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장(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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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義莊
(? ~ ?)

1. 개요[편집]


고려의 승려.

인주 이씨로 고려 외척 이자겸의 7남이다.


2. 생애[편집]


출가해서 개경 현화사(玄化寺)에 들어간다. 의장은 권세를 내세워 노승이라도 스승이 아니라 제자로 삼았으며, 현화사에는 의장에게 아부하려는 선비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현화사에 있던 승려 덕겸(德謙)[1]

스승이 있는 곳이 도가 있는 곳이다. 어찌 현달한 선비들이 세력의 강함에 핍박돼 도리어 아이의 문하에서 권속이 되려는가![2]

라고 화를 내며 꾸짖는데, 이를 계기로 덕겸과 사이가 틀어졌고 의장은 덕겸을 여러 번 해치려고 한다.

인종 2년인 1124년 7월 이자겸이 조선국공(朝鮮國公)에 책봉될 때 수좌(首座)[3]에 이른다.

궁궐에서 소란이 일어 척준신 등이 살해된 다음날인 인종 4년인 1126년 2월 26일, 현화사 승려 300명을 이끌고 궁성으로 향한다. 의장은 덕겸을 억지로 데리고 가려 했지만 덕겸은 병을 핑계로 삼각산 향림사(香林寺)로 몸을 피한다. 의장이 궁성의 남문 승평문(昇平門) 밖에 이르자 척준경과 병사들도 앞에 늘어서 있었다. 인종은 직접 승평문 뒤의 신봉문(神鳳門)까지 나오고 시어사(侍御史) 이중(李仲과 기거사인(起居舍人) 호종단을 보내 병사들을 회유하나 실패로 돌아간다. 척준경과 의장의 병력은 자성(子城) 성문 위에서 무장하고 지키던 인원과 충돌한다. 의장의 승병은 승평문으로 들어가 신봉문 기둥을 도끼로 찍었는데 누각 위에서 대기하던 궁병(弓兵)에 의해 머리를 맞고 즉사한다.

정권을 장악하고 국정을 전단하던 이자겸은 척준경과 사이가 틀어지고, 이 해 5월 이자겸은 결국 처자와 함께 팔관보(八關寶)에 갇힌다. 의장은 화를 피해 연경궁의 왕후 침소에 숨었지만 궁에 들어가 청소하던 근시(近侍)[4]들에게 발각돼 팔관보로 보내진다. 의장은 금주(金州)[5]로 유배된다. 이지미 등 이자겸의 다른 아들들은 인종 7년인 1129년에 사면되어 함께 사는 것이 허락되는데, 의장은 이 때 사면되지 않았는지 10년 뒤인 인종 17년인 1139년 본주(本州)[6]로 유배지를 바꾸는 것이 허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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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종 대의 현화사 주지로 상식봉어동정(尙食奉御同正)을 지난 김진간(金珎幹)의 아들이다. 그의 일생이 담긴 원증승통 덕겸 묘지명이 남아있다.[2] 師之所存, 道之所存也. 安有達士, 迫於豪强, 反爲兒子門眷耶![3] 국사·왕사에 책봉되기 전 단계[4] 임금을 측근에서 모시는 일을 하던 신하[5] 현재 경상남도 김해시[6] 본래 살던 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