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재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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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국역 전문
3. 요약
4. 의미
5. 기타


1. 개요[편집]




1839년 한국천주교회의 순교성인 성 정하상 바오로가 쓴 한국 최초의 천주교 호교론서(護敎論書)이다.

상재상서(上宰相書)의 뜻은 ‘재상에게 올리는 글’이라는 뜻으로, 당시 조선의 천주교 박해의 주동자였던 우의정(右議政) 이지연(李止淵)에게 보낸 한문 서신이다. 헌종 5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정하상 바오로는 체포를 예견하고 미리 작성해 두었다가, 6월 1일 체포된 다음 날 종사관(從事官)을 통하여 재상인 이지연(李止淵)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현재는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다.

2. 국역 전문[편집]


엎드려 아뢰옵건대 맹자(孟子)가 양자(楊子)와 묵자(墨子)[1]를 사설(邪說[2])이라 하여 배척한 것은 그 사상이 유교 학계를 해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요, 한유(韓愈)가 석가(釋迦)[3]노자(老子)[4]를 쳐서 물리친 것은 그 사상이 일반을 미혹(迷惑[5])하여 혼란케 할까 해서였습니다. 옛 군자(君子)가 법을 세워 금령(禁令)을 펼 때 반드시 그 뜻과 이치가 어떠하고 해됨이 있는가를 알아보았습니다. 무릇 의리(義理)에 맞는 것이라면 비록 나무꾼의 말이라도 성인이 반드시 받아들여 내버리면 안 되는 말로 되어 있거늘, 우리나라의 천주성교(天主聖敎)를 금(禁)하시는 것은 그 뜻이 어디 있습니까.
위에선 그 뜻과 이치(理致[6])가 어떠한지 물어보지도 않고 몹시 원통스러운 말로 사교(邪敎[7])로 몰아 큰 법을 세워놓고 신유년(辛酉年)을 전후 많은 인명을 없애면서도 한 사람도 그 기원과 전통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 이 도(道)를 배우면 유교에 해(害)를 끼치겠습니까? 일반 백성을 혼란케 하겠습니까? 이 도인즉 천자(天子)로부터 서민(庶民)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사용하고 늘 실행해야 할 도이오니, 해가 된다던가 혼란이 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제 감히 그 도리가 그릇되지 아니함을 간단하게 말하겠습니다.
대개 하늘과 땅에는 본래부터 다스리는 분이 계시는데, 여기 3가지의 증거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만물(萬物)이요, 둘째는 양지(良知[8])요, 셋째는 성경(聖經)입니다.
왜 만물을 증거로 말했을까요?
가옥(家屋)으로 비유해 보겠습니다.
가옥에는 기둥주춧돌, 대들보와 서까래가 있으며, 대문, 지게문 그리고 담장과 벽이 있는데, 간격과 길이가 한 치도 틀리지 않고, 둥글고 모난 것은 각기 틀에 맞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기둥과 주춧돌, 대들보와 서까래 그리고 대문, 지게문이며 담장과 벽이 혼연히 서로 합쳐 우뚝 저절로 생겨났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분명 미친 사람의 말이라 할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 천지는 큰 가옥인 셈이지요.
그러니 날짐승, 길짐승이며 동물, 식물들의 기기묘묘[9]한 형상들이 어떻게 저절로 생성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정말 저절로 생성된 것이라면, 해와 달과 별들은 어떻게 그 궤도를 벗어나지 않겠으며, 춘하추동(春夏秋冬) 사계절은 어떻게 그 차례를 어기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흥망(興亡)과 성쇠(盛衰)를 다스리는 자 누구이며, 화복(禍福)을 내리는 자 누구일까요?
하늘이 이루신 것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기에,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대충 짐작해 자연히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유복자(遺腹子)가 자기 아버지를 못보았다고 해서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사람들은 한편의 뛰어난 글과 한 폭의 훌륭한 그림을 보면 흠모[10]와 찬탄[11]을 아끼지 않으며, 반드시 누구의 솜씨인가 묻고서 결코 소홀하게 보아 넘기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데 빽빽하고 무성한 저 많고 많은 우주 만물들 또한 뛰어난 이요 훌륭한 그림이거늘,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누구도 한번 그 작자를 물어보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세간의 사물치고 질(質), 모(貌), 작(作), 위(爲) 이 4가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는데, 질이란 재료요, 모란 형상이요, 작이란 만듦이요, 위란 쓰임입니다.
