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스타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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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아오스타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Principe Emanuele Filiberto, Duca d'Aosta


파일:Emanuele_Filiberto,_II_duca_d'Aosta.jpg

출생
1869년 1월 13일
이탈리아 왕국 제노바
사망
1931년 7월 4일 (향년 62세)
이탈리아 왕국 토리노
재위기간
아오스타 공작
1890년 1월 18일 ~ 1931년 7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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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사보이아카리냐노 가문
이름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비토리오 에우제니오 알베르토 제노바 주세페 마리아
Emanuele Filiberto Vittorio Eugenio Alberto Genova Giuseppe Maria
아버지
아마데오 1세
어머니
마리아 비토리아 달 포조
형제자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루이지 아메데오
배우자
엘렌 도를레앙 (1895년 결혼)
자녀
아메데오, 아이모네
종교
가톨릭
군사 경력
임관
토리노 왕립 사관학교
복무
이탈리아 왕국 육군
1905년 ~ 1931년
최종 계급
원수 (이탈리아 왕국 육군)
병과
보병
참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군 경력
2.3. 전후
3. 가족
4. 기타



1. 개요[편집]


이탈리아 왕국의 왕족이자 군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차남 아메데오 왕자의 장남으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사촌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이탈리아 왕국군 육군 제3군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1869년 제노바에서 초대 아오스타[1] 공작 아메데오 왕자와 그의 부인 마리아 비토리아 달 포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듬해에 부친이 스페인 국왕 아마데오 1세로 옹립되면서 스페인으로 이사하였고 이때 잠시나마 아스투리아스 공 칭호를 받았으나, 극도로 불안정한 스페인의 정치 상황에 질린 아마데오 1세는 3년 만인 1873년에 퇴위하고 이탈리아 토리노로 돌아가면서 스페인 왕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다. 이탈리아로 돌아간 후에도 본래 부친이 왕으로 옹립되기 전에 수여받았던 아오스타 공작 작위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역시 이탈리아로 귀국하여 이탈리아의 방계 왕족으로 성장하였다.

1884년 사관학교에 입학하면서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고, 1890년 부친이 사망하자 증조부 카를로 알베르토 국왕이 부친에게 수여했던 아오스타 공작위를 습작했다. 사촌동생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즉위 직후에는 1904년 움베르토 왕태자가 태어날 때까지 잠시 이탈리아 왕국의 1순위 왕위계승권자가 되었다.[2]

2.2. 군 경력[편집]


1906년 나폴리 군단 군단장으로 임명되어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까지 나폴리에서 근무하였다.

이탈리아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이 가시화되자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침공에 투입될 병력을 집결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전쟁이 발발하자 제3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이손초 전선에서 제3군을 지휘하였다. 그의 군대는 제6차 이손초 전투에서 이탈리아 왕국군고리치아를 점령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카포레토 전투 중에는 우디네가 동맹국에 의해 점령되면서 제3군이 포위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독일 제국군이 포위 기회를 놓치고 주춤하는 사이 무사히 철수하는 데 성공하였다. 카포레토 전투 후 전투 패배의 책임으로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된 루이지 카도르나의 후임 사령관으로 임명되는 것이 거론되었으나, 실제 임명되지는 않았고 아르만도 디아츠가 후임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3]

이후에도 종전 때까지 제3군 사령관으로 복무하여, 피아베강 전투에서 제3군을 지휘하였다.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는 피아베 강 하구로부터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진격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전쟁 중 여러 차례의 성공적인 지휘로 불패의 공작(Duca Invitto)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3. 전후[편집]


1926년 피에트로 바돌리오 등과 함께 이탈리아 왕국군 원수 칭호를 받았다.

1931년 사망하였고, 유언에 따라 사보이아 가문의 왕실 묘당인 수페르가 성당(Basilica di Superga)이 아닌 그가 지휘하던 제3군 소속 전몰자들이 안장된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주의 레디풀리아 군인묘지(Sacrario militare di Redipuglia)에 안장되었다. 아오스타 공작위는 장남 아메데오가 습작했다.

3. 가족[편집]


1895년에 루이필리프의 장손이자 프랑스 왕위 요구자인 파리 백작 필리프의 차녀 엘렌 도를레앙[4]과 결혼, 슬하 2남을 두었다.


