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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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래[편집]
중국 문벌귀족의 가문이자 당나라 황실의 성씨이기도 했던 농서 이씨의 후예인 연안 이씨는 농서 이씨 시조 노자[4] 의 후예이자 오호십육국시대 서량의 초대 황제였던 농서 이씨 중시조 흥성제 이고의 후손이다.[5] 따라서 연안 이씨의 비조는 노자의 조상인 고요[6] 이며, 도시조는 노자이다.[7] 당나라 황실과는 종친 관계이다.[8]
연안 이씨의 시조 이무(李茂)는 당 고종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다가, 삼국 시대인 660년, 대총관 소정방의 부장(副將)으로 백제 정벌에 참여해 시염성(鼓鹽城)[9] 에 식읍 1,000호를 받고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졌다. 신라의 문무왕이 높은 벼슬을 제의했지만 이무가 극구 사양하므로 국빈(國賓)으로 예우했다. 나당동맹 와해 때 소정방이 신라도 공격하려 하자 반대했다. 구전(口傳)으로는 그 뒤로 백제의 여인[10] 과 혼인하고 신라에 귀화했다고 한다. 또한 이무의 아들이 다시 당나라로 돌아갔다가 그 후손이 다시 발해를 거쳐 신라로 돌아왔다고도 한다.[11]
고려 전기 이전에는 상술했듯이 당 황실의 성씨인 농서 이씨에서 갈라졌다 하여 똑같이 농서 이씨라 불리기도 하였고, 중기에는 염주·염성 이씨 또는 오원 이씨라고도 불렸다. 조선 중기 이후로는 높은 벼슬을 한 인물이 많다 보니 그 후손들이 자신들의 파를 따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예: 연안 이씨 관동파[12] - 동촌 이씨)
한편 성주 이씨에서 갈라진 신 농서 이씨가 있는데, 성주 이씨였던 이승경(李承慶)이 고려 말기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지내며 공적을 세워 원나라 조정에서 그의 할아버지 이장경을 농서군공(隴西郡公)에 추봉하였기 때문에 생긴 본관으로 연안 이씨의 연원보다 훨씬 후대의 일이다. 즉 연안 이씨는 물론이고 그보다 훨씬 이전에 생긴 당 황실의 농서 이씨와도 큰 관련이 없다. 자세한 내용은 성주 이씨 문서를 참고.
2. 조선 시대 벌열 가문[편집]
조선 시대 후기 노론을 대표하는 명문가.[13][14]
사실상 조선 후기 세도 가문 다음으로 정국을 좌지우지한 가문 중 하나이다.[16]
조선조에 정치가로서 최고 영예인 왕통(王統)을 상징하는 종묘배향공신을 2명[17] 배출했다. 이 밖에 기로소에 들어간 인원이 21명[18] , 관력으로는 9명[19] 의 정승, 정1품은 24명, 7명[20] 의 대제학과 청백리 7명[21] , 부원군 6명[22] , 공신 11명[23] , 판서 55명[24][25] , 봉군 33명[26][27] , 시호 53명[28][29][30] , 호당 10명[31] , 장신 4명, 암행어사 17명 등 문과 급제자 총 256명[32] 을 배출하고 무과 급제자는 92명을 배출하는 기염을 토했으며 왕실과 인척이 아니면서도 조선 시대를 통틀어 늘 권력의 중심에 있었지만, 청백리 7명을 배출하는 등 권세를 부리거나 남용하지 않은 깨끗함으로도 명망이 높았다. 또 무엇보다 조선 후기의 청요직인 규장각 직각을 14명을 배출하고[33] , 비변사 당상관 17명을 배출하는 등[34] 세도정치 때조차 중앙에서 버텨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5] 문과 급제자 출신 순위로도 전체 7위로 이씨로는 840명의 전주 이씨 다음이다.[36]
연성부원군 이석형은 세종 때 장원급제해 성종 때까지 무려 6대를 섬겼고, 세조의 총애를 받은 훈구파로서 정인지와 함께 고려사 및 치평요람을 편찬한 대학자였다. 현손인 월사 이정구가 좌의정을, 6세손 이귀가 1등 정사공신 작위를 받았다.
월사 이정구는 신흠, 장유, 이식과 함께 조선 중기 4대 문장가로 이들과 함께 한문사대가, 사대문장가 또는 이들의 호를 앞자리를 따서 월상계택(月象谿澤)이라고도 일컬어지기도 한다. 또한 월정 윤근수의 문인으로 선조 때 대제학을 거쳐 인조 때 좌의정이었다. 아들 백주 이명한도 인조 때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내고, 맏아들 청호 이일상이 효종 때 대제학에 올라 조선 첫 3대 연속 문형(文衡)을 배출했다. 막내아들인 이단상도 문명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부제학을 역임했고, 김창협, 김창흡 형제의 스승이다.
1761년 평양 원유사건으로 사도세자가 탄핵을 당하게 되자 사도세자를 지키려던 영의정 진암 이천보, 우의정 민백상, 좌의정 이후가 1달 간격으로 음독 자결했다. 이천보, 이후 모두 연리로, 정조 입장에선 연안 이씨에 빚을 진 셈이었다. 후일 노론이 다시 여당이 됐을 때 연안 이씨는 빛을 발했다. 홍재전서 일득록 편에 따르면 정조는 연안 이씨를 삼한갑족이라고 칭했으며, 항상 월사의 문집을 베개 옆에 놓고 봤다고 전해진다.
6대 문과 급제 집안이 4집[37] , 4대 문과 급제 집안이 2집, 4대 무과 급제 집안이 1집, 3대 문과 급제 집안이 12집, 4형제 문과 급제 집안이 1집, 3형제 문과 급제 집안이 3집 등이 있다. 또한 5대 판서 역임 집안이 1집, 3대 판서 역임 집안이 5집, 부자 판서 역임 집안이 6집, 형제 판서 역임 집안이 8집이다. 그리고 월사가문은 호당에 든 사람이 5명인데 이 호당 기록은 3대 대제학 가문 중에 제일 많이 배출하였다. 또한 기로소는 70세 이상에 종2품 이상인 문과 관료만 들어갈 수 있어 입소 조건이 까다로워 역대 700명 정도밖에 없는데 기로소에 입사한 인물이 21명으로 전체 씨족 중에서 2번째로 많이 배출하였다.
연안 이씨 소속 인물들이 존경받는 이유는 많은 고관대작의 수에만 있지 않다. 연안 이씨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때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더욱이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양란과 정묘호란 가릴 것 없이 외교관, 혹은 사신으로서 원군을 불러오거나 기타 자국의 유리한 결정을 하는데 역할을 수행했던 인물들이 포진했다. 재밌는 점은 조상의 영향을 받았는지 집현전 학사 이석형의 후손들이라 굵직한 국문학자들이 후손 중에 눈에 띈다.
3. 분파[편집]
-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 이습홍(李襲洪)
- 소부감판사공파(小府監判事公派)[39]
이현려(李賢呂)-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이송(李松)
- 통례문부사공파(通禮門副使公派) 이지(李漬)[40]
이상은 현재까지 후손이 전하는 4개 파이다.
- 예부상서공파(禮部尙書公派) 이해(李核)[41]
- 이부시랑공파(吏府侍郞公派) 이분양(李汾陽)
- 전법판서공파(典法判書公派) 이방(李昉)
-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이득량(李得良)
- 판도정랑공파(版圖正郞公派) 이백연(李伯衍)
- 영광군사공파(靈光郡事公派) 이계연(李季衍)
이상은 현재 남계 후손이 전하지 않아 확인할 수 없는 6개 파이다.
이를 중시조로 하여 각각 기일세(起一世)하고 있다. 문헌이 전해지지 않아 이들 계파는 시조와의 세계는 물론 각 파조들 간의 세대 관계도 모른다.
족보에 등재된 분파명과는 약간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여기 등재되어 있는 파들을 제외하고도 수백 개가 넘는 지파들이 존재한다. 또한 연안 이씨 홈페이지에 방문해서 질문을 하면 자신의 파에 관련된 자세한 답변을 들을 수도 있다.
◎ 태자첨사공파 분파(시조세대 = 중조세파 + 15세)[42]
수재공파 秀才公派(근수 根粹; 9세)[43] ,
판관공파 判官公派(인휴 仁畦; 10세)
별좌공파 別坐公派(광 垙; 11세),
진위공파 振威公派(오 塢; 11세)
경주공파 慶州公派(전 㙉; 11세),
삼척공파 三陟公派(말 [!] ; 11세)
내의정공파 內醫正公派(하손 夏孫; 11세)[44] ,
이천공파 伊川公派(세안 世安; 12세)
소윤공파 少尹公派(온량 溫良; 12세),
재령공파 載寧公派(대승 大升; 12세)
사평공파 詞平公派(공승 公升; 12세),
별제공파 別提公派(관 寬; 13세)
금성공파 金城公派(엽 曄; 13세),
현령공파 縣令公派(언성 彦性; 13세),
전주공파 全州公派(언경 彦憬; 13세)
장령공파 掌令公派(언침 彦忱; 13세),
진사공파 進士公派(언벽 彦愊; 13세)[46]
참봉공파 參奉公派(언각 彦覺; 13세).
◎ 소부감판사공파 분파(시조세대 = 중조세파 + 16세)[47]
저헌공파 樗軒公派(석형 石亨; 9세)[48] ,
농계공파 聾溪公派(명장 命長; 11세)
호군공파 護軍公派(복장 福長; 11세),
대호군공파 大護軍公派(효장 孝長; 11세)
첨정공파 僉正公派(경장 敬長; 11세),
월사공파 月沙公派(정구 廷龜; 13세)[49]
군수공파 郡守公派(정현 廷顯; 13세),
목사공파 牧使公派(정호 廷虎; 13세)
의정공파 議政公派(정화 廷華; 13세),
문천공파 文川公派(정수 廷秀; 13세)
좌랑공파 佐郞公派(선민 先民; 14세)[A][전] ,
쌍계공파 雙溪公派(번민 蕃民; 14세)[A][전]
판관공파 判官公派(관민 寬民; 14세)[A][전] ,
좌랑공파 佐郞公派(제민 悌民; 14세)[A][전]
호군공파 護軍公派(충민 忠民; 14세)[A][전] ,
서민공파 恕民公派(서민 恕民; 14세)[A][전]
응립공파 應立公派(응립 應立; 14세)[A][부] ,
응현공파 應賢公派(응현 應賢; 14세)[A][부]
흥무공파 興茂公派(흥무 興茂; 14세)[A][부] ,
흥창공파 興昌公派(흥창 興昌; 14세)[A][부]
진사공파 進士公派(주 澍; 14세),
장수공파 長水公派(빈 贇; 14세)
세마공파 洗馬公派(지 贄; 14세),
참봉공파 參奉公派(현 賢; 14세)
지평공파 持平公派(보 寶; 14세),
통덕랑공파 通德郞公派(갱 賡; 14세)
충정공파 忠定公派(귀 貴; 14세)[50] ,
직장공파 直長公派(경한 景漢; 14세)
수한공파 守漢公派(수한 守漢; 14세),
주부공파 主簿公派(신 愼; 14세)
참군공파 參軍公派(뢰 賚; 14세),
찰방공파 察訪公派(빈 賓; 14세)
교관공파 敎官公派(괴 蕢; 14세),
교위공파 校慰公派(신 賮; 14세)
동지공파 同知公派(천 蕆; 14세),
언우공파 彦佑公派(언우 彦佑; 14세)
언종공파 彦宗公派(언종 彦宗; 14세),
사직공파 司直公派(경흥 景興; 14세)
교관공파 敎官公派(복흥 復興; 14세),
장사랑공파 將仕郞公派(중흥 中興; 14세)
윤공파 淪公派(윤 淪; 14세),
현공파 鉉公派(현 鉉; 14세)
종공파 鍾公派(종 鍾; 14세),
연공파 鍊公派(연 鍊; 14세)
용공파 鏞公派(용 鏞; 14세),
전공파 銓公派(전 銓; 14세)
참봉공파 參奉公派(노 櫓; 14세),
성제공파 城齊公派(추 樞; 14세)
추담공파 秋潭公派(남 楠; 14세),
감찰공파 監察公派(즙 楫; 14세)
별제공파 別提公派(장 檣; 14세),
봉사공파 奉事公派(제 梯; 14세)
사복시정 란파 司僕寺正 欄派(란 欄; 14세),
승지공파 承旨公派(영 楧; 14세)
사복시정 화파 司僕寺正 樺派(화 樺; 14세),
사복시정 준한파 司僕寺正 俊漢派(준한 俊漢; 14세)
익한공파 翼漢公派(익한 翼漢; 14세),
창한공파 昌漢公派(창한 昌漢; 14세)
경한공파 經漢公派(경한 經漢; 14세),
계정공파 繼鄭公派(계정 繼鄭; 14세)
중추공 인춘공파 中樞公 仁春公派(인춘 仁春; 14세)[51] ,
별좌공 봉춘공파 別坐公 逢春公派(봉춘 逢春; 14세)
덕희공파 德禧公派(덕희 德禧; 14세),
덕록공파 德祿公派(덕록 德祿; 14세)
덕량공파 德良公派(덕량 德良; 14세)[52] ,
진충공파 盡忠公派(진충 盡忠; 14세)
효생공파 孝生公派(효생 孝生; 14세)[53] ,
택룡공파 澤龍公派(택룡 澤龍; 14세)
사립공파 士立公派(사립 士立; 14세),
천립공파 天立公派(천립 天立; 14세)
주부공파 主簿公派(시민 時敏; 15세),
사우당공파 四友堂公派(시담 時聃; 15세)
죽창공파 竹窓公派(시직 時稷; 15세),
시겸공파 時謙公派(시겸 時謙; 15세)
시성공파 時省公派(시성 時省; 15세),
시회공파 時晦公派(시회 時晦; 15세)
승사랑공파 承仕郞公派(광현 光玹; 15세)[A][전] ,
부정공파 副正公派(종미 宗美; 7세)[A]
생원공파 生員公派(흥림 興林; 8세)[A][54] ,
감찰공파 監察公派(덕림 德林; 8세)[A][55]
전서공파 典書公派(제경 齊卿; 8세)[A][56] ,
평장사공파 平章事公派(안군 顔君; 2세)[A][57] .
◎ 대장군공파 분파(시조세대 = 중조세대 + 18세)[58]
좌시랑공파 左侍郞公派(인후 仁后; 4세)[59] ,
공량공파 恭良公派(수산 壽山; 5세)[60]
찬성공파 贊成公派(질 晊; 8세).[61][62]
◎ 통례문부사공파 분파(시조세대 = 중조세대 + 18세)[63]
좌윤공파 左尹公派(척/즐 隲; 3세),
남대공파 南臺公派(백공 伯恭; 4세)
정랑공파 正郞公派(보민 補民; 5세),
현감공파 縣監公派(숭경 崇經; 6세)
충간공파 忠簡公派(숭원 崇元; 6세),
승정공파 承政公派(숭윤 崇允; 6세)
직강공파 直講公派(숙황 淑璜; 6세),
현감공파 縣監公派(숙형 淑珩; 6세)
감찰공파 監察公派(숙규 淑珪; 6세),
정양공파 靖襄公派(숙기 淑琦; 6세)
문장공파 文莊公派(숙함 淑瑊; 6세).
상술했듯이 위의 파들은 모두 현재까지 이어져오나, 아래의 파들은 현재 확인이 되지 않고 있는 파들이다.
◎ 예부상서공파(禮部尙書公派)[64]
◎ 이부시랑공파(吏部侍郞公派)[大][65]
◎ 전법판서공파(典法判書公派)
◎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 판도정랑공파(版圖正郞公派)[大]
◎ 영광군사공파(靈光郡事公派)[大][66]
3.1. 연안 이씨 분적 본관 일람[편집]
- 안산 이씨 경기계[67] : 시조 이인수(李仁守)[68] 는 연안 이씨 태자첨사공파 중시조 이습홍의 9세손 이근수의 장남으로 조선조에서 별시위를 지냈다고 한다. 안산 이씨의 세보에 의하면 이근수가 맹인 지화(池和)의 모함으로 창원에 유배되었다가 그의 형 이근건의 아들 이인문의 상소로 해배된 뒤 이천(伊川)으로 이거하였다고 한다. 그 뒤 아들 이인수(李仁守)가 다시 안산으로 옮겨 정착하면서 분적, 본관을 안산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연안 이씨 족보에선 이근수의 아들 중 이인수(李仁守)의 이름을 찾을 수 없기에 연안 이씨 일부 종원들은 안산 이씨 경기계가 정말 연안 이씨 태자첨사공파에서 분관한 가문인지 의구심을 갖고 있다.[69] 실제로 조선 후기 중인 집안의 족보를 총망라한 성원록에는 안산 이씨 시조는 이원(李元)으로 본래 본관이 완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연안 이씨 태자첨사공파 종중에선 이근수의 후대를 수재공파(秀才公派)로 정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만약 이인수(李仁守)가 정말 이근수의 아들이라면 이근수의 여러 아들 중 이인수(李仁守)의 후손들만 분적한 것으로 짐작된다. 알려진 인물로는 조선 후기 화가 이한철과 동래구청장을 지낸 이규상 등이 있다. 안산 이씨 경기계 홈페이지가 존재하며, 안산 이씨 경기계의 파로는 참의공파, 절충장군파, 부호군파, 찰방공파, 부사공파, 주부공파, 승윤공파, 숭건공파가 있다고 한다.
- 해주 이씨: 해주 이씨 시조는 이녕(李寧)으로 문하좌시랑 이인후의 후손이자 훈련원첨정을 지낸 이중련의 장남이다. 이녕(李寧)은 예빈시별제를 지내고 후에 가선대부 공조참판 해성군에 증직되었다. 이녕(李寧)이 해주로 유배 되자 후손들이 해주에 거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이녕(李寧)을 시조로, 해주를 본관으로 하여 연안 이씨 대장군공파에서 분적하여 세계를 이어왔다고 한다. 알려진 인물로는 견마(牽馬)로서 호성공신 3등에 올라 해신군에 봉해진 이희령과 조선 후기 화가로 <강산무진도>, <송하담소도> 등을 그린 이인문[70] 등이 있다. 또한 김홍도의 절친인 역관 이민식도 해주 이씨인데 김홍도는 이민식에게 그림을 선물하기 위해 <서원아집도>와 <신선도> 등을 그리기도 했다. 인구 수는 2015년 기준으로 1,531명이다.[71][72]
4. 항렬[편집]
상술했듯이 문헌이 삼별초의 난 때 실전되어 전해지지 않아 이들 계파는 시조와의 세계는 물론 각 파조들 간의 세대 관계도 모른다. 이에 각 파가 독자적인 항렬자를 사용한다. 또한 같은 이유로 어느 계파가 큰집인지도 알 수 없다.
태자첨사공파 시조세대[시] = 중조세대 + 15세[世代]
소부감판사공파 시조세대[시] = 중조세대 + 16세[世代]
대장군공파 시조세대[시] = 중조세대 + 18세[世代]
통례문부사공파 시조세대[시] = 중조세대 + 18세[世代]
5. 논란[편집]
5.1. 시조 이무가 신당서의 이무인가[편집]
5.1.1. 부정 의견[편집]
1887년 연안 이씨 운초 이정균이 지은 역사픽션 <흥무왕연의>에 등장하는 시조 이무가 신당서에 등장하는 농서 이씨[81] 이무가 맞는가 하는 문제이다. 신당서 열전 제4권에 나오는 이무가 동명이인이 아닐까 하고 김동협이 문제를 제기했다. #
연안 이씨 시조에 대한 기록이 당대 중국 측 기록으로는 없고 현재 중국에서 알고 있는 이무 역시 회남왕이 아닌 대한민국의 명가 연안 이씨의 시조라는 점 및 백제 정벌을 했다는 연안 이씨 족보의 주장을 그대로 실었을 뿐이다.
이에 대해 부사공파 문중 22세손 이성영은 혹여 가필이거나 정확지 않은 내용으로 시조를 오히려 욕되게 할 수 있으니 판단을 조심하자는 글을 썼다. 또한 이무가 연안백이 되었다가 연안후로 가봉이 된 후 국빈으로 대접받았다고 하는데 연안이란 지명은 고려 충선왕 때인 14세기이므로 혹여 연안후가 됐다 하더라도 중국 어딘가의 연안이 아닐까란 가설을 세우기도 했다. #
그러면서도 시조의 이름이 첫 등장하는 것은 현종 때 동국만성보가 처음이며[82] 영조 때 문헌비고와 일제강점기 때인 1924년 만성시조편임을 지적한다.[83] 물론 전문가의 주장은 아니기 때문에 고종 때 창작인 흥무왕연의를 김유신 장군의 흥무왕실기로 오해한 점은 눈에 띈다.
나당연합군의 지휘부 명단에는 대총관 소정방, 부대총관 김인문, 좌효위장군 유백영, 우무위장군 풍사귀, 좌효위장군 방효공 등이 나와있고, 중랑장 이무의 이름은 없으나 최소한 시조가 당나라에서 백제로 건너온 것이 맞는다면 소정방이 웅진도독부 등을 설치할 때 남기고 간 1만 병사 중 장교가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5.1.2. 긍정 의견[편집]
원정시 농서 이씨 황족을 1명 파견한 게 아닌가. 단순한 장교가 제후의 직위를 받는가.
회남왕 이무가 맞는다는 전제하에 측천무후가 이무의 부친 이원례를 죽여 당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귀화하지 않았을까. #
문무왕이 공을 인정해 시염성(鼓鹽城)에 식읍을 내렸고, 이에 후손들은 본관을 시염으로 하였다. 시염성(鼓鹽城)은 현재의 황해도 연안이므로 이무가 식읍으로 받은 곳이 황해도 연안으로 보는 것이 옳다.
또한 1821년에 연안 이씨 종원 이문우(李文愚)가 시조묘를 찾기 위해 여러 수소문을 한 결과 황해도 연안부 서편 비봉산 옥녀봉 아래 은일동(隱逸洞)에서 시조묘를 찾고, 혼유석과 상석 밑에서 ‘연안백이무(延安伯李茂)’라고 쓰여 있는 지석을 발견하였으므로 이무가 식읍으로 받은 곳은 중국과 무관한 황해도 연안임이 자명하다. #
1,000호의 식읍은 우리나라 역사상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중국의 만호후 수준의 제후였다. 당시의 식읍은 고려 시대와 달리 전적인 권한이 있었을 걸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무는 신라의 왕의 아랫사람은 아니며, 봉건시대 군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5.1.3. 반론[편집]
- 원정시 농서 이씨 황족을 1명 파견한 게 아닌가.
- 장교가 제후의 직위를 받는가.
- 측천무후와 이원례의 알력
- 중국 측 회남왕 이무에 대한 평가는 그럼? (바이두 사전 옮김)
- 李茂(约643-676年)唐高祖李渊孙,徐康王李元礼长子,封淮南王。性格酷薄,行为恶劣。
- 父亲李元礼卧病在床时,元礼宠姬赵氏貌美,李茂逼迫欲夺之。李元礼叱责李茂,李茂愤恨,屏斥李元礼的侍卫,断绝了父亲的药膳。说:“既得五十年为王,更何烦服药?”李元礼最终饿死,李茂后袭封父爵。上元年间,此事泄露,李茂被流放振州而死。
5.1.4. 결론[편집]
회남왕 이무는 백제로 온 사실이 없고 패륜으로 중국에서도 최남단 하이난 섬 싼야시까지 유배를 가서 죽는다. 즉 회남왕 이무는 한반도에 자손을 남길 수도 없고 집안의 명예와 역사에 누가 될 인물을 다시는 잘못 주장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
경북 군위 장군당에 대해 "문무왕, 김유신, 회남왕 이무가 모여..."이런 내용의 2011년 경북일보의 기사가 있는데 1회성 기사야 그렇다 쳐도 혹시 장군당 사적 설명 등 회남왕 운운하는 정보가 있다면 서둘러 정정시켜야 할 것이다.
5.1.5. 양측 모두 인정하고 있는 사항[편집]
- 이무의 실존 여부
→ 인정. 천 년 이상 족보의 기록을 중심으로 한 씨족이 뭉치고 싸우며 한반도의 역사를 만들었음.
- 이무의 농서 이씨 출신 여부
→ 인정.[85] 족보의 기록뿐만 아니라 1715년 이이명이 쓴 형조판서 이은상의 묘지 비명에 선계가 농서 이씨 출신이라고 적혀있고, 1790년 정조가 직접 연안 이씨는 농서 이씨 출신이라고 언급함.[86]
5.2. 수춘부원군 이수산이 연안 이씨?[편집]
이수산은 시호는 공량이며 1352년 조일신의 난 때 살해당할 뻔했지만 숨어서 죽음을 면했고 첨의평리, 행성낭중 등을 역임하다가 기철 등이 숙청되어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으나 풀려난 후 수춘군에 봉해진 다음 찬성사와 당시 정1품 관직인 판삼사사[87] 를 지냈고 추성익대좌명공신과 추숭보절익대좌리공신에 봉해졌다. 대부분의 사전엔 이수산의 본관이 수안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연안 이씨 대장군공파 중 공량공파의 족보에 이수산이 그의 형제인 수창, 수장과 함께 이인계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후대까지 기록되어 있기에 이수산을 수안 이씨가 아니라 연안 이씨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근대 지리학자 이지호[88] 는 수안 사람으로서 본관이 '연안'인데, 이 사람이 공량공의 21세손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1980년대 연안 이씨 공량공파 족보 서문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 족보 서문엔 본인의 선대는 분명한 연안 이씨임에도 불구하고, 각종 사적과 보서에는 수안으로 관향이 기록되어 있어 조상에 대한 죄를 짓고 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수산의 본관이 연안이라는 주장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이수산이 수춘부원군에 봉군이 내려지면서 아들인 지밀직사사 이념과 함께 수안에 정착하였다는 내용을 보아 이수산이 본관을 '연안'에서 '수안'으로 분적했다는 주장이다.[89][90] 다른 여타 가문의 특성을 살펴보아도 분관한 가문은 봉군에 의하여 분관되는 경우가 많다.
다른 주장으로는 이수산이 수춘부원군에 봉군되었기에 본관이 수안이라고 오인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수춘부원군은 고려사에서 처음 언급된 것으로 보이는데, 고려사라는 사료가 고려 당시에 기록된 사료가 아니라 1400년대 중반 즈음에 작성된 사료이기에 이수산의 본관까지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었고, 단순히 이수산이 수춘부원군에 봉군됐다는 이유로 그의 본관을 수안이라 칭했다는 것이다. #
또 다른 주장으로는 정말 출신 지역이 수안군이라 명신전에 수안군 사람(遂安郡人)이라고 나와있다는 주장이 있다. 다른 가문의 인물들로 예를 들면 본관이 성주라고 하면 ‘성주 사람(星州人)’이라고 표기하지 ‘성주군 사람(星州郡人)’이라고 표기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처가인 인천 채씨 세보에도 이수산을 수안군 사람(遂安郡人)이라 하였고, 공량공파 파보에 이수산의 아들인 이념의 묘는 수안군 도소면에 소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수산은 수안군 사람(遂安郡人), 즉 고향이 수안이라는 것이지 본관이 수안이라는 것이 아니며, 인명사전 등에서 본관을 수안이라고 기재한 것은 고향인 수안을 본관으로 잘못 해석한 기록이며, 수춘부원군도 이수산의 고향인 수안을 바탕으로 봉군이 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
1973년 발간된 연안 이씨 공량공파 족보의 서문엔 공량공의 후손들이 조선 후기 이전부터 이수산의 뿌리는 연안 이씨에 있다는 내용이 담긴 보첩을 갖고 있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비록 1973년에 발간된 족보의 서문이지만 해당 내용을 한성부판윤을 지낸 강난형이 1867년에 작성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결정적으로 수안 이씨 족보에는 이수산과 아들 이념이 나와 있지 않고, 연안 이씨의 보첩에 이수산의 선대와 그의 후손들의 세계가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봤을 때 이수산의 본관은 수안이 아니라 연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항목을 만드는데 사용한 자료들의 출처이고, 이 글은 공량공파와 연안 이씨의 관계를 고찰한 글이다. 해당 링크들을 통해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6. 실존 인물[편집]
6.1. 삼국 시대, 남북국 시대[편집]
- 이무 - 연안 이씨 시조. 당 고종 때 중랑장을 지내다 태종무열왕 7년에 소정방의 부장으로 신라에 와서 백제를 평정하는 공을 세웠다. 또 나당동맹 와해 때 소정방이 신라도 공격하려 하자 이무가 반대하는 등 공이 커 시염성에 식읍 700호를 받고 백작에 봉해졌으나 문무왕 때 김유신이 "식읍을 1,000호로 올리고 후작에 봉해야 한다"라고 청하니 문무왕이 윤허하였으며, 높은 벼슬을 제의하였으나 이무가 극구 사양하니 국빈으로 예우하였다고 전승에 나와있다. 또한 군위의 효령사(장군당)는 김유신과 소정방 그리고 대사마 좌위 중랑장(大司馬 左衛 中郞將) 이무를 기린 곳이며 야사에 세 사람이 장군봉에 올라 “이제 삼국 통합이 되었으니 안심하고 살아라’’라고 주민에게 말했다고 전한다. 정초, 상원과 단오에 제례가 있다. 소부감판사공파 등 일부 파에선 연안 이씨 시조 이무의 시호가 고려 명신 도첩과 부록에 기록된 내용에 따라 문청공(文淸公)이라 전한다. 묘는 연안군 비봉산 옥녀봉 아래 은일동(隱逸洞)에 있었으나[91] , 한국 전쟁으로 인해 남한과 북한이 서로 오갈 수 없으므로 연안 이씨 남계 후손들이 현재의 국립대전현충원의 위치에 단소(壇所)를 정하였다. 그러나 해당 묘역이 국립대전현충원의 위치로 정해지자 정부는 연안 이씨 시조 단소를 이장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연리 문중에서 이무는 삼국통일에 공헌하였고, 나당동맹에 주도적으로 공헌해서 국가 존폐 위난의 계기를 슬기롭게 해결하신 역사적 인물이라며 진정을 요청하였고, 마침내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의 묘소 존치 재가가 떨어져 단소(壇所)를 보존할 수 있었다.[92]
- 이경[추원보] - 발해 무왕 때 북우장군을 지냈으며, 경덕왕의 장인인 김의충과 함께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당나라와 평화책을 제시하고, 선대의 신원 복관을 요청하였으며, 발해의 건국을 인정받고, 친선을 도모했다. 이에 당 현종이 이경을 우림장군에 제수하였으며, 이경은 다음 해에 발해로 돌아와 좌윤에 제수되었다.
- 이윤원[추원보] - 태위장군 이일원의 아들로 발해 선왕 때 남좌장군으로서 양주절도사 조공과 순천장군 김웅원과 함께 왕병을 모아서 단주절도사 이사도가 일으킨 난을 평정하였다.
- 이충식[추원보] - 발해 출신으로 발해가 망하자 신라로 귀순하여 경애왕 때 창부원외랑을 지냈다. 박술홍과 함께 부사로서 후당에 파견되어 황제로부터 겸시어사를 제수 받고, 후에 고려 광종 때 연안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묘는 연안군 용각산에 있다고 한다.
6.2. 고려[편집]
이에 현재는 계보가 전해지지 않아 각 파의 중시조의 세계를 고증할 수 없어 중시조의 선대의 인물을 신분 정도만 간단히 유추하고, 정확히는 파악할 수 없다는 어려움이 있다. 그 예로 상서좌복야 등을 지낸 김의공의 처가 연안 이씨라고 전하는데, 부인 연안 이씨의 아버지는 도감판서를 지낸 승중(承中)이며, 조부는 제학을 지낸 충건(忠健), 증조부는 소감을 지낸 유인(裕仁)이라고 한다. 여기서 김의공의 처 연안 이씨는 1117년 생이므로 증조인 이유인(李裕仁)은 대략 1000년대 중반 시기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유인(李裕仁)은 현재 밝혀진 연안 이씨의 파들 중 가장 활동 시기가 빠른 소부감판사공파 중시조 이현려의 활동 시기보다 이전에 활동한 인물로 역시 계보가 전해지지 않아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 또 고려 성종이 “쇠로 말하면 좋은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은 사람이다.(鐵中錚錚)”라고 표현한 고려 현종 13년에 졸한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주국(尙書左僕射參知政事柱國)을 지낸 이주헌[94] 의 증손이자 선종 1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태자소보를 지낸 이공저[95] 의 본관이 연안(농서)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생년이 고려 문종 6년임을 보아 각 파 중시조의 선대의 인물로 추측되나 역시 확실히 고증할 방도가 없다.
- 이양[추원보] - 陽. 병부사 이예의 아들로, 후당에 사신으로 가서 겸시어사에 제수된 이충식의 손자이다. 성종 7년에 좌보걸 겸 지기거주를 지냈으며, 이후 병부상서 등을 지냈다. 좌보걸 겸 지기거주를 역임할 당시 봉사(封事)를 올려 민생의 안정을 꾀했다.
- 이원정[추원보] - 元挺, 일명 元. 정국공신 이제선[96] 의 손자이자 한림학사 이신의 아들이다. 현종 때 호부상서와 좌복야, 검교태자태보 등을 지냈다. 아들은 참지정사 이표이다.
- 이인정[추원보] - 仁挺. 이원정의 동생으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우정언과 이부상서, 평장사와 문하시중 등을 지냈다. 여담으로 연안 이씨 추원보에는 이인정이 1047년에 급제한 것으로 나와있으나, 문과 방목에선 1046년에 급제했다고 나와있다. 참고로 경주 이씨 평리성암공파 파조 이인정(李仁挺)과는 동명이인이다.[97]
- 이원수[추원보] - 조부는 이부상서 이자림, 아버지는 병부상서 이협이고, 평장사 이원장의 동생이며, 이공수의 형이다. 본인은 이부상서와 문하시중 등을 지냈다. 아들은 호부상서 이하이고, 손자는 문하시중 이경필[98] 과 하정사로서 요나라에 다녀온 평장사 이덕윤이다.
