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드라마)/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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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인물 관련
3. 의식주, 문화 관련
4. 사회 관련


1. 개요[편집]


드라마 선덕여왕의 전개와 차이를 보이는 대표적인 역사적 사실들을 간략하게 정리한 문서.

이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에서 모티브를 얻은 퓨전 판타지 사극이며, 극에서 나오는 사건은 왜곡이 많이 되어있는데 그 정도는 연개소문보다도 심하다. 오히려 역사적 사실을 매우 악의적으로 왜곡시켰다는 평이다. 위서 의혹이 큰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도 전반적으로 모티브를 얻었지만 정작 드라마에는 그 화랑세기 필사본에서조차도 없는, 각색을 넘어 순수 창작한 내용들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 사극이 역사와 100% 똑같을 수는 없고 똑같이 갈 필요도 없다지만, 적어도 그 시대에 있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선덕여왕은 캐릭터 놀이와 그 대결에만 치우친 사극이다.


2. 인물 관련[편집]


  • 미실위서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에만 기술되어 있다. 화랑세기 필사본이 위서라면 당연히 그녀도 가상인물이기에, 그녀가 작중에 등장한다는 것만으로 이미 역사적 사실과는 멀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1] 일단 필사본 화랑세기의 진위 여부를 제쳐두고 그 내용만 따져도 미실은 진흥왕부터 진평왕 초기까지 활동한 인물로 나오기 때문에 이 드라마 시점에서는 일부 회상씬이면 모를까 덕만과 동시대 인물로 등장할 수 없다.[2] 고로 천명공주 사망 때 마야가 미실에게 했던 악담[3]도 창작이다. 화랑세기의 위서 논란을 의식해서 정사에 미실이란 인물에 대한 기록이 없는 이유에 대한 설정을 추가한 묘사로 볼 수 있을 듯하다.

  • 화랑세기에 기술된 미실은 중간보스급이 풍기는데 이유는 이모이자 진흥왕의 정비인 사도태후의 하수인 노릇을 비슷하게 했기 때문이다. 미실이 중간보스면 사도태후는 최종보스다. 미실은 무슨 일이 있으면 항상 사도태후에게 일러바치고, 또 사도태후가 시키는 대로 했던 사람이다. 실제로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태후는 왕후 시절의 사도태후를 폐위하려 했는데 이 일을 미실이 사도태후에게 일러 바친 일로 미움을 사 미실은 궐에서 쫒겨난 적도 있다. 진흥왕은 독살되지도 않았고 진지왕을 폐위한 주도자는 진지왕의 어머니이자 미실의 이모인 사도태후이다. 기록들을 살펴보면 진지왕 폐위도 미실이 참여는 했지만 사도태후의 조카였기에 그녀를 받쳐주는 역할이 강했다. 진지왕이 폐위된 이유도 사도태후가 미실과 손 잡고 진지왕을 왕으로 세웠는데 미실을 왕후로 세우겠다는 약속을 어겨서 사도태후가 자신의 집안을 아들이 무시한다 여겨 미실과 손잡고 폐위를 시킨 것이다.[4] 진흥왕의 태자이자 자신의 아들인 동륜과 자신의 시누이인 만호부인이 이어지게 되자 여기에 미실을 끼웠던 것도 사도태후다. 사도태후를 만일 넣게 되었다면 미실이 부각되지 않는 데다가 사도태후는 진지왕 폐위사건 이후 절에 들어가 출가했기 때문에 시대상 아예 뺀 것으로 보인다.

  • 미실이 선덕여왕 시기에 생존해 있다는 것과 난을 일으켰다는 것에 대해 악의적 역사왜곡이라는 항의가 폭주하자, 제작진에서는 "역사대로 가자"고 라며 칠숙과 석품의 난으로 이어놓았다. 실제로 칠숙과 석품이 난을 일으킨 것은 맞긴 하지만 여기에 미실이 연루되진 않았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미실은 이미 수십년 전에 죽었다.

  • 선덕여왕이 궐 밖에서 자랐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설화의 기록이고 정사와 야사를 포함한 그 어떤 기록이든(당연히!) 덕만이 궐 밖을 넘어 바다 건너 중앙아시아에서 조기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은 없다.

  • 덕만과 천명이 쌍둥이라는 것은 필사본 화랑세기를 포함한 야사, 정사, 설화 할 것 없이 그 어떤 기록을 봐도 있지도 않은 창작이다. 아마도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는 덕만이 장녀고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모두 덕만이 동생이라고 기술이 서로 엇갈리기 때문에 여기에 기반한 작가의 창작이 반영된 듯싶다. 거기에 쌍둥이가 태어나면 성골이 씨가 마른다는 예언을 빌미로 미실이 진평왕을 압박하려 하는 부분도 작가의 창작. 삼국유사의 '성골남진(聖骨男盡)'이라는 말에서 착상을 얻어, 예로부터 쌍둥이를 불길하게 여긴 역사적 사례가 많은 것을 바탕으로 만든 설정으로 추정된다.