파일:Emanuele_Filiberto_with_his_family.jpg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일가
왼쪽부터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장남 아메데오, 엘렌, 차남 아이모네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아오스타 공작 아메데오
(Amedeo di Savoia-Aosta, duca d'Aosta)
1898년 10월 21일
1942년 3월 3일
안 도를레앙[5]
슬하 2녀
2남
토미슬라브 2세
(Tomislav II)
1900년 3월 9일
1948년 1월 29일
그리스와 덴마크의 이리니[6]
슬하 1남

장남 아메데오는 이탈리아 공군 장교로 복무하였으며 1931년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가 사망한 후 공작위를 습작하였다. 1937년부터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의 총독으로 재임하였으나 1941년 연합군이 에티오피아로 진군하면서 포로가 되어 케냐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수용 생활을 하던 중 1942년 병사하였다. 딸만 둘을 둔 탓에 왕실살리카법으로 인하여 공작위는 동생 아이모네가 습작했다. 장녀 마르게리타는 카를 1세의 차남 로베르트 대공(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동생)과 혼인해 3남 2녀를 두었고, 로베르트의 장남 로렌츠 대공은 벨기에 국왕 알베르 2세의 딸 아스트리드 공주와 혼인하여 벨기에의 방계 왕족 자격으로 벨기에에 거주하고 있다.

차남 아이모네는 스폴레토 공작으로 서임되었으며, 이탈리아 왕립 해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1941년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괴뢰 국왕 토미슬라브 2세로 잠시 추대되었으나, 왕위만 수락하였을 뿐 크로아티아로 가는 것은 거부하고 버티다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크로아티아 왕위를 포기하였다. 아이모네의 사후에는 그의 외아들 아메데오(1943~2021)가 공작위를 습작하여 5대 공작이 되었고, 현재는 아메데오의 아들 아이모네(1967~)가 6대 공작으로 있다.


4. 기타[편집]


  • 같은 이름의 조상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공작에 버금갈 만큼 전장에서 맹활약을 펼쳤다.[7]
  • 왕족인 탓에 제1차 세계 대전을 다룬 자료 등에서 작위인 '아오스타 공작'만으로 호칭되거나, 타 유럽 국가에서는 자국어식의 변형된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잦다. 가령 독일어로는 Emanuel Philibret(에마누엘 필리베르트), 프랑스어로는 Emmanuel-Philibert(에마뉘엘필리베르)로 불린다.
  • 제2차 세계 대전기 이탈리아 해군의 경순양함인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두카 다오스타 함은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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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오스타가 있는 발레다오스타는 시조 움베르토 1세 이래로 사보이아 가문이 세습해온 영토였다.[2] 다만 어디까지나 추정상속인이었기에 사보이아 가문의 확정상속인이 받는 피에몬테 공(Principe di Piemonte)과 같은 작위는 받지 않았다. 이후로도 사망할 때까지 왕위계승 서열 2위를 유지하였다.[3] 이에 대해 이탈리아어 위키백과에서는 만일 전쟁의 패배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퇴위하여 당시 13세에 불과했던 움베르토 왕태자가 국왕으로 즉위할 경우 왕위계승서열 2위였던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가 섭정이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는 추측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어 위키백과에는 전쟁으로 인해 상승한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의 인기로 인해 왕위가 위협받을 것을 염려한 결정이었다고 설명되어 있다.[4] 포르투갈 국왕 카를루스 1세의 왕비 아멜리의 여동생이자,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외할머니 루이즈의 언니다. 한때 조지 5세의 형 앨버트 왕세손의 연인이기도 하였으나, 종교적 문제와 부친의 반대로 결별하였다.[5] 루이필리프의 고손녀로, 루이필리프의 차손 로베르의 손녀다. 어머니인 이자벨이 아메데오의 어머니인 엘렌 도를레앙의 여동생이므로 아메데오와는 어머니 쪽으로는 사촌(이종사촌), 아버지 쪽으로는 6촌이 된다.[6] 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의 차녀로 엘리자베스 2세 전 영국 여왕의 남편 필립 공,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 왕자비 등과 친사촌이다.[7]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공작은 '철의 머리(Testa di ferro)'라고 불렸는데 그의 뛰어난 무예와 공적 덕분에 붙은 별칭이었다. 실제로 제8차 이탈리아 전쟁에서 스페인령 네덜란드 주둔 스페인군을 이끌고 프랑스를 상대로 완승을 거두어 카토캉브레지 조약이 체결되는데 공헌했고, 이 조약으로 부친 카를로 2세가 잃어버린 사보이아 공국을 되찾아 토리노로 천도하고 이탈리아화하여 사보이아 공국이 이탈리아를 통일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