- 이욱[추원보] - 평장사 이원장의 아들로 1076년에 문과를 장원으로 급제하여 병부상서를 지냈다. 부인은 봉어첨사 김해군 김렴의 딸인 계림군부인 김해 김씨이다. 또한 태자첨사공파의 중시조인 이습홍의 조상이다.[99]
- 이신[추원보] - 참지정사 이표의 아들이자 소부감판사공파의 중시조 이현려의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다. 호는 청계(淸溪)이며, 인종 15년에 문과를 장원으로 급제하여 판이부상서와 상서성의 우복야와 좌복야를 지냈다.
- 이계원[추원보] - 아버지는 인종 16년에 문과를 장원으로 급제한 이대유이고, 동생은 검교중랑장 이계우이다. 본인은 의종 16년에 문과를 장원으로 급제하여 병부상서를 지냈다.
- 이안군 - 顔君, 초휘는 顔. 소부감판사공파 중시조 이현려의 아들이자 고려 명종 때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지냈다.[100]
- 이회[추원보] - 원종 때 사람으로 아버지는 밀직부사와 첨의찬성사를 지낸 이곤이며, 어머니는 철원군부인 동주 최씨이다. 본인은 첨의평리를 지냈다.
- 이분희 - 汾禧. 충렬왕 때 사람으로 대장군 이송(李松)의 아들이다. 왕을 호종해 위사공신에 올랐다. 이때의 공으로 지복주사였던 연안을 석주로 승격시켰다. 또한 원나라 공주를 맞아들이기도 했다. 추밀원부사, 지주사, 지밀직사사를 지내다 김방경을 무고한 죄로 가산이 적몰되었고, 1278년에 바다에 던져져 죽었다고 한다. 또한 고려사 이분희전에는 그의 기록과 함께 그의 본관인 염주 이씨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배위는 함양 박씨로 판이부상서 추밀사 응천군 박신유의 딸이고, 고려사와 연안 이씨 추원보에 의하면 아들인 이장(李璋)은 지밀직사사를 지냈고, 딸은 도첨의중찬 한강의 아들인 보문각제학 한사기에게 출가했다고 한다.[101]
- 이습 - 이분희의 동생으로 초명은 이분성이다. 1240년에 태어났으며, 원종의 총애를 받아 상서도성의 우승에 올랐고 충렬왕 때 지신사를 지냈다. 성격이 곧고 깨끗하여, 정령(政令)이 시행될 때 백성들에게 불이익이 있게 되면 간쟁을 하였고, 내관들의 청탁을 모두 거절하여서 내관들의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또한 고종과 후궁 사이의 딸과 혼인하여 부마가 되어 국서(國壻)로 불렸다. 그러나 이습 역시 김방경을 모함했다는 죄로 1278년에 죽었다.
- 이경무 - 조부는 검교태자첨사로서 상약국 봉어를 지낸 학옹 이습홍이다. 아버지 이극영은 판태의감사를 지냈으며, 본인은 봉익대부 판도판서와 밀직부사를 지냈다. 부인은 군부인 성주[102] 김씨로 감찰어사 김대년의 여식이고, 은청광록대부 추밀부사 김수연의 손녀이고, 통헌대부 태자빈객 신천 강씨 강득화의 외손이다. 아들은 중정대부 대호군 이승안이고, 사위는 대제학 풍산 홍씨 홍유이다.
- 이효신 - 종2품 봉익대부 판도판서.
- 이아자첩목아 - 이효신의 장남. 원나라로 귀화했다. 후에 원나라에서 연안군으로 봉해졌다.
- 이엄 - 지밀직사사를 지낸 문신이자 연안군. 1등 공신에 올라 수성양절보리공신에 책록되었다. 충혜왕 때 밀직부사가 되었다. 1339년 충숙왕이 죽은 뒤 충혜왕에게 강간을 당한 경화공주가 창피하여 원나라로 가기 위하여 말을 구하려 하였다. 이때 충혜왕이 이엄과 윤계종(尹繼宗) 등에게 명하여 마시(馬市)를 금하여 경화공주가 말을 구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충혜왕이 이엄과 윤계종(尹繼宗)에게 마시(馬市)를 금하게 하여 말을 팔지 못하게 한 점으로 보아 충혜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이엄은 1340년 충혜왕이 원나라 형부(刑部)에 구금될 때 폐신으로서 이몽가(李蒙哥) 등과 투옥되었다가 풀려났으며, 1342년 조적의 난 때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었다. 이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고, 연안군(延安君)에 책봉된 후 1346년에 졸했다.
- 이운 - 芸, 雲. 연안군 이엄의 동생으로 기철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충혜왕의 잘못을 고발하였다. 이 일을 평소 이운의 형인 이엄과 사이가 좋지 않던 승려 파가경이 마치 이엄이 충혜왕을 무시하여 충혜왕의 잘못을 고하도록 했다는 식으로 궤변하며 고해 충혜왕이 크게 노하여 이엄을 구타한 사건이 있었다. 관직으로는 지신사와 판밀직사사 등을 지냈다. 형과 같이 조적의 난 때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었다.
- 이권 - 판삼사사를 지낸 문신이자 연성군, 오원부원군.[103]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를 거쳐 1350년에 경상·전라도도지휘사가 되어 왜구를 방어하였고, 이듬해에는 만호 인당(印瑭)과 함께 서강(西江)에서 왜구를 막았다. 1352년에 조일신의 난이 일어나자 조일신이 왕을 위협하여 어보를 꺼내 스스로 우정승에 제수하고, 정천기를 좌정승으로, 이권을 판삼사사로, 나영걸을 판밀직사사 등으로 삼았다. 그러나 공민왕 1년 9월에 조일신의 난이 실패하자 정천기와 조일신 등은 주살되고 이권은 일당으로 몰려 옥에 갇혔다가, 그해 10월에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1354년에 원나라의 요청으로 고우(高郵)의 장사성(張士誠)을 토벌하기 위하여 서경의 수군 300여 명을 이끌고 연경으로 갔으나, 남쪽에 있는 적의 세력이 날로 강성해진 탓에 힘껏 싸우다가 최원(崔源)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해에 오원부원군(五原府院君)에 봉하여졌다.
- 이인계 - 1279년 생으로 감찰시승 이병의 장남이자 문하좌시랑 이인후의 형이다. 관직은 시랑이다. 이인계는 판삼사사 공량공 이수산을 포함하여 세 아들을 두었는데, 이인계의 장남인 이수창은 판도정랑공파 중시조 이백연과 영광군사공파 중시조 이계연의 아버지이다.
- 이인후 - 충숙왕 때인 131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좌시랑을 지냈으며 감찰시승을 지낸 이병의 아들이다. 경기도 고양시 일대에 이인후를 파시조로 하는 대장군공파 좌시랑공파의 집성촌이 있다. 연안 이씨에서 분적한 해주 이씨 시조 해신군 이녕이 이곳 출신이라 전해진다. 또한 궁원록에는 이인후가 이분양의 아들이자 감찰시승을 지낸 이병의 삼남으로 기록되어 있다.
- 이수산 - 이인계의 아들로 밀직부사로서 추성익대좌명공신에 책록되고 춘성군(春城君)에 봉해졌다. 1352년, 조일신의 난 때 종적을 감추어 죽음을 면하였고, 1354년에 첨의평리를 거쳐 찬성사에 올랐다. 1355년 12월 행성낭중으로 쌍성에 가서 이주민과 원거주민을 구별하여 호적을 작성하였는데, 이를 삼성조감호계(三省照勘戶計)라 하였다. 1356년 친원파 기철이 포살되자 그 일파로 유배되었으나 1362년 12월 수춘군(壽春君)으로서 동북면도순문사로 나가 여진족을 평정하여 경계를 정하였다. 이후 판삼사사에 올라 수춘부원군(壽春府院君)이 되고, 추충보절익대좌리공신에 봉해졌으나 신돈에 의하여 한때 숙청당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살해되자 우왕을 즉위시키려는 이인임의 의견에 판삼사사로서 혼자 그 부당성을 지적하며 종친 가운데에서 후계자를 뽑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시호는 공량(恭良)이다. 아들은 대학사를 지낸 이염과 이희다.
- 이정공 - 중정대부 대호군 이승안의 아들로 전보도감 판관을 지냈으며, 전공판서 이원발의 아버지이다. 사후 광정대부 문하평리와 상호군에 추봉되었다. 부인은 남평 문씨로 증 지밀직사사 문유근의 딸이며, 수사공 좌복야 문효식의 증손녀이며, 안산 김씨 문하시중 김위의 외손녀이다.
- 이종실 - 종2품 봉익대부 호조전서. 이효신의 손자이며 종3품 중현대부 사복시정 이광의 아들이다.
- 이종미 - 종3품 중현대부. 서운관부정을 지냈다.
- 이종무 - 자덕대부 공조전서, 증 숭정대부 좌찬성.
- 이원발 - 상호군 이정공의 아들로 초명은 총(寵), 호는 은봉(隱峯), 부인은 중랑장 김남보의 여식인 송양군부인 성천 김씨이다.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과 같은 연배로 목욕도 함께 할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고려 공민왕 때 봉익대부 전공판서와 상호군 등을 지냈는데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가서 종적을 감추었다. 이때 평소에 덕과 의리를 같이 하던 친한 원천석이 그의 집에 와서 5~6일 정도 유숙도 하였다. 조선이 개국하였을 때 태조가 원천석과 함께 상신으로 불렀으나 여러 부름에도 움직이지 않고 최후에 우의정에 제배하였으나 불사이군 충절을 지키며 끝내 응하지 않았다. 뒷날 장남 이귀령이 공을 세운 것이 많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정승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서운관사에 증직되었다. 묘는 원래 고산현[104] 소주치에 있었으나 후에 용인 구수동 해자원으로 옮겼다. 아들은 좌의정치사 이귀령과 판서 이귀산이다.
- 이승백 - 평장사 이안군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용중랑장 이양, 어머니는 안주군부인 강씨이다. 누이는 당악 김씨 판도시랑 김원계에게 출가했다. 이승백은 고려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윤두수의 평양지에는 태조 원년에 문과에 합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광정대부 문하평리 상호군, 평안도 도순문찰리사를 지냈다. 부인은 평양부원군 조위의 여식인 평양 조씨이며, 아들은 광정대부 문하찬성사와 개성부윤에 추봉된 이화와 진사 이룡, 평안도 신성군영 천호를 지낸 이조, 공조전서를 지낸 이음이다.
- 이제경 - 호조전서 이종실의 아들로 공조전서 겸 춘추관사를 지냈다. 소부감판사공파 중 전서공파의 파조이다.
- 이념 - 판삼사사 이수산의 장남으로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판전의시사와 예의·전공의 판서 및 밀직부사, 첨서밀직사사를 역임했다. 공양왕 땐 지밀직사사가 되었다. 이때 왕에게 중방(重房)의 처벌을 강요하다가 순군에 갇히고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으나 이성계의 도움으로 합포에 장배로 그쳤다. 얼마 후 경상도 도절제사로 복귀하였다. 조선 건국 후 삼사우복야를 거쳐 정당문학으로 개국원종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사은사를 겸해 공민왕의 금인을 반환하러 명나라에 갔으나 황제로부터 "예를 갖추지 못한다"는 질책을 받고 돌아왔으며, 앞으로 조빙을 못 하게 만든 죄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이듬해 등용되어 1394년에 문하평리로서 표전과 예물을 가지고 명나라에 갔으며, 신도 궁궐 조성도감의 판사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춘추관 대학사로 궁궐에 말을 탄 채 들어갔다 탄핵으로 파직되었으며,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의 일파로 몰려 충군(充軍)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왔다. 그러나 정종 2년에 상왕에게 자주 찾아가 잡언(雜言)을 함부로 하여 춘주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여담으로 이념이 죽자 태종은 조회를 정지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예조좌랑 권보와 김훈이 명을 어기고 조회를 정지하지 않아 이들을 순금사에 가두었다가 3일 만에 석방시키기도 하였다.
- 이척 - 우왕 6년, 진사로서 문과에 병과 3위로 급제했다. 조부는 통례문부사공파 중시조 이지이며, 아버지는 중현대부 공조전서 전농정을 지내고 은청광록대부 좌복야 연성부원군에 증직된 문창공 이계손이다. 어머니는 계림부부인 경주 이씨이며 고려 문하시중 계림부원군 이제현의 차녀이다. 고려 때는 삼사좌사를 지냈으며, 조선이 건국된 후 정종 1년에 병조판서를 지냈다. 부인은 횡성군 조무의 여식인 횡성 조씨다.
6.3. 조선[편집]
- 이귀령 - 자는 수지, 호는 계은, 시호는 강호다. 전공판서 이원발의 아들이며 고려 말에 판선공시사 등을 지냈다. 동생인 이귀산과 함께 태조와 조선이 세워지기 전부터 친분이 있었다고 하며, 태조가 즉위하자 개국원종공신이 되어 형조전서 등을 지냈고, 태종 때 판공안부사와 판승녕부사, 판좌군도총제부사 등을 지내다 판한성부사가 되었다. 이후 검교우의정, 검교좌의정에 올랐는데 태종 16년에 좌의정으로 치사#致仕하였다. 94세 나이로 졸하였다. 여담으로 이귀령의 둘째 아들인 이돈이 조선 최대의 음부(淫婦)인 유감동과 간통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돈은 유감동의 죄상을 알면서도 안연하게 간통하면서 그의 아버지인 검한성 유귀수의 집까지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에 사헌부는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였으나 공신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벌에서 면죄되었다.
- 이귀산 - 자는 흥서, 호는 괴은이다. 봉익대부 전공판서 이원발의 아들이며 좌의정치사 이귀령의 동생이다. 도호부사 이속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전라도관찰사와 경성수보도감 제조, 경상도관찰사, 개성부유후,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전라도관찰사로 재직 당시 사헌부에서 이귀산이 찬성사 이천우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탄핵하니 태종은 이를 논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또한 태종이 이귀산에게 경상도관찰사를 제수하였을 때 사헌부에서 이귀산은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라고 상소하여 경상도에 가지도 않고 파직되었다. 이후 자헌대부 호조판서와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고령현부인 고령 김씨 사이에서 이속을 낳았으며, 장인은 문하평리, 예부상서, 판개성부사 등을 지낸 익대공신 고양부원군 김남득이다. 이귀산은 만년(晩年)에 용인 구수동으로 물러나 두 그루의 괴목을 심고 스스로 괴은(槐隱)이라 하고, 삿갓을 쓰고 밭을 갈며 강가에서 낚시하며 보냈다고 전해진다. 진안 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되었으며,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서리에 묘소가 있었으나, 골프장 건설을 위해 파묘하였다.[105] 묘갈은 1831년에 다시 세워졌으며, 비문은 19세손 가선대부 전 궁내부특진관 이의덕[106] 이 짓고, 17세 방손 통훈대부 전 중추원의관 이병욱이 썼다.
- 이장림 - 1378년에 충의교위 평안도 신성군영 천호 이조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는 문하평리 이승백이다. 본인은 문과에 합격하여 자헌대부 병조전서를 지냈다. 부인은 문하시중 이인임의 장녀 성주 이씨다. 슬하에 아들 이보를 두었는데, 이보는 현재 후손이 전하지 않는다.
- 이석형 - 자는 백옥, 호는 저헌, 시호는 문강, 4등 좌리공신으로 연성부원군이다. 태종원종공신 증좌의정 이회림의 아들이며, 조부는 개국원종공신으로 좌찬성에 증직된 이종무이다. 배위는 정경부인 연일 정씨로 정몽주의 증손녀이다. 연원군 이숭원과 같이 대표적인 훈구파였으며, 세종 때 생원시, 진사시, 식년문을 27세의 나이로 1년에 세 번 장원하였다. 1년에 삼장원 한 일은 과거 제도를 실사한 이래 없었던 일이다.[107] 이에 훗날 세조가 궁녀에게 삼장원가를 짓게 하여 술을 마실 때마다 부르게 했다.[108] 이석형은 사간원정언에 제수되고, 이듬 해 집현전부교리에 임명되어 14년 동안 집현전학사로 재임하면서 집현전의 응교, 직전, 직제학을 두루 역임하였다. 고려사를 편찬하고, 세조 때 한글로 논어 구결을 만들기도 했으며 대학연의 등 유교 경전을 정리했다. 전라도, 황해도의 관찰사와 판한성부사, 판중추부사 등을 지냈으며 조선의 호패법을 정착시키고 조선의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인 의원정심규제(醫員正心規制)[109] 를 제정한 사람이다. 또한 이석형이 나라 녹을 먹는 몸으로 사육신을 기리는 글을 지었다가 죽을 뻔 했으나 세조가 눈감아줬다고 한다. 조선 전기의 8대 문장가이며, 그의 후손 중에 정승만 8명, 부원군이 3명, 3대 연속 대제학을 포함해 총 6명의 대제학이 나왔으며 판서만 37명이다. 인조반정으로 정사공신 1~2등을 싹쓸이한 이귀, 이시백, 이시방 부자도 그의 후손이며, 정조가 늘 저서를 끼고 살았다는 월사 이정구도 그의 후손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후손 중엔 역적이나 탐관오리가 없이 깨끗 청빈하기까지 했다.
- 이속 - 호조판서 이귀산의 아들이며, 간택 제도를 만들게 한 일등공신이다. 춘천군수로 재직 당시 태종의 혼담을 거절했다가 노비로 전락되었다.
- 이숭원 - 3등 좌리공신. 이백겸의 손자이며, 예조판서 이보정의 아들이다. 훈구파의 핵심인물로서 세조 때 대사헌까지 지냈다. 또한 성종 즉위의 공으로 좌리공신 3등에 올랐으며 종2품 가선대부 연원군에 봉해졌다. 후에 이조판서에 올랐다. 1485년 우참찬이 되어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좌참찬이 되어 정헌대부에 올랐다. 1489년에 다시 형조판서를 지낸 뒤 1491년 병조판서가 되었다. 중종 때는 청백리에 녹선되고, 1648년엔 지례의 도동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공이다. 그의 후손들은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대대로 세거했고 독립운동가 여럿을 배출했다. 그의 초상화는 1974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 이숙기 - 1등 적개공신, 2등 세조원종공신, 4등 좌리공신. 평양판관 등을 지내다가 1467년 이시애의 난 때 강순(康純) 휘하로 공을 세워 절충장군에 올랐다. 실록에 이시애의 난에서 반란군을 이숙기와 남이가 살상한 것이 셀 수 없을 정도로 가장 많다고 나와있다. 이 공으로 종2품 가정대부로 이조참판이 되고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다. 후에 자헌대부로 승진하고 호조판서, 형조판서에 올랐다.
- 이곤 - 자는 자정, 호는 녹창이며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이인문의아들이다. 성종 23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병조좌랑·헌납을 지내다가 연산군 10년에 갑자사화 때 윤은보와 함께 심문받고 장 70대의 벌을 받았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정국공신 4등에 녹훈되고 연성군으로 봉해졌다. 이때 이곤이 반정 주모자에게 아무 공로도 없이 울면서 공신에 끼어 달라고 청탁하였기에 이를 기롱하는 말인 ‘정곡공신(正哭功臣)’이라는 말이 나왔다. 첨지중추부사로 관압사(管押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밀양부사가 되었다. 밀양부사로 재직 당시 사헌부와 사간원으로부터 밀양과 같은 큰 읍을 다스림에 부적합한 인물로 체직(遞職)을 청하는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519년 조광조 등 사림파의 주장에 의해 부당하게 책봉되었다는 이유로 공신 위호가 삭제되었다가 기묘사화 후에 복적 되었다. 이후에 이곤이 장례원판결사·여주목사·철원부사 등을 지낼 때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 했는데 정부에서 검시하고 수사한 결과 노비에 의해 독살되었음이 밝혀졌다. 참고로 이곤의 비석은 태양 안에서 날개를 높이 펴고 비상하는 삼족오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러한 묘표 양식은 이곤의 묘표와 박운의 묘표, 변안열의 묘표에서만 확인되는 매우 희귀한 양식이다.
- 이국주 - 1등 적개공신 이숙기의 손자로 이천현감을 지냈다. 초배는 민침(閔琛)의 딸인 여흥 민씨로 관찰사 이우민 등 2남 1녀를 두었다. 나이가 들어 상처했는데, 아들 이우민이 홀몸이 된 자신에게 오히려 비안 박씨를 소개하고 계모에게도 효를 다했다고 한다. 이국주는 계배 박씨에게서 아들 이호민을 포함해 3남 1녀를 두었고, 이호민은 대제학, 좌찬성 등을 지내면서 집안을 빛냈고, 이호민이 나라에 기여한 공이 커서 이국주는 사후에 연선부원군에 봉해졌다.
- 이언침 - 사림의 인물이다. 이속의 손자인 이인충의 증손으로 1537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인종 때 장령으로 있다가 사임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순창군수로 나갔다. 그러나 1547년에 장미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자 우울하게 지내다 죽었다. 그 후 1570년에 직첩을 환수받았다.
- 이후백 - 자는 계진, 호는 청련·청련거사, 시호는 문청(文淸). 1567년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았으며, 그 해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이어 대사간·병조참의를 거쳐 도승지·예조참의·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을 역임했으며, 1573년 변무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인성왕후가 죽자 3년상을 주장해 그대로 시행되었다. 1574년 형조판서가 되고 다음 해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그 뒤 이조판서를 지냈다.[110] 또한 김귀영과 함께 대제학의 물망에 올랐으나 결국 김귀영이 대제학이 되고 이후백이 홍문관과 예문관의 제학이 되자 많은 조정 사람들이 아쉬워했다고 한다.[111] 호조판서 재임 시 휴가를 얻어 함양에 성묘를 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종계변무의 공으로 1590년 광국공신 2등으로 연양군(延陽君)으로 추봉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아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한다. 함흥의 문회서원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저서로는 『청련집』이 있다. 여담으로 연안 이씨 인물 중 유일하게 택리지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 이호민 - 2등 호성공신이자 연릉부원군. 홍문관, 예문관 모두 대제학을 지낸 대학자다. 좌찬성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했다. 이때 적의 수중에 들어간 서울을 삼도의 군사가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선조의 착잡한 심경을 절실하게 표현한 시인 『용만행재문하삼도병진공한성(龍灣行在聞下三道兵進攻漢城)』을 지었다.[112] 또한 이호민은 명나라로 건너가 원군을 요청한 덕에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고 왜란을 끝낼 수 있었다. 선조가 양위를 하려 할 때 광해군이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죽을 뻔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도 광해군을 밀었다. 그러나 북인들의 독재와 영창대군 살해에 반대하다 귀양갔다. 인조반정 후 복권된다. 시호는 문희다.
- 이광정 - 2등 호성공신이자 연평부원군. 지중추부사, 이조판서, 예조판서, 개성유수, 한성판윤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수군을 맞이하는 역할을 했으며 명나라 사신으로도 다녀왔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묘호란 때 인조를 호종해 강화도로 갔다가 병환으로 죽었다. 인현왕후의 진외증조부이기도 하다. 또한 아버지 이주가 여러 사료와 가첩 등을 모아 족보를 준비하다 죽자 아들 이광정이 그 뒤를 이어 1605년 연리 사대파 중 처음으로 족보를 편찬하여 이홍로에게 초간본을 보낸 다음 이홍로가 청백리 이기설에게 질정을 받아 ‘을사보’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 이엽 - 태자첨사공파 중의 금성공파 파조. 종1품 찬성 이문회의 증손으로 이귀령의 곤손이다. 무과 급제한 후 금성현령을 지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병사 소속 우후로 참전하였다. 한산도대첩에서 왜장 가등청정에게 잡혀 항복을 하라고 협박당했으나 끝까지 듣지 않으니 관백에게 압송하여 왜의 본영까지 납치되었다. 여기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엽의 용모와 기개가 아름답다고 느껴 대장의 집에 머물게 하고 후하게 대접하면서 비단 등을 많이 주었다. 그러나 이엽은 조선인 포로들과 받은 비단을 팔아 배를 산 다음에 탈출하자고 계획을 세운 후 탈출에 성공하였지만[113] 다시 추격을 받아 해중에서 스스로 배에 칼을 꽂으며 바다로 떨어져 자결했다. 이 때 적군이 바다에서 이엽의 시신을 끌어내어 환열[114] 한 뒤 거리에 걸었다고 한다. 이엽의 현손 이세온은 이를 고지에 작성하였고, 이 고지의 내용을 바탕으로 상소를 써서 숙종에게 올린 결과 그 공이 인정되어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 이보 - 조선의 의병장이자 이귀의 형이며 소부감판사공파 중 지평공파의 파조다. 이보는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마면 사람인 소행진과 함께 의병 400여 명을 모집하고 가산을 정리하여 군량과 병기를 마련한 후 금산에 주둔한 왜진으로 향하였다. 당시 왜군은 곡창지대인 호남을 점령하여 군량미를 조달하려고 금산을 거쳐 배티재로 향하고 있었는데 왜군 1만 6,000여 명이 배티재를 넘으려 할 때 광주목사 권율이 이끄는 1,500여 명의 전라도 군사들과 소행진과 이보가 이끄는 부대를 비롯한 농민 의병군이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보와 소행진은 400여 명의 의병들과 함께 온종일 수적으로 우세한 왜병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다 전사하였다. 후에 사헌부지평으로 증직되었으며 묘는 익산에 있다.
- 이귀 - 인조반정의 주역으로 1등 정사공신이다. 서인의 영수이다. 남한산성을 높게 올렸고, 호패법을 재정비해 군역 대상자를 확실히 했으며, 만주족에 대한 각종 국방력 강화에 온 힘을 다했다. 그러나 이미지와 다르게 지천 최명길과 함께 주화파였다. 후일 사계 김장생과 함께 인헌왕후 구씨의 상에 기년을 주장하다가 파직됐었으나 정묘호란 때의 비상시국을 조선이 잘 넘길 수 있도록 온힘을 다했다. 또한 1624년, 개성유수로 재직 당시 건장하면서 용감한 자를 모집하여 화포를 연습시켜 어영군을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어영청의 시초이고, 이귀가 어영사로 임명된 것이 어영사 제도의 시초였다. 더불어 이귀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벌어질 것을 예견하고 만주족의 침입에 대비한 조선의 방어전략을 담은 이충정공 비어방략을 기록했는데 이 문서는 총 3권이며, 현재 미국 UC 버클리의 리치먼드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 이씨 부인 - 여류시인. 부사 신순일의 부인으로 이정현(李廷顯)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글짓기를 좋아했으며 시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썼다. 주역과 이백의 글을 필사했으며 유집이 1권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씨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향거즉사가 있으며 〈실제(失題)〉 1편이 전하는데 비오는 날 자신의 아름다웠던 청춘을 회고하는 내용이다.
- 이정구 - 조선 중기의 4대 문장가를 이르는 말인 월상계택의 '월'이 그를 일컫는 말이다. 월사집을 남겼고 대제학과 좌의정을 지냈다. 많은 명문과 그림을 남겼으며 해동명신록에도 이름이 올라 있다. 경기도 가평군에 묘소가 있다. 이귀의 아버지 이정화와 육촌형제간이지만 이귀보다 7살 아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중국어에 능하여서 어전통관으로 명나라 사신이나 지원군을 접대할 때 조선 조정을 대표하며 중요한 외교적 활약을 했으며, 양호 사건과 정응태 무고사건에 조선 조정이 휘말려서 명나라에게 곤혹을 치르게 생겼을 때 이정구가 명나라 조정에 상신한 주문으로 겨우 혐의를 벗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명나라 사람들이 조선 국왕의 충간의담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는 평이 연려실기술에 실려 전한다고 한다. 이후 인조가 즉위하자 세자이사와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냈다. 시호는 신하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시호인 문충(文忠)이다. 여담으로 조선 문인 최초로 중국에 책을 발간한 인물이다.
- 이유길 - 종계변무로 광국공신에 책록된 이후백의 손자. 어린 나이에 명량해전에 출전해 이순신 밑에서 전공을 세우고 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청나라가 일어날 때 우영장으로서 명나라 원군으로 갔다 만주에서 전사했다. 그가 오랑캐에게 포위될 때 피로 "3월 4일 죽었다"라고 삼베에 적어 말에 매어 보냈다. 주인 잃은 말이 만주에서 1,000km를 사흘 만에 달려 그의 고향집에 와서 슬피 울고 절명했다고 한다. 말을 묻은 곳이 파주 의마총이다. 의마총은 현재 파주시 지정 유적이다. 이유길은 1621년에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이후 1829년에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 이경엄 - 조선 중기의 문학가. 연천군. 본은 연안, 자는 자릉(子陵), 호는 현기(玄磯)이다. 연릉부원군 이호민의 아들이며 한성판윤을 지낸 후 기로소에 들어갔고 연천군에 봉해졌다. 사후에 우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시문집으로는 『과정습유(過庭拾遺)』를 남겼다. 시조 15수와 가사 사천귀전가(斜川歸田歌)가 전한다.
- 이홍로 - 연성군 이곤의 증손으로 1579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3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처는 영의정 기자헌의 누이로 행주 기씨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좌랑으로서 선조를 호종하다 도망을 가는 등 여러 이유로 탄핵을 받았고, 후에 다시 함경도종사관, 충주목사 등을 지냈으나 재차 탄핵되어 평안북도 강계와 제주도 등으로 귀양갔다. 제주도에서 해배된 후 풀려나와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나 1608년 류영경 등 소북의 일파로 몰려 다시 제주에 유배된 후 사사당하였다. 1612년에 류영경과 김대래와 함께 부관참시되었다. 또한 광해군에게 역신으로 낙인되는 바람에 가문이 풍비박산나는데 아들 이승원, 이승형은 류영경의 아들 유열과 함께 연좌되어 처형되고 남은 아들 이승업마저 교수형에 처해졌으나 다행히 이승업에겐 아들 2명이 있었고 그 중 이여주는 이승원에게 입양된 뒤 안악군수를 지내 세대를 이어갔다. 이홍로는 1623년 인조반정 후에 신원되어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 이시백 - 조선 고전소설 박씨전의 주요 인물이며,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1등 정사공신 이귀의 아들로 본인도 2등 정사공신에 올랐다. 시호는 충익이다. 병자호란 때 화살을 맞으면서도 남한산성을 지켰다. 아버지 이귀에 이어 2대에 이은 충정이었다. 김육의 대동법을 지지하였으며 서인의 영수로서 예송논쟁을 이끌었고 영의정을 지냈다. 여담으로 인조가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이시백은 이경여와 함께 반대하며 소현세자가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인조는 결국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술자리를 만들어 이시백을 불러 "병판은 주량이 얼마나 되오?"라고 물은 뒤 이시백이 "신은 술을 잘 못하고, 병이 있어 더욱이 못합니다"라고 답하자 인조가 "그 병은 남한산성을 지키다 생긴 병이다"라고 말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인조는 다시 이시백의 자녀가 몇 명인지 묻고, "왜 과거를 보지 않느냐? 나라에 충성하려면 무과라도 좋다. 나는 그대의 부친의 공을 잊지 못한다. 자식들이 과거를 보기를 바란다."라고 자녀들이 과거를 보게 하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이시백은 감동하여 "아버지가 눈감기 전에는 오직 나라가 있음을 알 뿐이었습니다. 이제 전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감읍하여 눈물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답하자 인조는 자리를 같이한 봉림대군으로 하여금 이시백에게 술을 따르게 하며 “내가 이분을 팔다리처럼 여기니, 너도 뒷날 이분을 높게 대접하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시백의 증손인 이하가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여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이에 이하는 능지처참 되었고, 후에 신원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 때문에 이하의 동생인 이척과 아들 이명구 등 일가가 죽거나 귀양을 갔고, 이들의 처는 노비가 되었다고 한다.
- 이여순(李女順) - 이귀의 장녀로 1587년에 태어나 인조반정의 일등공신 김자점의 형인 유학 김자겸과 혼인하였다. 부부는 독실한 불교신자였고, 두 사람은 혼인 후 일반적인 부부관계가 아니라 함께 불도를 닦는 도반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갔다. 김자겸에게는 오언관이라는 서얼 출신의 친구가 있었는데, 오언관은 김자겸의 집을 자주 드나들며 이들 부부와 함께 수행을 하고 불법을 논하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김자겸이 1608년에 요절했는데, 이때 오언관에게 “내가 죽더라도 집에 드나들며 내 아내와 불도를 논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후 수년간 오언관은 이여순(李女順)의 집을 드나들며 불경을 가르쳐 주었다. 1614년에 오언관이 경상도로 낙향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여순(李女順)은 함께 덕유산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비구니가 되었다. 비구니가 된 후 이명을 예순(禮順)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일은 예순비구니와 오언관의 간통 사건으로 둔갑해 광해군이 직접 심문하는 일까지 일어났는데, 오언관이 강변칠우 사건의 범인인 박치의로 오인돼 잡히면서 발생한 일이었다. 이에 오언관과 함께 이예순(李禮順)도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이에 이귀는 딸을 잘못 관리했다는 이유로 북인들에게 극렬하게 공격당했다. 그러던 와중 오언관이 의금부에서 공초를 받던 중 극심한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이예순(李禮順) 역시 처형될 뻔하였으나 광해군에 의해 방면되었다. 그 후 예순비구니는 왕실 비구니원인 자수궁에 머물렀고, 광해군의 정실 문성군부인 류씨와 김개시 등의 왕실 여성들로부터 생불로 칭해질 정도로 깊은 신망을 얻었다. 연려실기술에는 “예순이 궁중에 출입하니 대궐 안 사람들이 모두 생불이라 일컬으며 신봉함이 비할 데 없었다”고 기록돼 있다. 특히 김개시와는 모녀지간을 맺을 정도로 친분이 돈독했다. 그러나 이예순(李禮順)은 광해군을 내쫓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아버지 이귀와 시숙 김자점은 서인세력을 규합해 광해군의 폐위를 도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이 이를 눈치 채고 이들을 일망타진하려 하자, 예순비구니는 광해군의 측근인 상궁 김개시에게 편지를 보내 아버지 이귀의 무고함을 호소하였다. 김개시는 이예순(李禮順)의 부탁을 받은 직후 광해군에게 "충신들을 저버리지 말라"는 잘못된 조언을 던졌다. 이에 광해군은 이귀 등 반정세력에 대한 처벌을 보류하였고, 반정세력은 거사 시일을 앞당겨 인조반정을 성사시켰다. 반정 후 궁궐을 나온 그는 왕실의 지원을 받아 절을 중창하는 등 불교 진흥에 남은 생을 바쳤다. 동대문 밖 청룡사와 도봉산 회룡사의 중창 불사를 그녀가 주도한 것으로 나온다. 1657년에 71세의 나이로 입적하기까지 비구니 이예순(李禮順)의 신앙과 행적은 광해군일기, 어우야담, 공사견문록 등 비교적 많은 곳에 전해 온다. 이예순(李禮順)은 당시 일반적이던 도피로서의 여성 불교가 아니라 여성과 불교에 적극적인 힘을 축적한 유래없는 역사적인 사례로 꼽힌다.
