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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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력을 갖기 전까지
1.1. 초기 생애
1.1.1. 고향
1.1.2. 친부모와 카이사르와의 혈연
1.1.3. 어린 시절
1.2. 내전기
1.2.1. 옥타비아누스의 등장
2. 제2차 삼두정치와 원로원파 숙청
3. 황제
3.1. 아우구스투스, 프린켑스, 제정의 성립
3.2. 두 번의 헌법 조정 조치, 제국으로의 변신
3.2.1. 1차 조정 헌법
3.2.2. 2차 조정 헌법
3.3. 프린키파투스(원수정)의 속사정
3.4. 행정적 재편성, 대외 관계
3.4.1. 원로원 위원회 편성
3.4.2. 속주 통치 개편
3.4.3. 군 감축
3.4.4. 근위대 창설
3.4.5. 항구적인 해군 창설
3.4.6. 재정 및 세금 체제
3.4.7. 영토 확장
3.5. 화폐 개혁
3.6. 황제 숭배
3.7. 부자세습과 죽음


1. 권력을 갖기 전까지[편집]



1.1. 초기 생애[편집]



1.1.1. 고향[편집]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Gaius Octavius Thurinus). 고향에 대해서는 그가 로마 출신이지만 아버지의 고향인 벨리트라이(Velitrae)로 가서 자랐다는 이야기와 본래 벨리트라이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훗날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정적이었던 안토니우스로부터 증조부가 빵집을 운영했다고 비난을 받았다. 또한 안토니우스처럼 옥타비아누스의 정적인 가이우스 카시우스 파르멘시스는 옥타비아누스가 빵집의 손자이며, 그의 할머니는 더러운 손으로 거칠고 추접스러운 밀가루를 반죽했다고 조롱했다.[1]

그가 태어난 해는 정확하다. 키케로와 가이우스 안토니우스가 집정관이던 해인 기원전 63년 9월 23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어머니는 마르쿠스 아티우스 발부스[2]와 율리아(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누이)의 딸 아티아였다. 친모 아티아는 카이사르의 조카딸이니,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조카 손자(종손)가 된다.

로마에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벨리트라이는 조그마한 소도시로 이탈리아 라치오 주 벨레트리(Velletri)를 가리킨다. 이곳은 훗날 아우구스투스의 회고록에 나와있듯이 그의 집안[3]이 대대로 살았던 동네라고 한다.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로마에서 '소의 머리'라 불리는 곳[4]이 태어난 장소라고 한다. 이때 그의 아버지였던 옥타비우스에게 점성가는 "아이를 들에 버려야 하오."라고 경고를 했다고 한다.[5] 그러나 옥타비우스는 이런 경고를 무시하고 아들을 키우기로 했다고 한다.

로마 시내가 북적거려 사람들로 넘쳐나자 그의 가족들은 어린 옥타비아누스를 데리고 로마를 떠나 아버지의 고향인 벨리트라이로 옮겼고, 어린 옥타비아누스는 거기서 자랐다.


1.1.2. 친부모와 카이사르와의 혈연[편집]


아버지는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였다. 정적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내전 당시, 옥타비아누스를 경멸조로 "그의 증조부는 투리움에서 밧줄을 만들어 팔던 해방 노예, 조부는 환전상, 아버지도 환전상."이라고 문구를 쓰고 네거티브 전략을 펼쳤지만 이는 로마 시대 관보를 통해 완벽한 거짓 선동임을 확인할 수 있다.[6] 직계인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후손들은 분명 노부스 호모였지만, 아우구스투스의 부친의 8촌뻘 되는 옥타비우스 분가 사람들은 일찌감치 로마로 진출해 집정관을 여러 차례 지낼 정도로 출세했다. 따라서 로마 사회에서 옥타비우스 가문이 완전한 무명 가문은 아니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역시 마찬가지인데, 안토니우스 측의 주장과 달리 아우구스투스의 증조부는 2차 포에니 전쟁 당시인 기원전 205년경 시칠리아에 주둔한 아이밀리우스 파푸스 휘하 대대장으로 복무하며 로마군 장교로 활동한 행정관료였다. 이는 아우구스투스의 할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도 마찬가지인데, 그는 지방행정관으로 근무하면서 수입이 상당했고 아주 장수했다. 또 아우구스투스가 투리누스라고 불린 시절 자란 벨리트라이 근교에는 조부 소유의 시골 대저택이 있었다고 하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존속할 당시까지도 아우구스투스가 아기 시절 지낸 방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배경에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본가 옥타비우스 가문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이는 친아버지에 대해 기록한 부분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내 친부는 벨리트라이 태생의 오래되고 부유한 기사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옥타비우스 가문에서 최초로 원로원에 진출했다."라고만 간략히 기록했다.

친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부유한 기사 가문 태생으로, 태어날 때부터 부와 명예를 누렸던 부잣집 도련님이었고 풍요 속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이는 그토록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혐오한 수에토니우스가 황실 비서관으로 있으면서, 뒷조사를 철저히 하여 황제에게까지 보고한 내용이라고 하니 신뢰할 만 하다. 그의 주장처럼 아우구스투스 친가의 재산은 증조부 이전부터 환전상이나 고리대금업자, 세리 등을 할 정도로 많은 돈이 필요한 집안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부친은 먼친척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의 후손들과 달리 본인 대에 와서야 뒤늦게 원로원에 편입된 신참자(노부스 호모)였다. 그는 법무관을 지낸 뒤 마케도니아 총독을 지냈으며, 스파르타쿠스의 옛 잔당들이 점령했던 투리움 지역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마케도니아 총독을 지내면서도 성공적으로 통치를 했다. 속주민 통치에 대해 단호하고 공정하게 통치를 했고, 트라키아의 베시아인들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기도 했으며, 동맹 부족과의 외교 문제에 대해서도 잘 대처했다. 이 증거는 키케로가 자신의 동생 퀸투스의 무능함을 질책하면서 쓴 편지에 나타나있다. 편지에는 "제발 마케도니아 총독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에게 동맹 부족들을 외교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배워라."라고 써 있었다고 한다.[7] 하지만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집정관 직에 출마해보지도 못하고 40세가 되기 전에 로마 귀환 중 횡사했다. 그는 두 번 결혼했고 세 명의 자녀를 얻었는데, 앙카리아와의 사이에서 대 옥타비아를, 두 번째 결혼으로 맞이한 아내 아티아와의 사이에서는 소 옥타비아와 아우구스투스를 얻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친모인 아티아는 카이사르의 조카 딸이기도 하지만, 명문가인 발부스 가문 출신이다. 이 가문은 아리키아 출신이고, 많은 원로원을 배출한 집안인데 그녀의 아버지 발부스[8]는 법무관을 거쳐, 율리우스 법에 따라 캄파니아 토지를 평민들에게 분배해 주는 20인 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또한 아티아의 외가는 율리우스 씨족 중 하나인 카이사르 집안이며, 외삼촌이 바로 그 유명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에게 카이사르는 굳이 혈연상으로 따지면 외외종조부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국내외 로마사 저서들에서는 이런 단어가 비표준이고, 굳이 무리해서 쓸 이유도 없어 집필, 번역을 할때 카이사르를 외종조부라고 표기 중이다.[9]

그는 카이사르 암살 후 그의 유언에 의해 율리우스 씨족의 일원이 되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되었지만, 카이사르와 이름이 같았기 때문에 보통 옥타비아누스라고 불렸다.[10]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격파하고 로마로 귀환한 이후에 그가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은 뒤에는 그냥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렸다.[11]

개신교에서 널리 사용되는 개역한글판, 개역개정판 [12] 성경에서는 '아구스도'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는 그리스어에서 속격으로 되어 있는 Αυγουστου(Augoustou)를 음역한 것이다.[13]

1.1.3. 어린 시절[편집]


친가 자체가 아버지 대에 와서야 원로원 의석을 갖게 된 것을 보면 그는 평민 출신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실만큼이나 옥타비아누스의 어린 시절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제정 시대 로마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본가의 근거지 벨리트라이에서 집안 어른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투리누스'로 불렸다고 한다. 투리누스라는 이름은 이탈리아 남부 마그나 그라이키아의 옛 도시인 투리움(투리이라고도 함)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데, 수에토니우스는 옥타비우스 가문이 옛 고향을 기억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라는 것과 옥타비아누스의 아버지가 그 근처에서 노예 반란을 진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함이라는 두 가지 설을 전한다. 이는 훗날 매부이자 정적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를 비하할 때 일부러 '투리누스'라고 한 것에서 다시 살펴볼 수 있다고. 이 외에도 수에토니우스는 아우구스투스를 뒷조사하면서, 벨리트라이 근교에서 소문으로 돌고 있던 아우구스투스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로 불린 시절의 청동상을 찾아냈다고 자랑스럽게 언급했다. 이때 그는 자신이 발견해,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바친 아기 투리누스 청동상이 아우구스투스의 부친 가이우스 옥타비우스가 만들었고 여기에는 "투리누스"로 적혀 있었다고 한다. 이때 이는 가품이 아닌 진품이라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의 어린 시절 청동상을 소중히 간직하면서 자신의 침실에 모셨다고.

자세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지만 로마에서 태어났다가 벨리트라이에서 영아기를 보내고 다시 로마로 돌아와 성장한 것 같다. 그러다가 4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어머니인 아티아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14]와 재혼하자 의부(義父)인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밑에서 양육되었다. 필리푸스는 영향력 있는 아버지를 두었고, 본인도 집정관을 지낸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로서[15] 의붓아들인 옥타비아누스도 아버지를 여의긴 했어도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12세 때 외할머니이자 카이사르의 누이인 율리아의 장례식 때 추도 연설을 했다. 그 이후, 로마에서 성년으로 보는 16세가 되던 해에는 외외종조부 카이사르의 아프리카 전쟁 개선식에서 나이가 어려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훈장을 받았다. 이어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과 싸우기 위해 히스파니아[16]로 떠날 때, 동행하여 원정에 참전했다.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중병을 앓고 있다가 반절쯤 회복된 상태에서 소규모의 호위대만 이끌고 종조부 카이사르를 쫓아가 합류했는데, 카이사르는 이때 옥타비아누스가 보여준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다. 이들의 원정길은 바다에서 배가 난파되어 적들이 둘러싸고 있는 육로를 따라가는 험한 코스였는데, 약골에다 병에서 완쾌되지 않은 소년이 올바른 성품에 말을 타고 적들과 대치하는 원정길에서 군말없이 견디고 놀라운 투지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자신의 조카 손자를 히스파니아 속주를 탈환하고 다키아인에 맞서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일 계획을 세우기에 앞서 일리리아 지방의 아폴로니아로 보냈다. 거기에서 옥타비아누스는 그리스 문학을 공부하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1.2. 내전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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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옥타비아누스의 등장[편집]


옥타비아누스가 오늘날 크로아티아에 위치한 그리스계 도시 아폴로니아로 유학을 가기 전, 카이사르는 군사적인 재능이 결여된 옥타비아누스를 위해 재능 있는 18살의 동갑내기 군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17]를 붙여줘 함께 유학보냈다. 이들은 카이사르 막사에서 만나, 히스파니아에서부터 아폴로니아까지 갔고, 유학 기간 내내 함께 밥을 먹고 자며 지냈다. 따라서 둘은 금방 친해졌는데, 아그리파 특유의 솔직담백한 성격과 성실함은 어릴 때부터 예민하고 쉽게 친해지기 어려운 옥타비아누스조차 마음의 문을 열게 했다.

아폴로니아 유학 시절인 기원전 44년은 아우구스투스로 불릴 옥타비아누스가 후일 회고한 것처럼 본인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시절로 기억될 시간이었다. 그는 일리리쿰과 달마티아 내 카이사르군 훈련 참관, 아폴로니아 유학 생활을 아그리파와 함께 하면서 그곳에서 병법, 그리스어 수업 등을 배웠다. 이 시기, 그는 카이사르가 내려 보낸 파르티아 원정 고위 지휘관 신분이었고 아그리파는 그 수행원이었다. 그러다가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에서 온 카이사르 측근들의 긴급서한을 받고, 외종조부 카이사르가 암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 그에게 전해진 또 다른 소식은, 외할머니의 남동생 카이사르가 생전에 작성한 유언장 안에 그를 양자로 입양해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모든 것을 줬다는 이야기였다. 이는 로마 근교의 이탈리아 서민 가문 출신에 불과한 소년이 법적으로 파트리키(patrícĭi)가 되고, 엄청난 수의 클리엔테스들을 거느리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실 옥타비아누스는 이전까지는 외할머니 율리아 카이사리스의 친혈육이라는 이점과 어머니 아티아가 공화정 시대의 평민귀족 중 권력가 집안 출신이라는 점 외에는 이름난 귀족 가문들과는 친인척 관계가 거의 전무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의붓아버지 필리푸스가 누나 소 옥타비아의 신랑으로 30대 초반의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를 데리고 와서, 그 약점이 약간이나마 해소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18살의 옥타비아누스에게 있어 미래의 원로원 입성과 사회적 성공에는 확실한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따라서 18살에 불과한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는 본인이 외종조부 카이사르의 후계자이자 양자가 되었음을 전달받은 순간, 이탈리아 귀국을 결심한다. 이때 주변 군관들은 이런 그에게 암살 정국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만류했다. 이는 로마에 있던 어머니, 의붓아버지도 비슷해 이들은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에게 일단 카이사르파의 보호를 받으며 조용해질 때 귀국하라고 조언했다. 그렇지만 이런 주변의 태도는 이성적인 옥타비우스 투리누스가 볼 때, 더 빨리 귀국해야겠다는 결심을 서게 했다고 한다. 그는 카이사르파 군관들에게 아버지를 죽인 암살범들에게 복수할 시간이라는 의지를 드러내면서 아폴로니아에서 이탈리아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그는 친구 아그리파와 극소수의 수행원만 데리고 비무장 상태에서 이탈리아로 출발했다. 그렇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 시작이었고, 실제 옥타비아누스는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조직해둔 군대를 언제라도 로마로 보낼 채비를 끝마친 상황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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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리온(Caesarion, 왼쪽)과 그리스계 이집트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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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암살

보통 로마 귀족들의 후계자 입양은 전형적인 방법상 3가지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첫번째 방법은 재혼하면서 아내가 데리고 온 아이를 의붓아들이자 양자로 키우다가, 본인이 죽기 전 법적 친양자로 입양해 가문을 통째로 주는 형태가 있다. 이 문서의 주인공 아우구스투스가 아내가 첫 결혼에서 얻은 큰아들 티베리우스를 입양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이런 경우보다 많이 쓰인 방법은 본인과 혈연상 연결된 조카, 종손, 처조카 등을 일찌감치 입양하거나 딸이 있을 경우에는 사위로 삼아 그에게 가문 전체를 오롯이 물려주는 것이었다.[18] 이때 양부모가 영아기, 유아기 아이를 입양하는 형식의 경우에는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의 예처럼, 양부모가 남편의 누나 혹은 여동생의 아들 중 한명을 양자로 맞이하기로 아이 부모와 약속하는 방법을 사용하거나,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외조부 예시처럼 본인에게 딸이 있는데 그 딸이 재혼할 경우에는 외손자를 양자로 삼아 물려주는 방법을 많이 사용했다. 이런 방법도 없는 경우, 사용된 것으로는 본인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혈통 좋고 인척 관계가 훌륭한 가문' 아이를 데리고 오는 방법이 있었는데, 이는 콜린 맥컬로가 역사적 고증을 통해 만든 마스터스 오브 로마에서 나오듯이 엄청난 돈을 양자를 보낼 가문에 지불해야 됐다.

따라서 로마사 연구자들은 카이사르의 아우구스투스 양자 입양과 유언장을 통한 공개 발표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표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는 일반적인 로마귀족들의 입양과 비슷하면서도 카이사르 특유의 방법이 많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다만, 두 가지 부분에서 로마사 연구자들은 카이사르가 아우구스투스를 후계자로 선정한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이었다고 추정한다.

첫번째 이유는 정치적 논리를 배제하고, 현실적으로 볼 때 카이사르와 가장 가까운 남자혈육이 누나의 외손자인 옥타비아누스였다는 점이다. 가장 유력시 되었던 가문의 후계자는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였지만, 그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현실이 카이사르에게 뼈아픈 약점이었던 것은 유명했다. 그래서 카이사르로서는 로마 귀족들의 관습, 전통, 분위기상 본인의 혈육이면서도 사회적 상황상 부모 중 한쪽만 노빌레스, 파트리키에 속한 옥타비아누스를 입양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이었다고 유추가 가능하다고 한다.

두번째 이유는 로마귀족들의 입양 중 유언장을 통한 공개 방식이 많았다는 점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내전이 발발해 혼란한 상황에서 이런 통보 방법이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 모두에게 무척 유용해 내린 결정이었다는 현실이다.

사망 당시 (정치인으로서 젊은 나이인) 50대였던 카이사르의 나이를 감안해볼 때, 카이사르가 은퇴를 염두에 두고 후계자를 골랐다기보다는 10년~20년 앞을 내다 보고 후계자를 선정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는 카이사르가 여러 이유 중 옥타비아누스 양자 발표를 왜 유언장에 넣었는지 대충 추정할 수 있다. 카이사르는 여러 번의 결혼에도, 아들이 없었다. 그는 죽기 전까지 결혼생활을 해온 아내 칼푸르니아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얻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끝내 아이를 갖지 못했다. 즉, 카이사르에게는 외동딸 사후 공식적으로 로마법상 인지를 통해 인정받은 아들도, 딸도 전무했다. 카이사리온은 정식 혼인 관계에서 태어난 아들도 아니고 카이사르가 공식적으로 자신의 아들임을 인정한 적도 없었기에 공식적이고 법적인 아들로 인정받지 못했다. 즉 혼외 아들 내지 스캔들로 친아들로 의심받는 아이로 취급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그래서 그는 옥타비아누스에게도 전달된 유언장 내용 안에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에 대한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더욱이 카이사르의 유일한 혈육이며 외동딸인 율리아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폼페이우스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임신해, 출산하다가 요절했고 아이마저 태어난 직후 죽어 카이사르에게는 외손자도 없었다. 따라서 카이사르로서는 살아생전 작성해두는 유언장을 통해,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면서 누이의 손자인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의 유일한 약점이 될 부분을 해결해줬다고 충분히 해석이 가능하다. 혈통적 색채가 더 강하면서도 출세 지향적 측면에서는 보수적으로 변한 프린키파투스 체제의 절정기인 서기 1세기 말~2세기 초를 생각해보면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외조부가 부계가 갈리아 신흥귀족인 외손자를 위해 비슷한 행동을 취했는지 생각해보면, 이는 카이사르가 쌈박하게 결정한 창조적인 방법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카이사르의 이런 행동은 종국적으로 율리아의 손자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에게 큰 힘이 됐다. 일개 '신참자' 평민 가문에서 로마에서 손꼽히는 귀족 가문인 율리우스 가문의 양자로 입적하게 하고, 그에게 카이사르 가문의 상속자이자 아들로 삼은 것은 단순한 귀족을 넘어 그를 포플라레스와 카이사르파의 거두인 양아버지 카이사르의 정치적 후계자로까지 그 후광을 남겼던 것이다. 이를 위해 카이사르는 본인 이름으로 시민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도록[19] 유언했다.

따라서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는 이탈리아에 귀국한 뒤, 로마에 도착한 직후 친양자 입적에 필요한 모든 조치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입양이 최종적으로 완료됐을 때, 그는 전체이름을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바꿨다.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양자라는 굴레를 벗고자, 본인을 늘 카이사르라고 부르고 이를 주변에게도 당연히 부르게 요청했다.[20]

따라서 이 유언장과 양자 입양 완료를 위한 노력을 통해, 18살의 옥타비아누스는 귀국 직후 카이사르파의 새로운 구심점이 되었고, 가장 충성심이 많은 카이사르의 군단병들의 지지를 단번에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21] 한편 카이사르는 사후 원로원에 의해 신으로 추존되었고, 옥타비아누스는 하루 아침에 원로원 의원의 아들 내지 평민의 아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가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신의 아들이 되었다.[22] 당연한 말인데, 옥타비아누스는 적어도 기원전 42년 전후로는, 외종조모로 카이사르의 아내인 칼푸르니아를 "신격 카이사르의 아내이자 카이사르의 어머니"로 선전해, 카아사르파의 집결에 힘을 쏟았다.[23][24]

옥타비아누스가 후계자로 지명되었다는 사실은 카이사르가 죽고 나서 공개되었는데, 내심 카이사르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고 있던 안토니우스는 크게 실망했다.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전쟁 당시 군단장으로 복무했고, 내전 때부터 독재관 시절까지 카이사르 다음의 2인자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으며 18세의 옥타비아누스와는 쌓아온 커리어가 비교가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는 카이사르의 아내인 유덕하고 수줍음 많은 칼푸르니아에게서 유언장 공개에 앞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열쇠, 재산, 카이사르의 모든 개인 서류를 받고 카이사르의 외종손 옥타비우스 투리누스 등의 안전도 담보해달라는 요청까지 직접 받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카이사르 장례식 날, 유언장을 직접 확인하고 읽은 당시의 안토니우스는 "웬 애송이가 끼어들어서 내 자리를 채가냐?"는 생각, "칼푸르니아가 남편이 지명한 양자를 위해 연기를 하고, 나를 속였다."는 생각 등으로 인해 인간적 배신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추정은 나중에 드러나듯이 사실일 확률이 높은데,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카이사르의 마지막 아내 칼푸르니아에게 어떤 선전 홍보도 하지 않고, 옥타비아누스의 유언장 집행 요청도 묵살하듯 냉소적으로 대했다.

