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르제티슬라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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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 프르셰미슬 왕조 10대 공작
브르제티슬라프 1세
Břetislav I

제호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
브르제티슬라프 1세
(Břetislav I)
출생
미상
사망
1055년 1월 10일
재위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
1034년 ~ 1055년
자녀
스피티흐네프 2세, 브르제티슬라프 2세, 콘라드 1세, 야로미르, 오타 1세 올로모우츠
아내
슈바인푸르트의 유디트
아버지
올드르지흐
어머니
보제나
1. 개요
2. 행적
3. 가족



1. 개요[편집]


보헤미아 공국 프르셰미슬 왕조 10대 공작.


2. 행적[편집]


보헤미아 공작 올드르지흐와 보제나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12세기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 학장이자 연대기 작가이며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던 코스마스(Cosmas, 1045년경 ~ 1125년)에 따르면, 보제나는 시골 처녀였는데,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던 중 사냥을 마치고 돌아가던 올드르지흐의 눈에 들면서 그와 결혼했다고 한다. 1029년 노드르가우 변경백이자 바벤베르크 가문의 가죽 하인리히의 딸인 슈바인푸르트의 유디트와 결혼했다. 1031년 폴란드 대공국신성 로마 제국키예프 루스의 협공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폴란드로부터 모라비아를 탈환하길 희망한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모라비아로 진격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점령한 뒤 그곳의 행정을 맡았다.

1033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는 폴란드 침공을 돕지 않는 올드르지흐를 의심한 끝에 그를 소환한 뒤 반역 혐의로 고발해 체포한 후 바이에른으로 유배보냈다. 이후 올드르지흐에게 축출된 뒤 21년간 위트레흐트에 조용히 지내던 야로미르가 보헤미아 공작에 복위했다. 1034년 봄, 드르지흐가 콘라트 2세에 의해 보헤미아 공작에 복위했다. 콘라트 2세는 올드르지흐를 복위시키는 대신 보헤미아를 야로미르와 함께 나눠가지고, 모라비아 일대는 올드르지흐의 아들인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통치하게 했다.

그러나 올드르지흐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지배권을 형과 아들과 함께 나눠가질 생각이 없었다. 그는 부하들을 시켜 야로미르를 체포해 실명형에 처한 뒤 감옥에 갇히게 했고,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아버지를 피해 해외로 도주했다. 1034년 11월 9일, 올드르지흐가 급사했다. 이후 감옥에서 풀려난 야로미르는 일찍이 거세된 데다 눈까지 멀었기에 공작이 되기를 거부하고,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보헤미아 공작위에 선임되는 걸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보헤미아 공작이 된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1038년 폴란드 대공국이 내란과 외세의 침략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먼저 이교도를 타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폴란드로 진군하여 수많은 인명을 학살하고 철저하게 약탈했으며, 포즈난과 크루슈비차 주교구를 파괴했다. 이후 폴란드의 수도 그니에즈노를 철저하게 약탈하고 미에슈코 1세가 성당에 기증했던 금 십자가를 비롯한 수많은 귀중품과 보석을 약탈했다. <대 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그니에즈노, 포즈난, 크루슈비차는 이후로 오랫동안 버려졌으며 야생 동물들이 은신처로 사용했다고 한다.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여기에 더해 레드니카 호수 위의 섬에 있던 성과 석조 교회를 파괴했고,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한 기츠에 살던 수많은 공예가들을 보헤미아로 이주시켜 헤드차니에 정착히켰다. 이 시기에 실레시아와 소 폴란드가 보헤미아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독일왕 하인리히 3세는 보헤미아 공국이 이대로 모라비아와 폴란드를 석권해버리면 장차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려 들 거라 여기고, 보헤미아군에 쫓겨 독일로 망명한 폴란드 대공 카지미에시 1세를 돕기로 했다. 1039년, 카지미에시 1세는 하인리히 3세로부터 중무장한 독일 기사 500명과 재정 지원을 받고 조국으로 귀환했다. 여기에 키예프 루스 대공 야로슬라프 1세도 카지미에시 1세를 지원하기로 했고, 자신의 여동생인 키예프의 마리아 도브로니에가를 그와 결혼시켰다. 이후의 전쟁 과정은 전해지지 않으나, 1041년 레겐스부르크 협약이 체결되면서 보헤미아 측이 실레시아를 제외한 모든 폴란드 영토를 포기했다는 사실은 전해진다.