  • 화랑세기에 따르면 하종은 충의롭고 지혜로우며 용맹한 화랑으로 오히려 문노보다도 훌륭한 인물이지만[5] 드라마에서는 완전 개초딩 찌질이로 왜곡해 놓았다.

  • 설원은 실제로는 미실과 절륜한 사랑을 나누다가 미실의 간호수발을 자청하고 그러다 병들어 죽었으나, 드라마 설정상 병부령의 직책과 아울러 배우가 그 전노민이라서 최대한 뽀대나게 묘사하기 위해 계백과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설정되었다. 게다가 설원은 당시의 이름이 '설원'이 아니었다. 화랑세기에서는 그가 풍월주가 된 후 설화(薛花)라는 이름으로 바꿨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 비담이 미실의 아들뿐만 아니라 진지왕의 아들이라 기술된 곳은 설화나 야사,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도 없다. 확실한 것은 그가 귀족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 상대등까지 올라갈 정도로 짬밥이 높은 귀족이었다는 정도..[6] 이와 관련하여 말이 많을 걸 염두에 둔 건지, 비담이 등장할 무렵 제작진 측이 창작한 인물이라고 공인했다.[7]

  • 진지왕이 극에선 미실과 결탁하여 유서조작으로 왕이 되고, 이내 왕이 된 후 뒷간 나온 사람인 양 입 씻어서 결국 미실에 의해 탄핵되는 것처럼 나오지만, 삼국유사에선 진지왕이 그대로 4년이나 왕위에 앉아있다가 하는 짓이 정말로 막장이어서 화백회의에 의해 폐위됐다고 기술되어 있다(한 예로 도화녀와 7일 동안 검열삭제를 했다고...). 드라마는 필사본 화랑세기를 따른 설정.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진지왕이 막장이라서 태후가 폐위하려고 했으며, 여기에 원한을 품은 미실이 가담했다고 한다.
작중에서도 진지제가 폐위된 데에는 누구나 인정할 만한 실정이 있었고, 국선 문노나 거칠부도 반대하지 않았다고 언급된다.

  • 진지왕이 폐위되고 진평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진평왕은 13살이었는데, 드라마에서는 10대 후반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나온다. 이미 나이가 있는 미실이 왕후가 되겠다고 13살짜리한테 앵기는 장면은 현대인 시청자한테는 좀 와닿지 않다고 여겨 각색한 듯.

  • 화랑세기에서 등장하는 덕만의 세 명의 남편 중 한 명이 을제 대등인데, 그래서 방영 초반에는 화랑세기 내용을 예습해 온 사람들이 과연 덕만과 을제가 혼례를 올리는 장면이 과연 등장할 것인지 주목했지만 결국 드라마에선 일찌감치 해고당하셨다. 드라마에서 덕만은 주욱 미혼이므로 혼인하는 모습 역시 묘사되지 않았다. 그런데 화랑세기뿐 아니라 상대의 이름은 다르지만 삼국유사에도 음갈문왕과 덕만이 결혼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오히려 미혼이라는 설정이 창작이다.[8] 작중에선 을제 배역을 신구가 맡아서 이요원이 맡은 선덕여왕과 배우 간 나이차도 너무 많이 나서 결혼 장면을 연출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 거의 신급(?)으로 등장하는 국선 문노는 삼국사기에서는 그냥 높은 화랑1 정도의 평범한 인물로 등장한다. 일단 이름은 높았는지 김흠운 같은 귀족을 문하에 두긴 했지만 그 이상의 행적은 없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도 좀 더 추가적인 설정이 붙어서 뛰어나다고 하지만, 드라마에 나오는 정도까지는 아닌 그냥 평범한 화랑이다. 알천의 장인이기도 하지만, 작중에선 알천과 장인사위는커녕 별로 친해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니 알천 팬들이 '처량지도'를 결성하며 알천은 솔로겠거니 한다.

  • 김유신은 군인보다 정치인 쪽에서 역량이 뛰어났다는 평가도 있을 만큼 머리가 좋고 정치질에 능했지만 드라마상에서는 둔하고 권모술수와는 거리가 매우 먼 우직한 인물로 그려진다.

  • 진평왕수나라, 당나라와의 적극적인 외교 노선을 펼치는 등 실제 역사에서는 나름 선방한 왕으로 기술돼 있지만, 작중에선 비중이 너무 없고, 무능한 왕으로 전락. 결국 작중 최대의 피해자가 되었다. 유일하게 왕다운 행동은 월식계락으로 당당히 자신이 공주임을 밝히는 덕만에게 걸어가 딸임을 사람들 앞에 공식적으로 천명한 순간 정도. 그나마 이것도 먼저하지도 못하고 마야부인이 나서자 뒤따라 나오면서 한것이다.

