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2세(나바라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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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카를로스 2세 (Carlos II)[1]
별칭
샤를 데브뢰(Charles d'Évreux), 악인왕(El Malo)
출생
1332년 10월 10일
프랑스 노르망디 에브뢰
사망
1387년 1월 1일 (54세)
스페인 나바라 팜플로나
재위
나바라 왕국의 왕
1349년 10월[2] ~ 1387년 1월 1일
아버지
필리페 3세
어머니
나바라 왕국호아나 2세
자녀
마리아(María de Navarra),
카를로스 3세(Carlos III de Navarra),
보나(Bona de Navarra),
페드로(Pedro de Navarra),
펠리페(Felipe de Navarra),
후아나(Juana de Navarra),
블랑카(Blanca de Navarra)

1. 개요
2. 생애
3. 가족 관계



1. 개요[편집]


나바라 왕국 27대 국왕, 에브뢰 백작. 프랑스 국왕이 되기 위해 백년 전쟁 시기에 영국과 프랑스 양쪽을 오가며 정치 음모를 꾸미고 여러 인사들을 해쳤기에 악인왕(Gaiztoa)이라는 악명을 얻었다.


2. 생애[편집]


1316년 6월, 프랑스 왕국 카페 왕조의 국왕 루이 10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가 생전에 낳은 유일한 자식인 잔느가 뒤를 이어 프랑스 여왕이 되는 듯했지만, 루이 10세의 왕비이자 잔느의 계모 클레망스는 잔느의 어머니 마르그리트가 필리프 드 오네이와 간통했던 과거를 들어 그녀의 혈통에 의문을 제기했고, 자신이 임신하고 있는 자식이 아들일 경우 그 아이를 왕으로 세우겠다고 밝혔다. 1316년 11월 15일 클레망스의 아들 장 1세가 출생 직후 프랑스 국왕이 되었지만, 불과 5일 만인 11월 20일에 사망했다.

이에 클레망스는 잔느를 여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루이 10세의 동생 필리프가 막아섰다. 필리프는 살리카법을 확대 해석해 여성의 왕위 계승권을 부정하고 자신이 프랑스 국왕 필리프 5세로 등극했다. 살리카법은 나바라 왕국의 법률에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잔느의 외할머니인 부르고뉴 공작부인 아녜스와 잔느의 외삼촌인 외드 4세는 잔느를 나바라 왕국의 여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필리프 5세가 나바라 왕위마저 자기 것으로 삼는 바람에 실패했다.

1318년 3월 27일, 외드 4세는 필리프 5세와 협상한 끝에 그가 후계자를 낳지 못한다면 브리와 샹파뉴 백국은 잔느에게 승계되기로 합의했다. 또한 외드 4세는 필리프 5세의 딸 잔느(부르고뉴 여백작 잔 3세)와 결혼하고, 루이 10세의 딸 잔느는 에브뢰 백작 루이의 아들이자 자신의 사촌인 필리프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1318년 6월 18일, 잔느는 6살의 나이에 12살의 필리프와 결혼했다.

1322년 필리프 5세가 사망했을 때 딸만 여럿 낳았을 뿐 아들을 두지 못했기에 동생 샤를 4세가 프랑스와 나바라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그 역시 1328년 2월 1일에 남자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에 잔느는 남편 필리프와 함께 프랑스 왕위에 도전했다. 하지만 그녀의 세력은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에 비할 바 아니었기에 프랑스 왕이 될 가망은 별로 없었다.

이에 잔느와 필리프 부부는 나바라 국왕이 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지만, 필리프 6세는 여기에 문제를 제기했다. 나바라 왕국과 샹파뉴 백국, 에브뢰 백국이 통합된다면 프랑스 국왕의 권위를 위협할 정도로 강대한 국가가 탄생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필리프 6세는 과거 외드 4세와 필리프 5세가 약속한 대로 브리와 샹파뉴 백국을 잔느에게 넘겨주기를 거부했다. 그 대신에, 코탕탱 반도의 일부인 모르탱, 벡생, 퐁투아즈, 보몽 쉬르 우아즈, 아스니에르 쉬르 우아즈를 넘겨주기로 했다. 이때 앙굴렘 역시 양도하기로 했지만, 필리프 6세는 죽을 때까지 앙굴렘을 넘기지 않았다.

