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보수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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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현황
2.1. 당색
3.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와 보수정당 간의 관계
3.1.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기원 논란
3.2.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의 역사
4. 역사
6. 현존 보수정당
7. 소속 정치인
7.1. 대통령
7.2. 국회의원
7.2.1. 14대 국회
7.2.2. 15대 국회
7.2.3. 16대 국회
7.2.4. 17대 국회
7.2.5. 18대 국회
7.2.6. 19대 국회
7.2.7. 20대 국회
7.2.8. 21대 국회
7.3. 민선 광역자치단체장
7.3.1. 서울특별시장
7.3.2. 부산광역시장
7.3.3. 대구광역시장
7.3.4. 인천광역시장
7.3.5. 대전광역시장
7.3.6. 울산광역시장
7.3.7. 세종특별자치시장
7.3.8. 경기도지사
7.3.9. 강원도지사
7.3.10. 충청북도지사
7.3.11. 충청남도지사
7.3.12. 경상북도지사
7.3.13. 경상남도지사
7.4. 기초자치단체장
7.5. 당대표
8. 역대 선거 결과
9. 관련 문서
10.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이 문서는 대한민국 역사상 이념적으로 보수주의를 표방했고 정치적 스펙트럼으로는 범우파 성향을 가졌던 제도권 정당 중에서 민주당계 정당이 아닌 정당들을 다룬다.[2] 즉, 민주당계 정당 문서와 달리 이 문서에 나오는 정당들은 그저 이념이 보수주의인 정당들일 뿐, 반드시 계보적으로 연결된 정당들이 아니다.
예컨대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과 오늘날의 국민의힘은 역사적으로 이어진다고 하기 어렵다. 자유당,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 등이 모두 민주당계 정당과 대척점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마치 한 계보의 정당으로 인식하고, 지지 기반이 이어진 것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는 오류에 가깝다.[3][4] 어쨌든 세 정당 모두 보수주의 정당이면서 민주당계 정당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이 문서에 함께 포함된다.
제6공화국 이후 3당 합당으로 탄생했으며 민주당계 정당과 함께 대한민국 국회의 거대 양당을 차지해온 국민의힘 계열 정당들[5] 역시 여기에 속한다.
2. 현황[편집]
2.1. 당색[편집]
보수정당을 상징하는 색깔은 총 4개인데, 하나는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이 사용한 청색과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후 고른 민주공화당의 갈색, 민주정의당부터 한나라당까지 쓰여왔던 파란색[7] , 새누리당부터 국민의힘이 현재까지 쓰는 빨간색[8] 이 있다.
그러나 다른 색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박정희의 교섭단체인 유신정우회는 노란색을 썼으며 청구동계를 주축으로 한 자유민주연합은 초록색을 썼다.[9] 또한 개혁신당은 주황색을 쓰고 있다.
3.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와 보수정당 간의 관계[편집]
3.1.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기원 논란[편집]
1945년 광복 이후의 초기 정당 시대 혼란 상으로 인해서 학술적으로는 의견이 엇갈리지만, 보수주의 이념을 따르는 정치세력들이나, 시민단체 및 일반인들은 일반적으로 이승만과 자유당을 대한민국 보수진영과 보수정당의 시조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고 들어가면 이승만과 자유당을 오늘날 한국 보수주의 진영 혹은 보수정당의 전신으로 보기는 어렵다. 자유당은 이승만의 대통령 사임 이후 정치적 영향력을 완전히 잃었고, 5.16 군사정변으로 해산된 뒤 명확한 후신 정당으로 부활하지 못했다. 1960년대에 자유당 세력은 민주당계 정당과 함께 민주공화당에 맞서는 범야권으로 분류되었는데, 군소 파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다가 뿔뿔히 흩어져 갔으며 특히 재건 자유당 등은 민주당계 정당에 흡수됐다. 그리고 첫 주류 보수 정당이니까 괜찮지 않냐고 하기에는, 당시 주류 정당들은 민주당계 정당을 포함해 다 반공 보수 우파였다. 따라서 그런 식이면 민주당계 정당 등 이 시기 모든 주류 정당들이 오늘날 보수의 시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국민의힘 홈페이지에서는 신한국당이 기원으로 되어 있으나, 더 거슬러 올라가면 국민의힘의 직접적 전신은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자유당을 비롯한 정부수립 초기 정당들은 민주자유당과 연관성이 약하다. 