- 이시방 - 이귀의 아들로 정사공신 2등으로 연성군에 봉해졌다. 판의금부사, 호조판서를 지냈다. 제주 목사를 역임하고 있을 때 광해군이 죽자 소복으로 친히 염습하여 사변을 잘 처리하기도 했다. 그가 저술한 서봉일기에도 광해군 사후 처리 과정을 자세히 기록했다. 이시방은 훈구공신 집안 출신이면서도 사림 출신 정승 김육을 따르며 형 이시백과 함께 대동법을 떠받쳤다. 영의정에 추봉되었다.
- 이명한 - 삼등현령 이계의 손자이자 좌의정 이정구의 아들이다. 광해군 2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16년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공조좌랑 등을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경연시독관에 제수되었다. 이어 이조좌랑이 되어 어사로 관동에 나가 서리들의 정치와 백성들의 폐해을 살폈다. 이후 옥당에서 근무하다가 호당에 들어갔다. 또한 사가독서를 했으며, 승문원제술관, 한학교수, 교리 등을 겸대하다 이조정랑이 되었다. 이괄의 난 때 왕을 공주로 모시고 가서 이식과 함께 팔도에 보내는 교서를 지었다. 이어 응교·사간에 승진한 뒤 이조참의로 승진했다. 다시 사가독서를 허락받고 호당에 들어갔고 승문원부제조가 되었다. 도승지 등을 거쳐 1641년 한성부우윤·대사헌이 되었고, 홍문관·예문관의 양관 대제학,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643년 이경여, 신익성 등과 함께 척화파로 지목되어 심양에 잡혀가 억류되기도 했다. 이듬해 세자이사가 되어 심양에 가서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를 모시고 왔다. 1645년에 명나라와 밀통한 자문(咨文)을 썼다 하여 다시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풀려나와 예조판서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 심양까지 잡혀갔던 의분을 노래한 시조 6수가 전한다. 저서로 『백주집』 20권이 있다. 서산에 일모하니 또한 이명한의 작품이며, 남구만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동창곡이 사실 이명한이 지은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이어지고 있는데 그 근거 중 하나가 『약천집』에 당시 유행했던 한글 시조 정몽주의 단심가, 이항복의 철령숙운가와 함께 동창곡이 나와 있는데 이명한의 시조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1642년 진사시에 아들 이만상이 시험을 봤는데, 당시 부친인 이명한이 시험관으로 있었다. 모든 사람이 이만상이 1등을 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시사를 관장하던 부친은 중의(衆議)를 물리치고 아들 이만상을 2등에 두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아들 이만상은 부친의 병에 마음을 졸이며 간호를 하다 몸이 상하여 33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 이일상 - 이명한의 큰아들. 17세 소년 등과한 천재. 문과급제를 하고도 너무 어려 임관을 못하고 몇 년간 책만 봤다. 병자호란 당시까지도 아직 새파랬는데 청나라에 대해 주전론만 주장하다가 전라남도 영암군으로 귀양갔다. 이후로도 파직됐다가 복직됐다가 관직 생활이 평탄치 못했지만 결국 비변사당상과 대제학, 예조판서 등을 지내고 우의정에 추증. 동촌 이씨 8상 중 첫째다.
- 이관징 - 숙종 대 남인. 숙종의 신임을 받아 대사헌·이조판서 등을 거쳐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두루 관직을 거쳤으며 청렴한 관리로 이름났다. 그러나 갑술환국 때 삭출되었다가 이듬해 직첩이 환급되었다. 여담으로 당시 영의정 권대운이 기사환국으로 자신이 다시 집권하자 정치적 동료인 좌의정 목내선, 공조판서 오정위, 좌참찬 이관징과 대신들의 아들들을 불러 연회를 베풀었다. 이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 <권대운 기로연회도>이다. 이 작품은 집단 초상화의 성격을 가진 작품으로 연회에 참석한 이들의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그려졌다. 또한 이 연회에 참석한 이관징의 아들 이옥은 이 모임을 기념하여 「사로연회병서(四老宴會屛序)」라는 글을 남겼다.
- 이단상 - 대제학 이명한의 아들로 자는 유능(幼能), 호는 정관재(靜觀齋), 서호(西湖),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진사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다음 해 병과로 문과에 급제했다. 이조와 병조의 정랑을 지냈으며, 의정부 사인으로 지제교를 겸했다. 이후 사가독서를 한 뒤 대간에 들어가서 정론(正論)을 밝히기도 했다. 이후 부제학 등을 지냈다. 사후 민정중의 건의로 이조참판 겸 경연, 양관제학에 추증됐다가 이조판서로 다시 추증됐다.
- 이인징 - 자는 옥서(玉瑞), 호는 운강(雲崗). 관찰사 이창정의 손자이며, 지평 이완의 아들이다. 1675년에 사마 양시에 합격하고 1679년에 식년문과에 장원하여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이후 부수찬·부교리·사간·집의·수찬·교리 등 삼사의 직책을 두루 지내고 1690년에 시강원보덕을 거쳐 당상관인 승지에 올랐다. 숙종이 승하하고 경종이 즉위하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로 승진하였다. 1724년에는 공조판서를 거쳐 한성판윤에 임명되었다. 한성판윤 시절에 늙고 신병이 많아 한성부의 수많은 송사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체직되어 다시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영조가 즉위한 뒤에도 공조판서와 한성판윤을 번갈아 수행하다가 공조판서로서 벼슬길에서 물러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영예를 입었다. 여담으로 이인징의 아들 이혼(李混)은 모종의 이유로 영조 6년에 주살되었으며[115] , 이인징의 조카인 이렴(李濂)[116] 이 영조 21년에 영변에 유배되어 있던 이인좌의 난의 잔당이 일으킨 모역의 주모자로 잡혀와 문초당한 후 노적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이렴(李濂)의 아들 이만인(李萬寅)[117] 과 조카 이만보(李萬輔), 이만장(李萬長)이 유배되었다.
- 이희조 - 이단상의 큰아들이다. 부친인 이단상의 뜻을 계승하여 서인의 의리론을 수호했다. 노론과 소론의 분열 당시 노론에 선다.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영암에 유배되었다. 이후 철산으로 이배 도중 정주에서 사망했다. 생전에 이조참판과 대사헌 등을 지냈으며, 사후 좌찬성에 추증됐다.
- 이석관 - 자는 대유, 호는 삼금당. 전라도 영암 출신으로, 관찰사와 이조참의 등을 지낸 이숙함의 후손이며,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 2등 연양군에 추봉된 청백리 청련 이후백의 현손이다. 숙종 12년에 무과 병과 1위로 급제하여 연리 인물 중 유일하게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다.
- 이하조 - 자는 낙보, 호는 삼수헌. 이단상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우의정 이행원의 딸이다. 부인은 김창국의 여식인 안동 김씨이다. 1682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송시열의 문인이 되어서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그는 삼수헌을 지어놓고 10여년 동안 자연 속에 묻혀 지내다가 음보로 기용되어, 1694년에 세자익위사세마가 되었으며, 이어 사복시주부·공조좌랑을 지내고, 1698년에 부평현감으로 나가 치적이 높았으나 37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여담으로 김창국의 다른 딸은 숙종의 후궁인 영빈 김씨이다.
- 이철보 - 호조참판 이정신(李正臣)의 아들이다. 영조 때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판서, 판의금부사를 지냈다. 동생은 공조판서 이길보, 아들은 좌의정 이복원, 손자는 영의정 이시수, 이조판서 이만수이다. 1760년 본인이 기로소에 들어갔을 뿐 아니라, 동생 이길보, 아들 이복원, 손자 이시수까지 기로소에 들어감으로써 조선시대 최초의 삼세입사를 기록했다.
- 이정보 - 대제학 이일상의 증손으로 경종 1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영조 8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병조좌랑, 정언 등을 지내다 탕평책을 반대하는 시무십일조를 상소했다가 면책을 받고 사직했다. 1737년에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교리가 되고 이조좌랑, 교서관교리, 이조정랑, 응교, 형조참의, 동부승지, 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740년엔 수원부사가 되어 부성을 쌓고 목장을 설치해 전마를 기르고 군비를 충실히 하였으며, 1742년엔 승지로 전임하여 부제학, 대사성, 대사간, 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이후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상벌을 공평히 하고 비용을 절감해 변경을 안정시켰다. 이듬해 한성좌윤,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비변사제조 등을 지냈으며, 1750년에 도승지로 다시 탕평책을 반대하다가 인천부사로 좌천되었다. 2년 뒤 동지경연사, 성천부사를 거쳐 이듬해 좌부빈객이 되고, 1754년에 한성판윤 겸 오위도총관, 형조판서를 지냈다. 1755년에 우참찬, 예조판서, 판의금부사, 동지성균관사 등을 역임하고, 1756년에 공조판서로 홍문관·예문관의 제학과 지경연사·좌빈객을 겸하였다. 1758년엔 이조판서로 지춘추관사, 판돈녕부사를 겸하고 이어 좌참찬, 세손의 사부가 되었으며 1761년엔 이조판서로 수어사를 겸하였다. 1762년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763년 예조판서, 대제학, 지성균관사에 이어 판중추부사로 보국숭록대부에 승진하였다. 성품이 엄정하고 강직하여 상소를 하다 여러 번 파직되었다.
- 이후 - 노론의 영수로 영의정 이시백의 5대손이며, 좌의정을 지냈다. 이후에게는 과거 시험과 관련된 야사가 존재한다. 야사에 따르면 이후는 늙도록 과거에 응시했으나, 모두 낙방하고 음서로 조선의 지방관 중 3대 요직인 나주목사를 지내고 있을 때 형 이유가 자신의 생일잔치에 참석해달라고 하여 잔치에 갔다. 이때 이유가 점쟁이를 불러 점을 보게 했는데, 동석했던 호조판서가 "언제 일일이 점을 보겠느냐? 제일 먼저 정승이 될 것 같은 인물을 고르라."라고 하자 점쟁이는 당시 과거를 모두 낙방해 음서로나마 나주목사를 지내고 있던 이후를 지목했다. 이에 이후는 "내가 과거에 붙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정승이 되냐"며 화를 내고 나왔다고 한다. 그날 밤 이유가 "이것도 인연인데 과거를 보라"고 권했고, 이에 이후가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합격했다. 이 일로 한양에선 낙방 도사가 과거에 합격했다며 떠들썩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는 정말로 9년 만에 정승이 되었다.[118] 좌의정으로 세자부(世子傅)를 겸하였으며, 이듬해 사도세자의 평양 원유사건을 비롯하여 유언비어가 심한 데 대한 왕의 추궁을 받자, 그에 책임을 느낀 나머지 이천보(李天輔)·민백상(閔百祥) 등과 음독자살하였다. 시호는 정익(定翼)이다.
- 이천보 - 영조 대 영의정, 노론의 영수이다. 증조부는 비변사 당상을 지낸 이일상이고,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외손자로 인경왕후의 조카이다. 또 판서 이문원의 양아버지이자 좌의정 이존수의 조부이다. 이조·병조판서 등을 거쳐 1752년 우의정에 승진하고, 같은해 좌의정에 올랐다가 영돈녕부사로 전임되었다. 1761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사도세자의 평양 원유사건에 인책하여 음독 자결하였다. 가마나 말이 아니라 검은 소를 타고 다녀 까막소 대감이란 별칭이 있었다고 한다. 사위는 풍양인 우의정 조경이다.
- 이길보 - 영조 때 대사헌, 도승지, 대사간을 거쳐 공조판서를 지냈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판의금부사 이철보의 동생이다.
- 이복원 - 판의금부사 이철보의 아들이다. 정조 때 이조·병조·형조판서를 거쳐 좌의정, 우의정을 지냈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 이시수 - 자는 치가(稚可), 호는 급건(及健)이다. 판의금부사, 이조판서 등을 지낸 이철보의 손자이며 친부는 좌의정을 지낸 이복원이다. 이시수는 1773년(영조 49) 문과에 급제하였다. 성균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 이조 참의, 황해도관찰사, 개성부 유수,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병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지냈다. 정조 때 우의정을 역임하였고, 순조 때에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기로소에 들어갔다. 사후 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이지억 - 자는 덕수(德廋)·항승(恒承)·대수(大廋), 호는 성헌(醒軒)이다. 이조판서 이광정의 후손이며, 이성징의 증손으로 생부는 이만선이고, 양부는 정랑 이만성이다. 이지억의 육촌인 이지서[119] 는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여 참수당한 이지시[120] 의 재종이라는 이유와 그의 일파인 이지경(李之璟)과 이만춘(李萬春)의 일족이라는 이유로 과거를 보지 못해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는 데에 불만을 품고 괘서를 작성하여 붙인 혐의에 대해 추국 당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육촌인 이지억을 포함해 이지억의 형제 이지양과 이지목을 자신의 일파라고 지목하여 친국을 받았으나 이지억이 논리정연하게 논변하여 영조로부터 비상한 재주를 인정받게 되었다. 영조 27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장령을 거쳐 승지가 되었다. 1754년 강릉부사·도승지를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기까지 벼슬에 나간 지 10년이 못 되어 정경(正卿)의 자리에 올랐는데, 관작은 모두 영조의 특교에서 나온 것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그의 승진이 관작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처사라 하여 여러 차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 때문에 공조·형조·병조판서와 한성부판윤을 역임하는 동안 파직과 등용이 반복되었다. 그가 죽자 영조는 몹시 애석히 여기고, 그에게 자식이 없으므로 입후(立後)하게 하였으며, 상례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그의 후손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 선생이다.
- 이민보 - 노론의 인물로 자는 백눌(伯訥), 호는 상와(常窩)·풍서(豐墅),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진사시에 합격한 뒤 음보로 군수가 되고 장악원정, 동부승지, 호조참판을 역임했다. 그 후 정조 15년에 공조판서가 되어 장악원제조를 겸했으며, 그후 형조판서에 전임되었다. 1796년 노인직(老人職)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의 위계에 올라 돈령부판사가 되었는데, 음보로 보국숭록대부에 오른 것은 영의정 황희의 아들 황수신 이후 처음이었다. 판서 이조원(李肇源)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 이명식 - 시파의 원년 멤버이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함경도관찰사·판의금부사·공조판서·이조판서·형조판서·비변사당상·의정부좌참찬·개성부유수·병조판서·의정부우참찬·예조판서·가례도감의 제조·판돈녕부사 등을 지냈다. 1788년에 평안도관찰사 재직 당시 환곡과 그 발매의 폐단을 아뢰었다. 육조의 판서를 모두 지냈으며, 정조 21년엔 봉조하가 되어 정1품 보국숭록대부가 되었다. 또한 글씨를 잘 써 정조가 신하 124명에게 주자의 시 1224수를 필사하게 할 때 아들과 함께 발탁되어 영광으로 여겼다. 그가 사망하자 정조가 애도하였으나 1801년 지평 심보영(沈普永)과 윤우렬(尹羽烈) 등의 상소에 따라 추삭되고 1805년에는 아들인 이면응(李冕膺)까지 탄핵을 받았다. 그 후 복관되어 1820년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 이성원 - 병조판서, 경상도·평안도관찰사,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좌의정 재직 중 다리는 사치일 뿐 일종의 폐단이니 다리를 금해야 한다고 했다. 1789년에 동지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파견 되었다가 돌아와서 죽었다.
- 이조원(李祖源) - 이진보의 아들로 1735년에 태어나 1806년에 죽었다. 1790년에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한성부좌윤으로 재직중이던 1791년 동지부사로 연경에 다녀와 대사성을 역임한 뒤 대사헌에 올랐지만 곧 체직되었고, 도승지를 거쳐 형조판서에 올랐다. 1796년에 예조판서로 서용되었고, 그 뒤 형조·병조의 판서를 지냈으며 공조판서로서 동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우참찬·형조판서·한성부판윤을 지냈다. 순조 이후 노론의 시파로 활약하다가 1805년 김대비 계인 김달순과 함께 안동 김씨의 김좌근에 맞서다가 방귀전리 당했다.
- 정부인(貞夫人) 연안 이씨 - 재주와 문필이 뛰어난 여류 문사. 예조판서 이지억의 차녀로 1737년에 출생하였다. 류성룡의 8세손인 류사춘과 결혼하여 안동에서 유복하게 살면서 3남 1녀를 두었다. 그중 장남은 초계문신(抄啓文臣) 류태좌이다. 연안 이씨는 『쌍벽가』와 『부여노정기』 등 규방가사를 지었다. 『쌍벽가』는 정조 18년에 안동 하회에서 지은 것으로 맏아들 태좌와 큰조카 상조가 동년 동학으로 함께 과거에 급제하니 정조가 장질을 인견(引見)하고 이 훌륭한 일과 아울러 류성룡의 음덕(陰德)을 기려 제문을 지어 승지 이익운으로 하여금 치제하게 하자, 그날 즉석에서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2음보 1구로 계산하여 전체 326구이다. 또한 제목에 쓰인 ‘쌍벽’은 과거 급제한 두 형제의 준수하고 출중함이 서로 백중함을 칭찬한 것이다. 이 가사는 구성의 일관성, 뛰어난 조사(措辭), 유려한 문장 등에 있어, 규방가사 중 수작으로 꼽힌다. 또한, 대부분의 규방가사가 작자와 연대가 미상인 데 비하여, 『쌍벽가』는 작자와 연대가 잘 알려진 작품이며 연대가 가장 오래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있다. 『부여노정기』는 내용은 하회에서 부여 관아까지 도임하는 행차에 내행(內行)으로 끼어 여행하는 동안의 기록을 기행문으로 읊은 동시에, 부여 관아의 생활과 도임잔치, 남편의 수연(壽宴) 잔치를 읊으면서 성은에 감축하고 있다. 여행하는 동안을 읊은 내용은, 예천의 오천내, 삼산에서 옛 벗을 만남, 함창의 정결한 음식, 상주의 인물, 보은의 속리산, 노성의 은진미륵, 오리정의 넓은 들과 풍경 등이다. 이 역시 작자와 연대가 확실한 규방가사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작품 중의 하나이며, 수작에 속한다.
- 이기연 - 조선의 천주교 순교자로 연평부원군 이광정의 6세손으로 이지계의 사남이다. 충주에 있는 교회의 중추적인 인물로 이기연은 동생인 이최연과 함께 아버지의 기일 때 제사를 지내지 않다가 함경도 종성 근처로 유배를 갔으나 유배지에서도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유배지 근처에 사는 사람들에게 포교 활동을 계속한 탓에 1801년에 참형되었다. 참고로 이기연은 동생 이최연과 함께 연안 이씨 족보에서 삭제되어 현재 연안 이씨 족보에서 이지계의 아들은 3명으로 나온다.
- 이문원 - 본래 영의정 이천보의 먼 친척인 이국보의 아들이었으나 아들이 없는 이천보에게 입양되었다. 1763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음서(蔭敍)로 휘령전(徽寧殿)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뒤에 관직이 호조좌랑에 이른 후 1771년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와 승정원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쳐 동래부사, 경상도관찰사, 성균관 대사성, 여주목사, 선혜청 제조, 공조·이조·형조·병조·예조의 판서, 함경도관찰사, 판의금부사 등을 지냈다. 병판을 지낼 때 인척인 오재순이 이판에 오르자 한 집안에서 양전을 겸할 수 없다며 사직했다. 1788년엔 이조판서로 재직 중 홍봉한과 가까운 한덕후를 사헌부에 천거한 일로 비난을 받자 빈청에서 조복을 벗어던지고 물러나 숙천에 3개월간 유배되는 등 소소한 처벌들을 겪기도 하였다. 1790년엔 이조원(李祖源)이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되자 이문원이 자신은 황해도감사, 이시수가 함경감사로 재직 중이므로 연안 이씨 일문이 삼번(三潘)을 맡을 수 없다 하여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1792년에는 채제공을 격렬히 비난하는 상소를 올려 향리로 쫓겨난 일도 있었다. 외에도 지경연사,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이문원은 허례허식에 얽매이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데 이에 관련한 장난 괴수 이문원이라는 민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으니 재미로 보는 것을 추천한다.
- 이정운 - 이조판서에 증직된 이징대의 아들이다. 1769년에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검열·정언·지평 등을 거쳐 1781년에 홍충도암행어사가 되고, 1784년 서장관으로서 사은사(謝恩使) 박명원(朴明源) 등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승지 등을 지내다가 한때 안치되었고, 1796년 충청도관찰사, 이듬해 함경도관찰사, 1800년에 형조판서가 되었다. 문명이 뛰어났으며,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여담으로 아들 이조판서 이명적이 동래부사로 재직 당시 동래부에 관여하던 사람들이 그의 공덕을 기려 이명적 축제혜민비(李明迪築堤惠民碑)를 세우기도 하였다.
- 이익운 - 형조판서 이정운의 동생이다. 1774년에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1801년, 경기도관찰사 때 주문모(周文謨)와 관련된 천주교신자 18인을 잡아 심문한 뒤 그 중 3인을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이후 대사헌과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시호는 정숙(靖肅)이다.
- 이조원(李肇源) - 이민보의 아들로 1758년에 태어나 1832년에 죽었다. 앞에 서술되어 있는 동시대에 같은 집안 사람인 동명이인이 존재하므로 구분을 잘 해야한다. 장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1820년 판의금부사를 거쳐 좌참찬이 되었고, 이듬해 하정사로 청에 파견되었다. 이 후 우빈객·예문관제학·병조판서·좌빈객·호조판서·이조판서·공조판서 등 현직을 두루 지냈다. 그러나 1827년 승지 이해청과 사간원과 사헌부가 1814년 순조의 병환이 위독했을 때 김기서·김기후 등과 반역을 도모했다고 탄핵하자, 봉조하로서 무고라고 소를 올렸지만 결국 흑산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사후 참시당하였다. 풍양 조씨계의 인물로 안동 김씨계와 맞서다가 끝내 희생당한 것이다. 후에 헌종 1년에 대왕대비의 명으로 신원되었다. 글씨를 잘 썼고, 특히 전각에 뛰어났다고 한다.
- 이곤수 - 자는 성서, 호는 수재. 판서 이길보의 손자로 좌의정 이성원의 아들이다. 21세 때인 1782년 성균관 유생으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규장각대교가 되었다. 이후 시강원설서가 되었고, 1787년에는 황해도·평안도 양도의 어사로 나가 민정을 살피고 시정책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함경도관찰사로 부임하는 아버지 이성원을 따라가다가 병으로 요절하였다. 문재(文才)가 뛰어나 정조에게 남다른 총애를 받았으며, 정조가 직접 호를 하사하기도 했다. 이에 이곤수가 요절하자 정조는 몹시 애통해 하였다. 여러 편의 시문을 남겼으며, 정조의 말을 기록한 『일득성어록(日得聖語錄)』 등의 저술을 남겼다. 저서로는 『수재유고』 8권 3책이 있다.
- 이존수 - 영의정 이천보의 손자이자 판의금부사 이문원의 아들. 1819년 대사헌·이조판서, 이듬해 공조판서, 1821년 예조판서·호조판서, 1823년 예문관제학·판의금부사·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26년 함경감사 때에 조적의 고르지 못함을 바로잡는 오조변통책(五條變通策)을 강구하였다. 이듬해엔 우의정이 되어 수령 고과의 법을 엄하게 하고 족징(族徵)의 폐단을 근절할 것을 주장하였다. 1829년에 좌의정이 되어 포삼을 잠월하는 폐단을 막고, 망화정(望華亭)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관속을 빙자해 도매하므로 이의 혁파를 주장하였다. 좌의정 재직 중에 죽었는데 명문가 출신으로 유배 하나 없이 벼슬길이 순탄했으며, 왕에게 직언하며 아첨하지 않았다. 시문에 능했다. 또한 이인화의 소설인 《영원한 제국》의 주인공 이인몽의 실제 모델이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 이명호 - 조선의 천주교 순교자로 본래 이정운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이익운에게 입양되었다. 이명호의 이름은 정조가 지어준 것으로 정조는 뒤에 이명호의 자(字)도 친히 지어주기도 했다. 이를 보아 정조가 이명호를 많이 아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명호가 천주교에 입교한 후 오로지 천주교의 교리를 실천하는 방식으로만 생활했는데 언행을 온순히 하고, 식사를 극도로 검소히 했으며, 기도와 성서 그리고 주일의 교우 활동만이 그의 유일한 삶의 방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보았던 이익운은 이런 아들을 크게 꾸짖고 온갖 말로 배교할 것을 위협했으나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고,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끝까지 설득을 거부당한 이익운은 결국 이명호에게 스스로 죽으라고 사약을 드밀었고, 이명호가 이를 거부하자 사람을 시켜 붙들게 하고는 강제로 먹였다. 포졸들이 들이닥쳤을 때는 이미 이명호가 25세의 나이로 절명한 뒤로 그 옆에는 약사발이 뒹굴고 있었다고 한다.[121] 참고로 이명호는 이명불이란 이름과 자주 뒤섞인다. 이에 이명불은 이명호의 이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연안 이씨 족보에 의하면 이명불은 이익운의 형 이정운의 장자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익운의 양자는 이명불이 아닌 이명호로 기록되어 있다. 즉, 서로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송담유록」[122] 과 「눌암기략」 등은 모두 이름을 이명호가 아닌 이명불로 적고 있다. 게다가 족보에선 이명불의 후대가 끊겼고, 일체의 기록이 말소된 점도 의문이다. 천주교 측의 기록에는 이명호 요한으로 나오고, 1801년 10월 26일 순조실록 기사에도 이명호로 나와 두 사람이 혼동된 이유를 명확하게 알기가 어렵다.
- 이약우 - 좌의정 이성원의 손자로 순조 10년에 진사시와 문과에 급제하여 1835년에 대사헌이 되고, 그 뒤 이조, 병조, 형조, 공조, 호조의 참의를 두루 역임하였다. 1841년에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848년 형조판서에 이어 좌참찬으로 삼조보감찬집당상을 겸하고, 이어 예조판서에 올랐다. 그 뒤 청녕군에 봉해지고 공조, 이조의 판서, 판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헌종이 죽자 왕의 시장제술관이 되고, 예조, 공조, 형조의 판서가 되었다. 이후 지중추부사 겸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약우는 순조, 헌종, 철종의 권우를 입었고, 아래로 사류의 추앙을 받아 청요직을 두루 편력하였다. 또한 문장에 뛰어나 헌종의 시장을 쓰고, 이약우의 상소문은 명문으로 유명하였으며, 문사는 독자적인 경지에 이르러 경외감을 느끼게 하였다. 외에도 역학과 산수에도 정통했다.
- 이가우 - 헌종조부터 철종조까지 13년 동안 한성판윤을 9회나 지냈다. 총 11회 역임한 이완, 이언강에 이은 역대 3위의 기록이다. 이에 이가우를 ‘판윤대감’이라 불렀지만 실제 그의 재임기간을 통산하면 1년 3개월밖에 되지 않는다.[123] 여담이지만 그의 조상이자 세조 때 판중추부사를 지낸 이석형도 한성판윤을 총 9회 역임하였는데 총 재임기간은 7년 4개월~8년 5개월[124] 로 추정되어 이완과 함께 역대 최장 재임 기록을 다툰다. 이석형은 1460년에 1년간 황해도관찰사를 지냈을 때를 제외하면 1459년부터 1468년까지 대부분 한성판윤[125] 만을 지냈기 때문에 이가우보다 '판윤대감'으로 불리기에 더 적합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이가우는 철종 대에 판의금부사,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 이순익 - 초명은 이구익(李九翼), 자는 유서(唯怜)·유서(攸怜), 시호는 문정(文靖). 이약우의 아들로 철종 8년에 서울에서 정시 문과 병과로 급제한 뒤 그 이듬해 규장각 직각이 되었다. 고종 2년 홍문관 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이조참의를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1875년에는 진하 겸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이조참판과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형조판서와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어 예조판서가 되고, 대사헌·공조판서를 거쳐 1890년 2월 홍문관 제학에 임명되었다가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그 뒤 다시 공조판서, 예문관 제학, 예조판서를 지냈다. 1891년 4월에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 1892년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예조판서, 예문관 제학과 홍문관 제학을 지내고, 1894년에는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다. 1897년 봉상시 제조를 거쳐 의정부 찬성에 임명되고 칙임관 1등에 서임되었다. 이듬해 중추원 일등 의관이 되고 흥선대원군의 상례에 지문제술관(誌文製述官)으로 차출되었다. 1899년 장례원경과 궁내부특진관이 되고, 1901년부터는 규장각 학사, 홍문관 학사, 궁내부특진관을 역임하였다. 1902년에 정1품 보국(輔國)에 올랐으며, 1904년과 그 이듬해에는 규장각 학사 겸 시강원 일강관(日講官)을 지내기도 하였다. 또한 1906년에 홍문관 학사를 지냈으며, 칙임관 1등에 올랐다.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 이조연 - 자는 경집, 호는 완서, 시호는 충정이다. 서얼 출신이자 온건개화파의 중심 인물로 1880년에 사헌부감찰로서 개항 후 처음으로 파견되는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이듬해 다시 수신사 조병호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882년, 문과를 병과로 급제하고, 이해 고선관으로 청나라에 가서 영선사 김윤식을 따라 톈진에 간 유학생과 공장들의 실정을 조사하였다. 임오군란 때에 흥선대원군이 조선에 진입한 청나라 군에 의하여 청나라에 끌려가자 통리기무아문주사로 조영하의 종사관이 되어 청나라에 가서 흥선대원군 수금에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또한 청나라의 제도를 본떠 군제개혁이 단행되자 친군영좌감독이 되고, 이어 참의교섭통상사무, 기계국총판, 혜상공국총판, 이조참의, 함경북도병마절도사 등을 지냈으며, 1884년에는 협판군국사무 겸 기계국총판을 지냈다. 그는 온건개화파였지만 친청정치행적으로 개화당으로부터 수구당이라고 지목을 받았고, 1884년 갑신정변 때 우정국사건이 벌어지자 우정국 개국 축하연에 참석했던 이조연이 국가대사가 벌어짐을 눈치채고 궐내로 들어가려던 중 민태호, 한규직, 윤태준 등과 같이 개화당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후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여담으로 윤태준과 중국 상하이에 갔을 때 밤에 길거리에 나간 이조연은 길가에 떨어진 주머니를 발견하여 가져와서 그 안을 열어보니 100만냥의 가치로 되어 보이는 지폐 수천 원이 들어있었다. 이에 이조연이 자고 있던 윤태준을 깨워 이것을 가져가면 조선의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인데 윤태준의 생각은 어떻냐고 물어보자 윤태준이 이조연의 뜻대로 하라고 했다. 이에 이조연은 밤새도록 고민을 하다가 날이 밝자 대문 위에 전날에 수천 원의 지폐를 잃어버린 사람은 와서 찾아가라는 글을 써서 붙였고, 이에 돈의 주인인 영국인이 찾아와 "내가 듣기로는 동양에는 인물이 적다고 들었는데, 공처럼 훌륭한 분도 계십니까?"라며 돈을 찾아준 이조연에게 감사를 표한 후 사례금을 후하게 주었다. 그리고 이 일이 신문에 기재되어 온 천하에 알리게 되자 고종은 크게 기뻐하며 이조연의 아들 이탁을 배천군수로 임명하였다.
- 이도재 - 1848년 생으로 호는 심재, 운정이며 시호는 문정(文貞). 1882년 증광문과 급제생으로 이완용, 서재필 등과 동기다. 이듬해인 1883년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나가기도 했다.[126] 문무를 겸전해 갑신정변 때 진압군으로 참여한 그는 동학농민운동 때 전라감사로 나가 전봉준을 체포했다.[127] 대한제국의 부장(副將)으로서 군부대신에 임명된 후 학부대신, 외부대신, 내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철도원총재, 법부대신, 고등재판소재판장, 궁내부특진관, 의정부찬정, 귀족원경, 장례원경·시종원경, 대한제국 중추원 부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1906년 8월에 그 동안의 공적으로 태극장(太極章)을 서훈받았으며, 1907년엔 수학원장이었던 이도재가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된 후 칙임관 1등에 서임되었다. 후에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본이 강제로 고종을 폐위하려 하자 반대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총리대신 이완용의 모함으로 박영효 등과 나문정죄 당했고, 다시 시종원경과 칙임관 1등에 서임되었으나, 조중응이 고종의 양위식에 질병 등의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할 것을 아뢰어 탄핵을 받았다. 1909년에 타계하자 순종이 몹시 애통해하며 궁내부로 하여금 장례 용품을 넉넉하게 지원하도록 했다.