이런 안토니우스의 행동은 그가 카이사르 고참병들에게 절대적 지지 내지 안정을 위한 지지를 받지 못한 이유가 됐다. 칼푸르니아는 바람끼 많은 카이사르에게 매우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아내로, 고참병과 민중들에게 지지를 받았던 귀부인이었고, 종신독재관 시절 카이사르는 자신의 아내 칼푸르니아를 율리우스 가문 전체의 시조와 연결됐다는 비너스로 묘사해 선전할 정도로 카이사르파의 또 다른 구심점 중 하나였을 정도로 그 상징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더욱이 그녀가 정신을 차린 직후, 가문의 모든 것을 싸들고 카이사르의 유언장 집행과 이들 부부에게 어쨌든 '아들'인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보호를 요구했다는 것을 안토니우스가 쌈박하게 처리하지 못한 사실까지 알려져, 이는 고스란히 안토니우스에게 치명타가 됐다. 이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군인, 파벌의 리더로서 그 카리스마와 용맹함이 뛰어남에도, 저평가받은 배경 중 하나가 됐다. 더욱이 이런 안토니우스의 태도는, 종국적으로 상관 카이사르의 안목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는 조롱을 받게 했다. 그는 비록 죽음을 막지는 못했지만, 후계자 하나만큼은 정말 제대로 골랐던 것이다.[25]

당시 집정관이던 안토니우스의 실망감과 충격은 충분히 이해된다는 평을 듣고 있다. 먼저 그는 혈연적으로도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외삼촌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서 배출한 거물 중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어깨를 나란히 할 대정치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더욱이 그는 카이사르 최대의 업적으로 로마인들에게 평가받은, 갈리아 전쟁을 수행한 장군 중 한명이고 카이사르의 내전에서도 그 두각을 나타낸 카이사르파의 핵심 인사였다.

하여튼 이런 저런 이유로 큰 충격을 받은 안토니우스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카이사르의 유산을 옥타비아누스에게 주는 것을 거부했다. 이는 상술했듯이 여러 선택지 중 최악을 선택한 결과로 고스란히 돌아왔다. 칼푸르니아의 요청, 카이사르의 '아들' 옥타비아누스에게 대한 매몰찬 태도와 무시 전략 등은 카이사르의 군단병들을 등돌리게 했고, 로마 민중들의 비난을 받게끔 만들었다. 설상가상 그의 아내 풀비아가 그동안 벌인 행보까지 문제가 되면서, 이런 안토니우스의 행동은 합리적으로 판단하겠다는 이들까지도 일부 등을 돌리는 악수가 됐다.

이렇게 상황이 흘러가자, 숨을 죽이고 있던 키케로,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 등 원로원파는 카이사르의 '아들'로 정계에 등장한 18세 소년을 이용해, 일타쌍피 전략으로 안토니우스를 몰아내려 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공화정 체제를 분명 위협한 카이사르와 젊은 귀족들로 구성된 카이사르파를 아무 것도 모르는 것으로 보여진 카이사르의 '아들'을 분란 소재로 던져, 이번 기회에 일망타진하고 싶어했다. 카이사르파 핵심인사 중 데키무스 브루투스 같은 암살자를 제외한 골수 카이사르파도, 핵심 원로원파 멤버인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를 장인으로 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26]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처럼 가문과 자신의 운명을 놓고 숨죽이는 젊은 귀족들이 득실거리는 카이사르파 내 대부분 인사들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대립만 벌어지면 내분으로 와해될 것 같았다. 당시 안토니우스와 키케로의 관계는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는데, 안토니우스가 군대를 보내어 키케로를 납치해와라든가, 키케로의 집을 불태우라고 명령하기까지 했지만 여러 사람들이 만류하여 중지시켰다. 그런 증오 관계와 카이사르라는 상징의 지지 기반을 통한 정치적 야심은 이런 미묘하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로마 정계를 먹구름 끼게 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4월 20일 나폴리 근교의 쿠마이 내 고급별장에 머물던 키케로에게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제발로 찾아와 조언을 구한 것은 천운과 같았다. 18살에 불과한 미소년이 동갑내기 시골촌놈 아그리파 같은 볼품없는 친구 몇명과 소수 호위대를 이끌고 왔으니, 62살에 접어든 키케로는 이런 옥타비아누스와 그 친구들을 보고 확신을 가졌다. 따라서 키케로는 이 만남을 가리켜 “그 청년(옥타비아누스)은 찬양되고 명예를 얻다가 내동댕이쳐야할 자였다”고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했다.

이렇게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와 결합했고, 옥타비아누스에게 붙어 신랄한 비판과 훌륭한 라틴어 문법을 동원하며 당대 최고의 라틴어 교과서 정석답게 안토니우스 탄핵 연설을 한다. 그러나 이는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오판 이었다. 키케로는 지인과의 편지에서 '푸에르(애송이) 정도는 갖고 놀 수 있을 것'이라 이야기했고, 원로원 연설에서도 "이 애송이를 적당하게 이용해먹고 구실을 붙여 내쫓자!"라고 얘기했지만 정작 조종당한 것은 옥타비아누스보다 한참 나이가 많았던 키케로였다. 18세에 불과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답게 키케로를 아버지라고 부르기까지 하며 존중을 했는데, 그에게도 노회한 정치인 키케로는 안토니우스를 제거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는 키케로가 선수를 칠 기미가 있기 전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의 딸 세르빌리아와 약혼하면서 공개적으로 키케로와 정치적 이별을 선언해버린다.

키케로의 정적 세르빌리우스는 키케로 입에서 "미치광이(homo furiosus)"라는 단어가 튀어나오고, 일기 안에도 그 분노를 표출한 그 사건[27]의 당사자로, 키케로 입장에선 배신자와 같은 족속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원로원파였다가 카이사르파가 된 대표적인 카이사르파 지지자였기 때문에, 쿠리오, 폴리오, 클라우디우스 네로, 레피두스 같은 젊은 귀족 청년들과는 차원이 다른 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와 그 측근들을 애송이, 촌놈 등으로 멸시하면서도 로마 귀족 특유의 분위기에서도 제대로 한방을 먹은 셈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옥타비아누스는 1년 6개월간 질질 끌어온 정식입양절차가 끝나자마자 세르빌리우스 쪽과 손을 잡아버리면서, 약혼과 결혼을 분리해 정식 결혼을 진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재밌는 사실은 키케로 입장에선, 배신일 수도 있지만 애시당초 키케로는 원로원파였고, 카이사르를 계승한 옥타비아누스는 민중파의 추대를 받았으니 이 배신은 사실상 예고된 것일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28] 웃기는 건 키케로 본인은 그야말로 자신들이 유리한 순간이 오면 옥타비아누스를 배신할 거라고 사실상 공언하고 다녔으면서 정작 옥타비아누스가 자신들을 배신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 했던[29] 건데, 옥타비아누스는 쇼타임이 오기 전까지는 키케로를 아버지라 부르면서 전혀 딴 마음을 품고 있지 않은 척 위장하였으나 정작 그 순간이 오자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순식간에 배신해 버렸고 아버지라 부른 키케로를 처형하는 것에 대해 입 싹 씻고 묵인했다.[30]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귀환 후 유산을 받아 양부 카이사르의 유언을 집행하게 된다.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군대를 이용해 압박해오자, 안토니우스는 신변의 불안을 느끼고 갈리아 키살피나[31]로 도망친다.


2. 제2차 삼두정치와 원로원파 숙청[편집]


원로원은 집정관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아울루스 히르티우스를 보내고, 거기에 옥타비아누스에게 최고 지휘권을 주어[32] 안토니우스를 공격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무티나 내전에서 안토니우스는 패배했지만, 히르티우스와 판사는 전사했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단독으로 군대의 최고 지휘권을 갖게 되었다. 두 집정관이 하필 둘 다 전사한 것에 대한 음모론이 있는데, 대표적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안티" 수에토니우스는 그의 저서에서 "이 집정관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등에 칼맞아 죽었다"고 서술한 바 있다. 즉, 지휘권을 독점하기 위한 물밑 작업이라고 수에토니우스는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수에토니우스의 이러한 주장을[33] 현실성이 전혀 없다고 보고 있는데, 타키투스를 비롯한 좀 제대로 된 로마 시대 역사가들은 이에 관해 전혀 기술하지 않아 교차 검증이 안되고 있다. 또, 판사와 히르티우스는 심지어 옥타비아누스가 귀국했을 당시 제일 먼저 그를 만나기 위해 뛰어간 카이사르의 절친들이자 동지들이었고[34],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를 방해하려고 할 때마다 조언을 해주었던 인물들이 바로 이들과 다른 카이사르의 측근들, 그리고 저 유명한 카이사르 군단의 군단장들과 백인대장들이었다. 그러한 조언자이자 자신의 정치적 후원자를 단순히 지휘권을 이유로 살해한다는 것은 카이사르에 심취해서 나이도 어린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하는 카이사르파의 지지를 완전히 상실하게 만드는 행위이다.

어찌되었던 안토니우스가 패배하자 원로원은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군대의 지휘권을 넘기려 했는데 당시 원로원에게 있어서 당면 과제는 안토니우스를 몰아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파의 적에 가까웠는데도 원로원이 그를 지지했던 것은 순전히 그를 이용해 안토니우스를 몰아내는 데 이용하기 위해서였고,[35] 키케로가 원래 지지하려 했던 것은 당연히 브루투스를 비롯한 반 카이사르파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군대 지휘권을 이용해 거꾸로 원로원을 압박해 집정관[36] 자리를 얻어낸다.

결정적으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화해해 다시 원로원의 뒤통수를 친다.[37] 안토니우스에 이어 역시 카이사르파였고 히스파니아 총독이었던 레피두스까지 연합해 옥타비아누스는 제2차 삼두정치를 성립시킨다. 성립 즉시 '삼두'는 원로원파 척결 명령을 내린다.[38] 수백의 사람이 희생당했으며, 그중에는 키케로도 포함되어 있었다.[40]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명부를 작성하는 비밀 회의에서 옥타비아누스는 키케로의 숙청을 이틀간은 맹렬히 반대했으나, 꼭 죽여야 한다는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의 주장에 밀려 3일째에 양보하고 말았다.[41][42] 특히 탄핵 연설을 쓴 키케로의 손은 따로 잘려 안토니우스의 분풀이 대상이 된다.[43]

2차 삼두정치를 시작한 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병력을 이끌고 그리스로 건너가 공화파였던 브루투스 일파회전을 치르게 된다. 첫 교전에서 옥타비아누스는 대패하였으나 두 번째 싸움에서 안토니우스가 대승하여 승리를 거머쥐게 된다. 그 결과 브루투스는 자결하고 삼두정치 일파들은 최고 권력자가 된다.(해방자 내전)

그 뒤 삼두정치파들은 영토를 나누어 가졌는데 안토니우스는 부유한 동방을 선택했고 필리피 이전부터 자신의 세력권이었던 갈리아에 대한 권리도 인정받았다.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로부터 히스파니아를 가져왔고 필리피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본국을 지켰던 레피두스는 북아프리카에 대한 권리만이 인정받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시칠리아 섬은 폼페이우스의 아들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동방에 있는 틈에 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슬쩍 가져와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영토를 휘하에 두었다.[44] 이탈리아는 명목상 공동 관리 구역이었지만 실제로는 옥타비아누스가 실권을 잡았다. 하지만 코앞의 시칠리아를 장악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숙청을 피한 공화파, 안토니우스파 등이 옥타비아누스를 심하게 견제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옥타비아누스는 삼두정 성립에 큰 공을 세운 카이사르파 군단병에게 보상을 제공하는 골치아픈 일도 떠맡았다. 이탈리아의 토지가 이미 소유주가 있어 옥타비아누스는 군단병의 불만을 감수하거나 로마 시민의 토지를 빼앗고 민간인의 불만을 사느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결국 후자를 선택하여 시민과 원로원의 여론이 급격히 악화된다.

이렇듯 옥타비아누스가 맡은 지역은 상황이 안 좋았는데 설상가상으로 안토니우스의 아내였던 풀비아가 로마에 남아 안토니우스의 추종자들의 리더 역할을 하며 옥타비아누스를 견제하였다. 사실상 공화파의 숨통을 끊은 주역도 안토니우스였으며, 반대로 옥타비아누스는 대패하는 등 아무런 역할을 못했기 때문에[45] 안토니우스의 정치적 영향력은 그가 동방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내에서 여전히 강력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러한 풀비아의 방해 공작을 참지 못했고, 결국 그는 정략 결혼했던 풀비아의 딸 클로디아 풀크라[46] 이혼한 뒤 풀비아가 로마의 지도자가 되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러자 풀비아는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로마를 빠져나와 이탈리아 내의 안토니우스 추종자들과 연합해 옥타비아누스와 이탈리아 내에서 전쟁을 하려 들었다. 이때 풀비아는 안토니우스의 동생이었던 집정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연합하여 6개의 군단을 동원하여 대항한다.(페루시아 내전) 옥타비아누스는 이들을 상대하면서 꽤 고전했지만[47] 시민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지지를 얻은 군단병들의 도움으로 풀비아와 루키우스를 이탈리아 북부 페루자로 몰아넣는 데 성공했다. 풀비아와 루키우스는 포위된 상황에서도 안토니우스의 지원을 기다리며 저항했지만 안토니우스는 동방에서 미적대며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48]. 기원전 40년 초, 옥타비아누스는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여 루키우스를 사면했지만 풀비아는 결국 그리스로 쫓겨난 뒤 의문사했다. 안토니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일시 귀국해 브린디시를 포위했지만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양측의 부하들이 싸우는 것을 거부, 결국 40년 9월 브린디시 협정을 통해 두 사람은 화해했다. 이 때 옥타비아누스의 갈리아 지배가 공인되었고 레피두스는 안토니우스가 이끌던 6개 군단을 받아 북아프리카로 쫓겨났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나 옥타비아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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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투스 폼페이우스(Sextus Pompeius Magnus Pius, BCE 67년 – BCE 35년)

이로써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의 지배를 공고히 했으나 아직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시칠리아에서 건재한 상태였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지중해 제해권을 완전히 지배하여 이탈리아 내의 곡물 수송을 끊으며, 옥타비아누스를 위협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가 상대하기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세력이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세력을 인정하고 대신 폼페이우스의 처제인 스크리보니아[49]와 결혼을 함으로써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스크리보니아는 딸인 율리아를 낳았는데 율리아는 옥타비아누스의 유일한 혈육이었으며 훗날 아그리파와 결혼해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대 아그리피나를 낳았고, 대 아그리피나게르마니쿠스의 아내가 되어 칼리굴라소 아그리피나를 낳았으며, 소 아그리피나는 네로를 낳았다.

하지만 이러한 결혼은 단지 옥타비아누스가 폼페이우스에 대항할 세력을 모으기 위한 시간 벌기용이었으며 결국 어느 정도 힘이 생기자 스크리보니아와 이혼하고 폼페이우스와 전쟁을 선포한다.(시칠리아 내전) 전쟁 초기에는 폼페이우스의 우월한 해군력에 휘둘리며 옥타비아누스 본인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여기서 안토니우스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는데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120척이나 되는 선단을 보내온 것이었다. 이는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에게 2만 명의 군단병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믿은 것이었는데 옥타비아누스는 전쟁이 종료되자 고작 약속한 병력의 10분의 1인 단 2천 명만 보냈다. 안토니우스의 지원 덕에 아그리파가 이끄는 옥타비아누스 해군은 나우로쿠스 해전에서 폼페이우스를 격파하였고 이로써 시칠리아를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다.

이때 삼두정치의 한 명이었던 레피두스는 예전에 했던 약속대로 자신이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를 통치하겠다고 하였고 옥타비아누스에게 시칠리아에서 나가라고 하였다. 이때 레피두스도 상당한 양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하였고 폼페이우스와의 대결 때도 같이 싸웠다. 이에 대응하여 옥타비아누스는 대담하게도 레피두스의 캠프에 직접 들어가 장교와 병사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권유한다. 그러자 이들은 모두 레피두스를 배반하였으며, 이에 레피두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하고 그가 맡았던 최고 제사장이라는 직위를 유지하는 것을 허락받는다. 그 길로 레피두스는 은퇴하였고 따라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서쪽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또한 기원전 35~33년에 로마 공화국이 내전으로 혼란에 빠진 틈을 타 통제에서 벗어난 일리리아 정벌을 단행해, 정계에 뛰어든 이래 처음으로 외부 세력을 상대로 군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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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한편 안토니우스도 옥타비아누스의 세력이 커질 때까지 방관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에서 옥타비아누스를 방해하는 풀비아와 동생 루키우스를 물밑에서 지원하는 한편, 브루투스 일파가 장악했던 동방의 행정을 개편하고 마케도니아, 아시아, 비티니아, 시리아 등 핵심 속주를 제외한 영토들을 로마에 충성하는 현지 유력자들에게 다스리게 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 정책으로 인해 많은 수의 동방 유력자들이 안토니우스의 클리엔테스가 되어 그의 편에 섰으며, 이후 아우구스투스도 안토니우스의 동방 정책을 계승했을 정도였다. 삼두에 반대하여 동방으로 망명한 로마 귀족들 중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을 제외한 전원을 사면하여 지지층을 늘리기도 했다. 그는 이집트에 머물며 클레오파트라 7세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로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옥타비아누스와 폼페이우스의 평화 협상을 중재하기 위해 직접 이탈리아 본토까지 찾아오기도 했다. 사실 동방을 맡기 전까진 옥타비아누스의 세력은 안토니우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안토니우스가 마음만 먹었으면 옥타비아누스의 정치 생명을 끝장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의 부하들 중 대부분은 카이사르파 출신이었기에 카이사르의 오른팔과 카이사르의 양자가 직접 적대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오히려 폼페이우스와 공화파 잔당을 상대로 옥타비아누스와 연합하길 원했다. 안토니우스가 폼페이우스와 손잡고 옥타비아누스를 처리하는 것은 그의 지지 기반 상당 부분을 이탈하게 만들 우려가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파르티아 원정에 필요한 2만의 군단병의 약속을 받았는데 곧 정치 9단 옥타비아누스에게 거하게 뒤통수를 맞고 말았다.

기원전 38년 삼두정이 5년 연장된 이후 안토니우스는 동방에서 파르티아 원정을 시작하였다. 옥타비아누스가 군단병을 보내주지 않자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재력의 도움으로 거대한 규모의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먼저 친파르티아파의 아르메니아 왕을 항복시킨 후 파르티아로 남하하였으나 파르티아군은 정면승부를 받아주지 않았고, 보급선이 길게 늘어난 로마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2개 군단을 전멸시켰다. 이 때 기병 전력을 맡은 아르메니아 왕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후퇴했다. 안토니우스는 포기하지 않고 파르티아 요새의 포위를 시도했으나 파르티아 기병대에 시달려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후퇴 과정에서도 수만에 달하는 병력을 잃었다. 그 뒤 안토니우스는 아르메니아 왕이 도망간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아르메니아를 공격하였고 그 결과 여기서 승리하게 된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뒤의 안토니우스의 행각은 눈을 의심케 하였는데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50]에서 로마식의 개선식을 거행한 것이었다. 개선식은 반드시 로마 시내에서 해야 했는데, 그 이유는 이 개선식 자체가 로마에 거주하는 로마의 수호신들에게 바치는 행사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다른 도시에서 거행하는 것은 다른 도시의 신들에게 영광을 바치는 것이었고 따라서 이는 로마의 수호신에 대한 배신 행위였으므로 이는 당시 다신교를 믿었던 로마 시민들에게 있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안토니우스는 제멋대로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시리아의 영토를 떼어주고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서 낳은 자신의 쌍둥이에게 동방을 분할해 물려주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 7세는 왕중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와 카이사르의 아들인 카이사리온은 왕중왕이며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적자이자 정당한 후계자라고 선언하였다.(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 이에 대해 로마인들은 당연하게도 매우 분노하였으며 이에 대해 옥타비아누스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 안토니우스를 맹비난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주장은 원로원의 인가를 받지 않았으므로 무효라고 선언하고 또한 그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다.

이때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인 옥타비아와 정식으로 결혼한 상태였는데[51], 일방적으로 옥타비아와 이혼을 선언한다. 이에 자신의 혈육을 끔찍히 아꼈던 옥타비아누스는 분노하여 불법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는데, 그것은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압수해서 공개하는 것이었다.[52] 이는 자칫 잘못하면 역공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행위였지만[53] 승부수였고, 적절한 수였다. 이 사건을 통해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에게 로마의 전통과 상식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는 대신 안토니우스에게 그나마 남아있던 로마 시민과 지지자들의 지지를 단박에 사라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공개된 유언장에서 자신이 죽거든 로마가 아닌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고 적혀 있었고, 이는 설마하던 로마 시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로마에서 안토니우스의 정치적, 사회적 매장을 확정짓는 사건이 되고 말았다.[54]

하지만 그래도 안토니우스를 따르던 그해의 집정관들과 원로원의 1/3은 옥타비아누스보다는 안토니우스가 믿을 만하다는 판단을 했는지 로마를 떠났고, 안토니우스가 머물던 동방으로 간다.[55] 안토니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향해 이탈리아를 상륙하려고 하였고, 이에 맞서 옥타비아누스는 군대를 보내 이를 그리스에서 저지하려고 한다. 그 결과 이 둘은 아드리아 해의 그리스 서쪽에 있는 악티움에서 맞붙게 된다.(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 7세를 데리고 왔는데 클레오파트라 7세는 안토니우스에게 그리스를 버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안토니우스의 병력이 그다지 열세가 아니었으므로 클레오파트라 7세의 주장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싸우지도 않았는데 본거지로 철수해버리는 것은 상대의 기세를 올려줄 뿐 아니라 그리스를 몽땅 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모든 정황을 보건데 악티움에서 그대로 옥타비아누스를 견제하며 물량 싸움으로 나갔으면 풍부한 동방의 자원에 클레오파트라의 돈까지 쓸 수 있는 안토니우스에게 유리했을 것이다. 따라서 안토니우스의 장군들은 모두 격렬하게 반대하였는데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의견을 받아들여 악티움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한다.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이들의 철수를 저지하려고 하였고 따라서 악티움 해전이 벌어진다. 여기서 전투가 한창 벌어지는 동안 클레오파트라는 전선에서 이탈하고 안토니우스도 군대를 그대로 뒤로 남긴 채 클레오파트라를 따라 이탈함으로써 안토니우스의 해군은 괴멸된다.

안토니우스는 악티움 해전의 결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그와 클레오파트라는 악티움에서의 패배가 자신들의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악티움 이후, 안토니우스는 육지에서 군대를 모아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하면 된다라고 판단했고, 클레오파트라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둘은 악티움의 싸움은 그냥 지라고 내버려두고 애초 생각대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싸우겠다고 생각하고 몸만 빠져나간 것이었다.