1040년, 하인리히 3세가 보헤미아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이에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응전에 나섰고, 양군은 1040년 8월 22~23일에 브로테크에서 처음으로 격돌했다. 당시 하인리히 3세는 식량 부족에 시달렸기에 가능한 한 빨리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로 진격하려 했고, 진군로에 펼쳐진 울창한 숲을 제대로 정찰하지 않고 강행군했다.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브로테크 숲에 매복하고 있다가 통나무와 바위로 퇴로를 막은 뒤 기습 공격을 가해 수많은 적병을 사살했다. 숲에 들어가지 않은 후위대에 있던 하인리히 3세는 어떻게든 통나무와 바위를 치우고 아군을 구조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나머지 병사들만 수습해 바이에른으로 퇴각했다. 그 후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평화 협상을 제안했지만, 이대로 전쟁이 끝나면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수 없다고 여긴 하인리히 3세는 거부하고 재차 침공했으나, 9월 22일 흘루메크 전투에서 또다시 패배했다.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재차 평화 협상을 제안했지만, 하인리히 3세는 단호히 거부한 뒤 1041년 재차 대군을 일으켜 보헤미아로 진격했다. 이번에는 국경 방어선을 우회하고 프라하에서 브르제티슬라프 1세를 포위하는 데 성공했으며, 프라하의 세비르 주교를 비롯한 많은 프라하 귀족들이 황제에게 귀순했다. 결국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10월 15일 레겐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 참석해 참회자의 예복을 입은 채 맨 발로 걸어가다가 하인리히 3세의 발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 하인리히 3세는 그를 사면하고 실레시아와 모라비아를 가지는 것을 허용하는 대신, 조공을 매년 바치고 경의를 표해야 하며, 다른 정복지는 포기하게 했다.

그 후 하인리히 3세의 충실한 봉신이 된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1042년 하인리히 3세의 오르세올로 페테르를 헝가리 국왕에 복위시키기 위한 원정에 참여해 도나우 강 북쪽 영토를 점거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3세는 점령지를 지키기에 충분한 병력을 끌고 오지 못했기에 곧 철수했고, 헝가리 국왕 어버 샤무엘은 잃어버린 영토를 탈환했다. 1043년, 하인리히 3세와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다시 공세를 개시해 라바 강까지 이르며 헝가리군을 여러 차례 격파했다. 1044년, 하인리히 3세와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3번째로 헝가리로 진군했다. 1044년 7월 5일, 제국군과 보헤미아군은 멘포에서 헝가리 귀족들이 대거 배신한 덕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어버 샤무엘은 전사했다. 하인리히 3세는 오르세올로 페테르를 헝가리 왕위에 복위시키고 헝가리 왕국을 신성 로마 제국의 속국으로 삼았다.

1046년, 폴란드 대공 카지미에시 1세가 실레시아를 되찾으려고 쳐들어왔다.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즉지 군대를 이끌고 저지했다. 이후 양자는 마이센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1050년, 카지미에시 1세가 실레시아를 재차 침공해 일시적으로 공략했다. 이에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하인리히 3세에게 "카지미에시가 자신의 정당한 영지를 침략하고 있다"고 제소했고, 하인리히 3세는 그 해 11월 고슬라르에서 카지미에시 1세를 소환해 보헤미아와 적대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 후 1054년 5월 22일 크베들린부르크 회의에서, 카지미에시 1세와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하인리히 3세의 중재하에 협상한 끝에 카지미에시 1세가 실레시아를 갖고, 보헤미아는 그 대가로 매년 은 500 그지브나(grzywna)와 금 30 그지브나를 폴란드로부터 제공받기로 했다.

1054년경, 그는 죽을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자신의 다섯 아들과 귀족들을 불러다놓고 "나이가 가장 많은 자가 항상 공국의 권력과 권위를 갖고, 모든 형제와 후손들은 그의 통치 아래 복종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보헤미아는 장남 스피티흐네프 2세가 온전히 갖고, 모라비아는 세 아들 브르제티슬라프 2세(올로모우츠 지방), 콘라드 1세(브르노 지방), 오타 1세(즈노이모 지방)에게 분할되도록 했으며, 막내 아들 야로미르는 수도사가 되도록 했다. 1055년 1월 10일 헝가리 침공을 준비하던 중 흐루딤에서 사망했고, 장남 스피티흐네프 2세가 뒤이어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3. 가족[편집]


  • 슈바인푸르트의 유디트(1003년 이전 ~ 1058): 노르트가우 변경백 하인리히의 딸.
    • 스피티흐네프 2세(1031 ~ 1061): 보헤미아 공작(1055 ~ 1061).
    • 브르제티슬라프 2세(? ~ 1092): 올로모우츠 공작(1055 ~ 1056, 1058 ~ 1061), 보헤미아 공작(1061 ~ 1085), 보헤미아 국왕(1085 ~ 1092)
    • 콘라드 1세(1035 ~ 1092): 브르노 공작(1055 ~ 1016, 1061 ~ 1092), 보헤미아 공작(1092)
    • 오타 1세 올로모우츠(1045 ~ 1087): 즈노이모 공작(1055 ~ 1056), 올로모우츠 공작(1061 ~ 1087)
    • 야로미르(? ~ 1090): 프라하 주교(1067 ~ 1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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