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합(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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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창당 배경
2.2. 창당 직후~1차 세계대전
2.3. 몰락과 재창당
3. 주요 인물
3.1. 창립자
3.2. 자유연합 소속 총리
4. 선거 결과(이탈리아 왕국 하원)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이탈리아 왕국 정계를 주도하던 양대 정파인 역사적 좌파역사적 우파1913년에 통합하여 결성한 자유주의 정당이자 이탈리아 자유당의 전신이다.

통합을 주도한 인물인 조반니 졸리티는 역사적 좌파 출신이었지만, 이전보다 좀 더 우측으로 기울어서 보수자유주의에 가까운 정책을 펴는 중도~중도우파 정당이 되었다.

2. 역사[편집]



2.1. 창당 배경[편집]


1909년 총선에서 조반니 졸리티가 이끄는 역사적 좌파가 과반 의석을 유지하며 정권을 연장하긴 했으나, 기존의 양당제를 함께 이끌었던 역사적 우파가 원내4당으로 전락하고, 기성 체제를 부정하는 이탈리아 급진당[1]이탈리아 사회당[2]이 각각 원내2당과 3당으로 약진했다.

그러자 졸리티는 기존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좌우파가 자유주의라는 공통의 가치를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고 판단하고 정계 개편을 추진했고, 역사적 우파 역시 원내4당으로 쪼그라든 상황에서 단독으로 생존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협상에 임했다.

그 결과 1913년 총선을 앞둔 시기에 두 정파가 통합하여 자유주의 성향의 신당을 창당했으니, 그 당이 바로 자유연합(Unione Liberale)이었다.

2.2. 창당 직후~1차 세계대전[편집]


창당 직후에 열린 1913년 총선에서 자유연합은 선거 직전 의석(329석)보다 59석이 적은 270석을 얻는데 그쳤으나, 어쨌든 단독 과반을 사수하긴 했고 졸리티 역시 총리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4년에 원내2당인 급진당을 비롯한 야당들이 졸리티 내각 인사들의 부패폭로하며 격렬하게 비판하자, 궁지에 몰린 졸리티는 사임했고 역사적 우파 출신인 안토니오 살란드라가 후임 총리가 되었다.

살란드라 내각 출범 직후에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나 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자, 이탈리아 왕국영국런던 밀약을 체결하고 삼국동맹에서 이탈하여 협상국으로 참전하게 되었는데, 졸리티는 이를 비판하며 중립을 주장하다가 묵살당하자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1차 대전에서 이탈리아 왕국군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비롯한 동맹국 군대를 상대로 온갖 치욕스런 졸전 기록을 썼고, 그 과정에서 총리 역시 살란드라에서 파올로 보셀리로 교체되었다가, 다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로 바뀌었다.

오를란도 내각 하에서 아르만도 디아츠가 이끄는 이탈리아군이 1918년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그 여파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항복을 선언하여 이탈리아는 승전국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2.3. 몰락과 재창당[편집]


1차 대전 종전 이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 총리1919년 파리 강화 회의이탈리아 왕국 대표로 참석하여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해당 조약을 통해 이탈리아가 확보한 영토[3]런던 밀약으로 약속받은 영토에 비해 극히 적은 땅이었고, 이는 참전해서 막대한 를 흘리고도 얻은 게 별로 없다는 여론으로 돌아와 여당인 자유연합은 궁지에 몰렸다.

그러자 참전에 반대하고 은퇴했던 조반니 졸리티 전 총리가 당내 참전파 정치인들을 비판하며 다시 당권을 장악했고, 졸리티를 비롯한 반전파 정치인들은 같은 해에 열린 총선에서 당의 이미지를 쇄신하고 제1야당인 급진당과 자유민주급진파 공동명단이라는 정당연합을 결성하여 정권을 재창출하려 했다.

하지만 참전파와 반전파를 막론하고, 자유연합이라는 당의 이미지는 이미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기에, 자유연합은 무려 229석을 상실하며 41석짜리 원내5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후 이탈리아 급진당의 프란체스코 사베리오 니티가 1년 동안 총리직을 맡아 연립정부를 이끌었고, 1920년에 니티 내각이 붕괴되자 졸리티는 오랜만에 총리직에 복귀했다.

그러나 원내5당에 불과한 자유연합 소속으로 내각을 안정적으로 이끌기는 극도로 어려웠기에, 졸리티 내각 역시 1년만에 붕괴되어 1921년의회 해산 및 조기총선이 실시되었다.

1921년 총선에서 자유연합은 극우 정당인 이탈리아 전투 파시[4]을 비롯한 여러 우익 정당들과 함께 국민 블록(Blocco Nazionale)이라는 정당연합을 결성하여 선거를 치렀으나, 단일정당 기준으로 자유연합의 의석은 43석에 그쳤고, 연합 전체 의석으로도 105석에 그쳐서 123석을 확보한 이탈리아 사회당과 108석을 확보한 이탈리아 인민당에 밀렸다.

이후 총리직은 이탈리아 개혁주의 사회당(Partito Socialista Riformista Italiano)의 이바노에 보노미에게 넘어갔고, 1922년에 보노미 내각이 붕괴되자 자유연합의 루이지 팍타가 총리직에 올랐는데, 그 당시에도 자유연합의 실질적인 당권은 여전히 졸리티가 장악하고 있었다.

팍타 내각이 출범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자유연합은 당의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이탈리아 자유당으로의 재창당을 선언하여, 9년 동안 4명의 총리를 배출한 파란만장한 역사를 마감했다.

3. 주요 인물[편집]



3.1. 창립자[편집]



3.2. 자유연합 소속 총리[편집]


  • 조반니 졸리티
  • 안토니오 살란드라
  • 파올로 보셀리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

4. 선거 결과(이탈리아 왕국 하원)[편집]


1913년 270/508 47.62%[5]
1919년 41/508 8.63%[6]
1921년 43/535 7.12%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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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적 극좌파를 계승한 급진주의공화주의 정당[2] 마르크스주의혁명적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극좌이었다.[3] 트렌티노알토아디제, 이스트리아 반도[4] 국가 파시스트당의 전신[5] 원내1당 및 단독 과반 확보[6] 원내5당으로 추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