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나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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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게일어: Cináed mac Ailpin (키나드 막 아일핀)
영어: Kenneth I(케네스 1세)
(810~858, 달 리아타 국왕으로써 재위:834? 843?~858, 픽트 국왕으로써 재위: 843~858 )

파일:키나드 1세.jpg
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 야코브 데 베트 2세(Jacob de Wet II)가 그린 초상화. 그는 찰스 2세 시기 스코틀랜드 궁정에 들어가 110여 점의 스코틀랜드 군주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 시대의 상상화가 그렇듯 고증오류가 돋보인다.[1]

1. 개요
2. 생애
2.1. 키나드의 혈통
2.2. 왕위를 얻게 된 계기
2.3. 통치
3. 역사적 의의
4. 자식



1. 개요[편집]


스코틀랜드 왕국의 전신인 픽트 왕국의 국왕이다. 별명은 언 페르바삭(An Ferbasach), 우리말로 정복왕이다. 최초로 현재 스코틀랜드의 서부 지역과 동부 지역을 합쳐 한 나라로 만든 왕으로써 스코틀랜드 왕국의 국부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2. 생애[편집]



2.1. 키나드의 혈통[편집]


키나드 1세의 시대에는 아직 스코틀랜드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기였다. 당대의 스코틀랜드 지역에는 로마 시대부터 그곳에 거주하던 픽트족들이 부족 왕국 단위로 흩어져있었고, 통일된 국왕이라기보다는 아일랜드아르드리처럼 형식적인 국왕 정도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키나드 1세는 아예 픽트족도 아닌, 스코틀랜드 서부 군도 지방을 다스리는 왕국 달 리아타의 국왕이었다. 달 리아타의 주요 민족은 게일인으로, 아일랜드 출신의 켈트족이었다. 키나드 1세도 게일인 혹은 게일 혈통은 아닐지라도 게일화된 사람으로 추정되는데, 고고학적으로도 9세기 초에 만들어진 두플린 석조 십자가에 새겨진 그의 조상의 이름이 게일식이었기 때문이다.


2.2. 왕위를 얻게 된 계기[편집]


키나드 1세가 픽트 왕위를 갖게 된 계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기존에 알려진 계기는 그의 아버지에 관련된다. 그의 아버지 알핀 2세는 834년, 갤로웨이에서 픽트족과 전투를 벌였다 전장에서 전사 또는 사로잡혀 참수당했다고 전해지는데, 키나드 1세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픽트족을 침공해 왕위까지 얻어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키나드 1세가 전쟁 명분으로 아버지의 사망을 써먹었을 수는 있겠지만 이것과 그의 왕위 획득에 직접적인 연관 관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9세기는 그야말로 바이킹의 시대로, 북유럽에서 출발한 전사들이 온 유럽을 휘젓던 시기였고 그에 가장 심하게 직격당한 지역이 바로 브리튼과 아일랜드였다. 본래 픽트족을 통치하는 왕은 하이랜드 지방의 포트리우 왕국에서 나왔는데, 픽트 국왕 연대기에 839년 바이킹들의 대대적 침공으로 포트리우 왕국 국왕 우웬 막 웬구사과 그의 형제 브란, 아드를 위시로 한 포트리우 왕국 지배층이 그야말로 바이킹들에게 갈려나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인해 왕위 공백이 터져 4명 이상의 유력자들이 픽트 왕위를 놓고 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따라서 키나드 1세는 인근 왕국의 국왕으로써, 픽트 왕위를 위한 싸움에 참가해 왕위를 얻은 것이다. 또한 키나드의 픽트 국왕으로써의 재위가 843년에 시작된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848년이 돼서야 픽트 왕위를 요구하는 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픽트 국왕 즉위를 확정지은 것으로 본다.