잔느와 필리프 부부는 필리프 6세의 요구에 따르기로 하고, 1329년 3월 5일 나바라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 대성당에서 각각 호아나 2세필리페 3세로서 나바라의 공동 왕으로 등극했다. 그 후 두 사람은 프랑스 내 영지와 나바라 왕국을 오가며 통치했다. 그러던 1332년 10월 10일, 필리페 3세의 프랑스 영지인 에브뢰 백국에서 두 부부왕의 장남이 태어났으니, 그가 바로 카를로스 2세다.

카를로스는 프랑스 노르망디의 에브뢰 백국에서 출생한 뒤 프랑스에서 자랐다. 1349년 10월 어머니 호아나 2세가 페스트에 걸려 사망하면서 나바라 국왕이자 에브뢰 백작위를 물려받았다. 1350년 여름 나바라 왕국을 처음으로 방문해 6월 27일에 팜플로나의 산타마리아 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후 12년간 나바라 왕국엔 거의 들르지 않고 프랑스 영지 관리에 집중했으며, 그에 의해 나바라 총독으로 선임된 동생 루이가 나바라 왕국을 대신 통치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빼앗겨버린 프랑스 왕위를 자기 손으로 되찾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1350년 8월 22일, 필리프 6세가 사망했다. 필리프 6세의 아들 장 2세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나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가 이 때를 틈타 프랑스 왕을 칭할 것을 우려해, 아버지가 사망한지 한달 밖에 안 된 9월 26일에 랭스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가 필리프 6세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는 이미 장 2세가 프랑스 국왕에 즉위해버린 터라 지지자들을 미처 규합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일단 장 2세의 즉위를 받아들였지만, 어머니가 돌려받지 못한 브리와 샹파뉴 백국을 돌려받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필리프 6세가 주기로 약속했던 앙굴렘을 끝내 주지 않았으니 마땅히 브리와 샹파뉴를 회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카를로스는 노르망디와 센 계곡에 풍부한 재산을 가진 에브뢰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프랑스 국왕 샤를 4세의 왕비이자 카를로스의 외숙모인 잔느 드 데브뢰는 프랑스 왕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카를로스와 장 2세 사이의 중재 역할을 수행했다. 동생 필리프는 잉글랜드 등 외국에서의 지원을 받아내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또다른 동생 루이는 나바라 왕국을 대리 통치하면서 형을 위해 인적, 물적 자원을 징발했다.

그러던 1350년 11월 19일, 장 2세는 라울 2세 드 브리엔을 긴급 체포한 뒤 하루 만에 곧바로 참수형에 처하고 그의 재산을 압류했다. 라울 2세는 프랑스-잉글랜드-아일랜드 등지에 영지를 둔 귀족으로, 1346년 잉글랜드군이 캉을 공략했을 때 토마스 홀랜드가 이끄는 영국군에 의해 체포된 뒤 4년간 잉글랜드에 억류되었다가 1350년 60,000 프랑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하고 풀려났다. 하지만 그 큰 돈을 마련할 길이 없자, 에드워드 3세에게 자신의 소유물인 긴느 성을 양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장 2세는 이를 모든 프랑스 영토의 주권자인 자신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고 참수형에 처했다. 상당한 거물이었던 라울 2세가 순식간에 처형된 사건은 프랑스 귀족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고, 블루아 왕조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카를로스는 이 때를 틈타 푸아 백작 가스통과 불로뉴 백작가, 아르투아 백작가 등 발루아 왕조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을 끌어들였다.

