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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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로마 제국 깃발.svg 고대 로마의 내란·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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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ast_roman_mon_256.png 테오도시우스 1세 vs 파일:western_roman_mon_256.png 에우게니우스






1. 개요
2. 배경
3. 경과
3.1. 바다의 무법자
3.2. 미세눔 협약
3.3. 옥타비아누스의 전쟁 재개와 좌절
3.4. 제2차 침공
4. 이후



1. 개요[편집]






기원전 42~36년,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를 필두로 한 제2차 삼두정치파가 시칠리아를 본거지로 삼아 지중해를 지배하고 있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벌인 전쟁.


2. 배경[편집]


기원전 4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문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의 장남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의 심복이었으나 카이사르의 내전 발발 후 카이사르를 줄곧 대적했던 티투스 라비에누스가 이끄는 옵티마테스파 군대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전사했고, 옵티마테스파는 무너졌다. 폼페이우스의 차남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난 산간 지방의 부족들의 땅으로 피신했다. 카이사르는 그가 자신과 맞서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해 사면령을 내리고 귀국을 종용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부족들을 설득하여 지원을 약속받은 뒤, 카이사르가 임명한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들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먼 히스파니아 총독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에게 진압을 맡겼다. 그러나 폴리오는 섹스투스에게 연전연패하여 변장한 채 가까스로 탈출했고, 각지에서 수많은 이들이 섹스투스에게 가담했다. 그 결과, 기원전 44년 여름이 될 무렵 그에게는 6개 이상의 군단이 갖춰졌다. 게다가 그해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로마 정계가 혼란에 빠졌기 때문에, 누구도 그를 토벌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섹스투스에게 사절을 보내 로마 함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할 테니 귀순하라고 권했다. 섹스투스는 자기를 따르는 이들을 전부 함대에 싣고 마실리아로 항해한 뒤, 이탈리아의 상황을 살펴봤다.

기원전 43년 1월 무티나 내전에서 안토니우스가 패배하여 갈리아로 도피한 뒤, 원로원은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는 한편 섹스투스를 공식적으로 로마 함대 사령관으로 선임했다. 이리하여 이탈리아에 있는 모든 함대가 그의 수중에 들어갔다. 기원전 43년 8월 옥타비아누스의 군대가 로마를 점거한 뒤, 그는 카이사르를 암살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등과 함께 숙청대상 명단에 들어갔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옥타비아누스에 대항할 터전을 마련하기로 하고, 기원전 43년 12월 시칠리아 북부 해안에 상륙하여 메사나를 포위했다. 메사나 총독 아울루스 폼페이우스 비타니쿠스는 시칠리아를 그와 공동으로 통치하는 조건으로 메사나를 넘겨줬다. 섹스투스는 이에 동의하는 척했다가 곧바로 죽이고 시칠리아를 독차지했다.

이후 제2차 삼두정치의 대숙청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진 로마 귀족들이 섹스투스에게 몰려들었고, 군비 충당을 위한 가혹한 징세에 반감을 품은 시민들 역시 시칠리아로 망명했다. 또한 섹스투스는 해상 경험이 풍부한 아프리카와 히스파니아 선원들을 대거 고용해 대규모 함대를 이끌 발판을 마련했다. 이렇게 모든 준비가 끝난 뒤, 기원전 42년부터 이탈리아 본토를 상대로 본격적인 해상 공격을 개시했다.


3. 경과[편집]



3.1. 바다의 무법자[편집]


기원전 42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의 해상을 봉쇄해 식량이 해상에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또한 브룬디시움 등 여러 항구도시를 수시로 공격하여 피해를 누적시켰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퀸투스 살비우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에게 함대를 맡겨 시칠리아로 진군하게 하고, 자신은 해협을 건너기 위해 레기움으로 육군을 인솔했다. 그러나 섹스투스는 스킬리아 해전에서 살비디에누스의 함대를 격파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시칠리아-이탈리아 본토 해협에 위치한 레기움과 히포니쿠스 주민들에게 군단병들에게 토지를 내줘야 할 도시 목록에서 제외하겠다고 약속해, 그들이 폼페이우스의 군대에 호응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려 했다. 이후에도 시칠리아로 진군할 기회를 노렸지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 맞서고자 그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폼페이우스와의 전쟁을 연기하고 발칸 반도로 향했다.

