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스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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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스턴튼의 역임 직책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로이 킨
(1998~2002)

스티브 스턴튼
(2002)


케니 커닝햄
(2002~2005)


아스톤 빌라 FC 주장

폴 머슨
(2001~2002)

스티브 스턴튼
(2002~2003)


올로프 멜베리
(2003~2006)


스티브 스턴튼의 기타 정보





아일랜드의 축구감독


파일:S.Staunton_Retired_1.jpg

이름
스티븐 스턴튼
Stephen Staunton
출생
1969년 1월 19일 (55세)
아일랜드 던도크
국적
[[아일랜드|

아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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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신체 조건
185cm
직업
축구선수(수비수[1]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던도크 FC (1985~1986)
리버풀 FC (1986~1991)
브래드포드 시티 AFC (1987 / 임대)
아스톤 빌라 FC (1991~1998)
리버풀 FC (1998~2000)
크리스탈 팰리스 FC (2000 / 임대)
아스톤 빌라 FC (2000~2003)
코번트리 시티 FC (2003~2005)
월솔 FC (2005)
지도자
아일랜드 대표팀 (2006~2007)
달링턴 FC (2009~2010)
국가대표
파일: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02경기 7골 (아일랜드 / 1988~2002)

1. 개요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지도자 경력
5. 여담




1. 개요[편집]


아일랜드의 前 축구선수이자 축구 감독. 리버풀 FC아스톤 빌라 FC에서 활약한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잔뼈 굵은 수비수였으며, 대표팀에서는 주장을 역임하며 A매치 102회 출전으로 센츄리 클럽에 가입했다.


2. 클럽 경력[편집]



2.1. 경력 초기[편집]


아일랜드의 던토크 출생인 스턴튼은 어렸을 때부터 모든 운동에 소질을 보이며 체육인으로서 재능을 드러냈다. 이후 축구선수가 되기로 결심한 뒤 지역팀 던토크에서 축구 경력을 시작했다.


2.2. 리버풀 FC[편집]



파일:S.Staunton_Liverpool_1.jpg


1986년 9월 2일, 던도크 유스에서 뛰던 스턴튼은 20만 파운드에 잉글랜드의 명문 클럽 리버풀에 입단했다. 초기에는 바로 1군에서 뛰지 않고 리저브팀 및 브래드포드에서 임대생활을 하다가 1988-89 시즌, 토트넘과의 경기에서 인상적인 데뷔전을 치르면서 이후 1군 레귤러 멤버로 거듭나게 되었다. 당시 앨런 한센이 장기 부상으로 오랫동안 결장하게 되면서 주전 레프트백이었던 게리 아블렛이 센터백으로 출전함에 따라 기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해당 시즌에 FA컵 결승에서 숙적 에버턴을 연장 끝에 꺾고 트로피를 들어올리는데 힘을 보탰다. 이후 리버풀은 힐스버러 참사로 인해 연기되었던 아스날과의 리그 최종전을 치르게 되었는데 당시 리버풀이 아스날에 승점 3점 앞선 1위를 기록하고 있었고 두 골 이상만 실점하지 않으면 우승이 가능했으나 최종전에서 아스날에 0:2로 패하며 거짓말같이 리그 우승을 헌납하고 말았다. 결국 더블은 무산되었지만 스턴튼은 시즌 기간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우승 경쟁까지 이끌고 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다음 시즌, 스턴튼은 확고한 주전으로 발돋움하며 리버풀이 지난 시즌 아쉽게 놓친 리그 타이틀을 되찾아오는데 큰 힘을 보탰다. 그렇게 1990-91 시즌까지 활약하다가 쿼터 문제로 인해 아스톤 빌라로 이적하게 됐다.