가까이는 내 몸에서 살펴보고 나아가 사물을 통해 살펴보면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거늘, 이처럼 넓고 큰 세상 천지가 어찌 지으신 분이 없겠습니까?
이래서 만물을 통해 다스리는 분이 계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왜 양지를 증거로 말했을까요?
만약 백주대낮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번개천둥이 치면, 아무리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두려워 눈을 크게 뜨고 오금을 저리며 몸둘 바를 몰라 하지요.
이로서 상벌과 선악을 주관하시는 분이 사람의 마음과 머리 속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 민간에 살고 있는 사내며 아낙들도 아주 화급하고 위급한 처지나 비통하고 억울한 때를 당하면 반드시 “하늘이시여!” 하고 부르며 하소연하니, 이는 그 본래의 마음과 타고난 본성을 숨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고, 배우지 않아도 아는 것이지요.
다만 어떻게 섬기며 두려워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만은 같을 뿐입니다.
이래서 양지를 통해 천주께서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성경을 증거로 말했을까요?
고대 중국의 임금, 임금, 우왕, 탕왕, 무왕, 문왕, 주공, 공자 같은 성인들의 이야기도 경전과 역사서를 통해 전해오는데, 만약 이런 것이 아니었다면 요임금, 순임금, 우왕, 탕왕, 문왕, 무왕, 주공, 공자가 어떤 심법(心法)을 전수했고, 어떤 법도를 세웠는지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심법이며 법도를 대쪽과 비단에 써놓고 책에 적어 놓았기에, 읽고 본받으며 금석처럼 단단히 믿는 것이지요.
우리 천주교에도 역시 경전이 전래되어 오고 있습니다.
천지개벽(天地開闢) 이후로 역사의 기록이 끊어지지 않아 구약성경신약성경을 상세히 살펴볼 수 있으며, 지금도 집집마다 외우고 합니다. 소가 땀을 흘릴만큼 실어다가 집에 채우더라도 해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내용을 중국의 경전과 역사서에서 전혀 보지 못했다고 해서 의심하지만, 중국의 경전과 역사서에서도 말한 바가 있지 않습니까?
주역(周易)》에서는 “하늘께 드린다”고 했고, 《시경(詩經)》에서는 “하늘을 열심으로 섬긴다.”고 했으며, 《상서》에서는 “하늘께 제사드린다”고 했고, 또 공자는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어볼 곳이 없다”고 했으며, 이른바 하늘을 공경한다, 하늘을 두려워한다, 하늘에 순종한다, 하늘을 받든다는 말들이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의 글에 뒤섞여 실려 있으니, 서양(西洋)의 역사가 전래해 오지 않는 것이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설령 서양의 역사가 저 먼 옛날에 전래되어 왔더라도 요임금 시절의 홍수와 진시황분서갱유(焚書坑儒)로 인해 아주 없어져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중국 삼국시대 손권(孫權)의 오나라에서는 적오년간(赤烏年間[12])에 철십자가를 전해 받았고[13][14], 당나라 정관(貞觀) 9년[15]에는 경교(景敎)가 크게 성행하여 조정의 대신들로부터 초야(草野)의 백성들까지 모두 받들어 섬겨, 크게 제사를 드리고 경교 비석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16]
심지어 위징(魏徵)이나 방현령(房玄齡) 같은 어진 사람들도 독실히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명나라 만력년간(萬歷年間)[17] 에는 서양 선교사이 들어와 많은 저술을 남겨 오늘날까지도 중국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천주께서 묵묵히 동방(東邦)을 도우시어 신기하게도 우리나라가 다행히 똑같은 복을 누리게 된 것이 이제 50여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 다스리는 분이 계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위의 3가지 증거를 통해 이미 다스리는 분이 계심을 분명히 알 수 있으니, 천주께서 천지만물을 만드시어 그의 복을 두루 내리고 그의 덕을 드러내고자 하심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을 만들어 내 위를 덮어주고, 땅을 만들어 내 발을 받쳐주며, 해와 달과 별을 만들어 빛으로 나를 비춰주며, 초목과 날짐승, 길짐승이며 금, 은, 동, 철을 나에게 쓰라고 주셨으니, 우리가 모태로부터 나와 성장하기까지 하고많은 은혜를 받은 것이 이처럼 끝이 없거늘, 사람된 본분이 응당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늘을 이고 땅을 밟아 그것을 갈아 먹고 살 뿐이면서, 낳아주신 큰 은혜를 저버림이 이처럼 막심합니다.