1352년, 장 2세는 카를로스에게 갓 8살된 딸 잔느를 아내로 삼으라고 권유했다. 카를로스는 이를 거부한다면 장 2세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을 테고, 아직은 그에게 맞설 힘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또한 장 2세가 신부의 지참금으로 왕실 수입에서 차출한 10만 에쿠스를 매년 송금하겠다고 약속하자, 그는 결혼에 동의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352년 2월, 카를로스는 장 2세의 딸 잔느와 결혼했다. 그러나 장 2세는 약속과는 달리 10만 에쿠스를 지불하는 것을 차일피일 미뤘다.

여기에 더해 장 2세가 가장 신뢰하는 신하인 샤를 드 라 세르다가 앙굴렘 백작에 선임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격노했다. 앙굴렘은 지난날 필리프 6세가 어머니 호아나 2세에게 양도하기로 약속해놓고 끝까지 주지 않았던 곳이었다. 그런 곳을 카스티야 출신의 남작인 샤를 드 라 세르다가 가로챘다니, 그로서는 도저히 참고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샤를 드 라 세르다를 가만 놔두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1353년, 프랑스와 잉글랜드 국왕들은 교황 인노첸시오 6세의 호소와 중세 흑사병 유행으로 인한 참상으로 파탄 지경에 몰린 내치를 고려해 평화 협상을 가졌다. 하지만 카를로스는 평화가 성립되면 자신에게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하고, 협상을 훼방놓기 위해 샤를 드 라 세르다를 체포하기로 했다. 1354년 1월 18일, 카를로스의 동생인 롱그빌 백작 필리프가 이끄는 무리가 레글르(L'Aigle)의 한 여관에 투숙하고 있던 샤를 드 라 세르다를 습격했다. 그 과정에서 샤를의 수행원들이 대거 척살되었고, 샤를은 도주하다가 체포된 뒤 목숨을 구걸하다가 살육에 흥분한 필리프의 부하들에게 참수되었다.

카를로스는 동생 필리프가 샤를 드 라 세르다를 체포하지 않고 암살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일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자신이 살인을 주도했으며 샤를 드 라 세르다가 자신을 해치기 위해 음모를 꾸몄기에 정당방위로 행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후 에드워드 3세, 흑태자 에드워드, 에드워드 3세의 왕비인 에노의 필리파, 랭커스터 공작 헨리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장 2세는 이러다가 잉글랜드와의 전쟁이 재개될 것을 우려해 1354년 2월 22일 카를로스와 망트 조약을 체결했다. 장 2세가 아직 주지 않았던 영토를 포기하는 대가로 보몽-르-로거 군, 브레퇴일 성, 콩체스 성, 퐁-오데메르 성, 체르부르 시, 코탕탱의 폐쇄, 노르망디의 카렌탕, 쿠탕스 및 발로그네 일대를 영지로 수여받았다. 또한 노르망디 공작의 모든 특권을 직함 없이 누릴 수 있었다.

이렇듯 많은 것을 얻어낸 대가로, 그는 왕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파리로 가야만 했다. 장 2세의 둘째 아들인 앙주의 루이는 카를로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에브뢰에 인질로 보내졌고, 카를로스는 1354년 3월 4일 파리로 가서 삼부회 의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에게 공개적으로 용서를 구해 허락을 얻어냈다. 그러나 장 2세는 아끼던 신하를 살해하고 망트 조약을 통해 수많은 이득을 챙긴 카를로스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그해 8월, 그는 카를로스, 필리프, 루이 형제를 자신의 궁전에서 열린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세 형제는 이에 참석하러 가던 중 경고를 받자 급히 파리를 탈출해 암살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 후 노르망디를 침공한 장 2세를 피해 교황청이 있는 아비뇽에 은거한 카를로스는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평화 협약을 맺을 조짐이 보이자 이를 막기 위해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그는 비밀리에 렝커스터 백작 헨리에게 서신을 보내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국왕으로 세워지는 대신 노르망디, 샹파뉴, 브리, 랑그도크를 자신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그를 신뢰할 수 없는 자라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장 2세는 잉글랜드 왕국이 카를로스와 손잡고 자신을 도모하려 들 것을 우려해 카를로스에게 화해를 권했다. 이후 협상을 벌인 끝에, 양자는 1355년 9월 10일 발롱크스 협약을 체결하고 정식으로 화해했다.

