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웨이크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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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웨이크필드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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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OS_2004_WSChampion.gif파일:BOS_2007_WSChampion.gif
MLB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

2004
2007

파일:2009 MLB 올스타전 로고.svg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2009




파일:MLB 로고.svg 2010년 메이저 리그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

데릭 지터
(뉴욕 양키스)

팀 웨이크필드
(보스턴 레드삭스)


데이비드 오티즈
(보스턴 레드삭스)

피츠버그 파이리츠 등번호 49번
제리 돈 글링턴
(1992)

팀 웨이크필드
(1992~1993)


토미 그린
(1994~1995)
보스턴 레드삭스 등번호 49번
마이크 하틀리
(1995)

팀 웨이크필드
(1995~2011)


결번




파일:Tim Wakefield.jpg

팀 웨이크필드
Tim Wakefield

본명
티모시 스티븐 웨이크필드
Timothy Stephen Wakefield
출생
1966년 8월 2일
플로리다 주 멜버른
사망
2023년 10월 1일 (향년 57세)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학력
오 갤리 고등학교 - 플로리다 공과대학교
신체
188cm / 95kg
포지션
선발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8년 드래프트 8라운드 (전체 200번, PIT)
소속팀
피츠버그 파이리츠 (1992~1993)
보스턴 레드삭스 (1995~2011)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1. 개요
2. 선수 경력
3. 사망
4. 피칭 스타일
5. 연도별 기록
6. 기타



1. 개요[편집]


미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야구팀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활동했던 우완 투수. 너클볼의 명수로 유명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데뷔 전[편집]


대학 때는 주로 3루수로 뛴 포지션 플레이어였고[1] 피츠버그 파이리츠가 8라운드에 지명하여 계약한 1988년 싱글A 리그에서도 3루수와 1루수[2]로 뛰었지만 마이너 리그에서 1년 반을 뛰며 타자로서 가능성이 없다[3]는 말을 듣고 바로 다음 해부터 투수로 전향했다.

스프링캠프 때 팀의 다른 1루수와 캐칭볼을 하는데 너클볼성 송구를 하는 것을 본 우디 하이키 감독이 "어이, 방금 그건 꽤 쓸 만한데? 스트라이크도 던질 수 있겠나?" 라고 물어서 "네, 고등학교 때 투수도 했어요. 못 할 것도 없죠." 라고 답했고, 시합 종료 후 마운드에서 약간 던져 봤는데 잠시 후 감독이 다시 사무실로 불러서 가봤더니 다른 코치들이 우루루 앉아서 그의 투구에 대해 평가를 하고 있고 감독이 말하길 "나도 이런 말하는 거 뭣하긴 한데... 이런 말은 나도 하고 싶어서 이런 말하는 건 아니고... 구단에서 자네가 1루를 맡는 걸 원하지 않나 봐. 투수로 변신했으면 하는 모양이야..." 라고 말하길래 처음에는 자기를 이런 식으로 포기하나 싶어 속이 많이 상했다고 한다. '난 아직 칠 수 있는데...' 라고 생각 중인데 감독이 대뜸 "안 돼!" 라고 말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즉, '투수로 전향 할래? 아니면 집으로 갈래?(= 돌아오지 말라는 뜻.)' 라는 이야기라서 눈물을 머금고 "좋습니다." 라고 승낙 했다고 한다.[4]


2.2. 피츠버그 파이리츠 시절[편집]


1992년 26살이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했고, 당시에는 준수한 외모와 겹쳐 13경기에서 8승1패 2.15를 기록하는 돌풍을 일으켰고 NLCS에서도 3, 6차전에 등판하여 모두 승리했고,[5] NL 신인왕 투표에서 3위를 기록한다.[6] 하지만 소포모어 시즌엔 6승 11패 평균자책점 5.61로 배팅볼 기계화되었고[7] 그 이듬해엔 마이너리그로 강등을 당하고 만다. 이후 1994년엔 스프링캠프에도 참가하지 못하며 피츠버그는 그를 방출했다.