비유해 보건대, 아비가 집을 짓고 살림을 장만하여 그 아들에게 쓰라고 주었는데, 아들은 그 집에 머무르고 그 살림을 사용하면서 거만하게 스스로 대단한 듯 여기고, 부모 섬기는 것과 은혜에 보답할 줄을 모른다면, 효자이겠습니까? 불효자이겠습니까?
사람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은 아주 작은 것도 모두 천주의 힘입니다.
낳아서 길러주고 도와 보살피시고, 보호하여 이끌어 주시며, 죽은 뒤에 상을 받는 것은 더 따지지 않더라도, 살아서 지금 받은 은혜도 이미 지극하여 비길 바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죽기까지 받들어 섬기기를 어떻게 해야만 그 은혜에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 받들어 섬기는 것이란 전혀 터무니없이 행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며, 이상한 것을 찾아 괴상한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지난 잘못을 고치고 새롭게 되어 하느님의 계명(誡命)을 따르는 것일 뿐이지요.
계명이란 천주께서 계시로서 가르쳐 주신 10가지 계명입니다.
첫째는 하나이신 천주를 만유(萬有) 위에 흠숭(欽崇)하고,
둘째는 천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불러 거짓 맹세를 하지 말고,
셋째는 첨례날을 지키고,
넷째는 부모를 효도하여 공경하고,
다섯째는 살인하지 말고,
여섯째는 사음(邪淫)을 행치 말고,
일곱째는 도둑질을 하지 말고
여덟째는 거짓 증언을 말고
아홉째는 남의 아내를 원치 말고
열변째는 남의 재물을 탐하지 말라는 것인데
이 10가지 계명을 종합하면 2가지로 돌아가니, 즉 천주를 만유 위에 사랑하고 남을 자기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위 3가지 계명은 천주를 흠숭하여 섬기는 절차요, 아래 7가지는 자기를 닦고 성찰하는 공부입니다.
안씨(顔氏)의 사물(四勿)[18]이나, 대기(戴記)의 구사(九思)[19]가 이에 비교할 바가 되지 못합니다. 충성과 용서와 효도와 우애와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이 안에 들어 있어 터럭만치도 부족된 데가 없습니다. 이 도를 한 집안에서 실행하면 집안이 정돈될 것이요, 한 나라에서 실천하면 나라가 다스려질 것이요, 온 천하가 실행하면 온 천하가 태평할 것입니다.
10가지 계명 가운데 1가지라도 범할 수 없으며, 몸으로 범하기 뿐만 아니라 더욱 마음으로 범함을 금합니다. 무릇 사람의 잘못은 그 마음 속에서 일어나서 그 행동을 그르칩니다.
대개 사람들의 과실이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생겨나 일을 해치는 것인데, 세상의 법은 그 일은 다스릴 수 있지만 마음은 다스리지 못하고, 하느님의 계명만이 그 일을 다스릴 뿐 아니라 또한 그 마음도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위태롭고, 도리란 희미해서 잠깐 사이에 죄를 짓게 되고, 사사로운 욕심과 그릇된 감정이 곳곳에서 유혹을 합니다.
교만으로 유혹하고, 분노로 유혹하고, 탐욕으로 유혹하고, 요사스러움으로 유혹하고, 질투로 유혹하고, 인색함으로 유혹하고, 게으름으로 유혹하기도 하여, 죽어 없어지고 말 곳으로 사람을 빠뜨립니다.
정말 이런 유혹들을 시시각각[20]으로 경계하여 물리치지 않는다면, 죄악의 구렁텅이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을 때까지 유혹과 싸우되, 싸울 적마다 잠시도 느슨해서는 안됩니다.
싸움에서 이기면 공적을 이룰 것이요 이기지 못하면 죄악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지요.
공적과 죄악의 판결은 몸이 죽는 날 내려질 것이니, 천주께서는 지극히 공정하셔서 선행이 없으면 보답해 주지 않으시며, 천주께서는 지극히 의로우신 분이어서 악행이 없으면 벌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몸이 죽은 뒤에 영혼이 따라서 사라진다면, 상이며 벌을 누구에게 내리겠습니까?
이는 또한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대개 혼에는 3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생혼(生魂)이요, 둘째는 각혼(覺魂)이요, 셋째는 영혼(靈魂)입니다.
생혼이란 초목(草木)에 있는 혼으로서 나서 자라기는 하지만 알고 깨닫지는 못하는 것이요, 각혼이란 짐승들에게 있는 혼으로서 알고 깨달을 수는 있지만 의로운 이치와 옳고 그름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이란 사람이 지닌 혼으로서 나게도 하고 자라게도 하고, 알고 깨닫도록 하며,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도리를 따질 수 있게도 해줍니다.