  • 위서로 평가받는 화랑세기에만 수록된 인물들은 대거 채택하였음에도, 삼국사기 등 정사에 등장하며 그 영향력이 컸을 것임이 분명한 인물들은 도리어 생략한 경우가 많다. 가령,
    • 선덕여왕의 다음 왕인 마지막 성골 '진덕여왕' 승만은 작중에서 그 어떤 등장도 없고 언급도 안 된다. 드라마 홈페이지에는 인물소개에 올라와 있었고, 소개에 따르면 선덕여왕을 밀어주는 비중있는 인물이 될 것도 같고 나름 좋은 캐릭터가 나올 것도 같은데 작중에선 삭제. 캐스팅 얘기도 있었으나 결국은 끝까지 안 나온 인물. 마지막 회에서 선덕여왕이 김춘추에게 '일단 승만에게 왕위를 물려주는데 니가 그 다음 왕이 될 것이다' 식의 발언으로 간신히 언급되었지만 이 역시 감독의 편집신공으로 방송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역사의 가장 큰 줄기를 왜곡해 버린 이 드라마 최악의 실책이라고 하겠다. 성골 여성이라는 포지션이 겹쳐서였을지, 혹은 다음 세대의 주역 캐릭터로 김춘추를 확정하고 싶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 사실 워낙 진덕여왕이 미등장하는 게 사극이라는 장르상 역대급 촌극이라서 묻히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이 작품에 응당 등장해야 하는 진평왕과 선덕여왕 재위기에 큰 역할을 한 사람들도 미등장이 많다. 김유신의 여동생들이자 김춘추의 부인들이던 문명왕후김보희가 등장하지 않으며[9] 김유신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장군의 직위를 달았던 동생 김흠순도 미등장이다.[10] 선덕여왕 재위기의 2번째 상대등인 수품 역시 비중이 높아야 하는 거물급 인사였을 확률이 매우 높은데도 단역급으로만, 대등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만 대등 1명 정도의 위치로만 등장하며 이름만 언급될 뿐 그 중에서 누가 수품인지도 안 나온다. 게다가 39화 매점매석 에피소드에서 수품이 대등 중 언급된 것인데, 바로 2주 후인 43화 조세 개혁안 에피소드에서는 대등들 이름을 미실이 전부 읊는 장면에서 수품이라는 이름은 안 나오는 이뭐병급의 설정오류를 보여준다. 그리고 문명왕후가 삭제되면서 선덕여왕 재위기 최대의 촌극이었던 대야성성주였던 김품석과 그 부인 김고타소 역시 자연스럽게 미등장이다. 정작 대야성 전투(642년)는 그럭저럭 묘사했으면서... 아니 대야성이 함락된 건 보여주는데 왜 함락됐는지는 보여주지 못해 선덕여왕 재위기에는 유년기 내지 청년기였기에 족적을 남길 만한 일은 안 했지만 나중에 대성한 문무왕 역시 등장할 만하다.
    • 다만 김춘추의 가족들에 한해서 현실적인 이유를 따지자면, 작중 김춘추가 배우도 그렇고 묘사도 그렇고 실제 역사에 비해 대단히 어리게 묘사된 탓이 크다. 당사자가 거의 미성년자인데 성년 자녀와 사위를 묘사하는 건 아무래도 어색하다.

  • 염종과 비담이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 드라마에서는 비담보다 염종이 더 악당처럼 묘사되고 결국 비담 손에 죽는 간사한 캐릭터로 남았지만, 실제로 염종은 끝까지 비담에게 충성하여 진압군과 싸우다 죽었다. 이런 점에서 대왕의 꿈이 그나마 정사에 가깝게 묘사한 것이다.