물론 민주자유당의 뿌리 중 하나인 신민주공화당은 민주공화당에 대한 계승을 표방하는 정당이었고, 이 민주공화당이 창당할 때 자유당 출신 인사들의 일부가 개별적으로 참여했으므로 자유당을 국민의힘 계보 정당으로 볼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민정당, 국민의당(1963년) 등 민주당계 정당에 참여한 자유당 출신 인사들도 있고, 민주당(1955년) 출신 인사들 중에도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한 이들도 있었다는 점에서, 민주공화당이 민주당계 정당보다 자유당과 연결성이 특별히 강하다고 보기 어렵다. 무엇보다 제3공화국 시기에 자유당 출신 세력은 민주당계 정당과 함께 민주공화당에 대립하는 범야권으로 분류되었다. 박정희와 민주공화당은 자유당을 구시대 정치 세력으로 규정하고 배격했으며, 지지 기반도 자유당과는 차이가 있었다.[10] 사실 박정희는 원래 이승만 정부 때 쿠데타를 하려다가 사정상 미뤄져서 장면 내각 때 한 것인 만큼 자유당을 계승하려 했을 리가 만무하다. 그래서 심용환 성공회대 교수 등은 자유당은 이승만 정권 이후 완전히 소멸한 것이고, 민주공화당은 새로운 세력이라고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실제 역사적 연결성 여부와 무관하게 한국의 현대 보수주의 이념의 기원을 따진다면 자유당을 기원으로 보는데 무리가 없다는 시각도 있다. 현재 '보수정당' 지지자들의 대부분은 이승만과 박정희를 동시에 긍정 및 존경하기에 자유당과 민주공화당 사이에 전신, 후신 관계 여부와 별개로 자유당이 자신들의 기원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오늘날 보수 진영이 그렇다는 것이지, 박정희 정부 당시 자유당과 민주공화당의 지지 기반이 같았던 건 아니다. 오히려 박정희의 지지 기반은 이승만에 반대하는 조봉암의 지지 기반에서 이어졌다는 분석이 많다.# 즉 후대의 역사적 변천으로 인해 보수 진영과 그 지지층이 이승만과 박정희를 둘 다 지지하게 됐다는 것이고, 정작 박정희 정부 당시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이 이승만의 자유당의 지지 기반을 계승했던 건 아니다. 마지막으로 어차피 적어도 1980년대까지는 민주당계 정당도 마찬가지로 보수 정당이었다는 점에서도 이 주장은 무조건적으로 맞다고 하기 어렵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 오늘날 더불어민주당 지지층 중에 김구를 존경하는 이가 많다고 해서 한국독립당이 더불어민주당의 전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최초의 근대적 민주공화국 중 하나인 미국의 경우에는 1960년대까지 자유주의자 존 로크의 영향을 받아서 18세기 건국의 아버지들의 이념이 자유주의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이것은 루이스 하츠(Louis Hartz)의 미국의 자유주의 전통(The Liberal Tradition in America, 1955)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 칼 벡커(Carl Becker)는 토머스 제퍼슨이 존 로크의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공화주의적 수정론자’로 불리는 여러 학자들이 18세기의 영국과 미국의 정치사상을 근본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정설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들에 의해서 공화주의 이념이 급격하게 부상하면서 미국의 건국기 이념이 자유주의였는가 공화주의였는가를 놓고서 1980년대 후반까지 수십년간 논쟁이 벌어져왔다. 이후 미국 보수주의의 뿌리이자 미국 건국기의 이념은 자유주의나 공화주의 특정 한 이념이 아니라 청교도 윤리 등을 포괄하여서 영향을 받았다는 다원주의적 관점이 주류가 되었다. 이런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지금의 획일적인 대한민국 현대 보수주의에 대한 사관보다는 좀 더 풍부한 내용으로 늘어나고 이것이 대중에게 피드백 될 필요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학계에서는 다양한 시각을 가지는데 가장 멀리 내다보는 시각은 이승만 대통령이 개화파였고 자유민권운동과 구국계몽운동을 주장한 독립협회 소속의 급진적인 성향의 청년이었다는 점을 들어서 개화파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11] 특히 이들은 개화사상이었던 자유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에 주목한다. 1870〜1890년대 집권세력이었던 사대수구당과 대립하던 개화독립당은 문명개화(文明開化)와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도모한, 당시로서는 진보세력이었다.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이 개화파 1세대라면,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2세대이다. 1세대의 대표이면서 개화파의 비조(鼻祖)인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교육받은 2세대 인물들은 실패한 갑신정변의 주역들이며 개화당이라고도 불린다. 이승만, 안창호, 양기탁 등은 개화파 3세대이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이 이 시기 배재학당에서 배운 사상을 가지고 광복 후 대한민국의 첫번째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이들을 한국 보수주의 이념의 시조로 여기는 것이다.