이후 자기 영지로 돌아온 카를로스는 1356년 초 장 2세가 모든 노르망디 영주들을 루앙 성에 초대했을 때 이를 받아들였다. 일전에 자신을 죽이려 했던 장 2세의 초대를 받아들인 이유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자기만 빠졌다가 "왕의 초대에 불응한 역적"으로 낙인찍힐 우려가 있고 노르망디 귀족들이 장 2세에게 포섭될 우려도 있으니 참석해야겠다고 판단한 것으로 추정된다. 상당한 세력을 갖춘 자신을 어쩌지 못하리라는 자신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잔치가 한창일 때, 장 2세가 느닷없이 자식들과 같은 상석에 앉아있던 카를로스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덜미를 붙들며 외쳤다.

"이 배신자! 너는 내 아들의 식탁에 앉을 자격이 없다!"


카를로스의 종자 콜린 더블레(Colin Doublet)는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칼을 뽑았지만 왕실 근위대에 의해 즉시 체포되었다. 그 후 현장에서 체포된 카를로스는 측근 4명과 함께 샹폴 성에 잠시 수감되었다가 두에의 아를뢰 요새로 이송되었다. 이때 추종자 4명[3]이 참수되었고, 그들의 유해는 광장에 내걸렸다.

카를로스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에브뢰 가문과 노르망디 귀족들은 프랑스 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철회하고 에드워드 3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1356년 5월, 카를로스의 동생 필리프와 노르만 영주들은 휴젼 협약을 깨고 노르망디와 기옌을 통과하는 잉글랜드군에 대거 가세했다. 장 2세는 이에 대응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잉글랜드군에 대적했으나, 1356년 9월 19일 푸아티에 전투에서 참패하고 영국군의 포로로 전락했다.

그 후 장 2세의 큰아들 샤를이 아버지를 대신해 국정을 돌봤지만, 프랑스 각지는 무정부 상태로 전락했고 카를로스의 추종자들은 카를로스를 석방하라고 압박했다. 필리프는 랭커스터 공작 헨리가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함께 힘을 합쳐 노르망디 전역에서 프랑스군과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결국 샤를 왕자는 1357년 11월 9일 카를로스를 아를뢰 성에서 석방시키기로 했다. 카를로스는 아미앵에 잠시 들렀다가 삼부회의 초대를 받아 파리로 갔다.

11월 30일, 파리에 도착한 그는 민중들에게 자신을 투옥시킨 자들을 규탄하는 연설을 감행했다. 이에 에티엔 마르셀이 이끄는 파리 시민들이 "나바라 국왕을 부당하게 대우한 자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했고, 샤를 왕자는 일단 카를로스와 협상하기로 했다. 카를로스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자신의 영지에 가해진 모든 피해를 보상할 것, 자신과 추종자들을 사면할 것, 장 2세에 의해 처형된 동료들을 명에롭게 매장할 것 등을 요구했으며, 이와 더불어 노르망디 공국과 샹파뉴 백국을 자신에게 정식으로 넘기라고 촉구했다.

샤를 왕자가 그의 요구를 들어줄 기색을 보일 때, 잉글랜드군에 포로로 잡혀있던 장 2세가 에드워드 3세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카를로스는 평화 협정이 성립되면 자신에게 좋을 게 없다는 걸 잘 알았기에, 에티엔 마르셀을 부추겨서 파리에 수감된 죄수들을 풀어줘서 왕의 군대와 맞서게 한 뒤 자신은 노르망디로 가서 병력을 규합했다. 1358년 1월 10일, 그는 루앙 대성당에서 장 2세에게 처형된 추종자 4명을 기리기 위해 장례식을 거행한 뒤 이들을 죽인 자들에게 복수하겠다고 선언했다.

