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토리우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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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로마 제국 깃발.svg 고대 로마의 내란·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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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기두스 전투
파일:east_roman_mon_256.png 테오도시우스 1세 vs 파일:western_roman_mon_256.png 에우게니우스



세르토리우스 전쟁
영어: Sertorian War
시기
기원전 82년 ~ 기원전 72년
장소
히스파니아
교전 세력
파일:Senate_loyalists.png 옵티마테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포풀라레스
지휘관
파일:Senate_loyalists.png 메텔루스 피우스
파일:Senate_loyalists.png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파일:Senate_loyalists.png 루키우스 푸피디우스
파일:Senate_loyalists.png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파일:Senate_loyalists.png 마르쿠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파일:Senate_loyalists.png 루키우스 토리우스 발부스†
파일:Senate_loyalists.png 퀸투스 칼리디우스
파일:Senate_loyalists.png 루키우스 만리우스
파일:Senate_loyalists.png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루키우스 히르툴레이우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루키우스 살리나토르†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베이엔토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가이우스 헤레니우스†
결과
옵티마테스파의 승리.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기원전 82년~72년, 퀸투스 세르토리우스가 이끄는 포풀라레스파가 옵티마테스파가 장악한 로마 정부에 맞서 히스파니아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발발한 내전.


2. 상세[편집]


기원전 83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이끄는 5개 군단이 이탈리아에 상륙한 뒤 포풀라레스파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면서 술라의 내전이 발발했다. 포풀라레스파는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해 맞섰지만, 술라의 탁월한 군사적 능력과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메텔루스 피우스 등 측근들의 활약, 포풀라레스 지도부의 지리멸렬한 지도력 등의 요인으로 술라가 승승장구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부관으로 킴브리 전쟁동맹시 전쟁에서 활약했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는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탈리아에서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법무관으로서 사전에 배정받은 히스파니아 속주로 가서 항전을 이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기원전 83년 연말에 육로를 통해 히스파니아로 향한 세르토리우스는 재무관 루키우스 히르툴레이우스를 최측근으로 삼았다. 그는 히스파니아로 향하는 도중에 모집한 군단들을 이끌고 히스파니아를 빠르게 장악한 뒤, 히스파니아 부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선정을 베풀었다. 과중한 세금을 줄이고, 도시 내 군사 기지를 줄였으며, 부족 귀족들과의 관계를 개선했다. 역사가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는 세르토리우스가 온화하면서도 지도력이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반항적이었던 히스파니아 부족들은 그의 성품에 깊은 감명을 받고 진심으로 충성했다고 기술했다.

기원전 81년 로마를 평정한 술라는 세르토리우스를 숙청 대상자로 지정하고 가이우스 아니우스 루스카를 가까운 히스파니아의 새 총독으로 임명했다. 루스카는 2만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진군하다가 피레네 산맥에서 세르토리우스의 부하 루키우스 살리나토르가 지휘하는 6,000명의 분견대에게 저지되었다. 그러나 살리나토르는 부하에게 살해되었고, 6천 수비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루스카가 히스파니아로 진입하자, 세르토리우스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3천 병력을 이끌고 카르타고 노바로 후퇴한 뒤 함대에 병사들을 싣고 마우레타니아로 떠났다. 그러나 마우레타니아 주민들의 저항에 직면하자 그곳을 떠났고, 킬리키아 해적들과 연합하여 피티우스 섬을 공략했다. 얼마 후 루스카가 파견한 함대가 쳐들어오자 이에 맞섰으나 패배를 면치 못하고 하데스 해협을 지나 히스파니아의 베티스 강 어귀에 상륙했다.

그는 그곳에서 병력을 보충하고 휴식을 취한 뒤 킬리키아 해적들과 함께 팅기스로 향했다. 해적들은 팅기스의 참주로 아스칼리스를 옹립하려 했지만, 그는 팅기스 주민들이 아스칼리스에게 반감을 품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그들과 연합해 해적들을 전투에서 물리쳤다. 이후 팅기스를 복속시키기 위해 술라가 파견한 파키아누스를 물리치고 파키아누스의 병사들을 회유해 자기 편으로 끌여들었다.