1919년 3.1 운동 이후 공화제를 채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고 마지막 주석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선포한 1948년 8월 15일까지 임정이 유지되었다는 점을 들어서 임정을 보수주의의 뿌리로 보기도 한다. 당시 제헌 헌법의 전문에는 1919년 독립선언으로 성립된 임시정부에 민주공화제 정부의 기원과 한국 통치 권력의 정당성이 있음을 명문화했다. 사실 이런 임정에 대한 계승의식은 1948년 건국론을 내세운 뉴라이트의 등장 이전까지 원래 보수 진영의 일반적인 시각이었다. 이런 시각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보수 진영은 대한민국은 민족주의적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했으며 그에 따라 1948년 9월 9일 만들어진 사회주의적인 북한에 비해서 훨씬 뿌리가 깊고 정통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민주당계 정당의 시초인 한국민주당 또한 해방 정국에서 임정을 봉대하는 운동을 펼쳤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는 이승만과 같은 스탠스를 취했으므로 임정을 보수정당의 뿌리로 보기 어렵다.
이외에 위에서 나왔다시피 지주, 자본가들을 대변하고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서 농지개혁에 반발했던 유산계급의 정당적인 특성으로 인해서 보수주의의 반동주의적 관점에서 민주당계 정당의 기원인 한국민주당을 조명한 경우도 있다. 아시아권에서는 일본에서 1800년대 후반 conservatives를 오역한 탓에 수구와 보수를 분리하고 전자이기를 꺼리기 때문에 그다지 지지받는 관점은 아니나, 서구권과 주류 정치학계에서는 이러한 반동주의도 보수주의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3.2.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의 역사[편집]
한국의 현대 보수주의 이념은 개화기, 구한말 시기의 일본으로부터 온 잘못된 번역어 탓에 반동주의를 배격하는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12] 광복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보수라는 단어가 들어간 정당명이 잘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시각이 있다.[13]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 창당 당시 한국민주당을 자본가와 지주계급의 정당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정치적 세력을 노동자와 농민의 대변자로 정의하여 통일노농당이라는 얼핏 급진 좌파스러운 당명을 쓰려 했었다. 앞의 시각을 가진 이들은 당시 보수 이미지가 기피의 대상이었다는 반증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자유당으로 바꾸기는 했지만 자유라는 단어도 근대 서구 정치의 맥락에 따르면 보수주의보다는 진보주의였다. 지금 민주당계 정당들이 본인들의 정치적 이념을 암묵적으로 자유주의로 규정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던 보수라는 단어가 유의미하게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반부터이다. 신상초는 1957년 “우리나라 정계나 언론계에서 보수와 진보를 구별하여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 3년 전부터”였다고 회고했다. 1954~55년 사사오입 개헌 이후 신당운동이 진행되면서 당의 이념과 정책, 결집할 정치세력의 범위를 놓고 보수 세력, 진보 세력이란 말이 생겼다. 그 이전까지는 여당·야당을 주로 사용하다가 신당 운동 이후부터 조봉암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은 진보, 자유당과 민주당은 보수로 규정되었다. 조봉암은 「내가 본 내외정국」(1955)에서 민주국민당의 몇 논객이 “진보적이니 혁신적이니 하는 것은 모두 다 사회주의에 통하는 것”이라는 구실로 자신을 배제했다고 비판했다.
한편 5.16 군사정변 이후 집권한 박정희는 빈농 출신으로서 기존의 정치세력들을 수구로 규정하고 그들과 다른 진보적인 정치적 포지션을 일정 부분 취했다. 이것 때문에 박정희는 진보당의 조봉암을 지지하던 진보적인 지지층을 얻었고, 여순 사건 등 용공론의 피해를 입었던 영호남에서 막강한 지지를 얻었다.[14]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진보가 무조건적으로 좋은 이미지였던 것은 아니다. 6.25 전쟁을 계기로 해서 좌파 세력이 정리 된 이후 남아있던 사민주의, 민주적 사회주의 계열의 중도좌파들은 진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나 1956년 진보당 사건을 계기로 해서 조봉암이 처형되고 진보당이 해체되면서 진보라는 용어도 부정적인 이미지를 얻었다. 사실 그보다 훨씬 전인 1952년 제2대 대선에 조봉암이 출마했을 때부터 색깔론 공격을 당하는 등 #, 대한민국에서 진보 좌익 세력은 언제나 부정적인 이미지에 시달려야 했다.
