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티흐네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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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 프르셰미슬 왕조 11대 공작
스피티흐네프 2세
Spytihněv II

제호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
스피티흐네프 2세
(Spytihněv II)
출생
1031년
사망
1061년 1월 28일
재위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
1055년 ~ 1061년
자녀
스바토보르
아내
이다 베틴스카
형제
브르제티슬라프 2세, 콘라드 1세, 야로미르, 오타 1세 올로모우츠
아버지
브르제티슬라프 1세
어머니
슈바인푸르트의 유디트
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보헤미아 공국 프르셰미슬 왕조 11대 공작.


2. 행적[편집]


1031년경 보헤미아 공작 브르제티슬라프 1세와 노르트가우 변경백 하인리히의 딸인 슈바인푸르트의 유디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브르제티슬라프 2세, 콘라드 1세, 야로미르, 오타 1세 올로모우츠가 있었다. 1039년 독일왕 하인리히 3세의 궁정에 인질로 보내졌다가 1년 후 귀국했고, 1041년 아버지가 하인리히 3세의 침략에 버티지 못하고 복종을 서약한 뒤 재차 인질로 보내졌다.

스피티흐네프 2세가 하인리히 3세의 궁정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054년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아버지가 유언장을 작성했을 때는 보헤미아에 돌아와 있었다.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자신의 다섯 아들과 귀족들을 불러다놓고 "장자가 항상 공국의 권력과 권위를 갖고, 모든 형제와 후손들은 그의 통치 아래 복종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보헤미아는 장남 스피티흐네프 2세가 온전히 갖고, 모라비아는 세 아들 브르제티슬라프 2세(올로모우츠 지방), 콘라드 1세(브르노 지방), 오타 1세(즈노이모 지방)에게 분할되도록 했으며, 막내 아들 야로미르는 수도사가 되도록 했다.

1055년 1월 10월 아버지가 사망한 후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곧바로 하인리히 3세에게 경의를 표했고, 그로부터 보헤미아를 영지로 보유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1056년, 그는 보헤미아 뿐만 아니라 모라비아 역시 온전히 독차지하기 위해 세 형제들을 프라하로 불러들이고 그들의 영지를 회수했다. 어머니 유디트가 이를 반대하자, 그는 어머니를 국외로 추방했다. 이에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보헤미아에 계속 있다간 화를 입을 것을 우려해 헝가리로 망명했다. 또한 사자바 수도원에서 슬라브 수도사를 추방하고 라틴 전례를 수행하는 독일 수도사로 대체했다. 이후 300명의 모라비아 귀족을 흐루딤으로 소집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그들이 불응하자 군대를 보내 체포해 프라하 성채에 가둬놓고 자신에게 철저히 복종하겠다고 서약할 때까지 고문을 가했다.

1057년경 브르제티슬라프 2세가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1세의 딸 아들레타 우헤르스카와 결혼하자, 스피티흐네프 2세는 그가 헝가리군의 지원을 받고 쳐들어올 것을 우려해 1058년 도로 불러들여 화해하고 올로모우츠 영지를 돌려줬다. 1060년경 교황 니콜라오 2세에게 보헤미아 국왕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연간 100파운드를 교황청으로 보내는 대가로 주교관을 착용할 권리만 허락받았다.1061년 1월 28일에 사망했고, 동생 브르제티슬라프 2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하부 루사티아 공작 데트리치 2세의 딸 이다 베틴스카와 결혼해 외아들 스바토보르를 낳았다. 스바토보르는 수도자가 되었고, 1085년 아퀼레이아 총대주교에 선임되었으나 1년 만에 거리에서 발발한 폭동에 휘말려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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