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메시테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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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가이우스 푸리우스 사비니우스 아퀼라 티메시테우스
(Gaius Furius Sabinius Aquila Timesitheus)
출생
190년
사망
243년
직위
프라이토리아니 지휘관(근위대장)
자녀
트란퀼리나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로마 제국 군인 황제 시대권신. 고르디아누스 3세프라이토리아니 지휘관[1]이자 장인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탁월한 행정 능력과 준수한 군사적 역량을 갖췄다는 호평을 받았으나, 권력을 잡은 뒤 여러 실책을 저지르다 사산 왕조와의 전쟁 중 급사하면서, 고르디아누스 3세가 몰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2. 생애[편집]


'티메시테우스(Timesitheus)'는 고대 그리스 출신임을 암시하는 코크노멘이다. 하지만 프라에노멘과 노멘에 각각 '가이우스(Gaius)'와 '푸리우스 사비니우스(Furius Sabinius)'라는 로마의 저명한 귀족 가문 이름이 사용된 것을 볼 때, 그의 집안은 오래 전에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고 제국의 엘리트 계층과 긴밀하게 교류한 기사계급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기록에서는 이 인물이 전통적인 로마식 교육을 받은 로마인이었다고 설명했지만, 후대 학자들은 레반트 속주 태생의 그리스인이라고 추정했다. 최근에 리옹에서 이 인물을 기리는 비문이 발견되면서, 학자들의 추정은 사실로 드러났다.

비문에 따르면, 시리아 속주에서 태어난 그리스인으로, 집안이 부유해서 어릴 때부터 우수한 가정교사들로부터 수사학, 고전 문학, 예의범절 등을 두루 배웠다고 한다. 그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또는 카라칼라 치하에서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주에 있는 코호르스 제1 갈리아 보조군 기병 사령관을 맡으면서 관직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벨키카,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게르마니아 슈페리오르, 아라비아 속주의 징세관을 역임했으며, 백인대를 지휘할 수 있는 켄테나리우스(centēnárĭus)로 진급했다. 또한 218년과 222년에 아라비아 속주의 감찰관을 맡았으며, 이 자격으로 키레나이카 제3군단 지휘관을 맡았으며, 시리아 총독 휘하 최고 관료를 역임하기도 했다. 당시 동방에 주둔한 로마 군단이 겔리우스 막시무스, 베루스를 황제로 잇달아 추대하며 엘라가발루스 황제에게 반항했는데, 이들을 통제하는 임무를 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가 즉위한 뒤, 본격적으로 중용받았다. 그는 시리아 속주 징세를 총괄하는 동시에 2개 백인대를 지휘할 수 있는 두케나리우스(dŭcēnárĭus)로 진급했으며, 신전을 관리하기 위해 부과된 현물세를 징수하는 권한을 부여받기도 했고, 제국 황실 재산 감독관으로서도 활동했다. 세베루스 왕조는 시리아 출신 여인들의 입김이 강하기로 유명했는데, 특히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기엔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마마이아가 황제의 섭정을 맡아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그는 두 여인 밑에서 금고지기 역할을 하면서도 행정관료로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235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가 게르만족의 침략에 맞서 라인 전선으로 출정했을 때, 벨키카와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및 수페리오르의 행정관을 역임했고, 로마군이 라인 강을 건넜을 때는 게르마니아 2개 속주의 부총독을 맡아 원정군의 보급을 담당했다. 이런 중대한 임무를 맡긴 걸 볼 때, 시리아 여제들과 알렉산데르 황제는 그를 능력이 뛰어나고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인물로 여긴 듯하다.

