사마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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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진 3대 낭야왕
琅邪恭王 | 낭야공왕

시호
공(恭)
작위
낭야군왕(琅邪郡王)
직위
용종복야(冗從僕射, 최종 직위)
성씨
사마(司馬)

근(覲)

사조(思祖)
부왕
사마주(司馬伷)
생몰
256년 ~ 290년
재위
서진의 낭야왕
283년 ~ 290년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가족 관계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중국 서진의 황족이며 자는 사조(思祖)로 할아버지는 사마의, 아버지는 낭야무왕 사마주이며 어머니는 제갈태비이다. 사마근은 사마주의 네 아들중 장남으로 아내는 하후장의 딸 하후씨(하후광희)다. 사례 하내군 온현 사람.


2. 생애[편집]


256년, 사마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283년에 아버지 사마주가 급사하자, 그 뒤를 이어서 낭야왕(瑯揶王)이 되었지만 아버지의 유언대로 3명의 동생들과 영토를 분봉해 각각 왕으로 임명됐으며, 동생으로는 동무공 사마담, 동안공 사마요,[1] 광릉공 사마최가 있다.

용종복야를 겸했지만 290년에 35세의 나이로 급사한다. 시호는 공왕(恭王).

그의 차남 사마혼은 숙부 동안왕 사마요가 304년에 성도왕 사마영에게 살해되어 후사가 끊기자 그의 양자가 된다. 그러나 동안왕이 되었다가 자식없이 요절하여 대가 끊기게 되면서 동안국은 폐지된다.

319년, 동진의 황제로 즉위한 아들 사마예가 제사하는 축문에 사마근을 '황고(皇考)'[2]로 칭하였으나 한 신하가 '아들이 부친의 작위를 높일 수 없다'고 지적하자 '황고' 칭호를 철회하였다.


3. 여담[편집]


사마근이 사망한 뒤에는 장남 사마예가 뒤를 잇는데 이 사마예에 대한 얘기로 그가 낭야국을 비운 사이에 하후씨가 낭야국의 관리 우금과 사통해서 낳았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이 말의 최초 출처인 위서(북위의 역사서로 25사 중 하나) 자체가 25사 중에서도 질이 나쁘기로 악명이 높아 북조측에서 남조측의 정통성을 깎아내리기 위해 참언을 지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짙다.[3]

아들 사마예는 사마의의 종통 계승을 명분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부왕을 추존할 필요가 없었으며 원칙상으로도 추존은 불가능했다.

그와 그의 부인 하후광희는 결혼 전에도 사돈 관계였는데 결혼해서 겹사돈이 되었다. 바로 사마근의 백부인 사마사와 하후광희의 고모뻘이자 하후상의 딸인 하후휘가 이미 부부사이였던것. 하지만 이 부부는 삼국시대의 가장 비극적인 로맨스 스토리 중 하나를 갖고 있다.


4. 가족 관계[편집]




5. 둘러보기[편집]



서진의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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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조부군[추존][1]
사마랑
창무정후 유
하간평왕 홍
의양왕
장무왕
의양성왕 망
하간평왕 홍[2]
동평왕
고조 선황제[추존]
세종 경황제[추존]
제헌왕 유
동래왕 [3]
북해왕 [4]
제무민왕
태조 문황제[추존]
세조 무황제(1)
비릉도왕 궤[5]
효혜황제(2)
민회태자 휼
진헌왕
효민황제(4)[6]
성양회왕 경
초은왕
동해충왕 지
시평애왕 유
회남충장왕
청하강왕 [7]
장사려왕 예(혹은 애)
성도왕
오효왕
효민황제[8]
발해상왕 회[9]
예장왕→효회황제(3)[10]
대애왕 연[11]
제헌왕 유[12]
성양애왕 조
청하강왕
요동도혜왕 정국
동래왕
광한상왕 광덕
북해왕
낙안평왕
연왕 [13]
사마영조
낙평왕 연조
여남문성왕 [14]
사마수
회왕
낭야무왕 주
낭야공왕 근
중종 원황제(5)[15]
무릉장왕
동안왕
회릉원왕
연왕 경
연왕
부풍무왕 준
순양왕
신야장왕
평원왕
양효왕
조왕 [16]
안평헌왕 부
안평정왕 옹
남궁현왕 승[17]
안평왕 돈[18]
의양성왕 망[19]
사마익
남궁현왕 승
안평왕 [20]
태원열왕 괴
하간왕
상산왕 형
안평왕 돈
안평왕
동무대후 규
팽성목왕 권
팽성원왕
고밀문헌왕
동해효헌왕
신채무애왕
고밀효왕
남양왕
원황제[21]
범양왕 수
사마순
제남왕 수
중산왕
사마진
성양정후 손
단수현후 목
안평정후 표[22]
안성정후 통
임성왕 릉
임성왕
안평정후 민
안평정후 표[23]
경조부군 이전[추존][24]
정서부군 - 예장부군 - 영천부군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황제 및 추존 황제는 굵게 쓰고 8왕은 작위를 빨갛게 썼다. 그리고 8왕의 난에 관련된 자들은 작위를 갈색으로 썼다. 종친의 이름은 뒤에 쓴다. 그리고 종친은 작위 뒤에 성씨를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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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문앙을 죽게 만든 장본인이다. 근데 자기 팔자도 그닥 좋지는 못해서 팔왕의 난에 휩쓸려 끔살당했다.[2] <<晉書/卷019>> 元帝太興二年,有司言琅邪恭王宜稱皇考。[3] 실제로 위서에서 이 얘기가 나오는 곳은 권96 열전 제84인데, 표제가 (僭)진의 사마예, 곧 황제를 참칭한 사마예란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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