1358년 2월 22일, 에티엔 마르셀이 이끄는 폭도들이 샤를 왕자의 최측근인 장 드 콩플랑과 로베르 드 클레르몽을 척살한 뒤 샤를 왕자를 사실상 포로로 잡고 카를로스에게 파리로 속히 오라고 초대했다. 그는 파리로 즉시 가려 했지만 도중에 병에 걸려버렸고, 그 사이에 샤를은 극적으로 파리를 탈출한 뒤 동쪽에서 병력을 규합하여 반격에 착수했다. 이후 파리 주변의 영토는 카를로스가 파견한 노르망디군과 샤를 왕자가 보낸 선봉대에 의해 약탈당했다. 에티엔 드 마르셀은 카를로스에게 샤를 왕자와 협상해달라고 간청했지만 묵살당했다.

1358년 5월, 그동안 가혹한 수탈을 당하던 프랑스 북동부의 농민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했다.(자크리의 난) 에티엔 마르셀은 자크리들을 지지한다고 선언했고, 프랑스 북부 기사들은 카를로스에게 자크리 토벌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그들의 요청에 따르기로 하고, 1358년 6월 10일 멜루 전투에서 자크리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이후 파리로 들어와서 민중을 소집한 뒤 자신을 "파리의 대장"으로 선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자크리와 손잡았던 에티엔 마르셀을 토벌하지 않고 손잡는 것에 반감을 품고 샤를 왕자 쪽으로 등을 돌렸다.

이후 샤를이 귀족들의 지지에 힘입어 파리로 진군했다. 이때 파리 시내에서 반 잉글랜드 감정을 품은 주민들이 대거 봉기해 에티엔 마르셀을 포함한 친 잉글랜드, 친 나바라 성향 인사들을 모조리 죽였다. 카를로스는 파리 외곽의 생드니 수도원에 숨었다가 노르망디로 도주했다. 이후 에드워드 3세에게 서신을 보내 프랑스를 침공해 샤를 왕자를 격파하는 것을 도와준다면 그를 프랑스의 국왕으로 인정하고 노르망디, 피카르디, 샹파뉴, 브리의 영주로서 충성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장 2세와 평화 협정을 맺어둔 터라 그를 프랑스를 좌지우지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존재로 여겼다. 1359년 3월 24일, 에드워드 3세와 장 2세는 런던에서 협약을 체결했다. 장 2세는 인질들을 남긴 채 프랑스로 귀환한 뒤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며, 카를로스가 소유한 프랑스 영지를 포함한 많은 영토를 에드워드 3세에게 양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삼부회는 협약 내용이 부당하다고 여기고 샤를 왕자에게 전쟁을 지속하라고 촉구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를 직접 침공하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카를로스는 샤를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맹공격으로 인해 노르망디 영지가 피폐해진 데다 잉글랜드군이 또다시 노르망디에 상륙하려 한다는 정보까지 들어오자 샤를 왕자와 화해하기로 했다. 양자는 오랜 협상 끝에 1359년 8월 19일 퐁투아즈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그는 더 이상 영토와 돈에 대한 요구를 하지 않기로 했고, 샤를 왕자는 그가 그동안 프랑스에 해악을 끼친 행위들을 사면하기로 했다.

에드워드 3세는 1359~1360년에 노르망디를 침공했지만 카를로스와 샤를 왕자가 전투에 전혀 응하지 않고 청야 전술을 구사하는 바람에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되어 많은 병사가 죽어나가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이후 샤를 왕자가 장 2세와 에드워드 3세가 맺은 협약을 받아들일 테니 아버지를 돌려달라고 하자, 에드워드 3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카를로스는 칼레에 도착한 장 2세와 만나 장 2세에게 용서를 구하고 추종자 300명과 함께 사면받았다. 그 대가로 프랑스 왕실에 대한 충성 서약을 재차 맺었고, 프랑스에서 약탈을 자행하는 잉글랜드-나바라 용병대를 토벌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1361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카를로스는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2세의 딸 마르그리트[4]의 손자인 점을 이용해 자신이 부르고뉴 공국을 물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로베르 2세의 둘째 딸 잔의 아들인 장 2세가 부르고뉴 공작이 되었고, 자신이 죽은 후에는 아들 호담공 필리프 2세에게 물려주겠다고 선언했다. 카를로스는 교황 인노첸시오 6세에게 자신이 부르고뉴 공작이 되는 것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1361년 11월 나바라 왕국으로 가서 그곳의 장정들을 소집해 전쟁을 준비했다.