하지만 헬레니즘 세계에 대한 파급 효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로마 세력권의 동방 도시들과 주둔 군대, 장교와 시민, 동맹국들은 전혀 생각이 달랐던 것이다. 이들은 눈치를 보며 두 세력이 붙는 것을 계속 주목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이 대결은 자신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결정해야 할 척도였던 것이다. 특히 이들에겐 과거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대결에서 얻은 교훈이 있어서 더욱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에, 안토니우스의 계획은 최악의 판단 미스였던 것이다.[56][57] 따라서 이들은 악티움의 결말을 듣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미지근한 태도를 버리고 옥타비아누스에게 붙는다. 이는 지상전에서 승부를 결정짓겠다고 계획을 세운 안토니우스에게 치명타였다.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부하들을 통제하려고 하였으나, 로마군이던 동맹군이던 상관없이 안토니우스를 계속 배신하고 탈영하였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안토니우스는 맨 처음 탈영병들과 배신자들을 강하게 처벌했으나, 이는 구멍 뚫린 물풍선에 송곳으로 더 큰 구멍을 내듯 더 큰 탈영과 배신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1년 만에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 이후, 모아온 세력들 중 극소수의 병력만 제외하고 모든 기반을 잃어버린다.

한편 승자인 옥타비아누스는 서둘지 않고 승자로서 행보를 가졌다. 그는 동방의 그리스에 머물며 헬레니즘 세계의 동향을 파악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안토니우스를 배신하고 자신에게 귀순한 도시의 사절들을 환대하고 그들로부터 확고한 지지를 얻기 위해 1년 가까이를 보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거의 모든 도시들을 수중에 넣은 옥타비아누스는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가 이집트에 상륙했다. 그는 즉각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이자 헬레니즘 세계의 중심 도시 알렉산드리아[58]를 점령한다. 옥타비아누스에게 이는 아주 중요한 행동이었다. 그는 동족인 로마인과 안토니우스파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클레오파트라 7세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끝내고 지중해 세계의 평화를 다시 찾아오겠다고 공언했기 때문이다.

한편 안토니우스는 그때까지도 살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자해한다. 안토니우스에게 절망적인 소식이었을 것이다. 유일한 동맹인 클레오파트라마저 죽게 된다면 안토니우스는 완벽하게 재기할 수 없다는 사망 통보였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들은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렸고, 안토니우스의 부하들은 죽어가는 안토니우스를 데리고 오게 된다. 이때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 품에서 죽는다. 안토니우스마저 잃은 클레오파트라는 이제 모든 게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안토니우스마저 죽은 마당에 "안토니우스를 유혹해서 로마를 내전에 몰아붙인 이집트"를 내세운 옥타비아누스의 다음 행보는 뻔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는 편지를 보내 자신의 왕조이자 마지막 남은 헬레니즘 세계의 열강을 살리기 위해 "카이사리온을 살려달라"고 옥타비아누스에게 간청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한다. 옥타비아누스의 목표는 명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생존하기를 바랐는데, 그 이유는 클레오파트라를 로마로 데려가 정치적인 상징성을 위해 개선식에 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59] 이런 여론을 의식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있어서 클레오파트라는 반드시 로마로 동행해 개선식 때 로마 시민들에게 보여야 했던 카드이자 전리품인 것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리온은 살려둘 필요가 없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병사를 보내 카이사리온을 즉각 죽이도록 지시했다. 명령에는 "생포하지 마라. 그냥 죽여라."라고 내려져 있을 뿐이었다. 옥타비아누스에게 카이사르의 아들은 오직 본인뿐이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살려둘 필요도 없었다. 이집트가 로마의 속주가 된다면 로마인들이 끊임없이 걱정해온 밀 공급 문제는 단박에 해결될 최고의 카드였기 때문이다. 또한 카이사리온을 살려둬서 희망을 만들어 줄 필요도 없었다. 이렇게 카이사르의 양아들이 카이사르의 친아들을 죽이면서 카이사르의 생물학적 계통은 끊어지게 되었다.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철저히 감시케 했다. 자신의 최대 프로젝트를 장식할 상징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의 생각은 달랐다. 로마와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을 개선식에 데리고 가서 로마 시민들에게 선보인 뒤에 연금을 줘서 살려준다고 해도, 이는 치욕이었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군주로서의 체면도 깎아내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시녀들을 시켜 몰래 바구니에 독사를 넣어오도록 했다. 그리고 독사가 든 바구니에 손을 집어 넣어 자결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옥타비아누스는 매우 실망하여 자신의 시종으로 하여금 클레오파트라의 물린 곳에서 엄청나게 많은 독액을 빨아내게 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은 옥타비아누스에게는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문을 닫았고, 이집트에서 일어날 반란거리를 또 하나 제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여기에서 또 하나의 퍼포먼스를 선보이게 되는데 그것은 안토니우스의 유언장대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를 같이 묻어준 것이다.


3. 황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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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미술관 소장[60][61]

3.1. 아우구스투스, 프린켑스, 제정의 성립[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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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누스의 악티움 해전 승전 기념 주화.[62] 악어는 이집트와 나일 강을 상징한다.

파일:아우구스투스 1.jpg
아우구스투스 석상들을 기초로 AI 딥러닝으로 복원한 아우구스투스 얼굴이다.출처

"6회와 7회째 집정관직을 맡았을 때,

내란의 불길을 끄고 만장일치로 절대 권한을 받은 그때

나는 나의 통치 아래 있는 로마 공화국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의지에 맡겼다."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업적론(레스 게스타이)> 中 청동 원판 머릿말[63]


"고귀한 혈통의 트로이인인 카이사르가 태어나니 그의 제국은

동서남북에 미치고 그의 명성은 별들 사이에서 끝날 것인즉,

그가 바로 위대한 율루스의 이름을 딴 율리우스이다."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마침내 모든 정적을 물리치고 로마의 최고 권력자이자 진정한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된 옥타비아누스에게는 더 큰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내전의 후유증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지만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이후 어떤 황제도 갖지 못한 최고의 무기가 있었는데, 바로 시간이었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으로 명실상부한 로마의 일인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기원후 14년 사망할 때까지 무려 44년간 집권[64]하는데, 이는 카이사르의 내전 전 공화국이 건재하던 시절의 정치판을 직접 겪은 사람을 남김없이 무덤으로 보낼 만큼 긴 시간이었다. 덕분에 옥타비아누스는 공화정에 대한 기억과 해석을 입맛대로 비틀[65] 수 있었고, 충분한 시간을 기다려 원하는 권한을 전부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기원전 28년, 아그리파와 함께 1차 조정헌법(또는 헌법 조정) 발표와 동시에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43년과 기원전 42년 연이어 프린켑스 세나투스가 된 키케로 이후 정식으로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취임했다. 물론 내전 기간 내내 옥타비아누스는 30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로마 원로원 내 실질적 프린켑스 세나투스였고, 로마 헌법상 부여된 프린켑스 세나투스의 6가지 권한[66]을 행사하고 있었던 터라 정식 취임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키케로 이후, 정식으로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오른 옥타비아누스는 다시는 로마가 분열되지 않기 위해, 카이사르의 생각처럼 강력한 정치 권력이 있어야함을 깨닫고 있었다. 18세부터 정계에 등장했을 때부터 30세가 된 순간까지 충분히 경험을 한 부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카이사르처럼 노골적으로 황제 행세를 하면서 군림할 수는 없었다. 공화정 지지 세력과 원로원이 힘에 눌리긴 했지만 언제라도 이들이 '제 2의 브루투스, 카시우스'가 안 되리라는 보장은 없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는 프린켑스 세나투스 권한을 발동해 원로원을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옥타비아누스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큰 발표를 했다. "모든 것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에게 넘기겠다!"라는 것이었다. 양부 카이사르처럼 할 줄 알았던 원로원은 당황했고 옥타비아누스의 발표에 진심으로 환호했다.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35세의 최고 권력자에게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선사했다. 이를 해석하면 '존엄한 자', 혹은 실제로 북한에서 쓰이는 그 유명한 최고 존엄이 된다. 그러나 정치 9단의 속셈은 달랐다. 그는 명예와 존경을 얻으면서도 알맹이들은 여전히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는 공화파와 안토니우스와의 내전때문에 가지고 있던 임시로 부여된 권한만 포기한다. 예를들어 삼두정치권과 임시로 군대의 총사령관직을 부여하는 특권과 세금을 부여할 권한등이 있었다. 문제는 처음부터 위헌적인 요소가 다분해서 암살을 피하고 원로원과 시민들을 속이고 제정으로 이행하려면 불필요한 비상설 특권을 포기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는 공화정의 뼈대를 유지하면서 나라를 '제1시민(프린켑스)'이자 '총사령관(임페라토르)'으로서 죽을 때까지 통치하는 '원수정(프린키파투스)'을 실시했다.[67]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모든 권력을 원로원과 시민에게 돌리겠다 선언한 이 날이야말로 역사에서 말하는 제정 로마 시대의 사실상 시작이었다.[68] 아우구스투스가 자기 이름 앞뒤에 덧붙이고 다녔던 이 타이틀들은 그대로 로마 황제의 칭호가 되었으며, 로마 제국의 후대 황제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선례를 따라 앞뒤로 타이틀을 붙여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본명)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원래 성씨로 붙였는데, 결국 황제 타이틀이 된 케이스. 후일 이 정식 타이틀의 각 단어들, 즉 임페라토르와 카이사르는 그대로 황제라는 의미로 다른 유럽 언어들에 이식된다. 영어 단어 Emperor의 어원이 Imperator라는 것은 유명한 상식. 또한 독일의 카이저와 러시아의 차르도 카이사르에서 따온 단어다.

아우구스투스는 제정 실시를 기정 사실화하기 위해 악티움 해전이 끝나자마자 영묘 건설에 착수해 기원전 28년에 완성시켰다. 이것이 바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족들이 매장된 아우구스투스 영묘이다. 이는 동시에 그가 안토니우스 유언장 공개 당시 약속한 "저는 죽어서 로마에 묻힐 겁니다."는 것을 실현하는 것이기도 했기에 원로원은 기꺼이 이를 환호했다.


3.2. 두 번의 헌법 조정 조치, 제국으로의 변신[편집]


''이런 식으로 시민과 원로원의 권력은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손에 넘어갔고, 그의 시대부터 엄밀히 말하면 두, 세 사람[69]

이 나중에 집권하게 되더라도 군주라는 가장 정확한 이름이 되게 됐다. 로마인들이 군주제라는 이름을 너무 싫어해, (아우구스투스와 그 일가는) 황제를 독재자나 왕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 디오 카시우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가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클레오파트라 7세와 묶어 동반 몰락시키기 전부터, 옥타비아누스와 그 추종자들의 헌법 조정은 예고된 일이었다. 카이사르 암살 후, 로마 공화국의 임페리움(통치권)을 5년 동안 장악한 삼두(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원로원 모두 이를 바라고 있었고, 젊은 옥타비아누스는 일찌감치 밀려난 레피두스와 함께 안토니우스를 삼두정치와 엘리트 중심 독재 체제의 상징으로 매도해 그 타개책이 필요했다.

로마 공화국의 헌법은 기원전 509년 왕정 체제에서 원로원 중심의 과두정이 수립될 때부터 유기적으로 발전한 불문 헌법 중심이었다. 로마인들은 이를 '모스 마이오룸(우리 조상들의 관습)'이라고 부르며, 절대선으로 크게 강조했는데 여기에서 원로원과 현직 선출직 모두 가장 중요하게 여긴 4개 요소는 집정관, 호민관, 총독, 원로원이었다.

헌데 이는 로마인들 기준으로 볼 때, 술라, 카이사르의 손에 그 절대선이 손상된 상태였다. 술라는 반동적이고 보수적으로 술라 체제를 만들었지만, 이는 경직성을 초래했다. 더욱이 술라라는 냉혹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특정인의 죽음 직후 변형, 해체되면서 그 동력을 잃어 이는 수많은 야심가들 손에 난도질되는 결과까지 초래했다. 그래서 젊은 귀족들의 불만은 컸고 이는 카이사르가 그들에게 지지받은 이유 중 하나가 됐다. 원로원 입장에서 더 큰 불만은 카이사르의 개혁으로 불린 카이사르 체제였다. 카이사르의 개혁은 그가 기원전 44년 3월 15일 암살되면서 그 실체는 명확하지 않았으나, 카이사르의 죽음과 함께 다양한 권력과 권위는 일순간에 사라지고 술라 체제 이후의 혼란을 증폭시켰다.

그래서 내전의 유일한 승리자 옥타비아누스 앞에는 자신의 이전 세대의 두 거물 술라, 카이사르의 숙제와 함께 본인이 권력을 쥐기 위해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한 삼두정치의 폐해까지 시정해야 할 숙제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개인의 야심을 위해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분 아래, 기원전 30년부터 기원전 2년까지 일련의 헌법 조정 조치를 발표한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공화국이라는 완성이라는 명분 아래 시작되고 완성된 1차 조정 헌법, 2차 조정 헌법이다.

그렇지만 이 조치에 관해, 후대의 원로원 의원 디오 카시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이 길고 편법적인 조치가 우리가, 디오 자신이 살던 프린키파투스의 시작이라고 명확히 짚고 있다.

한편 기원전 30년에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무덤에 방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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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1차 조정 헌법[편집]


기원전 28년,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 회의 중 자신이 가진 내전 시대의 비상 권한을 무효화하고, 다음해에는 본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권한과 속주를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에게 반환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래서 그는 상술했듯 아우구스투스라는 거창한 칭호를 얻게 되는데, 이 선언과 함께 집행된 조치가 바로 1차 조정 헌법이다.

이 조치의 명분은 간단했다. "훼손된 공화국 제도의 재건", "새로운 공화정 체제의 복구"가 그것인데, 이는 원로원파와 삼두파 모두에게 큰 지지를 받았다.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8년 1월 1일, 아그리파와 함께 집정관에 취임하면서 공화정의 전통을 본보일 의도로, 그간 부하로 비춰졌던 아그리파에게 24명의 릭토르들 중 12명을 양도한다. 이후 전례와 관습 그대로 자연스레 켄소르에 취임해, 술라가 정한 정원으로 원로원 숫자, 선출직 숫자를 줄였다. 이후 그는 자신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다면서, 원로원을 술라의 조치때로 되돌리는 '작업'을 한다는 이유로 원로원 동료들 지지 아래 카이사르 이전의 원로원 체제로의 대수술을 단행한다.

기원전 27년 1월 13일,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에게 권한을 이행하는 연설을 한다. 여기에서 그는 약속된 각본대로 원하는 가면인 아우구스투스를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의 포문 아래 원로원의 만장일치로 얻는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동력삼아 본인과 아그리파의 의중대로 원로원을 대수술 후,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에게 이양을 제의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아우구스투스라는 거창하고 경의적인 이름을 얻어낸 직후, 옥타비아누스는 공화정 체제 수호와 그 상징을 위한 헌신을 이유로 새로운 이름을 사용한다. 이는 철저한 계산 아래 이뤄지는데, 여기에서 그는 로마귀족들에게 자신과 조상들의 모든 것인 노멘을 감추고 아우구스투스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러면서 그는 과거 로마를 구한 영웅들처럼 오직 총사령관으로서의 승리를 강조하고, 대개의 선조 원로원 영웅들처럼 애국심과 승리에 대한 헌신을 종교적 헌납으로 모든 것을 포장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는 원로원이 준 공적 칭호를 받아, 자신의 공적 이름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로 바꿔 사용한다.

그런데 이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사내가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해 내린 정략이었다. 그는 스스로 노멘을 감추면서, 아버지 카이사르와 자신을 이어주는 개인 성씨 카이사르를 아우구스투스라는 새로운 존칭에 섞어 사용했다. 내전 이후 개인성씨 카이사르가 부담스러우나, 포기할 수 없는 현실에서 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낳았다. 그래서 그는 원로원에게 왕(REX)으로 이미지가 단단히 박힌 본인의 개인성씨를 사용하지 않고도 자신의 정체를 숨기며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신격화된 카이사르를 디비 율리우스로 지칭하면서도, 새로운 공적 이름 안에서 신의 아들(디비 필리우스)을 여신 로마, 수호신 아폴로와 연결짓게 만들어 놓아 해석의 논란까지 교묘히 피했다. 더욱이 그는 이 새로운 이름을 통해, 율리우스 가문 사람임에도 아내의 혈통적 친정이며 두 양자, 외조카의 본가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카이사르 가문이라는 이름으로 합법적으로 장악했다.

그래서 1차 조정 헌법이 어느 정도 마무리 단계가 될 무렵이 되면, 아우구스투스는 동료들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모든 특권을 쥐게 되고 가문명까지 바꾸게 된 애국자처럼 행동할 수 있게 됐다. 그는 무질서함에 대한 혼란 수습과 로마군 장병들에 대한 보호 등을 이유로 그에게 실질적으로 속주 임페리움과 로마군 지휘권을 내려놓지 못하게 된 모습도 자연스레 얻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우구스투스는 능구렁이 같이 다시 한번 모두를 속였다. 그는 정중하게 이를 거절하는 듯 행동하지도, 당연히 받아들이는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허수아비처럼 행동하지 않고, 무책임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모든 책임을 자신이 졌고, 책임회피보다는 단호함으로 일관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이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됐을 때, 그는 술라, 카이사르, 안토니우스와 자신의 모습을 대비되게 비출 수 있게 됐다. 물론, 아우구스투스는 이 줄타기를 위해 정적들이 면전에 대고 욕설을 퍼부어도 마치 이를 수용하는 장면을 연출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모습들은 아우구스투스라는 사내가 명예직인 프린켑스 세나투스로서의 권위만 이용해 모두를 존중하는 중재자로 돋보이게 했다.


3.2.2. 2차 조정 헌법[편집]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공식적인 권력을 소유하지 않았지만, 영향력(auctoritas)에서 모든 것을 능가했다."

- 아우구스투스, <업적론>


성공적으로 첫번째 관문을 통과하고, 안성맞춤의 가면인 아우구스투스를 쓴 옥타비아누스는 건강 문제로 쓰러졌다가 가까스로 회복한 뒤, 자신이 만든 1차 조정헌법의 허점을 간파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본인이 가진 여러 권한을 여러 인사에게 분할해주는 척하면서 황제로 비춰지지 않는 2차 조정헌법을 발표했다.

이 조정헌법의 핵심은 그가 마치 동료, 정적들의 도움이 없다면 특정 기간 동안만 권한을 행사하는 것 같이 보이도록 한 계산된 쇼였다. 그는 명목상 이전 조상들처럼 임기가 끝나면 권한을 내려 놓는 연기를 했다. 물론 이 연기에 큰 도움을 준 이는 친구 아그리파와 옥타비아누스 시절부터 그를 따른 원로원 의원들이었다. 그들은 아우구스투스의 권한이 자동 갱신되도록 설계해, 강압적으로 그에게 책임을 준다며 쥐어주는 열연을 펼쳤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훼손된 공화국 제도의 복원자", "평화를 가져다 준 수호자"와 같은 이미지를 자연스레 받아내고 이를 통해 선출직 입후보자들의 당락까지 교묘하게 행사하게 됐다.

이와 동시에 그는 로마의 모든 군사적 승리를 자신에게 돌리는 조치를 마치 양보하는 양 행동했다. 이는 원로원 내 여러 의원들의 불만을 알아채고, 그가 합법적인 특권을 관용 아래 수용해주겠다는 목적으로 시작된 조치였다. 그래서 2차 조정 헌법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겉으로는 로마인들에게 최대 영광인 개선식을 오롯이 장악하지 않고, 원로원 동료들에게 인정해주는 척 했다. 일례로 그는 전투가 원로원 속주 안에서 벌어져 승리를 거두면, 원로원 이름으로 개선식을 거행토록 했다. 그래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는 기원전 19년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이 아닌 본인의 이름으로 로물루스와 여신 로마, 원로원에게 자신의 승리를 바치고 개선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이는 친족과 양자들도 비슷하게 적용돼 교묘하게 활용됐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 전쟁에서의 공적으로 기원전 7년 승리를 거둔 아내의 큰아들이자 자신의 의붓아들 티베리우스의 군사적 승리를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조카사위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승리 역시 마찬가지로 이렇게 포장해 그의 이름을 내세웠다. 이는 아내의 둘째 아들이며 누나 옥타비아의 막내사위 드루수스의 사례에서도 비슷했다. 다만, 드루수스의 경우 약식 개선식 후 아우구스투스와 그 아들의 개선식이라는 이름으로 후속 조치를 하면서, 그를 자신의 정식 양자로 확정짓는 것을 은연중에 알렸다. 하지만 이 엄청난 계획은 드루수스의 요절로 개선식 직전 허탕이 됐고, 이는 아그리파의 빈자리를 드루수스로 메우고 양자와 조카의 아이들을 완전히 율리우스 가문 사람으로 만들려 한 아우구스투스를 절망으로 몰아 넣었다.

그러나 아그리파, 드루수스의 연이은 죽음은 훗날의 일이고,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으로 나아가는 로마에 방점을 찍은 2차 조정 헌법을 발표(통과)해 이를 공개할 즈음 그는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고 이를 통해 로마 공화국을 로마 제국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는 기원전 19년 원로원의 이름 아래 기원전 23년부터 받은 총독 임면권과 임페리움을 호민관 특권과 함께 영구히 장악해, 집정관에 오르지 않고도 실권을 개인과 가문의 특권으로 만들었기에 가능했다. 여기에 더해 그는 기원전 12년 이후 레피두스가 죽자,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최고 제사장)을 승계했다. 그래서 기원전 2년 즈음이 되면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과 공공장소에서 굳이 집정관에 오르지 않고도 집정관 휘장을 착용할 수 있게 됐고, 원로원 회의장에서는 당해 집정관 사이의 자리에 앉아 파스케스를 든 호위병들을 거느릴 수 있게 됐다. 즉, 그는 두 번의 불문헌법 형태의 조정헌법으로 진짜 로마 황제가 된 것이다.

3.3. 프린키파투스(원수정)의 속사정[편집]


"나는 조상들의 관습(mos maiorum)에 위배되는 어떤 관직도 취한 바가 없었다."

- 아우구스투스, <업적록>


기원전 27년을 기점으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라는 정치 천재가 만든 독특한 로마 원수정체(프린키파투스)는, 지중해 동쪽의 페르시아, 헬레니즘 군주제 또는 근대 유럽이나 페르시아, 중앙 아메리카, 동아시아의 황제들과는 그 양상이 약간 달랐다. 심지어 술라, 카이사르의 두 체제와도 다르고 3세기 이후 등장한 로마 후기 제정(도미나투스)와 다른 정체(政體)였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로 불린 사내가 만들어낸, 프린키파투스 체제는 그가 살아생전 회고록 <업적론>의 6편에서 언급했듯, 왕(Rex)이 없는 '회복된 공화정(res publica restituta)'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런 그의 주장처럼 당대 로마인들 역시 자신들의 조국을 왕국, 제국이 아닌, 공화국이라고 불렀다.