6.4. 일제강점기[편집]
- 이현섭 - 1844년생. 우국지사로 1910년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자 곡기를 끊고 순국했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이학재 - 1888년에 금부도사에 임명되었다. 퇴직 후인 1908년에 대동회를 조직하여 발기인, 부회장, 상무국장, 임시회장 등을 맡았으며, 그해 말에는 현 논산시 지역인 충청남도 은진과 강경에 노동회를 설립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암살되자 이토 히로부미의 송덕비 건립을 목표로 하는 이등공송덕비건의소를 건립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 예산을 할당하고 이윤용을 찾아가 협의했으며, 경시청에 찾아가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했다. 일제에 머무르면서 한일합병 운동을 벌이던 송병준이 일제의 일은 자신이 맡아서 할 터이니 한국에서는 일진회가 이학재와 의논해 한일합병을 진척시키라는 편지를 보내올 정도로 합병 찬성파들의 신임을 받았다. 이러한 친일 행동으로 그는 1934년 일본 우익단체인 흑룡회가 세운 일한합방기념탑의 석실 안에 일한합방공로자로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평안남도에서 의병이 이학재의 무리라 하여 평남 상무 두령 권중혁을 구타하고 군자금을 빼앗는 일이 벌어졌을 만큼 원성도 높았다. 여담으로 연리 문중에선 이학재를 족보에서 삭제하는 일을 논의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이설 - 1850년생 독립운동가로 충남 홍성 사람. 병인양요, 강화도 조약 당시 젊은 우국지사였던 그는 끊임없이 외세 격퇴를 주장했다. 일제 강점이 시작되자 낙향했다. 특히 일제가 벌인 을미사변 직후 의병을 조직했으나 실패하고 옥고를 치렀다. 1906년 병환으로 사망.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 이경균 - 1850년 생 독립운동가. 경북 김천 출신. 파리 강화 회의에 파리 장서를 보낼 때 서명했다. 김천 대표로 독립 청원서를 보냈다. 2010년 독립유공자로 건국포장을 받았다. 이명균의 육촌이다.
- 이석균 - 1855년생으로 독립운동가. 경북 김천 출신. 이명균의 사촌으로 옆집에 살았다. 이경균과는 육촌이다. 1881년 영남 유생들이 정부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척사 운동을 벌일 때 공사원으로 참여했다. 1919년 만세 운동 때 파리 강화 회의 때 독립청원서에 서명했다. 1919년 4월 체포돼 고문을 받고 노구에 후유증을 얻는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그는 1927년 사망한다. 1995년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 이명균 - 1863년생으로 독립운동가. 경북 김천 출신으로 성종 때 공신 이숭원의 14세손이다. 호는 일괴. 1919년 3.1 운동 때 경북 만세 운동을 조직하다 옥고를 치른다. 파리 강화 회의에 장서를 보낼 때 같이 서명하고 유림단 대표로 활동하다 집행 유예 처분을 받는다. 1920년 문경에서 조선 독립운동 후원 의용단을 결성하고 군자금 조달 임무를 수행했다. 자비를 털어 무려 10만 원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의용단장 겸 재무총장이 된다. 1923년 군자금 모금을 하다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고 탈골, 자상, 화상 때문에 5월 2일 순국한다. 동작동 현충원에 묻혀있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이도익 - 1865년생으로 1894년 법부아문의 주사가 된 뒤 관리로 근무했다. 대한제국의 법부 주사와 한성재판소 검사를 거쳤고, 농상공부, 궁내부, 시종원 등지에서 일했다. 1907년 탁지부 서기관에 올랐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1910년 조선총독부 산하에 자문 기관인 중추원이 설치되자 부찬의에 임명되었고, 부찬의로 11년간 재직하다가 1921년 중추원 편제 개편 후 참의가 되었다. 1912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수여받은 바도 있다. 1916년 이후 조선총독부가 반도사 편찬사업을 시작했을 때 조사주임을 맡아 조선을 일본에 동화시켜 조선인을 일본의 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일본인 학자들의 집필 작업에 앞서 자료 수집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도익은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모두 수록되었고,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 이동녕 - 1869년생. 초대 임시정부 주석, 제3·5·9·10·13·14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과 제1대·12대·15대 임시의정원 의장 등을 지낸 독립운동가. 천안 사람으로 신민회를 조직하고 간도, 연해주, 만주를 누비며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이승만이 개판치고 떠난 임시정부를 맡아 뒷수습을 해냈다. 김구 선생과 함께 민족진영을 정치력으로 단결시켰다. 1940년 독립을 보지 못하고 이역만리 중국 쓰촨에서 타계했다. 또한 김구 선생의 멘토이자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동녕 선생의 유언으로 임시정부 3당이 1개의 당으로 합당되었다. 한국 국회의 뿌리인 임시의정원장으로서 현재 여의도 국회 로비에 그의 흉상이 있고, 천안엔 그의 동상이 있다.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으나 최고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올려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다.
- 이병렬 - 1870년생으로 본적은 충북 음성이다. 1902년에 판임관 6등의 농상공부 주사가 되면서 관계(官界)에 입문하였다. 농상공부에서 박람회 업무를 담당하여 1903년에는 일본 오사카시에 파견을 다녀오기도 했다. 1904년에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어 구사 능력을 인정받았다. 일본군 통역관으로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를 도왔고, 육군유년학교 교관에 임명되었다. 1908년에는 평안남도 사무관으로 발령받았다. 1910년에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황해도 안악군 군수에 임명되었고, 서흥군과 봉산군 군수를 거쳐 경기도 여주군 군수를 역임하였다. 1922년 말에 경기도 여주군수를 마지막으로 퇴관하였다. 퇴관 후 국민협회 전무와 부회장, 회장, 고문 등을 맡아 공개적으로 친일을 표방한 신일본주의 운동을 오랜 기간 주도하였고, 1927년에는 중추원 참의로 발탁되었다. 현재의 서울 서대문구 지역에 거주하며, 이 지역 유지로 활동했다. 노년에는 충북 음성군으로 내려가 감곡면 면장으로 재직하며 보냈다. 황해도 서흥군수로 재직 당시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수여받은 바 있다. 음성군 감곡면장이던 1938년을 기준으로 종5위 훈6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의 중추원과 친일단체 부문,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의 중추원과 관료 부문에 모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 이주승 - 1870년생으로 선공감 감역관을 지냈으며, 1895년 제천 을미의병 때 가문의 재력과 중앙 및 지방에 널리 퍼져 있던 연고를 동원하여 여러모로 의병을 도왔다. 제천 의진이 충주성을 공략할 때 충주향교의 도유사 이벽원과 지방대 두령 김성한 등을 시켜 의병에 내응하게 하였고, 족속인 이면재 등과 함께 청풍 쪽으로 우회하던 신지수의 별동 부대를 지원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가 살던 제천의 한수면 북노리는 제천과 충주 사이에 있어 의병들의 행군로에 중요한 거점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 후 적의 공격이 심화되자 일본군과 관군을 분리시키기 위해 서울에 파견되어 조정의 고관과 접촉하면서 왕의 영단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을미의병이 실패한 후에도 살미면 골운의 토지를 팔아 유인석의 재기를 지원하였으며, 1907년 정미의병 때에도 이강년 의진의 좌종사로서 수안보 석문리 부근의 토지를 팔아 적극 후원하였다. 만년(晩年)에는 의병에 관련한 귀중한 문서를 모아서 후대에 전해지도록 하였다. 1946년에 타계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또한 노촌 이구영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 이조승 - 1873년생으로 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이다. 유인석의 재당숙인 유중교의 문인으로 유중교와 유치원의 가르침을 받았다. 유중교가 세상을 뜬 후에는 유인석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장담마을에서 추진하였던 『성재집(省齋集)』을 발간하는 일에 동참하였다. 단발령이 내리자 스승과 함께 망명할 계획이었으나 안승우 등의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키고 유인석을 대장으로 추대하자 홍선표·이기진·정화용·이정규 등과 함께 대장 종사가 되어 종군하여 작전 계획과 여러 전투에 참여하였다. 호좌의진이 근거지로 삼았던 제천에서 관군에게 패한 후에는 서울로 올라가 의병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돌리기 위하여 애쓰다가 서북 지방을 향해 이동하는 대장진을 뒤따랐다. 유인석이 청나라로 망명하자 홍선표 등과 함께 스승을 좇았으며, 청나라로부터 도움을 받기 위하여 선양까지 다녀왔는데, 병으로 귀국하여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유인석의 뒤를 좇아 중국을 다녀온 기록인 『서행일기(西行日記)』가 전하는데, 호좌의진이 장기렴의 관군에게 패한 후 의병들의 동향을 엿보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책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여담으로 1894년 7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충주 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상이 잘 기록되어 있어 충주와 그 일대 동학농민군의 활동 내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갑오일기』의 저자 의병장 이면재는 그의 족속이다.
- 이민영 - 1877년생으로 한학을 공부하여 관계(官界)에 들어섰다. 대한제국 말기에 세무 관리로 근무하였다. 1906년 12월에는 충청남도 홍산세무서에 회계 감독을 위해 파견되었으며, 계속해서 회계와 세무 분야에서 일했다. 1907년을 기준으로 품계는 9품이었으며, 1908년에는 탁지부 재무서 소속의 전주재무감독국 산하의 석성재무서에서 근무 중이었다. 1910년에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총독부 관리로 이동하였다. 처음에는 충청남도 석성군에서 그대로 서기로 일하다가, 곧 서천군으로 이동 발령받았다. 이후 충청남도 내무부와 제1부에서 서기로 근무하였으며, 1918년 11월에 연기군 군수로 승진하였다. 연기군에 이어 예산군, 홍성군, 서산군, 아산군 군수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아산군수이던 1930년을 기준으로 정6위 훈6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일본 정부가 쇼와 천황 즉위 기념으로 수여한 쇼와 대례기념장도 받은 바 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 이승녕 - 1879년생으로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군인이다. 1900년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학도로 뽑혀 1903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보병 참위로 임관하였고, 시위대와 친위대에 배치받아 장교로 복무했다. 1905년에 시위대 제1연대 제2대대에 발령받았고, 1907년에는 정3품으로 승급하고 육군 보병 부위가 되었다. 그러나 1907년 8월에 대한제국 군대 해산 사건이 일어나 이승녕은 모교인 육군무관학교에 발령받았다. 이후 일본군 육군으로 소속을 옮겨 조선군 사령부에서 복무하며 육군 소좌에까지 올랐다. 일본군 보병 중위이던 1920년에 훈6등 서보장을 받고 종7위에 서위된 바 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선정되었고, 최종 계급은 대한제국 육군 부위와 일본군 소좌이다.
- 이장녕 - 1881년생으로 독립군이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출신이다. 청산리 전투 이후 대한독립군 참모총장에 올랐으나 자유시 참변으로 연해주에서 중국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1932년에 일본이 사주한 중국 마적떼에게 당해 일가족이 몰살당하고[128] , 자신도 살해당했다. 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 이정 - 1884년생으로 독립운동가이다. 전라북도 익산 출신으로 여산면에서 익산 지역에서 가장 격렬한 횃불 시위를 박사국과 이병석 등과 함께 주도하여 일으켰다. 이정은 시위 대열을 이끌다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정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현재 여산면 여산초등학교 앞에 세워진 ‘여산 독립만세운동 기념비’에 이정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다.
- 이철영 - 1884년생으로 독립운동가이다. 월사 이정구의 후손으로 1910년 8월 서산 읍내에 있는 경찰서 게시판에 한일합방에 대한 방문이 붙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포고문을 찢어 버렸으며 게시판을 부숴 불을 지르고 서산경찰서에 뛰어들어 한일합방의 부당함과 ‘척왜(斥倭)’를 외쳤다. 이에 이철영은 그 자리에서 경찰에게 체포되어 3개월간 고문을 당했다. 이후 공주 감옥으로 이감 도중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호송을 담당한 일본 경찰 두 명을 죽이고 몸을 피했다. 떠돌던 이철영은 서산 가야산으로 들어와 약초를 캐면서 살다가 우연히 동생 이우영(李又榮)의 처남 최숙현(崔淑鉉)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이름을 이의영(李宜榮)으로 바꾸었다. 그 후 인근 당진에 있던 노공재(盧公在)의 집에 머물면서 한학을 가르쳤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43년 30여 년 만에 은거 생활을 청산하고 넷째 동생인 이학영(李學榮)의 집에서 지내다가 1945년 2월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45년 2월 일본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서산 유림과 제자들의 주도 아래 군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1960년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서산시청 앞에 추모비를 세웠다. 이철영이 후학을 양성했던 당진시 송악읍에는 이철영의 추모기(追慕記)가 있다.
- 이원순 - 1890년생으로 독립운동가이며, 서울 출생이다. 보성전문을 나와 1925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승만을 도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대조선독립단의 회장으로 3.1운동의 진상을 미국 정부에 전달한 바 있다. 그러나 헛짓거리를 거듭하는 이승만과 결별해 광복 직후 귀국도 못했고 정부 여권도 없었지만, 스톡홀름으로 날아가 대한민국의 IOC 가입을 도왔다. 야당 정치인 신익희와 친했으며 후일 김구 기념사업회에 후원하기도 했다. 54년 한국증권주식회사, 1958년 한국해광개발주식회사 등을 차려 사업가로서 길을 걸었다. 197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1988년 이미 99세였던 그는 서울올림픽에 남다른 감회를 인터뷰한 적도 있다. 1993년 10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 이병기 - 1891년생으로 국어학자. 1921년 12월 휘문 의숙에서 김윤경, 최현배, 최두선 등 16명의 유지와 함께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하고 간사가 되었다. 1942년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흥원경찰서로 끌려가 1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휘문고에서 교편을 잡고 연희전문 강사를 거쳐 광복 후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가 됐다. 국문학 시조 연구에 매진하다 68년 타계했다. 또한 그의 시조를 노래로 가곡한 파랑새와 별 등이 있다. 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이병석 - 가람 이병기 선생의 동생으로 1894년에 전라북도 익산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0일 이병석은 이정·박사국 등과 함께 주도하여 횃불 시위를 일으켰는데, 이는 익산 지역에서 가장 격렬한 시위 중 하나였다. 약 200여 명의 면민들은 두루마기를 잘라 ‘조선자주독립(朝鮮自主獨立)’이라고 쓴 기를 앞세우고 익산 여산면 헌병분견소 가까이까지 다가가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병석은 시위 대열을 이끌다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4월 18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5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병석의 공적을 기려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현재 여산초등학교 앞에 세워진 ‘여산 독립만세운동 기념비’에 이병석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다.
- 이효덕 - 1895년 생으로 한국의 독립운동가, 사회운동가, 여성운동가, 감리회 전도사. 평안남도 용강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부유한 양반 집안이어서, 그녀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그녀가 5살 때 가족이 개신교로 개종하여 30리 떨어진 예배당에 들어갔다. 그녀의 부모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신학문에 관심이 깊었고, 자녀들에 대한 교육열이 상당했다. 특히 막내딸인 그녀에 대한 교육열이 대단했는데 모친은 이효덕의 신앙교육을 위해 7살된 딸을 교회 목사에게 맡겼고, 8살 때는 진남포로 유학보내 공부시켰다. 이후 이효덕은 광혜병원의 어느 전도사 집에 유숙하면서 정진소학교에 입학했다. 그녀는 이 학교에 다니면서 평생 결혼하지 않고 전도부인을 하겠다고 결심했으며, 이를 끝까지 지켰다. 이효덕은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조선 여성과 무산 아동교육, 물산장려운동을 벌였으며, 명주를 여러 가지 색으로 염색하여 입고 다니도록 하는 ‘채색 옷 입기’, 음식에 파리 꾀이지 않게 하는 법, 주택의 청결 등 여러 사회 운동도 전개하였다. 또한 광복 후 1968년에 중앙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행적을 회고했다. 그녀는 당시 서울 종로 5가 245번지 창동상회 내 단칸방에서 어렵게 살아야 했지만, "그런대로 후회 없이 잘 살았다고 생각합니다."라며 그동안의 생애를 만족스럽게 여겼다. 그녀는 1978년에 서울 감리교 안식관에서 사망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 이순탁 - 1897년 생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효정(曉亭)이며 전남 해남 출생이다. 1922년에 일본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1923년엔 연희전문학교 상학과 과장을 역임하였으며, 1933년 연희전문학교 봉직 만 10년에 안식일 휴가(1년)로 세계 각국을 시찰하였다. 이후 1933년의 이른바 연전상과사건으로 3년의 옥고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엔 한국민주당에 입당했지만 1946년 좌우합작에 찬성하면서 탈당했다. 이후 민중동맹, 조선공화당, 민주주의독립전선, 민주독립당 등 중도좌파 성향 정당에서 활동했다. 1946년 10월 미군정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된 그는 토지개혁법 제정을 적극 추진했는데, 유상 매수 방식에 의한 토지개혁이 바로 이순탁이 주장한 토지개혁이었다. 1946년 연희대학교 초대 상경대학장, 1948년 초대 내각에서 대한민국정부기획처 초대 처장을 지내고, 1948년 9월 발족한 농지개혁법 기초위원회에서는 부위원장을 맡았다. 1949년 대한금융조합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 때 납북되었다. 논문으로는 「자본주의 경제조직에 관한 일고찰」, 「노동운동과 소작운동」, 「조선인의 결혼연령 추이」 등이 있다.
- 이의식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주석 이동녕의 차남으로 1900년에 태어났다.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야마가타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귀국하여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여 제1회로 졸업하고 의학박사가 되었다. 이후 경성부에 이의식 내과병원을 개업하여 내과의사로 이름을 날렸다. 광복 후에는 미군정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 선출됐으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검찰관으로 선임되어 활동했으나 6.25 전쟁 당시 납북되었다.
- 이수흥 - 1905년 생으로 독립운동가. 경기도 이천 사람이다. 조선의 학자로 이황(李滉), 이재(李縡)의 학통을 이어받아 《사칠부화(四七附話)》를 저술한 외암 이식[129] 의 직계 후손이며 유생 이일영의 외아들이다.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군무부에서 훈련을 받았다. 만주로 가 대한 육군 주 만주 참의부를 조직했다. 또한 1926년 순종 기일에 맞춰 기획된 6.10 만세운동 때 동소문 파출소를 습격하고 수원으로 피신했다. 이천에서 식산 회사 주재소 등을 파괴하는 등 작전을 펼친 후 부친 장사를 치르러 귀향했다가 친척의 신고로 일제에 검거된다. 이에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공소를 포기해 사형 당하기를 자청했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의 1928년 7월 15일자 기사엔 이수흥이 사형을 언도받고도 태연자약해 마치 무죄를 선고받은 사람처럼 보였다며, 법정이 생긴 이후 사형 선고를 받고도 공소하지 않은 사람은 강우규, 허위, 그리고 이수흥 뿐이라고 밝혔다. 이후 1929년 2월 27일 불과 25세의 나이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되었다.
- 이의복 - 1906년에 이장녕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적은 충남 천안이다. 1921년에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정의부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등 만주 지역에서 아버지 이장녕을 도와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1982년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 이숭녕 - 1908년 서울에서 규장각 경연참찬관 원임비서승, 궁내부 기후관 춘사(春沙) 이병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심악.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 경성제국대학 예과 및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굴지의 국어학자로서 음운체계의 과학적 정리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근대 언어학으로써 근세 국어, 중세 문법 연구 등 국어를 연대기적으로 체계화시켰다. 원래 법대생이었으나 우리말 뿌리를 찾자는 생각으로 어문학을 전공했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고대 그리스어, 라틴어 등 6개 언어를 할 줄 알았다. 경성제국대학 시절부터 교수를 해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정훈장교(소령)로 참전해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살인적인 스케줄을 매일같이 실천하며 정력적으로 활동한 그는 대한민국 문화포장, 국민훈장 동백, 모란장에 이르기까지 국가 훈장이 4개에 달하는 슈퍼맨이었다. 팔순에 이르기까지 공부를 쉬지 않았던 그는 1989년 뇌경색으로 지병을 얻어 1994년에 타계했다.
- 이항녕 - 1915년 생으로 충남 아산 출신. 일제강점기 판 고위 관료 채용 시험인 고등문관시험 출신이며 경성제국대학 법학과 출신이다. 하동, 창녕군의 군수 등을 지냈으며 적극적인 친일 행위는 없었으나 광복 후 자신의 행적에 대해 계속 반성하고 참회한 양심가였다. 문교부 차관,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법학과 교수 등을 거쳐 홍익대학교 총장까지 지냈다. 또한 김앤장의 대표변호사인 이재후 변호사의 선친이다.
6.5. 현대[편집]
- 이호정 - 1895년에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났다. 초대 대구고등법원장과 제13대, 14대 광주지방변호사회장을 지냈다.
- 이중재 - 1898년 생으로 이승만 행정부에서 제5대 재무부 장관('54년)과 대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54년)을 지냈다. 자유당 기획위원으로 한국전력의 전신인 경성전기 사장도 지냈다. 재무부 장관 취임 시 재무부 관할 아래 있던 은행 감독권을 한국은행으로 환원시키고 은행법 개혁에 나섰다. 은행법 시행령, 금융기관 감독규정, 인가사항 취급규정 등을 정비시켜 아직 걸음마 단계이던 대한민국 금융시장을 안정시켰다. 재무부가 가지던 은행 귀속주를 시중에 불하하는 데 잡음 없이 처리하고 뒤로 빠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후임 장관 송인상을 시켜 3.15 부정선거 자금을 마련시킨다. 5.16 직후 이중재는 자유당 부정의 연대 책임을 지고 감옥에 가지만 곧 사면된다.
- 이원영 - 1910년에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이후 휘문고등보통학교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경성일보, 매일신보 등에서 기자로 근무했고, 매일신보에서는 정경부장을 지냈다. 일제강점기 말기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겸 사무국 경제 위원회 위원,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총무과장 겸 조선항공사업사 지배인,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반민족 행위를 하였다. 8.15 광복 이후 한국원양어업 주식회사 대표이사, 남한제사 주식회사 대표이사 등을 지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1973년 사단법인 대한잠사회 이사장이 되었다.
- 이도영 - 청주 출신으로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 경성제국대학 예과,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 수료하였다. 1950년에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충청북도 청원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인 대한국민당 홍순옥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으며 1956년에 홍익대학교를 인수하고 홍익공예고등전문학교, 홍익국민학교, 홍익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또 1970년엔 성암국민학교와 성북중고등학교를 인수하고 71년엔 수도공과대학도 인수하였다. 같은 해 홍익대학교를 종합대학으로 발전시키고 충청일보사 사장, 청주문화방송 사장, 남한흥산주식회사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외에도 이도영은 1962년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1963년 한국생산성본부 부회장, 대한광업협회 부회장, 1964년 한국수출산업공단 이사,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1965년 한국제지공업연합회 이사 등을 각각 역임하였다. 1970년에 대한체육회장상(체육진흥공로), 같은 해 대통령 표창(수출진흥공로), 1972년 문교부 장관상 등을 받았다. 여담으로 현재 홍익학원 이사장은 이도영의 육촌 동생인 이면영이다.
- 이정림 - 대한민국 1세대 재벌로 1913년에 개성에서 태어나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졸업한 뒤 개성상인으로서 수련을 쌓았다. 1933년에 고무신 도매상을 시작하여 경기도와 황해도, 강원도 지방에서 대리점을 경영하였다. 후에 천일고무주식회사를 설립하여 경영하고 이합상회를 개업하였다. 1949년엔 이합상회를 개풍상사라 이름을 바꾸고 정식 무역회사를 창립하여 무역에 종사했다. 1953년엔 호양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55년엔 대한탄광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듬 해에는 대한양공회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우리나라 사상 최초로 국산 시멘트 공장을 건설하였다. 59년엔 국내 최초의 민간출자 은행인 서울은행을 창립하였다. 후에 65년엔 공영화학공업주식회사, 67년에 박용학 등과 함께 대한선박주식회사 설립, 1970년에 대한유화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외에도 3·1 문화 재단을 설립했으며, 경제 재건 촉진 위원회를 발족하고 전국경제인연합회 2대 회장을 지내고, 해운대의 날에서 대통령 표창, 국무총리 표창, 석탄산업훈장 등을 받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유화산업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받는 대한유화의 현 회장은 이정림 회장의 조카이자, 이정호 명예회장의 4남인 이순규 회장이다. 이순규 회장은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에 '이순규라운지'를 자신의 기부금으로 조성하기도 했다.
- 이연 - 한국의 민영 탄광 가운데 생산 규모가 가장 컸던 동원 탄좌의 회장으로 가람 이병기 선생과 같이 익산 출신이다. 아들은 전원산업의 회장인 이전배 회장이다.
- 이예춘 - 한국 배우계의 악역 대부다. 아들 이덕화가 채널A 도시어부에서 연안 이씨임을 밝혔다.
- 이구영 - 제천에서 갑부이자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독립운동가 이주승의 아들로 월사 이정구의 후손이다. 이구영은 벽초 홍명희, 위당 정인보 선생의 제자였으며, 일제 당시인 1943년 독서회 사건으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구영은 북한에서는 김일성에게 연암 박지원의 실학사상을 강의하였다. 1950년 9월 북한으로 넘어갔다가 1958년 7월 부산에서 남파 간첩으로 내려왔다가 접선에 실패하여 9월에 체포되었는데, 그를 체포한 경찰은 일제강점기에 그를 고문했던 형사였다.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후 석방됐는데 22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감옥에서 신영복 등에게 한학과 서예를 가르쳤다. 출소한 후에 이문학회를 창립, 후진에게 한학을 가르치고 호서의병사적과 의병운동사적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신경림 등이 이문학회에서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 이석희 - 이동녕 선생 손자로 1922년 생이다. 형은 문교부 기획관리실장과 서울교육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이철희이다. 본인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여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나왔다. 이후 대우자동차 회장과 대우그룹 부회장을 지냈다. 부회장을 역임할 당시, 그는 어렵게 사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직원으로 고용하는 등 훌륭한 인품을 지녔던 인물이다.
- 이봉녕 - 1924년 2월 5일 완주군 초포면[130] 송전리[131] 에서 태어났다. 이봉녕 회장의 선대는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132] 에서 살았으나 증조부가 초포면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이거 했다. 이봉녕 회장은 익산시에 공장을 세워 쌍방울의 전신인 쌍녕섬유공사를 만들었고 이 회사가 커져 쌍방울그룹이 되었다. 쌍방울그룹의 초대 회장이기도 하다.
- 이광린 - 호는 칠리(七里), 1924년 2월 9일 평안남도 용강군[133] 에서 태어났다. 평양제2공립중학교를 거쳐 1945년 10월 연희전문학교 전문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1946년에 사학으로 전공을 바꾸었고 1950년 5월 연희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64년부터 서강대학교에서 1989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특히 한국의 개화기 역사 연구에 힘을 쏟아 개화사 연구의 개척자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서강사학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1972년부터 서강대학교 인문과학 연구소 소장을 맡았고 1980년부터 1983년까지 같은 대학교 부총장을 지냈다. 1981년에는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정년퇴임 이후엔 한서대학교 한국사 교수와 중부대학교 총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2006년 4월 11일 오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조수리사연구, 한국개화사연구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100여 편의 논문을 남겼다. 그는 국민훈장 동백장과 모란장, 3·1문화상, 대한민국학술원상, 용재상 등을 받았다.
- 이상수 - 1925년 함경남도 신흥군 출신으로 본관은 연안이다. 1949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학사, 1956년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이학석사, 1959년 같은 대학 이학박사다. 레이저 분야를 한국 최초로 개척하였으며 1968년 하버드 대학교 초빙 연구원, 국제 원자력 기구 한국 대표 등을 지냈다 한국과학원 초대 원장, 6대 원장, 한국 광학회 초대 회장, 한국 물리학회 회장, 원자력청 청장등을 지냈다. 이외에 태국 방콕 AIT공학대학 이사와 일본 도쿄 유엔대학 이사 및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1976년 동곡 문화상, 1979년 국민훈장 모란장, 1982년 대한민국 과학상, 200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그밖에 대통령 표창, 성곡 문화상, 인촌상 미국 광학회상 등을 받았다. 또한 한국 광학회를 통해 미국 광학회에 전달한 기금으로 '이상수 어워드'가 제정됐다. 자국의 광학과 광산업에 공헌한 사람을 선발해 한국 광학회와 미국 광학회가 공동으로 격년 시상한다. 석사 108명 박사 48명을 길러낸 그는 2010년 타계했다. 2019년 대한민국 과학기술 유공자에 선정됐다.
- 이철승 - 1926년 생으로 상공부 차관을 지냈다. 이철승의 딸 이주영은 GS그룹의 초대 회장이자 전경련 회장을 지낸 허창수의 부인이며,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허준구 GS건설 명예회장의 유지를 이어받아 아들 허창수 회장이 설립한 장학 재단인 남촌재단의 고문으로서 자신의 모교인 이화여대에 2008년부터 꾸준히 기부하여 2020년 기준으로 현재 총 9억 원을 기부했다고 한다. 이주영의 언니 이은영은 OCI그룹 창업주인 이회림 회장의 막내아들 유니드 회장 이화영과 결혼하였다.
- 이철배 - 1926년 생으로 대웅제약 전 명예 회장이며 전문 경영인이다.
- 이병두 - (주)나진산업 설립자. 손자로 이석진 전 (주)나진산업 대표가 있다.
- 이재희 - 한국의 군인으로 1929년 9월 10일 경기도 파주에서 출생했다. 1950년에 생도 2기로 임관하여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준장 진급 후 제2군단 참모장을 역임하였다.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21보병사단장, 육군군수사령부 참모장, 육군포병학교장, 육군종합행정학교장, 제3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한 후 1983년 예편하였다.
- 이의영 - 1930년 생으로 김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 총학생회장, 아시아 반공 연맹 청년학생대회 한국대표를 지냈다. 이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 이웅희 - 문화공보부 장관.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1980년에 대통령 공보수석에 임명돼 MBC 사장, 한국언론재단 이사장, 한국야구위원회 총재 등을 역임하고 제13대, 14, 15대 3선 국회의원을 지냈고 국회 재경위원장까지 지냈다. 슬하에 제14대 주러시아대사관대사 이석배 대사가 있다.
- 이면영 - 1933년 생. 이도영 전 홍익학원 이사장의 육촌동생이며 홍익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홍익대학교 총장을 거쳐 1997년부터 홍익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 이돈희 - 1937년 생. 제42대 교육부 장관으로 서울대학교를 나와 서울대학교 교수와 한국교육학회장, 민족사관고등학교 교장 등을 지냈다.
- 이이화 - 1937년 생. 대구 출신의 재야 사학자로 민중사관적 입장을 지녔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전문가로 서원대학교 석좌교수이며 경술국치 100년 공동행동위원회 상임공동대표이다. 2020년에 타계했으며, 국민훈장 1등급인 무궁화장이 추서됐다.
- 이치호 - 1939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하였다. 판사 출신 정치인으로 민정당 소속인 3선 국회의원이었으며, 법사위 위원장도 지냈다.
- 이원배 - 1939년 전라북도 전주에서 출생하였다. 유년기 때 전남 함평에서 보낸 적이 있다. 그 후 배재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나왔으며 제11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판사에 임용되었다. 1973년 4월 1일에 서울고등법원 판사에 임명되었고, 1982년 9월 1일에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되었다. 이어 대구고등법원에서 부장판사를 하다가 서울중앙지방법원 동부지원장으로 옮겨 재직하던 1991년에 광주지방법원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인천지방법원과 서울민사지방법원에서 법원장을 역임했다. 후배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고 의견을 잘 받아들인다는 평가를 받은 이원배는 서울민사지방법원장으로 재직할 때인 부산고등법원장이 되었다. 그는 현직에 있는 최고참 법원장으로서 법원장 회의를 주재하였다.
- 이의익 - 194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경북중학교를 졸업하여 서울 경복고등학교에 진학하였으나 1학년 때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 역할을 했던 당시 경상북도청에서 근무했던 큰형 이의석을 따라 경북고등학교로 전학했다. 공무원 출신 정치인으로 기재부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15대 국회의원과 대구직할시장을 지냈다.
- 이일규 - 특 1급 호텔인 베스트 웨스턴 프리미어 서울 가든호텔의 대표자이다. 서울 가든호텔읃 1979년에 개관하여 관광호텔업, 부동산 임대업, 소매업, 외식사업, 유희시설사업 및 부대사업 등을 하며 지하 2층 지상 15층 규모에 372개의 객실을 갖추고 있다. 또한 레스토랑, 20평에서 194평에 이르는 연회장, 동시통역 시설을 갖춘 회의장, 비즈니스 센터, 웨딩홀, 피트니스센터 등이 있다. 또한 서울 가든호텔은 베스트웨스트 브랜드 중 처음으로 특 1급 호텔로 승격된 호텔이기도 하다. 가족으로는 서울 가든호텔의 전 회장인 이정구 회장이 아버지이고, 슬하에 아들 이교상 사장이 있다.
- 이재후 - 전 홍익대학교 총장 이항녕 교수의 아들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수석으로 입학하여 대전지방법원과 서울고등법원에서 판사 생활을 하다가 김앤장에 합류하여 시니어 파트너가 되었다. 네임 파트너인 김영무, 장수길과 공동 경영을 하고 있다.