2.3. 아스톤 빌라 FC[편집]


110만 파운드에 빌라로 이적한 스턴튼은 1991년 8월 17일, 힐즈버러에서 열린 셰필드 웬즈데이와의 데뷔전에서 득점을 성공시키며 빌라 팬들을 만족시켰다. 그는 대표팀 동료인 폴 맥그래스와 호흡을 맞추며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다. 이듬해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출범 후 첫 시즌인 1992-93 시즌에는 빌라의 상승세를 이끌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치열한 우승 경쟁을 벌이는데 도왔으나 아쉽게 2위에 머무르며 초대 우승에 실패했다.

이후에도 오랫동안 빌라의 주전 수비수로 활약하며 두 차례 풋볼 리그 컵 우승과 빌라가 중상위권 클럽[2]으로 거듭나는데 큰 기여를 했다.

2.4. 안필드로 복귀[편집]


빌라와 계약이 만료 예정이었던 스턴튼은 1998년 7월 3일, 자유계약으로 리버풀에 복귀했다. 그는 리버풀에 있는 동안 1999년 9월 27일, 안필드에서 치러진 에버턴과의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리버풀의 골키퍼인 산더르 베스터르펠트프란시스 제퍼스와 격한 언쟁 끝에 몸싸움으로 이어지면서 퇴장을 당하자 이미 교체 카드를 모두 사용한 탓에 남은 15분 동안 대신 골문을 지키기도 했다. 실점 없이 잘 마무리했지만 팀은 전반 4분 케빈 캠벨에게 내준 결승골로 인해 0:1로 패했다.

1999-2000 시즌부터는 입지가 좁아지기 시작하면서 전반기 동안 눈에 띄게 출전 횟수가 줄어들자 2000-01 시즌, 크리스탈 팰리스로 임대되어 단기간 활약하다가 리버풀에 복귀하여 2000년 11월 23일 올림피아코스와의 UEFA 컵 3라운드 1차전에서 전반 45분을 소화한 뒤 교체되었다. 그리고 이 경기가 리버풀 소속으로 치룬 그의 마지막 경기였다.


2.5. 빌라로 복귀[편집]


올림피아코스 전을 치루고 2주가 지난 2000년 12월 7일, 자유계약으로 빌라에 합류하며 또 다시 친정팀으로 복귀했다. 그는 남은 후반기 동안 14경기를 뛰었으며, 이후 두 시즌동안 주전으로 활약했다.


2.6. 코번트리 시티 FC[편집]


어느 덧 34살의 노장이 된 스턴튼은 선수 생활을 지속하기 위해 코번트리 시티에 입단했다. 그는 2005년 팀을 떠나기 전까지 75경기를 뛰었다.


2.7. 월솔 FC[편집]


2004-05 시즌을 끝으로 코번트리와 계약이 만료되자 재계약 없이 팀을 떠나 2005년 8월 2일, 월솔로 이적했다. 이전부터 노쇠화가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였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출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는지 반년간 10경기 출전에 그쳤으며, 2005년 마지막 날 치러진 블랙풀과의 경기에서 주장으로 출전하며 2:0 승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이 경기를 끝으로 20년간의 현역 생활을 마무리했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파일:S.Staunton_national_1.jpg


1988년, 4:0으로 승리한 튀니지와의 친선전을 통해 대표팀에 데뷔했으며, 이후 스턴튼은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던 잭 찰튼의 부름을 받아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선수단 막내로 합류하였다. 그는 이제 막 약관을 벗어난 어린 나이였으나 쟁쟁한 선배들을 따돌리고 주전 레프트백으로 본선 5경기를 모두 소화했다.

4년 뒤 치러진 1994년 미국 월드컵에도 이름을 올리며 이번에도 본선 기간 동안 주전으로 나서 2연속 토너먼트 진출을 이끌었다.

이후 UEFA 유로 19961998년 프랑스 월드컵은 대표팀이 본선 진출에 실패하면서 참가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그는 대표팀에서 레귤러 멤버로 뛰었다.