만물 가운데서 오로지 사람이 가장 귀한데, 사람을 귀하에 여기는 것은 그 혼이 영험한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른바 하늘이 부여해 준 성품으로서, 태중에 있을 때 주어진 것이니, 어찌 초목이나 짐승들과 같이 썩어 없어져 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미 옛 유학자들도 혼에는 3가지가 있고, 영혼은 사라지지 않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 혼이 거듭 흩어진다.”고 했으며, 또 “혼(魂)은 하늘로 오르고, 백(魄)은 땅으로 꺼진다.”고 했으니, 혼은 3가지가 있으며, 영혼은 죽지 않는 것이 명백합니다.
그러면 죽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면, 필경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착한 사람의 영혼은 올라가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의 영혼은 땅으로 들어가 벌을 받습니다.
그 상이란 천당(天堂)의 영원한 복락(福樂)이요, 벌이란 지옥(地獄)의 영원한 고통이지요.
만약 천당을 못 봤고 지옥을 못 보았다고 해서,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믿지 못한다면, 이는 맹인(盲人)이 하늘을 못 보았다고 해서 하늘에 해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어떤 사실이 이치에 합당하면 보지 않더라도 믿을 수 있을 것이요, 이치에 합당하지 않으면 비록 보았다 하더라도 믿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실을 믿을 것이냐 믿지 못할 것이냐 하는 것은 보았느냐 못 보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이치에 합당하냐 합당치 못하냐에 있을 뿐입니다.
정말 이치에 맞도록만 한다면, 천년 뒤의 동짓달도 앉아서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니, 어찌 반드시 눈으로 직접 보아야만 되겠습니까?
대개 나라에는 반드시 상과 벌이 있는 법인데, 공을 세운 자는 승격시켜 벼슬을 주고 상금을 내리며, 죄를 지은 자는 내몰아 감옥에 가두어 형벌을 내리지요.
나라의 임금도 상벌의 권한을 갖고 있거늘, 하물며 천지의 대군께서는 어떠하겠습니까?
그 상이란 이 세상의 벼슬이나 상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원무궁한 복락이요, 그 벌이란 세상의 감옥이나 형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원무진한 고통이랍니다.
하늘로 오를지 땅으로 내려갈지 한 번 정해지면 다시는 옮길 수 없는 것입니다.
슬픕니다.
세상 사람들이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어느 곳에 머물러야 할지를 모르니 어찌 애통하지 않습니까?
이제 영원한 상과 영원한 벌이 있는, 즉 세상사 모두 헛된 것임을 알 수 있지요.
사람의 목숨이 길어야 불과 백 년인 것을, 이익과 욕심의 구렁에 빠져 얻지 못하면 그것을 얻으려고 고민하고 이미 얻었으면 그것을 잃어버릴까 근심하다가 늙음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지냅니다.
이 몸 한 번 죽어버리면 부귀공명은 모두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요, 게다가 일생토록 구해도 다 얻지 못할 부귀공명이란 또 얼마나 헛된 것입니까?
어찌 그리도 앞이 가려져 깨닫기 어려운 것인가요?
아! 세상의 복은 완전하지 못하나 천상의 복은 완전무결하며, 세상의 복은 잠깐 지나는 것이나 천상의 복은 영원한 것이니, 불완전하고 잠깐 지나는 세상의 복을 구하는 것이 완전하고 영원한 천상의 복을 구하는 것과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천당의 영원한 복락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만약 지옥에 떨어지는 후환만 없다면, 잠깐 사는 세상 짧은 영화도 한번 누려 볼 만하겠지만, 지옥의 영원한 벌이 엄연히 있으니 어쩌겠습니까?
세상에 사는 동안 어리석어 깨닫지 못하다가 죽은 뒤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그래서 도끼들이 앞에 놓여있고 끓는 솥이 뒤에 있어도 의연하게 뜻을 굽히지 않는 순교자들이 끊임없이 계속 있어 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천주교를 참된 교(敎)라 할 수 있는 한 증거이니, 한마디로 말해서 지극히 거룩하고 공번되고 지극히 정의롭고 지극히 참되며 지극히 완전하고 오로지 홀로이며 유일무이한 교인 것이지요.
그러면 어째서 지극히 거룩한 교회(敎會)라고 말할까요?
천주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로서 예로부터 여러 성인(聖人)들이 끊임없이 서로 이어 그 올바른 이치를 천명하고 그 법도를 바로 세워 목숨까지 바치며 증거하였으니, 지극히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지극히 공번되다고 하는 것일까요?
귀인, 천인, 현명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 남녀노소, 동서남북의 사람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가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이니, 지극히 공번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어째서 지극히 정의롭다고 하는 것일까요?