2.3.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편집]


그런데 1995년 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하였다. 웨이크필드보다 더 이전 세대의 너클볼 레전드인 필 니크로는 그가 1992 NLCS 3차전에서 호투한 것을 눈여겨 봤었고, 피츠버그가 방출하자 "아직 어린 투수를 왜 방출하는 거지?" 라며 이해 하지 못하고 있던 찰나에 보스턴에서 웨이크필드를 영입하려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자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으니 꼭 잡으라!" 며 강력하게 추천했다. 그래서 보스턴이 그를 잡았다.[8]

그렇게 그는 2011년까지 17년 동안 한 팀에서만 뛴 레드삭스의 간판투수가 된다. 비록 데뷔는 레드삭스에서 하지 않았지만, 거의 20년을 레드삭스와 함께 했으니 명실상부한 레드삭스의 프랜차이즈 선수라고 볼 수 있다.[9]

2005년에는 레드삭스와 종신계약을 맺었다. 400만 달러에 매년 계약을 갱신할 수 있는 옵션으로, 구단이 원하는 한 영원히 계약을 연장할 수 있는 옵션이다. 2009년 시즌 후에 다시 2년 계약으로 돌아가서, 2011년까지 계약했다.

2007-08년에는 2년 연속 두 자리 승수를 거두며 노익장을 과시했고, 2009년에는 AL 올스타에까지 선발되었으나 부상으로 시즌의 1/3을 날려 먹었다. 부상의 여파는 2010년까지 계속되었고, 2011시즌에도 레드삭스의 유니폼을 입었지만 테오 엡스타인과 레드삭스 수뇌부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간 4m에 무제한 연장 옵션까지 달았던 것을 2010년 3.5m 2011년 1.5m으로 후려치면서 땜빵 선발 또는 불펜으로 막 굴려먹었다. 그 때문에 함께 연봉이 후려쳐진 제이슨 배리텍과 함께 뉴욕 양키스 팬들에게 동정을 받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월급이야 어쨌든 2011년을 193승으로 시작한 웨이크필드를 보는 시선들 중에선 나이가 들어 더는 어렵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시즌 초반에는 실제로 중계진으로 나와 그리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그러나 저주받은 레드삭스의 2011년 선발 로테이션[10] 덕에 선발 한 자리를 맡게 되어 그럭저럭 순항, 시즌 중반 200승 달성이 무난해 보였으나, 7월 26일 199승 달성 이후 7번의 선발등판에서 모두 승수 추가에 실패했다. 결국 9월 13일, 팀의 5연패 후 펜웨이 복귀전에 등판, 초반 홈런 2방으로 2-3, 4-5로 끌려갔으나, 보스턴 타선의 폭발에 힘입어 18-6으로 승리, 통산 200승 달성에 성공했다.[11]

그러나 2011년, 어메이징한 추락을 경험한 보스턴 레드삭스의 몰락[12]에 큰 영향을 끼친 콩가루 팀워크를 다잡을 생각은 안 하고 자신의 개인 기록에만 신경썼다는 주장이 나오며 한국과 현지에서 모두 고참으로서의 리더십이 아쉽다는 평이 나왔다. 한편 2011년에 만 45세를 넘기면서 제이미 모이어를 대신해 메이저리그 현역 최고령 투수가 되었다.[13]

결국 2012년 2월 17일, 은퇴 선언을 하며 20년 동안의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다만 은퇴 후 2017년에 입후보한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는 0.2%의 득표율에 그치며 그대로 후보자격을 상실했다.


3. 사망[편집]


현지 시각으로 2023년 9월 27일 커트 실링이 팟캐스트에 출연해 웨이크필드가 뇌종양 투병중이며, 그의 아내는 췌장암 투병중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문제는 당사자들의 허락이 없었다는 것. 투병 사실이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던 웨이크필드 가족은 이 사실에 크게 분노했으며 보스턴 레드삭스 측에서도 유감성명을 발표했다.# 팬들도 명예의 전당에 못 갈 만 했다며 발언에 있어 전혀 신중하지 않은 태도를 보여주는 실링을 비판하는 중이다.