그러던 중 루시타니아 부족장들이 세르토리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들이 술라파 총독의 폭정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하소연하면서, 그를 지도자로 세울테니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이에 세르토리우스는 기원전 80년 팅기스에서 2,600명의 로마군과 700명의 마우레타니아 용병대를 이끌고 히스파니아로 건너가 벨론 시 부근에 상륙했다. 4,000명 이상의 루시타니아인들과 합세한 뒤, 그는 먼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 루키우스 푸피디우스와 베티스에서 격돌했다. 푸피디우스는 이 전투에서 2,000명 이상의 로마 군단병을 잃고 도주했고, 먼 히스파니아 일대의 상당수 영역이 세르토리우스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세르토리우스는 자신의 입지가 아직 불안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루시타니아인들은 지금 당장은 그가 필요해서 지도자로 선출했지만, 조금만 수틀리면 이방인인 그를 배신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술책을 썼는데, 특히 신들과 소통하는 특별한 인간으로 포장했다. 한 번은 한 사냥꾼이 하얗고 작은 사슴을 발견하고 세르토리우스에게 선물했는데, 그는 이 동물을 아르테미스의 신성한 선물이라고 선언하면서, 이 하얀 사슴이 자신에게 비밀을 알려준다고 밝혔다. 적이 어느 지역을 공격했다는 비밀 통지를 받거나 반역 모의가 있다는 보고가 들어올 때, 그는 사슴이 그 사실을 알린 척하며 적절한 조치를 내렸다. 그리고 부하가 승리했다고 보고했을 때, 전령의 도착에 대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좋은 소식의 표시로 화환으로 장식된 사슴을 공개했다. 이에 부족민들은 그가 아르테미스 여신의 총애를 받는 특별한 인간이 분명하다고 여기고, 그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얼마 후, 가까운 히스파니아 총독 마르쿠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가 푸피디우스를 돕기 위해 남하했다. 세르토리우스는 즉각 응전했고, 아나스 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칼비누스를 주살했다. 이 전투의 여파로 히스파니아의 대다수 부족이 세르토리우스에게 돌아서자, 독재관 술라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메텔루스 피우스에게 4개 군단과 비슷한 숫자의 보조병을 이끌고 세르토리우스를 토벌하라고 지시했다. 세르토리우스는 전력차가 많이 나고 전투력도 열세한 상황에서 정면승부는 승산이 없다고 보고, 유격전을 벌이기로 했다. 그는 행군 중인 적을 연이어 습격해 괴롭히고 보급로를 수시로 끊어서 물자를 조달하기 어렵게 했으며, 적군이 숙영지를 건설할 때 급습하고 반격하려 들면 곧바로 후퇴했다.

한 번은 메텔루스의 군대가 라코브리가 시를 포위했다. 그는 수로를 차단하여 시민들이 물을 얻을 길이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세르토리우스는 도시에 2,000개의 물을 담은 가죽을 신속하게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메텔루스는 도시가 이틀 안에 항복할 거라 여기고 불과 5일치 식량만 가져왔는데, 장기전을 피할 수 없게 되자 식량을 구하기 위해 1개 군단을 파견했다. 그러나 이 군단은 세르토리우스의 매복 공격을 받고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결국 메텔루스는 라코브리가 시 공략을 포기하고 퇴각해야 했다. 한편 메텔루스는 부관 루키우스 토리우스 발부스를 히스파니아 중부로 파견했으나, 발부스는 콘사부르에서 루키우스 히르툴레이우스에게 대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메텔루스는 아나 강과 탕구스 강 사이의 루시타니아에서 작전을 이어가면서 적의 보급 기지를 파괴하고자 지나가는 곳마다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다. 그러나 세르토리우스의 탁월한 유격 전술에 손실이 갈수록 커지자 기원전 78년 말 투르데타니아에 틀어박혀 농성했다. 기원전 78년,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총독 루키우스 만리우스가 메텔루스를 구원하고자 3개 군단을 이끌고 히스파니아로 진군했다. 그러나 만리우스는 일레르다에서 히르툴레이우스에게 대패하고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로 도주했다.