필리피 전투 이후, 일부 원로원 의원들은 파르마의 카시우스 소속 부대와 함께 시칠리아로 망명했다. 또한 이오니아 해를 순항하던 해방자파 함대가 루키우스 스타티우스 무르쿠스의 지휘하에 폼페이우스에게 가담했다. 이후 페루시아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하여 투리와 코센티아를 포위 공격했고, 휘하 함대는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점령했다. 사르데냐에 주둔하고 있던 옥타비아누스 휘하 2개 군단은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했다. 한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동맹을 맺기로 하고, 안토니우스의 어머니 율리아와 만나 동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율리아는 곧장 안토니우스에게 섹스투스의 의사를 전했으나, 안토니우스는 자기를 따르는 병사들이 카이사르를 추종하던 이들인데 그와 손을 잡고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를 친다면 반발이 심할 것이라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브룬디시움 협정을 체결해 페루시아 내전을 종결하고, 옥타비아누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와 결혼했다. 이에 폼페이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협공을 받을 것을 우려해 육군을 시칠리아로 철수시켰다.

섹스투스는 이후에도 해안을 수시로 습격했으며, 곡물이 이탈리아로 오는 것을 차단했다. 이로 인해 식량 물가가 급격히 상승했고, 민중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듯 했다. 그들은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한 옥타비아누스보다는 섹스투스가 낫다고 여겼다. 기원전 40년 가을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신들의 형상이 극장에 반입되었을 때, 섹스투스의 수호신으로 여겨졌던 넵튠이 등장하자 관객들이 박수를 보냈다. 그 직후 로마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군중은 삼두정치를 이끈 세 사람의 동상을 던졌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이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군중은 그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이에 군대가 투입되어 사람들을 학살했고, 수많은 시체가 강물에 내던져졌다.


3.2. 미세눔 협약[편집]


상황이 이처럼 좋지 않자, 삼두정치파는 섹스투스와 타협하기로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의 최측근인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딸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하여 유일한 혈육인 대 율리아를 낳았다. 또한 안토니우스는 섹스투스에게 평화 협약을 맺자고 촉구하는 편지를 연이어 보냈으며, 섹스투스의 어머니 무키아 테르티아[1]도 그를 찾아와 설득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를 따르던 인사들은 고향이 그리웠기에 합의를 맺고 자신들이 돌아갈 길을 마련해달라고 촉구했지만, 메노도루스만이 사르데냐에서 편지를 보내 "배고픔이 삼두를 더 순응하게 만들 때까지 연기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기원전 39년, 섹스투스는 장고 끝에 협상에 임하기로 하고, 미세눔 해안에 함대를 끌고 갔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측근들과 함께 육지에서 마중나왔다. 하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 폼페이우스가 이집트에 상륙하다가 피살당한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에, 육지에 상륙하길 거부하고 바다 위에 두 개의 구조물을 설치하고 바다를 사이에 두고 고함을 쳐가며 협상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합의안이 도출되었다.

1. 육상 및 해상 전투 중단, 해상 봉쇄 해제.

2.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 및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소유한다.

3. 폼페이우스의 수비대는 점령한 이탈리아 도시에서 철수하고, 그의 배는 이탈리아 해안에 상륙해서는 안 되며, 가출한 노예를 받는 것도 금지된다.

4. 폼페이우스는 일상적인 관행에 따라 로마인들에게 자신의 속주에서 난 빵을 공급해야 한다.

5.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35년 집정관에 선임되며, 친구들을 통해 집정관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

6. 고귀한 망명자들은 카이사르의 살인자로 유죄 판결을 받은 자들을 제외하고 고국으로 돌아갈 권리를 얻는다. 단지 두려워서 망명했던 사람들의 경우, 동산을 제외하고 모든 재산을 반환받는다.

