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구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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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제3대 군주
尉仇台王 | 위구태왕

출생
연대 미상
부여
사망
연대 미상
부여
능묘
미상
재위기간
제3대 군주
197년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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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해(解)

위구태(尉仇台)
부왕
시왕
왕후
왕후 공손씨[1]
자녀
해간위거
왕호
위구태왕(尉仇台王)


1. 개요
1.1. 즉위 이전
1.2. 즉위 이후
1.3. 사후
2. 수명에 대한 의문점



1. 개요[편집]


부여의 군주.

이름의 뜻이 '구태 2세'인데 이에 대해 백제의 시조로 여겨지는 구태(仇台)와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구태(仇台)라는 이름은 중국 정사에 속하는 역사서인 《주서》, 《북사》, 《수서》, 그리고 《책부원귀》에 전해지고 있다. 구태 시조설은 전승이 조금 다르기 때문에 구태 항목 참조.


1.1. 즉위 이전[편집]


120년 후한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선물로 인수(印綬)와 금색 비단을 받았다고 한다.(《후한서》 <부여전>)

121년과 122년에 고구려가 현도군을 공격하자 20,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군을 지원해 500명을 참수하는 공을 세웠다.(《후한서》 <고구려전>)

이 시기는 《삼국사기》 기준으로 태조대왕차대왕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는 시점이고, 《후한서》 기준으로는 태조대왕이 사망하는 시점이다.


1.2. 즉위 이후[편집]


구려와 선비가 강성해지고, 부여가 (구려와 선비) 두 오랑캐 사이에 있는 것을 본 공손도는 종실의 여자를 (위구태왕에게 보내) 처로 삼게 했다. 위구태가 죽자 간위거가 즉위했다.

時句麗·鮮卑彊度以夫餘在二虜之間妻以宗女。尉仇台死簡位居立。

정사 삼국지》 <위지(위서)> -동이전-. 남아있는 위구태왕 기록의 전부다.

공손도(公孫度)의 종녀를 부인으로 맞이해 동연과 유대를 강화했다. 이러한 조치는 주변의 선비족[1]고구려[2]에 대한 견제로 파악된다. 요동 지역의 군벌로 자리매김한 공손씨와 언제 유대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204년 한충 - 견초의 대화에서 한충이 '부여'에 대해 언급한 것을 보아 그 이전에 유대를 맺은 것으로 추측된다. 만약 그렇다면 공손도가 요동왕을 참칭한 189년 ~ 204년 사이에 유대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197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이 시기에 고구려의 서부 지역을 담당하던 연노부가 단체로 이탈해 공손연과 손을 잡았기 때문. 남성의 경우 70대가 되어도 생식능력을 갖고 있을 수 있는데 이를 보면 불가능한 건 아니다. 이를 보면 고구려 산상왕의 즉위에 반대해 공손씨 세력과 힘을 합쳐 고구려를 공격한 고발기와도 가까운 친인척 관계에 놓여있었던 듯하다.

위구태왕 시기인지 아들 간위거왕 시기인지는 불분명하나, 조위 황초 연간(220년~226년) 사이에 부여에 예속되었던 읍루가 반란을 일으켜 부여가 읍루 정벌을 시도했지만 끝내 굴복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동연과 비교하면 공손도의 아들 공손공 치세에 일어난 일이므로 간위거왕 시기일 가능성이 높다.


1.3. 사후[편집]


제왕운기》에 나오는 부여 부마대왕(駙馬大王)과 동일인으로 추정되는데, 중국측 기록에 등장하는 부여의 군주 중 다른 군주의 딸과 혼인한 사람은 위구태왕 뿐이기 때문이다. 랴오허 강 인근에 그의 능이 있다고 한다.


2. 수명에 대한 의문점[편집]


위구태 왕자와 위구태왕 사이에는 약 70년 정도 되는 시간차가 존재한다. 게다가 167년에 현도군을 공격한 부여왕 부태(夫台)가 확인되는데 일단 위구태왕과 부태왕은 모두 공손도와 연관되어 있는 사람이다. 위구태왕이 죽은 뒤 간위거왕이 즉위했는데, 이 인물이 위구태 왕자의 아들인지 위구태왕의 아들인지는 불명확하다. 보통은 위구태왕의 아들이라고 여긴다.

경향신문의 1987년 9월 11일자 기사에서 위만의 손자인 우거의 명칭이 고유명사가 아닌 우두머리를 지창한다는 조승복 교수의 주장에서 언급되는데, '우거'가 고유명사라 한 안사고(顔師古)의 주장은 잘못되었으며, 우거에 대한 음운 변이를 고구려의 우거, 부여왕 간위거, 위구태 등을 언급하면서 씨족의 생활 공동체를 다스리는 우두머리 또는 우두머리 직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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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한서》 <선비전>에 따르면, 단석괴가 선비족을 통합하고 전쟁을 벌일 때 충돌한 국가로 부여가 언급된다.[2] 제8대 고국천왕이 발기의 난, 연나부의 난을 제압하면서 왕권을 강화시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