당시 히스파니아의 대다수 영역은 세르토리우스의 손아귀에 넘어갔고, 지중해 연안의 카르타고 노바, 타라고나 등 몇몇 도시만이 로마 정부에 여전히 충성했다. 세르토리우스는 이 영토를 확고히 장악하려면 현지 주민들의 호응을 얻어내야 한다는 걸 잘 알았다. 그는 우에스카를 수도로 삼고 개별 부족, 도시 및 지역 귀족 대표의 후원자를 자처했으며, 자신에게 협조하는 히스파니아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고 그들의 자녀들을 위해 우에스카에 학교를 짓고 로마식 교육을 받게 했다. 그러면서도 로마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 사이에서 300명의 원로원을 구성하고 법무관과 재무관 등을 선출해, 이들과 함께 히스파니아를 안정적으로 다스렸다.

세르토리우스는 히스파니아 장병들이 로마 무기와 전술, 신호 및 명령체계를 익히도록 노력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부족 회의를 소집한 뒤 두 마리의 말을 데려오게 했다. 하나는 늙고 병들었지만, 다른 하나는 몸집이 크고 건강하며 아름다운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쇠약해진 말은 키가 크고 힘센 사람이 이끌고, 힘센 말은 작고 연약한 사람이 이끌었다. 세르토리우스가 신호를 보내자 힘센 사람은 말의 꼬리를 양손으로 잡고 힘껏 끌어당기려 했고, 약한 자는 털을 하나씩 뽑기 시작했다. 힘센 사람은 말이 격렬하게 저항하는 바람에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작업을 포기했지만, 약한 사람은 말의 꼬리를 신속하게 뽑았다. 그는 이 광경을 모두에게 보이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고 한다.

"전우 여러분, 힘보다 인내가 더 유익하고, 한 번에 할 수 없는 일도 차근차근 실천하면 이룰 수 있습니다. 끊임없는 압력은 저항할 수 없습니다. 시간은 어떤 힘도 파괴할 수 있습니다. 시간은 자신을 현명하게 선택하는 사람의 동맹이 되고, 지나치게 서두르는 모든 사람의 적이 됩니다."


세르토리우스는 이와 별개로 부하 마르쿠스 마리우스를 폰토스 왕국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보내 로마 정부에 대항하는 연합 전선을 형성했다. 그러던 기원전 77년, 집정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술라가 세운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참패하고 사르데냐로 망명한 뒤, 부관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베이엔토가 리구니아에서 항전하다가 진압군을 피해 피레네 산맥을 건넜다. 페르페르나는 독자적으로 메텔루스와 싸우려 했지만, 병사들이 세르토리우스와 합류해야 한다고 강력히 권고하자 그 말에 따랐다. 하지만 두 사람은 지휘권을 놓고 대립했다. 병사들이 인망 높은 세르토리우스를 확고하게 지지했기에 세르토리우스가 총지휘권을 맡게 되었지만, 페르페르나는 이에 반감을 품었다. 또한 그는 '야만족'인 히스파니아인들을 지나치게 후대한다고 여겨 세르토리우스와 끊임없이 반목했다.

기원전 77년, 원로원은 세르토리우스의 기세가 갈수록 강력해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 토벌을 맡겼다.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77년 말이나 기원전 76년 초 피레네 산맥을 건넜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그의 군대는 3만 명의 군단병과 1,000명의 기병, 그리고 비슷한 숫자의 보조 부대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도로를 닦으며 남하했다. 당시 세르토리우스는 최근에 로마 정부에 귀순한 라우론을 포위 공격하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이 도시를 구원해야겠다고 판단하고, 그쪽으로 이동했다. 세르토리우스는 병력을 매복시켰다가 폼페이우스군의 식량 수집부대를 습격해 큰 타격을 입혔다. 폼페이우스는 아군을 구하고자 1개 군단을 파견했으나, 그들은 곧 포위되었다. 폼페이우스가 진영에서 본대를 이끌고 아군을 구하고자 이동했으나, 세르토리우스가 이끄는 중보병대가 후방의 언덕 정상에 출현한 걸 보고 급히 퇴각했다. 세르토리우스는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여 1만 명을 사살한 뒤, 여세를 몰아 라우론을 공략했다. 이때 일부 군단병들이 라우론 시를 약탈하고 여인들을 강간하자, 세르토리우스는 이들을 전부 공개 처형했다.