며칠 후인 10월 1일 결국 부고가 올라왔다. 사인은 실링이 밝힌 뇌종양으로 추정.


4. 피칭 스타일[편집]


최고 구속도 130km/h 대에서 노는 이 선수가[14] 보스턴과 같은 명문팀에서 17년이나 버티기 위해서는 아무리 염가 봉사[15]라고 해도 애매하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시즌 162경기를 소화하는 리그에서 200이닝을 던져줄수 있는 투수는 팀운영에 매우 도움이 된다. 불펜 경험도 150경기 이상이며[16] 통산 방어율도 웨이크필드의 출전 전경기를 상위 하위로 딱 반을 가르면 상위는 평균자책점이 3점대가(정확한 수치계산을 하면 2점대 후반이 나올수도)나온다. 너클볼 투수의 숙명인지 공이 손에 긁히는 날은 에이스, 안 긁히면 그냥 배팅볼이다.

20년간 장수하며 200승-2000탈삼진-3000이닝 소화 등의 대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많은 야덕들에게 로망의 화신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아닌 너클볼 투수이기 때문이다. 필 니크로의 대를 잇는 너클볼 투수이자 2010년 뉴욕 메츠R.A. 디키가 너클볼을 장착해 활약하기 전까지는 21세기 메이저리그에서 너클볼을 주 구종으로 삼는 유일한 투수였다. 너클볼러임에도 아이러니하게 정교한 제구로 유명했다. 타자의 히팅을 유도하는 너클볼 투수의 특성상 카운트 승부가 중요한데 평소엔 불규칙한 궤도로 느릿느릿하게 날아오는 웨이크필드의 너클볼을 상대할 준비를 하던 타자를 갑작스레 존에 아슬아슬하게 들어오는 투심으로 잡아버리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 애당초 너클볼 자체가 작은 변화로도 회전이 들어가면 평범한 배팅볼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손의 감각이 중요한데 그런 너클을 능숙히 다루는 만큼 제구력도 좋았다고 한다.

다만 너클볼을 안정적으로 받아낼 수 있는 포수는 메이저리그에도 많지 않기 때문에 포수 궁합에 따라 성적이 널을 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 과거 보스턴의 주전 포수였던 제이슨 배리텍[17] 대신 덕 미라벨리를 전담 포수로 두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미라벨리도 정상적인 포수 미트를 쓰지 않고 훨씬 큰 소프트볼 1루수 미트를 써야 했다.


5. 연도별 기록[편집]


파일:MLB 로고.svg 팀 웨이크필드의 역대 MLB 기록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92
PIT
13
8
1
0
0
92
2.15
76
3
35
1
51
1.207
162
1.3
2.4
1993
24
6
11
0
0
128⅓
5.61
145
14
75
9
59
1.714
72
-0.5
-0.5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95
BOS
27
16
8
0
0
195⅓
2.95
163
22
68
9
119
1.183
165
2.6
5.0
1996
32
14
13
0
0
211⅔
5.14
238
38
90
12
140
1.550
98
1.0
1.2
1997
35
12
15
0
0
201⅓
4.25
193
24
87
16
110
1.391
106
1.8
1.9
1998
36
17
8
0
0
216
4.58
211
30
79
14
146
1.343
103
1.6
1.5
1999
49
6
11
15
0
140
5.08
146
19
72
5
104
1.557
99
0.7
0.2
2000
51
6
10
0
3
159⅓
5.48
170
31
65
4
102
1.475
93
-0.3
0.2
2001
45
9
12
3
3
168⅔
3.90
156
13
73
18
148
1.358
115
2.2
2.8
2002
45
11
5
3
5
163⅓
2.81
121
15
51
9
134
1.053
162
2.7
3.9
2003
35
11
7
1
0
202⅓
4.09
193
23
71
12
169
1.305
114
3.6
3.6
2004
32
12
10
0
1
188⅓
4.87
197
29
63
16
116
1.381
99
1.4
1.2
2005
33
16
12
0
0
225⅓
4.15
210
35
68
11
151
1.234
109
1.8
4.5
2006
23
7
11
0
0
140
4.63
135
19
51
10
90
1.329
103
1.2
1.9
2007
31
17
12
0
0
189
4.76
191
22
64
4
110
1.349
100
1.9
2.2
2008
30
10
11
0
0
181
4.13
154
25
60
13
117
1.182
112
1.1
2.8
2009
21
11
5
0
0
129⅔
4.58
137
12
50
10
72
1.442
102
1.8
2.2
2010
32
4
10
0
0
140
5.34
153
19
36
5
84
1.350
82
1.2
-0.6
2011
33
7
8
0
0
154⅔
5.12
163
25
47
8
93
1.358
84
0.1
-1.7
MLB 통산
(19시즌)
627
200
180
22
12
3226⅓
4.41
3152
418
1205
186
2156
1.350
105
27.3
34.5