실제 아우구스투스 본인은 도미나투스가 확립된 4세기 로마 황제들처럼 본인 입으로 군주와 관련된 단어로 자신을 지칭한 적이 없었다. 그가 주도해 발표한 두 번의 조정 헌법(헌법 조정)에서도 왕, 황제가 연상되는 단어나 문구는 없으며, 그와 그 일가 사람들이 두 번의 조정 헌법 발표 후 취임한 관직은 단 한 개도 없다.[70]

이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가 데리고 온 두 아들 중 아우구스투스가 직간접적으로 후계자로 염두에 둔 드루수스나 50대가 돼서야 정식입양된 드루수스의 형 티베리우스조차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역시 양부 아우구스투스와 마찬가지로 "공화정의 회복"을 외쳤고, 당시 로마 장군들이나 원로원 의원들 역시 "공화국의 영광과 원로원의 명예를 위하여!"를 기원전 31년 이전처럼 당연하게 외쳤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와 그 일가, 측근들이 "내가 공화정의 위험을 구하고, 공화정의 영광을 되살려주겠다"는 말은 겉으로 보기엔 카이사르와 달리 로마인들에게 거부감을 덜 느끼게 했다. 물론 모든 로마인들이 철석같이 아우구스투스의 말을 믿어주거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당대부터 이를 지적하는 정적들도 있었고, 아우구스투스와 그 일가를 노린 암살 계획으로 여러 번에 걸쳐 피바람이 불기도 했다.

'회복된 공화정체'라는 정의는 애매모호했고,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그 평가는 당대 로마인조차 크게 갈렸다. 원로원 내 공화주의자들의 일갈처럼 그 본질은 아우구스투스가 내세운 사탕발림이었다. 공화정기 여러 정무관들의 분산된 권력을 프린켑스라는 한 사람이 가지고, 그 프린켑스가 이를 공화정기 관행과 전통을 이유로 다음 로마시민에게 물려주는 방식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아우구스투스가 주장한 '회복된 공화정'은 문제를 제기하려고 해도, 분명 '공화정'이 맞기 때문에 "공화정이 아니다"고 할 수 없는 새로운 공화정체였다.[71]

황제는 프린켑스(제 1시민)이자 임페라토르(최고 사령관)였고, 굳이 집정관에 오르지 않아도 호민관 특권인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본국 이탈리아에 주둔 중인 군대(프라이토리아니)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공화정 체제와 무관하게 그의 개인 영지로 편입된 부유한 이집트 속주에 장관을 직접 임명할 권리도 가지고 있었으며, 기원전 29년부터는 아시아 속주를 시작으로 아나톨리아 반도 일대의 그리스계 주민들로부터 신격화되어 주민 자발적으로 클리엔텔라 관계까지 맺게 됐다. 여기에 더해 양아버지이자 정통성의 뿌리였던 카이사르가 직접 정복해 현지 유력자들에게 율리우스 씨족명을 주어 피호민으로 삼았던 갈리아와 그 곳의 군단들, 누나 옥타비아와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를 통해 맺게 된 여러 유력 가문과의 친인척 관계 형성은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으로 아우구스투스가 권력의 정점을 향할 때 큰 자산이 됐다. 또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가문 남성들 및 아그리파로 대표되는 측근들이 제국에 편입시킨 레누스(라인강)과 다누비우스(다뉴브강) 일대의 게르마니아, 판노니아 등의 속주와 군단들이 사실상의 개인 영지이자 사병으로서 아우구스투스와 그 일가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었다. 이렇게 이집트에서 생산되는 엄청난 양의 곡물과 현지에서 거둬들여지는 막대한 세금, 로마의 주 전력이었던 갈리아와 도나우 강 속주들의 병력들, 결혼과 입양을 통해 맺게 된 원로원 안팎에서의 끈끈한 연대,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유지되는 임페라토르로 상징되는 군 지휘권이 그의 물적 기반이 되었다. 이런 배경들을 등에 업고 그는 공화정기의 권한들을 합법적으로 획득했다.

또 아우구스투스는 본인의 주장처럼 선동이나 테러, 협박, 암살 등의 수단을 행사하지 않아도, 자신의 능력만으로 획득한 엄청난 자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전 과정에서 얻은 애국자 이미지와 평민, 군인의 절대적 지지 아래 로마와 이탈리아 전체에서 얻은 권위, 명예, 위엄이었다. 로마와 이탈리아 평민들은 도시와 농촌에 상관없이 아우구스투스를 절대적으로 지지했고, 군인과 그 가족들 역시 아우구스투스를 영웅이자 자신들의 수호자로 떠받들었다. 이는 기원전 2세기 이후 원로원과 대척점을 세운 그라쿠스 형제나 양부 카이사르조차 누리지 못한 엄청난 영광이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9년 개선식 거행 후, 공화정 복구를 선언해주고 비상특권 형식으로 받은 각종 권리를 포기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정통성을 로마시민들에게 얻었다. 그래서 그는 호민관에 오른 적이 없어도 "호민관 특권을 통해 제발 민회를 장악해달라"는 평민들의 요청과 지지를 받았고 이를 통해 손쉽게 민회를 장악했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그는 원로원을 생각해 민회를 장악하더라도 민감한 사안인 집정관 후보 선정이나 선거 등에는 늘 중립적인 것처럼 연기했다. 그렇지만 실상은 간접적으로 늘 정무관 입후보와 선거 모두 영향력을 행사했다. 여기에 더해 서기 5년부터는 <발레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법>으로 불리는 켄투리아회 구성 변경까지 실질적으로 행사하면서, 문자 그대로 원로원을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렸다.[72]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굳이 제위에 오르지 않아도, 그가 가진 칭호와 지위(프린켑스, 임페라토르, 폰티텍스 막시무스 등)들만 이용해 실질적인 황제로 권위와 권력, 정당성까지 모두 가질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제시한 프린켑스(또는 임페라토르) 중심의 프린키파투스(원수정)라는 것은, 강력한 군사력을 사병화한 개인이 호민관 특권을 갖고 민회와 행정부의 사실상 수장으로 군림해 원로원의 도움을 받는 양두정 체제였다. 간단히 말하면 공화정이라는 시스템 위에 올라탄 형세였다. 5현제는 물론이거니와 군인 황제 시대까지도 황제에 도전할 만한 인재들은 모두 공화정의 시스템이었던 명예로운 경력[73]을 통해서 능력을 검증받은 이들이었다. 국가의 제도를 완전히 쇄신하였다고는 볼 수 없었고 아우구스투스의 말처럼 공화정이 복구되었다. 다만 그 공화정을 통해서 생겨나는 국가 행정의 생동성과 풍부한 인재들은 모두 황제의 통치권 행사를 위해 사용되었던 것이다.[74]

따라서 로널드 사임의 표현처럼, 아우구스투스는 내전을 종식시킨 영웅이자 모순 많은 공화정체를 교묘히 무너뜨린 모험가, 개혁가이면서 합법의 틀 안에서 교묘히 로마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이득을 챙긴, 흥미로운 독재자였다. 즉, 그는 원로원에게는 공화정을 되살린다고 안심시킨 후, 뒤로는 야금야금 권력을 집어삼켜 공화정의 탈을 쓰고 제정을 연 능구렁이 같은 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아우구스투스는 생전에 원로원과 타협하고 속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75]

아우구스투스의 프린키파투스 체제는 외형상 공화정 체제이면서, 기형적인 형태의 삼두정 체제를 대체한 양두정치의 모습을 보였지만 힘의 균형으로 제국이 운영되는 방식이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그 본질은 원로원의 재가를 받는 선거에 의한 입헌 군주정 모습을 띤 로마식 국제였다. 아우구스투스의 협력 요청은 형식적이었고, 그가 틀을 잡은 새로운 공화정체는 프린켑스로 불리는 원로원의 승인을 받은 임페라토르가 로마법을 지키면서 원로원의 도움과 지지 아래 국정을 이끄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가 시행하고 티베리우스가 반석에 올린 프린키파투스는 황제의 권한을 원로원의 협력과 그들과의 투표를 통해 결정된 시스템으로 돌아갔다. 실제 초기 프린키파투스 체제는 아우구스투스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의 후계자들에게 그 방식상의 문제일 뿐 황제 본인 스스로가 제정하지 않은 법들에 제한받은 부분은 네로를 제외하곤 형식상 존중했다. 이는 폭군으로 간주되었으나 2000년대 이후 재평가 중인 가이우스(칼리굴라) 역시 마찬가지였고[76], 지나칠 정도로 냉혹했던 티베리우스조차 마찬가지였다. 아우구스투스 사후 연이어 제위를 차지한 율리우스 가의 두 황제들은 재위 기간 내내 원로원에게 '냉혹하고 변덕스럽다'고 평가받았음에도 원로원을 협박해 표를 얻거나 증거 없이 재판장에서 완전히 무죄로 결론난 피고를 유배보내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콤모두스가 나타나기 전까지 네로, 도미티아누스가 원로원에게 "악랄한 황제들보다 더 독재자"라고 비난받았고, 네로의 경우에는 군대까지 불신임을 내려 탄핵된 이유는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프린키파투스 체제 아래에서 그 속사정까지 완전히 무시한 결과였다[77]

단, 아우구스투스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호민관 특권에 기반한 제정이나 형식적 양두정체를 설계한 것은 아니다.

이런 기묘한 형태의 로마 제정은, 친위 쿠데타 등 무리수를 두지 않으면서도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한 위태로운 줄타기를 통해 필요한 권한을 하나하나 얻어내면서 완성된, 우연과 타협의 산물로 봐야 할 것이다.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 칭호을 받은 후로도 그는 기원전 23년까지 한 해도 정규 집정관 신분을 놓치지 않았으며, 동료 집정관으로도 아그리파나 친족들, 부하 장수들 등 자신의 영향력이 직접 닿는 인사들만을 당선시켰다. 특히 이 시기 아우구스투스는 조카 마르켈루스, 아내의 두 아들 티베리우스대 드루수스에게 노골적으로 특권을 부여하면서 원로원의 불만을 샀으며, 권력 유지 및 강화 과정에서 아그리파, 마이케나스, 리비아 등 핵심 측근들과도 그 방법으로 갈등을 빚었다. 특히 기원전 24-23년에는 원로원 속주인 마케도니아의 전 총독 마르쿠스 프리무스가 총독 재임 중 어린 마르켈루스의 명령에 따라 행동했다[78]고 증언하면서 큰 파장이 일어났다. 아우구스투스는 직접 법정에서 증언하며 프리무스의 증언을 부정하고 반대 여론을 억눌러야 했다.(기원전 23년 로마 헌정위기)

기원전 23년 중병에 걸린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개인적 인장은 아그리파에게, 모든 공적 문서와 군지휘권은 동료 집정관이자 원로원파인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에게 맡기면서 마르켈루스의 후계자 내정을 일단 부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병에서 회복한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직을 도중에 사퇴했고 이후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집정관직을 맡지는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아우구스투스는 양보의 대가로 종신 호민관 특권과 감찰관의 일부 권한, 원로원 속주에까지 미치는 프로콘술급 임페리움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기원전 22년 원로원의 일부 의원들은 판니우스 카이피오의 주도로 아우구스투스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졸속 재판을 거쳐 처형되었으며, 이 중에는 프리무스 사건에서 프리무스를 변호했던 무레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원로원 계급의 반발과 달리 기사계급과 로마 시의 평민들은 아우구스투스를 지지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기원전 22~21년의 로마 시 식량 위기에서 원로원이 무능력한 대처를 보이면서 더욱 견고해졌다. 반면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프로콘술급 임페리움과 이집트의 지배권을 통해 식량 공급 문제를 맡자마자 바로 해결해 버렸다. 기원전 19년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집정관급 임페리움 및 특권을 부여하여 언제든 제국 전역에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함으로서 사실상 항복 선언을 했다.

집정관 연임을 포기하면서, 아우구스투스는 실질적인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동시에 자신의 입맛에 맞는 기존 귀족들에게 집정관직을 선사하여 그들을 제정 지지파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스스로 로마 전통의 수호자임을 자처했고, 로마 공화정 체제의 틀 안에서 족벌주의와 정략결혼, 입양제도 등을 이용했다. 그러면서 그는 오래 전에 정계에서 사라졌거나 내전으로 밀려났던 옛 가문들을 다시 정계에 복귀시키고 후원했고, 카이사르가 임페라토르에게 유리하게 개정한 반역법을 이용해 이를 활용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리비아의 두 아들이 속한 클라우디우스 네로, 리비아의 혈통적 친정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법적 친정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 옥타비아의 시가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가문을 자신의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상호 입양, 결혼으로 하나의 가문으로 완성했다. 그러면서 한때 매형이었던 안토니우스 생전의 결혼동맹 구도를 유지해,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유니우스 실라누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등 공화정기에 조금만 관심이 있어도 이름을 들어봤을 유력 가문들을 전부 아우구스투스의 새로운 카이사르 가문과 인척관계로 연결해, 이들을 황실에 편입시켰다. 아헤노바르부스나 안토니우스처럼 아우구스투스와 직접 대립하거나 끝까지 공화파로 남았던 명문대가들조차도 아우구스투스는 본인의 황실에 편입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되려 율루스 안토니우스 숙청 사건에서 보이듯, 그는 이를 가족사업으로 생각해, 본인 외의 인사가 친인척 처분 문제에 관여할 시 일단 넘긴 후, 눈밖에 난 인사들을 모조리 숙청하는 냉혹함까지 보여줬다.[79]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과 본인이 후계자로 염두에 둔 드루수스를 위협한 아내의 혈통적 친정 식구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본인의 후계자로 낙점된 티베리우스를 제거하려고 한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 스크리보니아누스(아내 남동생 드루수스 리보의 양자 중 한명)을 간통죄, 불경죄 등으로 쳐내고 몰락시키거나, 병석에서 이를 후계자에게 상기시켜 사후 피바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따라서 갓 즉위한 티베리우스는 측근과 원로원에게 "나는 늑대의 두 귀를 붙잡고 등 위에 올라탄 상황이다."고 이를 표현했다.

그렇지만 이런 조치의 결과, 수도 로마와 이탈리아는 기원전 2세기부터 벌어진 내전에서 벗어나 평화[80]를 누릴 수 있게 됐다.

공화정 말기의 유력 정치인들은 경기대회와 공공시설 건축 등 각종 사업을 주관해 유권자들에게 환심을 사고, 심지어는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정복전쟁을 일으켜야 했다. 이런 경쟁은 누미디아 반란을 제압하고 게르만족을 격파하며 사병화된 군인들의 지지로 전대미문의 집정관 7선을 달성하고 로마의 일인자가 된 가이우스 마리우스 때부터 본격화되었다. 술라루쿨루스미트리다테스와 티그라네스를 격파하며 동방에서의 로마의 패권을 확립했다. 이어서 해적들을 일거에 소탕한 뒤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마무리하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제국에 편입시키며 국고 수입을 2배로 늘린 폼페이우스, 한때 로마를 점령할 정도로 강성했고 수백년간 생사를 건 외나무다리 싸움을 해왔던 갈리아 전역을 정복해 마침내 긴 악연에 종지부를 찍은 카이사르에 이르기까지 공화정 말의 유력 정치인들은 점점 더 스케일 크고 특별한[82] 전공을 내세워야만 했다.

이렇게 정복전쟁으로 유력자들이 벌어들인 전리품의 규모가 커지면서 대 카토가 지은 포르키우스 회당처럼 소박한 건축물만 있던 포로 로마노도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먼저 술라는 공문서 보관소인 티불라리움을 지었고, 폼페이우스는 로마 최초의 상설극장인 폼페이우스 원형극장을 지었다. 카이사르는 카이사르 포룸을 지었으며 제정 시대에 상설투표소 역할을 하게 될 사이프타 율리아를 구상[83]하였고, 아이밀리우스 회당의 재건 비용을 대 최대의 명문가 중 하나였던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문을 우군으로 끌어들이는 등 거물 정치인들이 벌이는 건축사업[85] 의 규모와 그 정치적 의미도 점차 커지게 된다. 때문에 귀족들은 출세를 위한 경쟁의 과정에서 일이 잘못될 경우 카틸리나처럼 파산하고 반란을 일으키거나, 크라수스처럼 전쟁에 패배하고 전사[86] 할 위험을 감수해야 했고, 다른 한 편으로 이런 극단적 무한경쟁에서 뒤쳐진 여러 명문귀족들은 조상 대대로 당연하게 차지해왔던 고위공직과 특권들을 내놓아야만 했다. 결국 이렇게 극단적 경쟁에서 밀려나 잊혀지거나, 조상대대로 내려온 재산과 지위를 잃을 처지에 놓이게 된 이들이 선택한 최후의 극약처방이 바로 내전이었다. 유력 정치인들이 앞다투어 군사적 위업을 달성하며, 로마의 강역이 빠르게 팽창한 공화정 말기의 외형적 화려함의 이면에는 귀족들 스스로도 감당하기가 어려웠고 결국 서로를 죽이는 내전으로 치닫게 된 무한경쟁이 있던 것이다.

그랬던 귀족들에게 아우구스투스가 사실상 선거를 폐지한 일은 쌍수를 들어 반길 만한 사건이었다. 과거에는 당선을 위해 엄청난 정력을 소모해야 했으나 이제는 동료 원로원 의원들과 원만히 지내고, 아우구스투스의 신임만 얻으면 충분했던 것이다. 따라서 유력 귀족들은 처지에 만족하고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지위를 넘보지만 않는다면, 오히려 공화정 말기보다도 쉽게 집정관 및 속주 총독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자신과 가문의 영광을 위해 업적을 쌓고 로마의 일인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여기던 귀족들의 습성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었다[87]. 그래도 자신의 목숨은 물론 가문의 멸문을 매일같이 걱정해야만 했던 내전, 그에 수반되는 정치적 숙청을 연이어 겪은 대부분의 귀족들에게, 아우구스투스의 조치는 불만스러운 측면은 있어도 받아들일 만한 것이었다. 로마의 1인자에 도전할 수 있는 타고난 권리, 로마 귀족이라면 한번씩은 꿈꿨던 개선식 등 많은 특권을 포기하도록 한 대신, 아우구스투스는 귀족들에게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주었던 것[88]이다.

한편 달력에는 카이사르의 이름인 율리우스가 7월을 뜻하는 'July'로, 아우구스투스가 8월을 뜻하는 'August'로써 등록되었다.


3.4. 행정적 재편성, 대외 관계[편집]



3.4.1. 원로원 위원회 편성[편집]


기원전 27년 ~ 18년,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도와 원로원 의사 일정을 준비할 사실상의 내각원로원 위원회를 조직했다. 종종 원로원 의원들에게 콘킬리움 프린키피스(프린켑스 자문 위원회)라고 불린 이 위원회는 15명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그해의 집정관 2명과 정무관들이 각각 파견한 대표와 제비 뽑기로 선출된 원로원 의원들이었고 6개월마다 인원을 교체케했다. 서기 13년, 아우구스투스는 위원회의 기능과 구성을 수정했다. 여기에는 황제의 가문 사람들인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 사람들이 새로이 들어가고 기사 신분들이 보강되었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결코 오늘날의 내각이 아니었다. 이들은 공개적으로 모여 활동했지만, 절대 제국의 각종 정책들을 황제와 토론하고 결정하지 않았다.[89]

하지만 여전히 실권은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 등 친한 원로원 의원들, 전문 입법가와 행정 각료, 황제 가문의 친구들과 일원들이 쥐고 있었다. 이들은 비공식적이고 비밀리에 모임을 가지며 정부의 정책, 원로원과 민회에 상정할 법률, 속주 총독 인선, 선거 때 아우구스투스 입맛에 맞는 후보자 천거 등을 결정하고 제국의 재정, 외교, 법, 종교, 행정을 결정했다.


3.4.2. 속주 통치 개편[편집]


당시 로마는 총독이 되려면 집정관이나 법무관이어야 했다.[90] 즉 원로원만이 속주 총독이 될 수 있었다. 앞서 27년 공화정 복귀선언 당시에 아우구스투스가 손에 쥐고 놓지 않은 권한이 있는데 바로 총독임명권이다. 아우구스투스는 황제령 속주 총독을 자신이 마음대로 임명을 했으며 이에 따라 속주에 주둔한 군대를 계속 지휘할 권한을 법적으로 부여받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총독으로 기사나 평민을 파견했다. 이렇게 행정을 개편하면서 로마의 속주는 크게 4부분으로 나뉘게 된다.

먼저, 본국인 이탈리아 지역과 두번째로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파라오를 아우구스투스가 승계받으면서 편입된 이집트, 세번째로 오랫동안 로마의 통치를 받아온 식민지인 원로원령 속주, 마지막으로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통치하는 황제령 속주가 있다.

원로원령 속주는 기존과 같은 1년짜리 임기의 법무관이나 집정관 출신 총독을 계속 원로원이 임명하게 하였다. 여기에는 민병대를 제외한 상설군단이 주둔하지는 않았다. 이 지역에 해당하는 곳이 시칠리아사르데냐, 나르보네시스 속주[91], 베티카 속주[92], 마케도니아 속주[93], 아카이아 속주[94], 현재의 터키 서부지역인 아시아 속주, 비티니아 속주 , 지중해의 크레타, 키프로스 그리고 카레나이카 속주, 아프리카 속주, 누미디아 속주에 해당한다.

황제령 속주는 이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지역이며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는 속주를 포함한다. 여기에는 1개 이상의 군단이나 적어도 1개 대대 이상이 주둔하는 속주들이다. 임기는 보통 5년이었지만 황제가 언제든지 교체할 수 있었다. 이집트는 조금 특이한데 당시 임페라토르이자 프린캡스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의 파라오를 겸직하게 되었는데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후계자가 공석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맡은 것이다. 이집트는 워낙에 유서깊은 역사를 가진 나라인데다 이 역사의 대부분이 신의 아들이 통치하던 신정국가였다보니 원로원과 로마 시민인 인간 주권자에 대해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었고, 때문에 밀 생산과 경제력을 장악한다는 실질적 이득 외 이런 명분적 부분에서도 신(카이사르)의 아들인 아우구스투스가 지배하는 것으로 인식시키는 편이 나았다. 이집트 총독에는 주로 군인들이 임명되었기에 아우구스투스에 임페리움 프로콘술라레 마이우스(군통수권)라는 호칭을 부여해서 황제의 군통수권을 합법적으로 인정해주었다.

