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바노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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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제200대 교황. 아비뇽 시대의 여섯 번째 교황이자 베네딕도회 소속이기도 했다.
우르바노 5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후에도 자신의 소속인 베네딕도회의 규율에 따라 검소하고 겸손한 삶을 살았다. 그의 생활 방식은 유복한 삶에 이미 익숙해진 주변 고위 성직자들로부터의 공감을 얻지는 못했다.
우르바노 5세는 교육 정책에 힘을 썼는데, 그는 헝가리 왕국에 대학교를 설립했으며, 1363년 4월에는 파비아 대학교를 정식 스투디움 제네랄레[1] 로 승인했다. 게다가 그는 몽펠리에의 약학대학을 복원하는 계획을 실시했으며 동사에 성 베네딕토 대학을 설립했다. 아울러 그는 크라쿠프 대학교의 발전을 증진하고자 수많은 서적들을 제공했고 양질의 교육자들을 파견했다.
이외에도 우르바노 5세는 로마에 포도원 개발 계획을 착수했고, 당시 유럽에는 평민들은 물론 귀족들이나 성직자들마저 유대인들을 대놓고 차별해도 문제가 없었을 정도로 반유대주의적 사회상이 만연했으나 유대인들에게 해를 끼친 성직자들 및 신도들은 과감히 제명하는 엄벌 제도를 실시했다.
1367년 4월 아비뇽 교황청의 로마 귀환을 계획하여 로마로 옮기지만 내부의 완강한 반대로 인해 1370년 9월 로마를 떠나 아비뇽으로 돌아간다. 그로부터 3개월 뒤, 1370년 12월 19일 아비뇽의 교황궁에서 선종했다. 그의 시신은 생 마리 드 돔스 대성당 안에 있는 요한 22세 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371년 5월 31일에는 그의 시신은 마르세유의 생 빅토르 수도원으로 이전되었다.
2. 시복[편집]
우르바노 5세의 시복은 그의 후임자인 그레고리오 11세에 의해 처음으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11세가 교황청을 다시 로마로 이전하고 이에 대한 반발로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가 선출된 서방교회 대분열 사태로 인해 그의 시복은 무산되었다. 그리고 약 500여년 뒤인 1800년대 중후반에 다시 우르바노 5세의 시복이 논의되었고, 이윽고 1870년 3월 10일 비오 9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우르바노 5세의 축일은 선종한 날인 12월 19일. 그는 교육자, 건축가, 그리고 베네딕도회를 수호하는 복자로 천명되었다. 우르바노 5세는 아비뇽 시대의 교황 중 유일하게 시복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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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tudium Generale. 현재의 대학교에 준하는, 중세 유럽의 고등교육기관들을 이르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