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덤프버전 :

1. 개요
2. 역사
3. 사건사고
3.1. 과테말라 쿠데타
4. 대중매체에서
5.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United Fruit Company / UFC

과거 미국에 존재했던 식품 생산기업으로 주 품목은 바나나를 위시한 과일이었다. 19세기 말 등장해 라틴아메리카에서 대규모 바나나 플랜테이션을 경작했다. 그리고 이들 국가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라틴아메리카인들에게는 문어(el pulpo)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지금도 하와이를 집어먹은 Dole, 필리핀장악한 델몬트처럼 플랜테이션과 정경유착으로 악명 높은 기업으로 손꼽힌다.[1]

1970년 AMK 코퍼레이션에 인수되어 유나이티드 브랜즈 컴퍼니(United Brads Company)로 개명하였다. 이후 1990년 치키타(Chiquita)라는 이름으로 개명한다. 이 문서에서는 역사적 기업인 UFC에 대한 것만 다룬다.


2. 역사[편집]


1870년, 로렌초 도우 베이커(Lorenzo Dow Baker)라는 미국인이 자메이카에서 산 바나나 160송이를 저지시티에 매각해 한 송이에 2달러씩 이득을 보았다. 15년 후 그는 앤드류 프레스턴(Andrew Preston)이라는 다른 미국인과 함께 보스턴 프루트 컴퍼니(Boston Fruit Company)를 창설했다. 한편 보스턴 프루트 컴퍼니가 세워지기 14년 전, 마이너 C. 케이스(Minor C. Keith)라는 미국인 사업가가 코스타리카 국철의 건설권을 따냈다. 돈을 더 많이 벌고싶었던 케이스는 철로를 따라 바나나 나무를 심어 팔았다. 베이커, 프레스턴, 케이스가 만난 것은 1899년의 일이었다. 베이커와 프레스턴의 보스턴 프루트와 케이스의 철도회사가 합쳐져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가 만들어진 것이다.

유나이티드 프루트는 처음으로 냉동장치가 달린 배로 식료품을 수송하였으며 병충해에 강한 품종을 만들기 위해 최초로 바나나를 연구하기도 하였다. 열대 기후의 태양빛을 반사시키기 위해 선체를 흰색으로 칠한 유나이티드 프루트의 상선들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시기 세계일주를 벌인 미 해군 함대의 별명을 따 대백색함대(Great White Fleet)라고 불렸다. 이 대백색함대의 규모는 1930년에는 95척으로 급증하였다.

1946년 UFC는 치키타라는 브랜드와 미스 치키타라는 캐릭터를 내놓는다. 미스 치키타는 본래 라틴 아메리카가 연상되는 드레스를 입은 바나나의 모습이었지만 1980년대에 과일이 올라간 모자를 쓴 여성이 되었다.

1970년,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는 AMK 코퍼레이션에 합병되어 유나이티드 브랜즈 컴퍼니로 개명한다. 이후에도 1980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올림픽 후원기업으로 선정되는 등의 일이 있었다.

1990년 유나이티드 브랜즈는 더 유명한 이름인 치키타로 다시 개명한다.

그러나 관세와 경쟁에서 밀리면서 경영은 악화되었고 결국 2001년에는 파산을 선언, 한 때는 스미후루 계열사와 합병한다는 소식이 있었으나 결렬되었고 현재는 브라질의 Cutrale과 Safra 그룹의 자회사가 되었다. 중남미를 끊임없이 못살게 굴던 플랜테이션 회사가 결국은 남미의 자회사가 되었다는 의미심장한 최후.


3. 사건사고[편집]


파일:kurtz-phelan-600.jpg
이 회사를 풍자한 로고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지상에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고

여호와는 이 세상을 나누시어

코카콜라, 아나콘다사[2]

,

포드사와 그 외 회사들에게 주셨다.

유나이티드 프루트사는

가장 큰 땅을 차지했으니

이 땅의 중부해안지대

아메리카의 날씬한 허리였다

자기 땅을 새로 명명하길

"바나나 공화국"이라 하였고

죽어 잠들어 있는 자들 위에,

자유와 국기,

영광을 쟁취했던

애국심에 불타는 선열들 위에서

어릿광대 극을 펼쳤다

자유의지를 멀리하게 하였고

시저의 왕관을 주었다

탐욕이 드러나게 했고

파리 같은 자들의 독재를 부추겼다

- 파블로 네루다, 〈유나이티드 프루트사〉[출처]

라틴아메리카의 독재 정부와 결탁해 현지인들을 착취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1928년 콜롬비아의 UFC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은 하루 8시간 근무, 주 6일 근무, 급여 현찰 지급[3]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콜롬비아군은 파업 노동자들을 총으로 진압했고, 이 파업은 바나나 학살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출처1]


3.1. 과테말라 쿠데타[편집]