- 이건영 - 전 건설부 차관으로 용인 출신이다. 서울로 이주하였다가 6.25 전쟁 때 부산에서 잠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서울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문민정부 시절 건설부 차관 직책을 잠시 지낸 그는 국토개발연구원장으로 국토 및 도시개발정책을 선도하고, 교통개발연구원장, 건설산업연구원장을 역임하며 계속 교통, 건설산업정책 연구에 참여하여 왔다. 그리고 아주대학교, 단국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후 중부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2007년 중부대학교 충장을 끝으로 은퇴한 후 다시 문학활동을 재개하여 '계간문예'에 장편소설 <낙동강 개개비>를 연재하고 장편소설 <마지막 인사>, <엄마의 목각인형>을 발표하였다.
- 이구택 - 1946년 생으로 김포 출신.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금속공학과를 졸업하여 포스코 공채 1기로 입사했다. 이후 포스코 대표이사 회장, 포스코 청암재단 이사장, 한국발명진흥회 회장, 국제철강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이 회장은 브라질 정부의 히우브랑코 훈장을 받기도 했다. 여담으로 히우브랑코 훈장을 받은 국내인사는 이 회장을 포함하여 총 4명이다.
- 이회택 - 1946년 생으로 김포 출신. 별명은 ‘아시아의 표범’으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한 축구 선수이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과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 이성희 - 1949년 생. 제24대 농협중앙회 중앙회장이며 최초의 수도권 단위조합 출신인 회장이다.
- 이덕화 - 배우. 도시어부에서 연안 이씨임을 밝혔다. 그러나 위키백과에선 출처도 없이 이덕화를 전주 이씨 회안대군파로 소개하였다.
- 이민화 - 경상북도 군위 출신으로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에서 전기 및 전자공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한전선 연구원, 카이스트 교수 겸 창조경제 연구회(KCERN) 이사장, 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이었으며 1985년 의료기기 업체인 메디슨을 설립한 1세대 벤처기업인이다. 초음파 진단기 기술을 연구하여 국내 최초 초음파 진단기를 개발했으며 다른 카이스트 출신 전문가 7명과 함께 벤처기업을 설립하였다. 한국 벤처업계의 대부로 꼽히는 인물이다.그러나 2019년 8월 3일 66세에 사망하였다. 사인은 부정맥으로 많은 후배 벤처기업인들이 그를 추모했다.
- 이의철 - 이봉녕 회장 아들. 쌍방울그룹의 2대 회장이자 쌍방울 레이더스의 구단주였는데, 당시 한국프로야구 최연소 구단주였다.
- 이석배 - 장관 이웅희의 아들로 1974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에 입학해 1985년 졸업하고 1989년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소련정치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러시아어 전문관으로 외교부에 입부한다. 비고시 출신에도 불구하고 4강 외교의 한 축인 주러대사로 임명되어 세간의 눈길을 끌었다.
- 이용선 - 1958년에 순천에서 태어났다. 광주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시민통합당 대표, 민주통합당 임시대표, 문재인 정부 시민사회수석 비서관을 지낸 이력이 있다. 현재는 제21대 국회의원, 더불어민주당 대외협력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양천구 을 지역위원장을 지내고 있다.
- 이승훈 - 1960년 생으로 전 복싱 IBF 주니어 페더급 세계 챔피언(1987년).
- 이차영 - 제44대 충청북도 괴산군수로 1987년 7급 공채 시험에 합격해 괴산군 감물면사무소에서 공직을 시작했다. 이후 충청북도청으로 전입해 괴산군 부군수, 충청북도지사 비서실장, 경제통상국장 등을 지내고 2017년 명예퇴임하였다. 명예퇴직 후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하였다.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충청북도 괴산군수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민선 7기 괴산군은 4년 동안 지역 내 총생산 성장률 5.27%를 기록하여 도내 1위를 달성했으며, 시스템반도체 기업들을 유치하여 산업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틀을 다졌다.
- 이성윤 - 전 서울고등검찰청의 검사장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윤석열 정부로 바뀌면서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좌천되었다. 본관은 연안이다.
- 이재영 - 9급 공무원 출신으로 1983년 괴산군 증평읍사무소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하여 1991년 충청북도청으로 전입, 충청북도지사 비서실장, 증평군 부군수, 충청북도청 재난안전실장을 역임했다. 2019년 명예퇴직 이후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하여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증평군수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 이준배 - 세종특별자치시 경제부시장을 지냈다.
- 이하늘 - DJ DOC의 리더. 71년생 대구 출신으로 본명은 이근배. 1994년 데뷔하였다. 동생은 2021년에 사망한 45RPM 그룹 소속의 가수로 고 이현배다.
- 리마리오 - SBS 출신 개그맨으로 본명은 이상훈. 잘생겼지만 느끼한 캐릭터인 리마리오(웃찾사)로 '미끌어지듯이' 등 유행어를 히트시켜 CF, 영화 드라마 출연 등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 이재영 - 새누리당 비례대표 공천을 받아 제19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현재 국민의 힘 강동구 을 당협위원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국민의 힘 대외협력위원장을 지냈다. 또한 자유한국당 청년 최고위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조지타운 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였고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아버지는 주식회사 범구의 회장이자 김포상공회의소 제3-4대 회장이었던 이기승이며 어머니는 제13대 국회의원 도영심이다.[134] 또한 그의 누나는 동양인 최초로 CNN 수석 부사장 자리에 오른 엘레아나 리이다.
- 이희완 - 1976년에 김천에서 태어났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357정 부장으로서 제2연평해전에 참전하였고, 북한의 선제 포격으로 357정 정장 윤영하 대위가 전사하자 그를 대신하여 357정 대원들을 지휘하였다. 그 역시 당시 한쪽 다리을 잃었다. 이후 대령으로 진급했다가 국가보훈부 차관에 임명되었다.
- 이민훈 - 대전과학기술대학교의 교수이자 사회복지학자. 소부감판사공파로 대전광역시 출생이나 서울특별시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전광역시로 돌아와 중고등학교 및 대학교를 졸업했다. 대학교 졸업 이후 프리한19 데스크 출연과 SL사회복지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며 인식개선 교육 등을 펼치고 있다.
- 이지영 - 호는 천미로 대한민국의 일타 강사이다. EBSi 뉴탐스런 생활과 윤리 강의에서 연안 이씨임을 밝힌 적이 있다.
- 이청아 - 배우. 아버지는 배우 이승철이다. KBS1 천상의 컬렉션에서 연안 이씨 태자첨사공파 29세손, 지파는 삼척공파라고 밝힌 적이 있다.
- 이국주 - 한국의 코미디언이다.
- 그레이 - 예명 GRAY로 활동하는 힙합 뮤지션으로 본명은 이성화. 힙합 레이블 AOMG 소속의 프로듀서 겸 R&B 가수다.
- 이연희 - 배우. 서울에서 태어나 성남시에서 자랐다.
- 이수홍 - 충간공 이숭원의 후손으로 서울대학교를 만 15세의 나이로 입학한 수학 천재다. 12살이라는 나이로 영재올림피아드 2연패를 달성했고,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수학 문제를 스스로 내고 풀었다고 하며 중앙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5살에 도전 골든벨 우승을 하고, 16살엔 IMO 금메달을 따고 사상 최연소로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교 1학년 때 대학생 수학경시대회에서 대상을 받고 MIT 수학과 박사과정을 진학했다.
6.6. 기타(위인 및 유명인의 가족)[편집]
- 성골장군 호경의 후손이자 고려 태조의 증외고조부인 신천 강씨 보육의 후손[135] 중랑장 강인의 부인이 연안 이씨로 신천 강씨 족보에는 부인 이씨가 당나라에서 온 대장군, 연안후 이무의 후손이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강인의 아들 정원부사 강세의 부인은 이수산의 여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궁원록에선 강세의 부인 수안 이씨의 아버지가 이수산이 아니라 이인(李仁)으로 기록되어 있고, 부인의 외조부는 연안 이씨 이적(李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인(李仁)은 상술했듯이 이견웅을 시조로 하는 수안 이씨와 다른 계열의 수안 이씨의 시조인데, 이 점에선 이수산과 일치한다. 또한 후대에 만들어진 신천 강씨 족보엔 강세의 부인의 아버지가 이수산이라고 적혀있으므로 이인(李仁)과 이수산이 동일 인물인지에 대해 의문점이 들 수 있으나 이수산의 처가는 인천 채씨인데, 이인(李仁)의 처가는 연안 이씨이므로 동일 인물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 즉, 둘 중 어느 하나가 오기(誤記)라는 것이다.
- 풍산 홍씨 시조인 홍지경의 손자이자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을 지낸 홍유의 부인이 연안 이씨로 밀직부사 판도상서 이경무의 딸이다.
- 충숙왕 원년에 태어난 광산 김씨 양간공파 중 판군기감사공파의 파조 김영리의 장모가 연안 이씨이다. 김영리 처 남양군부인의 어머니이자 봉성대부 선공부령 홍승연의 처인 연안군부인은 1256년에 태어난 통헌대부 밀직부사 민부전서 이득량의 여식이다. 즉 홍승연의 처 연안군부인은 밀직부사공파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여담으로 연안군부인의 아들은 문하시중 남양백 홍영통이며 홍영통의 조부는 광정대부 첨의찬성사 양순공 홍경, 증조부는 충선왕 배향공신으로 벽상삼한진충동덕좌리공신 경흥군 개국후에 봉해지고, 추성동덕익대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에 추증된 충정공 홍자번이다. 외에도 김영리의 아들인 광성군 김정의 처도 미확인 6개 파 중 전법판서공파 중시조 이방[136] 의 여식인 숙신택주 연안 이씨다. 또한 김정의 손자인 김원우의 처도 연안 이씨이나 역시 파계 미상이다.
- 영해 박씨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박회의의 부인이 연안군부인 연안 이씨로 밀직부사 이득량의 딸[137] 이다. 참고로 연안군부인의 아들이 최씨 정권을 타도한 대장군 박송비다. 박송비는 이 공으로 위사공신이 되어 수사공 좌복야와 참지정사 등 요직을 지냈다.
- 문의 박씨의 시조 박의중의 초배가 26세에 졸한 국부인(國夫人) 연안 이씨로 이수창의 삼녀이다.[138] 박의중은 경명왕의 아들 밀성대군의 17세손이다. 그는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대사성과 직제학 등을 지내고, 1388년에 명나라에 들어가 철영위(鐵嶺衛)의 철폐(撤廢)를 교섭하고 돌아와 창왕 때 공신이 되었다. 후에 예문관 제학 겸 대사성을 지내고, 1392년에 고려사를 수찬하고 검교 참찬의정부사가 되었다. 박의중과 국부인(國夫人) 연안 이씨 사이에 아들 두 명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 박연은 정몽주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공민왕 때 등과하여 정사공신, 정당문학, 대제학을 지냈고, 둘째 아들 박행도 공민왕 때 우상을 역임했다. 국부인(國夫人) 연안 이씨의 손자이자 박행의 아들 박녕은 고려 말 공조전서를 지냈으나 조선이 개국되자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던 두문동 칠십이현 중 한 명이다.
- 신덕왕후 아버지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적장자이자 신덕왕후의 친오빠인 재령 강씨의 시조 안릉부원군 안정공 강득룡의 부인이 연안군 이엄의 딸인 연안군부인이다. 여담으로 강득룡은 고려 대에 삼사우사, 삼중대광 첨의정승 등을 지냈다.
- 공산 안씨 시조이자 고려 말기 문하찬성사를 지내고, 조선이 건국되자 참찬문하부사에 오른 정평공 안익의 부인이 문청공 이계손의 딸인 연인 이씨다. 또한 안익의 아들인 병마절도사 안습의 부인도 이계손의 손녀이자 이량의 딸인 연안 이씨다.
- 상산 김씨 김만호의 세계도에 중현대부 전농정 김균의 부인이 연안 이씨라고 기록되어 있다.[139] 부인 이씨의 아버지는 산원(散員) 인손(仁孫)이고, 할아버지는 호군 청(淸), 증조할아버지는 도첨의찬성사 무(茂)이고, 외할아버지는 언양 김씨 판도판서 김지경이라고 한다. 부인 이씨의 직계 조상들은 현존하는 연안 이씨 파계에선 확인할 수 없는 인물이다. 연안 이씨 가문의 한 종원은 이들이 통례문부사공파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 근거로 이들의 활동연대와 통례문부사공파 중시조 이지(漬)와 그 아들 이계손(係孫)의 활동연대가 유사하며, 이지(漬)와 이청(淸)의 삼수변 부수(氵)와 그 아들 대인 이계손(係孫)과 이인손(仁孫)의 손(孫)자가 항렬로 추정되며, 홍귀달이 찬한 충간공 이숭원[140] 의 비명엔 이숭원의 먼 조상인 이무(茂)가 고려 때 관직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141] #
-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헌납을 지내고, 조선 개국공신 3등에 오른 동원군 정평공 함부림의 후배가 정경부인 연안 이씨이다. 함부림의 족보에 의하면 연안 이씨 부인의 아버지가 연성군 이명조(李命祖) 또는 호부상서 이상준(李尙俊)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연안 이씨 파계에선 확인할 수 없는 인물이다.
- 태종의 후궁인 의정궁주의 어머니가 좌의정치사 이귀령의 여식인 정경부인 연안 이씨다. 정경부인 이씨의 남편이자 의정궁주의 아버지 조뢰는 돈녕부지사를 지냈고, 조부는 조선 개국공신 한산군 조인옥, 증조부는 고려 공민왕 때 판도판서를 지낸 조돈이다. 참고로 태종과 의정궁주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 중종 때 정권을 집권하여 예조판서, 좌의정, 영의정 등을 지낸 남곤의 처가 정경부인 연안 이씨이다. 정경부인 이씨의 아버지는 숙천부사를 지낸 이세웅인데 이세웅은 영광군사공파 중시조 이계연의 증손자이다. 즉, 정경부인 이씨는 현존하지 않는 파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남곤과 정경부인 이씨 사이에선 아들은 없고 딸만 3명이었다.
- 공조정랑과 순천군수 등을 지낸 임류의 처 연안 이씨 부인은 예부상서 이해의 후손이다. 임류의 묘표에 기록되어 있기를 연안 이씨 부인은 이비의 여식이며, 판사재감사·지문주사 이을수의 손녀, 예부상서와 밀직사사를 지낸 이해의 증손이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임류의 처 연안 이씨 부인은 예부상서공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이해는 씨족원류에 기록된 내용에 의하면 90여 년을 살았으며, 밀직부사 이무(茂)의 후손이라고 한다.[142]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대표적 피난기로 꼽히는 쇄미록을 남긴 선비 오희문의 부인이 연안 이씨다. 명재상으로 꼽히는 영의정 오윤겸의 어머니이며, 삼학사의 한 사람인 오달제의 할머니이기도 하다. 또한 오희문 처 연안 이씨의 아버지는 이정수인데 이정수의 장인이 바로 성종의 서자 익양군이다. 이정수는 익양군의 차녀 이계환과 결혼하여 오희문의 처 연안 이씨를 낳은 것이다.
- 징비록을 기록한 명재상 서애 류성룡의 조모가 이형례의 딸인 연안 이씨이다.
- 임진왜란 당시 초토사 이정암을 도와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한 충정공 김덕함의 어머니는 파계를 고증할 수 없는 연안 이씨이다. 어머니 연안 이씨의 아버지는 우부장 이윤공(李胤公)으로 조부는 후릉참봉 이정생(李廷生)이며, 증조부는 홍문관직제학 이삼산(李三産)[143] 이다. 여담으로 김덕함은 1636년에 대사헌이 되었으며 청백리에 녹선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 선조의 딸 정명공주와 혼인하여 영안위에 봉해진 홍주원의 어머니는 이정구의 여식인 정경부인 연안 이씨이다. 혜경궁 홍씨, 홍봉한, 홍국영 등이 후손이다.
- 소현세자의 부인인 민회빈 강씨의 동생이자 우의정 강석기의 삼녀가 이정구의 손자이자 비변사당상 이소한의 아들인 이홍상의 부인이다.
- 인현왕후의 오빠 예조판서 민진후의 선처가 대제학 이명한의 아들 인천부사 이단상의 딸이며 후처는 현감 이덕로의 딸로 같은 연안 이씨다. 특히 후처 소생 민익수가 바로 명성황후의 고조부가 된다. 여담이지만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외할아버지도 연안 이씨인 연원부원군 해고 이광정이다.
- 인경왕후의 숙모는 형조판서 이은상의 딸인데, 인경왕후의 아버지 김만기의 동생인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을 지은 양관 대제학 김만중의 처 정경부인 연안 이씨가 판서 이은상의 딸이기 때문이다. 또 인경왕후의 조카가 노론의 영수였던 이천보이기도 한데 이천보의 어머니 광산 김씨가 김만기의 삼녀로 이천보의 어머니는 인경왕후의 여동생이 된다. 즉 인경왕후의 숙모도 연안 이씨, 조카도 연안 이씨라는 것이다. 인현왕후의 새언니도 연안 이씨인데 숙종의 정비였던 3명 중 2명이 연리의 인척이었던 것이다.
- 채제공의 어머니 정경부인 이씨는 연안 이씨다. 정경부인 이씨는 18세의 나이 때 혼서와 택일단자까지 받은 상태에서 결혼하려고 하던 남편이 혼례를 치르기 직전에 급사하여 과부가 될 뻔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경부인 이씨는 당시 예조판서에게 용기 있게 사정하여 당시에 흔하지 않게 왕명[144] 으로 재혼을 허락받았다는 일화가 내려온다.
- 풍양 조씨의 세도를 확립한 조만영의 아들이자 이조·예조판서를 지낸 조병구의 처가 정부인 연안 이씨다. 조병구는 신 안동 김씨와 세력 다툼을 벌이는데 앞장섰으며, 삼촌인 조인영이 영의정에 오르자 합세하여 정치 세력을 키운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이다.
- 정약용의 누이인 나주 정씨는 연안 이씨인 이중식(李重植)에게 출가하였다.
- 개화파의 시조인 우의정 박규수의 부인이 연안 이씨다. 박규수는 평안도관찰사를 지낼 당시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까지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자 거부하며 이현익을 시켜 식량을 주어 돌아가게 시켰으나 이들은 오히려 이현익을 침임자로 오해하여 이현익을 붙잡고, 무장하여 도발하자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웠다.[145] 참고로 박규수의 아들 박제응의 부인도 연안 이씨이다.
- 철인왕후의 모친이자[146] 안동 김씨 세도가 김문근의 본처 연양부부인 이씨는 효간공 이용수의 딸이자 연안 이씨다.
- 친일파 민영휘의 적장녀는 정관재 이단상의 후손인 정위 이유익(李裕翼)과 결혼 후 이홍재(李弘宰)와 이달재(李達宰)를 낳았으나, 이혼하였다고 한다.
- 동학 농민 혁명의 지도자 김개남의 첫 번째 부인은 연안 이씨다.[147] 여담으로 김개남이 관군과의 싸움에서 결국 패해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에 전라감사 이도재가 김개남이 부하들에 의해 도망칠 수도 있다며 재판을 거치지 않고 전주 초록 바위에서 목을 베게 했는데, 김개남의 목을 베게 한 전라감사 이도재도 연안 이씨이며, 김개남의 비문을 지은 역사문제연구소장 이이화도 연안 이씨이다.
- 한글이라는 이름을 지은 주시경 선생의 어머니가 연안 이씨다.
-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이자 서재필의 뒤를 이어 두 번째 한국 출신 의사인 박에스더의 친모가 연안 이씨다. 박에스더는 미국 볼티모어 의과대학 최연소 입학자이자 대한민국 최초로 교회에서 서양식 결혼식을 치른 부부이기도 하다.
-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이범석 장군의 어머니가 연안 이씨다.
7. 기타[편집]
- 연안 이씨 관동파를 동촌 이씨라고도 하는데, 이는 이정구의 손자이자 8상이라 불리는 이일상, 가상, 만상, 단상, 은상, 홍상, 유상, 익상 대인 조선 후기에 접어들며 폭발적으로 성장한 관동파를 일컫는 말이다. 또한 천재 이일상이 17살에 소년 등과하고 문형이 돼 조선 최초 3대 연속 대제학이 되었고 이정구 이후 3세의 모두가 문과에 급제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또한 이들 대부분은 당상관으로 문한(文翰)에서도 막중해 명망을 얻었다.
- 이석형이 생원, 진사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때 세종이 생원, 진사에 급제한 자들을 사은하기 위해 축제를 열었는데 광화문 앞에서 이석형이 오지 않자 세종이 옆에 있던 관리에게 이석형이 왜 오지 않냐고 묻자 관리가 생원시에 합격한 자들은 왼쪽 문, 진사시에 합격한 자들은 오른쪽 문으로 와야 하는데 이석형은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니 그를 앞에 세우고 서로들 자기네 쪽으로 데리고 가려고 다투어서 날이 저물도록 들어오지 못했던 사정을 알자 세종이 몹시 기뻐하며 가운데 문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 연성부원군 이말정은 자식들과 함께 한양에서 김천 구성면 지품마을로 이주해 터를 잡고 살았다. 그러나 김천에 홍수가 일어나 범람하자 이들은 거창 모곡으로 잠시 이주했고, 이후 다시 지품마을로 돌아오기 전까지 살았던 모곡에는 오자암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이야기는 이말정이 다섯 아들을 각각의 바위 위에 앉혀두고 공부를 시켜 자식들 모두가 등과하는 성공을 거뒀다는 이야기다. 이후 주변 사람들이 다섯 아들이 공부하던 바위를 오자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 1990년대 초 대종회가 MBC로부터 일요일 아침에 방영되는 명가(名家) 성씨 소개 자료를 요청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프로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폐지되는 바람에 빛을 보지 못하였다.
- 연안 이씨 인물들 중 장수하는 이들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148] 또한 정지천의 《명문가의 장수비결》에선 일가가 모두 장수했던 집안으로 연안 이씨를 꼽았는데 장수 비결을 이석형이 노년에 지은 정자 계일정(戒溢亭)에서 찾았다. 계일정(戒溢亭)은 ‘넘침을 경계한다’는 뜻을 갖고 있는데 연못에 물마개를 달아놓아 물이 차면 마개를 열고, 부족하면 닫아 적정 수위를 유지했다. 이에 저자는 이 연못이 가문의 정신을 반영한다고 봤다. 즉, 청빈과 절제의 정신이 바로 연안 이씨 가문의 장수 비결이라고 말했다.
- 1983년에 편찬한 소부감판사공파 족보에 저헌 이석형이 쓴 저헌집 부록에 늙은 누이를 자신이 봉양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점을 통해 이석형에겐 누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그 누이의 남편, 즉 이석형의 매형의 이름을 알 수 없기에 후고(後考)하여 찾기를 기다린다고 적혀있다. 여기서 이석형의 매형은 인천 이씨 이수림으로 이수림은 첨만호를 지내고 병조참판에 추증됐다.
- 홍복산은 임진왜란 당시 월사 이정구가 왜병과 15일 이상 전투를 한 장소이다. 이때 이정구가 다리에 총상을 입었지만 살아남게 되어서 산의 본래 명칭인 황골산에서 지금의 명칭인 홍복산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지현리에 있는 연릉동은 연릉부원군 이호민이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에 가서 외교관으로 활동한 공을 인정받아 화현면 지현리 연릉동 두리봉산을 사패지로 하사받아 연릉동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
-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 초촌리 오촌 마을은 본래 남원군 백암면 오촌리였으나 1914년에 초동리와 병합되면서 초촌리에 편입되었다. 오촌 마을은 1637년 병자호란 당시 연안 이씨가 피난 차 삼남의 요지인 남원에 당도하여 정착지를 물색하다가, 요천을 건너 장백산 자락에 위치한 지금의 오촌 마을에 와보니 이곳의 지리적 위치가 매우 명당이라 하여 정착지로 삼았다. 그 후 진주 소씨와 남원 양씨가 합세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본래 오촌 마을은 자래 울 또는 오촌(鰲村)이라 했다. 연안 이씨가 살다가 마을 앞 당산에 부친의 묘를 쓰려고 땅을 파자 바위가 나와 그 바위를 깨트리자 그 속에서 자라 한 마리가 기어 나오고 물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묘를 다른 자리로 옮기고 그곳에 우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자라가 나와 자라 울, 자래 울, 오촌(鰲村)으로 불렀는데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자라 오(鰲)를 다섯 오(五)로 바뀌어 오촌(五村)이라 했다고 한다.
- 청주시 문의면에 있는 후곡리는 연안 시씨 이성징이 현재 후곡리 일대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생긴 것으로 그의 호인 후곡을 따서 후곡리라고 하였다. 이 일대에 연안 이씨들이 거주하면서 이 일대의 지명들이 많이 바뀌었는데, 기존에 박씨가 살았다고 하여 박달봉이라고 불렸던 것을 연안 이씨가 거주하면서 이달봉으로 바뀌었고, 이들의 일족인 연리의 인물 중 한 명이 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고 해서 진사골이라고 불리는 등의 여러 지명이 바뀌었다. 또한 이들의 후손 중 한 명인 비서감승 이의국이 한일병합이 체결되자 분개하여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다음 고향에서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후곡리에 용흥강습소를 세워 양성하였는데, 이가 현재는 대청댐의 건설로 수몰되어 폐교된 청주 용흥국민학교의 시초이다. 후곡리의 이야기를 담은 기사
- 조선 정조 때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상주 이씨의 시조인 이민도의 묘지를 발견했고, 이민도가 농서 사람이었기에 정조는 연안 이씨의 선대가 농서 출신인 것을 고려하여 연안 이씨 종원인 이복원과 이민수가 묘비명을 짓도록 하였다.
- 남양주에 있는 퇴계원의 본래 명칭은 퇴조원으로 현재의 명칭인 퇴계원으로 바뀐 이유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내곡리에 살던 이정구의 후손인 이조온의 아들이 상민들이 “퇴조원, 퇴조원”하고 부르니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아 불쾌하여 퇴계원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고 한다.
- 충주시 살미면 공이리에 있는 골짜기에 큰 바위 두 개가 나란히 있는데 이 바위를 마을 사람들은 암수바위라고 부른다. 숫바위의 그늘이 지는 곳에는 바둑판이 적요하게 새겨져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바둑판의 독특한 전통양식인 '연꽃무늬' 모양으로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이는 1853년에 연안 이씨 4형제 노천 이원익, 노강 이민익, 노탄 이근익, 노호 이횡익이 새긴 것으로 숫바위 아래 반석에 연안 이씨 4형제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또한 이들은 암수바위 위쪽 언덕에 사노정이라는 작은 정자를 세우고 그 절경 속에서 계절에 따라 변하는 자연의 조화를 만끽하며 시문을 읊고 바둑을 두며 세속을 잊은 선비의 생활을 즐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 경상북도 김천의 독립운동가 이명균의 종손인 이진특씨는 2004년 영남일보와 인터뷰에서, 일괴 이명균 선생의 대만 해도 토지만 12만 평이 넘는 김천의 손꼽히는 부호였던 그의 집안이 독립운동과 군자금을 대느라 가산을 모두 쓰고 후손들은 정말 어렵게 산다고 말했다. 이후 후손들은 세계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돈을 벌러 나가야 했다면서, 집성촌에만 30명이 넘는 이진특씨 항렬 중 대학 다닌 사람이 한 명 뿐이라고 말했다. 이진특씨는 공무원 출신으로 정년퇴직 후 일괴 선생의 기념 사적지를 관리하며 살고 있다.
- 어느 한학자의 말에 따르면 구한말에 충청남도 신창에서 연안을 본으로 하는 토호 이덕향이 살았다고 한다. 이덕향의 세력은 신창현감과 군수를 능가했다고 한다. 이에 신창 관아의 나졸들이 형사 피의자를 체포해서 연행할 때 이덕향의 집 앞을 통과하면 이덕향의 하인들이 우루르 달려와서 나졸들을 두둘겨 패고 피의자를 탈취해서 피의자의 죄질에 따라 피의자에게서 돈을 받고 관아의 처벌을 막아 주었다고 한다. 이덕향은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부잣집의 여식을 며느리로 맞았다. 이덕향은 돈이 아쉬울 때마다 며느리를 친정으로 보내 돈을 넉넉히 갖고 오게 했는데, 며느리가 한계에 도달하자 자살하기를 결심하고 웅덩이에 몸을 던졌다. 이때 어느 사람이 웅덩이에 빠진 며느리를 보고 막대기를 내밀며 구출하였다. 이 일은 곧 이덕향에게 알려졌는데 이덕향은 구출한 사람을 당장 잡아오라고 하인에게 명하고 하인들이 구출자를 이덕향의 집으로 끌고 오자 이덕향은 상민이 양반가 며느리가 물에 빠졌든 말든 어찌 천하게 막대기를 내밀 수 있냐며 나무라면서 구출자가 죽지 않을 만큼 매우 때리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이덕향은 고을의 좌수가 돈이 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탐해 하인을 시켜 좌수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라고 시켰다. 좌수는 만남을 거절하였으나, 이덕향이 계속해서 강요하자 좌수는 결국 응하였는데, 조건이 있었다. 그 조건은 자신을 가마에 태워 집으로 데려가라는 것이었다. 이에 이덕향은 가마를 보내 좌수를 데려오도록 시켰고, 좌수가 이덕향의 집 앞에 도착하자 가마꾼이 가마를 내려놓으려 하자 좌수는 비수를 꺼내 협박하며 대청마루에 내리도록 시켰다. 이에 이덕향은 하인에게 가시가 매우 날카로운 엄나무로 엮어 만든 발을 바닥에 깔게 하였다. 좌수는 하인들을 향해 다시 비수를 들어 자신의 몸에 손을 대지 말라 하였고, 옷을 벗더니 엄나무 발에 뛰어들어 굴렀다고 한다. 이에 좌수의 몸엔 피가 쏟아져 나왔고, 대청마루엔 좌수의 피로 흠뻑 젖었다고 한다. 이에 이덕향은 겁에 질려 고개를 떨구었고, 좌수는 일어나서 이덕향을 덮친 후 그의 목에 비수를 들이대며 좌수의 신분으로 양반인 이덕향을 죽이면 자신도 곧 무사할 수 없을 거라고 하면서 이덕향을 죽이고 자신도 여기서 죽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어 좌수는 이덕향을 향해 식솔을 불러 유언을 남기라고 말했다. 이에 이덕향이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좌수는 다신은 악행을 하지 않겠다고 친필로 서약을 하면 살려준다고 말을 했고, 이덕향은 친필로 서약을 해서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덕향의 서약서는 관청의 정문에 붙었고, 이덕향은 고향에서 살 수 없어 어디론가 사라져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일개의 가담항설(街談巷說)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 연안 이씨 대종회는 서울 서초구 양재동 ‘연리회관’ 3층에 저헌공파 종중과 함께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1989년 완공부터 저헌공파 소유였다고 하며 2016년에 건물의 시세를 측정한 결과 약 25억원 정도라고 한다. 연안 이씨 종중회는 수원 영통구에 있는 ‘연안빌딩’에 있다. 또 서울 강남구 역삼동 선릉로엔 ‘연안이씨빌딩’이 위치하고 있다. 외에도 연성군 이곤이 중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성남과 용인 일대의 땅 4만 평이 판교신도시로 재개발되면서 향토 유적으로 지정된 일부 묘역을 빼고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오면서 약 120억 원 정도의 토지보상금을 받았으나 종중 간부가 돈을 횡령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종중에 남은 돈은 없다고 한다.
- 용인에 위치한 약 30만 평에 이르는 연안 이씨 종토인 불당골[149] 이 골프장 건설로 인한 철거와 배상금 등의 문제로 골프장 건설사와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해당 관련 기사 해당 관련 기사 2
- 전북 익산에는 연안 이씨 종중 문적 박물관이 있다. 이곳에는 이숭원의 홍패 등 여러 문화재가 있으며, 붓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체험 등이 있다. 또한 연안 이씨에 대한 여러 정보들도 확인할 수 있다.
7.1. 연안 이씨 문화재[편집]
- 대구광역시 군위군 효령면 장군리 효령사(장군당)에는 개국공 태대각간 흥무대왕 김유신과 신구도대총관 소정방 및 대사마 좌위 중랑장 신라 연안후 이무를 모신 사당인데, 백제 정벌에 이어 고구려까지 평정해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어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게 해준 고마움을 기리기 위하여 사공중상의 상소로 공양왕 2년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고려 말엽부터 이곳 주민들이 옛일을 추모하기 위하여 효령사에 매년 3월 3일에 향사를 지내다가 1900년대 중반부터 김해 김씨와 연안 이씨 양문중의 주관으로 넘어가 정초, 상원과 단옷날에 향사를 지낸다.
- 소부감판사공파의 중시조인 이현려[150] , 봉익대부 판도판서를 지낸 이효신, 자덕대부 공조전서 이종무의 유묵이 전해진다.
- 전라북도 무형문화재인 명주(名酒) 호산춘이 익산시 여산면 연안 이씨 종가의 것이다. 가람 이병기의 25대 조부이자 소부감판사공파 중시조 이현려(1136~1216)가 고려 의종 때 소부감판사 겸 지다방사로 있으면서 빚었던 술이라 전해진다. 대대로 문화를 선도했던 연안 이씨 가문의 이 술은 고려 시대 궁중에서 마시던 술로 ‘임금님 술’이란 별칭도 있다고 한다. 이름에 ‘춘’자는 중국의 고급술을 춘주라 칭한 것이 유래다. 다른 예로는 약산춘, 산사춘 등이 있다. 현재 여산 호산춘은 이연호 명인에 의해 전승되고 있는데, 이연호 명인은 가람 이병기 선생의 동생이자 독립유공자인 이병석 선생의 장녀인 이경희 여사의 아들이다.
