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드 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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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샤를 드 푸코[1]
Charles de Foucauld


파일:푸코.png

본명
샤를 외젠 드 푸코 드 퐁브리앙
Charles Eugène de Foucauld
de Pontbriand
출생
1858년 9월 15일
프랑스 제국 스트라스부르
사망
1916년 12월 1일 (항년 58세)
프랑스령 알제리 타만라세트
국적
[[프랑스|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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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직업
군인, 탐험가, 지리학자, 수도자
종교
가톨릭
시복
2005년 11월 13일
추기경 호세 사라이바 마르틴스
교황 베네딕토 16세
시성
2022년 5월 15일
교황 프란치스코
축일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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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에두아르 드 푸코 드 퐁브리앙 자작
어머니 엘리자베트 드 모를레
형제자매
여동생 마리 이네스 로돌핀 드 푸코
학력
리세 생트제네비브
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임관
소뮈르 기병학교
복무
프랑스 육군
1878년 ~ 1883년


1. 개요
2. 생애
2.1. 유년 시절
2.2. 학창 및 군인 시절
2.3. 사막에서의 생활
2.4. 죽음
3. 시복 및 시성
4. 저서
5. 기타



1. 개요[편집]


그들을 다만 평등과 우애로써 대할 뿐 아니라, 나의 신앙이 요구하는 겸손과 존중과 사랑과 헌신으로 대할 것.”

프랑스군인, 탐험가, 지리학자, 수도자.

사하라 사막에서 홀로 은수 생활을 보낸 뒤 알제리 남부의 투아레그족 사람들과 지내면서 이들이 믿는 이슬람을 이해하고 고유의 언어와 풍습을 배워 타 종교 및 문화 존중의 모범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현재 가톨릭성공회에서는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축일은 12월 1일.


2. 생애[편집]



2.1. 유년 시절[편집]


샤를 드 푸코는 1858년 9월 15일 프랑스 제국 스트라스부르의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두아르 드 푸코 드 퐁브리앙(Édouard de Foucauld de Pontbriand)은 십자군 기사, 대주교 등을 배출한 명망 있는 귀족 집안 출신이었고, 어머니 엘리자베트 드 모를레(Élisabeth de Morlet)는 할아버지 대부터 막대한 부를 지니게 된 집안 출신이었다. 이 둘은 1855년에 결혼해 2년 뒤인 1857년에 첫 아이를 가졌으나 아이는 출산 후 한 달 뒤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듬해 1858년 9월에 샤를이 태어났고, 샤를은 같은 해 성 카를로 보로메오의 축일인 11월 4일에 생피에르르죈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샤를이 태어나고 몇 달 뒤 그의 아버지는 업무 차원으로 알자스에 있는 비상부르 지역으로 떠났고, 1861년에는 샤를의 여동생 마리 이네스 로돌핀(Marie-Inès-Rodolphine)이 태어났다. 그 누구보다도 신심이 깊었던 그의 어머니는 어린 샤를에게 가톨릭에 관한 다양한 것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샤를이 여섯 살이던 1864년 3월에 그의 어머니는 건강이 악화되어 배 속의 아이를 유산함과 동시에 세상을 떠났고, 설상가상으로 몇 달 뒤 8월에 그의 아버지가 신경쇠약으로 세상을 떠났다. 부모를 갑자기 잃게 된 샤를과 그의 여동생은 친할머니인 클로틸드 드 푸코(Clothilde de Foucauld)에게 맡겨졌으나 그녀마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샤를과 그의 여동생은 외조부인 보데 드 모를레(Beaudet de Morlet)와 그의 아내에게 맡겨졌고, 이 둘은 자신들의 외손자들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2.2. 학창 및 군인 시절[편집]


샤를은 생타르보가스트 성공회 학교를 거쳐 스트라스부르의 중등학교에 다녔으나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과 잔병치레를 많이 해 학교를 빠지는 날이 비일비재했다. 그는 1868년 여름에 친척 집에서 보냈는데, 그곳에서 자신보다 8살 많은 사촌누나 마리 무아테시에(Marie Moitessier)를 만나 급속도로 친해졌다. 마리의 온화하고 넓은 마음씨덕분에 그는 어머니의 빈 자리를 약간이나마 채울 수 있었다. 1870년 샤를과 그의 가족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잠시 베른으로 피신했고, 전쟁이 차츰 잠잠해지자 낭시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샤를은 고등학교를 다녔으나, 그곳에서 들은 수사학 수업을 통해 고대 철학자들의 가르침에 빠져 그는 신앙심은 물론 종교 자체에 흥미를 잃었다.

