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당(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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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과거에 한국독립당에 소속되어 있었던 대한민국 초기의 군인, 정치인이었던 김홍일이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직전에 재건한 당. 1963년 10월 30일에 창당되었다. 한국독립당의 역사를 감안한 작명이었으나 누가 봐도 이름을 팔아 선거용으로 내세운 것이 자명했으므로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다가 1965년 보궐선거에서야 간신히 한 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여 미약하나마 원내정당이 되었는데 그 국회의원이 바로 김두한이다. 그러나 이후 김두한은 바로 한독당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서대문형무소)에서 구속재판을 받다가 다른 야당의 구명운동[1] 으로 석방되어 불구속 재판을 받다가 무죄를 선고받아 누명을 벗었지만, 이미 감옥에서 여당과 박정희에게 큰 앙심을 품은 그는 무죄 선고를 받은지 2일만에 그보다 더 유명한 사건인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을 일으켜[2]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을 자기 손으로 마무리 해 버렸다. 결국 이후의 선거에서는 당선자를 못 내고 군소 정당으로 연명하다가 1970년 1월 25일 보수 야당 대통합이란 명목으로 신민당에 흡수 합당되었다.
2.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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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회의결로 불구속 재판으로 바뀌게 되었다.[2] 무죄를 선고받고 2일만에 진짜 죄를 지은 셈이었다. 당시 김두한은 오물을 뿌리기 전 박정희 정권의 문제점을 비난하는 연설을 하였기에, 후에 박정희가 그의 연설 속기록을 읽고 크게 분노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김두한은 다시 구속되어 수사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중정에 끌려가 심각한 고문을 당했다고 알려진다. 결국 집행유예로 풀려나긴 해서 감옥에 오래 살지는 않았음에도, 고문 때문에 후유증이 생겼고 사건 후 한반도 최고의 싸움꾼이자 튼튼함의 대명사였던 그가 6년만에 50대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