7. 폼페이우스 편에서 싸운 노예들은 자유인으로 인정받는다.


협정을 체결한 후, 섹스투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는 교대로 잔치를 벌였다. 섹스투스는 호화로운 배에서 손님들을 맞이해 융숭한 대접을 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이때 메노도루스가 섹스투스에게 이들을 모두 죽여 모든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해 아버지의 위업을 회복하라고 제안했다. 이에 섹스투스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맹세를 어기는 것은 메노도루스에게 적합하지만, 폼페이우스는 그렇지 않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연회 석상에서 클레오파트라 7세와 안토니우스에 대한 농담을 한창 하고 있을 때, 메노도루스가 다가와서 이렇게 속삭였다.

"제가 닻줄을 끊고 당신을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만이 아닌 로마의 통치자로 삼고자 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섹스투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메노도루스, 그대는 나한테 얘기하지 않고 먼저 그렇게 했어야 했다. 이제는 다 끝났다. 우리는 지금 이 상황에 만족해야 한다. 나는 약속을 어길 수 없다."


대숙청을 피해 섹스투스에 귀순했던 로마 귀족 대부분이 이 협정을 통해 이탈리아로 돌아갔고, 그중 다수가 안토니우스에게 가담했다. 또한 이탈리아 주민들은 드디어 평화가 성립되고 곡물을 원하는 대로 얻을 수 있게 된 것에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지 않아 깨지고 만다.


3.3. 옥타비아누스의 전쟁 재개와 좌절[편집]


섹스투스가 삼두와 화해하고 평화가 성립되게 한 것에 수많은 이가 고마워했지만, 측근들은 그가 대의를 저버렸다고 여기고 등을 돌렸다. 특히 코르시카와 사르데냐를 다스리던 메노도루스는 자신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은 그에게 실망하여 독립하려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감지하고 메노도루스를 회유했고, 그는 결국 기원전 38년 초 옥타비아누스에게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넘겨줬다. 이에 위협을 느낀 데다, 안토니우스가 "펠로폰네소스 주민들이 내게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기다리라"며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내주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자, 섹스투스는 해상 봉쇄를 재개하고 해적 행위를 다시 벌였다. 이에 사람들은 섹스투스가 자신들을 속였다며 분노했고, 옥타비아누스는 강도 여러 명을 잡아 고문한 뒤 섹스투스가 자기들을 보내 시민의 재산을 강탈하려 했다고 자백하게 했다. 그는 이를 명분으로 삼아 섹스투스와의 전쟁을 벌이기로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라벤나에서 차출한 함대를 브룬디시움에 집결시키고, 갈리아에서 군대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아테네에 있는 안토니우스에게 전갈을 보내 섹스투스를 함께 치자고 권유했다. 안토니우스는 이를 거부하고 미세눔 협약을 준수하라고 촉구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계속 밀어붙였다. 그는 이탈리아 해안의 방어를 강화하고 라벤나와 오스티아에 새로운 선박을 건조하게 했다. 함대 사령관엔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가 선임되었고, 메노도루스는 부관을 맡았다. 기원전 38년 봄, 옥타비아누스는 타렌툼에서, 칼비시우스와 메노도루스는 에트루리아에서 함대를 출격시켰다. 이들은 레기움에서 결집한 뒤 시칠리아에 상륙할 준비를 했다.

폼페이우스는 이에 맞서 메사나에 육군을 집결시키고, 함대를 메네크라테스에게 맡겨 칼비시우스를 물리치게 했다. 쿠마 북쪽 만에서 양측 함대가 격돌한 결과(쿠마에 해전), 섹스투스 측 함대가 승리했다. 그러나 메네크라테스는 도중에 메노도로스 휘하 함대와 격돌하다가 전사했고, 부관 데모카루스가 대신 지휘권을 맡아 배를 시칠리아로 되돌려놓았다. 한편,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는 메사나에 접근했다. 당시 메사나에는 40척 밖에 없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감히 공격하지 않고 칼비시우스의 합류를 기다렸다. 그러다 쿠마에 해전 소식이 들어오자, 옥타비아누스는 그와 합류하고자 북쪽으로 항해했다.

