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존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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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존창(李存昌)
이명
이단원(李端源)
본관
경주 이씨[1]
출생
1752년(영조 28)
충청도 천안군 신종면 호동리
(현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105-3번지)[2]
사망
1801년(순조 1)
충청도 공주목
(현 충청남도 공주시)
종교
기독교 (천주교)
세례명
루도비코 곤자가
사인
참수형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이존창(李存昌, 1752년 ~ 1801년)은 한국 가톨릭의 순교자이다. 세례명은 루도비코 곤자가이며 이단원(李端源)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 후기 신유박해 당시에 순교한 천주교인으로서 '내포의 사도'라 불릴 정도로 전교 상의 공헌이 지대한 인물이다. 단적으로 <한국천주교회사>를 저술한 프랑스인 달레(Dallet, C.C.) 신부는 "오늘 우리 교우 대부분들이, 그가 그때 입교시킨 자들의 후손"이라고 언급하였다.


2. 생애[편집]


1752년(영조 28) 충청도 천안군 신종면 호동리(현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105-3번지)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초기 천주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권일신(權日身)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 뒤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하에 신부가 되어 충청도 지방을 맡아 전교에 힘쓴 결과 '내포(內浦)의 사도'로 불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가성직제도가 교리에 어긋남을 알고는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하여 윤유일(尹有一)에게 여비를 주어 청나라 북경에 보냄으로써 마침내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를 맞아들일 수 있게 하였다.[3]

그러나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혹심한 고문에 못 이겨 한 때 배교하여 홍산[4]으로 이사 갔으나, 전날의 배교를 뉘우치고는 더욱 열심히 전교하였다. 그 결과 내포와 그 인근지방은 다른 어느 고장보다도 천주교가 가장 성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의 할머니는 그의 조카딸이 되고,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그 생질의 손자가 되는 등, 조선 말기의 신자 중 대부분이 그가 입교시킨 신자들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으리만큼 그의 전교상의 공헌은 지대하였다.

그러다가 1795년 말에 그는 다시 체포되어 고향인 천안으로 옮겨져 6년 동안 연금생활을 하던 중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다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4월 8일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아 공주감영으로 이송되어 참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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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출생지 신종리 105-3번지에 이존창생가가 남아 있다.[3] 가성직제도의 문제점에 관해서는 나홀로 신앙 참조.[4]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의 일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