- 고려사 열전 36권에 이분희전이 실려있어 그의 정보는 물론 주변 사람들의 정보까지 나와있어 연안 이씨의 고려 대의 선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 1402년 간행된 강호공 이귀령 준호구는 아내 성씨(成氏)와 2남 2녀의 자녀들이 함께 본 호적 문서에 수록되었다. 31세의 맏딸부터 18세의 막내아들까지 모두 혼인하였으며, 각각 그 배우자를 함께 기록해 두었다. 또한 호주인 이귀령과 그 처의 사조(四祖)[151] 외에도, 할아버지의 장인, 증조부, 증조의 장인, 외조부, 외조부의 장인, 그리고 이귀령의 장인과 성씨의 외할아버지의 사조도 밝혀져 있다. 안타깝게도 원문은 전하지 않고, 강호공 세보에 기록된 서문으로만 전한다. 이 호적은 비슷한 시기의 호적에 비해 처의 조상 기록이 좀 더 자세하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 이회림의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향토문화재 제2호로 이회림은 조선 초 문·무신으로 태종 때 원종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사후 좌의정에 추증된 인물이다. 그의 부친인 이종무는 조선 개국 원종공신이며, 그의 아들인 이석형은 조선 최초로 3과[152] 를 장원했던 인물이다. 묘는 정경부인 박씨와 합장묘로 상하로 조성되어 있어 조선 초기 분묘 조성 방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묘의 위치에 대한 내용은 조선 한문 4대가 중에 한 명인 월사 이정구 선생의 『월사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묘와 석물들을 통해 조선 초·중기 묘역의 특징을 알 수 있으며, 현재까지도 후손들에 의해 관리가 잘되고 있다.
- 조선 전기 집현전 학사인 이석형의 묘는 경기도기념물 제171호로 쌍유혈로 조선에 손꼽는 명당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의 4대 후손부터 정승 고관이 줄줄이 나왔다. 묘는 용인시 모현면에 있다. 이 근처에는 연안 이씨 비각공원이 있는데 정몽주 선생 묘 성역화 사업에 맞추어 조성한 것으로 정몽주 묘로 들어가는 입구 오른쪽에 있다. 공원 앞에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개울 중앙에 공원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있다. 공원 안에는 이석형을 비롯한 연안 이씨 선조들의 신도비·비각·행적비들이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여담으로 이석형의 선대의 묘는 함경남도 안변군 석왕사면 주음리에 위치하고 있다.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 이숭원의 초상화는 조선 초기 공신 도상의 일반적인 작품과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른 점을 보이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양손이 드러나 있는 것과 배경에 포도넝쿨을 사실적으로 그려 넣은 점이 있다. 우리나라 초상화에서는 대상 인물의 공식성과 엄숙성을 강조하기 위해 시선을 분산시키게 되는 손을 대부분 표현하지 않으며, 배경도 같은 이유로서 공백으로 비워두는 것이 일반적인데도 이숭원의 초상화엔 손과 포도넝쿨을 자세히 표현하여 상이되는 부분을 갖고 있다. 여담으로 이숭원의 초상화를 그린 이는 노비 출신의 화가 이상좌(李上佐)로 조선 전기의 대화가로 꼽힌다. 이상좌(李上佐)는 천한 신분이면서도 그림 실력이 뛰어나 중종의 도화서에 특채되기도 했으며, 공신들의 초상화를 그려 후에 원종공신이 된 입지전적 인물이기도 하다.
- 보물 제651호는 연안 이씨 종중 문적으로 이보정의 홍패와 이숭원의 조부에서 손자까지 내린 교지 18매, 공신녹권 1건, 공신회맹문 6책 등이 익산 현동사에 있어 이숭원 가계의 연혁과 내력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일 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의 서지학을 연구하는 데에도 귀중한 자료였으나 현재는 공신녹권과 공신회맹문이 도난당한 상태다.
- 비지정문회재인 익산 현동사 연안 이씨 종중 고문서도 1998년 9월 18일에 이숭원의 공신녹권, 공신회맹록과 함께 도난당했다.
- 보물 제1992호는 원종공신, 적개공신에 녹훈된 이숙기가 좌리공신에 녹훈되자 성종이 내린 공신록권으로 당시 공신 교서의 형태적 특징, 서체, 제작 방식, 장정 형태를 온전히 확인할 수 있다. 원문의 상태가 양호하며 성종을 추대한 정치 세력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 팔홍문(八紅門)은 이지남과 그 부인 등 3대에 걸쳐 8명의 자손이 효자·충신·열녀가 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8개의 정문으로 본래 서울특별시 중구 순화동에 있었으나 현재는 김포로 옮겨 확장·복원되었고, 기존에 있던 자리는 터만 남았다. 또한 팔홍문(八紅門) 집안이라고 알려진 이 가문은 사헌부 장령 이언침의 처 절부 광릉 안씨와 이언침의 아들 효자 이지남을 비롯하여 110년 동안 6세에 걸쳐 충신 2명, 효자와 효녀 7명, 절부 3명, 열녀 1명 모두 13인이 정려되었다.
- 이주·이광정 묘 및 신도비는 경기도 파주시 향토문화유산 제12호로 조선 중기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청백리에 녹선된 이광정과 영의정에 추증된 그의 부친 이주의 묘와 신도비이다.
- 청주시 향토문화재 43호로 지정되어 있는 사당인 이강영당은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에 있다. 상술한 이광정(李光庭)과 그의 현손 이만원(李萬元)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한 사당이다.
- 이호민 선생 묘 및 신도비는 경기도 양평군의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호민의 영정과 그 외 유물들은[153]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되었다.
- 공주 연평부원군 신도비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9호로 1650년에 세운 연평부원군 이귀의 신도비이다. 신도비문은 조익이 짓고 오준이 글씨를 썼다. 글을 새긴 비신과 비머리는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두 마리의 용과 구름을 조각한 비머리는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 이충정공 비어방략은 이귀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벌어질 것을 예견하고 만주족의 침입에 대비한 한국의 방어전략을 담은 이충정공 비어방략을 기록했는데 이 문서는 총 3권이며,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버클리의 리치먼드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 충청남도의 무형문화재 제7호인 계룡백일주는 본래 궁중술로 인조가 1등 정사공신 이귀의 공을 치하해 양조비법을 하사한 것이다. 이귀의 부인 인동 장씨를 통해 내려온 이 술의 현재 기능보유자는 식품명인 4호 지복남 명인으로 이귀의 14세손 며느리다. 현재는 지복남씨의 아들인 식품명인 제4-가호 이성우 명인이 술을 빚고 있다. 술을 빚는 방법은 문헌에 남기지 않고 집안 비법으로 내려왔다. 소량 제조해 제사상에만 올리기 때문에 충남 공주의 종가에서도 맛본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한다. 현재는 브랜드로 만들어 판매를 하고 있다.
- 이정구 선생 묘 및 삼세 신도비는 경기도의 기념물 제79호로 이정구 선생 묘로 지정되었으나, 2016년에 당초 향토문화재로 별도 관리되던 연안 이씨 삼세 비각을 통합하여 지정되었다.
-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133호는 월사집 목판인데 이 목판은 월사집을 간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이정구가 사망한 1년 후인 1636년에 공주에서 문인 최유해 등에 의해 처음 간행되었고, 1688년에 손자 이익상이 원집과 부록 68권을 경상도 감영에서 간행하였다. 그리고 1720년에 증손자 이희조가 별집 7권을 간행하였다. 중간본은 원집(原集)·부록(附錄)·연보(年譜)·별집(別集)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문화재를 통해 월사 이정구의 사상을 배울 수 있다.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에 위차한 파주시의 향토문화유산 제36호인 의마총(義馬塚)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왕이 직접 이름을 하사한 말의 비석이다. 의마총은 이유길이 전장에서 사망할 것을 예측하고 말을 집으로 돌려보내자 3일간을 달려 장군의 집에 도달해서는 장군의 죽음을 알리고 죽음을 맞이한 충성스러운 말을 기리고 있다. 조선 원군이 1619년 심하의 후차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모두 전사했을 때 이 전투에서 이유길도 마지막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는데 죽기 직전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글 ‘3월 4일사(三月四日死)’를 써서 말에게 매주고선 채찍질을 하며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전해진다. 이 말은 산과 강을 건너 3일 만에 집으로 돌아와 장군의 전사를 알리곤 슬피 울다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이에 광해군이 병조참판에 증직시키고, 비석의 이름을 직접 하사해 유일하게 왕이 직접 이름을 하사한 말의 비석으 되었다. 이유길은 영조 대에 정1품인 대광보국숭록대부에 증직 되었다. 외에도 연안 이씨 이유길 가전 고문서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다.
- 경기도 남양주의 동관댁은 국가민속문화재 제129호로 현재 소유자인 여경구의 장인인 이덕승의 8대조가 약 250여년 전에 지었다고 전해온다. 대문채, 사랑채, 안채, 사당이 비교적 옛모습을 잘 지니고 있는 편이라고 한다. 마을에서는 연안 이씨 동관댁이라 부르는데 명당의 터에 집을 지어서 누대 복록을 누려왔다고 한다.
- 연안 이씨 별좌공 종택은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71호로 이덕창의 집으로 조선 선조 때 지은 것이다. 선생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내자시정이 된 학자이다. 조상의 옛 터에 집을 세우고 안채 대청에 ‘사고구려’라는 현판을 걸었다. 본채와 사당, 대문채 3동이 남향하여 놓여 있다. 'ㅁ'자형의 안채와 서쪽에 위치한 사랑채가 본채를 이루는데, 안채에는 원래 6칸 대청이 있었으나 후에 4칸으로 줄이면서 방으로 바꾸었다. 이 지역 사대부의 주거 모습을 볼 수 있는 건물이며, 조선 중기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로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 김천 방초정은 보물 제2048호로 조선 선조 때 이정복이 조상들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2층 누각이다. 몇 차례의 화재와 홍수로 파손된 것을 정조 11년에 다시 지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 이시방 초상의 초상은 보물 제1482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이시방 초상 일괄은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8호다.
- 이시방의 신도비는 보령시 향토문화유산 제9호로 이시방의 신도비다. 조선 중기 양반가 신도비의 전형적인 형식을 반영하고 있는 자료로, 비문이 3,000여자에 달하며 대동법 실시, 정묘호란 등 조선 중기의 사회상을 알 수 있다.
- 이익태의 묘는 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153호로 제주목사를 지낸 이익태의 묘는 부여에 있는 조선 후기 사대부의 무덤으로 묘역을 구성하고 있는 석물들의 보존 상태 또한 양호하여 부여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이익태가 제주목사를 역임할 당시 기록했던 '지영록'은 보물 제2002호로 1694년 7월부터 1696년 9월까지 제주목사를 지낸 제주목사 중 업무와 제주 관련 역사, 부임지의 임기를 마치고 제주도를 떠나기까지의 행적을 기록한 제주도 최초의 인문지리서다.
- 충주 이시희·이시걸 형제 쌍효각은 경종 2년에 정려가 내려져 효자문이 건립된 것이다. 이에 이시희와 이시걸은 각각 통정대부와 장사랑에 증직 되었다. 또한 이시희·이시걸 형제의 부모를 위하는 효심이 깊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리고 대소변을 맛보며 부모를 병간호하니 겨울철 얼음 위로 약에 쓸 잉어가 솟아 나오고 밤중에 약을 구하러 나서면 호랑이가 지켜주는 등 전설적인 효행이 전해진다. 부친상으로 시묘할 때는 3년간 호랑이가 와서 곁을 지켰고, 모친상 때는 죽으로 연명하며 시묘했다고 한다. 연안 이씨 쌍효각은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46호로 지정되었다.
- 이천보의 고가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5호로 조선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진암 이천보가 살았던 집이다. 당시 건물은 모두 소실되고 현재 있는 건물은 고종 4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한국 전쟁으로 안채는 모두 불에 타 버렸고 지금은 사랑채와 행랑채만 남아 있다. 또한 이천보가 심었다고 전하는 가평 연하리 향나무는 수령 300년 이상으로 1981년 경기도 기념물 제61호로 지정되었다.
-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노현리에 위치한 포충사는 충강공 이술원을 모신 서원이다. 이술원은 이인좌의 난 당시 거창현 좌수로 있었다. 이인좌와 정희량이 역모에 합세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이술원은 좌수로서 거창 현감 신정모에게 현내의 군사권을 위임받아 끝까지 대적하다 결국 정희량에게 잡혀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 이에 아들 이우방은 원수를 갚을 것을 맹세하고 병사를 일으켜 우영장을 따라 거창에서 정희량을 공격하였는데, 우두령에서 정희량과 조우하였다. 이우방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정희량은 역적이니 가담한 사람은 투항하라고 설득하였고, 장사 여해달이 정희량을 사로잡아 투항해 오자 이우방은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 간과 뇌를 꺼내 이술원의 관 앞에 놓고 장사를 지내 원수를 갚는다. 이에 조정에선 그 공을 높이 사 현감에 제수하였고, 효자비를 정려하였다. 또한 이술원은 양무원종공신과 사헌부 대사헌에 추증되었다. 여담으로 포충사는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 김천 도동서원은 문화재자료 제663호로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에 있는 서원이다. 1771년에 건립된 연안 이씨 문중의 현조 5명을 배양한 문중 서원으로 당시 연리의 남인과 노론의 당색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문중 의식으로 극복한 흔치않은 사례이며, 독립운동가 이경균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 대구광역시 군위군 군위읍 외량리에 송오 이진 선생과 남계 이보 선생을 모시는 서원이 있는데 이를 송호서원이라 한다. 송호서원은 1798년 정자를 지어 창건하였으며 철종 때 서원으로 승격되었다가 이후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오늘날 복원되었다. 현재의 서원 건물은 총 5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지역에서 세거해 온 연안 이씨 문중에서 소유와 관리를 맡고 있다.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65호는 거창 연안 이씨 호구 단자와 준호구이다. 조선 후기에 경상남도 거창에 거주한 연안이씨 쌍청당파 후손 이명원에서 8대에 걸친 연안 이씨 가문의 호구 단자 및 준호구인데 다른 집안에서도 이 정도의 호구 자료를 소장한 경우가 적지는 않지만, 고쳐진 곳을 표시하는 인적(印跡)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거주지가 변동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호구 자료가 계속 보관되고 있었던 점이 연안 이씨 호구 자료의 중요성을 말해 준다.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220호인 노현리 민가는 청주시 문의면 노현리에 거주하던 연안 이씨인 괴정 이현승 참봉이 살던 가옥이었다. 현재는 문의문화재 단지 내에 있다.[154]
- 청주시 향토문화재 28호로 지정되어 있는 연안 이씨 열녀비는 현재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에 있는데, 이는 신긍호(申兢浩)의 부인 연안 이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한 비석이다. '열녀신긍호처유인연안이씨지비'라 음각되어 있다.
- 완주군에 있는 신교리 유도양의 처 연안 이씨 정려는 완주군 소양면에 있고, 유도양의 부인 연안 이씨의 효심을 기리기 위한 비각이다. 유도양의 부인 연안 이씨는 시어머니가 병환에 걸리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간호를 하였으며, 그래도 위독해지자 단지주혈[155] 까지 하였다고 한다. #
- 경상북도 양산시 동면 가산리에 있는 금호사는 연안 이씨 사당으로 매해 음력 10월 둘째 일요일에 제사를 지낸다. 1810년 연안 이씨 문중에서 소부감판사공파 중시조인 판소부감공(判小府監公) 이현려의 15세손 금호공 이수생을 향사하기 위해 세웠다. 그 후 1860년에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금산리로 옮겼다.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제사를 금하다가 1945년 다시 향사를 시작하였으며 1994년 2월 도로 확장으로 지금의 자리인 동면 가산리로 이전하였다.
-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동호리에 연안 이씨 고택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고택은 조선 시대에 건축된 고택으로 1884년 참봉 이준학 선생이 차남인 영은 이현석 선생에게 분재해 준 집이다. 도문화재자료 제122호인 동호리 이씨 고가[156] 의 아래쪽으로 담장을 공유하고 있으며, 2005년 3월 31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71호로 지정되었다.
-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한기리에 있는 경덕재는 1915년에 3개동으로 지은 1층 목조 건물로 무척이나 화려한 부농의 주택이었다. 한식·중식·일식의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독특한 외형을 나타내며 파련각(波蓮刻) 장식의 낙양과 화반(花盤), 난간 등의 세부 장식이 전통 한옥 건축의 기법과 많은 차이를 보이는 경덕재는 강원도와 경상북도 등지에서 금광을 경영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한 연안 이씨 이현보의 주택이다. 한국·중국·일본의 건축 양식을 혼합하여 절충식으로 지은 건물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어 국가등록문화재 제147호로 지정되었으나 2014년 화재로 본채가 소실되어 문화재 지정이 해지되었다. 현재 경덕재는 국사문, 가묘, 신문, 남문 등 5동만 남아 있다.
- 현재 육군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이도재의 예복은 국가등록문화재 제553호로 1897~1907년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한제국의 예복으로 상의, 하의, 예모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의의 길이는 74.5cm, 소매의 길이는 55.8cm, 하의의 길이는 103cm이다. 이 예복은 운정 이도재가 입었던 것으로 대한제국의 예복이라는 상징적인 가치뿐만이 아니라 보존 상태, 디자인, 색상 등 보존 상태가 뛰어나 보존 가치가 더욱 높다.
- 전라북도 익산시에 있는 연안 이씨 종중문적 박물관이 있는데 조선 전기 문신 충간공 이숭원의 조부에서 손자까지 내린 교지 18매를 비롯해 자체 소장 유물 200여 점과 전국의 연안 이씨 문중에서 기증한 300여점의 유물 등 총 500여 점에 이르는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이곳에선 고문서와 초상 등 각종 연안 이씨에 관한 사료들을 볼 수 있다.
- 전라북도 익산시에 있는 가람 이병기 선생의 생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었다. 고패형식의 안채와 사랑채·고방채·모정으로 구성되었으며, 입구에 세워졌던 3칸의 행랑채는 철거되었다. 모정 앞쪽에는 두 개의 작은 못을 파놓았으며, 뒤쪽에는 일꾼을 위한 각각 1칸씩의 방과 부엌으로 된 외딴채가 있다. 또한 생가의 탱자나무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112호이다.
7.2. 창작물에서[편집]
- 김주영의 장편소설 《춘향전》에서는 이몽룡의 본관이 연안으로 나온다.
- 조선 작가 미상의 소설 《박씨전》에서도 주인공 박씨 남편으로 인조반정 공신 영의정 이시백이 나온다.
- 임영태의 장편소설 《호생관 최북》에서도 연안 이씨가 나온다.
- 이인화의 장편소설 《영원한 제국》에서 주인공 이인몽의 실제 모델이 좌의정 이존수다.
- 소설가 김동인이 1930년부터 1931년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젊은 그들》의 여주인공 이인화는 연안 이씨다.[157] 이 작품은 1955년 신상옥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고, 최은희가 이인화 역을 맡았다. 근거자료
8. 인구 분포[편집]
2015년 인구 기준으로 작성된 문서임을 밝힌다.
정리를 하면 2000년 대비 서울과 부산의 인구는 오히려 줄었고, 인천과 경기도의 거주 인구가 늘었다. 충청남도의 인구 수는 조금 늘었고, 전라북도는 2000년 대비 조금 줄었다. 수도권의 인구 수가 전체 인구의 반절 정도로 비중이 크며, 전라도에서는 전라북도에 인구 수가 크게 편중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제주특별자치도의 인구는 836명으로 2000년보다 인구수가 약 300명 정도 늘었다.
8.1. 집성촌[편집]
8.1.1. 남한[편집]
- 서울특별시 강서구 마곡동
- 대구광역시 군위군 군위읍 대흥리·외량리, 소보면 사리리, 효령면 중구리
- 인천광역시 강화군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 경기도 김포시
-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뇌조리
- 경기도 양주시 덕계동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
-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운중동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갈담리
-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모산리
-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 경기도 여주시 가남면 정단리
- 경기도 이천시
-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내촌면 문현리
-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 갈말읍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후곡리·상장리·괴곡리
- 충청북도 괴산군 감물면 백양리
-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인곡리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덕련리
-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오목리
-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산정리
-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 탄천면 광명리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덕암리
- 충청남도 서천군
- 충청남도 부여군 구룡면 죽교리, 홍산면 교원리
-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대사리
- 충청남도 청양군 대치면 상갑리
-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삼기면 기산리
-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안성면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운봉읍
-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고수면 부곡리, 부안면 검산리, 흥덕면
-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 상대리
- 전라남도 순천시 상사면 봉래리
- 전라남도 영암군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충리·원진리·송정리
-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상원리·상거리, 부항면 사등리
-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송곡리
- 경상북도 안동시
- 경상북도 문경시 점촌동·흥덕동
-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산포리·동호리, 주상면 성기리
- 경상남도 진주시
-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금산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
8.1.2. 북한[160][161][편집]
- 경기도 개풍군 서면 전포리·광정리, 청교면 묵송리, 토성면
- 강원특별자치도 이천군
- 강원특별자치도 통천군 고저읍 반월리·신월리·전천리·오류리
- 강원특별자치도 회양군 안풍면 안미리
- 강원특별자치도 안변군
- 황해도 금천군 서북면
- 황해도 수안군 도소면 옥검리
- 황해도 봉산군
- 황해도 중화군 해안면
- 황해도 서흥군
- 황해도 연안군
- 황해도 배천군
- 황해도 벽성군 청룡면
- 황해도 평산군
- 평안북도 초산군
- 평안남도 용강군 지운면 양원리, 양곡면, 삼화면, 대대면, 신녕면
- 평안남도 강동군 삼등면
- 평안남도 평원군
- 평안남도 성천군
- 평안남도 덕천군 잠상면
- 함경북도 길주군
- 함경남도 함흥시
- 함경남도 정평군 장원면 사수리, 광덕면 장천리
9. 연안 이씨 관련[편집]
9.1. 관련 문서[편집]
9.2. 관련 링크[편집]
- 연안 이씨 종합 홈페이지
- 연안 이씨 홈페이지[162]
- 연안 이씨 대종중 카페
- 연안 이씨 의정공파 카페[163]
- 연안 이씨 유계공파 홈페이지
- 연안 이씨 삼척공파 카페
- 연안 이씨 장령공파 카페
- 연안 이씨 별좌공파 카페
- 연안 이씨 석흥군파 카페
- 연안 이씨 대장군공파 관련 카페
- 연안 이씨 통례문부사공파 카페[164]
9.2.1. 인터넷 족보[편집]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4-06-17 10:53:49에 나무위키 연안 이씨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해주 이씨와 안산 이씨 경기계 등 본래 연안 이씨였으나 다른 가문으로 분관한 경우와 해외 거주자 또는 개인 사정으로 인해 성씨 또는 본관을 바꾼 경우 또는 6.25 전쟁 당시 이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연리 후손 중 일부(이북에서 내려온 후손의 경우 휴전 직후 동/면사무소 서기가 호적을 정리할 때 본관이 미기재되어 있어 임의로 본관을 전주 등 다른 본관으로 기록하는 바람에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후손들이 본관을 되돌리려 해도 집안의 가보나 종친회 족보를 보고 인정해야만 수정할 수 있는데, 피난할 때 족보를 갖고 피난하는 경우는 드물고, 종친회의 도움을 받고 족보를 제공받기도 어렵기에 그냥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남북통일이 된 후 일가친척이 족보를 소장하고 있거나 종친회가 직접 나서서 도와주면 바꿀 수 있겠지만) 등 그 외 인구를 포함한다면 약 17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또한 2015년 통계청의 집계에 따르면 연백 이씨가 29명이 있는 것으로 나왔다. 다만 이들이 연안 이씨인지 아님 말 그대로 연백 출신의 이씨인지는 불분명하다.[2] 참고로 북한에서는 면이라는 행정구역을 쓰지 않는다. 또한 대한민국의 법률상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북한에 위치한 지역의 이름을 대한민국의 이북5도위원회가 규정한 행정구역을 따로 사용하고 있다. 아래의 명칭은 북한 땅에 있는 대한민국의 이북5도위원회가 규정한 행정구역의 명칭이다. 또한 이 행정구역은 이름이 같은 북한 당국이 관할하는 행정구역과 면적의 차이도 큰데, 일부 문서에서 행정구역 이름만 같고 관할구역이 다른 북한의 행정구역을 대입하는 오류가 종종 있다.[3] 개풍과 개성에선 소부감판사공파 중 생원공파 계열과 태자첨사공파 중 소윤공파, 재령공파 계열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황해도에선 대장군공파와 태자첨사공파, 소부감판사공파 계열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미수복 강원도 쪽에선 소부감판사공파 계열의 후손이 세거하고, 평양을 비롯해 평안도 쪽에선 대장군공파와 소부감판사공파 중 평장사공파 계열이 세거하고, 함경남도 쪽에선 대장군공파와 태자첨사공파 중 강호공파(조선 초 좌의정을 지냈던 이귀령의 후손들로 태자첨사공파 중 별제공파, 금성공파, 이천공파, 소윤공파가 속한다.) 계열의 후손들이 세거한다.[4] 본명이 ‘이이(李耳)’이다.[5] 대장군공파 종중에선 시조 이무가 흥성제 이고의 여섯째 아들 이번(李翻)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으나 일부 종원들은 이번(李翻)의 손자 이무는 연안 이씨 시조 이무와 생몰연대가 맞지 않다는 점에서 이번(李翻)의 후손이라는 것에 부정하기도 한다. 단, 연안 이씨 시조 이무가 상술한 이무와 다른 인물로 이번(李翻)의 또 다른 후손일 가능성도 있다. # 또 다른 사람은 이무의 선대의 족보를 제시하기는 했으나 그 근거는 미상이며, 족보의 인물들이 실존 인물인지조차 의문이다. 다음은 해당 인물이 제시한 이무의 족보이다. ‘이윤(李允)-이상후(李祥厚)-이무양(李武陽)-이교-이총(李叢)-이무(李茂)’ 그러나 제일 선대인 이윤(李允)은 누구의 후손인지 제시하지 않았다. 단, 연안 이씨가 농서 이씨 출신인 것은 확실하다.[6] 참고로 고요의 증조부는 창의로 삼황오제 중 하나인 황제 헌원씨와 황제의 본처인 서릉의 딸 누조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다. 산해경에 따르면 창의는 하늘나라에서 죄를 범해 인간세계로 내려가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창의의 아버지인 황제는 소전씨와 유교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소전씨는 인류의 시조격인 태호 복희씨와, 질서의 여신으로 우주를 배회하다가 번개의 신 뇌공의 발자국을 밟고 난 후 갑자기 임신했다는 화서(花序)의 딸 여와의 아들라고 한다. 태호 복희씨와 여와의 아버지는 뇌신(雷神) 풍뢰우(風雷雨)로 이들의 성씨 또한 풍(風)씨였다고 한다. 소전씨는 염제 신농씨의 아버지이기도 한데, 이 기록대로라면 서로 극렬하게 대립한 황제와 염제는 이복형제 관계가 된다.[7] 그러나 당나라 황실인 농서 이씨는 본래 탁발선비 계통으로 노자의 후손을 참칭했다고 보기도 하는데, 오호십육국시대와 남북조시대에는 이민족의 중원 유입이 굉장히 활발했고 이들은 한족들에게 권위를 세우기 위해 중원의 유명인이나 신화시대의 인물의 후손을 참칭했기 때문에 농서 이씨가 본래 탁발선비 계통이라는 가설도 아예 허황된 가설은 아니다. 당 황실의 경우 모계는 실제로 선비족이긴 한데 부계는 탁발씨 계통인지 한족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당 황실은 스스로 한족임을 자처했으므로 선비족의 영향이 짙었던 한족 정도로 여겨도 무방할 듯싶다.[8] 당나라 황실은 흥성제의 아들이자 이번(李翻)의 형인 이흠의 계통이다.[9] 지금의 황해도 연안군.[10] 신라의 여인이라는 말도 있다.[11] 단, 이 이야기는 종원들 사이에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종원들이 이무가 당시 당나라의 국정이 측천무후로 인해 어수선하여 신라에 귀화했다고 보기 때문에 그의 아들이 다시 당나라로 되돌아갔다는 말은 신빙성이 없기 때문이다.