섹스투스는 데모카루스의 함대에 합류한 뒤 메사나 근처의 스킬라 해안을 따라 무질서하게 항해하던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를 급습했다.(스킬라 해전) 옥타비아누스는 싸우지 말고 계속 항해하라고 명령했으나, 적이 한 척당 두 척씩 달라붙어서 맹공을 퍼붓는 바람에 미처 피하지 못한 배들이 모조리 침몰했다. 급기야 적 함대가 자기가 탄 배 쪽으로 바짝 따라오자, 옥타비아누스는 배를 버리고 해안으로 달아났다. 그러다 늦은 오후에 칼비시우스와 메노도루스의 함대가 수평선에 나타나자, 폼페이우스 함대는 공격을 멈추고 메사나로 귀환했다. 잔여 함대를 캄비시우스의 함대에 귀속시킨 옥타비아누스는 다시 바다로 나갔으나,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폭풍으로 수많은 배를 잃고 말았다. 결국 시칠리아 공략을 포기하고 본토로 돌아간 뒤, 남부 이탈리아에 군대를 집중시키고 해안 도시의 수비대를 강화해 적의 상륙 가능성에 대응했다.

시민들은 패전 소식에 분노해 옥타비아누스를 상대로 대대적인 폭동을 일으켰다. 궁지에 몰린 옥타비아누스는 갈리아에서 활약하고 있던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를 불러들였다. 그는 이 당시 갈리아에 침입한 게르만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둬서 개선식을 거행할 자격이 있었지만, 옥타비아누스가 궁지에 몰린 것을 보고 친구를 구하는 게 우선이라고 여겨 개선식을 포기하고 로마 시에 들어갔다. 그 후 군대를 이끌고 폭도들을 모조리 제압하고 주동자들을 처형해, 질서를 확보했다. 그 후 기원전 37년 봄,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타렌툼에서 만나 새로운 협약을 체결했다. 삼두의 임기를 5년 연장하기로 했으며,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를 돕기 위해 130척의 함선을 보내기로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 대가로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필요한 2만 병력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3.4. 제2차 침공[편집]


아그리파는 새로 운 함대를 건조하고 선원들을 훈련시켜 새 원정대를 준비하는 임무를 떠맡았다. 그는 폼페이우스의 함대가 도사리는 상황에서 기존의 항구를 이용하는 건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 나폴리 만에서 루크리노 호수로 이어지는 운하를 건설하고, 다시 루크리노 호수에서 아베르노 호수로 이어지는 운하를 건설하게 했다. 이후 두 개의 호숫가에 함선들을 배치한 후 해상 훈련을 철저히 수행했다. 그 동안 나무를 빽빽하게 심어서 이러한 훈련이 적에게 노출되지 않게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임시 항구는 '포르투스 율리우스(Portus Julius)'로 일컬어졌다.

한편, 아그리파는 폼페이우스와의 해전에서 패한 원인을 분석했다. 폼페이우스의 함대는 빠른 배로 구성되었으며, 선원들은 해상 활동에 익숙했다. 따라서 빠른 기동성을 갖추고 있었기에, 치고 빠지는 전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해 적을 제압할 수 있었다. 아그리파는 이에 대응하여 여러 척의 갤리선과의 전투를 견딜 수 있는 더 크고 무거운 함선을 건조했으며, 그리스인에게서 하팍스를 빌렸다. 이 장치는 작살처럼 작동했으며, 발리스타에 의해 발사되어 배의 측면을 관통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신무기를 활용해 기동성이 뛰어난 적을 제압하기로 했다.

