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국당/역대 전당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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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제1차 전당대회 겸 국회의원 선거 필승 전진대회
3. 제2차 전당대회
4. 제3차 전당대회
5. 제4차 전당대회



1. 개요[편집]


신한국당의 역대 전당대회에 대한 문서.


2. 제1차 전당대회 겸 국회의원 선거 필승 전진대회[편집]


1996년 2월 6일 신한국당은 제1차 전당대회 및 국회의원 선거 필승 다짐 전진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전당대회에서는 당명을 기존의 민주자유당에서 ‘신한국당’으로 변경하는 당헌 개정안과 대통령 중심제 지향∙국민화합정치 등을 담은 강령 및 기본 정책을 통과시키고 제2창당의 새 출발을 선언했다. 또한 신한국당은 15개항의 핵심과제를 담은 국회의원 선거공약 ‘국민과의 약속’을 채택했다.

개정된 당헌 제2조 목적 조항에는 역사 바로 세우기와 민족 정통성 확립, 그리고 안정 속의 개혁을 명확히 기록했다. 전당대회 의결을 통해 신한국당의 당규는 7개항으로 재정비됐고, 당헌 또한 여성의 참여 기회 확대, 고문단의 격상, 사무처 기능 강화, 중앙상무위 부의장단 보강, 이북도민위원회의 지위 격상 등을 주요 내용으로 정비되었다. 이러한 당헌∙당규 상의 개정 내용은 신한국당의 기본 정책에 반영되어 5개였던 주요 정책 영역이 7개로 늘어났다.


3. 제2차 전당대회[편집]


1997년 7월 21일 이회창이 신한국당의 15대 대선의 대선 후보로 지명된 전당대회다. 7월 2일 총 7명의 후보자가 입후보한 가운데 7월 5일 경기도를 시작으로 총 12개 권역을 순회하며 실시된 합동연설회를 마친 후의 전당대회였다. 전국 1만 2,400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2차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이회창 후보가 6,992표를 얻어 4,622표를 얻은 이인제 후보를 누르고 제15대 대통령선거 신한국당 후보자로 선출되었다.

15대 대선의 신한국당 경선은 17대 대선한나라당 경선과 마찬가지로 성공적으로 흥행했는데, 다수 후보의 출마, 광역별 합동연설회, 접전 등으로 인해 국민적 관심을 모으며 소기의 성과를 이뤘다. 다만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 문제가 불거지면서 20대 대선과 비슷하게 후보교체론이 이때에도 일어났다. 여기에다 이인제가 이인제 방지법을 낳게 만든 경선 불복과 대통령 선거 독자 출마를 공식 선언하고 탈당했다. 결과적으로 이로 인해 대한민국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4. 제3차 전당대회[편집]


1997년 9월 30일,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지지부진해 당에 혼란이 많자 이보다 앞선 9월 24일에 김영삼 총재가 이회창 대표를 중심으로 뭉칠 것을 당부하면서 총재직을 사퇴했고 대구실내체육관에서 전당대회가 열렸다. 김영삼 대통령을 명예총재로 추대하고 이회창 대통령 후보를 새 총재로 선출하여 새로운 총재 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당헌∙당규를 개정하여 지도체제를 단일지도체제에서 9인 이하의 최고위원을 두는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했다. 이에 따라 이회창 신임 총재는 이한동 고문을 대표최고위원으로 지명하고 전당대회에 참석한 대의원 9,735명의 동의를 얻었다. 이로써 신한국당은 이회창 총재-이한동 대표의 집단지도체제로 정비되었다.


5. 제4차 전당대회[편집]


1997년 11월 21일 신한국당은 민주당과의 신설 합당을 최종 의결하고, 같은 자리에서 연이어 합당 전당대회를 개최해 신설 정당 한나라당으로 공식 출범했다.

이것은 같은 해 11월 7일 신한국당 이회창 총재와 민주당 조순 총재가 당 대 당 통합 원칙에 의한 연대, 대통령 후보 단일화, 당명과 당헌∙당규의 통합, 3김 정치 청산 범국민추진위원회 구성 등 4개 항에 합의하며 전격적으로 합당을 선언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신한국당과 민주당의 합당은 대통령 선거 정국이라는 정치적 환경으로 인하여 신속하게 전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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