1362년 5월 추종자들을 부추겨 노르망디에서 봉기를 일으키게 했으나 실패하자 1363년 나바라 해군을 노르망디로 파견해 그곳을 장악하고 나바라 육군을 형제 루이에게 맡겨 가스코뉴인들과 힘을 합쳐 부르고뉴를 공략하게 했다. 1363년 1월, 카를로스는 아헨에서 흑태자 에드워드와 만나 잉글랜드 왕국이 보유하고 있는 아키텐 공국에 나바라 왕국군이 통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해 승낙을 얻어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사전에 노출되었고, 1364년 5월 16일 코르슈렐 전투에서 나바라 왕국군과 잉글랜드 용병 연합군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참패했다. 그 직후 장 2세가 잉글랜드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샤를 왕자는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로 즉위하고 형제 필리프를 부르고뉴 공작으로 확정했다.

1364년 8월, 로드리고 데 우리즈가 이끄는 소규모 나바라군이 바욘에서 세르부르로 항해했고, 노르망디의 카를로스 추종자들이 이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켰다. 한편 카를로스의 동생 루이는 아키텐 공국을 지나 가스코뉴군과 합세한 후 9월 23일 노르망디에 도착했다. 그러나 9월 29일 코르슈렐 전투 소식을 전해들은 루이는 부르고뉴 침공을 포기하고 코탕탱 반도를 탈환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그러나 루이는 부하들이 프랑스 마을들을 심하게 약탈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이로 인해 민심은 카를로스에게 등을 돌렸다. 여기에 교황 우르바노 5세가 부르고뉴와 노르망디의 국경지대인 안세 마을을 초토화한 루이의 부하 세갱 드 바데폴을 파문하는 등 교회마저 등을 돌리자, 카를로스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샤를 5세와 화해하기로 했다.

1365년 5월, 카를로스와 샤를 5세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는 정복한 영토를 유지할 수 있었고 자신의 추종자들의 사면을 받아냈으며, 처형된 나바라인들의 유해를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내고, 포로들이 몸값없이 상호 석방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가 확보한 영토는 하나같이 초토화되었기 때문에 별다른 실익이 없었으며, 부르고뉴 공작위에 대한 요구는 교황의 중재에 회부되기로 했지만 교황청이 이에 대해 언급 자체를 하지 않으면서 흐지부지되었다. 그 후 카를로스는 다시는 프랑스 왕위를 탐하거나 영지를 늘리는 데 관심을 두지 않고 나바라 왕국에 머물렀다. 1365년 말, 세갱 드 바데폴이 나바라 왕국에 찾아와서 카를로스가 자신에게 지불하겠다고 약속한 상당한 급료를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카를로스는 그가 쓸데없이 주민들을 학살하고 교회 재산을 털어버리는 만행을 저지르는 바람에 일을 그르쳤다고 여겼기에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일단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가, 나중에 사람을 시켜 독살했다.

한편, 카를로스는 공식적으로는 카스티야 국왕 페드로와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1365년 말에 페드로를 폐위시키고 그의 이복동생인 엔리케 2세를 카스티야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 나바라 왕국을 통과하기를 원하는 게클랭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나중에 마음을 바꿔 통과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대신 그들이 나바라 왕국을 통과하면서 약탈을 최소화하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했다. 이후 엔리케 2세가 카스티야 국왕에 성공적으로 선임되었고, 페드로는 아키텐을 다스리던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망명했다.