2.3. 통치[편집]


정복왕이라는 별명답게, 그의 전공이 여럿 기록되있다. 삭소니아에 6번 침공했다고 하는데, 이 삭소니아가 독일 북부의 작센 지방을 일컫는지 잉글랜드의 색슨족을 일컫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현재 스코틀랜드 최남단에 있는 멜로스를 침공하고 던바를 불태웠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볼때 잉글랜드 북부까지 침공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반면 바이킹들의 공세에 시달렸고, 심지어 내륙까지 바이킹이 진출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바이킹의 공세가 스코틀랜드의 형성에 주요한 영향을 끼쳤는데, 키나드 1세와 게일인들의 본거지던 서부 군도 지역에 바이킹의 대공세가 시작되어 게일인들이 생존을 위해 스코틀랜드 본토로 넘어갔고,[2] 픽트인들과 습합을 택했기 때문이다. 이 게일인들을 스코트인이라 일컬으며, 이들의 나라가 바로 스코틀랜드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두 민족의 결합은 키나드 1세의 치세에 10세기 전후로 완성 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다만 키나드 1세가 두 민족을 결합시켰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으로, 현대에 키나드 1세는 스코틀랜드의 왕이라기보다는 픽트와 달 리아타 두 나라의 왕으로 보는 것이 더 맞다고 여겨진다. 그는 858년, 종양으로 킨벨라헤르에서 사망했다. 킨벨라헤르는 지금의 스콘 근교로 비정된다.


3. 역사적 의의[편집]


사실 그의 재위기간은 스코틀랜드 역사에선 아직 신화 시대에 가깝다고 분류되는 시대로, 그에 대한 기록도 당대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에 대해 다루는 최초의 기록은 10세기 말에 발간된 '알바 왕들의 연대기'라는 책에서 최초로 나타난다. 또한 1570년대에 조지 뷰캐넌이 쓴 '스코틀랜드의 역사'에서 키나드 1세의 이야기에 살을 붙여 현재 대중적으로 알려진 아버지의 원한을 갚고 스코틀랜드를 건국했다는 키나드의 전설이 최초로 완성된다. 이 기록들은 19세기 말 윌리엄 스콘 등의 연구에서 재검토되는데, 스콘은 픽트족의 왕사를 연구하다 픽트족의 모계 상속 전통을 밝혀냈고 이를 통해 모계가 픽트 왕족이라 픽트 왕위에 오른 게일인들의 선례를 찾아내면서 키나드가 왕위를 얻게 된 실제 계기가 드러나게 되었다. 현대의 역사가 알렉스 울프는 이 연구결과를 계승해 키나드가 스코틀랜드라는 정체성은 아직 없었고 그를 픽트 왕이라 보는 것이 더 부합하다는 주장을 하여, 현재는 그의 주장이 정설에 가깝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4. 자식[편집]


두 아들 카우산틴아드가 알려져 있다. 이 둘은 이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된다. 훗날 키나드의 가문은 알핀 가로 알려지는데, 알핀 가의 왕위 계승은 카우산틴 계파와 아드 계파가 돌아가면서 왕위를 갖는 독특한 방법으로 이뤄지게 된다. 딸은 최소 두 명으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은 스코틀랜드 남부의 브리튼인 왕국 어스트라드클리드의 왕 룬 압 아르흐갈과 결혼해서 오하드 막 룬을 낳았다. 다른 딸 말 미러는 아르드리 아드 핀들리어흐에게 시집가서 니얼 글룬두브를 낳았다. 아드 핀들리어흐가 죽자 플란 너 시나너와 재혼해서 돔날 막 플란을 낳았다. '울라 편년사'에 의하면 말 미러는 913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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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단 17세기 당대의 복장에 중세 스코틀랜드 느낌을 내려고 그레이트 킬트를 착용한 모습이다.[2]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예시로 849년, 키나드 1세는 스코틀랜드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한 아일랜드 수도사 성 콜룸바의 유물들을 달 리아타 땅에 있는 이오나 지역에서 픽트 땅에 있는 둔켈드 지역으로 옮겼다. 왕국의 주요한 성유물을 옮기는 행위의 중요성을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