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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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택시 출신 독립운동가, 오창선
2. 안성시 출신 독립운동가, 오창선



1. 평택시 출신 독립운동가, 오창선[편집]


파일:오창선.jpg
성명
오창선(吳昌善)
생몰
1884년 1월 12일~1961년 7월 27일
출생지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양교리
사망지
서울특별시
위패
국립서울현충원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오창선은 1884년 1월 12일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양교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동료들과 함께 경부선 철도의 폭파를 계획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이후 계몽운동 및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했던 그는 1920년 2월 18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동지인 안구현·이택화(李宅和)와 모의, 진위군 부호 김태연(金台淵)의 집을 습격하여 당시 임시정부 재무총장((財務總長) 이시영 명의의 문서를 제시하고 군자금 100원을 모금하였다.

이후 1920년 3월 10일 진위군에 있는 이민화(李敏和)의 집에 잠입하여 위와 동일한 군자금 모금문서를 제시하고 모의권총으로 이민화를 위협, 1,000원을 출급토록 하여 동월 19일 110원을 모금했다. 그러나 김태연, 이민화 등의 신고로 일대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지자 은신했지만 이웃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1920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후에도 임시정부 국내 요원으로 활동했다고 하며, 8.15 광복 후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1년 7월 2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오창선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2. 안성시 출신 독립운동가, 오창선[편집]


성명
오창선(吳昌善)
본관
해주 오씨[1]
생몰
1884년 1월 12일 ~ 1974년 9월 18일
출생지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덕봉리[2]
사망지
경기도 안성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오창선은 1884년 1월 12일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덕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1일 최은식(崔殷植)·홍창섭(洪昌燮)·이유석(李裕奭) 등이 주동이 되어 전개한 안성군 양성면, 원곡면 일대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다. 그는 이날 저녁에 덕봉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뒤, 이희봉(李熙鳳)·손정봉 등과 함께 양성면으로 행진하여, 오후 9시경 동항리(東恒里)에 있는 경찰 주재소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길에, 원곡면장을 선두에 세우고 횃불을 들고 행진해 오던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합세하여 다시 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오후 10시경 주재소에 도착하여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 건물과 숙직실을 파괴·방화하였다. 다시 시위군중과 함께 양성 우편소로 가서 그 곳의 기물과 건물을 파괴·방화하고, 일본인 토자 토요테(外里與手)가 경영하는 잡화점과 일본인 고리대금업자 타카 히데토모(隆秀知)의 집을 파괴했다. 이후 양성면 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괴·방화하고, 시위군중과 함께 인근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친 뒤 해산했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안성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4년 9월 1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오창선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23세 선(善) 항렬.[2] 해주 오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오복영·오세경·오세학·오용근·오윤선·오정근·오창문·오홍근이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