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기(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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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탐진 최씨[1]
출생
1913년 4월 20일
전라남도 광주군 기례방면 누항리
(現 광주광역시 북구 누문동 76번지)
사망
2000년 2월 1일
서울특별시
학력
광주농업학교 (명예졸업)
교토중학교 (졸업)
도쿄공업대학 (화학공학 / 학사)
조선대학교 대학원 (수료)
전남대학교 대학원 (공학 / 박사 과정 수료)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832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교육인, 정치인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되었다.


2. 생애[편집]


1913년 4월 20일 전라남도 광주군 기례방면 누항리(現 광주광역시 북구 누문동 76번지)에서 태어났다. 이후 광주군 광주면 누문리(現 광주광역시 북구 누문동) 253번지로 이주해 광주농업학교를 다녔다. 1967년에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2가 22번지에 거주했고, 1977년에는 종로구 세종로 1-41번지에 거주했다.

광주농업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9년 6월, 조길룡·김남철(金南哲) 등 광주농업학교에 다니던 20여명의 학우들과 함께 광주군 석곡면 금곡리(現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무등산에 모여 '독서회 중앙본부'의 하부조직으로 항일 학생비밀결사인 광주농업학교 독서회를 조직했다. 이때 그는 김남철·정욱(鄭昱)·김순복(金順福) 등과 함께 독서회의 조직교양부 위원에 선임되었고, 이후 이들은 전 독서회원을 4개 반으로 나누어 각 반별로 연구활동을 하며 항일의식을 길러 나갔다.

또한 그는 학년별로 독서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1929년 10월 광주군 광주면 읍내 유환묵(劉煥默)의 집에서 최차도(崔次道)·안종변(安鍾卞) 등과 함께 2학년 중심의 독서회 조직을 논의하였다. 이후 그는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하였고, 11월 12일 제2차 시위가 일어나자 수업종을 신호로 하여 조길룡과 김남철·정욱·김복근(金福根) 등 독서회원들과 함께 광주농업학교 재학생 200여명을 주도해 교문을 박차고 나가 격문을 뿌리고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이들은 광주형무소로 진격하던 도중 광주고등보통학교 부근에서 급히 출동한 일본 경찰에 저지되고 말았다.

그 뒤 1930년 1월 광주학생항일운동 당시 연락 책임자라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독서회 운동과 관련해 심문을 받으며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리고 1930년 7월 1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광주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고, 10월 18일 광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5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하여 대구복심법원으로 이송되었고, 두 차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구류 갱신이 이뤄졌다. 이어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혐의에 대해 공소의 이유가 있다는 판결이 내려졌고, 일부 감형된 징역 1년형(재판 미결 구류일수 중 365일 본형에 산입, 법정 미결 구류 통산 4일)을 선고받아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중학교와 도쿄공업대학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광과학공업 주식회사에서 전무취체역으로 재직하다가 8.15 광복을 맞아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조선대학교 대학원전남대학교 대학원 공학 박사 과정에 입학해 각각 수료하고 조선대학교 공과대학 학장에 부임했다. 1960년 6월 11일부터 1961년 8월 27일까지 제2대 조선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또한 고려미유(高麗美油) 주식회사 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1963년 민주공화당이 창당되자 이에 입당했고, 그해 시행된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전국구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공화당 전라남도지부 위원장, 전라남도 제1지구당 위원장, 당무위원 등을 지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전라남도 광주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이 지역의 거물이던 신민당 정성태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이후 민주공화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서훈되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역시 신민당 정성태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이후 1971년 6월 21일 제4대 전라남도 교육위원회 교육감임명되어 1975년 6월 21일까지 역임했다.

이후 광주농업고등학교로부터 명예졸업장을 수여받았다. 1987년에는 신민주공화당에 입당해 부총재에 임명되어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김종필 후보의 선거를 도왔다.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가로 서훈되었다.

2000년 2월 1일 오전 11시 서울특별시에서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그의 유해는 2000년 2월 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안장되었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
당선
초선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광주시 갑)
24,907표 (46.24%)
낙선 (2위)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광주시 갑)
26,759표 (4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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