  • 판타지에 가까운 드라마여서인지, 연대와 연령이 정확하지 않은 인물들이 많다. 가령,
    • 이순재가 극중 진흥왕으로 등장하는데 진흥왕은 526년생[11] 혹은 534년생[12]으로 540년에 즉위했고 37년간 재위했다. 고로 사망할 때 43세 혹은 51세로 중년기였기 때문에 이순재가 연기한 완연한 노인의 모습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13]
    • 덕만과 천명은 602년생으로 나오는데, 작중 덕만이 자기보다 연하라고 밝힌 김유신이 실제 역사에서 595년생이고 천명의 아들인 김춘추가 실제로는 604년생이다! 사실 천명이 만 16세 근처에 김춘추를 낳았다고 말했으니 김춘추는 작중에서는 618년생으로 14년이 젊어진 것.
    • 비담은 극중에서처럼 진지왕대에 태어났다고 치면 비담의 난 쯤에는 60대 이상이다. 사실 여기도 오류가 있는데 작중 묘사 상은 분명히 진지왕 시기에 태어났다고 나오면서 진평왕 치세인 건복 1년, 즉 584년생으로 나온다. 어느 쪽이던 비담의 난 때는 환갑을 넘긴 할아버지이다. 덕만과는 작중 설정상 18세(...) 차이다. 작중 묘사로 보면 2년 내지 3년 차이밖에 안 나보이는데(...).
    • 드라마 상에서는 알천김유신이 화랑 시절부터 같은 세대로 나왔지만 이것도 실제 역사와 다르다. 같은 시대를 다룬 대왕의 꿈에서는 알천 역에는 중견배우 임혁이 맡았고 김유석이 맡은 김유신의 윗세대로 등장한다.
    • 김춘추 또한 여기서는 소년~청년기로 등장했다. 실제 김춘추는 상술했다시피 604년생으로, 비담의 난이 일어난 647년에는 이미 40대였다. 이미 장성해서 시집갔다가 사위의 손에 동반자살로 죽은 딸까지 있었던 아버지였다.
    • 당장 주인공인 선덕여왕부터 실제로는 빨라야 40대 후반에 즉위해 60대까지 재위한 할머니 여왕이었다는 게 정설. 사망 당시 연령을 70대까지 보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는 선덕여왕이 김유신보다 윗세대였음에도 같은 세대로 만들어 놓은 건 덤. 하지만 드라마상의 나이를 그대로 적용한다 해도, 595년생이었던 김유신이 비담의 난 때에 53세였으니 드라마상의 선덕여왕도 분명히 유신보다 자기가 연상이라고 했으니 최소 55세는 되었다고 봐야 한다.
    • 15화에 보종과 석품이 소화를 데리고 떠나려는 칠숙을 붙잡으려는 씬이 나오는데 해당 씬에서 석품이 "칠숙랑, 접니다. 청룡익도 어린 시절 칠숙랑을 뵀었습니다. 저 석품입니다. 모르시겠습니까?"라는 대사가 나온다. 해당 대사로 따져본다면 석품은 칠숙을 소화, 덕만의 추격 임무를 위해 떠나는 시점 전에 봤었다는 것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덕만, 김유신, 심지어 보종보다 최소한 형(오빠)이다.[14] 추정컨대 드라마 상 비담과 비슷한 나이대거나 더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드라마 내내 보종이 나이로나 지위로나 더 위인 것으로 연출된다.

  • 진평왕 시기의 병부령은 설원이 아니라 김후직이었다. 사실 설원이라는 인물 자체는 화랑과 더 관련이 있다.

3. 의식주, 문화 관련[편집]


  • 덕만의 타클라마칸 유학기엔 놀랍게도 감자가 등장하고, 죽방이 옥수수를 들고 있는 장면도 나온다. 감자와 옥수수 둘 다 아메리카가 원산지라 작중 배경인 7세기에는 한국에도 유럽에도 없었고, 임진왜란 종전 이후인 19세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작물이다.(!) 작중 가리반이라 불리는 카레라이스(!)는 본디 커리를 일본이 현지화해서 일제강점기 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여온 것이니 말할 것도 없고... 단 타클라마칸에서 인도는 거리가 멀지 않고 인도 본토에서도 카레를 밥과 한 접시에 얹어 먹기도 하므로 감자나 옥수수보단 말이 된다.


  • 주몽의 다물군 갑옷 역시 주진공 개인의 병사 갑옷으로 재활용되었다.

  • 계백의 붉은 투구는 고증적 관점에서 보면 그냥 판타지인데, 판타지라고 해도 너무 신선한 디자인이다. # ## 진짜로 한국형 판타지 세계관에서 써도 될 정도인 디자인

  • 극 중 미실, 덕만공주, 천명공주를 비롯한 대다수의 신라 궁중 여인들이 입은 의상이 당나라식 한푸인 제흉유군과 비슷하게 생겼다. 사실 후기 신라가 당나라 복식에 영향을 받았던 건 사실이지만 그건 극 중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이 아닌 이보다 살짝 후대인 진덕여왕~문무왕 시기이다. 진덕여왕 재위 시기에는 김춘추의 주도로 당나라 관복인 단령이 신라에 수입되었으며, 조금 더 후대인 문무왕 재위시기에는 귀부인들의 복식이 수입되었다고 삼국사기에 나온다. 즉, 이 드라마 속 여성 인물들이 입고 나오는 의상은 문무왕 이후에나 입었을만한 의상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선덕여왕 같은 삼국시대 신라 배경 사극보다는 차라리 해신 같은 통일신라 배경 사극에 해당 의상들이 나오는 게 훨씬 자연스러우며, 실제로도 해신은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통일신라 여성의 의상을 잘 재현하여 호평을 받았다. 게다가 이 드라마 자체가 워낙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았던만큼, 대중들로 하여금 당나라풍 의상이 마치 신라 고유의 한복인 거처럼 착각을 일으키게 만드는 불상사까지 일어나 지금도 종종 경주시같은 곳에서 열리는 신라 재현 행사에서는 신라 고유의 한복이 아닌 당나라풍과 가까운 의상들이 선보여질 때가 많다.