이후 샤를은 예수회가 운영하는 기숙학교인 리세 생트제네비브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학업에 성실치 않아 성적이 부진했고 또 엄격한 규율 생활을 싫어해 기숙사를 도망쳐 나왔다. 결국 그는 1876년 3월에 퇴학을 당했고 이를 기점으로 세속적인 쾌락과 물질적인 삶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1876년 6월 샤를은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고, 이후 1878년 소뮈르 기병학교를 졸업했다. 소위로 임관한 그는 로렌 지방과 알제리 북동부 지역에서 복무하였으나, 자신의 양육자였던 외할아버지의 죽음으로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음으로써 방탕하고 멋대로 행동하던 그는 1881년 계급을 박탈당했다가 다시 회복되는 일을 겪기도 했다. 휴가를 얻어 프랑스 파리로 잠시 떠난 그는 군대 생활이 자신에게 맞지 않음을 깨닫고 제대한 후, 1883년부터 1884년까지 모로코를, 1885년에는 사하라 사막을, 그리고 1888년부터 1889년에는 팔레스타인 일대를 탐험했다. 열성적인 지리학도이자 알제리와 모로코에 큰 관심을 가졌던 그는 알제에서 토착 언어와 관습을 배워 기록을 남겼고 1885년 파리 지리학협회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아 메달을 수여받았다.


2.3. 사막에서의 생활[편집]


한편, 사막에서 랍비의 시종으로 가장한 채 탐험 생활을 보내면서 광활한 사막에서 느낀 고독과 그 안에서 알라 신의 현존을 느끼며 살아가는 무슬림의 순박하고 투철한 신앙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1886년 10월 사촌누나 마리로부터 소개받은 생토귀스탱 성당의 앙리 위블랭(Henri Hublin) 신부와의 영적 대화를 통해 고해성사를 보고 교회와 화해하면서 성체를 모셨다. 다시 신앙심을 가지게 된 샤를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기도와 금욕의 삶을 시작했고, 위블랭 신부는 그의 영적 지도자로서 그에게 많은 것들을 알려주었다. 그는 성무일도서와 사막 교부들의 금언을 읽으면서 은수자로서의 자신의 소명을 깨달았다.

샤를은 위블랭 신부의 조언으로 1888년 말부터 1889년까지 4개월 동안 팔레스타인 일대에 성지순례를 한 뒤 1890년 나자렛의 트라피스트회에 입회하여 마리 알베릭(Marie-Albéric)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튀르키예시리아의 국경 지역에 있는 아크베즈 지역의 트라피스트회 수도원으로 옮겼으나, 수도원 건물에서 지내기보다는 주로 마을의 가난한 주민들과 생활했다. 늘 더 큰 고독과 기도와 절제의 삶을 살고자 했던 그는 수도원장의 허락을 받고 트라피스트회를 떠나 1897년 나자렛으로 돌아가서 클라라회 수녀원의 문지기로 살며 1900년까지 밤낮으로 묵상과 기도에 전념했다. 그의 생활은 오로지 비천한 노동, 경건한 독서, 성경 공부, 기도로만 이루어졌다. 나자렛에서 독실한 생활을 한 그는 1900년 아크베즈의 수도원으로 돌아가 사제품을 준비한 후 1901년 6월 9일 43살에 프랑스 남부 비비에 지방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파일:은수처.jpg

