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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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학업.jpg
성명
신학업(申學業)
이명
신주극(申周極)
본관
고령 신씨[1]
생몰
1901년 12월 16일 ~ 1975년 2월 3일
출생지
경상남도 언양군 상북면 서부동
(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서부리)
사망지
부산광역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신학업은 1901년 12월 16일 경상남도 언양군 상북면 서부동(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서부리)에서 아버지 신병석(申秉奭)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석하(金錫夏)의 딸 사이의 4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17년 언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7월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마쓰시다 철공소 직공으로 일하다 10월에 귀국했다. 1918년 1월 도쿄 게이오기주쿠대학 상과 야학부에 입학했으나 1919년 3.1 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당했다. 그해 10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접촉하여 울산군에서의 국내 각 지방의 유력자, 재산가, 학교, 종교 실태 등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았다.

1920년 11월 조선으로 돌아와 언양에서 잠시 활동하던 그는 1921년 8월 11일부터 18일까지 언양청년회에서 신문화 보급을 위해 지방순회 강연대를 조직할 때 김기오, 김원룡과 함께 연사로 활동했다. 이후 1922년 일본 도쿄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입학했으며, 이듬해 7월 귀국한 뒤 1923년 9월 30일 언양청년회에서 노동야학을 개설했다. 또한 1923년 10월 언양청년회에서 언양소년회를 창립할 때 개회사를 했다.

1923년 11월 동아일보 울산지국 기자와 언양 주재 특파원을 맡은 그는 1924년 1월 4일부터 1월 15일까지 울산소작인회에서 소작인의 생활상태와 소작료를 함부로 더 받는 지주 조사를 할 때 오태영, 오덕상 등과 함께 범서면, 두동면 등 언양 서부 5개면을 시찰했다. 1924년 3월에는 언양청년회의 김기오, 그의 둘째 형 신영업(申榮業)과 함께 사회주의적 정치 운동 성격이 강한 무산자 동맹을 결성하였다. 1927년에는 언양농민조합 집행위원장이 되었으며, 1928년 3월 신간회 울산지회 창립 임원을 맡았다.

1928년 4월 6일 언양에서 언양기생조합 설립 반대회를 조직하여 성명서를 발표하는 일에 관여했다가 주동자 이동관, 울산청년동맹과 농민조합단체 위원인 형 신영업, 오문영, 이규강 등과 함께 부산지방법원 검사국에 소환당해 취조를 받았다. 언양기생조합 설립 반대사건으로 징역 6개월을 구형받았으나 1928년 9월에 벌금 50원을 선고받았다.

1928년 5월 신간회 울산지회 대표위원을 맡았고, 그해 12월 신간회 울산지회 간사를 맡다가, '언양소년회 불온문서 사건'에 연루되어 언양청년동맹 집행위원장으로서 조사를 받았다. 1929년 1월 신간회울산지회 상무 간사와 정치문화부 간사를, 6월에는 신간회 복대표회의 중앙위원을 맡았다. 1930년 5월 근우회 울산지회에서 활동하던 김수봉(金守奉)과 결혼했으며, 1931년 4월 신간회 양산지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1931년 11월 언양의 서부, 동부, 남부, 어음리의 통도사 소작인 대표를 맡아 양산 통도사를 방문하여 4개 조건의 개선을 요구했다. 4개 조건을 다음과 같다.

첫째, 소작료를 생산량에 비례하여 정할 것.

둘째, 소작료 운반을 10리 이내는 소작인이 무임운반하되 초과할 경우 통도사가 운임을 부담할 것

셋째, 지세(地稅)의 전부를 통도사가 부담할 것

넷째, 취산(鷲山)농업장려회를 설립하지 말 것.


이에 대해 통도사는 첫째는 거부하고 둘째와 셋째는 수용하고, 넷째는 보류하겠다고 답했다. 또한 1931년 12월에는 경남 언양지방에 소유답 1200여 두락에 소작료 1천여 석을 징수하는 서울의 송모 지주가 가혹한 소작료를 징수하자 300여 명의 소작인의 원성이 높자 언양농민조합 대표로서 경고했으나 무시당했다. 1932년 2월 언양농민조합 신춘간담회에서 임시집행부 의장을 맡아 지세의 지주 전액부담, 소작료, 소작권 이동, 소작료 운반, 소작인 무료 사역 등의 문제에 대해 토의를 하였다.

그러다 1932년 5월 메이데이 격문 첨부 사건으로 신학업과 이동계는 검거되고 7일의 구류 처분을 받았다. 그러다 다시 1932년 7월 가택수색과 문서차입을 당하고 이동계는 석방되나, 그는 다른 사건에 연루되어 부산으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때 전병건(全秉健) 등이 신학업을 구출하기 위해 양산경찰서를 습격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었고, 조사과정에서 전병건의 집에 숨겨두었던 비밀서류가 압수되어 사유재산제를 부인하고 일제로부터 독립을 목표로 하는 조선공산당 재건협의회의 조종을 받은 경남적색농민조합건설 동부위원회 조직책이 드러났다. 신학업은 이 문서에서 울주군 조직책을 담당했음이 밝혀졌다.

이 일로 재판에 회부된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고, 1935년 5월 9일 만기 출소했다. 이후 조용히 지내던 그는 8.15 광복 후 거창군인민위원장으로 활동하다 미군정에 의해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후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뗀 그는 부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5년 2월 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신학업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0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정은공파 24세 우(雨) 항렬. 족보명은 신학우(申學雨). 고령 신씨 대동보에는 본명 학업(學業)이 그의 자(字)라고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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