권용립에 따르자면 일제강점기를 거쳐 1970년대까지는 보수의 정치적 대척 이념인 진보가 강력하지 못했기 때문에 보수는 주로 일상 담론에서 봉건, 완고, 고루와 같은 퇴영적 함의만 축적해 왔다고 하였다. 한국에 정치적으로 보수주의 이념이 부상하기 시작한건 1980년대부터다.[15] 그 이전까지 진보는 관념으로만, 보수는 집단으로서만 존재해왔다고 평가되었으나 80년대의 일련의 사건으로 진보는 집단을 갖게 되고 보수도 이념의 체계화를 시도했다. 당시의 활발한 보혁 논쟁은 그러한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이렇게 민주-반민주 구도가 보혁구도로 바뀌었다. 그런 경향은 구 공산권의 붕괴로 더욱 심화되었으며 민주화가 된 이후에도 혁신계는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2004년이 되어서야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출하며 좌파(혁신계) 정당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한편 1987년 민주화를 계기로 기존 집권세력이 권위주의 통치로 사회변화를 막을 수 없게 되어버리자 민간에서는 보수주의 이념의 수호를 위한 사람들과 단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보수가 세력화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6공화국 이후 연성화된 보수여권을 무능하다고 비판했으며 보수야당들에 대해서는 부패하거나 위험하다고 하거나 색깔론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제한적이었는데 이런 보수주의가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였다.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계속해서 한국 보수주의 이념의 뿌리를 찾기 위한 노력을 하였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자유주의, 공화주의, 민주주의에 대한 개괄적인 학습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 정치권은 자유보수주의 성향의 보수계파들이 권위주의 세력들을 밀어내면서 두 세력간의 다툼이 원조 보수 논쟁이 일어났으며 1997년 IMF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자유보수주의 계파들이 서서히 쇠퇴하고 권위주의 세력들이 다시 득세하기도 했다. 이 시기 특징적인 것은 탈냉전의 영향에 따라서 대북 강경론에 따라서 보수와 수구가 분화되어갔고 서구 보수주의를 모방하는 방식으로 보수의 개념을 복권시키는 작업도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을 맞고 기존 권위주의 성향의 세력들이 크게 몰락한 상황에서 2000년대 중반부터 쇄신의 일환으로 적극적으로 신보수주의 이념을 받아들이면서 1970년대 등장한 글로벌화를 옹호하는 영미식 보수주의를 전범으로 신자유주의를 학습하며 경제적 자유주의를 내면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와 2010년 일련의 무상복지 사건으로 인해서 사회의 분위기가 진보적으로 흘러가자 위기를 느낀 보수 세력은 두가지의 방향으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한 부류는 정통 보수를 부르짖으며 우경화하면서 1990년도 때처럼 다시금 보수대연합을 통해서 위기를 극복하자고 외쳤으며 다른 부류는 개혁 보수를 부르짖으며 대안이념을 수용하면서 중도화해서 외연을 확장해 위기를 극복해야한다고 외쳤다.
2010년대는 대체로 전자 성향의 계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특히 이 계파의 인물인 박근혜가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이겨버리는 기적을 만들어내자 후자는 약화되었고 보수는 계속 우경화되었다. 또 후자 중에서는 이념적 대전환을 이뤄낸 영국 보수당을 본받아야한다며 이념적으로 유연한 보수가 될 것을 주문하며 지나치게 자유주의, 개인주의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흘러간 것에 대한 반성으로 공동체를 말하며 신공화주의를 외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2017년 박근혜가 탄핵당하면서 1990년도 보수세력들이 대연합을 통해서 만들어낸 것이 붕괴되자 보수는 아노미 상태에 빠졌다. 전세계에 유행한 대안 우파와 극우세력을 본받아 끊임없는 우경화와 극단화로 인해서 제도권 보수정당은 물론 민간의 보수진영 인사들도 극우라는 소리를 들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보수주의 이념은 2020년 총선 참패를 계기로 해서 터닝포인트[16] 를 맞이했다. 이로 인해 한국의 보수 진영은 영국 보수당 모델, 독일 기민련/기사련 모델의 독일식 보수주의 같은 유럽식 보수주의를 수용하였으며 2021년 재보궐선거를 계기로 기존의 보수를 혁신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수면 아래에서 논의만 이어지던 청년층 중심의 다양한 보수주의가 천천히 부상하고 있는 중이다.
