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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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규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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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gv1.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0






MBC 청룡 / LG 트윈스 등번호 17번
박석채
(1982~1984)

윤덕규
(1985~1992.6.30.)


박준태
(1992.7.1.~1999)
{{{#fab93d [[태평양 돌핀스|태평양 돌핀스]]
/
[[현대 유니콘스|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3번}}}
정상진
(1991~1992.6.30.)

윤덕규
(1992.7.1.~1997)


이흥태
(1999)
LG 트윈스 등번호 78번
결번

윤덕규
(2007~2009)


이종열
(2010~2011)




파일:external/opds.joins.com/200906231716331101_1.jpg

LG 트윈스 코치 시절.[1]
윤덕규
尹德奎 | Yun Deog-kyu

출생
1963년 2월 25일 (61세)
경기도 수원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남창초 - 대광중 - 대광고
포지션
외야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85년 1차 지명 (MBC)
소속팀
상업은행 야구단 (1982~1984)
MBC 청룡-LG 트윈스 (1985~1992)
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 (1992~1997)
지도자
현대 유니콘스 2군 타격코치 (2001~2002)
롯데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 (2003)
LG 트윈스 1군 주루코치 (2007~2009)

1. 개요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4. 기타
5. 연도별 주요 성적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LG 트윈스, 태평양 돌핀스의 선수, 코치. 애칭은 '초구의 사나이'.


2. 선수 경력[편집]


대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실업팀인 한국상업은행에서 뛰다가, 1985년 MBC 청룡의 1차 지명을 받아 프로에 입문했다. 비록 고졸 출신이었지만 고교 선배인 팀스타 김재박의 든든한 배려에 힘입어 첫 해부터 주전 자리를 꿰차며 순탄한 선수 생활을 했다. 초구부터 과감하게 스윙해 만든 우중간 안타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렇게 세 차례 3할 타율을 기록하고, 1990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까지 차지하며 청룡/LG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남는 듯 했다. 다만 도루에는 영 서툴러서 1991년에는 도루 성공은 3번, 실패는 12번이나 기록해 도루성공률이 고작 20%에 그칠 정도였다.

그러나 1992년 시즌을 앞두고 LG에 부임한 이광환 감독과 갈등을 빚었고,[2] 초구부터 스윙하는 타격 습관에 대해 지적받는 등 주전 자리를 잃었다. 결국 1992년 6월 30일, 2:1 트레이드를 통해 태평양 돌핀스로 이적했다. 이때 윤덕규를 대신해 LG 유니폼을 입게 된 선수 중 하나가 박준태다.

하지만 태평양 이적 후 오히려 보란듯이 날아다녔는데,[3] 3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하며 김경기, 김동기와 함께 'YKK포'로 불리웠다. 1994년에는 데뷔 후 처음으로 올스타에 선출된 데 이어 타율 0.321, 11홈런으로 최전성기를 기록했고, 이에 힘입어 외야수 골든글러브도 수상하는 데 성공했다. 이 때 인터뷰에서 스스로 별명이 "영원한 3할 타자"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듬해이자 태평양의 마지막 시즌인 1995년에는 타율이 무려 0.228로 무려 1할이나 떨어져 버렸다는 게 흠.

이후 1996년 태평양 돌핀스가 현대그룹에 인수되어 현대 유니콘스로 재출범한 뒤에도 여전히 팀의 주전 외야수이자 정신적 지주로 활약했다. 현대 시절 보여준 모습은 한화 이글스와 준플레이오프 2경기 모두 대타로 나와 적시타를 때린것과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1996년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4] 김인호의 다음 타석에 나와 결승 싹쓸이 3루타를 기록하는 등 팀의 클린업으로 활약하고 1997년 시즌 후 은퇴했다.[5]

은퇴 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피츠버그 파이리츠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다. 한편 1999년 시즌을 앞두고 당시 재정난으로 선수가 부족해진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윤덕규와 선수로 계약을 시도했던 바 있다. 윤덕규 본인도 현역 복귀를 노려 입단 직전까지 갔다가[6] 선수 등록 기한을 넘겨 무산됐다.[7] 윤덕규는 현역으로 복귀할 줄 알고 몸까지 다 만들고 준비도 완벽하게 해놨는데 무산되니 너무 아쉬웠다고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유난히 초구를 치는 걸 좋아했고, 이게 윤덕규만의 특징으로 각인됐다. 심지어 어떤 경기에서 윤덕규가 그날 전 타석에서 초구를 공략하자 모 코치는 모든 선수들이 윤덕규같으면 경기가 50분만에 끝날 텐데란 말로 윤덕규의 초구 사랑을 극찬(?)한 바가 있다. 다만 의외로 4사구는 많다. 초구 노려치기가 실패하면 적극적으로 출루를 강조했기 때문.