광대명백하고 탕탕평평해서 조금도 잘못된 행동이나 어긋나는 일이 없으니, 지극히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지극히 참되다고 하는 것일까요?
천하에 종교 없는 나라가 없건만, 참되지 못한 것을 가르치는 일이 많습니다.
노자장자는 허무함을 가르쳐서 잘못이고, 신선부처는 황당함으로 해서 잘못되었으며, 이외에 제자백가들의 술수는 족히 입에 올릴 것도 못됩니다.
그러나 천주교의 도리는 진실되고 거짓이 없어 전혀 어긋나지 않았으니, 지극히 참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지극히 완전하다고 하는 것일까요?
초목(草木)에 비유하건대, 다른 종교들은 혹 갈래는 있으나 가지가 없으며, 혹 잎은 있는데 꽃이 없으며, 혹 꽃은 있으나 열매가 없어 머리와 꼬리가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처음과 끝이 서로 이어지질 않습니다.
오직 천주교는 갈래도 있고 가지도 있고 잎도 있고 꽃도 있고 열매도 있으며, 천지(天地), 귀신(鬼神), 인사(人事)의 전말과 과거, 현재, 미래의 앞뒤가 가득히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지극히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애통하게도 금과 옥을 가리켜 억지로 기와조각이라 하고 맛난 음식을 찌꺼기라고 하니, 이 무슨 말입니까?
또한 애비도 없고 임금도 모르는 것들이라고 헐뜯는데, 이것은 천주성교의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십계 중 4번째에 “부모를 효성으로 공경하라” 했으니, 충효(忠孝) 두 글자는 만 세대 동안 변하지 않는 도리입니다.
부모의 뜻과 몸을 봉양하는 것은 자식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것이요, 교를 믿는 사람으로서는 더욱 힘써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모께 예의를 다해 섬기고 힘을 다해 봉양하는 것이 임금에 대해선 충성이 되어 목숨을 바치며 불길 속에 뛰어드는 것도 감히 피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계명을 어기는 것이니, 과연 애비도 없고 임금도 모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다만 임금이 금지했는데도 백성들이 행하고, 아비가 금지했는데도 자식이 행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입니까?
이 또한 해명할 것이 있습니다.
지위에는 높고 낮은 것이 있고, 일에는 가볍고 중한 것이 있으니, 한 집안에서 아버지가 가장 중하지만, 아버지보다 높은 사람은 임금입니다.
또 한 나라에서 임금이 가장 중하지만, 임금보다 높은 것은 천지대군입니다.
아버지의 명을 따르면서 임금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죄가 무거울 것이요, 임금의 명을 따르되 천지대군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죄가 비길 바 없이 클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주를 받들어 섬기자는 것이지, 일부러 임금의 명을 어기고자 한 것이 아닌 부득이한 것이었느니,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애비도 없고 임금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또 재화(財貨)를 유통(流通)하고 색정(色情)을 나눈다고 말하는데, 재화를 유통시키는 것은 자고로 국가에서는 하루라도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있는 물건과 없는 물건을 서로 유통해야 백성들이 서로 도움받아 살아갈 텐데, 만약 재화를 유통시키는 일이 없다면 온 나라 안에 살아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이것이 장차 불미스러운 법인데, 오히려 금지시켜야 할 일이겠습니까?
또 이른바 색정을 나누는 것은 짐승들도 오히려 그러지 않는 법인데, 어떻게 천주성교를 믿는 우리에게 그런 비난을 하는 것입니까?
십계명 중 6번째에 “음사한 짓을 하지 말라”고 했고, 9번째에 “남의 아내를 바라지 말라”고 하였으니, 6번째 계명은 몸으로 범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요. 9번째 계명은 마음으로 범하는 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천주교가 음사한 것을 엄격히 금하기를 이처럼 반복하고 있는데, 도리어 색정을 나눈다는 소문을 들씌우니, 어디에 이처럼 윤리를 더럽히고 법도를 어지럽히는 가르침이 있었습니까?
도리가 참된지 거짓된지, 사리가 굽은지 곧은지 여부는 구석에 던져두고, 얼토당토않은 말로 밀치고 막는 것은 어쩌면 외국의 도(道)라고 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이 산지(産地)에 관계없이 순도(純度)만 좋으면 보배가 되듯, 도리 역시 지역에 구애됨 없이 성스러우면 참된 것이지요.