6. 기타[편집]


  • 전담 포수와 관련하여 재밌는 일화로 2006년의 트레이드 소동이 있다. 2005년 시즌 후 더스틴 페드로이아의 콜업까지 남은 1년을 땜빵하려고 2루수 마크 로레타를 데려오는 과정에서 너클볼 캐칭 말고는 도대체 빅리그급의 기량이 아니었던 나이 든 포수 덕 미라벨리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트레이드시켰는데, 새 전담포수 조시 바드와 웩옹이 2006년 4월 한달 간 거둔 성적은 1승 4패에 포일이 무려 10개였다. 결국 트레이드 5개월, 시즌 개막 한 달만인 5월 1일에 보스턴은 미라벨리를 다시 트레이드해왔다. 그리고 역시나 이때 뉴욕 양키스는 보스턴이 미라벨리를 못 데려가게 하기 위해 고춧가루 경쟁 입찰을 했다. 트레이드 당일 오후 7시에 양키스는 시즌 첫 펜웨이 파크 원정이 잡혀 있었고, 레드삭스 선발이 웨이크필드였기 때문에 트레이드가 성사되면 당연히 미라벨리가 그 경기에 나설 것이었기 때문. 그러나 당시 파드리스의 GM 케빈 타워스와 레드삭스 GM 테오 엡스타인 두 사람은 평소 친분도 있었고, 파드리스에는 미라벨리가 없어도 주전 베테랑 포수 마이크 피아자가 있었기 때문에 부담없이 트레이드[18]를 성사시켰다. 레드삭스 프런트는 미라벨리를 구단주의 전용기를 띄워 샌디에고부터 보스턴까지[19] 데려왔고, 6시 48분에 공항에 도착하자 경찰차를 동원하여 경기 시간을 늦추면서까지 출전시키는데 성공했다.# 미라벨리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경찰차 안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었고 인사를 나눈 동료가 웨이크필드를 제외하면 양키스 유니폼을 입고 욕을 먹으며 1번타자로 첫 타석에 들어섰던 조니 데이먼 밖에 없었다고. 당시 사진을 보면 삭스 동료들이 매우 반갑게 맞아주는 것이 보인다. 아무튼 이러한 구단의 노력에 화답이라도 하듯 웨이크필드와 미라벨리는 7이닝 3실점 QS+를 합작, 승리를 거뒀으며 미라벨리는 삭스 팬들에게 The Savior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20]

  • 웨이크필드가 삭스팬뿐 아니라 많은 야구팬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꾸준한 성적이나 특이한 구질 뿐 아니라 훌륭한 인품 덕분이기도 하다.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 후보로 8번 추천되다가 2010년 드디어 수상의 영광을 차지했을 정도. 이것은 2차례의 월드 시리즈 우승과 함께 웨이크필드가 선수 시절 누렸던 최고의 영광으로 남았다.