새 함대의 건조에는 상당한 자금이 필요했다. 원로원, 기사계급 및 기타 부유한 사람들은 자발적인 기부라는 명목으로 거액의 기부를 강요받았다. 또한 평민에 대한 세금을 늘려서 국고를 마련하고자 했다. 이에 소요가 일어났지만, 아그리파는 이를 철저하게 분쇄했다. 이렇듯 준비가 나름대로 이뤄지고 있었지만, 메노도루스는 일전처럼 패할 게 뻔하다고 여기고 7척의 배를 이끌고 섹스투스에게 귀순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칼비시우스를 경질하고 아그리파를 함대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기원전 36년 7월, 시칠리아에 대한 재공세가 개시되었다. 아프리카에서 세력을 갖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12군단과 5,000 누미디아 기병대가 탑승한 1,000척의 수송선, 70척의 전함과 함께 아프리카에서 출항했다. 또한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가 이끄는 안토니우스의 120척이 타렌툼에서 출격했으며,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는 푸테올리에서 해안을 따라 항해했다. 이에 맞서는 섹스투스는 8개 군단과 약 200척의 함대를 보유했다. 그는 레피두스의 상륙에 대응하기 위해 루키우스 플리니우스 루푸스에게 1개 군단과 보조 부대를 맡겨 릴리바이움으로 보냈다. 또한 그의 함대는 시칠리아 동부와 서부 해안, 특히 적군이 침공을 위한 준비 기지로 사용할 수 있는 에올리에 제도와 코시라를 지켰다. 한편 함대 중 가장 강력한 부대는 메사나에 예비로 남겨졌다.

레피두스는 항해를 개시한 지 사흘만에 풍랑이 거세서 많은 수송선을 잃는 상황에서도 항해를 강행해 시칠리아에 상륙한 뒤 릴리바이움을 포위했다. 반면 타우루스는 풍랑이 일자 곧바로 타렌툼으로 돌아갔으며,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는 6척의 중선, 26척의 경량 선박, 많은 갤리선을 손실하고 인근 해안에 피신했다. 함대를 정비하는 데 한달이 소요되었고 여름이 이미 끝나가고 있었지만, 이 해를 넘기면 시민들이 대대적인 봉기를 할 것을 우려해 작전을 속행하기로 했다. 실제로 로마에서는 폼페이우스 지지자들의 시위가 다시 시작되었고, 옥타비아누스는 가이우스 킬리니우스 마이케나스를 보내 질서를 회복하게 했다.

섹스투스는 옥타비아누스 함대가 폭풍으로 손상을 입었을 때 공격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대신 적을 감시하고 방해 공작을 수행하는 임무를 메노도루스에게 7척의 배와 함께 맡겼다. 그러나 메노도루스는 사령관으로 복직시키지 않고 하찮은 일이나 시킨다며 섹스투스에게 불만을 품었고, 기회를 틈타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했다. 한편 레피두스는 릴리바이움 공략에 실패하자 시칠리아의 동쪽인 타우로메니움로 향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의 대리인 메살라 코르비누스에게 2개 군단과 함께 메사나 해협 연안에서 출발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타우루스는 함대를 이끌고 타렌툼에서 재출격하여 타우로메니움 맞은편의 스킬라키 돛으로 향했다.

한편, 아프리카에 대기중이던 4개 군단이 수송선을 타고 레피두스를 향했다. 이때 폼페이우스 측 해군 사령관 파피아스가 이들을 급습해 일부를 침몰시키고 일부를 사로잡았고, 나머지는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레피두스는 이들을 돕기 위해 함대를 보냈지만 너무 늦었고, 2개 군단이 이로 인해 수장되었다. 해안까지 어떻게 헤엄쳐간 사람들도 있었으나, 폼페이우스 측 사령관 티시에누스 갈루스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는 필로리아다, 밀레, 툰다리다 해안에 폼페이우스의 함대가 집결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메살라와 타우루스에게 히포니아로 재집결하라고 명령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시칠리아에 상륙하여 타우로메니움을 점거한 뒤 레피두스와 함께 메사나에서 폼페이우스를 봉쇄하기로 했고, 아그리파는 대부분의 적 함대를 상대하기로 했다. 그러나 레피두스가 옥타비아누스의 명령을 따르길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하겠다고 통보해,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다만 아그리파가 단독으로 출격하여 에울리에 제도를 쉽게 공략한 뒤, 밀레에 주둔한 파피아스의 40척 함대에 접근했다. 섹스투스는 이를 물리치기 위해 45척의 함대를 아폴로파네스에게 맡겨 구원하게 하고, 그 자신은 70척의 함대를 이끌고 뒤따라 가기로 했다.