그러니 도를 전하는데 어떻게 이 땅 저 땅의 경계가 있겠습니까?
중국은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서로 오고 가고 하여, 불교도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으며, 외국인들이 많이 와서 머물러도 일찍이 금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불교의 폐단(弊端)이 오래되어, 전국의 과 사찰들은 아주 사치스럽고, 금불상과 동상을 만드는 데에 재력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불교란 서역(西域)의 종교 중에서도 이단(異端)이지요.
천주성교의 문자를 표절해 쓰고 법도(法度)를 모방했으나, 뜻과 이치는 비뚤어져 어긋났고, 윤리와 기강은 뒤집혔으니, 이야말로 붉은색을 흐려놓는 자주색이요, 벼를 망치는 가라지입니다.
화복을 가장하고 백성을 공갈쳐서 이젠 괴상한 폐단이 되었습니다.
무당, 풍수쟁이, 점쟁이, 관상쟁이들이 부인들을 꾀어 돈과 재물을 빼앗아가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면서, 천주교만 유독 포용의 아량을 베풀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집안에 해가 되어서입니까?
나라에 해가 되어서입니까?
그 하는 일과 행동을 살펴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며 그가 지키는 도리가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반역이라도 꾀했습니까?
음란한 짓이라도 했습니까?
도둑질을 했습니까?
살인이라도 했단 말입니까?
어찌 그리 법보다도 지나치게 형벌을 내리며 천주를 배반하라는 것입니까?
천주께서는 만물의 대부모(大父母)요 대주재(大主宰)입니다.
옛날의 성현들도 열심으로 섬기고 제사를 드렸었거늘, 어째서 오늘날 이 사람들만이 이런 능욕을 당한단 말입니까?
굶주리고 메말라 나라가 어려운 때가 되면, 우리 임금께서는 밤낮으로 애쓰고 인정(仁政)을 일으키시어 생명을 아끼는 사랑이 민심에까지 젖어드는데, 아니 저 성교를 믿는 사람들은 우리 임금의 자식이 아니란 말입니까?
애석하게도 저 사람들이 이런 지경에 이르러도 조금도 불쌍치 않단 말입니까?
옥중에서 죽어가고 성문 바깥에서 처형되는 것이 끊이질 않아 피눈물은 도랑을 이루었고, 통곡이 하늘에 울리고 있습니다.
아비는 자식을 부르짖고, 형은 아우를 부르짖으니, 마치 궁핍하여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맑고 좋은 세상에 이 무슨 광경입니까?
목숨을 바쳐 주님의 참 가르침을 증거하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요.
이 몸 또한 죽고 말 것이지만, 외람되나마 말씀을 올릴 수 있는 이 때에 한 번 고개를 들어 길게 외쳐보지도 못하고 그냥 묵묵히 죽어버린다면, 산더미 같은 이 생각들을 백세 뒤에까지 밝힐 길이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각별히 불을 밝혀 읽어보시고 도리가 참되고 바른지 거짓되고 나쁜 것인지를 자세히 분별하신 뒤에, 위로는 조정에 아뢰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펼쳐야 할 것입니다.
또한 최선의 방법으로 일변하여 금령을 늦추고 체포령을 거두며 옥에 갇힌 이들을 놓아 주시어, 온 백성들과 함께 편안하고 즐겁게 태평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천 번 만 번 바라고 또 바랍니다.
또 아룁니다.
죽은 사람 발 앞에 술과 음식을 바쳐 올리는 것은 천주교에서 금하는 것입니다.
살아있을 적에도 영혼을 술과 음식으로 모실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죽은 뒤의 영혼이야 어떠하겠습니까?
음식은 육신과 입을 공양(供養)하는 것이요, 도덕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아무리 효성(孝誠)이 지극한 자식이라 할지라도 맛있는 음식으로 주무시는 부모 앞에서 공양을 할 수 없는 법이니, 잠잘 적엔 먹고 마실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잠을 잘 적에도 그러한데, 하물며 아주 잠든 때에는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쌀밥, 기장이며 푸짐한 과일들은 헛된 것이 아니면 거짓된 것이니, 자식된 자가 헛되고 거짓된 예절로 돌아가신 부모를 섬길 수 있는 것일까요?
이른바 사대부(士大夫)들의 위패(位牌)도 천주교에서 금하는 것입니다.
이미 위패는 부모님의 기맥(氣脈)이나 육신과는 아무 연관도 없으며, 낳아 길러주신 은혜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부모라는 이름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데, 장인이 깎아 만든 것에 물감과 먹으로 칠하여 놓고는 진짜 아버지고 진짜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치에 맞지 않고 양심이 허락치 않는 것이니, 차라리 사대부들에게 죄를 지을지언정 천주교에 죄를 짓고 싶지는 않습니다.

