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르지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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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 프르셰미슬 왕조 9대 공작
올드르지흐
Oldřich

제호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
올드르지흐
(Oldřich)
출생
미상
사망
1034년 11월 9일
재위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
1012년 ~ 1033년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
1034년(복위)
자녀
브르제티슬라프 1세
아내
유타, 보제나
형제
볼레슬라프 3세, 바츨라프, 야로미르
아버지
볼레슬라프 2세
어머니
엠마
1. 개요
2. 행적
3. 가족



1. 개요[편집]


보헤미아 공국 프르셰미슬 왕조 9대 공작.


2. 행적[편집]


보헤미아 공작 볼레슬라프 2세와 엠마의 막내로 출생했다. 형제로 볼레슬라프 3세, 바츨라프, 야로미르가 있었다. 999년 보헤미아 공작에 오른 볼레슬라프 3세는 형제들을 잠재적인 정적으로 여기고 숙청을 단행하기로 했다. 1001년, 볼레슬라프 3세는 야로미르가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를 적용해 거세했다. 이후 자신까지 볼레슬라프 3세에게 살해당할 위기에 몰리자, 그는 올드르지흐 및 어머니 엠마와 함께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에게 망명했다.

1002년, 보헤미아 유력 귀족인 브르쇼프 가문이 폭정을 자행하는 공작을 몰아낸다는 명분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볼레슬라프 3세는 반란군에게 패배한 뒤 노르가우 변경백인 슈바인푸르트의 하인리히에게 망명했다. 이후 블라디보이가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의 지원으로 보헤미아 공작에 올랐지만, 1003년 1월에 사망했다. 이후 볼레슬라프 3세가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에 의해 보헤미아 공작에 복위했다.

그는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자들을 사면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곧 이를 뒤집고 브르쇼프 가문 인사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수많은 인사들이 살해당하자, 이에 반발한 보헤미아 귀족들의 반란이 각지에서 발발했다.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는 그가 폭정을 일삼아 보헤미아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자 크라쿠프로 초대한 뒤 곧바로 체포한 후 실명형에 처한 뒤 알려지지 않은 곳에 가두었다.

이후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 본인이 보헤미아를 침공하여 프라하를 장악한 뒤 공작을 맡았다. 이에 반감을 품은 보헤미아 귀족들은 독일왕이 된 하인리히 2세에게 야로미르를 왕으로 모시고 싶으니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1004년 가을, 하인리히 2세가 파견한 독일군이 폴란드군을 보헤미아에서 몰아냈고, 야로미르는 보헤미아 공작에 등극했다. 이때 올드르지흐 역시 보헤미아로 돌아갔다.

1012년, 그는 반란을 일으켜 야로미르를 축출하고 보헤미아 공작위를 찬탈했다. 그해 10월, 하인리히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 대가로 보헤미아를 다스릴 권한을 인정받았다. 1014년 브르쇼프 가문을 비롯한 야로미르의 추종자들을 집단 처형해 입지를 강화했다. 1015년,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올드르지흐에게 장남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를 비롯한 사절단을 보내 동맹을 제안했다. 하지만 올드르지흐는 이들을 모조리 체포하고 하인리히 2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후 하인리히 2세가 아버지를 위해 위험한 임무를 맡은 미에슈코 2세를 가상하게 여겨 풀어주라고 지시하자, 올드르지흐는 이에 따라 미에슈코 2세를 석방했다.

이후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가 하인리히 2세와 전쟁을 벌이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모라비아를 점진적으로 공략했으며, 1017년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의 보헤미아 침공을 격퇴했다. 또한 아들 브르제티슬라프 1세와 슈바인푸르트의 유디트를 결혼시킴으로서 당시 오스트리아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바벤베르크 가문과 동맹을 맺고 그들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아냈다. 1024년 독일왕에 오른 콘라트 2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보헤미아 지배를 재차 인정받았다.