235년 3월 21일, 알렉산데르 황제와 모친 율리아 마마이아, 원로원 의원, 황제 자문위원, 그리고 여러 장성들이 모군티아쿰[2] 병영에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이끄는 장병들에게 피살당했다. 그 후 막시미누스는 알렉산데르와 밀접한 관련이 있던 이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하지만 그는 별다른 해를 입지 않은 건 물론이고 오히려 중용받았다. 그는 비티니아, 폰투스, 파플라고니아 등 소아시아 주요 속주들의 회계 및 영토, 세금 관리 총책임자로 활동했다. 또한 동방의 원로원 속주 중에서 모종의 사유로 총독이 비어있는 속주의 대리 총독 역할도 수행했다. 아마도 행정면에서는 까막눈인 막시미누스가 자기 대신에 풍요로운 동방 속주에서 세금을 뜯어내서 게르만족과의 전쟁 비용을 충당해줄 적임자로 그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38년 고르디아누스 1세고르디아누스 2세가 막시미누스에 맞서 봉기하고 원로원이 이에 호응해 막시미누스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면서, 그의 경력은 꼬여버렸다. 원로원은 막시미누스를 지원하던 그의 계급을 2계급 이상 강등하고 로마에서 추방시켰다.

리옹의 비문에 따르면, 그는 공직을 떠난 뒤 루그두눔[3]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갈리아 일대 유력자들을 상대로 그리스-로마식 수사 교육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내전이 끝난 뒤 추방령은 취소되었고, 갈리아 루그두넨시스와 아퀴타니아 속주의 징세관으로 활동했다. 다만 대리 총독의 역할은 맡을 수 없었고, 계급도 복권되지 않았다. 임기가 끝난 후 로마로 돌아온 그는 여러 원로원 인사들과 접촉하다가 고르디아누스 3세의 모친인 안토니아 고르디아나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수사학 재능이 훌륭하고 행정 능력도 탁월한 그가 어린 황제의 후견인으로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241년 그의 딸 트란퀼리나와 고르디아누스 3세의 결혼을 결정했다. 결혼식은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가 소유했던 로마 근교의 아름다운 고르디아누스 별장에서 거행되었다. 그 후 프라이토리아니 지휘관에 선임되었고, 임페리움[4]을 부여받았다.

그는 즉시 자신의 사람들을 프라이토리아니에 심었다. 이때 발탁된 이들은 율리우스 프리스쿠스, 필리푸스 아라부스 형제 등 시리아 속주 출신의 인사들이었다. 또한 그리스, 푸닉, 시리아 계열 인사들이 고르디아누스 3세 정부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딸 트란퀼리나와 사위 고르디아누스 3세를 고결하고 아름답고 자상한 소년, 소녀 부부로 포장하여 여러 도시에 기념물들을 축조하는 등 대대적인 홍보를 벌였다. 그러던 241년, 아프리카 속주에서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사비니아누스 총독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보다 전, 고르디아누스 3세는 할아버지 고르디아누스 1세와 삼촌 고르디아누스 2세를 살해한 누미디아 속주의 제3 아우구스타 군단을 해체했다. 사비니아누스는 이로 인해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민병대를 끌어모아 거병하였고, 스스로 황제를 자칭했다. 그러나 마우레타니아 속주 총독이 군대를 소집한 뒤 즉시 토벌에 착수했고, 결국 사비니아누스는 토벌대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그는 이 사건을 빌미로 삼아 정적 숙청에 나섰다. 그는 사비니아누스의 반란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툴루스 메노필루스를 처형하고 기록말살형에 처했다. 메노필루스는 238년 4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라인 방면군이 아퀼레이아 공성전을 벌일 때 수비군 지휘관으로서 활약하여 막시미누스를 막아내, 끝내 성과없는 공성전에 지친 라인 방면군 장병들이 막시미누스를 살해하는데 일조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를 막시미누스 일파로 낙인찍고 추방하는 데 일조했기에 그의 원한을 샀고, 이로 인해 그가 사비니아누스의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걸 입증할 뚜렷한 증거가 없는데도 처형당했다. 이에 사람들은 그가 사적인 원한을 풀려고 메노필루스를 죽였다고 여겼다고 한다.