3. 요약[편집]


별첨형식의 우사(又辭)까지 합쳐 모두 3,400여 자에 불과한 짤막한 글인데, 천주교 기본교리에 대한 설명, 호교론, 신교(信敎)의 자유를 호소한 3개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 부분은 보유론적(補儒論的)인 견지에서 천주의 존재를 논하고, 천주십계(天主十誡)를 들어 천주교의 실천윤리를 설명하였다.

둘째 부분에서는 호교론을 전개하여 천주교가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종교가 아님을 강조하면서, 말미에 「우사」라는 글을 첨가하여 조상제사와 신주를 모시는 일이 이치에 맞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셋째 부분에서는 천주교가 주자학적 전통에 어긋난 것이 아니며, 사회윤리를 올바르게 하는 미덕이 있음을 변증하여 신앙의 자유를 호소하였다.


4. 의미[편집]


정하상 바오로가 남긴 이 상재상서는 한국천주교회의 대변자로서 자신들의 입장과 신앙을 증명, 설파하고 한국천주교회에 대한 종교적 박해를 멈추어달라는 뜻을 담고 있다.

조선후기 유학자계 신학자이자 사제 후보였던 정하상 바오로가 남긴 이 글은 조선후기 처음으로 형성된 초기 천주교 신앙이 신앙인들에게서 어떻게 인식되고 있었으며, 조선에서 (외부 선교사의 유입 없이) 자발적으로 시작된 천주교 신앙이 어떻게 조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전교되어졌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기도 하다.

본래 상제란 고대 중국, 그 기원은 상나라에서 상나라 왕족들과 씨족들이 섬기던 신에서 유래한다. 그는 우주 만물의 근원이요 주재자(主宰者)인 절대적 존재를 지칭한다. 이는 대체로 상나라 시대는 상제(上帝), 주나라 시대는 천(天), 도가에서는 도(道), 성리학에서는 태극(太極)이라 하였다. 기원전 18~12세기 상나라 사람들은 해, 달, 별, 비, 바람, 구름, 등을 신으로 섬겨 왔으며, 선조(先祖)들도 사후에는 승천하여 신령한 존재로서 하늘 나라에 있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선조 위에는 상제가 있음을 믿었다.