1031년, 올드르지흐는 폴란드 국왕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와 키예프 루스 대공 야로슬라프 1세의 협공으로 인해 정신없는 틈을 타 모라비아 전역을 별다른 저항 없이 공략하고 브르제티슬라프 1세에게 모라비아 행정을 맡겼다. 그해 가을, 미에슈코 2세가 신성 로마 제국과 키예프 루스의 공세를 피해 보헤미아로 망명하자, 그는 과거에 미에슈코 2세의 아버지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가 자신의 형인 볼레슬라프 3세를 크라쿠프로 유인한 뒤 체포 후 실명형에 처했던 것을 보복하고자 미에슈코 2세를 체포한 뒤 거세했다. 대 폴란드 연대기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보헤미아인들은 그를 배신하여 붙잡은 뒤 그가 더 이상 자손을 낳을 수 없도록 그의 성기를 가족끈으로 묶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인 볼레스와프 왕이 그들의 왕자와 삼촌의 눈을 멀게 하여 그들에게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후 미에슈코는 포로 생활에서 풀려났지만 다시는 아내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올드르지흐는 얼마 후 미에슈코 2세를 석방시켜 폴란드 대공에 복위하게 했는데, 그런 조치를 내린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한편, 그는 신성 로마 제국군이 폴란드를 장악하는 걸 돕기를 거부해 콘라트 2세의 의심을 샀다. 결국 1033년, 콘라트 2세는 올드르지흐를 소환한 뒤 반역 혐의로 고발해 체포한 후 바이에른으로 유배보냈다. 이후 그에게 축출된 뒤 21년간 위트레흐트에 조용히 지내던 야로미르가 보헤미아 공작에 복위했다.

1034년 봄, 올드르지흐가 콘라트 2세에 의해 보헤미아 공작에 복위했다. 콘라트 2세는 올드르지흐를 복위시키는 대신 보헤미아를 야로미르와 함께 나눠가지고, 모라비아 일대는 올드르지흐의 아들인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통치하게 했다. 그러나 올드르지흐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지배권을 형과 아들과 함께 나눠가질 생각이 없었다. 그는 부하들을 시켜 야로미르를 체포해 실명형에 처한 뒤 감옥에 갇히게 했고,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아버지를 피해 해외로 도주했다.

1034년 11월 9일, 올드르지흐가 사망했다. 12세기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 학장이자 연대기 작가이며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던 코스마스(Cosmas, 1045년경 ~ 1125년)에 따르면, 그는 잘 차려진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던 중 급사했다고 한다. 야로미르는 그가 죽은 뒤 석방되었고, 프라하의 성 베드로 교회에서 장례를 치르게 했다. 거세된 데다 눈까지 먼 야로미르는 공작이 되기를 거부하고 올드르지흐의 아들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보헤미아 공작위에 선임되는 걸 받아들였다.


3. 가족[편집]


  • 유타(? ~ ?): 독일 영주의 딸이었고 불임이었다는 이야기만 전해질 뿐, 자세한 신상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다.
  • 보제나: 보헤미아의 시골 처녀였다. 코스마스에 따르면, 올드르지흐는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그녀가 우물에서 빨래를 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에 홀딱 빠져 궁정으로 데려오게 한 뒤 결혼했지만, 유타와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모든 사람이 원하는대로 두세 명의 아내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허용되었다고 한다. 16세기 보헤미아 성직자이자 연대기 작가 리보차니의 바츨라프 하예크(Václav Hájek z Libočan)에 따르면, 보헤미아 귀족들은 시골 처녀인 보제나가 공작의 부인이 되는 것에 반대했다. 이에 올드르지흐는 화가 나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독일 황제의 딸과 결혼하는 대신 보헤미아 농민과 결혼하는 것이 너희들에게 해를 끼쳤느냐? 각자가 공주님 앞에서 무언가를 하고 싶다면 통역사를 어디로 데려가야 하는가? 독일 공주는 자기 가족을 챙기고 싶어할 테고, 나는 너희들의 재산으로 공주의 가족들에게 풍부한 대접을 제공해야 한다. 많은 독일인들이 이를 보고 이 나라로 몰려들 것이고, 그들을 여기서 내보내는 건 어려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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