2002년, 대표팀이 플레이오프 끝에 이란을 꺾고 본선에 진출하면서 8년만에 월드컵에 참가했다. 본인의 3번째 월드컵인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실시한 전지 훈련 기간에 기존의 주장이었던 로이 킨이 감독 믹 맥카시와 불화를 일으키면서[3] 팀에서 퇴출당하자 그 대신 본선에서 주장으로 활약했다. 그는 본선 전 경기를 출전했으며, 조별라운드 2차전 독일과의 경기에서는 A매치 100경기 달성하면서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다. 당시 그는 아일랜드 축구 역사상 최초로 100경기를 출전한 선수였다. 이후 아일랜드가 스페인과의 16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아쉽게 패하면서 월드컵을 마무리하자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아일랜드가 올라간 3번의 FIFA 월드컵 본선에 전부 출전해 해당 대회들에서 모두 아일랜드의 주전으로 뛴 그야말로 아일랜드 축구 역사의 산 증인 중 한 명이다.


4. 지도자 경력[편집]



4.1.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편집]


2006년 초, 아일랜드가 독일 월드컵 진출에 실패한 뒤 아일랜드 축구 협회(FAI)는 기존의 대표팀 감독이었던 브라이언 카를 경질하고 새로운 감독에 스탠튼을 선임했다. 당시 FAI는 다가오는 UEFA 유로 2008 지역 예선전을 위해 세계적인 감독을 데려오겠다고 밝혔지만, 막상 지도자 경력이 전무한 스탠턴을 선임하자 팬들은 엄청난 비판을 했다. 팬들의 심정이 이해가는게 당초 세계적인 감독을 데려오겠다고 호언장담 해놓고 막상 데려온 사람이 지도자 초짜인 스탠턴이었으니.. 더군다나 당시 후보군으로 루머가 났던 감독들이 알렉스 퍼거슨, 테리 베너블스, 바비 롭슨 등 영연방 최고의 명장들이었기에 충분히 그럴만도 했다.

아무튼 스턴튼은 아일랜드 감독으로 선임이 되었으며, 3월 1일 스웨덴과의 친선경기를 통해 대표팀 감독으로 첫 경기를 치렀다. 이 날 아일랜드는 스웨덴을 3:0으로 격파하면서 축구팬들의 우려를 잠식시키며 감독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경기 후 스턴튼은 '동화 같은 이야기의 시작'이라고 밝히며 결과에 크게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5월 24일 홈에서 치러진 칠레와의 친선 경기에서 0:1로 패하며 서서히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경기 내용이 너무 무기력했기 때문에 아일랜드 축구팬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네덜란드와의 A매치를 하루 앞둔 8월 15일, 대표팀이 합숙하고 있던 호텔에서 스턴튼이 한 괴한으로부터 총기 위협을 당하면서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다행히도 부상자는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스턴튼은 네덜란드 전에 임했지만, 대표팀은 홈에서 무려 0:4로 대패하며 2연패에 빠지게 됐다. 2연속 패배로 자국 축구팬들과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선임 당시부터 말이 많았던 감독 자질론이 서서히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몰론 상대가 강팀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하루 전날 팀 호텔에 괴한이 침입하는 사고를 겪으며 멘탈이 혼란스러웠겠지만 홈에서 무기력한 대패는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결과였다.

많은 비판 속에서 스턴튼은 9월 2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치러진 독일과의 유로 지역예선에서 0:1로 패했다. 강적 독일을 상대로 선전했다고 볼 수 있지만, 3연패에 빠진 대표팀에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이 날 스턴튼은 경기 후반에 큰 좌절감을 느꼈는지 물병을 경기장으로 걷어차며 주심으로부터 퇴장 명령을 받았다. 10월 7일, 지난 경기에서의 퇴장으로 터치라인 금지령을 받으면서 스턴튼은 키프로스와의 원정 경기를 관중석에서 지켜봤다. 그리고 이 날 대표팀은 경기 내내 끔찍한 플레이를 일관하며 2:5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경기 후, A매치 4연패+키프로스전 충격적인 대패로 스턴튼에 대한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게다가 4일 뒤에 있을 체코와의 예선 3라운드에서 패할 경우 즉시 경질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올 정도로 분위기는 험악했다. 다행히 체코전에서 개선된 경기력을 선보이며 1:1 무승부를 거두면서 여론은 조금 완화되었다. 그러나 스턴튼에 대한 의구심은 여전했다.