카이사르가 정복한 이후 자치령으로 남아있던 갈리아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95], 아퀴타니아 속주[96],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97], 벨키카 속주[98], 게르마니아 속주[99]로 나뉘었고 히스파니아는 당시에 가까운 히스파니아 먼 히스파니아로만 되어있었으나 이를 타라코넨시스 속주[100], 루시타니아 속주[101], 베티카 속주[102]로 개편했다.

3.4.3. 군 감축[편집]


아우구스투스는 내전이 끝난 후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함께 60개 군단, 50만 명 이상이던 병력을 25개 군단, 30만 명(군단병 15만 + 보조병 @)으로 감축했다. 또한 군인들의 복무 기간을 군단병 20년, 보조병 25년으로 설정하는 작업을 수행했다.[103][104] 또한 세계 최초로 군 복무를 마친 퇴역병들(VETERANUS, 베테랑)에게 로마 시민권 및 퇴직금을 지급하는 제도를 마련하였다.[105][106] 이 작업을 성공적으로 완료함으로써 로마 제국은 약 2세기 가량 유럽,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에 사는 5000만명의 사람들을 15만명의 병력으로 지킬 수 있었다. 또한 항구적인 직업 군인 제도가 마련되어 중앙에서는 확실한 계산 아래 제국의 국방과 군 행정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3.4.4. 근위대 창설[편집]


아우구스투스는 본국 이탈리아에 합법적으로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를 만들어 주둔시켰다. 이들은 9개 보병대로 구성되었고 로마 시민들로만 충원되고 구성된 집단이었다. 이들은 즉시 황제의 명령을 직접 받고 수행하였으며 로마와 본국에서 근무하면서 많은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들의 복무 기간은 16년 밖에 안되었고, 375 데나리우스의 연봉+ 보너스, 퇴직금 5천 데나리우스를 받았다. 또한 많은 수가 일반 군단의 백인대장 또는 대대장으로 진급했다. 원로원이 있는 로마에 자신의 사병을 만들어놓고 무언의 정치적 협박과 압력을 가한 것.


3.4.5. 항구적인 해군 창설[편집]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대결과 악티움 해전은 아우구스투스에게 항구적인 해군 창설을 필요케 했다. 이제 지중해는 국제 해역이 아닌 "로마의 호수"였고, 이곳의 해적은 곡물 수송선과 무역선을 위협하는 존재로써 반드시 씨를 말려야 했다. 따라서 그는 1개의 주력 함대를 나폴리 만에 자리잡은 미세눔에 주둔시켜 서(西) 지중해를, 아드리아 해의 라벤나에 1개를 주둔시켜 동쪽의 안전을 지키게 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와 갈리아 속주의 포룸 율리[107]에 해군 기지를 추가로 건설했다. 더불어서 라인 강, 도나우 강, 갈리아 전역의 강들, 나일 강에 보조 소함대들을 만들어 순찰케 했다.


3.4.6. 재정 및 세금 체제[편집]


아우구스투스는 내전으로 원로원이 관장하는 아이라리움 사투르니의 기금이 고갈되고 세입이 탕진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다 로마의 200,000명 가량의 빈민 계층에 대해 무상 곡물을 제공하고 공공 오락 자금, 도로 및 거리 건설, 행정, 국방 등에 들어갈 자금이 심각한 문제로 다가왔다. 따라서 그는 더디고 신중하게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먼저 기원전 28년, 국고 관할권을 경험없는 콰이스토르들에게서 프라이토르(법무관) 경험자들로 바꿨다. 더해서 기원전 23년 이후에는 매년 추가 선출된 2명의 프라이토르들에게 국고 관할권을 이관케 해서 황제가 직접 국고를 장악하도록 만들었다. 더해서 각 속주에 피스쿠스(fiscus: 무화과 광주리)[108]라고 불린 기금을 설치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군단 병사들의 월급을 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추가로 서기 6년에는 참전 전역병들의 연금 지급을 원활케 하기 위해 아이라리움 밀리타레라는 군대 기금을 만들어 국고 부담을 줄였고, 새로이 막대한 황제 개인 재산을 담당하는 기금을 두었다.

그리고 의외로 잘 안알려진 것 중에 독신세를 걷은 첫 황제였는데 저출산대책으로 제정된 정책으로 주로 2만 세스테르티우스의 재산을 가진 여성에게만 부여되는 세금이었다. 만 50세미만의 부유층 여성에게 수입의 1/100 즉 1%를 직접세로 부과하였다.


3.4.7. 영토 확장[편집]


갈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에 비해 아우구스투스는 비교적 내정 위주의 황제인 이미지가 있으나, 아우구스투스 역시 실제로는 매우 공격적인 확장 위주의 정책을 폈다.

아우구스투스는 초대 황제라는 입지의 불안정한 점 때문에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데에 많은 신경을 썼다. 그래서 그는 로마 시민들이 지도자의 덕목으로 가장 높이 평가하는 군사적 업적을 보여주길 원하였다. 그래서 그는 군 사령관(임페라토르)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하기 위해 공공연하게 로마는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선전하였다. 팍스 로마나라는 단어도 이때 만들어진다. 그는 그러한 선전을 함과 동시에 클레오파트라의 사후 공석이 된 이집트의 넓은 영토를 모두 로마에 편입시켰고, 그 후 유다 왕국이 통치하던 팔레스타인 일대와 소아시아의 구 폰토스 영토, 히스파니아 반도 북부의 미점령지, 그리고 알페스(알프스) 지역을 모두 점령, 로마의 행정구역으로 편성한다. 그 작업이 끝난 뒤 그는 곧바로 파르티아와 조약을 맺어 시리아 일대의 국경을 확정 짓는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일리리아와 다누비우스 강[109](도나우 강) 사이에서 살고 있던 달마티아 부족에 대해 공격을 감행하는데, 그들을 공격한 이유는 그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도나우 강을 로마의 북동쪽 국경선으로 확정짓기 위해서였다. 로마인들의 침입에 달마티아 족은 강경하게 반발하였으나 아우구스투스는 단호하게 공격하였고 마침내 이들을 격파한다. 이후 그 일대를 두개의 속주로 개편, 로마의 영토에 편입시킨다.

그 지역을 정복하는 동안 게르마니아의 정복 사업 역시 추진한다. 이는 레누스 강[110](라인 강) 건너에 있는 알비스 강(엘베 강)을 로마의 국경선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그는 기존의 레누스 강은 다누비우스 강에서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다고 보았다. 이는 레누스 강(라인 강)과 다누비우스 강(도나우 강) 방벽은 길이도 길지만 두 강의 사이에 위치한 이탈리아의 지붕 알페스(알프스)로 인해 하나의 통합된 국경선으로서의 관리가 불가능하였다. 만일 오늘날의 엘베 강과 도나우 강으로 국경을 확정짓는다면 국경선의 길이는 수백킬로미터 가까이 좁혀질 것이며, 두 강 사이에는 알프스와 같은 지형적 장애물이 없으므로 편리한 교통을 통한 보급로의 확보로 인해 한 명의 총사령관이 하나의 국경처럼 통합 관리할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한편 이집트 행정장관 가이우스 아일리우스 갈루스를 시켜 아라비아 펠릭스(현재 예멘오만 일대)를 정복하게 했으나, 갈루스의 아라비아 원정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쿠시 왕국의 여왕 아마니레나스가 이 틈을 타 이집트를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아우구스투스의 두상을 노획하여 신전 현관 계단 밑에 묻어서 백성들이 그 위를 지나며 밟게 하자, 아우구스투스는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또는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를 보내 쿠시 왕국을 징벌하게 했다.(쿠시-로마 전쟁) 4년간의 전쟁 끝에, 아우구스투스는 쿠시 왕국의 주권을 용인하고 국경을 30마일 후퇴시키는 선에서 평화조약을 맺고 우호관계를 맺었다.


3.4.7.1. 게르마니아 전쟁[편집]

파일:attachment/아우구스투스/1_195.jpg

기원전 27년,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는 권력을 움켜쥔 이후 갈리아 일대에서 반 로마 운동이 벌어지자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를 보냈다. 이 봉기는 곧 진압됐지만, 갈리아 내 반로마 세력에게 제공된 무기가 레누스 강(오늘날의 라인 강) 너머의 게르마니아에서 밀수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아그리파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해 군을 이끌고 보복 성격의 추가적 군사행동을 벌인다. 그렇지만 이 당시 반로마 봉기가 벌어진 라인란트 일대는 로마군 주둔 병력이 적었고, 완전하게 갈리아 전역이 로마 영토로 편입되지는 않은 탓에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는 갈리아 안정에 힘을 쏟았다. 아울러 이 시기(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는 갈리아 전초기지로 향하는데 마르켈루스, 티베리우스를 함께 데리고 갔다. 이는 그가 후계구도에 염두에 둔 두 소년에게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일대에서 군사경험과 군무교육을 시키기 위함이었는데, 이를 증명하듯 군사교육 후 마르켈루스는 외삼촌의 결정에 따라 사촌누이동생 율리아와 결혼식을 올린다.

아그리파는 이 시기부터 갈리아 일대에 도로를 깔고 대대적인 갈리아 인프라 개선작업을 벌였고, 속주화 작업은 기원전 20년이 되어서야 완료된다. 기원전 19년 로마는 군대를 대대적으로 라인 강 서쪽 변경으로 이동시키는 작전을 시작한다. 이 시기 로마군은 2년간 군사요새를 건설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게르마니아를 차지해야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로마는 게르마니아로 눈을 돌리는데, 기원전 17년과 18년 사이 게르만족들이 도하 후 갈리아 일대의 로마군을 공격한다. 이를 막기 위해 마르쿠스 롤리우스의 5군단이 출전하는데, 5군단은 오히려 그들에게 패배했고, 독수리 군기까지 포획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런 이유로 로마는 게르마니아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보게 되며, 아우구스투스는 이 사건 이후 갈리아 일대의 새로운 군대 재편 및 자금 문제까지 손을 보게 된다.

기원전 16년 아우구스투스는 대대적인 게르마니아 전쟁의 청사진을 구축한다. 이 작업은 총 3년이 걸렸고, 대형 프로젝트의 첫 조치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알프스 산맥을 지나 갈리아 남동부에 도착하면 나오는 루그두눔에 전쟁 자금을 위한 조폐국 신설이었다. 신설된 조폐국은 병사들의 월급과 전쟁비용 자금원이 됐다.[111] 이와 동시에 아우구스투스는 갈리아 일대에서 대대적인 인구조사를 통해, 인구에 따른 세금체계를 마련했고 갈리아를 장기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서부전선 기지를 만든다.

기원전 13년 아우구스투스는 알비스 강(엘베 강)과 레누스 강 사이의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 그의 두 양아들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 누나의 큰사위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네로의 조부) 등을 파견했다. 이는 그 지역을 정복하는 것이 매우 중대하다고 판단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여러 장군 중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아들로 서른도 되지 않은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형제가 담당했으며, 그들은 각각 일리리쿰, 갈리아 정비의 중책도 함께 맡았다. 따라서 갈리아 속주 전체를 관장했던 드루수스는 기원전 15년 아우구스투스의 명에 따라 루그두눔[112]에 총독 관저를 마련했으며, 기원전 13년 정식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이 시기동안 갈리아 행정, 방어체계, 세금징수 문제를 정비했으며, 기원전 9년까지 게르마니아 내 레누스 전선과 게르마니아 전쟁을 실질적으로 책임졌다. 그리고 드루수스의 형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15년부터 동생을 도와 알프스와 갈리아 일대에서의 군사행동을 병행하면서, 다누비우스 전선을 중심으로 영토 확장 프로젝트를 총괄했다.

드루수스의 공식적인 게르마니아 전쟁 수행은 기원전 11년부터 9년까지 총 네 번 진행됐다. 하지만 그는 전쟁 개시 이전부터 실질적으로 갈리아 총독으로 있었고,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마니아 전쟁 프로젝트를 기원전 27년 처음 담당했던 아그리파의 사례를 참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젊은 드루수스는 기원전 14년 레누스 강변에 항구적인 병영기지 3곳을 건설했고,[113] 정찰 업무와 병참 보급을 위한 활로 확보 및 친로마 세력 포섭을 진행했다. 사실 이 시기동안 드루수스는 갈리아 총독으로서 행정과 방어체계 완성에 집중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우스페스족과 시캄브리족으로 구성된 게르만족이 갈리아에 침공하면서 이는 28년간 아우구스투스 일가가 3대에 걸쳐 집중한 게르마니아 전쟁 개막으로 이어진다.

기원전 14년 로마군은 드루수스의 지휘 아래 레누스 강을 건너 로마를 공격한 우스페스, 시캄브리 군대를 격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스페스족의 심장부까지 진격했다. 따라서 드루수스 군대는 레누스 하류를 도하해 우스페스 땅을 직접 응징한 다음, 그대로 북상해 시캄브리를 공격하여 이 일대를 편입했다. 이후 드루수스는 오늘날의 네덜란드 북부로 진격해 프리지아인의 땅을 정복한 뒤, 독일 북서부에 있던 우치족까지 공격해 그들을 사실상 로마령으로 편입시켰다. 이 작전은 불과 1년도 안 된 사이에 모두 끝이 났고, 드루수스 군대의 퇴각은 그해 겨울이 되면서 종결됐다. 이듬해 봄까지 로마로 돌아가 전황 보고를 하고 아우구스투스 밑에서 정치활동을 병행한 드루수스는 다시 레누스 강을 건넜다. 이때 그와 휘하 군대는 다시 항거하기 시작한 우스페스족을 공격한 뒤, 베저 강을 지나 북독일 일대를 휩쓴 뒤 로마 선단을 이끌고 북해를 통과해 북상, 지금의 덴마크 일대인 엘베 강 근처에 내려 공격할 정도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 두번째 전쟁에서 그는 엘베 강과 라인 강 사이에 있던 이셀 호수를 연결한 드루수스 운하를 건설하고, 이 일대에 숙영기지와 퇴역병 정착촌 등을 만들었다.

기원전 10년 봄, 드루수스는 다시 레누스를 건너 게르마니아 심장부로 향했다. 이때 그는 레누스를 가로지른 뒤 카티족과 1년 내내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카티족의 강한 항거에도 끝내 그들을 로마에 편입시켰다.

드루수스는 매년 겨울이 될 즈음, 로마로 귀환해 전황을 보고했는데, 이 시기의 전쟁 보고서가 발표된 직후 아우구스투스와 원로원은 크게 고무됐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이 유독 아낀[114] 드루수스의 전공과 전략에 크게 감탄했고, 원로원은 야누스 신전 문을 닫으면서 그 전공을 기렸다. 그리고 이 시기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와 원로원에게 개선식까지 허락받는다.

실제 그의 게르마니아 원정은 게르만족들조차 놀랄 정도로 대단했다. 그 이유는 드루수스의 작전이 과거 카이사르처럼 상당히 정공법이면서도 일대의 지리와 부족들간의 이해관계를 전략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인데, 드루수스의 전투들은 28년간의 게르마니아 원정 기간 내내 벌어진 여러 원정 중 아우구스투스를 가장 만족케했다. 사실,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 생전 당시부터 두 양자 중 드루수스가 자신의 후계자임을 공공연하게 드러냈고, 아그리파 급사 이후에는 아예 드루수스를 사실상 후계자로 생각해 이런 뜻을 원로원과 측근들에게 밝혔다. 따라서 드루수스는 28살의 젊은 나이에 법무관 임기를 마치자마자, 기원전 9년 양부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집정관에 당선되었고 다음해 개선식이 정해졌다. 이후 그는 집정관 자격으로 로마를 떠나 게르마니아 전쟁을 다시 수행했다.

기원전 9년의 전쟁은 게르만 부족들의 강력한 저항 탓에 꽤 고전했지만, 드루수스는 카티족과 수에비족을 모조리 격파한 뒤, 베저 강을 지나 광활한 늪지대와 울창한 숲이 펼쳐진 일대에서 여러 게르만족을 굴복시켰다. 그는 퇴각하는 척하면서 적을 격파하는 노련한 전술을 보여줬고, 총사령관인 본인이 솔선수범해 적진까지 돌진해 전군을 과감하게 밀어붙이기도 했다. 또 드루수스 군대는 굴복 후 저항하는 게르만족들을 다시 한 번 격파하기도 하는데, 이 시기 로마는 이 일대를 자신들의 영토로 거의 집어삼킨다. 이에 대해 디오 카시우스는 드루수스와 그 군대가 "모든 것을 자신의 방식처럼 약탈하고 끝내 진격했다"고 그 군공을 전하고 있다.

따라서 드루수스의 네 번째 원정은 무려 엘베 강까지 돌파했고, 로마인들은 드루수스 지휘 아래 난생 처음 가장 춥고 깊은 게르마니아 동쪽까지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시킬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레누스 강을 도하하던 중, 드루수스는 개선식을 얼마 앞두지 않은 상황에서 낙마 사고로 큰 부상을 입었다. 이후 그는 후송돼 군사기지로 돌아오는데, 그 후유증으로 여름철 숙영지(또는 겨울철 숙영지)에서 죽게 된다.[115]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의 죽음 이후에도 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드루수스 사망 후 아내와 심리치료를 받을 정도로 상심했지만, 죽은 양아들의 뜻과 업적을 계속 잇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이유로 양아들의 추도식에서 아우구스투스는 공개적으로 "저에게도 제 사랑하는 아들처럼 위대한 죽음을 내려달라"고 신께 빌면서, 아버지이자 국가원수로서 그 유지를 이어가겠다고 밝혔고, 군심을 다독인 다음 드루수스가 맡았던 업무를 티베리우스에게 맡긴다.

티베리우스는 32살의 젊은 나이답지 않게 동방, 서방 일대에서의 군사, 행정, 외교 부분에서의 경험과 실적이 대단히 풍부했다. 그의 첫 병영생활은 기원전 27년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경계의 군사기지에서 시작됐고, 재무관과 법무관 임기를 채우던 20대 초반의 나이에 이미 알페스 산맥과 일리리쿰, 달마티아 일대에서 여러 군사작전을 수행해 능력을 보여줬다. 기원전 20년 아그리파 밑에서 티베리우스는 동방 프로젝트를 담당하기도 했는데, 그는 파르티아와 아르메니아 사태에 대처함에 있어 군사행동을 병행하면서 실적을 증명했다. 아울러 그는 게르마니아 전쟁 개시 후 일리리쿰과 달마티아 일대를 소위 로마화하면서 다누비우스 수원을 발견하고, 동생 드루수스와 협력하면서 이 전쟁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로 게르마니아 전쟁 수행 사령관이 바뀐 상황에서도 로마군의 기원전 8년과 기원전 7년의 원정 역시 상당한 속도로 진척됐다.

티베리우스의 전략과 속주화 방법은 카이사르와 비슷했던 드루수스처럼 정공법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노련하고 효율적이었다. 그가 전임자처럼 고도의 심리전과 외교전을 계속 병행한 탓에, 친로마세력 포섭과 유인책도 여전히 진행되었다. 이런 탓에 게르만 부족들은 과거 드루수스의 원정 당시와 마찬가지로 티베리우스의 로마군을 효과적으로 괴롭히지 못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시캄브리족 외에는 별 저항없이 상당수의 게르만 부족들을 로마의 영향력 아래에 쉽게 편입시켰다. 이런 이유로 티베리우스의 부장 출신 역사가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이때 로마가 “게르마니아를 사실상 정복했다”고 표현했다. 티베리우스는 드루수스 요절 이후에도 레누스 전선과 다누비우스 전선을 오가며, 대 게르마니아 내의 상당한 영토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는데 이 시기 아우구스투스는 이미 노년에 접어들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 사후, 티베리우스 중심의 새로운 후계 구도를 구축하기 위해 그를 로마로 소환한다. 그 뒤 티베리우스가 로도스 섬으로 잠적해버리는 등의 소동을 겪게 되고 아우구스투스는 그 와중 우선은 점령한 지역의 안정화를 시도해보려 하였다.

기원전 3년, 아우구스투스는 양자 티베리우스의 후임 사령관으로 네로의 할아버지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임명했다. 아헤노바르부스는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보다 뛰어나진 않아도 꽤 훌륭한 야전사령관이었다. 그는 게르만 부족들이 매복한 늪지대를 지나 엘베 강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냈고, 이 일대를 정비했다. 그러나 이런 전공과 별개로 그는 게르만 부족을 대할 때 지극히 오리엔트와 레반트에서의 외교전략을 많이 차용했다. 하지만 그가 동방 일대에서 보여준 성과와 다르게, 게르만족들은 이 방식에 대해 의문을 드러냈다. 따라서 아헤노바르부스의 이런 전략은 기원전 5년 티베리우스가 애써 관계를 맺은 부족들과 갈등을 야기했고, 이 부분에서 로마는 약점을 노출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거의 끝나가는 전쟁을 확실하게 완성하기 위해 아헤노바르부스를 소환하고, 노련한 장군 마르쿠스 비니키우스를 파견해 정복과 게르마니아 속주 작업을 함께 돌입했다.