  • 의외로 장신구 소품 고증은 은근히 꼼꼼했던 드라마였다. 작중 등장하는 많은 장신구들이 실제 신라 장신구 유물의 모습을 재현했다고 한다. 다만 지나치게 현대적이라고 비판을 하는 네티즌들도 꽤 있었는데, 실제로 선덕여왕의 장신구 제작을 담당한 업체는 나스첸카라는 이름의 장신구 업체로, 현 한국 사극 장신구의 95%를 담당하고 있다고 보면 될 정도다[15] 하지만 고증에도 맞지 않은 장신구를 자주 납품해서 고증 덕후들에게는 욕을 많이 먹는 편. 다만 같은 업체에서 협찬을 하더라도 결국은 각 드라마의 소품팀과 미술감독의 최종선택에 따라 제품이 선정되기 때문에 고증에 맞지 않는 이유가 100% 업체의 잘못만이라고 할 수는 없다.

  • 작중에서는 불교 도입 이전의 신라 토착신앙이 아직도 기세를 펼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김유신과 천관녀의 이야기를 보면 이미 신라 토착신앙은 이차돈의 순교와 법흥왕의 불교 공인 이후 빠르게 몰락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몇 세대가 지난 진평왕 재위기간 시점에 미실이 설령 토착신앙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라 해도 그만한 힘을 내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필사본 화랑세기로 치더라도 미실은 생존시기상 마야부인이 살아있던 시기에도 이미 노년에다 병마와 싸우고 있기에 마야부인, 선덕여왕과는 동시대 인물은 아니고 드라마에서처럼 만나서 정면대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4. 사회 관련[편집]


  • 선덕여왕 자신이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여왕이 되겠다고 김유신 앞에서 선포하는데 이미 그 순간 동시대 옆나라 일본에선 여왕이 존재했다... 신라가 왜국과 그리 친하진 않아도 사신교류는 있었고 심지어 신라계 도래인이 일본에서 살아가기도 했기 때문에 그걸 몰랐을 수는 없다. 더군다나 사례가 없었을 뿐이지 여자가 왕이 되는 것이 성에 개방적인 신라 사회에선 그렇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고 한다.[16]


  • 작중에서 덕만이 "여왕 폐하"라고 불리는데, '여왕'은 고려 때 들어서나 나온 말이며,[17] 따라서 삼국사기를 보면 '선덕여왕' 이 아니라 '선덕왕' 으로 되어있다.[18] 굳이 여성 군주임을 강조할 때에도 여왕이 아니라 여주(女主)라고 했다. 단 여주는 임금의 호칭인 '제왕군주' 중 가장 낮은, 폐위된 임금(폐주)에게나 붙일법한 격이 낮은 글자다. 역사기록에서 여주라는 말은 (여자니까) 제대로 된 왕이 아니라고 비하하는 뉘앙스가 들어간 것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차라리 "대왕 폐하"로 불리는 게 맞는 고증이 되었을 것이다.

  • 김춘추가 "골품제는 없어져야만 하는 제도"라면서 까는데 아무리 김춘추를 밀어주려고 했다고 해도 이건 말 그대로 신라라는 나라의 제도 근간을 건드리는 설정. 물론 극중에서 김춘추가 미실을 비롯한 진골 귀족들을 도발하면서 드라마의 긴장을 높이기 위한 설정이었으나 조금 무리가 아니었나 싶다. 일단 김춘추가 당시 신라 귀족치고는 타고난 신분보다 능력 위주의 인사를 선호했던 것 자체는 사실이다. 비주류 가야계 가문과 혼인하고 상대적으로 자신보다 격이 낮다고 할 수 있는 김유신, 강수, 원효를 중용하는 등. 그러나 근본적으로 골품제를 뒤엎으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일단 골품제는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폐지되지 않는다.[19] "너무 심하니 수정 좀 해야 하지 않겠음??"이라는 말이나마 신라 후기에 나왔을 뿐. 그리고 김춘추 자신이 골품제의 수혜자인 진골이다. 자신이 천부적으로 받은 수혜를 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평등사회를 꿈꾸는 사람이었다면 김춘추는 이미 성인의 반열로 올라갔을 것이다.