이후 11월 15일, 최약체 산마리노를 가볍게 5:0으로 제압하면서 마침내 유로 예선 첫 승을 거두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7일, 원정에서 치러진 산마리노와의 유로 예선 5라운드에서 졸전 끝에 2:1로 간신히 승리[4]하자 다시 경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피파 랭킹 195위인 산마리노를 상대로 한 결과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턴튼은 경질 되지 않았고, 3월에 치러진 웨일스, 슬로바키아와의 유로 예선 2연전에서 모두 승리하는데 성공하며 일단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2007년 8월 22일에는 오르후스에서 열린 덴마크와의 친선 경기에서는 4:0으로 크게 승리하며 여론을 어느정도 잠재우는데 성공했다. 3월에 있었던 유로 예선 2연전을 스왑하면서 다시 본선 진출에 희망을 걸 수 있게 되자 스턴튼은 만족스러움을 표했고, 9월에 있을 본선 진출의 향방을 가르게 될 유로 예선 2연전을 앞두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9월 8일 슬로바키아전에서 90분까지 2:1로 리드하다가 종료 직전에 마레크 체흐에게 동점골을 얻어맞으며 꼬이기 시작하더니 4일 뒤 체코전에서 0:1로 패하면서 끝내 예선 탈락이 확정되었다. 이후 독일을 상대로 홈에서 1:1 무승부를 거두었지만, 웨일즈와 키프로스[5]를 상대로도 무재배를 하면서 12전 4승 5무 3패로 3위에 랭크하며 지역예선을 마무리했다. 참고로 체코와 독일이 각각 1위, 2위를 기록하며 본선에 진출했다. 유로 지역예선 기간동안 부진한 경기력으로 많은 비판을 받은 스턴튼은 끝내 10월 24일, 21개월만에 대표팀 감독직에서 경질됐다. 몰론 스턴튼 본인의 능력 부족도 있었지만, 지도자 경험이 일천한 그를 데려온 FAI도 한동안 많은 비판을 받았다. 다행히 이 때 정신을 차렸는지 후임 감독으로는 이 분을 데려오셨다.


5. 여담[편집]


  • 훌륭한 킥의 소유자였던 스턴튼은 대표팀 시절에 코너킥 키커로 나서 두 번이나 직접 골을 성공시켰다. 첫 번째 골은 1992년 6월 7일, 보스턴에서 열린 포르투갈과의 US 컵 경기였고, 두 번째 골은 1993년 3월 31일, 더블린에서 열린 북아일랜드와의 월드컵 지역예선 경기였다.

  • 19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볼캡을 착용하고 경기를 뛰었다.# 골키퍼가 아닌 필드 플레이어가 모자를 착용하는 경우는 꽤나 드문 일이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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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 포지션은 레프트백이지만 센터백도 소화했다.[2] 몰론 매 시즌마다 기복은 있었지만 강등의 문턱까지 갔던 1994-95 시즌을 제외하면 그가 있는 동안에는 대부분 중상위권에 랭크했다.[3] 당시 킨은 맥카시의 훈련 방식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했다.[4] 심지어 후반 49분까지 1:1이었다가 스티븐 아일랜드의 극장골로 간신히 승점을 챙긴 심각한 졸전이었다.[5] 심지어 홈 경기였다.[6] 골키퍼는 낮 경기시 햇빛으로 인해 시야에 방해를 받을 수 있으므로 종종 모자를 착용하고 경기에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