폼페이우스는 라우론 전투에서 참패한 뒤 피레네 산맥으로 후퇴했다. 이후 세르토리우스가 폼페이우스의 편을 들은 인디퀘테스족과 라케타네스 족을 징벌하는 원정을 벌일 때, 폼페이우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에 두 부족은 도로 세르토리우스에게 충성을 바쳤다. 기원전 75년, 세르토리우스는 페르페르나와 가이우스 헤레니우스에게 폼페이우스를 상대하게 하고, 루키우스 히르툴레이우스는 메텔루스를 상대하되 전투를 회피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충성을 바치길 거부하고 있는 베로네스 족과 아우트리코네스족을 토벌하기로 했다. 세르토리우스는 두 부족을 성공적으로 복종시켰지만, 그 사이에 폼페이우스는 공세를 재개해 발렌티아에 이르러 헤레니우스와 페르페르나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가이우스 헤레니우스를 포함한 10,000명의 반란군이 피살되었고, 발렌티아는 폼페이우스군에게 초토화되었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세르토리우스는 급히 폼페이우스를 막으러 이동하여 페르페르나의 잔여 부대와 합류했다. 폼페이우스의 부하들은 메텔루스가 합세할 때까지 전투를 미루자고 진언했지만, 폼페이우스는 듣지 않고 수크로에서 세르토리우스와 결전을 벌였다. 두 장수는 각자 우익 부대를 지휘하여 공세를 이끌었다. 그러던 중 폼페이우스가 적의 좌측면을 밀어내기 시작하자, 세르토리우스는 즉시 그쪽으로 말을 몰아 흔들리는 장병들을 독려하여 전의를 되살리고, 예비대를 대거 투입해 폼페이우스를 밀어붙였다. 그 결과 폼페이우스군 우익 부대는 궤멸되었고, 폼페이우스는 중상을 입고 사로잡힐 뻔했지만 적병들이 화려한 장식을 단 그의 말을 놓고 다투는 틈을 타 가까스로 도망칠 수 있었다. 이때 폼페이우스의 부관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가 이끄는 좌익부대가 일시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적진에 침입했다. 이에 세르토리우스는 폼페이우스를 쫓으려던 생각을 접고 아프라니우스에게 달려갔고, 아프라니우스 역시 격퇴되어 상관을 따라갔다.

수크로 전투에서 막심한 피해를 입은 폼페이우스는 전면 퇴각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하지만 메텔루스 피우스가 히르툴레이우스를 이탈리카 전투에서 물리치고 폼페이우스를 도우려 달려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세르토리우스는 어쩔 수 없이 후퇴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세르토리우스는 이때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고 한다.

"노파가 훼방놓지 않았더라면, 저 아이를 채찍질해서 로마로 쫓아냈을 텐데!"


폼페이우스와 메텔루스 피우스가 합세하여 압박해 들어오자, 세르토리우스는 유격전으로 대항하기로 했다. 그러나 메텔루스가 켈티베리아의 사군툼을 포위하자, 세르토리우스의 군대에 복무하던 켈티베리아인들이 "우리의 도시를 구하지 않으면 떠나겠다."라고 압박했고, 그들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했던 세르토리우스는 어쩔 수 없이 사군툼을 구하러 진격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사군툼 전투에서, 앞서 파견한 페르페르나가 5,000명의 병사를 상실하고 패퇴하자, 세르토리우스가 직접 메텔루스 피우스에게 맹공을 가해 그에게 부상을 입혔다. 하지만 메텔루스는 끝까지 위치를 고수했고, 그의 부하들은 상관을 부상시킨 이베리아인들에게 맹렬하게 반격하여 몰아냈다.

메텔루스가 군대를 휴식시키기 위해 숙영지를 세우자, 세르토리우스는 병사들을 재편성한 뒤 저녁에 메텔루스의 진영을 기습 공격했다. 그러나 다른 곳에 가 있었던 폼페이우스가 나타나 역습했다. 세르토리우스는 폼페이우스의 공세를 격파하여 6,000 가량의 사상자를 입히고 폼페이우스의 처남인 가이우스 맘미우스를 죽였지만, 전투를 이어가긴 어렵다고 보고 철수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 3,000 가량의 희생자를 냈고 최측근인 루키우스 히르툴레이우스도 전사했다. 메텔루스 피우스군의 손실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 후 세르토리우스는 측근들을 각지로 보내 병력을 모집하게 하고, 자신은 클루니아 요새에 들어간 메텔루스와 폼페이우스를 포위해 공성전을 벌이는 척했다. 그러다가 병력이 모집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포위를 풀고 아군에 가세했다.