  • 화백회의의 만장일치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덕만의 주장은 야사, 설화, 필사본 화랑세기에도 없다. 화백회의의 만장일치제가 나온 배경이 6부의 합의라는 신라의 건국 과정까지 올라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신라의 설립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위에 언급한 골품제 부정 발언과 동급 혹은 그 이상으로 파급력이 큰 주장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도 김춘추의 그것처럼 극에서 미실의 계책을 역관광시키기 위한 계책인 것이다.

  • 칠숙의 난으로 알려진 사항도 드라마에선 그 실체는 미실의 난이 되어버렸다.[20]

  • 삼국사기에 따르면, 칠숙과 석품이 난을 일으키기 전에 신라 궁궐에 지진이 나서 땅이 크게 갈라졌다고 전하지만 이를 생략했다.[21]


  • 라틴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리스어가 인쇄된 책이 등장한다.[22]

  • 선덕여왕이 자기 맘대로 비담상대등에 지명한다. 실제 상대등은 귀족들의 대표격이기 때문에 귀족들의 정치적인 이익에 따라 결정되지 왕이 지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23] 왕 좋을대로 임명하고 해임시킬 수 있는 최고 관직은 진덕여왕 시기부터 등장한 시중이다. 애초에 상대등은 진골만 될 수 있다! 비담도 혈통을 따져보면 진골이긴 하지만 진지왕과 미실의 아들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니 귀족들 입장에서는 산에서 약초나 캐던 사람이 자기 상관이 된 거다.

  • 사실 위의 비담의 상대등 임명보다 더 말이 안되는 건 알천의 상대등 임명이다. 비담이 미실과 진지왕의 아들이라는건 대등 중 하나인 미생은 당연히 알고 있었고, 진지왕의 아들이었던 용춘 역시 이런저런 경위를 통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다들 비담의 세력이 비담을 왕으로 추대하는데 이 시점을 보면 엥간한 사람들은 비담의 신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알천은 역사상으로 보면 아마 진골로 추정되는데[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실측에서 그를 배제하고 왕실에서도 그를 배제하여 천명공주의 사위감으로 언급도 안되고, 그나마 미실이 적당히 구슬려 먹을 생각으로 추천하는 것으로 언급이 된다. 이미 진덕여왕 시절에 상대등에 오른걸 보면 상당히 영향력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힘이 있다는게 드라마 내내 표가나지 않는다. 오히려 알천이 상대등이 되는 게 그저 10화랑 중 하나에 불과했던 알천이 그저 공주와 친하다고 상대등을 물려받는 꼴이 된다. 일단 비담의 난이 바로 시작하기 전에 비담이 덕만파 대등의 숫자가 3명이라고 하는데 확실히 덕만파 대등으로 표현된건 용춘과 김서현이며, 남은 한자리는 그 당시 권력이나 지위로보면 알천과 춘추 그리고 김유신 셋중 하나가 된다. 그런데 이 세 명중 누구도 대등의 옷을 한번도 입은 적이 없다. 그나마 알천이 대등이었을 수도 있다는 걸 유추할 수 있는 건 비담의 난 시작전 회의에서 알천이 대등인 서현과 용춘 옆에 앉아있다는것 정도인데, 자리 배치하나로 대등인지 아닌지 알아맞추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설상가상으로 유신, 알천 그리고 김춘추 세 명중에서는 신분이 김춘추가 제일 높기에 이 셋 중에서 한명이어야 한다면 김춘추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게 골품제에서 골이 가장 높은 건 바로 김춘추이기 때문이다.[25]

  • 11화 말미에 백제와의 전투에서 김서현이 살아돌아온다면 천명공주는 김서현에게 병부의 대감 관직(병부 서열 2위)을 제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병부 대감은 진평왕 45년에 설치된 관직이다. 작중 시점은 천명공주와 덕만이 10대 후반쯤 된 시기이므로 병부 대감이라는 관직은 아직 설치되기 전의 시기이다. 즉, 천명공주의 논공행상은 없는 관직을 제수하라고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

  • 미실 일파가 자리잡은 대야성을 공격할 때 대야성은 동쪽에서 한 번도 공격받은 적이 없다는 말이 나오는데 당연히 말도 안되는 소리다. 대야성 일대는 과거 대가야(반파국)의 영토였고 진흥왕이 이사부사다함을 보내 멸망시켰다. 즉 신라는 이미 동쪽에서 대야성을 쳐서 함락한 경험이 있는 셈이다.