이후 벌어진 밀레 해전에서, 아그리파는 단 5척의 배만 잃고 30척의 적선을 침몰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섹스투스가 뒤늦게 구원하러 달려오자, 아그리파는 즉시 철수하면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폼페이우스가 메사나를 떠났으니 이제 상륙을 감행하라고 권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에 따라 3개 군단을 이끌고 시칠리아에 기습 상륙해 타우로메니움을 점령하려 했다. 메사나에 귀환한 뒤 적 수송선이 이동하고 있다는 급보를 접한 섹스투스는 즉시 그 쪽으로 진군했다. 얼마 후 타우로메니움 인근 해안가에 상륙한 옥타비아누스는 근처 언덕에 숙영지를 세웠지만, 섹스투스가 이끄는 육군이 맞은편 언덕에 자리를 잡고 해군이 바다를 봉쇄해버리는 바람에 보급로가 끊겨 버렸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육군을 루키우스 코르니피키우스에게 맡긴 뒤 함대를 이끌고 섹스투스의 함대와 격돌했으나 참패를 면치 못했고, 적군에게 사로잡힐 위기에 몰리자 공황 상태에 빠져 쪽배를 타고 달아났다. 그는 적 함대의 추격을 간신히 따돌리고 한 명의 하인과 함께 칼라브리아 해안에 간신히 상륙한 뒤, 동굴에 숨어 지내면서 상황을 살폈다.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그는 이 시기에 너무 낙담하여 하인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했으나 하인이 끝까지 거부해 무산되었다고 한다. 또한 옥타비아누스와 동행했다가 중간에 길을 잃어 헤어진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노예가 일찍이 옥타비아누스가 대숙청을 자행했을 때 살해당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옥타비아누스를 죽이려 했지만 산악지대의 사람들이 옥타비아누스를 비호해 실패했다. 그 후 옥타비아누스는 본토에서 기다리고 있던 3개 군단과 합세한 뒤, 그들을 이끌고 아그리파가 주둔한 밀레로 향했다.

한편, 코르니피키우스는 타우로메니움 근처에서 한동안 대치했지만 해상 보급이 끊겨서 식량이 부족해지자 아그리파와 합류하기 위해 북상했다. 그러나 섹스투스가 급파한 적 기병의 습격에 시달렸고, 당시 분화가 일어나고 있던 에트나 화산을 지나가면서 병사들이 탈진했다. 결국 도저히 행군할 수 없게 된 그들은 섹스투스의 육군에게 둘러싸여 포위섬멸될 위기에 직면했다. 이때 아그리파가 급파한 퀸투스 라로니우스의 3개 군단이 도착하자, 섹스투스는 포위 섬멸할 계획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코르니피키우스는 라우로니우스의 군단과 합세한 뒤, 며칠간 병사들의 원기를 회복시킨 후 아그리파가 있는 밀레로 이동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가 시칠리아에 집결시킨 군대는 최대 21개 군단, 2만 기병 및 5,000 경보병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이 병력을 이끌고 레피두스와 연합한 뒤 섹스투스가 버티고 있는 메사나를 에워쌌다. 섹스투스는 상륙군을 섬에 고립시키기 위해 적 해군을 섬멸하기로 결심했다. 기원전 36년 9월 3일, 나우로쿠스 앞바다에서 대규모 해전이 벌어졌다.(나우로쿠스 해전) 섹스투스 본인이 180척의 함대를 통솔했고, 아그리파는 그보다 더 많은 함선을 통솔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는 해전이 벌어지는 동안 해안가에 무릎 꿇고 엎드린 채 신께 기도했으며, 참모들이 도중에 군사적인 조언을 하는 것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한다.