그런데 16세기 말, 중국 선교사 예수회마테오 리치와 동료 예수회 회원들은 하느님을 상주(上主) 혹은 천주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상제나 천의 의미도 같이 사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천주실의를 쓸 당시 중국인들이 그쪽의 개념을 이용해서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도미니코회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은 "상제나 천은 하느님과 그 개념이 명백히 다르므로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란은 100년 넘게 지속되었다 결국 20세기에 접어들어 교황청의 회칙선포로 천주 이외의 호칭을 금하면서 이쪽이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의 서학자들은 마테오 리치의 상제관을 받아들였다. 특히 공자의 근본 사상에서 유교를 재해석한 정약용은 상제를 비할 수 없이 위대하고 존귀한 존재로, 만유의 유일한 근원이요 신령한 지혜를 갖고 만물을 주재하는 인격적인 절대자라고 하였다. 결국 오랫동안 유교서적들을 독파하면서 이들에게 최적화된 선교체재를 갖추고 있던 마테오 리치의 판단은 그가 예상치 않은 방향에서 긍정적으로 발현된 것이다. 만일 당대에 마테오 리치가 이런 개념을 내세우지 않았다면, 조선의 유학자들은 천주교를 수용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은 십계명을 들어 교회의 실천 윤리를 설명하였으며, 천주교가 무주무군(無主無君)의 종교가 아님을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천주교가 주자학적인 전통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고, 사회의 윤리를 바르게 한다고 주장하면서 신앙의 자유를 호소하였다.

이외 당시 유학자들이 본래부터 비판 대상이었던 불교는 물론이고 타 제자백가 사상에게도 비판적이었으며 당시 사회적 폐단이었던 무당, 풍수지리, 점쟁이, 관상에 대해서도 경고를 날린다.

5. 기타[편집]


1887년 홍콩에서는 정하상의 약전을 첨가해서 출판되어 중국의 선교에 널리 이용되었다. 이는 중국과 한국 둘 다 한자문화권이자 유교가 깊이 뿌리내린 문화적 공통점을 지닌 곳으로서 중국인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쉽다는 특성 때문으로 보인다.

국내에서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7대 교구장 블랑(Blanc, M. J. G.) 주교의 서명이 들어있는 필사본과 한글역본 등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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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자백가 학파 중 묵가의 창시자로, 젊은 시절 공자의 사상을 익혔지만 유가 학파를 비판하면서 별도의 학파를 만들었다. 이 묵가 학파는 단순한 학파가 아니라 주나라의 천 신앙을 내세운 교리를 가진 교단이기도 했다. 춘추전국시대 때만 하더라도 유가 못지않게 대중적으로 성행했지만 진나라분서갱유에 큰 피해를 입었고 서한이 접어들면서 완전히 소멸한다.[2] 올바르지 않은 논설[3] 고타마 싯다르타불교의 시조.[4] 도가의 창시자로 공자보다 한 세대 위이며 공자와 대면한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당대 도가 학파는 밀교적인 도교와 달리 춘추전국시대제자백가가 그러했듯 현실정치적인 철학사상에 가까웠다.[5] 정신이 헷갈려서 갈팡질팡하는 것[6] 도리에 맞는 취지[7] 사회에 해로운 작용을 하는 그릇된 종교[8] 여기에서는 양명학(陽明學)에서 말하며 마음의 본체(本體)를 말한다.[9] 몹시 기이하고 묘하다[10] 공경하며 사모하는 것[11] 칭찬하며 감탄하는 것.[12] 238년[13] 고고학적으로 이게 사실이라면 중국 종교사와 삼국시대(중국)에 대한 재평가는 필수로 해야 하지만 정사 삼국지, 후한서, 양양기, 계한보신찬, 소설삼국지연의 등의 기록에서도 없고 중국인 입장에서는 외국 사서인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 대일본사에서 똑같거나 유사한 내용이 없다.[14] 당시 중국 출판본에는 계한에 대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고 떠돈 적이 있었다.[15] 당태종의 연호로 635년을 말한다.[16] 대진경교유행중국비를 말한다.[17] 1573년[18]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하지도 말라.[19] 율곡 이이의 격몽요결의 구사구용을 보면된다.[20] 시간이 흐르는 시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