  • 왕실과 각 부처를 감찰하는 직속기관 사량부(司量部)가 신설되고 비담이 그 수장으로 등장하는데 어린 진흥왕을 대신해 지소태후가 섭정을 하던 시기에 이미 감찰기관인 사정경(司正卿)이 만들어진 상태였다.[26] 게다가 당연한 얘기지만 비담은 사정경의 수장이 된 적도 없다.[27]

  • 복야회라는 가야를 복원하기 위한 단체가 나오나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야는 제국(諸國), 즉 각각의 나라가 따로 놀았다. 쉽게 말해서 금관가야 입장에서 대가야나 신라나 다를 게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야 소국들의 후예들끼리 모여서 가야를 부흥시키려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28]

  • 상대등 역임에 대한 부분에 오류가 많다. 진평왕 시기부터 선덕여왕 시기까지의 상대등은 아래와 같은 순서로 역임했다.

|| 노리부 - 수을부 || 을제 - 수품 - 비담 - 알천 ||
|| 진평왕 || 선덕여왕 ||

다음은 드라마 선덕여왕에서의 순서이다.
|| 거칠부 - 노리부 - 세종[29] || 용춘 - 비담 - 알천 ||
|| 진평왕 || 선덕여왕 ||

일단 노리부와 세종이 실제로는 같은 인물이었다는 점은 넘어가더라도 비담의 편에 서서 반역을 일으킨 수을부의 경우 진평왕 시기부터 상대등이었기 때문에 원래 드라마 상에서는 비중이 더 높았어야 했으나 그저 화백회의에서 미실 편만 드는 대등 중 하나에 이후엔 자신의 이익을 반역을 일으킨 인물 정도로 묘사되었다. 게다가 을제의 경우 극중에서 진평왕이 천명공주를 잃은 시기에 삭탈관직 당해 쫓겨났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선덕여왕이 재기용 한다는 묘사가 있어야 하나, 그냥 넘어가버린 탓에 선덕여왕 치세 초기의 상대등은 엉뚱하게도 실제 역사에선 상대등을 지내본 적도 없는 김용춘에게 상대등 직위가 넘어가 버렸다. 그리고 수품 역시 을제의 뒤를 이어 상대등을 지냈으나 아예 인물 자체가 사라져버렸고 용춘이 사실상 퇴출(...)된 이후 비담이 바로 이어받는 것으로 등장한다. 이래저래 누락되거나 잘못된 부분이 너무 많다. 사실 공홈에서 을제 캐릭터의 설명을 보면 분명히 파직 이후 복귀해 덕만을 돕는 것으로 되어있다. 아마 미실의 난 때 공을 세운 후 복직해서 상대등에 임명되는 그림으로 갔을 확률이 큰데 배우 신구씨가 고령인 문제 등으로 재출연을 시키기에는 힘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안 나온다.