1366년 7월, 카를로스는 보르도로 가서 페드로와 협의해 흑태자 에드워드의 잉글랜드군이 나바라 산길을 통과하게 해주는 대신 상당한 보상금을 받기로 했다. 이후 그해 12월에 엔리케 2세와 접촉한 뒤 로그로뇨와 더 많은 보상금을 받는 대가로 잉글랜드군의 통과를 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흑태자 에드워드는 이중계약을 맺은 그에게 분노해 나바라 국경지대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원래 약속한 대로 하라고 요구했다. 카를로스는 급히 에드워드를 찾아가서 자신이 엔리케 2세와 거래한 적이 없다면서, 잉글랜드군이 산길을 통과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카를로스를 신용할 수 없다고 여기고 올리버 드 마우니에게 카를로스를 붙잡아놓게 했다. 그 후 카를로스는 흑태자 에드워드가 엔리케 2세를 몰아내고 페드로를 카스티야 국왕으로 복위시킬 때까지 잉글랜드 군영에 억류되었다.

1369년, 백년 전쟁이 재개되자 나바라를 떠나 낭트로 가서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와 만나서 상호 방위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면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와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에게 동시에 사절을 보냈다. 그는 양측에 노르망디에 있던 자신의 영토를 회복하고 부르고뉴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고 몽펠리에를 관장할 권리를 주라고 요구하면서, 에드워드 3세에게는 "노르망디에 있는 자신의 영토를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고, 샤를 5세에게는 "잉글랜드의 침략에 대항하여 전력으로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샤를 5세는 그의 제안을 노골적으로 거절했고, 에드워드 3세는 카를로스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1370년 7월, 로버트 놀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센 강 하구에 파견되었다. 로버트는 왕이 좀더 심도 높은 논의를 하고 싶어하니 런던으로 와달라고 청했고, 카를로스는 이 말에 따라 런던으로 향했다. 1370년 12월 2일, 에드워드 3세와 카를로스는 정식으로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로버트 놀스의 잉글랜드군이 퐁발랭 전투에서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궤멸되면서 일이 틀어져버렸다. 결국 카를로스는 샤를 5세에게 또다시 충성을 서약해야 했고, 1372년 초 나바라 왕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곤트의 존이 페드로의 딸 콘스탄차와 결혼해 장차 카스티야 국왕이 될 야심을 품고 페드로에게 접근하자,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2세는 이를 감지하고 1373년 카를로스에게 결혼동맹을 맺을 것을 제안하면서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 왕국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카를로스는 1374년 3월 기스코뉴에서 곤트의 존을 만나서 엔리케 2세가 지난날 빼앗아간 나바라 왕국의 도시들을 탈환하는 데 힘을 보태준다면 나바라 왕국을 카스티야 침공기지로 사용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곤트의 존은 얼마 안가 계획을 포기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가버렸고, 엔리케 2세로부터 보복당할 위기에 몰린 카를로스는 1375년 5월 장남 카를로스와 엔리케 2세의 딸 레오노라의 결혼에 동의하고 나바라 왕국이 카스티야 왕국의 봉신이 되는 것을 받아들였다.