[12] 연안 이씨 관동파와 그들의 근거지를 조사한 논문이 존재한다. #[13] 높은 고관들이 노론계 연안 이씨였던 것이지 물론 소론 및 남인 연안 이씨도 있었다. 대표적인 남인 계열이 태자첨사공파 계열의 이조판서 근곡 이관징 계열이다. 이관징은 예송논쟁에서 남인 학설을 지지했으며, 그의 아들 예조참판 근암 이옥은 환국에서 송시열의 극형을 주장했다. 이들의 후손은 처가 쪽 인연으로 경상북도 상주 지역으로 이거 했는데 이때 이옥의 아들 이만부가 한성을 떠나기 전 숙부 이협과 함께 아버지 예조참판 이옥을 따라 입궐하여 숙종에게 낙향 인사를 드렸다. 숙종은 그들의 낙향 결심이 확고부동한 것을 알고 "그대들이 영남으로 낙향하는 것은 좋으나 과연 영남에 그대 집안과 혼인할 수 있는 가문이 몇이나 될까?"라며 넌지시 농담을 던졌다고 한다. 이에 이들은 "성은이 망극하오나, 조령을 넘으면 버들잎과 오얏뿌리가 발에 걸릴 듯 하옵니다."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실제로 이들의 말대로 종녀가 영남 남인의 정신적 지주인 이언적 종가의 종부로, 또 이황의 고제인 류성룡 종가 종부로 출가했다. 소론 계열은 대제학 이명한의 증손자이자 기로소에 입사했던 판서 이철보, 길보의 아버지인 이정신 계열이 있다. 이정신은 이종성, 조태억 등 소론계 인사들과 교류하였으며, 경종 대에 병조참판, 경기도·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이후 소론으로서 노론을 탄핵시키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신임사화를 일으킨 주동자로 지목되어 유배되었다. 또한 이정신의 증손이자 좌의정 이복원의 아들인 영의정 이시수는 소론의 마지막 영수였다.[14] 조선 시대에 너무 번성해서 그런지 고려 시대에는 세력이 크지 않았던 가문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옳지 않다. 시조부터 중시조까지 세계를 고증하던 문헌이 실전되어 선대를 알 수 없어 고려 무신정권 시기 전후부터 여말선초까지라는 시대가 제한됨에도 불구하고(각 파 중시조의 선계를 고증할 수 없다 보니 각 파 중시조의 선조조차도 분명히 밝힐 수 없다. 또한 선계를 밝힐 수 없다 보니 과거 연안 이씨 족보 제작 당시에도 연안 이씨 종중조차 모르는 파와 세계가 존재했을 것이다. 즉 이름조차도 밝혀지지 않은 파가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당대 연안 이씨는 재상지종은 아니었지만 당대에 유력했던 권문세가로 무신정권 이후와 원나라의 간섭기 이후 판삼사사 오원부원군 이권, 연안군 이엄, 원나라에서 연안군으로 봉해진 이아자첩목아, 무신으로 정권을 잡아 지밀직사사에 오른 위사공신 이분희와 원종의 총애를 받은 그의 동생 이습을 배출하는 등 당대에 세력이 컸던 가문이었다.[15] 공조판서, 형조판서, 호조판서, 이조판서, 대제학, 예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친형이 영의정 이시수이다.[16] 당시 권신들을 일컫는 말로 천생오태사(天生五太史)라는 단어가 있다. 이는 연안 이씨 극옹 이만수[15] , 장동 김씨 김조순, 의령 남씨 남공철, 청송 심씨 심상규, 대구 서씨 서영보을 일컫는 말로 이 시기에 정계를 움직인 핵심 인물들이다. 천생오태사(天生五太史)는 권세가 막강하여 감히 견제하기 어려워 이들의 권력을 빗대어 표현한 말로 하늘이 내린 태사라는 뜻이다. 이들의 집안은 혼인을 통해 인연을 유지하거나 서로 친교하여 세력을 유지하였다.[17] 인조실 배향 이귀, 순조실 배향 이시수[18] 판서 이철보가 동생 이길보와 함께 기로소에 들어간 데 이어 아들 좌의정 이복원과 손자 영의정 이시수가 기로소에 들어가는 조선 최초의 삼세 입사가 되었다.[19] 정승 명단: 이시백, 천보, 시수(이상 영의정), 이귀령, 정구, 후, 복원, 성원, 존수(이상 좌의정)[20] 판삼사사 이수산의 아들 이념이 태조 때 대제학의 전신인 예문춘추관 대학사를 지냈으므로 대제학의 전신인 대학사까지 포함한다면 8명이 된다.[21] 연릉군 이만원은 정조 20년(1796) 4월 18일 청백리로 천거되었으나 녹선되지 못한 54인 중 한 명이다. # 따라서 연리 청백리 명단에서 제외하여 7명이라고 표기하였다.[22] 사후 추봉된 경우까지 포함하면 10명이다. 참고로 고려 때 봉해진 부원군은 2명이다.[23] 고려 때 공신은 5명이다. 공신이 되었다는 기록이 족보에서만 확인되는 경우까지 포함한다면 총 7명이다.[24] 병조판서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는 이척과 이승백, 예조판서를 지냈다는 이보정, 족보에는 봉익대부 전공판서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활동연대를 고려하면 전공판서가 아닌 공조판서를 지낸 것으로 보이는 이지수, 병조전서를 지냈다는 이장림, 공조전서를 지냈다는 이음, 이귀령의 증손 예조판서 이종규(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국조방목에서는 어찌 된 일인지 ‘유종규(柳宗揆)’라고 나온다. 그러면서도 이칭은 ‘이종규(李宗揆)’라고 표기하고 있다. # 또한 조선왕조실록에서 태종 때 예조좌랑 등을 지낸 이종규(李宗揆)의 기록은 나오지만 유종규(柳宗揆)의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호조판서를 지냈다는 이규장을 포함하면 총 63명이다.[25] 6조의 판서를 모두 역임한 사람은 이만수, 조원(肇源), 존수이다.(지식백과에선 좌의정 이후의 손자이자 연행기사를 저술한 연풍군 이갑도 6조의 판서를 모두 지냈다고 소개하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에선 이갑이 호조판서를 지냈다는 기록이 나오지 않아 제외하였다.) 총 3명을 배출하였으며, 본관별로는 4명을 배출한 신 안동 김씨 다음으로 가장 많이 배출하였다.[26] 이귀의 일가가 10대 봉군으로 이어졌다.[27] 고려 때 봉군은 3명이다. 원나라에서 봉군된 경우와 봉군된 기록이 족보에서만 확인되는 경우까지 포함하면 총 6명이다.[28] 월사 이정구가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은 후 이 가문에서 문(文)자 시호를 받은 사람이 8대에 걸쳐 18명이다.[29] 유언으로 시호를 내리지 말라고 한 인물은 이귀산, 지억(이상 태자첨사공파), 이철보, 길보, 익보, 조원(祖源), 갑, 면응, 풍익, 세재, 현익, 순익(이상 소부감판사공파)으로 모두 11명이다.[30] 고려 때 시호를 받은 인물은 2명이다.[31] 전체 씨족 중 가장 많이 배출했다.[32] 연안 이씨 255 + 연안 유씨 1(연안인 이종규를 유종규라고 오기함.) = 256명. 문과 급제자 수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을 기준으로 작성하였다. 또한 문과 3회 급제자는 2명(이숙함, 만회), 2회 급제자는 8명(이석형, 주, 소한, 도, 은상, 명식, 지회, 성원)이다.[33] 참고로 규장각 첫 번째 제학이 좌의정 이복원이며, 정조가 규장각 각신 중에서 공로가 많은 4명의 각신을 지명하여 초상화를 그리게 했는데 그중 2명이 연안 이씨로 판서를 지낸 이시원, 조원(肇源) 형제이다.[34] 이 수는 세도 가문으로 유명한 풍양 조씨와 같은 수로 역대 비변사 당상 역임자 중 6%가 연안 이씨다.[35] 연안 이씨는 당시 왕비를 간택할 때 동성을 제외하고 간택하였기에 당연히 왕비를 배출하지 못했고, 후궁조차 배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시 세도가들이 왕실의 인척임을 이용하여 권력을 휘둘렀던 시기에 왕실과의 인척이 없던 가문이 세력이 있었다는 것은 거의 유일하다.[36] 여러 사이트에선 전체 8위로 나와있는데, 이는 남양 홍씨의 문과 급제자 수인 329명이 혈연적인 관계가 전혀 없는 당홍계와 토홍계가 합쳐서 나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개의 가문은 서로 혈연적 관계가 없으므로 문과 급제자 수를 조사할 때 따로 조사해야 한다. 따라서 남양 홍씨 당홍계와 토홍계를 구분해서 조사한다면 문과 급제자 수는 각각 206명과 123명이므로 연안 이씨는 전체 7위이다.[37] 소부감판사공파에서 1집과 태자첨사공파에서 3집을 배출했다. 태자첨사공파의 어느 종원의 말에 따르면 5대 문과 급제 집안과 4대 무과 집안도 존재한다고 한다. 이에 소부감판사공파에서도 1집만 배출한 게 아니라 더 많은 집안을 배출했을 가능성이 높다.[38] 고려 충혜왕 때 지밀직사사를 지낸 연안군(延安君) 이엄(李儼)과 이엄(李儼)의 동생으로 지신사를 지낸 이운(李芸), 충정왕 때 지도첨의사를 지내고 공민왕 때 판삼사사에 오른 연성군(延城君) 오원부원군(五原府院君) 이권(李權)을 중시조로 하여 13개의 파로 보기도 한다.[39] 과거 명칭은 판소부감공파였으나 2002년부터 소부감판사공파로 명칭이 변경됐다.[40] 이지(李漬)의 처가인 전의 이씨 족보에 따르면 일명이 이을년(李乙年)이라고 한다.[41] 이해(李海)라고 하기도 한다.[42] 청백리를 다수 배출한 파이다. 그러나 별제공파(중시조 21세 항렬까지만 수록되어 있다.)와 금성공파(중시조 19세 항렬까지만 수록되어 있는데 19세손인 인물은 무후로 기록되어 있고, 금성공파의 종손이자 태자첨사공파 17세손인 이세온은 슬하에 자손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진위공파(1984년에 발간한 갑자보를 기준으로 최말손(最末孫)이 중시조 28세손으로 모두 189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반 출생이다. 이를 통해 진위공파의 모든 후손들은 이북에 남아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내의정공파(최말손(最末孫)이 중시조 25세손으로 진위공파와 같이 1900년대 초반에 출생한 인물들까지만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는 남계 후손이 끊어진 것으로 보인다.[43] 이 파에서 안산 이씨 경기계가 분관하였다. 또한 수재공파의 지파인 금호공파는 선대 고증 문제로 인해 소부감판사공파 족보와 태자첨사공파 족보에 모두 실렸다. #[!] 土+末[44] 내의원정공파(內醫院正公派)라고도 한다.[45] 1920년에 만들어진 경신보까지는 중시조 18세 항렬까지 수록되어 있었으나 이후에 만들어진 족보부터는 하나의 파로서 인정받지 못해서 사라졌다.[46] 연안 이씨 내에서도 진사공파는 여러 개이기에 구분을 위해 이언벽의 호를 따서 모암공파(慕菴公派)라고 하기도 한다.[47] 소부감판사공파는 분파의 수가 약 70여 개로 그 수가 굉장히 많은데, 이들 중 5개의 파를 제외하면 전부 저헌 이석형으로부터 시작된 저헌(문강)공파에 속한다. 즉 판사공파의 거의 대부분은 저헌공파이다. 여기에 속하지 않는 5개 파는 전서공파, 부정공파, 평장사공파, 생원공파, 감찰공파이다.[48] 문강공파(文康公派)라고도 한다.[49] 관동파(館洞派)라고도 하며, 동촌 이씨가 이 파를 일컫는 말이다.[A]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저헌공파가 아닌 파이다.[전] A B C D E F G 전서공파의 지파이다.[부] A B C D 부정공파의 지파이다.[50] 연평공파(延平公派)라고도 한다.[51] 중추공 인춘공파는 구한말에 태어난 중시조 22세 항렬인 인물까지만 수록되어 있다. 즉, 현재 남계 후손이 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52] 덕량공파는 구한말에 태어난 중시조 21세 항렬인 인물까지만 수록되어 있다. 즉, 현재 남계 후손이 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53] 효생공파는 구한말에 태어난 중시조 21세 항렬인 인물까지만 수록되어 있다. 즉, 현재 남계 후손이 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54] 집성촌이 개성시 개풍구역이다. 흥림은 태학생원이었는데 고려가 멸망하자 부조현(不朝峴) 진봉산 대사암 일대에서 낙향하였다. 흥림이 낙향한 부조현(不朝峴)은 태조가 고려 유신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경덕궁에서 친히 과거를 열었으나 이들은 아무도 응시하지 않고 경덕궁 앞의 고개를 넘어가 버렸다. 이에 그 고개를 부조현(不朝峴)이라 하였고, 부조현(不朝峴) 북쪽에 관을 걸어놓고 넘어갔다 하여 이를 괘관현(掛冠峴)이라 불렀다고 한다.[55] 강원도 통천 일대에 집성촌이 있다고는 하나 1980년대에 편찬된 소부감판사공파 족보에 감찰공파 종원들이 수록되지 않았으므로 남계 후손은 존재하지 않거나 매우 극소수일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로 이덕림의 장증손인 이계장이 문강공 이석형의 차남인 진사 이호에게 입양 갔기 때문에 감찰공파 소속은 아니지만 이덕림의 핏줄은 아직까지 이어진다. 이계장의 후손들은 중추공 인춘공파, 별좌공 봉춘공파, 덕희공파, 덕록공파, 덕량공파, 진충공파, 효생공파로 분파되었다.[56] 황해도 봉산 일대에 집성촌이 있다고 한다.[57] 개성과 평양, 중화군 등에 주로 거주한다. 평장사공파의 하위 지파로는 참판공파, 원언공파, 승사랑공파, 무공랑공파, 인향공파, 인과공파 등이 있다. 그러나 이 많은 파들 중 2000년대 초반에 진행한 평장사공파 계열의 족보 수록은 원언공파와 승사랑공파만이 수록되어 있다. 그 외의 파들의 인물은 1900년대 초반 출생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58] 조선조에 제일 번성한 파가 소부감판사공파라면 고려 때 제일 번성한 파는 물론 현존하는 4개 파들로만 규정했을 때 대장군공파이다. 또한 집성촌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대장군공파의 집성촌의 대부분이 이북이어서 현재 남한에 있는 대장군공파의 후손들은 한국 전쟁 때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많다. 파계 확인이 늦은 것도 이 때문일 수도 있다. 이처럼 파계 확인이 늦은 비슷한 예로는 소부감판사공파 중의 평장사공파가 있는데 평장사공파도 집성촌이 평양에 위치하고 있어서 현재 이남에 있는 평장사공파의 종원들은 대부분 그의 선조가 한국 전쟁 때 북에서 내려온 경우이다.[59]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이 집성촌이다. 또한 해주 이씨가 이 파에서 분관하였다.[60] 황해북도 수안군 도소면 옥검리가 집성촌이다.[61] 찬성사 이질을 파조로 하며, 집성촌은 함경남도 함흥 근방과 정평군 장원면 사수리 일대이다. 정평군 장원면 율천리의 명칭이 이질의 장남인 이흥양의 호 율천(栗川)에서 유래했다고 하며, 정평군 문산면 수천리의 명칭은 이질의 차남인 이중양의 호 수천(洙川)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파는 한 가지 신기한 점이 있는데 바로 대장군공파 족보에서 찬성공파 파조 이질이 영광군사공파 중시조인 지영광군사 이계연의 아들로 나와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연안 이씨 대장군공파 세보에선 찬성공파가 영광군사공파의 분파가 아닌 대장군공파의 분파로 나와있다.[62] 여담으로 연안 이씨 족보인 무진보(戊辰譜)에 따르면 이질의 장남인 이흥양의 처가 인천 이씨 수의교위 부사정 이실지(李實之)의 여식이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당시 대장군공파 종중 회장은 ‘之’가 이름이 아니라 ‘~의’라는 조사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며, 이실지(李實之)의 딸이 아니라 이실(李實)의(之) 딸이라고 주장했다. 더불어 인천 이씨 족보엔 이실(李實)이나 이실지(李實之)에 대한 기록이 없고, 전주 이씨 족보에 영성대군의 삼남이자 호군을 지낸 밀릉군 이실(李實)이 나오므로 이흥양의 처의 본관을 전주로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3] 현감공파(숙형)와 감찰공파는 절손되었다.[64] 현존하지 않는 파들 중 그나마 가장 최근까지 존재했던 파로, 적어도 1900년대 초반까지는 남계 후손이 존재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남계 후손이 끊어진 것으로 보인다.[大] A B C 이부시랑공파, 판도정랑공파, 영광군사공파는 대장군공파에서 분파하였다.[65] 이부시랑공파 중시조 이분양(李汾陽)은 금자광록대부 수태부 문하시중 익대공 김전의 장녀와 혼인하여 슬하에 아들 1명과 딸 2명(장녀는 상서 임성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상서 오전에게 출가했다. 오전에게 출가한 차녀는 딸 2명을 낳았고, 이들의 장녀는 합문지후 김효경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사공 왕씨에게 출가했다.)을 두었는데, 아들이 감찰시승을 지낸 이병이다. 감찰시승 이병은 2남 2녀를 두었고, 딸들은 각각 평강 채씨 삼중대광 도첨의중찬 양정공 채인규의 아들인 삼사사 채우와 장기 정씨 봉선대부 이부낭중 정구와 결혼하였는데, 평강 채씨와 장기 정씨 세보에 부인 이씨의 아버지는 감찰시승 장군 이병이고, 조부는 시랑 이분양, 증조는 대장군 이송이라고 나와있다. 이를 통해 이부시랑 이분양은 대장군 이송의 아들임이 확인된다. 현재 대장군공파 종원은 모두 이분양의 후손들인데, 이는 곧 남한에 현존하는 대장군공파 종원들이 모두 이부시랑공파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로 이부시랑 이분양을 중시조로 하는 이부시랑공파를 따로 기록했는지는 알 수 없다.[66] 현존해올 가능성이 있다. 영광군사공파라 주장하는 사람과 대화해 본 종원이 있다.(!) 당사자 주장으로는 따로 족보까지 발행해왔다고 한다. 이에 종원이 족보 앞면을 복사해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자 당사자가 이 말에 응했으나, 결국 생각을 바꾼 건지 보내지 않고 잠적했다 한다. 추정컨대 집안에서 반대한 것같다고. 관심 있는 사람은 연리 사이트에서 본문 검색어에 ‘추원보’를 검색해볼 것. 연안 이씨 추원보와 관련된 문서 상술했듯이 대장군공파 세보에 이질을 파조로 하는 찬성공파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찬성공파 파조 이질은 영광군사공파 중시조 이계연의 아들이기 때문에 대장군공파 중 찬성공파의 종원들이 영광군사공파라고 주장한 것일 수 있다.[67] 안산 이씨는 경기계와 철산계로 나뉘는데 경기계가 연안 이씨에서 분적한 것이고 철산계는 이희적(李希勣)을 시조로 하는 본관이다. 즉, 서로 다른 성씨이다.[68] 일명은 이원(李元)이다.[69] #[70]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해주로 자는 문욱(文郁), 호는 유춘(有春)·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이다. 벼슬은 현감을 지냈다. 산수, 인물, 영모, 포도 등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발휘하여 김홍도와 쌍벽을 이룬 명수로 평가받기도 했다. 특히 산수화에서는 남종화와 북종화의 화법을 혼합하여 특유의 산수화풍을 이룩했다.[71] 덕수 이씨의 위인 중 한 사람인 율곡 이이의 맏형인 죽곡(竹谷) 이선(李璿)이 해주 이씨로 분적하였다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연안 이씨 대장군공파에서 분적한 것이다.[72] 해주 이씨가 가끔 자신이 어렸을 때 연안 이씨로 자주 들어와서 자신이 연안 이씨로 알고 있는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해주 이씨의 정보가 많이 없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시] A B C D 시조 세대란 시조부터 자신의 대까지를 말한다. 예를 들어 본인이 태자첨사공파 30세손이라면 중조 세대인 30 + 시조 세대인 15를 더해 시조 기준 45세손이라는 것이다. 이 시조 세대는 1958년 발행한 소부감판사공파의 종파인 전서공파 족보에 시조부터 추정 계대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는 연안 이씨 항렬을 통일하기 위해 추정 계대를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데 종중에선 불분명한 기록을 인정하기 어려워 시조 세대로 세대를 보는 것을 금하고 중조 세대를 기준으로 세대를 보는 것을 권하고 있다.[世代] A B C D 시조를 1세로 하여 아래로 내려갈 경우에는 세(世)라 하고, 자신을 빼고 아버지를 1대로 하여 올라가며 계산하는 것을 대(代)라 한다. 즉 자신이 태자첨사공파 30세손(世孫)이라고 한다면 태자첨사공파 중시조 이습홍으로부터 29대손(代孫)이 된다는 것이다.[73] 태자첨사공파에선 23세 구(○九)자 항렬부터 거의 모든 파가 통합된 항렬을 사용한다. 23세 항렬을 보면 재령공파 계열과 현령공파 계열, 소윤공파 계열, 내의정공파 계열만 다른 항렬을 사용했는데, 이는 특별한 경우로 이러한 경우를 제외하면 23세부터 모든 파들이 통합된 항렬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단, 재령공파와 소윤공파의 경우 아직도 독립된 항렬을 사용한다.[현] 현령공파와 현령공파에서 분파한 지파에서만 사용하는 항렬이다.[내] A B C 내의정공파와 내의정공파에서 분파한 지파에서만 사용한 항렬이다.[B] A B C 항렬자 원리를 따라서 '재(載○)'자와 '성(成○)'자를 항렬로 쓰는 집안도 더러 존재한다.[장] 장령공파와 장령공파에서 분파한 지파에서만 사용하는 항렬이다.[74] 인명용 한자가 아니다.[C] A B C D E F G H I J 대장군공파에서 공개한 항렬자이다. 연안 이씨 종중에서 공개한 항렬과 대장군공파에서 공개한 항렬은 조금 다르므로 대장군공파가 아닌 이상 각 파 종중에서 직접 공개한 앞의 항렬자를 따르는 것을 추천한다.[75] ‘범(○範)’자의 경우 진위공파에서도 사용하는 항렬이다.[76] 소부감판사공파는 30세 '동(○東)', '근(○根)'자 항렬부터 각 파가 통합된 항렬을 사용한다.[77] 소부감판사공파 후 평장사공파는 파계 확인이 늦어 1980년대에 들어서 비로소 족보에 기록되었으므로 28세 이전 항렬을 각기 다르게 쓰는 집이 많다. 즉, 여기에 적힌 항렬 외에 다른 항렬도 존재한다는 말이다.[78] 대장군공파도 소부감판사공파 중 평장사공파와 같이 파계 확인이 늦어 항렬을 각기 다르게 쓰는 집이 많다.[79] 찬성사 이질의 차남 이중양의 후손[80] 찬성사 이질의 장남 이흥양의 후손[81] 당나라 황실 집안 성씨이다.[82] 중종 때 간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김유신과 소정방 그리고 이무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고려 말엽에 세워진 장군당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 즉, 연안 이씨 시조와 관련된 책자 기록은 이때가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83] 단, 조선 초중기에 작성한 묘지 비문에선 시조의 이름을 찾을 수 있는데, 그 예로 홍귀달이 지은 충간공 이숭원의 비문과 이정구가 지은 문강공 이석형의 비문 등이 있다.[84] 만약 연안 이씨 시조 이무가 당나라 황족이 확실하다면 공훈과 큰 관계없이 제후의 직위를 받았을 수도 있다.[85] 실제로 연안 이씨 종친회 임원 일부가 2013년 노자의 고향 중국 허난 성에서 열린 세계 이씨 종친대회에 참석했다.[86] 사실 당나라 초기 지배층이었던 이씨(李氏)는 모두 농서 이씨였다. 시조 이무가 당나라에서 왔다는 첫 기록은 1567년에 대제학 정사룡이 찬한 이국주의 묘지명이다.[87] 본래 판삼사사는 종1품 관직이었으나 공민왕 11년에 정1품 벼슬이 되었다. 이수산은 공민왕 11년 이후에 판삼사사를 지냈으므로 정1품이었다.[88]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교수, 대한지리학회 회장 등을 역임한 지리학자이다.[89] 실제로 조선씨족통보에서는 이수산을 시조로 하는 수안 이씨와 이인(李仁)을 시조로 하는 또 다른 수안 이씨가 있다고 나와있다. 이인(李仁)은 고려사와 궁원록에서 이름 확인이 가능한데 궁원록에선 연안군 이엄, 전법판서 이방, 이인(李仁)의 처부(妻父) 이적(李適) 등 다른 연리 인물과 함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90] 현대에 대장군공파 중의 공량공파가 이수산을 파조로 삼는 것을 보아 후손들이 다시 본관을 연안으로 바꾸었거나 안산 이씨 경기계와 태자첨사공파 중의 수재공파처럼 후손 중 일부만 분적했을 수 있다.[91] 연안 이씨 추원보에는 이무의 묘가 강원특별자치도 이천군에 있다고 한다.[92] 여담으로 국립대전현충원 내에는 이귀의 차남인 사우당 이시담의 묘도 존재하는데, 이시담의 묘 역시 이장을 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연안 이씨 문중에서 이시담은 인조 즉위에 공헌하여 어지러운 정사를 바로잡는데 기여했다고 진정을 요청하였고, 박정희의 묘소 존치 재가가 떨어져 사우당 이시담의 묘 역시 보존할 수 있었다.[추원보] A B C D E F G H I J K 연안 이씨 추원보에 기록된 내용으로 추원보는 무엇을 근거로 작성했는지 자료가 부족하고, 다른 가문의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연안 이씨 가문의 세계를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이 있기에 너무 신뢰하지 말고 참고만 하길 바란다. 특히 발해에서 장수를 지냈다는 남북국 시대의 인물들의 기록은 정말 참고만 하길 바란다. 해당 내용에 대한 고찰[93] 이를 대용하기 위해 이북 지방에서 살던 종원들이 갖고 있던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추원보가 존재하나 추원보를 고증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하고, 당시 인쇄술이 부족한 탓인지 시중에 많이 배포되지 않았으며, 생몰년도 등 몇 가지의 오류 때문에 참고 문헌 정도로만 사용되는 실정이다. 연안 이씨 추원보에 대한 고찰[94] 동주 토산현 출신으로 소리(小吏)라는 말단 관리 출신인 것을 보아 이 지역 일대의 호족 출신으로 추정된다. 또한 목종 즉위 이후 고속 승진을 한 것을 보아 목종 즉위의 공신으로 추정된다. 이주헌은 감찰사헌과 내서사인, 서경유수, 상서좌복야 등을 거쳐 상서우복야로 죽었다.[95] 이공저의 부친은 봉어 이사상이고, 조부는 경(卿) 이휘?라고 한다. 이공저는 개성 출신으로 문종 6년에 태어나 인종 15년에 8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묘는 개성 고토성(지금의 황해도 금천군 우봉면)에 있고 평상시에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인종 16년에 돌에 해서(楷書)로 새긴 『이공저묘지명(李公著墓誌銘)』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96] 이제선의 자는 자연(子衍)으로 성종 때 용호위상장군을 지냈다. 이제선은 거란의 2차 침략 때 공을 세워 정국공신에 봉해졌다.[97] 경주 이씨 이인정(李仁挺)은 충렬왕 때 활동했던 인물이다.[98] 여담으로 이경필은 진사로서 과거시험을 봤는데, 과거시험의 문체 양식에 맞지 않게 답안을 작성했음에도 장원으로 급제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지공거였던 김양감과 손관이 현명하지 못하다며 비난을 들었다.[99] 추원보에는 이습홍이 이욱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이욱과 이습홍 사이의 세계를 정확히 상고할 수 없기에 그 사이를 생략하여 이습홍을 이욱의 아들로 적어놓은 것이라 봐야 한다.[100] 일부 족보엔 그가 벽상삼한삼중공신 수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101] 청주 한씨 족보에 의하면 한사기의 처 연안 이씨의 조부는 대장군 이송이고, 증조부는 연안군 이엄이라고 한다.[102] 경상북도 성주군이 아니라 평안남도 성천군이다.[103] 오원은 현재 연안군의 별칭이다.[104] 지금의 완주군 고산면[105] 이에 태자첨사공파 선조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서 동양 최대 규모에 준하는 연화사(물론 연화사보다 규모가 큰 사당이 존재하나 개인 집단이 만든 사당으로는 매우 큰 규모인 것은 확실하다) 철거 문제 등과 관련하여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해당 관련 영상 해당 관련 기사[106] 가선대부 궁내부특진관을 지냈다고 하며, 성균관 명륜당 옆 99칸의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107]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면 처음엔 종6품 관직에 제수된다. 그러나 이석형은 조선에서 유일하게 정6품에 제수되는 특별한 혜택을 받았다.[108] 이 때 부르던 삼장원가의 가사가 전해진다. 다음은 삼장원사의 가사이다.
< 삼장원사 (三壯元詞) >
三壯元詞九天上 (삼장원을 치하하는 구천에서 위에서)
三壯元臣拜稽首 (삼장원한 신하 머리 숙여 절을 올리네)
臣名九皐風徹響 (구고에 떨친 신하의 명성 바람타고 사무치는데)
臣身一毛不自有 (신의 몸은 털끝 하나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네)
王曰來汝文章骨 (임금께서 이르시네 옳아! 그대, 타고난 문장이로다.)
設我竹아래邊豆崇我酒 (내 그대 위해 변두를 차리고 술을 가득 채웠노라)
居然敎坊新門안祭出 (교방에서는 재빠르게 새곡조 만들어 내니)
宮娥信口歌以侑 (궁녀들 멋들어지게 노래하네)
歌聲淸切上蒼蒼 (청아한 노래소리 창창하게 들려오니)
紫皇廳之咨嗟久 (자황께서 들으시고 찬탄 마지 않으시네)
方丈蓬萊一時遍 (방장산과 봉래산을 일시에 두루 거닐은 듯)
五色雲間鸞鶴逗 (오색 구름 사이 사이 난학이 깃들인 듯)
瀏瀏瑞旭度仙掖 (맑고 밝은 상스러운 햇살 선액을 지나가고)
細細和風動宮柳 (솔솔 부는 온화한 바람 궁중 버드나무 흔드네)
天香桂樹長三枝 (천향풍기며 우뚝 자란 계수나무 긴 세 가지는)
月裏精神恩雨後 (달 속에 은우내려 맑은 정기 받았다네)
玉壺瓊漿十分醉 (옥호와 경장으로 맘껏 취하고는)
晩下門안昌門扶左右 (늦어서여 좌우 부축받고 창문 내려오네)
君知筆力參造化 (임금께서 조화를 부리는 듯한 필력을 알아보고)
嗟爾小兒八叉手 (어린 나이에 능란했던 팔차수에 매우 감동하였네)[109] 의원정심규제(醫員正心規制)는 다섯 가지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다음은 그 내용이다.
一 醫者 不殆硏究 深思熟考 勿爲失數之至 (첫째, 의원은 의술의 갈고 닦음을 꾸준히 한다. 심사숙고하여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二 醫員 夫患者 何條件貧富高下 莫論 無次別待遇 診療最善 誠實爲主 (둘째, 의원은 환자의 조건이나 빈부고하를 차별하지 않는다. 진료에 정성과 최선을 다한다.)
三 醫術 仁術也 慈惠濟象 非商道 勿把蓄財之道 (셋째, 의술은 인술이다. 은혜로 베풀며 축재의 상술로 삼지 않는다.)
四 醫道 正直診療中 病原因愆過 秘密保障 一切他方 不許發說 (넷째, 의사의 길은 정직함이다. 진료를 통해 안 병과 환자의 부끄러운 내용을 발설하지 않는다.)
五 醫學者 世間之尊敬人 恒時 以聖心對人 不爲驕慢 治療憑藉 不許他方利用 (다섯째, 의사는 세상 사람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정성으로 대하고 교만하지 않는다. 치료를 빙자하여 다른 이익을 취하지 않는다.)[110] 이 때의 일화가 선조수정실록에 전해지는데, 이후백은 이조판서 시절에 힘써 공론을 숭상하고 어떤 청탁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리 친구라도 자주 와서 안부를 살피면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루는 친척이 찾아와서 벼슬을 부탁하자 이후백은 낯빛이 변하면서 작은 책자 하나를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앞으로 관직에 제수할 사람들 명단이었다. 그 명단엔 친척의 이름도 그 속에 기록되어 있었다. 이후백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기록한 것은 장차 천거하기 위함이었소. 그런데 지금 족친께서 벼슬을 구하는 말을 하고 있으니, 청탁한 이가 벼슬을 얻게 된다면 이는 공정한 도리가 아닐 것이요. 참으로 애석하구려. 그대가 말을 하지 않았다면 벼슬을 얻었을 것인데.”하였다. 그 친척은 매우 부끄러워하면서 물러갔다고 한다. 이후백은 사람을 뽑아 임용할 때는 반드시 합당한지 여부를 두루 물어 보았고, 만약 잘못 등용한 사람이 있으면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내가 나라 일을 그르쳤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575년부터 조정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하였음에도 이후백의 공정한 인사는 시비를 걸 사람이 없었다. <연려실기술>에 나오기를 동인인 김효원은 그가 서인의 심의겸과 친하다고 하여 “후백은 다만 판서의 재목일 뿐이다. 만약 정승이 되기에 이른다면 내가 꼭 논핵할 것이다.”하였으나, 이후백은 나이가 어린 신진 관료들도 싫어하지 않아 정승 물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호조판서를 마지막으로 죽었으니 애석한 일이라고 전한다.[111] 그러나 많은 사전이나 문서에선 양관 대제학을 지냈다고 나와있다. 이를 보아 후에 이후백이 정말 양관 대제학을 역임했거나(정말 역임했다고 가정하면 연안 이씨 대제학(대학사 포함) 역임자는 총 9명이다) 추증된 관직을 생전에 역임했다고 오기한 것으로 추정된다.[112]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干戈誰着老萊衣 (전쟁에 누가 노래자의 색동옷을 입을 수 있겠는가?)
萬事人間意漸微 (만사 인간의 뜻이 점점 희미해져가네.)
地勢已從蘭子盡 (지세는 이미 난자도로부터 끝났고,)
行人不見漢陽歸 (행인은 서울로 돌아가는 이 보이질 않네.)
天心錯莫臨江水 (임금께선 암담하게 압록강을 굽어보고,)
廟算凄凉對夕暉 (묘당의 계책은 처량하게 석양을 바라볼 뿐.)
聞道南兵近乘勝 (남도의 관군이 요즘 승기를 탔다고 들리던데,)
幾時三捷復王畿 (언제나 전승하여 서울을 수복하려나.)[113] 이 때 적은 시가 전해진다. 다음은 시의 내용이다.
東海茫茫萬里長 將軍何事自沈忙 (만리 떨어진 망망한 동해 물결 위에 어찌하여 장군은 스스로 뛰어 드시는고)
殺身己快葬魚腹 埋骨無勞願首陽 (내 몸 흔쾌히 던저 어복에 장사 지냄이여 뼈 묻는 수고 없이 만고충절 지켰구려.)