서기 6년, 티베리우스가 일리리아 대반란 진압을 위해 일리리아에 파견되었고, 아우구스투스는 지역 안정화에 적합한 인재로는 유능한 행정가가 적임일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이에 재능을 보인 바루스를 총독으로 부임시켰다. 이는 인사상의 큰 실책이 되었고, 이전의 장군들이 거의 완성한 대형 프로젝트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바루스는 그 지역의 통치를 맡아 동방에서 하던 대로 했으나 이러한 로마식 행정은 게르만족에게는 압제로 받아들여졌기에 헤르만(아르미니우스)이 대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아르미니우스는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 아래에서 로마인이 되고, 로마군 장교로 복무한 탓에 이 사건은 최악의 결과가 되고 만다. 이때 바루스는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매복해있던 게르만 군대에게 공격을 받아 휘하 3개 군단과 운명을 같이하였다. 이로써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일가 남자친족과 측근들이 다져 놓은 라인 강 동쪽의 점령지를 모두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비보를 접하고는 밤에 혼자 집에 틀어박혀서 "바루스! 내 3개 군단을 돌려줘!"하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3개 군단은 대군이라 보기는 어려운 병력으로 해당 군단이 소멸했다고 점령지를 모두 상실하게 된 것은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로 그 군대에는 바루스를 비롯해 그 지역을 통치하는 관료들이 대거 동원되었는데 군대가 소멸하면서 점령지의 통치 집단이 증발해 버렸다. 둘째로 해당 전과에 고무된 게르만족이 대규모로 봉기하여 군단 기지를 공격하였고, 3개 군단이 소멸된 직후의 공백으로 인해 그 기지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여 그곳이 모두 점령당한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효율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점령지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 주둔시켜 놓은 것에 기인한다. 셋째로 아우구스투스가 벌인 지나친 팽창 정책으로 인해 병력들이 지리적으로 멀리 배치된 데에 최소한으로 감축한 군단 수, 또한 임페리움을 황제가 독점하는 새로운 관료 시스템으로 인해 3개 군단의 소멸을 메울 수 있는 병력이 즉시 동원될 수가 없었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그 지역은 상실하게 되었고, 이에 대해 아우구스투스는 심하게 자책하긴 하였으나, 엘베 - 도나우 리메스의 구축은 반드시 해야한다고 보았다. 이에 그는 복귀한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의 장남 게르마니쿠스를 서기 10년과 서기 11년 다시 그 지역에 파견하여 재정복을 꾀한다. 이는 게르마니아 정복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는데, 고령이었던 아우구스투스는 두 혈육에게 레누스 강의 전선에 집중케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전선 복귀 이후 일단 바루스 패배 후 방치되다시피한 군사도로, 방치된 경작지와 정착촌을 재정비하며,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는데 주력했다. 이어 서기 11년과 서기 12년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 게르마니쿠스가 티베리우스의 두 차례 원정에 합류해 함께 레누스 강을 도하한다. 그렇지만 토이토부르크 전투 이후의 괴멸적 타격 탓에 티베리우스는 병력을 이동시키면서 친로마파 게르만족을 로마 점령지에 이주시키고, 저항하는 부족들에게 복수하기보다 인구를 분산시켜 안정적으로 그들을 로마 아래로 편입시키는 것에 집중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두 차례 원정은 아우구스투스의 영토확장 원정 중 가장 소득이 없었고 토이토부르크 전투 이후의 전력 유지에 초점을 맞춘 모양새로 흘러갔다.

서기 12년 겨울, 티베리우스와 게르마니쿠스는 나란히 로마로 귀환했다.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후계자 티베리우스의 권력승계를 위해, 다음해 원정을 담당할 레누스 전선 총사령관으로 게르마니쿠스를 임명하는데, 14년 8월 아우구스투스는 노환으로 서거한다. 이때의 일에 대해 타키투스와 디오 카시우스는, 서거 직전의 아우구스투스가 제국 확장을 끝내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14년 9월 원로원은 티베리우스에게 프린켑스 자리를 승계시키는 안건을 통과시킨 직후, 그와 중진급 인사들이 만나 선황의 유지를 재확인하는데 독대 내용은 추측만 있을 뿐 확실히 전해지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고대 로마인 저자들은 다양한 추측들을 하는데, 분명한 사실은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와 서기 12년 귀환 직후부터 게르마니아 전쟁과 관련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고 대략 이 문제에 대해 오랜 시간동안 심각한 고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자신이 수십년동안 맡은 이 프로젝트의 후임에, 자신의 조카, 양자, 상속자인 게르마니쿠스를 계속 총사령관으로 삼아 그 지역의 정복을 맡긴다. 그러면서 그는 오랜 게르마니아 전쟁 경험을 토대로 로마군을 재배치하는데, 로마 군단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8개 군단을 레누스 강변의 전선에 주둔시키고, 이를 각각 레누스 상류의 4개 군단(책임자: 가이우스 실리우스), 하류의 4개 군단(책임자: 아울루스 카이키나 세베루스)으로 세분화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서기 14년 게르마니쿠스는, 아르미니우스와 그 동맹 부족장들과 전투를 재개한다. 총사령관 게르마니쿠스는 부친 드루수스가 지휘했던 옛 군대를 이끌고 레누스 강을 도하했고, 늪지대와 울창한 숲이 많은 게르마니아에서 위험부담을 최소화하는 것에 주력했다. 따라서 게르마니쿠스는 과거 자신의 부친처럼 해군을 이용하기도 하는데, 이 전략은 로마군이 군용도로 없이 물자 소비를 최소화하고 신속히 게르마니아에서 원정을 치루는 것에 큰 도움을 줬다. 그리고 서기 16년, 게르마니쿠스는 휘하 부장 플라부스[116] 등과 함께 이디스타비소 전투에서 로마군의 극적 승기를 쥔 뒤, 8군단을 이끌고 오늘날의 하노버 서쪽에서 벌어진 앙그리바리 방벽에서 최후 결전을 벌여 아르미니우스의 게르만 동맹을 와해시키는데 성공한다. 따라서 게르마니쿠스의 게르마니아 전쟁은 후대 로마인 타키투스 등에게 지극히 토이토부르크 전투의 복수전 성격을 띠는 성격을 보였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티베리우스와 로마는 현실적 이유로 인해, 게르마니쿠스를 로마로 소환하고 병력을 모두 철수시킴으로써 엘베 강을 국경선으로 삼고자 한 아우구스투스의 계획을 백지화한다.

결국 엘베 강과 다뉴브(도나우) 강에 이르는 리메스의 구축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를 완전 포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오늘날의 라인 강과 다뉴브 강, 즉 로마인들이 말하는 레누스와 다누비우스를 경계로 하는 리메스를 구축하고 다누비우스 이남의 일리리쿰 정비 업무 담당자로 소 드루수스[117]를 파견해 선황의 유지를 현실에 맞게 수정한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역대 황제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황제였으며, 그가 확립한 시리아와 도나우 강의 국경선은 수백년에 걸쳐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3.5. 화폐 개혁[편집]


기원전 23년경부터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가 잠깐 시행하다가 암살로 중단된 화폐제도를 개혁한다. 카이사르가 생전에 기념용으로 소량만 발행하던 금화인 아우레우스를 정식 화폐로 인정하며 화폐제도를 손을 보려했으나 암살로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아우구스투스가 정식적으로 화폐제도를 대대적으로 손을 보게 된다. 이제 초강대국인 로마의 화폐는 지금의 미국 달러와 같은 기축통화가 되었으나 문제는 아직 가치가 안정이 되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화폐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정하게 된다.
  • 금화 : 아우레우스 무게 : 7.80g, 재질 : 100%, 가치 : 25 데나리우스, 퀴리날리우스 무게 : 3.89g, 재질 : 100%, 가치 : 1/2 아우레우스
  • 은화 : 데나리우스 무게 : 3.90g, 재질 : 100%, 가치 : 4 세스테르티우스, 퀴나리우스 무게 : 1.95g, 재질 : 100%, 가치 : 2 세스테르티우스
  • 황동화 : 세스테르티우스 무게 : 27g, 재질 : 황동, 가치 : 4 아스, 디폰디우스 무게 : 13.65g, 재질 : 황동, 가치 : 2 아스
  • 동화 : 아스 무게 : 10.90g, 재질 : 구리 100%, 가치 : 1/4 세스테르티우스, 콰드란스 무게 : 3.24g, 재질 : 구리 100%, 가치 : 1/4 아스
이 화폐체계는 거의 300여년간 로마의 화폐시스템의 근간이 된다.


3.6. 황제 숭배[편집]


아우구스투스는 내전 승리 직후, 실질적으로는 황제라고 해도 여전히 공화정 체제의 제1인자(프린켑스)라는 이중적 지위라는 한계와 최고권력자인 자신이 이끄는 중앙정부와 원로원 의원들로 구성된 지방속주 파견자들의 타협과 조율을 놓고 고민했다. 왜냐하면 이 시기의 로마는 일반적으로 원로원과 파견된 전직 집정관, 전직 법무관 출신 총독 사이의 끊임없는 보고와 서한 교환 그리고 현지 유력자들과 로마 중앙정부 사이의 소통으로 이뤄졌기에, 만약 그가 적합한 후계자를 선정하지 않을 경우 또 다른 내전은 불보듯 뻔했다. 따라서 공화정의 수호를 외치면서도, 프린키파투스 체제를 구축하려고 한 아우구스투스는 여기에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아주 교묘하고 이중적인 방식으로 중앙과 지방 속주들을 본인과 자신의 가문 아래 통제할 수단을 만든다. 그것이 바로 황제 숭배인데, 아우구스투스는 후대의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 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등과 달리 노골적으로 이를 황제의 명령, 중앙정부의 칙령으로 공포하지 않고 동방의 그리스, 소아시아를 시작으로 스며드는 방식으로 이를 추진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로마에서 최고권력자가 신처럼 숭배되기 시작한 시점에 대해, 그 시작은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였다고 언급되고 여러 논문들 역시 공식적인 황제 숭배는 아우구스투스 시대때 통치술로 도입됐다고 설명된다. 물론 이에 대해 로마의 전통종교가 기원이었다는 주장도 있고, 기원전 46년경 아시아 속주 총독이었던 이사리우쿠스 부임 당시 여신 로마에 대한 속주민들의 숭배 기록도 있기에 반론도 있긴 하다. 당장 기원전 2세기경부터 그리스인들의 최고 지배자 숭배 전통이 로마에 도입되어, 그리스와 소아시아 일대의 그리스 주민들이 공화정 시대부터 서기 3세기까지 로마 원로원을 숭배한 것이 확인되고 있다. 그래서 학자들 사이에서는 "왕정 시절부터 내려온 오래된 신앙이었다", "공화정 이래의 전통과 헬레니즘 세계의 조우로 만들어진 산물이었다" 등의 이야기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주장 속에서도 학자들이 말하는, 로마 제정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통치술 '황제 숭배'조치의 시작은 아우구스투스부터였다는 것에 거의 일치된 주장이 나온다. 이는 2세기 말 ~3세기 초의 원로원 의원, 행정가,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가 로마 관보상 내용을 기록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디오에 따르면, 황제 우상 숭배 결정이 내려지고 도입된 것은 기원전 29년 겨울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아버지' 카이사르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디비 율리우스로 하고 아시아 속주에 여신 로마[118]와 디비 율리우스를 신으로 모시는 신전 봉헌을 허락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이때의 일에 관해 디오는 "황제가 에페수스와 니카이아에 여신 로마와 아버지 카이사르를 디비 율리우스로 명명한 신전의 봉헌을 허락했다. 두 도시는 당시 아시아와 비티니아 속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황제는 이 두 도시에 거주하는 로마인들에게 위의 두 신(로마, 디비 율리우스)들에게 의례를 올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리스인이라고 불리는 외국인들에게는 황제 자신(아우구스투스)에게 신전을 바치는 것을 허락했다."고 말하며, 로마에서 최초로 살아있는 사람이 신격화되어 숭배되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이 명령 직후부터 아시아 속주에서는 페르가뭄, 비티니아 속주에서는 니코메디아에서 아우구스투스를 숭배하는 신전이 세워졌고, 아우구스투스를 신으로 여기며 그를 위한 제전이 페르가뭄을 시작으로 시작되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이는 관례로 정착하면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자 카이사르의 손자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이래로 그리스 세계를 비롯한 다른 속주들로 번져나갔다"고 밝혔다. 그러나 디오가 직접 지적했듯이, 아우구스투스의 황제 숭배는 여러 학자들의 주장처럼 로마인들에게 거북하고, 말도 안 되는 조치로 인식된 터라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에서는 대체로 살아있는 황제를 존경한다고 하더라도 현존하는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황제 사후 그를 신격화하여 다양한 신들을 숭배하면서 봉헌하는 개념으로 그를 기렸다고 말한다[119].

이런 디오의 기록 외에도 타키투스의 기록에서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듯, 아우구스투스는 황제 숭배를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 내에서는 노골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실제, 그는 늘 "일개 로마시민으로서의 제1시민(프린켑스)"로 소개했고, 주변이 황제 숭배를 위해 제단을 만들어도 마치 납득이 안 가는 이들에게 어쩔 수 없이 허락하는 것이라는 자세를 취하며, 그리스인과 여타 속주민들의 요구에 대해 자신과 로마 여신 또는 수호신 아폴로와의 합동 숭배에 한정해 이를 허락했다. 대신 그는 그 외 지역에서는 황제 숭배를 적절히 사용했다. 그 예로 그는 황제 숭배를 대놓고 할 경우, 증손자 가이우스의 사례처럼 "미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원로원에게 자신이 원하는 명예 칭호를 받아 이 칭호를 우선적으로 내세우는 것에 집중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와 이탈리아 안에서는 '국가의 아버지', '조국의 수호자', '공화정 체제의 보호자' 등을 내세우거나, 자신의 수호신을 원로원에게 결정받은 뒤 최고제사장으로서 그 신의 이름으로 봉헌케하는 방식을 이용했다[120]. 반면 로마의 통치를 받지만 아직 그가 직접 방문하지 않거나, 경제력이 떨어져 조공, 선물을 받기 어려운 제국 속주 지방들, 일찍부터 지방자치와 전통이 지속된 지중해 동쪽에서는 그들의 전통, 관습 안에 황제 숭배를 교묘하게 도입시켰다. 따라서 기원전 29년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평화를 가져온 업적을 기린다", "아우구스투스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은덕을 받았다", "우리가 살 수 있는 모든 곳에 영광을 가져다 주었다" 등을 이유로 동방에서 서방으로, 도시에서 시골로, 농촌에서 변방으로, 육지에서 섬으로, 속주에서 로마로, 아우구스투스와 그 일가를 다양한 신의 이름으로 함께 봉헌하는 제사와 신전 건립, 제단 축조가 시작됐다.

게르마니아 전쟁, 파르티아와의 외교 문제 등 자신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직접 담당한 대형 국가 프로젝트들에는 반드시 황제 숭배가 활용됐다. 일례로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대 드루수스는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 총독으로 부임한 이후, 기원전 12년경 갈리아 일대의 모든 유력자들을 불러 모은 다음,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대표적인 클리엔테스 도시 루그두눔(오늘날의 리옹)에 '아버지'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숭배 제단을 자발적으로 바치게 하고 이를 매년마다 하도록 했다[121]. 또 그는 갈리아 행정 체계와 군사방어 체계를 정비하면서 루그두눔을 아우구스투스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전체를 숭배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는데, 이런 이유로 대 드루수스의 손자 칼리굴라는 즉위 후 화폐주조소를 아예 루그두눔으로 영구 이전시키면서 자신과 아우구스투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사람들의 얼굴을 찍어낸 뒤 이를 위한 제단까지 만들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의 측근들도 비슷했는데, 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장군의 경우 기원전 3년 진군 중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으로 된 제단을 만들게 한 뒤, 속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이를 기리게 했다.

이 외에도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6년, 태양력을 아시아 속주 전역에 도입하면서 아예 황제의 생일이 새로운 달의 이름으로 널리 퍼지게 할 때 황제 숭배를 활용했고, 이런 조치를 서방 속주 내에서 로마영내에 일찍 편입된 히스파니아 등에서도 구렁이 담넘듯 교묘하게 취했다. 이때의 조치 중 아시아 속주의 경우, 로마 속주정부는 "그대들의 땅에 아우구스투스와 로마의 지배는 공고하며, 황제의 탄생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고 포고문까지 발표했다. 그러면서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 시대동안 가혹할 정도로 세금이라는 이유로 수탈이 자행된 그리스, 소아시아 속주들을 시작으로 황제 숭배 조치를 통해 오직 황제 자신과 그 일가의 이름 외에는 결단코 총독이나 장군, 현지 유력자의 이름으로 수탈이 자행되지 못하게 했다. 물론 기원전 15년 갈리아에 파견된 율리우스 리키누스[122]가 이를 무시하듯 세금을 착복하고 수탈한 일도 있었다. 이때 리키누스는 갈리아인들이 함부로 재산을 축적해 봉기하는 일을 방지할 목적으로 "로마의 일년은 12개월이지만 14개월이 있어서 추가로 세금을 내야 한다"라는 궤변을 하면서, 갈리아인들을 속여 두달치 세금을 자신의 재산과 갈리아 국고에 각각 채웠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거짓말은 곧 들통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갈리아인들은 자신들의 보호자였던 아우구스투스를 직접 찾아가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으로 이렇게 수탈하고, 세금을 착복하면 됩니까?"며 항의했는데, 이 사건의 경우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양자 대 드루수스가 개입해 단번에 일단락됐다[123]. 따라서 이런 조치들은 동방, 서방 속주민들에게 놀라울 정도로 지지를 받게 되었고 , 이를 증명하듯 최근 발굴된 미틸레네 비문에는 아우구스투스와 그 일가의 은덕과 그들이 자신들에게 안겨준 보호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즉, 아우구스투스는 황제 숭배를 통치술의 하나이자 각 속주 행정 체계 정비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프린키파투스 체제 정착 수단으로 널리 활용했다. 실제 이런 이점들로 페르가뭄의 경우,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아예 특허받듯 따낸 '아우구스투스 숭배와 제전' 권한을 내놓지 않기 위해 다른 도시들과 외교전까지 벌였다고 한다. 또 티베리우스 즉위 후에는 무려 11개 도시가 서로 황제숭배와 그 보호권한을 받기 위해 경합하면서, 서로 "우리가 로마 여신과 황제 당신의 가문의 클리엔테스로 더 적합하다"며 싸우기도 했다. 따라서 디오, 타키투스의 주장처럼 2대 황제 티베리우스는 이를 반영해 그리스인들과 아시아 속주에서 "제발 당신을 숭배하게 해달라"고 하소연하자, "아버지 아우구스투스 시절처럼, 나만 숭배하지 말고 내 모후와 원로원, 신까지 함께 봉헌해 숭배하는 전제 아래에서 그렇게 하라"고 명령한 일도 벌어졌다.


3.7. 부자세습과 죽음[편집]


서기 14년 8월 19일, 로마의 팔라티노 황궁을 떠나 나폴리로 유람을 떠났던 늙은 황제는 놀라에서 갑자기 용태가 악화되었다. 임종 직전에 티베리우스를 불러 은밀한 대화를 나눈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품에서 평온하게 세상을 떠났다.[124] 향년 76세. 그가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

Acta est fabula, plaudite(이야기는 끝났다. 박수를 쳐라).

이 에피소드의 근거는 수에토니우스인데, 정작 수에토니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이 유언을 그리스어로 남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의 유언은 위 라틴어 번역보다 훨씬 더 길었다. 우선 그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내가 인생에서 나에게 주어진 배역을 잘 연기한 것 같더냐?"라고 묻고는 그리스어로 이렇게 말했다.

εἰ δὲ πᾶν ἔχει καλῶς, τῷ παιθνίῳ, δότε κρότον, καὶ πάντες ὑμεῖς μετὰ χαρᾶς κτυπήσατε(그렇다면 기쁜 목소리와 박수로 이 배우에게 찬사를 보내다오).


이런 유언 외에도 그는 가족들과 친구, 측근들에게 이런 말도 남겼다. 이는 후일 정적들에게 그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 손자 게르마니쿠스, 소 드루수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등이 아우구스투스 사후에도 뜬소문에 시달린 배경이 됐다.

"율리아는 이제 괜찮소?"(증손녀 율리아 리비아가 열병에 걸려, 간호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병석에서 아내 리비아와 손자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내가 그때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해, 그 아이를 얻지 않았더라면..."(측근들이 모인 병석에서 딸 율리아의 비행에 대한 상심을 공개적으로 토로하면서)

이런 것 외에도, 야사에 따르면 죽기 직전까지도 후계자인 티베리우스나 주변 사람들에게 "게르마니아에서의 일은 내 탓이 아니지?"라고 물으면서 그 일을 끝까지 후회했다고...

서기 14년 당시, 로마는 공화정 이래 원로원 내 명예직 프린켑스 직의 부자 승계가 없었다. 따라서 타키투스의 언급처럼 아우구스투스가 죽기 전, 자신의 아들 티베리우스를 위해 미리 프라이토리아니를 티베리우스가 살고 있던 사저를 둘러싸고 지키도록 명령하고, 프라이토리아니가 명령을 그대로 따른 모습은 분명히 이례적이었다. 이때, 이를 본 원로원 인사들은 프라이토리아니가 무방비가 될 이탈리아와 로마를 방어하기 위한 군대가 아님을 제대로 깨달았다. 그러나 '새로운 공화정 체제'와 공화국 수호를 외친 아우구스투스의 아성은 대단해, 그 누구도 로마가 형식적인 공화국일 뿐 제국이 되었다는 것에 공개적으로 반발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같은 해 8월, 아우구스투스의 상태가 공식 발표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를 지근거리에서 호위한 근위대장 루키우스 스트라보[125]가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티베리우스에게 정식으로 충성을 맹세했다. 이어 근위대장과 대대장들이 무장한 프라이토리아니 병력과 함께 현직 집정관 두 명을 찾아왔다. 그들은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향해 두 집정관이 주종 관계 형식에 따라 충성서약을 하라고 요청했다. 말이 요청일 뿐, 강요와 명령이라서 두 집정관은 형식상 동료 의원인 티베리우스에게 충성선언을 했다. 이 맹세 직후, 프라이토리아니가 정식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죽음을 선포하면서, 원로원에게 묵념과 추모를 하도록 명령하고 이를 철저히 감독했다. 즉, 프라이토리아니의 충성과 원로원 통제를 시작으로, 우리가 로마 제정이라고 하는 로마 제국의 첫 세습이 시작됐던 것이다.