  • 국내 야구팬들 사이에는 '웩옹'이란 별명으로 불린다.

[1] 대학교 2학년때는 홈런을 22개나 쳐서 그때부터 스카우터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2] 본인은 프로에서 장타력 있는 1루수가 되고 싶었다고...[3] 알루미늄 배트에서 나무 배트로 바뀐 것에 대한 적응에 어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웨이크필드 본인 말을 빌리자면 2할도 친 적이 없다고 스스로 말했다.[4] 출처: EBS에서 방영된 바 있는 EIDF 2012 스포츠 다큐멘터리 '너클볼!' 에서의 본인 인터뷰. 앞의 1~3번 주석도 동일 출처. 참고로 이 다큐멘터리는 너클볼항목의 6번 문항에서도 거론된다.[5] 하지만 결국 피츠버그는 7차전에서 2:1로 앞서던 9회말 2사 만루에 스탠 벨린다프란시스코 카브레라에게 역전 끝내기 2타점 적시타를 맞고 탈락했다.[6] 당시 NL 신인왕 수상자는 에릭 캐로스.[7] 개막전에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를 상대로 선발 출장했는데, 9회까지 완투하며 승리투수는 되었지만 볼넷을 10개나 내줬다고 한다. 옆에서 그 얘기를 듣던 R.A. 디키가 "10개라구요?" 라면서 반문하며 "믿을 수가 없어요. 제 영웅이신데..." 라며 놀라워 한다. 웨이크필드옹은 다 지난일이라 그런지 영웅이란 말에 기분이 좋은건지 그저 허허 하며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인다. 역시나 출처는 다큐멘터리 '너클볼!'[8] 출처는 다큐멘터리 '너클볼!'. 보스턴에서 웨이크 필드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과 마이너리그 계약을 하고 싶은데 지금 우리 스프링 캠프가 있는 포트 마이어스에서 니크로 형제가 여자 야구팀을 가르치고 있어요. 우린 당신이 그들과 연습을 좀 했으면 하는데 (정확히는 그들에게 좀 배워보자는 뜻) 어떻게 되는지 봅시다." 라며 오라고 하며 계약을 제시했다고 한다.[9] 그가 레드삭스에서 거둔 승수가 184승인데, 이는 192승의 로저 클레멘스사이 영에 이어 3위다.[10] 존 래키는 평균자책점 6점대, 마쓰자카 다이스케토미 존 서저리로 시즌아웃, 클레이 벅홀츠는 척추 피로골절로 재활, 거기에 조시 베켓, 존 레스터의 부동의 원투펀치마저 8월 하순에 부상으로 이탈했다.[11] 이 날 조기강판 당했던 보스턴의 젊은 유망주 선발투수가 바로 앤드류 밀러였다. 밀러는 결국 선발로서는 실패했고 불펜으로 전향한 후 포텐이 터졌다.[12] 8월 이후 엄청난 속도로 DTD를 시전했다.[13] 그리고 웨이크필드가 은퇴한 2012년 제이미 모이어가 잠시 현역으로 뛰기도 했다. 최고령 타이틀은 다시 모이어가 가져갔다(...).[14] 2005년 당시 메이저리그 선발투수 중 가장 느린 패스트볼의 소유자.[15] 보스턴에서 17년 동안 받은 통산 연봉이 6천만 달러가 안 된다.[16] 조진호가 메이저 리그 첫승을 거둘 때 마무리로 뒷받침을 해주기도 했다.#[17] 배리텍에 따르면 너클볼 캐치는 데이비드 오티즈 같은 왼손잡이 1루수를 유격수로 놓는 것과 같다고 한다.[18] 대가는 조시 바드, 클라 메러디스 + 현금 10만 불[19] 말 그대로 미국의 남서쪽 끝에서 북동쪽 끝까지[20] 여담으로 당시 이 영입 때문에 최희섭이 미라벨리에게 28번을 도로 뺏기고 로스터에서 제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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