나우로쿠스 해전 결과는 아그리파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아그리파는 불과 3척만 잃었고, 섹스투스는 28척이 침몰하고 대다수가 포획되는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섹스투스는 17척의 배만 이끌고 발칸 반도로 달아났고, 메사나에 남겨진 잔여 부대는 전부 옥타비아누스와 레피두스에게 항복했다. 그리하여 시칠리아 내전이 종결되었다.


4. 이후[편집]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자신이 시칠리아 전쟁의 승리에 큰 공을 세웠다고 자부하며, 옥타비아누스에게 대가를 받아내려 했다. 그는 섹스투스가 가졌던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코르시카를 자신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옥타비아누스는 홀로 레피두스의 군영에 찾아왔고, 레피두스의 병사들은 대부분 그의 편을 들었다. 결국 레피두스는 항복했고, 옥타비아누스는 그가 새로운 내전을 유발하려 했다고 비난하며 기존에 가지고 있던 아프리카 속주의 지배권마저 박탈했다. 다만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책만은 계속 유지하는 것을 허용했고,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는 것도 허락했다. 그 후 레피두스는 원로원에 가끔씩 얼굴을 비추는 것 외에는 은거 생활을 하다가 기원전 13년에 사망했다.

섹스투스를 따랐던 부대와 레피두스를 따랐던 병사들의 귀순으로, 옥타비아누스는 45개 군단, 25,000명의 기병, 40,000명의 경보병, 600척의 전함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군인들이 제대를 요구하면서, 필리피 전투에 참전한 이들이 받은 것과 동일한 상을 요구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일리리아 전역에 함께 가서 싸워준다면 보상해주겠다고 약속하고, 화환과 휘장을 풍부하게 배포했다. 이때 대대장 오필리우스가 외쳤다.

화환과 자주색 예복은 아이들의 장난감일 뿐이오! 군인에 대한 정당한 보상은 땅과 돈이오!"


옥타비아누스는 그 말에 분노해 연단에서 내려왔고, 오필리우스의 지지자들은 자기들 편을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역정을 퍼부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오필리우스는 다음날 사라졌으며, 아무도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군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무티나 내전필리피 전투 때 참전한 병사들을 제대시켜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폼페이우스의 지지자가 많은 시칠리아에서 대대적인 징벌 작전을 수행했다. 이에 대한 기록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지만,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비슷한 시기에 대부분의 도시가 심하게 파괴되고 종속된 토지가 황폐화되었다고한다. 디오 카시우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섹스투스의 지지자 중 원로원에퀴테스는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처벌받았다. 대열에 있는 사람들 중 자유인은 카이사르의 군대에 등록되었고, 노예는 처벌을 위해 주인에게 옮겨졌다. 주인을 찾지 못한 노예는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자발적으로 카이사르 편으로 넘어간 도시들은 용서받았고, 저항한 도시들은 벌을 받았다.


또한 시칠리아 도시들은 1,600달란트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으며, 시칠리아 5대 도시 중 하나인 타우로메니움 시민들은 추방되었다. 포에니 전쟁, 노예 전쟁에서 자주 겪었던 시칠리아의 황폐화는 이 시기에 완성되었고, 이제는 그리스와 원주민 정착지 대신 목초지가 섬 대부분을 차지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 돌아간 뒤 승리를 기념하는 기둥을 세웠으며, 섹스투스에 대한 승리의 날을 연례 휴일로 선포하고 이 해의 세금 체납을 면제시켰다.

한편, 섹스투스는 발칸 반도로 달아났다가 다시 소아시아로 이동한 뒤, 3개 군단을 모집하여 파르티아 샤한샤 프라아테스 4세와 연합하여 재기를 도모하려 했다. 그러나 기원전 35년 안토니우스에게 체포된 뒤 재판 없이 처형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시민권이 없는 무법자라고 선언했지만, 나중에 섹스투스를 재판하지 않고 처형한 것은 불법이라며 안토니우스를 비난하는 근거 중 하나로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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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폼페이우스의 세번째 아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