아세크렘에 있는 샤를 드 푸코의 은수처
사제품을 받은 샤를은 수많은 사람이 영적인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모로코알제리 국경 근처 베니 아베스 지역의 은수처로 들어갔다. 그는 해당 지역에 머무는 무슬림 부족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자신 스스로 타 종교 및 문화를 존중하는 '보편적 형제'로서의 기독교인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는 스스로 '예수 성심의 형제회'라고 이름 붙인 은수처에서 늘 공개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오랜 시간 동안 조배를 했다. 1905년 그는 베니 아베스를 떠나 알제리 남부의 도시 타만라세트 근처 아하가르 산맥의 해발 2,780미터의 고원 지대인 아세크렘에서 은수처를 마련한 후, 그곳에서 11년 동안 생활했다. 그는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투아레그족과 조화롭게 지내면서 이들의 언어와 관습을 배웠으며, 투아레그족의 문학적 전통을 지키고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투아레그어 사전을 만드는 작업에 헌신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모든 능력과 정성을 다해 투아레그족 사람들을 섬기며 평화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부족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2.4. 죽음[편집]



파일:푸코의묘.jpg

엘메니아에 있는 샤를 드 푸코의 묘
1916년 12월 프랑스의 식민 통치를 반대하는 원주민들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 그 혼란을 틈 타 세누시야베두인들과 깊은 연관이 있는 엘 마다니 아그 소바(El Madani ag Soba)가 자신의 호전적인 무슬림 집단을 이끌고 마을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명백히 프랑스 백인으로 보이는 샤를을 납치하고자 했으나 두 명의 프랑스 낙타부대 병사들이 나타나 이를 저지하려고 했다. 이때, 마을을 침략한 집단의 일원이었던 15살 소년 세르미 아그 토라(Sermi ag Thora)가 낙타부대 병사들의 저항에 당황한 나머지 근처에 있던 샤를의 머리에 총을 쏘고 말았고 샤를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렇게 샤를은 12월 1일 타만라세트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태로 사하라 사막에서의 영적 여정을 마무리했다.

투아레그족 사람들은 다음 날 아침 샤를과 나눴던 우애의 증거로서 그의 시신을 마을 인근에 매장했다. 그리고 1929년 4월 그의 시신은 프랑스 군대가 주둔해 있던 알제리 중부의 오아시스 도시인 엘메니아의 묘지로 이장되었다.

한편 프랑스 군대는 알제리에서 발발했던 사건 조사의 일환으로 자국민인 샤를을 죽인 범인과 그 약탈 집단 수색도 착수했다. 1943년 사건 당시 집단을 이끌던 엘 마다니 아그 소바는 프랑스 군대에 쫓겨 리비아페잔 남부 지역으로 도망쳤고, 샤를의 머리에 총을 쏜 소년 세르미 아그 토라는 결국 체포되어 1944년 자네트에서 처형되었다.


3. 시복 및 시성[편집]


2005년 11월 3일 호세 사라이바 마르틴스(José Saraiva Martins) 추기경교황 베네딕토 16세를 대신해 샤를 드 푸코를 시복했다.

2020년 5월 27일 교황 프란치스코는 샤를 드 푸코가 성인으로서 추대될 자격이 있음을 천명했다. 그리고 2년 뒤 2022년 5월 15일 샤를 드 푸코는 또 다른 9명의 복자들과 함께 시성되었고, 이후 성공회에서도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기 시작했다. 축일은 그의 기일인 12월 1일로 지정되었다.


4. 저서[편집]


  • 모로코 탐사(Reconnaissance au Maroc, 1883~1884년 출간)
  • 투아레그어–프랑스어 사전(Dictionnaire Touareg–Français, 1951~1952년 출간)
  • 투아레그족 시집(Poésies Touarègues, 1925~1930년 출간)


5. 기타[편집]


  • 1936년에 개봉된 프랑스 영화 '침묵의 부름(L'Appel du Silence)'이 샤를의 일생을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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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로망스어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기 때문에 '드푸코'가 맞으나, '드 푸코'로 띄어 쓰는 것이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관용적 예외로 인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