로마로 운구된 황제의 유해는 화장되어 자신이 지은 아우구스투스 영묘 중앙에 안장되었다. 이날 고인 추도사가 가문과 지위를 세습한 티베리우스 및 유가족들의 참석 아래 국장으로 열렸다. 그런데 이날 프라이토리아니는 아우구스투스 장례식에 참석해 공화정기 일반 병사들과 다른 태도를 취하며 다시 한번 참석자들을 놀래켰다. 술라, 카이사르 장례식때의 베테랑 퇴역병, 현역병들의 전례와 달리, 그들은 아우구스투스 관을 향해 절대복종을 다짐하면서 새로운 임페라토르 티베리우스에게 절대 충성을 맹세하고 이를 다시 한번 외쳤다. 그들은 공화정기 병사들처럼 무리를 짓지 않고, 계급에 따라 도열해 여느 장례식과 그 분위기가 다르고 이질적인 모습을 띠었다. 왜냐하면 군대조직 전체가 황제와 황제 가문을 절대적으로 따르겠다고 재차 밝힌 적은, 공화정기 영웅, 군벌 정치가 장례에서도 없던 모양새였기 때문. 따라서 프라이토리아니는 로마 제정을 상징하는 집단이며, 로마 제국 황제 승계에 있어 상징과 같은 부대임이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1] 고대 서양에서는 마을마다 주민들이 가져오는 밀가루를 반죽하고 구워서 빵으로 만들어 파는 빵집이 하나씩 있었다. 그런데 빵집 주인들 중에서는 주민들로부터 받은 밀가루 중 일부를 몰래 빼돌려서 숨겨놓고 밀가루 상인들한테 팔아넘기는 식으로 돈을 버는 악덕 업자들도 많았다. 따라서 빵집 주인이나 혹은 빵장수라고 하면 도둑이나 사기꾼이라는 나쁜 이미지가 있었고, 그런 이유로 로마에서 상대방을 비난할 때 빵집 주인이라는 말이 쓰였던 것이다.[2]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고종 사촌 동생이다. 아티우스의 어머니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고모이다[3] 옥타비우스 가문.[4] 이곳은 포룸 로마눔과 매우 가까운 팔라티누스 언덕에 있던 곳이다.[5] 로마의 관습에 따르면 아이가 태어났을 때, 모든 생살 여탈권과 가문 편입 여부는 전적으로 가장에 달려 있었다. 태어났을 때뿐 아니라 사유만 정당하면 아버지는 아이들을 개인적으로 죽일 수 있었는데, 범죄나 간통이나 전쟁 중 도망쳤다거나 하는 식으로 명예를 더럽혔다는 것만으로도 그냥 죽일 수 있었다. 이를 가장권 행사라고 했는데 게르만법과의 큰 차이 중 하나로 게르만법에서 한 인간은 마을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개념이 우선이지만 로마에서는 가족 공동체가 우선했다. 법은 가정의 문턱을 넘지 못한다라는 유명한 법언이 로마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게르만족도 서서히 로마의 영향을 받아 아버지가 아이들을 마음대로 죽이는 게 낭만적이고 합법적인 일로 바뀌게 된다.[6] 안토니우스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로마 시대 기사 계급은 평민들 중 재산의 규모로만 정해졌으며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 본토의 부유한 자영농 계급이 몰락한 뒤로 금융업자, 상인, 운송업자, 공장 경영자를 뜻했다. 그중에 금융업자는 세금 징수, 환전, 고리대금업 등 사람들이 싫어할 만한 모든 일을 겸했는데 전통적으로 로마 농민들이 경멸하는 존재이기도 했다.[7] 수에토니우스의 <황제 열전>[8]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고종 사촌 동생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종손이기도 하지만, 폼페이우스의 재종손이기도 하다. 카이사르 쪽의 촌수가 더 가깝다.[9] 조카의 아들이 종손, 외종손이라고 쓰고, 종손이라고 부르는 것이 허용된다. 그러나, 외외종손, 외외종조부라고 단어는 없다. 따라서 국내 저자, 번역가들은 이런 사정을 고려해, 무리해서 외외종손, 외외가 같은 비표준 친족단어를 만들어 사용하지 않고 있다. 대신 외종조부, 외종손이라고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아우구스투스가 카이사르 누이의 외손자이기에 은연 중 외외종손이라는 혈연상 의미를 기술해 설명 중이다.[10] 옥타비우스 가문 출신이란 뜻이다. 로마인은 입양되면 입양된 집안의 성과 씨족을 부여받았고 자신의 출생 가문 이름을 약간 변형시켜 뒤에 붙였다.[11] 카이사르, 프린켑스, 임페라토르 등 로마 황제들이 물려밨던 칭호들이 대부분 전제 군주의 호칭으로 남았듯, '아우구스투스' 또한 로마 황제의 칭호로 남았다. 신성 로마 황제의 칭호에까지 덧붙으며 명맥을 유지했다.[12] 최근 발간된 가톨릭 성경에서는 폰티우스 필라투스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라틴어 원음 그대로 쓴다. 로마 가톨릭에서도 이전에는 ‘토마스’를 ‘도마’라고 표기하고 발음하곤 했다. (예: 도마 안중근)[13]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부분이 Καισαρος Αυγουστου(Caesaros Augoustou, 직역하면 아우구스투스의 카이사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어에서 속격은 소유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동격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말의 뉘앙스를 고려하여 옮기면 ‘아우구스투스 황제’ 혹은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될 것이다. 개역 성경에는 ‘가이사 아구스도’라고 되어 있다.[14] 전 부인에게서 얻은 딸 마르키아가 소 카토의 아내이기 때문에 소 카토의 장인이기도 하다.[15] 카이사르의 조카딸과 혼인하면서도, 소 카토를 사위로 맞는 등 카이사르파, 옵티마테스파 양쪽과 다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내전의 참화를 무탈하게 피해갔던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16] 오늘날의 스페인. 이베리아 반도.[17] 미술 시간에 석고상으로 자주 나오는 그분. 아우구스투스는 정치에서는 유례가 없을 정도의 먼치킨스러운 능력을 보여줬지만, 군사적인 재능은 없었다. 물론 아우구스투스는 본인에게 군사적 재능은 없었지만 인재 활용은 잘 했고 정치적 재능은 차고 넘칠 정도였으므로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가 이뤄낸 군사적인 성취는 많은 부분이 아그리파의 공이었다.[18] 마키아벨리에게 오현제로 묶여 소개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안토니누스 피우스와 그 양자이자 사위이며 처조카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는 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도 비슷한데, 이 경우에는 하드리아누스가 누나의 손녀의 딸인 비비아 사비나와 결혼했고,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가 미성년자일 때 오촌 당숙이며 후견인였음에도 양자로 삼겠다는 공개 표현을 명시적으로 하지 않아, 트라야누스 급사 직후부터 큰 문제가 됐다.(자세한 내용은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편 참고 바람)[19] 카이사르의 유산을 옥타비아누스의 이름으로 나누어준다는 말은 곧 그가 바로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는 것을 공언한 거나 다름없으므로 옥타비아누스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해질 수 밖에 없다.[20] 물론 이런 호칭은 지지자들 사이에서만 통용되었고, 반대파 정치인들은 그를 카이사르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를 줄기차게 옥타비아누스로 불렀다. 후대의 로마사 연구자나 애호가들조차 이 시기의 아우구스투스를 옥타비아누스로만 부르지 카이사르로 부르는 일은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대와 후대를 통틀어 옥타비아누스의 이런 노력은 눈물날 정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권력을 잡은 것은 최근 일이기는 했으나 로마 왕가와 기원이 동일했던 율리우스 가문과 옥타비우스 가문의 사회적 지위는 냉정히 말하면 차이가 많이 났고, 외형상 강인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주는 십대 소년에 불과했던 옥타비아누스의 모습에서 카이사르를 떠올리는 것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일부 카이사르 지지자들조차도 옥타비아누스를 카이사르의 이름을 참칭하는 허풍선이 어린애로 여겼다. 이는 훗날 증명되었듯 이 소년이 갖고 있던 내면의 힘을 고려했을 때 꽤나 부당한 평판이었으나, 필리피 전투 등 전장에서 군사적으로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던지라 이런 시선은 내전기 최후의 승자가 될 때까지 끈질기게 옥타비아누스를 과롭혔다. 마찬가지로 입양을 통해 이름을 얻었으나 자연스럽게 소(小) 스키피오로 불리며 로마의 일인자로 등극했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출신 가문인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문이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가문과 완전히 대등한 명문가였고, 서로가 정치적, 혈연적으로 오랜 기간 맺어왔던 밀접한 관계가 당대 로마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스키피오 가문의 당주로 인정받을 수 있던 것이다. 아무튼 이후의 일관된 행적을 고려해봤을 때 칭호와 선전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이는 큰 고민거리였고, 결국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로마의 명실상부한 일인자로 등극하며 카이사르라는 이름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명망이 쌓인 뒤, 충분히 권위가 있으면서도 전제군주를 연상시키지 않도록 주의깊게 고른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이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하게 된다.[21] 즉,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후 총사령관에 충성하던 사병들이 공적 직위가 없는 그의 아들에게까지 대를 이어 충성하는 일종의 개인 재산화된 것으로 나라에 망조가 든 심각한 문제에 해당된다. 사실 이 문제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동맹시 전쟁의 지휘관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이끌던 부대를 세습한 뒤 술라의 내전에 참가한 것으로 충분한 조짐이 보이던 상황이었다. 물론 옥타비아누스 본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내전이 평정된 이후에는 제대로 제도를 개혁하여 군대가 사병화되는 것을 방지하였다.[22] 황제로 즉위한 후의 이름 중 DIVI FILIVS가 신의 아들이라는 뜻이다.[23] 여담으로 칼푸르니아는 남편이 암살됐다는 소식을 듣자, 충격을 크게 받은 나머지 정신을 잃어버린 사람마냥 슬픔에 잠겨 여자 노예들을 데리고 집에서 뛰쳐 나갔다고 한다. 이후, 그녀는 남편의 유언장을 가지고 있던 안토니우스에게 달려가, 가문의 열쇠, 재산, 카이사르의 모든 개인 서류를 맡기며 본인과 가문, 양자로 입양될 외종손의 안전을 담보해달라고 했다고 전해진다.[24] 칼푸르니아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원전 42년 이후부터,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와 혈연적으로 연결된 자신의 어머니 아티아를 '자상한 어머니', '휼륭한 어머니' 등의 선전 대상으로 삼아 지지자들에게 홍보했다.[25] 당시 옥타비아누스의 세력이나 전력을 봐도 안토니우스에 비하면 밀리는 편이었고 심지어 전쟁 관련 능력치 역시 안토니우스 쪽이 한참 앞섰다.(최소한 카이사르는 장수로서 능력은 폼페이우스에 뒤지지 않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장수로서 능력은 없느니만도 못했다.) 그걸 순전히 정치력만으로 뒤엎은 것이니 이런 말이 안 나올 수가 없다.[26]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친부[27] 기원전 43년 키케로와 쌍방 패드립이 오가는 말싸움[28] 카이사르는 이미 정치활동을 시작하기 전부터 자신은 민중파라는 것을 공언하고 다녔던 인물이다. 이 때문에 술라에게 쫓기기도 했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평생동안 카이사르는 민중파로 살았으므로 당연히 그 유산을 물려받은 아우구스투스도 민중파(정확히는 민중파의 일파인 카이사르파겠지만)로 봐도 이상하지 않았다.[29] 끝까지 유지되었던 개인적 교분과는 별개로, 키케로의 카이사르에 대한 적개심과 서로의 정치적 대립, 카이사르 암살자들에 대한 지지는 당대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놓고 배신을 공언하고 다녔으면서도 키케로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반대 입장에 서있던 카이사르의 후계자를 쉽게 조종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실제로는 카이사르조차도 뛰어넘는 천재적 모략가였다는, 계산에 넣기 힘들었던 규격외의 변수를 감안하더라도 이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판단이었다.[30] 이렇듯 양부 카이사르는 뛰어난 정치가라는 것과는 별개로 믿었던 이들로부터 배신당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데 비해 아우구스투스는 오히려 정적들의 뒤통수를 후린 적이 꽤나 많았다.[31] 현재의 북이탈리아.[32] 당시 로마군은 카이사르에게 충성을 하고 있어서 카이사르의 후계자였던 옥타비아누스가 아니라면 군대를 움직이기 힘들었다. 물론 원래대로라면 어떻게든 이를 회수했어야 했지만 이미 로마군은 카이사르의 사병이나 다름없는 상태라 말처럼 그렇게 쉬울 리도 없었고 무엇보다 공화파는 군대에게 줄 농지를 자기들이 쥐고 놓지 않았던 터라 이들이 말을 듣게 할 명분도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죽은 카이사르의 군대 대부분을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식 지휘권을 부여한 것이다.[33] 수에토니우스는 그냥 제정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제정에 관한 저술은 제정에 부정적이지만 그 근거가 빈약하거나 찾기 힘든 경우가 많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34] 히르티우스는 갈리아 전기의 마지막 챕터를 카이사르 대신 쓸 정도로 카이사르의 측근이었다.[35] 당시 군대는 카이사르에게 충성했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를 임명하지 않았으면 오히려 병사들이 안토니우스에게 투항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과정은 안 봐도 비디오로 옥타비아누스에게서 군권을 뺏은 뒤 지위는 높지만 실권은 없는 그런 자리에 앉혀서 꼭두각시 노릇이나 시킬 것이 뻔했다.[36] 그 당시 옥타비아누스는 공식 경력이라고는 없는 19세의 어린애였다. 집정관의 제한 연령은 42세에 명예로운 경력(재무관, 법무관, 안찰관 등)이 있어야 했다.[37] 안토니우스가 전투에서 지긴 했어도 영향력과 힘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이 선택은 옥타비아누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납득이 가는 게, 원로원 입장에서 정치적 노선이 달라 눈에 가시 같이 여기지만 필요악 같은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를 집정관 임기가 끝난 후에 해산시켜버리기라도 하면 그의 입지가 굉장히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도 쿠데타를 일으킨 결정적 계기가 군대 해산 논란 때문이었다.[38] 1차 삼두정치의 주역들은 원로원을 무시했을지언정 대놓고 숙청은 안했다. 이는 1차와 2차 삼두정치 간의 사정이 달랐기 때문인데 기본적으로 1차 삼두정치 시절에는 돈의 크라수스, 무력의 폼페이우스, 민중파의 거두 카이사르 세 사람은 사실상 당시 로마 그 자체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또한 이들은 각각 기사계급, 군대, 평민계급을 대표하기도 했다. 1차 삼두정치 시절의 명분은, 가장 큰 게 원정 갔다 돌아온 폼페이우스의 병사들에 대한 봉급 미지급 문제였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문제는 제대병들에게 가야 할 공공 재산을 원로원에서 자기들 멋대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기 명분이 확실했고 세력으로 봐도 원로원파 입장에서는 상대도 안되었다. 또, 원로원을 결집하여 삼두정치에 반대할 만한 거물급 정치가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근본적으로 원로원파 정치가들은 필연적으로 인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2차 삼두정치의 일원들은 1차에 비해 무게감도 떨어졌고 비록 원로원파가 카이사르 암살을 통해 민중들에게 인기가 없긴 했지만 그래도 공화제로 돌아가자는 명분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거물 정치가인 키케로가 뒤에서 버티고 있었으므로 삼두파 입장에서는 숙청이 필요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39] 당장 술라파였던 크라수스가 그렇게 재산을 많이 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40] 무고한 사람도 희생되었는데, 희생자 재산 역시 '삼두'의 손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즉 숙청은 반대파 척결용이기도 했지만 재산 약탈용이기도 했다. 사실 이런 식의 숙청은 술라 및 그의 추종자들이 먼저 실컷 써먹었던 방법이니[39] 누가 누굴 원망할 처지도 아니었다.[41] 옥타비아누스는 키케로를 희생하기로 양보하는 대신 레피두스는 친형을, 안토니우스는 외삼촌을 제물로 바치기로 협의했다. 권력욕 앞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드물지 않는 사례 중 하나를 보여준다...만 실제로 죽은 사람은 키케로 뿐이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조용히 처박혀 사는 것만으로 더 이상 문제삼지 않았다.[42] 사실 굳이 이틀이나 반대한 이유도 자기 지분을 늘리기 위해서였지 키케로를 위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다른 두 명은 반대파라고는 해도 실제 가족이나 친척인데 비해 옥타비아누스만 사실상 혈통상으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키케로였다.[43] 비슷한 사례가 앞서 있었는데, 바로 (양)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간의 대결 때였다. 장인-사위 관계로 둘을 묶고 있던 율리아가 죽은 직후였는데, 원로원은 폼페이우스를 밀어줘서 카이사르를 내쫓으려 했다.[44] 재미있게도 앞서 제1차 삼두정치에서도 비슷한 구도가 성립되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양아버지이자 역시 서방을 선택한 카이사르, 빠르게 몰락한 크라수스 & 레피두스, 함대를 거느린 폼페이우스 & 안토니우스.[45] 옥타비아누스는 정치가로서는 끝판왕급 능력을 지녔지만 군략가로서의 재능은 형편없었다. 오죽했으면 카이사르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그리파를 붙여줬을 정도였다.[46] 풀비아와 첫 번째 남편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사이의 딸. 안토니우스는 풀비아의 세번째 남편이었다.[47]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방위를 맡겼던 레피두스가 이들에 의해 로마에서 쫓겨났다.[48] 안토니우스는 풀비아가 쫓겨난 후 풀비아를 만나 쓸데없이 일을 벌렸다고 질책했다고 하며, 안토니우스의 부하들은 대부분 옛 카이사르군이어서 카이사르의 후계자를 적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49]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와 코르넬리아 술라의 딸이다. 코르넬리아 술라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딸인 폼페이아 마그나와 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유일한 아들인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딸이다.[50]이집트 소재[51] 안토니우스의 전 아내인 풀비아 때문에 한번 사이가 벌어져서 이를 틀어막기 위해 옥타비아누스가 정략결혼으로 자기 누나 옥타비아를 안토니우스에게 시집보냈다.[52]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군주론의 리더 스타일이다.[53] 불법인 건 아니었지만 당시 로마인들에게 남의 유언장을 생전에 공개하는 건 매우 몰상식한 행위로 여겨졌다.[54] 로마에 남아있던 안토니우스의 추종 세력은 옥타비아누스의 주장에 반신반의 하였다. 이들은 "설마 안토니우스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라고 생각하거나 "조작된 거야"라고 여기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가 막히게도 옥타비아누스의 주장은 대부분 사실이었고 그 결과, 많은 수의 안토니우스파가 옥타비아누스에게 붙게 된다.[55] 사정이야 어찌 됐든 전쟁을 벌인다면 당연히 안토니우스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 판단이었다. 실제로 전쟁 수행 능력은 안토니우스 쪽이 압도적이었기도 하고.[56]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마리우스, 술라의 내전이나 2차 삼두 정치가들이 또다시 피의 숙청을 벌인 선례가 있었기에 정치가들은 한쪽이 조금만 약해진 조짐이 보이면 즉시 갈아탈 준비를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게다가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그의 정치력, 인간적 매력, 아니면 파트리아로 보는 인간적 유대감과는 동떨어진, 그냥 단순히 군사력과 뛰어난 군사적 능력만 보고 안토니우스의 승률이 더 높다고 생각하고 지지하던 상태였다. 그래서 안토니우스의 한번의 패배는 그를 지지할 이유를 없애 놓은 것이었다. 또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낳은 3명의 자식들에게 로마를 삼분해서 유증해주겠다라는 굉장히 이상한 방침을 발표했는데, 그로 인해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국가의 적(enemy of state)이자 모든 공적에서 추방된 반역자로 규정된 상태였다.[57] 거기다 정작 안토니우스가 이끌던 로마군은 이미 안토니우스가 국가의 적이 된 데다가 그들 자신도 로마의 배신자가 된 처지니 처지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쨌거나 동방의 부와 안토니우스의 군사적 능력으로 이런 불만을 무마하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안토니우스가 패배하자 이들 중 대다수는 탈영하여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하였다.[58] 알렉산드리아는 사실 여러 개가 있었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건설한 도시들에게는 알렉산드리아라고 붙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중 대표적인 도시는 바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였다.[59] 당시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에서 매우 유명했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라는 두 거물들과 염문을 뿌리고 안토니우스를 정신 못 차리게 한 클레오파트라의 악명은 로마 시민들에게 있어 상당한 것이었다. 오죽했으면 로마 시민들은 "그 유명한 이집트 여왕 좀 보자"라고 했을까...[60] 인류사에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 조각 작품이다. 이 작품 전까지 인간을 묘사할 때는 신에 대한 겸손의 의미로 고개가 약간 숙여져 있다. 저 위풍당당한 포즈는 신들의 조각상을 만들 때 쓰던 구도로, 처음으로 한 인간을 신격화한 작품이다.[61] 아우구스투스가 프린키파투스 체제를 만든 이후, 자신이 훌륭한 리더십을 갖춘 정치인이자 내전을 종식시킨 군사령관이며 로마의 전통과 종교를 보호하는 종교지도자임을 강조한 대표작품이다. 흉갑 부분은 이를 잘 설명하는데, 갑옷 위의 큐피트와 돌고래는 율리우스 가문이 베누스의 후손임을 강조하는 의미이며, 흉갑 하단의 조각은 자신과 후계자들이 파르티아 문제를 외교적인 노력으로 해결하고 로마의 평화를 가져왔다는 의미를 뜻한다. 그리고 흉갑에 묘사된 남성 중 중앙 왼편(해당문서 사진 기준)에 보이는 완전군장 차림의 키 큰 남성이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자 후계자 티베리우스, 오른편의 수염있는 남성이 파르티아의 왕 프라아테스 4세인데, 이 작품에서 아우구스투스는 후계자 티베리우스가 전쟁의 신 마르스로도 해석되게끔 작품을 구성하여 자신의 가문이 거둔 업적을 한층 강화했다.[62] 앞면에는 "카이사르, 콘술 6회"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아이깁투스와 나일 강을 정복함을 표현 중이다.[63] 아우구스투스가 적고, 원로원이 오타와 문법을 수정한 다음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가 추가 검토해 최종 완성됐다. 