기원전 74년, 메텔루스는 갈리아에서 2개 군단을 추가로 모집한 뒤 켈티베리아와 바카아이 족의 영역으로 진격했다. 그는 적의 매복이 있을 거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병사들에게 대비하라고 명령했다. 실제로 두 부족이 산길에서 매복 공격을 가했지만, 메텔루스의 병사들은 침착하게 대처하여 그들을 격퇴했다. 한편 폼페이우스는 팔렌티아를 포위공격했으나, 도중에 세르토리우스가 달려오자 교전을 회피하고 메텔루스 쪽으로 이동했다. 이후 두 장수는 필요할 경우 서로를 지원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를 유지했다. 세르토리우스는 이에 맞서 페르페르나를 이베리아 서부 해안으로 보내 칼레 시를 점령하게 하고, 자신은 팔렌티아 성벽을 재건한 뒤 동쪽으로 진격하여 에브로 계곡으로 들어가 칼구루스 시를 포위 공격하던 로마군을 급습해 3,000명을 죽였다.

기원전 74년 말, 폼페이우스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로 이동한 뒤 원로원과 추종자들에게 서신을 보냈다. 역사가 살루스티우스가 전하는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위험과 궁핍을 견뎌왔으며, 내 휘하의 군대가 그대들의 적들을 몰아내고 그대들을 안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원로원의 아버지들이여, 내가 만약 그대들과 조국의 신들과 싸우면서 시간을 보냈다면, 지금처럼 나를 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대들은 내가 젊은데도 불구하고 가장 잔인한 전쟁에 노출되도록 했다. 그대들은 최선을 다해 나와 충실한 군대를 가장 비참한 죽음, 즉 굶주림의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것이 로마인이 아들들을 전쟁에 보낼 때 기대했던 것인가? 그리고 조국을 위해 부상을 입고 자주 피를 흘리는 이들이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그대들은 3년 동안 한 번 쓸 수 있을 정도만 공급해 주었다. 그대들은 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식량도 보수도 없이 군대를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는가?

나는 이 전쟁을 열정적으로 시작했음을 인정한다. 그대들이 내게 장군이라는 공허한 칭호를 준지 40일 만에 군대를 일으켰다. 적(페르페르나)은 이미 이탈리아의 목구멍에 있었으나, 나는 그들을 알프스에서 히스파니아로 몰아냈고, 그 과정에서 한니발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경로를 열어줬다.(중략) 수적으로 열세하고 경험이 없던 군대로 정복하고 있는 세르토리우스의 첫번째 공격을 막아냈다. 그 후 겨울을 도시가 아닌 가장 야만적인 적들 사이에서 보냈다. 내가 전투와 원정, 파괴되거나 점령된 도시들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수크로에서 적 진영을 점령하고 투리아 강에서 적 사령관 가이우스 헤레니우스를 그의 군대와 함께 전멸시켰다. 발렌티아 또한 우리의 수중에 넣었다.

아버지들이여, 이 모든 것에 대한 대가로 우리는 궁핍과 굶주림을 얻었다. 적군도 나와 같은 상황이다. 둘 다 급여가 없으며, 둘 다 그것을 얻기 위해 이탈리아로 행진할 수 있다. 이 점에 유의하고 내 경고에 주의하라. 적군이 차지하지 않은 히스파니아 키테르오르 일부는 사실 우리에게 큰 부담이 된다. 해안 도시들을 제외하면 우리와 세르토리우스 모두 이곳을 완전히 황폐화시켰기 때문이다. 갈리아는 작년에 현금과 농작물을 메텔루스에 공급했지만, 올해는 흉작이어서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대들이 하기에 달렸다. 그대들이 상황을 구하지 않는다면, 내 군대가 이탈리아에 들어가서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대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로마의 귀족들은 폼페이우스의 위협에 몹시 두려워했고, 세르토리우스가 금방이라도 로마에 쳐들어올까 봐 두려웠기도 했기에 그를 지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국고가 부족했기 때문에, 그들은 개인 재산을 모아서 폼페이우스에게 전달했다. 이후에 전개된 기원전 73년의 전역이 어찌 되었는지는 기록이 부족해서 확실히 알 수 없다. 그저 메텔루스와 폼페이우스가 이전에 세르토리우스에게 종속된 여러 도시를 점령했고 일부 도시는 무혈 입성했다는 것만 알려졌다.