1950년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Jacobo Arbenz Guzman)이 과테말라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아르벤스는 국방장관을 하던 인물로 1944년 과테말라 민주화 당시 군 내 민주주의 지지자들을 이끌었었다. 1951년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UFC의 바나나 농장 40만 에이커를 유상 몰수했다. UFC는 세금을 적게 낼려고 실제 가치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토지를 신고했는데 아르벤스는 그 가격만큼만 배상을 해 회사에 큰 손실을 입혔다. 이 농장의 대부분은 UFC가 경작하지도 않으며 가지고 있던 땅이었다. 땅을 놀리고 있었기 때문에 과테말라 국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는데, UFC가 이 땅을 경작하지 않고 내버려 둔 이유는 바로 그로 미셸 품종을 초토화시키는 파나마병 때문에 대처법을 찾기 전까지는 섣불리 경작을 할 수 없던 것.[출처3]

이에 분노한 UFC는 미국 정부에게 적극적인 로비를 벌였다. 마침 미국은 공산당을 합법화시키는 아르벤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먼저 행동에 나선 기관은 CIA였으며, 이들은 아르벤스 정권 초기부터 정치공작 및 방해공작을 계획했다. CIA는 반 아르벤스 세력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했으며 1953년부터는 군부 내 쿠데타 세력을 본격적으로 지원했다. 미 정부는 그러면서도 과테말라 정부에게 UFC의 손실에 대해 15만 달러의 배상금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했다.

1954년 6월 18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Carlos Castillo Armas) 대령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지만 겨우 480명밖에 되지 않은 반군은 대부분 과테말라군에게 진압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테말라군은 반군에게 항복했으며 아르벤스 대통령은 27일 사임한다. 이는 CIA의 심리전에 휘말린 결과였다. CIA가 방송으로 반군의 수를 부풀리고 거짓 전투를 보도해 과테말라군의 전의를 꺾은 것이다.[4]

카스티요 아르마스는 대통령 자리에 앉아 독재를 펼쳤다. 하지만, 3년만에 경호원의 배신으로 총에 맞아 46살 나이로 암살당했다. 이후로도 과테말라는 몇십 년간 독재 정권에게 지배받았다. 또한 1960년에 내전이 발발해 1996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동안 적어도 14만명에 달하는 과테말라인들이 살해되거나 실종되었다.

UFC는 이후 웃기게도 본국인 미국의 반독점법에 걸려서 중남미의 철도망과 과테말라의 토지 일부를 매각해야만 했다.

3.2. CEO자살[편집]


1975년 2월 3일 유나이티드 브랜즈의 회장 일라이 M. 블랙(Eli M. Black. 1921~ 1975, 정확한 이름은 Elihu Menashe Blachowitz. 폴란드 태생 유대인으로 이민와서 성을 블랙으로 고쳤다.)이 뉴욕팬암 빌딩 44층 창문을 깨고 뛰어내려 자살했다.

자살 사유로는 1974년 9월 허리케인 피피가 온두라스를 덮쳐 엄청난 피해를 낸 것,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바나나에 붙는 수출관세를 올린 것, 부채로 인해 자회사들을 매각해야 했던 것[출처2], 그리고 온두라스 대통령에게 250만 달러의 뇌물을 줬던 일이 들키기 직전이었다는 것 등이 추측된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5. 참고 자료[편집]


나머지 참고 자료는 주석에 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1 18:13:15에 나무위키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그나마 델몬트는 필리핀 주민들을 우선 고용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고, 평균 임금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보수를 주급으로 지급하고 있으며, 장기 근속 시 집을 제공해 주거나 특별 보너스를 제공하는 등의 이유로 다른 두 기업보다는 애증 관계에 가깝다. 마냥 애정할 수는 없는 게 플랜테이션 농장 자체가 가지는 문제점들이 많기 때문.[2] 아나콘다 구리광업회사. 미국 광산회사로 칠레의 수많은 구리 광산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노동 착취로 악명이 높았다. 아나콘다가 가지고 있던 구리 광산들은 살바도르 아옌데 집권 이후 국유화되었다.[출처] 김창민, 〈라틴아메리카와 미국: 역사적 관계와 문학적 이미지〉, 《라틴아메리카연구》 18(4), 2005[3] UFC는 노동자들에게 임금으로 돈 대신 배급표를 줬다. 이 배급표는 UFC 배가 실어온 미국산 농산품으로 교환할 수 있었다. 노동자들은 반강제로 미국 상품을 사게 된 것이다.[출처1] 서울경제 - 바나나 학살[출처3] 바나나: 세계를 바꾼 과일의 운명[4] 당시 쿠데타 현장에 있었던 사람 중 하나가 의사의 꿈을 꾸며 바이크 여행을 하던 체 게바라였다. 이 꼴을 보고 체는 혁명에 투신하기로 마음먹게 된다[출처2] 뉴욕 데일리 뉴스 - 돌아버리기: 치키타 스캔들의 팬암 빌딩 자살(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