원판은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위치해 있었고,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직후 티베리우스 카이사르의 명령으로 설치됐다고 명시되어 있다. 복제본은 제국 각 속주마다 배포돼 각 관공서와 신전 등에 설치됐는데, 현재 원판은 사라졌고 터키 등에 배포한 복제판 중 일부만 남아있다.[64] 이는 동서분열 전 황제들 중 압도적인 최장기 집권기록이다. 이후 황제들을 보면, 30년간 재위했던 콘스탄티누스를 빼면 22년이 가장 긴 재위기록이었다.[65] 아우구스투스는 18세에 정치판에 뛰어들어 20대에 집정관을 지냈다. 이는 보통 30대에 호민관이나 재무관에 당선되어 정치인 생활을 시작하고 40대에 집정관을 지낸 동료 정치인들과 비교했을 때 10년에서 20년 이른 출세였다. 그러면서 정치인들의 평균적 수명보다도 20년 이상을 더 살았으니 아우구스투스는 경쟁자들에 비해 압도적인 시간적 우위를 누릴 수 있었다. 덕분에 아우구스투스의 행위가 공화국의 모스 마이오룸에 위배되고, 당시에는 그런 행위가 허용되지 않았다고 근거를 댈만한 기억과 권위를 가진 사람은 아우구스투스가 권력을 굳히는 과정에서 전부 퇴장해버렸다. 아우구스투스에 도전할 연륜과 권위가 있으면서도 장수한 인물로는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가 있었으나, 심정적 공화파였던 그는 안토니우스 편에 섰다 그의 패배 이후 정계에서 은퇴해 저서 집필에 전념했던지라 아우구스투스에게 도전할 처지가 아니었다.[66] 원로원 소집 및 폐회권, 발언권 부여, 원로원 회의 장소 지정, 원로원 회의 절차 및 질서통제권, 로마 공화국과 원로원 이름으로 외국 대사와의 면담 및 교섭, 원로원 최종권고 명령권.[67] 후기 제정, 즉 전제정(도미나투스) 아래에서 로마 황제는 '프린켑스=임페라토르(황제)' 개념이 일치하지 않는다.[68] 이 때문에 전통적으로 로마 제국의 시작은 기원전 27년으로 잡는 일이 많다.[69] 디오는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티베리우스, 두 친혈육 가이우스(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가 그들이라면서 이들이 그 유지를 받아 제정을 완성했다고 제시했다.[70] 근위대(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끄는 근위대장 같은 자리는 기사계급 로마인들의 전유물이었고, 아이깁투스 장관 자리는 이집트 병합 당시부터 총독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71] 형식상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개혁개방을 시도했던 덩샤오핑의 접근법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덩샤오핑은 분명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집단농장을 해체하고 사영기업을 허용, 주식시장을 개장하는 등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했으나, 그가 사회주의를 버렸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는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72] 원로원에게 "과거보다 선거운동비용이 덜 들고, 당선 확률은 늘었다"는 당근을 주고, 원로원 전체가 명예로운 경력에 오르는 내내 아우구스투스와 그 일가의 눈치를 보는 상황을 만든 법이다. 이 법은 켄투리아 민회를 10개의 켄투리아로 꾸리면서, 600명의 원로원 의원들을 각 켄투리아에 배치해 그들의 발언권과 입후보시 금전적 손실을 줄여주는 내용을 담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우구스투스는 교묘하게 3000명의 기사계급들도 함께 배치하도록 하고, 기사계급 안에 평민들도 껴넣도록 설계해 민회의 의견과 호민관 특권을 가진 사람의 의중도 넣도록 했다.[73] 모든 관직을 두루 경험한 후 집정관으로 정점을 찍는 로마 지도층의 경력[74] 그런데 이러면 현대의 발전된 민주주의 체제와는 달리 수도 로마의 여론을 제압할 수 있는 개인의 군사력과 경제력만 있으면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황제 자리에 도전이 가능했다. 여기에는 물론 권위가 뒷받침되어줘야 했지만 그 권위라는 것 자체도 지극히 아우구스투스적으로 모호한 것이었다. 로마나 타국이나 누구나 자기 힘과 명분으로 자리에 오르는 것은 똑같다. 지배 계층의 엘리트와 일반 대중의 지지 없이 마음대로 정치 못하는 것도 역시 같다.[75] 물론 이런 황제의 모습도 제정이 점차 중앙 집권적 전제화되면서 점점 사라지고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에 들어서면서 관료제가 강화되고 전제 군주정이 도입되어 사실상 전제 군주정화된다.[76] 네로와 달리 칼리굴라는 재위 기간 중 병사들에게 불신임을 받지 않았고, 원로원조차 암살 직전과 직후 불신임을 행사하지 않았다. 물론 원로원은 가이우스의 암살 사건 직후 공화정 움직임을 가져가긴 했다. 그러나 원로원 내부는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의 원로원 의원들이 "어차피 아우구스투스의 카이사르 가문이 프린켑스를 맡고 있고, 공화정 체제가 존속 중인데 왜 공화정 선언을 다시 하느냐"고 지적하며 가이우스 칼리굴라의 암살건을 공화정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봤다고 한다. 따라서 거의 동시대의 요세푸스나 후세대의 디오 역시 극단적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카이사르를 혐오한 수에토니우스와 달리, 정상적이라면 칼리굴라가 암살되지 않을 돌발상황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네로의 몰락처럼 프린키파투스 체제 아래에서의 불신임은 네로 케이스였고, 칼리굴라 암살 사건은 황제의 정통성 관점에서 로마인들에게 차원이 다른 부분이었다고 언급한다.[77] 이 부분에서 도미티아누스와 차이가 있다. 원로원에게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고 해도, 도미티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의 프린키파투스 체제에서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와 비슷한 황제였고 그가 원로원에게 욕먹은 이유는 원로원 의원들을 기소한 다음 고문까지 동원해 숙청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미티아누스는 주권 행사자로 명시된 원로원과 군대 중 군대에게는 사후에도 인기가 많았고 지지받았다.[78] 총독이 황위 계승자의 명령에 따른 일이 뭐가 문제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당시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 복귀를 선언하고 몇몇 혼란스러운 속주의 통치만 정국이 안정될 때까지만 일시적으로 맡겠다고 공언한 상태였다. 때문에 원로원이 임명권을 행사하는 원로원 속주는 원칙적으로는 변방 속주에 대한 임페리움 마이우스만 행사하던 아우구스투스와 아무 상관이 없어야 했던 것. 현대의 한국에서 대법관이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판결을 내렸다는 증언이 나왔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생각해 보면,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중대한 헌정 위기였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79] 아우구스투스는 율루스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딸 대 율리아와 정치동맹 형태의 애인 방식으로 포섭되자, 그를 간통죄로 사형을 선고. 그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율루스와 조카딸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의 자녀인 외종손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율라 안토니아 남매 처분을 본인 외 인사가 언급하지 못하게 했다. 이때 그는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를 죽이라는 원로원 일부 요구에, "아이의 나이가 너무 어리고, 미래를 생각해 마살리아로 유학보내겠다."고 발언해 그를 감싸고, 살려준다. 이후 그는 적당한 시간이 흐른 뒤, 외종손 연좌제를 주장한 이들을 하나씩 모조리 손봤다.[80] 아우구스투스의 집권기가 평화의 시기였다고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로마와 이탈리아가 안정되었을 뿐 아우구스투스는 집권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게르마니아와 일리리쿰에서 양아버지 카이사르만큼이나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벌였다.[81] 당시 갈리아 전쟁은 달 착륙만큼이나 미지의 세계와의 조우를 통한 문화 충격이었던 동시에, 기술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기도 했다. 알레시아 전투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던 방어시설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기술적 우위를 과시한 것은 겨우 5만의 병력으로 프랑스와 베네룩스, 독일 서부까지 포함하는 방대한 땅에 사는 수많은 부족의 복속을 이끌어낸 비결 중 하나였다. 배나 부교를 이용하는 대신 유럽에서 손꼽히는 대하천 라인 강에 목조 다리를 놓은 일, 바다 건너 미지의 땅인 브리타니아에서 기병과 공성장비까지 포함된 대규모 군단의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보급과 전쟁수행까지 해낸 일 등, 카이사르가 신이 나 갈리아 전쟁기에 자세히 묘사했던 조직적, 기술적 작업들은 당대의 로마인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끈 동시에, 현지인들에게는 공포심을 넘어 경외심을 느끼게 할 정도의 대사업이었다. 브리타니아 원정 소식을 전해들은 원로원은, 원정 자체의 실익이 크지 않았음에도 전례없는 20일의 감사제를 결의했다. 이는 폼페이우스의 동방 정복을 기념하는 12일의 전례를 훨씬 뛰어넘는 것으로 당시 로마 사회에 준 충격의 크기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는 기존 로마의 일인자로 공인되던 폼페이우스의 입지를 카이사르가 크게 위협하게 된 사건으로 인식되었고, 이후 양 측의 결별과 대립에 영향을 주었다.[82] 카이사르는 직접 정복에 나설 목적이 아니었음에도 갈리아 전쟁 도중 위험하기 짝이 없는 라인 강 너머 게르마니아로의 진군과 도버 해협 너머의 브리타니아 원정을 감행했다. 이는 게르마니아, 브리타니아와 정치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배후지 갈리아의 안정을 위한 선택이었으나, 무엇보다도 로마인들에 대한 정치적 선전으로서 큰 가치가 있었다. 폼페이우스의 폰토스나 시리아 정복은 물론 군사적 위업이었으나 로마인들이 잘 아는 기존의 지중해 문명 세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에 비해 당대 로마인들에게 끝을 알 수 없는 검은 숲과 미지의 야만인들의 땅 게르마니아, 풍문으로나 존재를 알던 세상 끝 오지 브리타니아에 로마군이 발을 들여놓은 일은 지금으로 치면 달 착륙 수준의 문화충격이자 대사건[81]이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라도 자신들 체제의 우위를 증명하기 위해 벌어진 미국과 소련의 우주 경쟁과 같은 일이 로마 공화정 말기의 거물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있던 것이다.[83] 이 구상은 아그리파가 이어받아 완공하게 된다.[84] 지금이야 그리스-로마 문명으로 무리없이 묶이지만, 당대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그리스 문화를 선진문물로 인정하고 향유하면서도, 이를 저속한 것으로 간주하고 엄연한 로마의 피정복지였던 그리스 문화에 탐닉하는 것은 훌륭한 로마의 전통 문화를 버리는 일로 여기는 국수주의적 풍조가 있었다. 이런 흐름은 포에니 전쟁에서의 승리에 이어 그리스와 헬레니즘 세계 정복을 주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리스 문화에 매우 개방적이었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 대한 대 카토의 집요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다 보니 폼페이우스의 원형극장 건설은 보수파로부터 단순한 개인의 취향 문제를 넘어 시민들의 인기만 의식한 포퓰리즘 행보로서, 애국적이지 못한 행동이라고 비판받았다. 이런 분위기는 제정 시기까지 이어져, 네로의 그리스 문화 애호는 그가 로마 황제답지 못한 부적격자로 간주되어 폐위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로마의 지도자가 공공연하게 그리스 문화를 애호하고, 동성애를 즐기며 수염을 길러도 별 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게 된 것은 하드리아누스 이후의 일이었다.[85] 지은 건물에서도 각자의 배경과 지향점이 드러나는데, 설계목적과 전혀 맞지 않는 관공서로 쓰이던 신전에 쌓여가던 공문서를 영구적으로 보관할 수 있는 건축물을 지은 술라의 의도는 매우 훌륭했다. 그러나 이는 원로원 계급의 통치기능 강화에 골몰하고 대중의 지지에는 관심이 없던 술라의 관심사에 부합하는 것이었고, 시민들에게는 자기들과 관계없는 일에 돈을 썼다고 욕을 먹었다(...). 폼페이우스는 모든 시민이 이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을 지었는데, 일각에서는 족보 없는 촌놈답게 그리스 연극이나 좋아하는 저속한 취미[84]를 과시한다고 비판을 받았다. 이를 의식했던 카이사르는 평시에는 시민들이 상점이나 개인교습소를 여는 등 생업을 영위하는 장소로 쓰이고, 집회나 재판, 투표 등 정치적 행사가 있을 때는 공공 목적으로도 이용할 수 있는 포룸을 지어 로마 사회를 이루는 여러 계층이 고루 혜택을 체감할 수 있고, 자신의 건설사업이 로마 고유의 가치와 국익에 부합하는 애국적 행위로 보이도록 노력하였다.[86] 이미 압도적인 전공을 세웠던 폼페이우스와 갈리아 정복을 수행하며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카이사르 사이에 낀 크라수스는 무리를 해서라도 파르티아 정복 정도의 대업적을 이뤄내지 않으면 밀려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로마 최고의 부자 타이틀만으로는 대중의 인정을 받기에 충분하지 않았고, 술라의 내전 승리에 기여하고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반란을 진압한 정도의 빈약한 전공은 늘 크라수스의 약점이었기 때문이다.[87] 아우구스투스는 재위기간 내내 자신을 노린 명문 귀족들의 음모에 끊임없이 대응해야만 했다[88] 연회 자리에서 사정을 솔직하게 설명한 뒤, 공신들이 군권을 내놓도록 하는 대신 명예직과 안락한 여생을 보장해준 송 태조 조광윤의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에 비견할 수 있는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송나라의 공신들과 마찬가지로 당시 로마의 명문귀족에게는 클리엔테스 관계를 통해 사병을 동원하고 속주 총독으로 부임하면 재산과 영향력을 이용해 군대를 회유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있었는데, 이를 포기하도록 하는 대신 높은 명망을 가진 집정관 등의 고위직에 도전하는 과정에 따르던 각종 리스크를 없애 지위를 보장해주며, 황실과의 인척관계까지 안겨준 것이다. 둘 다 각국의 창업군주로 고도의 정치력을 이용해 유혈사태를 최소화하며 군벌들이 난립하던 장기간의 혼란기를 종식시켰고, 그 업적이 후대 사가들에게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유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비슷한 결과를 얻었지만, 조광윤은 본인의 인망과 공신들과의 개인적 신뢰를 통한 설득협박으로 한 번에 목표를 이뤄낸 반면, 아우구스투스는 고도의 책략을 동원해 단계적으로 목표를 실행해나갔다는 점에서 그 과정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서로 차이가 있는 접근방식에서 각각이 평생 구사해왔던 정치 스타일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이 흥미롭다고 할 수 있겠다.[89] 아우구스투스의 후임자였던 티베리우스는 필요없는 이 위원회를 해산했다.[90] 총독의 라틴어 관직명이 바로 프로콘술이다. 프로콘술은 집정관 출신을 앉히는 게 관례였고, 집정관 다음가는 권력을 가졌던 법무관 출신도 가능했다. 총독으로 번역되는 다른 라틴어 관직명도 있긴 하지만 그건 엄밀히 말해서 황제가 직접 불러다 앉히는 총독이 아니라, 총독이 전체 식민지를 통치하기 어려워서 임명하는 식민지 행정관이다.[91] 현재의 남프랑스[92]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93] 현재의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북부[94] 현재의 그리스 남부[95] 주도 나르보(현재의 나르본)[96] 주도 부르디갈라(보르도)[97] 주도 루그두눔(리옹)[98] 주도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트리어)[99] 주도 콜로니아 아그리피넨시스(현재의 쾰른)[100] 주도 타라코(현재의 타라고나)[101] 주도 아우구스타 에메리타(현재의 메리다)[102] 주도 코르두바(현재의 코르도바)[103] 빠른 시간에 이 작업을 수행한 이유로는 군인이 너무 많아 월급 주기 힘들고, 쿠데타 가능성을 염려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게다가 제국 전체 예산의 반이 군비로 쓰였던지라 재정 압박 또한 상당하다보니 빨리 군 감축을 하여 재정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104] 보조병의 근무연수를 25년으로 정한게 아우구스투스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105] 이를 위해서 로마 시민들에게 12.5%에 달하는 상속세를 부과하였는데, 로마 시민에 대한 유일한 직접세다.[106] 보조병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정책을 아우구스투스가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학자들은 보조병에게 주는 전역증서의 발견을 근거로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기에 시민권 수여가 시작 또는 정착화되었다고 보고있다.[107] 오늘날의 프랑스 프레쥐스[108] 눈썰미가 있으면 보이겠지만 여기서 영여 fiscal이 나왔다.[109] 로마인들이 부른 다뉴브 강의 옛 이름[110] 로마인들과 갈리아인들이 부른 라인 강의 옛 이름이다. 뜻은 갈리아 고어로 ‘~흐른다’를 뜻하는 레노스.[111] 훗날 3대 황제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가 원로원이 가진 화폐발행권을 뺏은 다음, 황제의 조폐권으로 변경한 관할권을 이 도시의 조폐국으로 옮긴다.[112] 오늘날의 프랑스 리옹[113]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독일 마인츠와 크산텐.[114] 단순히 아낀 것이 아니라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가 아내의 뱃속에 있을 당시부터 친아들로 생각했고, 이런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가 친딸 율리아와 첫째 양자 티베리우스에게 편지에서 밝히길, 그는 자신이 보낸 가장 큰 행복 중 하나는 드루수스와 함께 보낸 일이었다. 그는 편지를 통해 "나의 사랑하는 아들 드루수스와 함께 주사위 놀이를 하고, 그와 오랜 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업무 이후의 시간"을 최고의 행복으로 언급했다.[115] 여러 정황상 아우구스투스는 두 의붓아들 중 드루수스를 개선식 이후 정식 입양해 율리우스 가문에 편입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의 사망 소식 당시, 이성을 잃고 하늘을 원망했으며, 드루수스 사후에도 그 충격으로 아내 리비아와 함께 심리상담을 받으며 이를 극복했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정신을 차리고, 로마에서 양자의 관을 마중하기 위해 말을 타고 국경까지 마중 나갔다고 하며, 고인의 아버지 자격으로 장례식을 총괄했다. 이후 그는 양자를 위한 서사시를 바치고 조카딸의 아이들이기도 한 드루수스 자녀들의 정식 보호자가 됐다.[116] 아르미니우스의 동복친동생으로 게르만식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름처럼 금발머리였다. 대 드루수스 원정 당시, 협정에 따라 어린 나이에 로마로 건너가 교육을 받았으며 시민권 취득 당시 기사계급에 편입됐다. 아내는 카티족 부족장 아크투메르의 딸로 이 사람의 가족과 후손들은 로마에서 교육을 받고 이탈리아에 정착해 기사계급 로마인으로 살았다. 아들 중 이탈리쿠스는 아르미니우스 암살 이후, 친로마파 부족민들과 티베리우스와 로마군의 도움으로 세기메루스의 왕좌를 차지했다.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플라부스의 손자(이탈리쿠스의 아들)까지 케루스키족 왕좌를 지켰지만, 도미티아누스가 로마 내 반대에도 불구하고 게르마니아 전쟁 중 재정지원을 제한하면서 왕좌를 포기했다고 한다. 플라부스는 형과 달리 로마군에 남았고, 한평생을 가족들과 함께 로마인으로 살았다. 그는 전쟁 기간 중 일리리쿰 반란 진압을 지휘하다 한쪽 눈을 잃는 큰 부상을 당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티베리우스의 신임을 받았고 게르마니쿠스 아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이유로 그는 부상 이후에도 퇴역하지 않고 끝까지 로마군 장교로 복무하고 퇴역했다. 플라부스는 형의 아내와 조카가 로마군 포로가 된 이후 상황을 잘 알았기 때문에, 일부러 완벽히 로마인으로 살았다는 말도 전해진다.[117] 아우구스투스 생전, 게르마니쿠스와 제왕수업을 받은 티베리우스의 친아들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쿠스는 티베리우스가 있는 게르마니아 전선으로, 소 드루수스는 로마에 남겨 직접 후계교육을 담당했다.[118] 고대 로마의 국가 여신으로, 조국 로마를 인격화한 존재다. 초기 왕정 시대부터 여전사 아마존을 형상화한 듯 묘사되어 있고, 보통의 그리스 문화권 여신 숭배와 달리 남자 사제들이 봉헌과 숭배 의식을 담당해 로마가 건국 당시부터 상무 정신이 투철했음을 단번에 느끼게 해준다는 평을 받고 있다. 기원전 280년부터 기원전 276년, 기원전 265년에서 기원전 242년 로마 원로원과 S.P.Q.R.에서 발행한 로마 동전,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대의 기념 기둥 등에 로마 여신의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더 자세하게 알아보기 위해서는 영어 위키백과 Roma (mythology)를 참조하면 좋다.[119] 칼리굴라, 네로, 도미티아누스 사례처럼 초기 프린키파투스 체제 아래에서 황제 본인이 자신의 숭배 강요를 대놓고 하거나, 황제 스스로 '살아있는 신', '신의 대리인' 등으로 자처, 또는 자신과 다른 로마인을 차별화하여 이를 외칠 경우에는 당연히 독재자, 무법자 등으로 까일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면, 아우구스투스나 티베리우스 사례처럼 안 하는 척 하면서 하거나, 마지못해 동의한다면서 넘어가야 원로원과 로마인들에게 좋은 소리를 들었다는 이야기다.[120] 이런 이유로 히스파니아 속주민들이 티베리우스에게 "당신을 신으로 숭배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티베리우스는 "만일 그렇게 허락하게 된다면, 내 선조(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조각상과 살아 있는 내 초상화까지 함께 숭상된다는 것이 아니냐. 이건 내 아버지의 업적과 명예를 욕보이는 것이니 절대 허락할 수 없다"고 말했다.[121] 당연한 이야기인데, 이런 결정은 이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 동안 제국 전역으로 퍼졌고,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부터는 제국 전역에서 이뤄진 일종의 법제화된 전통이 되게 된다.[122] 로마 제정 당시 로마인들에게 크라수스 이상의 재산을 축적해, "부자의 대명사"로 유명해진 인물이다. 본래 갈리아의 자유민이었지만, 갈리아 전쟁 당시 생포돼 카이사르의 노예가 되었다가 뛰어난 머리와 로마문화에 대한 개방적 태도 등을 높게 본 카이사르에게 해방됐다고 한다. 이후 그는 해방노예가 된 다음 율리우스 성씨를 받고 기사계급에 편입되었고, 아우구스투스 밑에서도 충성을 다했다고 전해진다.[123] 갈리아인들의 항의 당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진심으로 신뢰했던 갈리아인까지 그를 비판하자 수치심과 모욕감을 느껴 진심을 다해 사과했다고 한다. 따라서 열받은 아우구스투스는 아들 드루수스를 보내 황제 숭배 제단을 만들어 갈리아인들의 보호를 약속했다. 이후 그는 자신을 제대로 망신시킨 리키누스를 처벌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리키누스가 황제에게 "갈리아인들의 봉기를 막고, 로마 국고 보강을 위해 욕을 먹어가며 한겁니다. 제가 재산을 축적했어도, 이것이 사실인 것은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으십니까"라고 변호해 황제의 마음을 돌렸다. 이런 복잡한 사정으로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해임하고 목숨과 재산을 뺏지 않았는데, 리키누스를 높게 평가한 세네카에 의하면 그는 공직만 해임되었을 뿐 천수를 누리다가 사망했다고 한다.[124] 하지만 자기 친아들 티베리우스에게 제위를 빨리 물려주려던 리비아에게 독살당했다는 설도 있다.[125] 로마사 전체를 관통하는 악인, 간신의 대명사 세야누스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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