동아일보에서 초구 관련 기사를 다뤘는데, 초구타격의 장점과 수싸움 활용법 등을 이야기했다.원문보기


3. 지도자 경력[편집]


이렇듯 선수로서의 경력은 훌륭했지만, 지도자 생활은 다소 불운한 편. 고교 선배인 김재박 감독 덕분에 현대 유니콘스에서 2군 타격코치를 맡다가, 2003년 시즌을 앞두고 스승인 백골프의 권유로 롯데 자이언츠의 타격코치로 이적했지만, 백골프의 경질에 수반해 그도 1년 만에 옷을 벗었다.[8]

롯데에서 잘린 이후 몇 년간 야인으로 지내다가 2007년 김재박을 따라 LG 트윈스의 코치로 영입되며 친정팀에 복귀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LG의 암흑기였다 보니 2009년 시즌 후 그를 데려온 김재박이 임기 만료로 물러나면서 또 다시 옷을 벗었다.

이후 상황은 알 수 없다.


4. 기타[편집]


  • 김재박과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며 프로 데뷔 후 1992년 일부를 제외하고는 프로 데뷔부터 은퇴까지 졸곤 한솥밥을 먹었다.



5.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5
MBC
25
47
.170
8
0
1
1
3
6
2
1
.277
.188
1986
107
354
.280
99
21
(4위)
3
3
45
34
3
34
.381
.338
1987
103
357
.269
96
11
4
2
34
31
5
23
.339
.312
1988
101
352
.304
107
13
5
(1위)
1
43
31
10
41
.378
.375
1989
102
317
.300
95
12
5
(4위)
1
34
41
12
46
.379
.385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0
LG
116
369
.279
103
16
8
(1위)
6
44
68
6
52
.415
.366
1991
105
383
.308
118
18
7
1
45
56
3
49
.399
.383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2
태평양
116
390
.300
117
24
3
8
52
49
6
42
.438
.364
1993
102
360
.300
108
14
4
1
31
35
9
32
.369
.355
1994
100
368
.321
(3위)
118
27
(3위)
3
11
51
49
8
36
.500
(3위)
.379
1995
84
241
.228
55
14
0
2
16
21
5
16
.311
.275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6
현대
113
326
.267
87
14
3
5
23
38
3
17
.374
.301
1997
101
209
.239
50
8
2
5
17
21
1
6
.368
.260
KBO 통산
(13시즌)
1275
4073
.285
1161
192
48
47
438
480
73
395
.390
.346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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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진 속 등번호 8번의 주인공은 넥센 히어로즈 시절의 정수성이고 LG 유니폼을 입은 75번 코치는 정진호다.[2] 당시 이광환 감독은 부임 후 기존 MBC의 색채를 지우겠다고 대부분 노장들을 정리했는데, 원년 멤버였던 이광은이 이 때 옷을 벗고 코치로 전업했고, 윤덕규의 고교 선배이자 청룡의 상징과도 같았던 김재박도 태평양으로 트레이드되는 등 대대적인 개편이 있었다.[3] 트레이드 이튿날 열린 LG와의 인천 홈 경기에서 연장 10회말 친정팀을 상대로 끝내기 안타를 쳤는데, 이 때 LG 덕아웃을 향해 헬멧을 내동댕이치는 세리머니를 보여주며 자신을 트레이드시킨 LG 구단과 이광환 감독에게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 유명하다.[4] 당시 쌍방울 김원형이 던진 공을 현대 김인호가 헤딩(?)해 데드볼로 출루한 사건으로 유명한 경기다.[5] 이후 현대 유니콘스가 1998년 창단 첫 우승을 한것을 생각하면 조금 더 활동했으면 우승맴버가 됐을지도 모른다.[6] 당시 노장을 선호하던 김성근 감독도 적극 반겼다고 한다.[7] 등록 기한을 넘기지만 않았다면 1999년 쌍방울 성적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8] 롯데 코치로 부임했을 때 가족들도 같이 부산으로 왔었는데 아들이 부산진고등학교에서 재학 중이었다는 부산일보의 기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