한편, 세르토리우스의 측근들은 세르토리우스를 상대로 음모를 꾸몄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세르토리우스는 폭군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로마의 전우들과 함께 논의하는 걸 그만두고, 히스파니아 사람들을 억압하고, 쾌락과 사치에 탐닉했으며, 주변에서 자신을 해치려 든다고 의심하여 사람들을 해쳤다고 한다. 또한 페르페르나가 음모를 꾸민 게 밝혀져 거의 모든 공모자들이 처형되었지만, 페르페르나는 모종의 이유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한편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페르페르나가 최고 권력에 대한 공허한 욕망을 마음에 품고, 부하들에게 "로마인은 도망자 세르토리우스의 수행원 취급을 받고 있으며, 야만족은 우리를 꾸짖고 명령하고 의무를 지게 하고 있다"라고 선동했다. 이후 암살 시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자, 암살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기원전 72년, 공모자들은 세르토리우스에게 아군이 승리했다고 보고하면서 이를 기념하는 연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세르토리우스는 한동안 망설였지만 주변에서 거듭 권하자 결국 받아들였다. 연회가 한창일 때 페르페르나가 희석되지 않은 포도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바닥에 떨어뜨리자, 즉시 세르토리우스 옆에 기대고 있던 마니우스 안토니우스가 단검으로 세르토리우스를 찔렀다. 세르토리우스는 달아나려 했지만, 안토니우스는 그의 가슴에 몸을 던지고 그의 손을 잡았다. 저항할 능력을 상실한 세르토리우스는 많은 공모자들의 연이은 공격으로 결국 살해되었다. 그렇게 세르토리우스를 살해한 뒤 페르페르나가 새 지휘관에 선출되었지만, 장병들은 그동안 자신들을 잘 이끌었던 세르토리우스가 피살된 것에 불만을 품었다.

페르페르나는 자신의 집권에 반감을 드러낸 히스파니아인과 로마인을 집단 처형했고, 히스파니아 부족들은 메텔루스 피우스와 폼페이우스에게 대거 귀순했다. 이로 인해 세력이 급속도로 위축되자, 페르페르나는 적을 상대로 승리해 자신의 지도력을 입증해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폼페이우스를 향해 진격했지만, 폼페이우스는 이를 예상하고 적을 함정으로 유인했다. 10개 코호트가 페르페르나의 군대와 교전하다가 후퇴하자, 페르페르나는 적이 패주한다고 여기고 추격했다. 그러나 도중에 매복하고 있던 폼페이우스군이 들이닥쳤고, 10개 코호트는 방향을 돌려 전방에서 추격자들을 공격했다. 결국 반란군은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페르페르나는 사로잡혔다. 그는 폼페이우스에게 로마 정부 및 사회의 고위급 인사들과 세르토리우스 사이에 오간 모든 서신을 전달하겠다고 제안했지만, 폼페이우스는 단호히 거부하고 페르페르나 등 세르토리우스를 살해한 모든 자들을 처형했다.

페르페르나의 죽음으로 전쟁은 종결되었다. 세르토리우스에 가담했던 모든 로마인은 폼페이우스에게 몰려들어 자비를 구했고, 폼페이우스는 이들을 기꺼이 사면했다. 폼페이우스는 부관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와 동료 메텔루스 피우스를 히스파니아에 그대로 남겨서 아직도 저항하는 이베리아 부족들을 토벌하게 한 뒤, 자신은 로마로 귀환했다. 그는 가능한 한 빨리 로마에 돌아가서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군을 토벌해 공적을 독차지하고 싶었지만, 기원전 71년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스파르타쿠스를 꺾고 노예 반란군을 진압한 뒤였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도망치던 잔여 노예 반란군 7천 명을 섬멸한 뒤, 자기가 노예 반란을 최종적으로 마무리했다고 선언했다.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여 폼페이우스가 세르토리우스 전쟁 뿐만 아니라 노예 반란도 평정한 걸 기념하는 개선식을 거행하게 했다.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가 자신의 전공을 가로챘다며 격분했고, 이후로 두 사람은 오랜 세월 반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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