[1] 다만 필사본 화랑세기가 진서라는 소수설도 아직은 있기 때문에 소수설을 따른다고 그것만으로 역사 왜곡이라 하기에는 섣부른 감이 있다. 이러한 소수설을 주장하는 대표적 인물로는 서강대 이종욱 총장이 있다. 물론 화랑세기 위서설이 현재로서는 압도적 다수설이긴 하다.[2] 그런데 미실은 이 드라마 뿐만 아니라 연개소문에서도 등장한다. 단, 연개소문의 경우 주 무대가 신라가 아닌 고구려이기 때문에 미실은 초반부에 단역으로 몇 장면에서만 등장하며, 당연하지만 이 쪽도 필사본 화랑세기를 참고한 것이다. 화랑세기상의 등장연대를 충실히 따라서 중견배우 서갑숙이 연기했다.[3] 해당 대사는 "네 이년! 네 년도 죽을 것이다. 네 년이 가진 모든 것을 잃고 빼앗기고 짓밟히고 혼자서 외로움에 떨다 죽을 것이다. 잠을 자도 잘 수 없고, 먹어도 먹을 수 없고 살아도 살 수 없고, 송장처럼 썩어가다가 비명을 질러도 소리가 나지 않은 채로 죽을 것이다! 비석도 없이, 무덤도 없이, 흔적도 없이 죽으리라!! 하여 역사에 네년의 이름은 단 한글자도 남지 않으리라!!"이다. 실로 무시무시한 대사인데, 대체로 온화한 역을 맡아왔던 윤유선 씨의 폭풍열연으로 듣는 미실은 물론이고 시청자들까지 기가 질릴 정도의 포스를 발산했다. 마야부인 항목에 동영상이 올라가 있으니 꼭 보길 추천한다.[4] 이는 사도태후, 미실 집안의 대원신통과 관련있다. 사도태후의 집안은 신라 왕실가에 색공을 들여 왕후가 되려는 의지가 강했는데 그걸 아들이 거절했으니 충분히 화낼 수 있는 문제다.[5] 다만 화랑세기에서는 외모가 아름답지만 사다함과 너무나도 닮아 그의 자식이 아닌가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6] 같은 시대를 다룬 다른 사극 삼국기에서 비담은 완전히 할아버지로 등장한다.[7] 하지만 비담 자체는 기록이 별로 없을 뿐이지 엄연히 실존인물이 맞기 때문에 창작한 인물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결국 실존인물을 제멋대로 써 놓고 비판은 피하고 싶은 제작진의 궁색한 변명일 뿐이다.[8] 삼국사기에서는 선덕여왕의 혼인 여부에 대해 기술된 바가 없다.[9] 문명왕후의 경우에는 공홈 인물관계도에는 김유신의 여동생이자 김춘추의 부인으로서 본명인 "김문희"로 올라가 있기는 하다.[10] 김유신과 동맹 이후 김서현의 양자로 입양된 월야가 김흠순이 되는 거 아니냐는 추측도 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그냥 증발되었다. 만약 그렇게 처리했다면 월야의 이후 행적 탓에 어찌 되었건 역사왜곡이긴 하다.[11] 삼국유사.[12] 삼국사기.[13] 다만 이는 2000년대에서 보았을 때의 통념이고, 1500년 전의 고대인은 현대인보다 수명이 짧았으니 50세면 충분히 노인으로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장 대중매체를 보더라도 80~90년대의 30대 남성 얼굴은 2010년대의 30대에 비해 노안이다.[14] 보종이 덕만 또래 나이라는 추정은 7회 때 나오는 상황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덕만이 임종이 쏜 화살에 맞은 보종을 치료 중일 때 미실 입장에선 보종이 실종된 것이라 석품을 시켜 보종을 찾으려 왈패 무리에게 보종에 대해 설명할 때 '상산 열외사 근처에서 실종/나이 15/검은 무명옷/키는 6척 정도/짙은 눈썹/외상'이라는 이야기를 했으니, 15년 후로 시간이 흐른 덕만의 또래일 것이다.[15] 최근에도 철인왕후, 옷소매 붉은 끝동, 달이 뜨는 강의 장신구 제작을 담당했다.[16] 원래 대본에는 옆나라 일본의 여왕에 대한 언급이 있었으나, 방송분에서는 편집되었다고 한다.[17] 다만 중국 사서에서는 선덕여왕보다 앞선 여왕들인 야마타이국, 동여국의 여왕들을 가리키며 여왕이라는 말을 진작부터 쓰고 있었다.[18] 다만 삼국유사에서는 '여왕'으로 되어있다.[19] 더군다나 신라가 고려에 흡수되고 나서도 신라 출신들 간의 암묵적 서열로 작용했다. 그런 골품제의 잔재가 완전히 사라진 건 여몽전쟁을 거치면서 신라계 고려인들 사이에서 신라 유민으로서의 정체성이 완전히 사라진 뒤였다.[20] 정확히 말하면 시놉시스에선 미실이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바로 철수 선언하고 그것을 거부한 잔당들이 모인 칠숙의 난이 됐는데 연장으로 인해 설정이 변경됐다. 제작진도 창작이라고 인정한 상황.[21] 다만 이것은 변호를 하자면 할 여지가 있는데, 불길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지진을 비롯해 용이 나타났다거나 그림 속의 개가 짖었다는 등 신이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삼국사기 곳곳에 나타나는 서술 기법이기 때문이다. 이 지진 역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기보다는 서술 기법인 것으로 보았으므로 묘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 것. 다만 지진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근거도 없다.[22] 당연히 흔하게 볼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겠으나, 불가능하진 않다. 신라도 실크로드 교역의 끝자락에 있긴 했으니...[23] 물론 왕권이 강력했던 신라 중대의 신문왕이나 경덕왕 때처럼 상대등을 왕이 멋대로 갈아치우는 사례도 있긴 했지만 선덕여왕 치세에 이런 인사는 불가능했다.[24] 진덕여왕 사후 알천은 실제로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거절하였다.[25] 김춘추의 어머니인 천명공주는 성골이고, 김용수도 원래는 성골이었다가 족강된 진골이다. 김유신의 부모는 만명부인이 원래 성골이었다가 족강된 바람에 진골, 그리고 김서현은 골이 없다가 가야계에 주어진 진골이기에 같은 진골이라도 일단 다르다. 이에 비해 알천의 부모의 골품은 아예 언급도 되지 않는다.[26] 이후 무열왕 시기에 사정부로 승격된다.[27] 다만 비담은 난을 일으키기 전의 정보, 즉 출신년도와 활약, 이전 작위 등이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작가가 상상력을 동원한 것일 수는 있다.[28] 다만 가야 제국설과 연맹설은 확실히 뭐가 진짜인지 밝혀진 바가 없다.[29] 설정오류로 보인다. 1-2화에서는 노리부가 화백회의를 주관하는 것으로 등장하데, 막상 미실이 거칠부를 숙청하려는 에피소드에서는 남편인 세종에게 상대등에 올라야겠다고 얘기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물론 드라마에 등장하지 않지만 만약 세종이 상대등이었다가 다시 추대된 경우라면 불가능하지는 않으며 세종이 오르기 전에 노리부가 임시로 담당했다고 해도 말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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