한편 이 시기에 제국 각지에서 지진이 자주 일어나 여러 도시가 큰 피해를 입었다.《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정부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유명한 신탁서인 시빌라 예언서를 보며 지진으로 인한 피해를 대처케 했고, 그 결과 재앙이 완화되었다고 한다. 현대인들은 "자연재해가 빗발치는데 주술행위만 했다"라며 이상하게 여길 수 있겠지만, 당대 로마인 입장에서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은 미신을 신봉하는 경향이 강했고[5], 만사가 신의 뜻대로 이뤄진다고 확신했다. 제국 각지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현상 역시 신의 징벌이라고 여겨 민심이 흉흉했을 테니, 그들을 달래는 차원에서 시빌라의 예언집을 참고하여 제사를 지내는 등의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실제로 당대 역사가들은 이 일화에 대해 어떠한 비판도 가하지 않았다.

239년 또는 240년경, 고트족과 카르피족(다키아인)이 함께 다뉴브 강 하류를 침략했다. 이때 고르디아누스 정부는 고트족에게 연공금 지불을 조건으로 포로를 석방시키고 그들을 돌아가게 했으나, 카르피족에게는 연공금 지불을 거절했다. 카르피족은 이에 분노하여 다키아 속주를 더욱 황폐화시켰다. 하지만 이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는데, 이 무렵 사산 왕조왕중왕 샤푸르 1세가 사막도시 하트라를 점령하는 등 노골적인 위협을 가했기 때문이다. 그는 개발이 덜 된 다키아 속주보다는 풍요로운 동방 속주를 지키는 게 우선이라 여기고, 사산 왕조의 침략에 대비하여 라인 강과 다뉴브 강 전선의 정예 병력을 차출하여 원정을 준비했다.

242년, 샤푸르 1세가 로마 동방 영토인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해 여러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소아시아안티오크를 위협했다. 이에 황제를 대동한 채 동방 원정에 착수했다. 황제가 대군을 이끌고 나섰다는 소식을 접한 샤푸르 1세는 이미 탈취한 도시들의 수비대를 철수시키고 유프라테스 강에서 티그리스 강으로 후퇴했다. 고르디아누스 3세는 첫 번째 원정 승리를 원로원에게 통지하면서 그 공로를 그에게 돌렸다. 원정 기간 내내 군대의 안전과 기강을 감독하고 단속했다. 그는 부대 내에 물자를 충분히 비축하고 전방의 모든 도시들에 식초, 베이컨, 밀짚, 보리, 밀 등의 창고를 짓게 함으로써 군인들이 안심하고 전쟁에 임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춘 로마군은 페르시아 원정에 착수하여 레세나[6] 전투에서 사산 왕조군을 격파하고 사산 왕조의 영토 깊숙이 진군했다.

그런데 243년, 돌연 사망했다.《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당시 설사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필리푸스 아라부스가 설사약이라며 건넨 약을 먹고 증상이 치명적으로 악화되어 사망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교차검증할 만한 다른 기록이 없기 때문에 현재 학자들은 이 기록의 신빙성은 없다고 간주하고 있다. 학자들은 그의 사망 원인은 이질 때문이라고 본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사망이었기 때문에, 당대부터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고르디아누스 3세는 장인을 무척 신뢰했기에 큰 충격을 받았고, 244년 2월에 신임 근위대장 필리푸스 아라부스에게 암살되거나[7] 사산 왕조와의 전투 도중 전사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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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위대장[2] 오늘날의 독일 마인츠[3] 오늘날의 프랑스 리옹[4] 전직 집정관 행정권[5] 전투를 치르기 전 닭에게 모이를 줘서 닭이 모이를 먹는 모습을 관찰해 전투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판단하기도 했다.[6] 오늘날의 시리아 라스알아인[7] 로마 측 기록[8] 사산 왕조 측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