1377년, 카를로스는 잉글랜드에 자신이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 항구와 성들을 그들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해줄 테니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게 해주고 카스티야군과 맞서 싸우는 것을 도울 병력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여기에 더해, 시종장 자크 드 루를 요리사로 위장시켜서 파리의 프랑스 왕궁에 잠입시킨 뒤 샤를 5세를 독살하게 했다. 그러나 그의 이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샤를 5세는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에 진입하자마자 군대를 출동시켜 적이 더 해안 요새에서 더 이상 이동하지 못하게 묶어놓았다. 또한 노르망디에 파견되었던 아들 카를로스는 샤를 5세의 군대에게 패배해 항복한 후 프랑스군에 배속되었다. 또한 자크 드 루는 1378년 3월 25일 코르베유에서 체포된 뒤 카를로스의 지시를 받들어 샤를 5세를 독살하려 했다는 사실을 자백한 후 레스 할레스에서 공범자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1378년 6~7월, 샤를 5세로부터 카를로스의 음모를 전해들은 엔리케 2세가 이끄는 카스티야군이 나바라 왕국을 전격 침공해 각지를 황폐화시켰다. 카를로스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생장 피에 드 포르로 도주한 후 보르도로 가서 잉글랜드 장군 존 네빌에게 원조를 간청했다. 네빌은 토마스 트리벳 휘하의 소규모 병력을 나바라 왕국에 파견했지만, 그들은 나바라 왕국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울 의사가 없었기에 얼마 안가 되돌아왔다. 결국 모든 희망을 잃은 카를로스는 1379년 3월 31일 투델라를 포함한 나바라 왕국 남부의 20개 요새를 카스티야 왕국에 넘겨주고 잉글랜드에 맞서 카스티야-프랑스 왕국과 군사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내용의 브리오네스 협약에 서명했다.

나바라 왕국 주민들은 자신들과 별다른 관련이 없는 모험적인 계획을 집행하기 위해 자신들을 쥐어짜고, 외적이 쳐들어와서 자신들을 해치고 재산을 약탈하는 걸 막지도 못하는 국왕에게 분노했다. 카를로스는 이로 인해 재위 말년을 나바라 왕국 각지에서 일어난 민란을 진압하는 데 허비해야 했다. 그러던 1386년 10월부터 심각한 질병에 시달린 그는 자신의 유해를 팜플로나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 심장을 우후에 성모 마리아 성당에, 내장을 롱세스바예스 성모 마리아 성당에 안장해달라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1387년 1월 1일, 염증이 도져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쇠약해지자 궁정 의사의 처방에 따라 염증 치료를 위해 온 몸을 독한 브랜디에 적신 붕대[5]로 감았다. 그런데 브랜디가 가연성이라는 것을 몰랐던[6] 한 시종이 붕대에서 삐져나온 실 조각을 촛불로 지지는 바람에 불이 순식간에 붕대 전체에 옮겨 붙었고, 전신이 불타올라 심각한 화상을 입고 죽었다. 향년 54세. 사후에 맏아들인 카를로스 3세가 나바라 왕위를 물려받았다. 생전에 평판이 어찌나 나빴던지, 그가 끔찍하게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천벌을 받았다며 통쾌해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의도된 암살이 아니냐는 추측도 제기되었다. 하지만 당시 브랜디 자체가 고급 약품이라는 속설이 널리 퍼진 만큼 아무것도 몰랐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3. 가족 관계[편집]


  • 잔느(1343 ~ 1373):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딸.
    • 마리아(1360 ~ 1400년 이후): 간디아 공작 알폰소 다라고나의 부인.
    • 카를로스 3세(1361 ~ 1425): 나바라 국왕
    • 보나(1364 ~ 1389년 이후)
    • 페드로(1366 ~ 1412): 모르탱 백작
    • 펠리페(1368): 요절
    • 후아나(1370 ~ 1437): 브르타뉴 공작 장 4세와 초혼,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와 재혼.
    • 블랑카(1372 ~ 1385): 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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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 왕호는 스페인의 국왕 카를로스 2세와 같은 왕호이다.[2] 대관식은 1350년 6월 27일에 팜플로나의 산타마리아 성당에서 치뤄졌다.[3] 그 중 2명은 샤를 드 라 세르다 암살에 관여한 이들이었다.[4] 루이 10세의 첫번째 왕비이자 호아나 2세의 모친으로, 불륜을 저질러 감금되었다.[5] 또는 아마포라고도 전해짐.[6] 양조주인 와인과는 달리 증류주인 브랜디는 당시에는 굉장한 고급품이었고, 기호품이 아닌 귀중한 약품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귀족 이상의 지위와 재력이 없으면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단순히 가연성이라는 걸 넘어 브랜디 자체가 뭔지도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