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포 발론체리 (r2020030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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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포 발론체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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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루이지 체베니니
(1925~1927)

아돌포 발론체리
(1927~1930)


움베르토 칼리가리스
(1931~1934)



파일:Milan.png
AC 밀란
감독(1대 ~ 3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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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C 나폴리 감독
기술 위원회
파일:SSCNapoli.png
9대
아돌포 발론체리

파일:SSCNapoli.png
10대
안토니오 보야크
1939년

1939년~1940년

1940년~1943년

AS 로마 역대 감독
풀비오 베르나르디니
(1949~1950)

아돌포 발론체리
(1950)

피에트로 세란토니
(1950)

파일:Adolfo Baloncieri.jpg
이름
아돌포 발론체리
(Adolfo Baloncieri)
생년월일
1897년 7월 27일
사망년월일
1986년 7월 23일
국적
파일:이탈리아 국기.png 이탈리아
출신지
알레산드리아
포지션
인사이드 포워드
신체조건
182cm / 77kg
등번호
-[1]
소속팀
알레산드리아 (1919-1925)
토리노 FC (1925-1932)
코멘세 (1932-1933)
알레산드리아 (1943-1944)
국가대표
47경기 / 25골 (1920-1930)

감독
코멘세 (1932-1933)
AC 밀란 (1934-1936)
노바라 칼초 (1936-1937)
리구리아 (1937-1939)
SSC 나폴리 (1939-1940)
리구리아 (1940-1942)
알레산드리아 (1942-1945)
AC 밀란 (1945-1946)
치아소 (1946-1947)
UC 삼프도리아 (1947-1950)
AS 로마 (1950)
치아소 (1951-1952)
US 팔레르모 (1954)
UC 삼프도리아 (1958)
치아소 (1961-1962)
1. 생애[2]
1.1. 어린 시절
1.2. 선수 생활
1.3. 이후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3. 뒷이야기
4. 수상
4.1. 클럽
4.2. 국가대표
4.3. 개인


1. 생애[3]



1.1. 어린 시절


발론체리는 알레산드리아 지방의 카스텔체리올로에서 태어났다. 9살 무렵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 건너가 12년을 보냈고 아마추어 축구 선수인 형 마리오의 영향으로 축구와 인연을 맺었다.

1.2. 선수 생활



1.2.1. 클럽


1차 대전이 끝나고 1919년 이탈리아에 돌아온 발론체리는 고향팀 알레산드리아에 입단했고, 카를로 카르카노[4]와 같이 뛰게 되었다.
첫 시즌에는 북부 리그 준결승에 오르는 데에 만족해야 했고, 다음 시즌에는 결승에 갔지만 프리마 카테고리아[5] 우승팀이 될 프로 베르첼리에 밀려 프리마 카테고리아에는 나가지 못했다. 계속 이렇게 팀이 우승에 거리가 먼 모습을 보이자 발론체리는 결국 1925년 토리노 FC로 팀을 옮기게 되었다.
발론체리는 이적하자마자 적응기 없이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되었고, 다음 시즌에선 훌리오 리보나티 등과 호흡을 맞추며 파괴적인 공격력을 선보였다. 결국 꿈에 그리던 프리마 디비시오네 우승을 차지했지만 이 우승은 알레만디 스캔들로 박탈되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다음 시즌에는 논란없이 우승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토리노는 1929년에도 프리마 디비시오네에 진출했지만 여기서는 볼로냐에 발목을 잡혀 준우승에 머무르고 말았다.
1932년 그는 토리노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코멘세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마지막 불꽃을 태웠고 리그 통산 316경기 출전, 169골의 기록을 남겼다.

1.2.2. 국가대표팀


발론체리는 1920년 5월, 네덜란드를 상대로 국가대표팀에 데뷔하였다. 그리고 곧 올림픽 3경기에 참가하였고 이집트를 상대로 골도 넣었다.
그 이후 발론체리는 2번의 올림픽에 더 참가했다. 특히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는 주장으로 참가, 5경기 6골의 훌륭한 활약을 펼치며 이탈리아 축구계에 동메달을 안긴 1등 공신이 되었다.
발론체리는 이탈리아 국가대표로 47경기에 출전[6], 25골의 득점 기록을 남겼다. 이것은 주세페 메아차가 돌파하기 전까지 이탈리아 대표팀 내 최고 득점 기록이었으며 현재도 필리포 인자기, 알레산드로 알토벨리와 함께 공동 6위에 랭크되어 있다.

1.3. 이후


1931 시즌부터 발론체리는 토리노 FC의 플레잉 코치로 감독 준비를 시작했다. 코멘세를 거쳐 1934년부터 AC 밀란에서 2년 반을 보냈다.
노바라 칼초, 리구리아의 감독직 이후 SSC 나폴리의 소방수로 투입되었지만 한 시즌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경질되었고 1942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고향팀 알레산드리아에서 감독직을 수행했다.
여러 팀에서 감독직을 수행하던 발론체리의 리그 최고 기록은 UC 삼프도리아를 이끌고 1948-49 시즌에 기록한 5위였다.
발론체리는 1962년 스위스의 치아소에서 마지막 감독 임기를 마쳤고 1986년 폐렴으로 숨을 거두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공격형 플레이메이커로서 빠르고 재능 넘치는 선수였다. 또한 우아하고 창의적이며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한 패스에도 능했다. 레나토 카살보레는 아르헨티나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익힌 축구와 이탈리아의 게임 방식이 결합해서 그런 플레이를 펼치게 된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축구 원로 기자 잔니 브레라는 생전에 발론체리를 주세페 메아차, 발렌티노 마촐라 등과 동급의 플레이메이커로 놓았고 카를로 키에사도 그를 역대 최고의 레지스타라 할 순 없어도 최고 중 한 명이라고 평했다.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세트 플레이, 행동을 취할 때의 판단력, 슛, 드리블, 싸움, 전진, 가끔은 경이로운 골까지 말이다.

프랑코 오솔라 주니어

발론체리 자신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의 행동에도 영향을 준다.

il primo vero, autentico regista del nostro calcio(우리 축구 최초의 진정한 감독) 중에서

그는 조작하는 감각, 운동의 인지, 위치 선정의 직관, 슈팅의 속도[7]

를 갖고 있다.

안토니오 기렐리

특이한 걸음걸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가 보통 생각했던 뒤쪽 위치에서 슈팅을 하곤 했고, 수비수들의 속을 끄집어내었으며, 볼터치는 공격을 이끌어내고 전진을 연출한다.

비토리오 포초


3. 뒷이야기


  • 발론체리가 1927년 스위스를 상대로 기록한 득점은 이탈리아 대표팀의 통산 100번째 득점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골을 포함해 해트 트릭을 기록하며 이탈리아의 5대1 대승을 이끌었다.

4. 수상



4.1. 클럽


  • 프리마 디비시오네 우승 1회: 1927-28(토리노 FC)
  • 프리마 디비시오네 준우승 1회: 1928–29(토리노 FC)

4.2. 국가대표



4.3. 개인


  • 토리노 FC 명예의 전당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출처: 위키피디아, 11v11[4] 카르카노는 나중에 유벤투스의 감독이 되어 전설적인 세리에 A 5연패를 이끈다.[5] 세리에 A의 전신.[6] 그 중 28경기는 주장으로 출전했다.[7] 슈팅 타이밍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