七里灘解千古咽 九嵐山色百年荒 (예날 신라 박제상을 기리는 망부석아 오늘도 안타까히 허망하게 기다린 백년)
君間漢代李都衛 國士心甘拜大羊 (한나라 이릉장군 생각마저 돋는구려 바다를 향해 삼가 허리 굽혀 절하노라)[114] 수레로 시신을 조각내는 것을 말한다.[115] 이혼(李混)의 경우 아들 이만식(李萬軾)이 후에 소원(訴冤)하여 그 죄는 풀렸다.[116] 이렴(李濂)은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여 노적된 이만구(李萬衢)의 숙부이기도 하다.[117] 후에 이만인(李萬寅)을 포함한 이렴(李濂)의 세 아들은 모두 교살되었다고 한다.[118] 형 이유는 정승은 하지 못하고, 이조판서와 병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재주와 능력은 있었으나 성품이 부박(浮薄)하고 사휼(詐譎)한데다 무식하여 사리에 어긋난 일이 많았고, 임금에게 아첨을 잘해 최고의 총우(寵遇)를 받았다는 등 평판이 매우 안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풍원군 조현명은 그의 죽음을 듣고서는 통곡하며 말하기를 "나라를 위해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 죽었다."라고 하였다.[119] 후술하겠지만 이지서는 괘서를 작성하여 붙인 탓에 모진 고문을 당했고, 고문 끝에 물고(物故)를 당하였다. 또한 이지서에겐 장남 승연, 차남 항연 등 아들 6명이 있었는데, 괘서를 쓴 차남 항연은 섬으로 유배되었다.(참고로 연안 이씨 족보엔 이지서의 아들로 승연과 경연만 기록되어 있으며, 차남 항연과 다른 아들들은 기록되지 않았다. 이승연의 장손 이우홍은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고, 이승연의 차남 이민덕은 이지서의 동생 이지절의 차남 이복연에게 양자를 갔고, 그 후손이 아직까지 존재한다. 이지서의 또 다른 아들 이경연은 슬하에 서자 이현덕을 두었지만, 이현덕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지서의 종친인 이만춘(李萬春) 역시 이인좌의 난과 관련된 조덕규의 처남으로 지목되어 고문을 당했다. 이만춘(李萬春)의 아들 이지경(李之景)(연안 이씨 족보에 의하면 이만춘(李萬春)은 5명의 아들을 두었고 다섯 아들 모두 지(之)자와 일(日)자를 부수로 하는 한자를 돌림자로 사용했다. 그러나 5명의 아들 중 이지경(李之景)이라는 이름은 찾을 수 없다. 이에 이지경(李之景)은 연안 이씨 족보에 기록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변방에 유배되었다. 실록을 보면 이인좌의 난의 역적 이지경(李之暻)을 극형에 처하고, 그 처자도 연좌시켜 노비로 삼으며, 재산은 몰수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지경(李之暻)은 이지경(李之景)의 다른 이름이거나 이지경(李之景)의 일족일 수도 있다. 더불어 실록을 보면 이지간(李之榦)은 역적 민관효와 친하다는 이유 등으로 이만춘(李萬春)과 같이 유배되었다고 나오는데, 이지간(李之榦) 역시 이들의 일족일 수도 있다.[120] 이지시는 이성징의 손자였다. 이로 인해 친척인 이만근(李萬根)과 이만춘(李萬春)이 고문을 당했으며, 진잠현감 이만동(李萬東) 역시 이들의 일파로 몰려 곤장을 맞고 죽었다. 이에 이만동(李萬東)의 부인 우계임과 아들 태연, 두 딸 미순·종순은 경상도 단성의 관노와 관비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우계임의 나이는 41살이었으며, 아들 태연(泰延)은 13살, 두 딸 미순(美順)·종순(終順)은 각각 8살, 5살의 어린 나이였으며 단성 호적에는 이들은 30년이 넘도록 유배지를 떠나지 못하고 단성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아들 태연과 두 딸은 연안 이씨 족보에서 사라지는 불운을 겪었다고 한다. 연안 이씨 족보를 보면 이만동(李萬東)의 아들 이지현(이태연(李泰延)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이는 이태연(李泰延)이 이만동(李萬東)의 아들이라고 상술했던 내용과는 다른데, 자세한 내용은 후술한다.)은 이조연을 양자로 삼았으나 이조연이 자식을 두지 못해서 절손된 것으로 나온다. 참고로 이 이야기에는 한 가지 오류가 있는데 이만동(李萬東)의 아들은 연(延)자 돌림이 아니라 지(之)자 돌림으로 족보에 이만동(李萬東)은 아들 이지현을 둔 것으로 나온다. 따라서 연(延)자 돌림은 이만동(李萬東)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뻘 항렬이다.[121] 이익운은 아들 이명호를 양평에서 장사를 지냈는데, 이익운은 유언으로 천주교를 믿지 말고, 이명호의 곁에 묻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이명호의 절명 뒤, 이익운은 중형 이승운의 셋째 아들인 이명건을 자신의 둘째 아들로 양자 들여 흔치 않게 아들 둘을 양자로 들이게 되었다. 또 이명건의 큰아들인 이원식을 이명호의 아들로 삼아 이명호의 가계는 긴 정성의 뒤에야 비로소 여느 집과 같은 안정된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한국학자료센터를 보면 이원식은 이명발의 아들로 나온다. 즉 후술할 이명불과 이명호, 이명발 모두 동일 인물일 수도 있다.[122] 이 기록에서의 이명불의 이야기는 이명호의 이야기와 정확히 일치한다.[123] 이것은 이가우가 한성판윤을 9번 역임하는 중에도 판의금부사, 이조·예조·병조·형조 판서, 대사헌, 관찰사 등을 두루 거쳤기 때문이다.[124] 중간에 한성부윤으로 있던 이서(李墅)와 윤자(尹慈)의 재임기간이 불분명하기에 이석형의 재임기간을 정확히 단정지을 수는 없다. 정확한 임기를 알 수 없는 이서와 윤자의 재임기간을 1일로 가정했을 때 최장 8년 5개월에 이를 수 있다.[125] 실록에서는 당시 명칭에 따라 '판한성부사' 또는 '한성부윤'으로 기록되어 있다.[126]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있는 어사암이 이때 유래되었다. 어사암은 1894년에 기장현에 있는 해창에서 양곡을 가득 실은 조운선이 부산포로 가다 이곳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침몰하는데 흉년으로 굶주리던 어촌 주민들은 잠수질하여 바다 밑에 흩어져 있던 곡식을 건져서 먹는다. 그러나 이 일이 현감에게 알려지며 주민들은 모두 절도 혐의로 기장 관아에 구금되고, 마을 집집을 수색하여 곡식을 모두 거둬 갔으며, 옥에 갇힌 주민은 가혹 행위로 죽기까지 했다. 이 일이 고종의 귀까지 들리자 이도재를 어사로 파견하여 볏섬 도난 사건과 고문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도록 했다. 어사가 온다는 소식을 접한 어촌 주민들은 기장 관기 월매로 하여금 자신들의 어려운 사정을 얘기하고, 관아에서 가혹 행위로 도난 물량이 많은 것처럼 허위로 꾸며 주민들의 재산을 수탈하려 했다고 말하게 했다. 이에 월매는 어사가 현장을 조사하기 위해 매 바위를 찾을 때 월매도 동행하여 춤과 노래를 선보였고, 어사는 흥에 겨워 ‘천공경무물(天空更無物) 해활난위시(海闊難爲詩) 환구구만리(環球九萬里) 일위가항지(一葦可航之)’(하늘은 비어서 다시 형상하기 어렵고, 바다는 넓어서 시를 짓기 어렵네. 세상 구만리에, 한 조각 갈대배로 항해해 갈 뿐이라네)라는 시를 매 바위에 새겨 넣어 결국 이도재의 현명한 선택으로 절도 죄가 성립되지 않아 주민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이에 고마움을 느낀 주민들은 1883년 생사단을 세워 비석에 시를 짓고, 이도재의 생일마다 축원을 올렸다고 전해진다. 당시 비석에 적은 시는 아직까지도 비석에 적혀 있어 당시 어민들이 이도재에게 느꼈던 무한한 고마움을 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은 ‘우리 고을에 왜 이리도 늦게 오셨나, 그래도 하늘은 기필코 도우시네, 수 많은 폐단들을 모두 바로 잡으시니, 천추에 영원토록 기리오리다.’ 이다.[127] 전라감사 재직 당시 섬사람들의 여러 고충을 해소시키기 위해 강진, 해남, 영암으로 흩어져 있던 섬들을 묶어서 섬사람들 공동체인 완도군을 신설하기도 했다. 이에 사람들이 이도재에 대한 고마움에 영세불망비를 고금도에 세웠다.[128] 이 글을 보아 다행히 후대가 끊기지 않고 이어진 것 같다.[129] 택당 이식과는 동명이인이며, 정국공신 이곤의 후손이다.[130] 지금은 완주군 용진읍과 삼례읍으로 각각 편입됐다.[131] 1919년 3월 17일 완주군 초포면 3·1 운동이 일어난 곳이다.[132] 태자첨사공파 중의 진사공파의 집성촌이다.[133] 현 남포시 용강군[134] 여담으로 그와 그의 어머니는 대한민국 첫 모자 국회의원이다.[135] 신천 강씨 족보에 강인은 보육의 손자로 기록되어 있으나, 보육은 신라 때 인물이고, 강인은 고려 후기의 인물이므로 강인은 보육의 손자가 아니라 후손으로 봐야할 것이다.[136] 전법판서 이방은 광산 김씨 족보 등 사료에 의하면 전법판서 외에 사헌부감찰을 지냈고, 연리세보(延李世譜)에 7세로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기 상으로 보아 시조부터 7세가 아닌 어떤 파를 기준으로 7세손으로 기록된 거 같다. 그러나 이방이 어떤 파에서 분파한 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연안 이씨 추원보에 의하면 이방의 6대조는 정국공신 이제선이다. 이에 추원보의 내용이 맞는다면 이제선을 파조로 하는 지파가 있었을 것이다. 즉 과거 연안 이씨 족보 제작 당시에도 연안 이씨 종중에서 모르는 파와 세계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기록이 확실한지에 대해선 의문점이 있다. 만약 기록이 확실하다고 해도 이방의 처 해주 오씨도 해주 오씨의 시조 오인유의 7세손이었으므로 7세손이라고 기록한 것이 이방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점도 있다.[137] 현재까지 밝혀진 밀직부사 이득량의 딸은 두 명인데, 한 명은 앞서 서술한 홍승연 처 연안 이씨고, 나머지 한 명은 박회의 처 연안 이씨다.[138] 참고로 이수창의 장녀는 영천 이씨 보문각제학 이석지에게 출가했다.[139] 현재 상산 김씨 족보에 김균의 부인은 황씨만 기록되어 있고, 이씨는 누락되어 있다.[140] 이계손(係孫)의 현손이다.[141] 단, 묘비명에선 이숭원의 조상 이무(茂)가 단양 이씨 단산부원군 이무로 혼동되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시 계대를 잃어버린 탓에 발생한 문제로 추측된다.[142] 상술한 도첨의찬성사 이무(茂)와 이해의 조상인 밀직부사 이무(茂)가 동일 인물이라면 예부상서공파와 통례문부사공파는 같은 집안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143] 이삼산은 삼언(三彦), 삼산(三山)의 다른 이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삼산은 단종 2년 정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직제학을 지냈다. # 그러나 현재 실존하는 파에선 파계를 고증할 수 없으므로 미확인 6개 파 중의 인물이거나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은 파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144] 당시 임금은 숙종이었다.[145] 이는 5년 뒤에 일어나는 신미양요의 주된 원인이다.[146] 철인왕후의 생모는 민무현의 딸 흥양부부인 민씨이다. 본래 김문근은 효간공 이용수의 딸 연양부부인 이씨와 결혼하였으나 연양부부인 이씨가 본인 소생의 자녀 없이 26세의 나이로 일찍 죽자 흥양부부인 민씨와 재혼하여 철인왕후를 낳은 것이다. 즉 연양부부인 이씨는 철인왕후의 친모가 아니라 재취(再娶)의 자식이 그 아버지의 전처를 이르는 말인 전모(前母)이다.[147] 근거 자료[148] 조선조에서 조금 과장하자면 환갑잔치할 확률은 20%라고 하며, 조선 왕의 평균 수명은 46.1세였으며 서민들의 평균 수명은 35세 혹은 그 이하라고 한다. 그러나 연안 이씨 인물들은 대부분 장수했는데 고려 인종 대에 태어난 소부감판사공파 중시조인 이현려도 희종 2년 까지 살아 81세에 사망했고 조선 초 검교좌의정을 지낸 좌의정치사 이귀령은 무려 94세 때 사망했다. 비록 명예직이긴 했지만 이귀령은 조선에서 정승 직함을 달았던 사람 중 제일 오래 살았던 인물이다. 이 외에도 많은 인물이 대부분이 7~80대까지 살았으며 조선 시대 70대를 넘긴 종2품 당상관들만 들어갈 수 있는 기로소에 들어간 인물이 21명을 기록하여 전체 가문 중 2위라는 매우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149] 불당골 안에는 태자첨사공파 2세부터 5세까지 위패를 모신 사당인 연화사(延和祠)와 연화사(延華祠)가 있었으나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모두 철거됐다. 또한 불당골은 모든 풍수가들이 불당골이 명당 중 명당이라고 명당의 표본으로 삼고 있다.[150] 이현려는 현재 영정도 전해진다. #[151]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 외할아버지[152] 생원과, 진사과, 식년문과[153] 교지와 교지함, 시호족자 등 6점의 유물이다.[154] 참고문헌[155]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어드리는 행위[156] 마찬가지로 동호리 이씨 고가도 연안 이씨의 고택이다. 동호 이지유의 손자 이진악이 조부의 호를 따서 고택을 지은 것이다. 또한 동호리 지명 자체가 이지유의 호에서 유래된 것이다.[157] 출처:동아일보 젊은 그들 106화[158] 현 강원특별자치도[159] 현 전북특별자치도[160] 참고로 북한에서는 면이라는 행정구역을 쓰지 않는다. 또한 대한민국의 법률상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북한에 위치한 지역의 이름을 대한민국의 이북5도위원회가 규정한 행정구역을 따로 사용하고 있다. 아래의 명칭은 북한 땅에 있는 대한민국의 이북5도위원회가 규정한 행정구역의 명칭이다. 또한 이 행정구역은 이름이 같은 북한 당국이 관할하는 행정구역과 면적의 차이도 큰데, 일부 문서에서 행정구역 이름만 같고 관할구역이 다른 북한의 행정구역을 대입하는 오류가 종종 있다.[161] 개풍과 개성에선 소부감판사공파 중 생원공파 계열과 태자첨사공파 중 소윤공파, 재령공파 계열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황해도에선 대장군공파와 태자첨사공파, 소부감판사공파 계열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미수복 강원도 쪽에선 소부감판사공파 계열의 후손이 세거하고, 평양을 비롯해 평안도 쪽에선 대장군공파와 소부감판사공파 중 평장사공파 계열이 세거하고, 함경남도 쪽에선 대장군공파와 태자첨사공파 중 강호공파(조선 초 좌의정을 지냈던 이귀령의 후손들로 태자첨사공파 중 별제공파, 금성공파, 이천공파, 소윤공파가 속한다.) 계열의 후손들이 세거한다.[162] 단, 대종회에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운영하는 홈페이지다.[163] 태자첨사공파 중 의정공파는 전공판서 이원발을 파조로 하는 파이다. 현재 태자첨사공파 종원은 모두 이원발의 후손이므로 태자첨사공파 카페라고 봐도 무방하다.[164] 이 카페의 경우 연안 이씨 관련 누리집 중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으나, 카페 관리자의 작고로 신규 회원의 카페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 삼장원사 (三壯元詞) >
三壯元詞九天上 (삼장원을 치하하는 구천에서 위에서)
三壯元臣拜稽首 (삼장원한 신하 머리 숙여 절을 올리네)
臣名九皐風徹響 (구고에 떨친 신하의 명성 바람타고 사무치는데)
臣身一毛不自有 (신의 몸은 털끝 하나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네)
王曰來汝文章骨 (임금께서 이르시네 옳아! 그대, 타고난 문장이로다.)
設我竹아래邊豆崇我酒 (내 그대 위해 변두를 차리고 술을 가득 채웠노라)
居然敎坊新門안祭出 (교방에서는 재빠르게 새곡조 만들어 내니)
宮娥信口歌以侑 (궁녀들 멋들어지게 노래하네)
歌聲淸切上蒼蒼 (청아한 노래소리 창창하게 들려오니)
紫皇廳之咨嗟久 (자황께서 들으시고 찬탄 마지 않으시네)
方丈蓬萊一時遍 (방장산과 봉래산을 일시에 두루 거닐은 듯)
五色雲間鸞鶴逗 (오색 구름 사이 사이 난학이 깃들인 듯)
瀏瀏瑞旭度仙掖 (맑고 밝은 상스러운 햇살 선액을 지나가고)
細細和風動宮柳 (솔솔 부는 온화한 바람 궁중 버드나무 흔드네)
天香桂樹長三枝 (천향풍기며 우뚝 자란 계수나무 긴 세 가지는)
月裏精神恩雨後 (달 속에 은우내려 맑은 정기 받았다네)
玉壺瓊漿十分醉 (옥호와 경장으로 맘껏 취하고는)
晩下門안昌門扶左右 (늦어서여 좌우 부축받고 창문 내려오네)
君知筆力參造化 (임금께서 조화를 부리는 듯한 필력을 알아보고)
嗟爾小兒八叉手 (어린 나이에 능란했던 팔차수에 매우 감동하였네)[109] 의원정심규제(醫員正心規制)는 다섯 가지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다음은 그 내용이다.
一 醫者 不殆硏究 深思熟考 勿爲失數之至 (첫째, 의원은 의술의 갈고 닦음을 꾸준히 한다. 심사숙고하여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二 醫員 夫患者 何條件貧富高下 莫論 無次別待遇 診療最善 誠實爲主 (둘째, 의원은 환자의 조건이나 빈부고하를 차별하지 않는다. 진료에 정성과 최선을 다한다.)
三 醫術 仁術也 慈惠濟象 非商道 勿把蓄財之道 (셋째, 의술은 인술이다. 은혜로 베풀며 축재의 상술로 삼지 않는다.)
四 醫道 正直診療中 病原因愆過 秘密保障 一切他方 不許發說 (넷째, 의사의 길은 정직함이다. 진료를 통해 안 병과 환자의 부끄러운 내용을 발설하지 않는다.)
五 醫學者 世間之尊敬人 恒時 以聖心對人 不爲驕慢 治療憑藉 不許他方利用 (다섯째, 의사는 세상 사람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정성으로 대하고 교만하지 않는다. 치료를 빙자하여 다른 이익을 취하지 않는다.)[110] 이 때의 일화가 선조수정실록에 전해지는데, 이후백은 이조판서 시절에 힘써 공론을 숭상하고 어떤 청탁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리 친구라도 자주 와서 안부를 살피면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루는 친척이 찾아와서 벼슬을 부탁하자 이후백은 낯빛이 변하면서 작은 책자 하나를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앞으로 관직에 제수할 사람들 명단이었다. 그 명단엔 친척의 이름도 그 속에 기록되어 있었다. 이후백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기록한 것은 장차 천거하기 위함이었소. 그런데 지금 족친께서 벼슬을 구하는 말을 하고 있으니, 청탁한 이가 벼슬을 얻게 된다면 이는 공정한 도리가 아닐 것이요. 참으로 애석하구려. 그대가 말을 하지 않았다면 벼슬을 얻었을 것인데.”하였다. 그 친척은 매우 부끄러워하면서 물러갔다고 한다. 이후백은 사람을 뽑아 임용할 때는 반드시 합당한지 여부를 두루 물어 보았고, 만약 잘못 등용한 사람이 있으면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내가 나라 일을 그르쳤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575년부터 조정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하였음에도 이후백의 공정한 인사는 시비를 걸 사람이 없었다. <연려실기술>에 나오기를 동인인 김효원은 그가 서인의 심의겸과 친하다고 하여 “후백은 다만 판서의 재목일 뿐이다. 만약 정승이 되기에 이른다면 내가 꼭 논핵할 것이다.”하였으나, 이후백은 나이가 어린 신진 관료들도 싫어하지 않아 정승 물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호조판서를 마지막으로 죽었으니 애석한 일이라고 전한다.[111] 그러나 많은 사전이나 문서에선 양관 대제학을 지냈다고 나와있다. 이를 보아 후에 이후백이 정말 양관 대제학을 역임했거나(정말 역임했다고 가정하면 연안 이씨 대제학(대학사 포함) 역임자는 총 9명이다) 추증된 관직을 생전에 역임했다고 오기한 것으로 추정된다.[112]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干戈誰着老萊衣 (전쟁에 누가 노래자의 색동옷을 입을 수 있겠는가?)
萬事人間意漸微 (만사 인간의 뜻이 점점 희미해져가네.)
地勢已從蘭子盡 (지세는 이미 난자도로부터 끝났고,)
行人不見漢陽歸 (행인은 서울로 돌아가는 이 보이질 않네.)
天心錯莫臨江水 (임금께선 암담하게 압록강을 굽어보고,)
廟算凄凉對夕暉 (묘당의 계책은 처량하게 석양을 바라볼 뿐.)
聞道南兵近乘勝 (남도의 관군이 요즘 승기를 탔다고 들리던데,)
幾時三捷復王畿 (언제나 전승하여 서울을 수복하려나.)[113] 이 때 적은 시가 전해진다. 다음은 시의 내용이다.
東海茫茫萬里長 將軍何事自沈忙 (만리 떨어진 망망한 동해 물결 위에 어찌하여 장군은 스스로 뛰어 드시는고)
殺身己快葬魚腹 埋骨無勞願首陽 (내 몸 흔쾌히 던저 어복에 장사 지냄이여 뼈 묻는 수고 없이 만고충절 지켰구려.)
七里灘解千古咽 九嵐山色百年荒 (예날 신라 박제상을 기리는 망부석아 오늘도 안타까히 허망하게 기다린 백년)
君間漢代李都衛 國士心甘拜大羊 (한나라 이릉장군 생각마저 돋는구려 바다를 향해 삼가 허리 굽혀 절하노라)[114] 수레로 시신을 조각내는 것을 말한다.[115] 이혼(李混)의 경우 아들 이만식(李萬軾)이 후에 소원(訴冤)하여 그 죄는 풀렸다.[116] 이렴(李濂)은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여 노적된 이만구(李萬衢)의 숙부이기도 하다.[117] 후에 이만인(李萬寅)을 포함한 이렴(李濂)의 세 아들은 모두 교살되었다고 한다.[118] 형 이유는 정승은 하지 못하고, 이조판서와 병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재주와 능력은 있었으나 성품이 부박(浮薄)하고 사휼(詐譎)한데다 무식하여 사리에 어긋난 일이 많았고, 임금에게 아첨을 잘해 최고의 총우(寵遇)를 받았다는 등 평판이 매우 안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풍원군 조현명은 그의 죽음을 듣고서는 통곡하며 말하기를 "나라를 위해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 죽었다."라고 하였다.[119] 후술하겠지만 이지서는 괘서를 작성하여 붙인 탓에 모진 고문을 당했고, 고문 끝에 물고(物故)를 당하였다. 또한 이지서에겐 장남 승연, 차남 항연 등 아들 6명이 있었는데, 괘서를 쓴 차남 항연은 섬으로 유배되었다.(참고로 연안 이씨 족보엔 이지서의 아들로 승연과 경연만 기록되어 있으며, 차남 항연과 다른 아들들은 기록되지 않았다. 이승연의 장손 이우홍은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고, 이승연의 차남 이민덕은 이지서의 동생 이지절의 차남 이복연에게 양자를 갔고, 그 후손이 아직까지 존재한다. 이지서의 또 다른 아들 이경연은 슬하에 서자 이현덕을 두었지만, 이현덕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지서의 종친인 이만춘(李萬春) 역시 이인좌의 난과 관련된 조덕규의 처남으로 지목되어 고문을 당했다. 이만춘(李萬春)의 아들 이지경(李之景)(연안 이씨 족보에 의하면 이만춘(李萬春)은 5명의 아들을 두었고 다섯 아들 모두 지(之)자와 일(日)자를 부수로 하는 한자를 돌림자로 사용했다. 그러나 5명의 아들 중 이지경(李之景)이라는 이름은 찾을 수 없다. 이에 이지경(李之景)은 연안 이씨 족보에 기록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변방에 유배되었다. 실록을 보면 이인좌의 난의 역적 이지경(李之暻)을 극형에 처하고, 그 처자도 연좌시켜 노비로 삼으며, 재산은 몰수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지경(李之暻)은 이지경(李之景)의 다른 이름이거나 이지경(李之景)의 일족일 수도 있다. 더불어 실록을 보면 이지간(李之榦)은 역적 민관효와 친하다는 이유 등으로 이만춘(李萬春)과 같이 유배되었다고 나오는데, 이지간(李之榦) 역시 이들의 일족일 수도 있다.[120] 이지시는 이성징의 손자였다. 이로 인해 친척인 이만근(李萬根)과 이만춘(李萬春)이 고문을 당했으며, 진잠현감 이만동(李萬東) 역시 이들의 일파로 몰려 곤장을 맞고 죽었다. 이에 이만동(李萬東)의 부인 우계임과 아들 태연, 두 딸 미순·종순은 경상도 단성의 관노와 관비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우계임의 나이는 41살이었으며, 아들 태연(泰延)은 13살, 두 딸 미순(美順)·종순(終順)은 각각 8살, 5살의 어린 나이였으며 단성 호적에는 이들은 30년이 넘도록 유배지를 떠나지 못하고 단성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아들 태연과 두 딸은 연안 이씨 족보에서 사라지는 불운을 겪었다고 한다. 연안 이씨 족보를 보면 이만동(李萬東)의 아들 이지현(이태연(李泰延)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이는 이태연(李泰延)이 이만동(李萬東)의 아들이라고 상술했던 내용과는 다른데, 자세한 내용은 후술한다.)은 이조연을 양자로 삼았으나 이조연이 자식을 두지 못해서 절손된 것으로 나온다. 참고로 이 이야기에는 한 가지 오류가 있는데 이만동(李萬東)의 아들은 연(延)자 돌림이 아니라 지(之)자 돌림으로 족보에 이만동(李萬東)은 아들 이지현을 둔 것으로 나온다. 따라서 연(延)자 돌림은 이만동(李萬東)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뻘 항렬이다.[121] 이익운은 아들 이명호를 양평에서 장사를 지냈는데, 이익운은 유언으로 천주교를 믿지 말고, 이명호의 곁에 묻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이명호의 절명 뒤, 이익운은 중형 이승운의 셋째 아들인 이명건을 자신의 둘째 아들로 양자 들여 흔치 않게 아들 둘을 양자로 들이게 되었다. 또 이명건의 큰아들인 이원식을 이명호의 아들로 삼아 이명호의 가계는 긴 정성의 뒤에야 비로소 여느 집과 같은 안정된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한국학자료센터를 보면 이원식은 이명발의 아들로 나온다. 즉 후술할 이명불과 이명호, 이명발 모두 동일 인물일 수도 있다.[122] 이 기록에서의 이명불의 이야기는 이명호의 이야기와 정확히 일치한다.[123] 이것은 이가우가 한성판윤을 9번 역임하는 중에도 판의금부사, 이조·예조·병조·형조 판서, 대사헌, 관찰사 등을 두루 거쳤기 때문이다.[124] 중간에 한성부윤으로 있던 이서(李墅)와 윤자(尹慈)의 재임기간이 불분명하기에 이석형의 재임기간을 정확히 단정지을 수는 없다. 정확한 임기를 알 수 없는 이서와 윤자의 재임기간을 1일로 가정했을 때 최장 8년 5개월에 이를 수 있다.[125] 실록에서는 당시 명칭에 따라 '판한성부사' 또는 '한성부윤'으로 기록되어 있다.[126]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있는 어사암이 이때 유래되었다. 어사암은 1894년에 기장현에 있는 해창에서 양곡을 가득 실은 조운선이 부산포로 가다 이곳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침몰하는데 흉년으로 굶주리던 어촌 주민들은 잠수질하여 바다 밑에 흩어져 있던 곡식을 건져서 먹는다. 그러나 이 일이 현감에게 알려지며 주민들은 모두 절도 혐의로 기장 관아에 구금되고, 마을 집집을 수색하여 곡식을 모두 거둬 갔으며, 옥에 갇힌 주민은 가혹 행위로 죽기까지 했다. 이 일이 고종의 귀까지 들리자 이도재를 어사로 파견하여 볏섬 도난 사건과 고문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도록 했다. 어사가 온다는 소식을 접한 어촌 주민들은 기장 관기 월매로 하여금 자신들의 어려운 사정을 얘기하고, 관아에서 가혹 행위로 도난 물량이 많은 것처럼 허위로 꾸며 주민들의 재산을 수탈하려 했다고 말하게 했다. 이에 월매는 어사가 현장을 조사하기 위해 매 바위를 찾을 때 월매도 동행하여 춤과 노래를 선보였고, 어사는 흥에 겨워 ‘천공경무물(天空更無物) 해활난위시(海闊難爲詩) 환구구만리(環球九萬里) 일위가항지(一葦可航之)’(하늘은 비어서 다시 형상하기 어렵고, 바다는 넓어서 시를 짓기 어렵네. 세상 구만리에, 한 조각 갈대배로 항해해 갈 뿐이라네)라는 시를 매 바위에 새겨 넣어 결국 이도재의 현명한 선택으로 절도 죄가 성립되지 않아 주민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이에 고마움을 느낀 주민들은 1883년 생사단을 세워 비석에 시를 짓고, 이도재의 생일마다 축원을 올렸다고 전해진다. 당시 비석에 적은 시는 아직까지도 비석에 적혀 있어 당시 어민들이 이도재에게 느꼈던 무한한 고마움을 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은 ‘우리 고을에 왜 이리도 늦게 오셨나, 그래도 하늘은 기필코 도우시네, 수 많은 폐단들을 모두 바로 잡으시니, 천추에 영원토록 기리오리다.’ 이다.[127] 전라감사 재직 당시 섬사람들의 여러 고충을 해소시키기 위해 강진, 해남, 영암으로 흩어져 있던 섬들을 묶어서 섬사람들 공동체인 완도군을 신설하기도 했다. 이에 사람들이 이도재에 대한 고마움에 영세불망비를 고금도에 세웠다.[128] 이 글을 보아 다행히 후대가 끊기지 않고 이어진 것 같다.[129] 택당 이식과는 동명이인이며, 정국공신 이곤의 후손이다.[130] 지금은 완주군 용진읍과 삼례읍으로 각각 편입됐다.[131] 1919년 3월 17일 완주군 초포면 3·1 운동이 일어난 곳이다.[132] 태자첨사공파 중의 진사공파의 집성촌이다.[133] 현 남포시 용강군[134] 여담으로 그와 그의 어머니는 대한민국 첫 모자 국회의원이다.[135] 신천 강씨 족보에 강인은 보육의 손자로 기록되어 있으나, 보육은 신라 때 인물이고, 강인은 고려 후기의 인물이므로 강인은 보육의 손자가 아니라 후손으로 봐야할 것이다.[136] 전법판서 이방은 광산 김씨 족보 등 사료에 의하면 전법판서 외에 사헌부감찰을 지냈고, 연리세보(延李世譜)에 7세로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기 상으로 보아 시조부터 7세가 아닌 어떤 파를 기준으로 7세손으로 기록된 거 같다. 그러나 이방이 어떤 파에서 분파한 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연안 이씨 추원보에 의하면 이방의 6대조는 정국공신 이제선이다. 이에 추원보의 내용이 맞는다면 이제선을 파조로 하는 지파가 있었을 것이다. 즉 과거 연안 이씨 족보 제작 당시에도 연안 이씨 종중에서 모르는 파와 세계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기록이 확실한지에 대해선 의문점이 있다. 만약 기록이 확실하다고 해도 이방의 처 해주 오씨도 해주 오씨의 시조 오인유의 7세손이었으므로 7세손이라고 기록한 것이 이방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점도 있다.[137] 현재까지 밝혀진 밀직부사 이득량의 딸은 두 명인데, 한 명은 앞서 서술한 홍승연 처 연안 이씨고, 나머지 한 명은 박회의 처 연안 이씨다.[138] 참고로 이수창의 장녀는 영천 이씨 보문각제학 이석지에게 출가했다.[139] 현재 상산 김씨 족보에 김균의 부인은 황씨만 기록되어 있고, 이씨는 누락되어 있다.[140] 이계손(係孫)의 현손이다.[141] 단, 묘비명에선 이숭원의 조상 이무(茂)가 단양 이씨 단산부원군 이무로 혼동되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시 계대를 잃어버린 탓에 발생한 문제로 추측된다.[142] 상술한 도첨의찬성사 이무(茂)와 이해의 조상인 밀직부사 이무(茂)가 동일 인물이라면 예부상서공파와 통례문부사공파는 같은 집안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143] 이삼산은 삼언(三彦), 삼산(三山)의 다른 이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삼산은 단종 2년 정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직제학을 지냈다. # 그러나 현재 실존하는 파에선 파계를 고증할 수 없으므로 미확인 6개 파 중의 인물이거나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은 파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144] 당시 임금은 숙종이었다.[145] 이는 5년 뒤에 일어나는 신미양요의 주된 원인이다.[146] 철인왕후의 생모는 민무현의 딸 흥양부부인 민씨이다. 본래 김문근은 효간공 이용수의 딸 연양부부인 이씨와 결혼하였으나 연양부부인 이씨가 본인 소생의 자녀 없이 26세의 나이로 일찍 죽자 흥양부부인 민씨와 재혼하여 철인왕후를 낳은 것이다. 즉 연양부부인 이씨는 철인왕후의 친모가 아니라 재취(再娶)의 자식이 그 아버지의 전처를 이르는 말인 전모(前母)이다.[147] 근거 자료[148] 조선조에서 조금 과장하자면 환갑잔치할 확률은 20%라고 하며, 조선 왕의 평균 수명은 46.1세였으며 서민들의 평균 수명은 35세 혹은 그 이하라고 한다. 그러나 연안 이씨 인물들은 대부분 장수했는데 고려 인종 대에 태어난 소부감판사공파 중시조인 이현려도 희종 2년 까지 살아 81세에 사망했고 조선 초 검교좌의정을 지낸 좌의정치사 이귀령은 무려 94세 때 사망했다. 비록 명예직이긴 했지만 이귀령은 조선에서 정승 직함을 달았던 사람 중 제일 오래 살았던 인물이다. 이 외에도 많은 인물이 대부분이 7~80대까지 살았으며 조선 시대 70대를 넘긴 종2품 당상관들만 들어갈 수 있는 기로소에 들어간 인물이 21명을 기록하여 전체 가문 중 2위라는 매우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149] 불당골 안에는 태자첨사공파 2세부터 5세까지 위패를 모신 사당인 연화사(延和祠)와 연화사(延華祠)가 있었으나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모두 철거됐다. 또한 불당골은 모든 풍수가들이 불당골이 명당 중 명당이라고 명당의 표본으로 삼고 있다.[150] 이현려는 현재 영정도 전해진다. #[151]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 외할아버지[152] 생원과, 진사과, 식년문과[153] 교지와 교지함, 시호족자 등 6점의 유물이다.[154] 참고문헌[155]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어드리는 행위[156] 마찬가지로 동호리 이씨 고가도 연안 이씨의 고택이다. 동호 이지유의 손자 이진악이 조부의 호를 따서 고택을 지은 것이다. 또한 동호리 지명 자체가 이지유의 호에서 유래된 것이다.[157] 출처:동아일보 젊은 그들 106화[158] 현 강원특별자치도[159] 현 전북특별자치도[160] 참고로 북한에서는 면이라는 행정구역을 쓰지 않는다. 또한 대한민국의 법률상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북한에 위치한 지역의 이름을 대한민국의 이북5도위원회가 규정한 행정구역을 따로 사용하고 있다. 아래의 명칭은 북한 땅에 있는 대한민국의 이북5도위원회가 규정한 행정구역의 명칭이다. 또한 이 행정구역은 이름이 같은 북한 당국이 관할하는 행정구역과 면적의 차이도 큰데, 일부 문서에서 행정구역 이름만 같고 관할구역이 다른 북한의 행정구역을 대입하는 오류가 종종 있다.[161] 개풍과 개성에선 소부감판사공파 중 생원공파 계열과 태자첨사공파 중 소윤공파, 재령공파 계열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황해도에선 대장군공파와 태자첨사공파, 소부감판사공파 계열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미수복 강원도 쪽에선 소부감판사공파 계열의 후손이 세거하고, 평양을 비롯해 평안도 쪽에선 대장군공파와 소부감판사공파 중 평장사공파 계열이 세거하고, 함경남도 쪽에선 대장군공파와 태자첨사공파 중 강호공파(조선 초 좌의정을 지냈던 이귀령의 후손들로 태자첨사공파 중 별제공파, 금성공파, 이천공파, 소윤공파가 속한다.) 계열의 후손들이 세거한다.[162] 단, 대종회에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운영하는 홈페이지다.[163] 태자첨사공파 중 의정공파는 전공판서 이원발을 파조로 하는 파이다. 현재 태자첨사공파 종원은 모두 이원발의 후손이므로 태자첨사공파 카페라고 봐도 무방하다.[164] 이 카페의 경우 연안 이씨 관련 누리집 중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으나, 카페 관리자의 작고로 신규 회원의 카페 활동이 불가능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