4. 역사[편집]
4.1. 8.15 광복 ~ 5.16 군사정변[편집]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의 보수정당/8.15 광복 ~ 5.16 군사정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2. 5.16 군사정변 ~ 3당 합당[편집]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의 보수정당/5.16 군사정변 ~ 3당 합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3당 합당 이후[편집]
5.1. 민자당계 정당[편집]
자세한 내용은 민자당계 정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2. 충청권 보수정당[편집]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의 제3지대 정당/충청권 보수정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3. 중도보수 정당[편집]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의 제3지대 정당/중도보수 정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4. 기타 보수정당[편집]
1987년 민주화가 되고 제6공화국이 출범한 후 일반적으로 보수정당은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의 직계 후신정당인 한나라당계 정당을 의미한다.
그러나 1995년까지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이전의 민주당계 정당이 가진 이념적인 보수성에 주목한 사람들은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전까지의 민주당계 정당을 보수 성향의 정당으로 보기도 하며, 이 관점을 수용할 경우 새정치국민회의 혹은 열린우리당 이전의 한국 정치 지형은 보수양당제로 분류된다.
이외에도 민자당계 정당의 주요일파로서 신민주공화당에 뿌리를 두고 자유민주연합부터 시작한 충청권 보수도 존재하며 제6공화국 이후 지속되어온 민자당계 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의 양당제에 반기를 든 통일국민당이나 바른정당 등의 중도보수 성향의 개혁적 보수도 존재한다. 일각에서는 민자당계 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의 성향이 섞인 국민의당(2016년) 등의 중도주의 정당이나 창조한국당과 같은 정당도 중도보수의 개념에 넣기도 한다.
5.4.1. 한국미래연합[편집]
2002년 5월 17일 박근혜 1인을 중심으로 창당된 보수정당. 이회창과의 갈등때문에 창당되었는데 지방선거에서 참담한 패배를 겪으면서 박근혜는 조용히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5.4.2. 미래희망연대[편집]
원래 이 당은 2007년 10월 2일 대선용으로 창당된 민주당계 정당인 참주인연합이었다. 그러나 대선후보였던 정근모 전 과학기술처 장관이 낙선하고 개점휴업 상태였던 정당을 2008년 18대 총선을 앞두고 친이계에 의해서 공천에 떨어진 친박계가 집단 입당하면서 2008년 3월 13일 미래한국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가 같은해 3월 21일 친박연대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해당 항목 참조.
놀랍게도 18대 총선에서 자유선진당이 18석의 정당이 되었는데 친박연대는 14석의 의석을 확보하였다. 2010년에는 미래희망연대로 당명을 바꿨다가 박근혜가 한나라당의 당권을 잡고 난 후 2012년에 2월 2일 한나라당에 흡수합당되었다.
역대 당대표(당의 명칭이 친박연대가 된 이후의 당 대표만 아래에 기재한다.)
5.4.3. 미래연합[편집]
미래희망연대(구 친박연대)가 한나라당과의 합당 움직임을 보이자, 합당 반대파를 주축으로 이규택이 창당한 정당. 이름은 박근혜가 창당했던 한국미래연합의 약칭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마케팅을 일절 배제해버린 나머지 득표율 0.09%로 해산되었다. 해당 항목 참조.
5.4.4. 국민대통합당[편집]
장성민이 만든 대선용 정당. 해당 항목 참조.
5.4.5. 미래를향한전진4.0[편집]
바른미래당에서 탈당한 이언주를 중심으로 창당한 1인 보수정당이다. 중도우파부터 우파까지 포괄하는 보수 빅텐트를 표방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새로운보수당과 함께 미래통합당으로 신설합당하였다. 해당 항목 참조.
- 대표:
- 이언주 (2020년 1월 19일 ~ 2020년 2월 17일)
- 대표:
5.4.6. 한국경제당[편집]
국민희망당을 계승한 정당. 이은재 의원이 기독자유통일당을 탈당해 한국경제당으로 입당함에 따라 국회 원내에 의석을 가지게 되면서 제도권에 진입했다. 하지만 한국경제당은 21대 총선에서 원외정당에도 밀리는 비례투표율을 보임에 따라 참패하여 원외정당으로 다시 밀려나게 되었다. 이후 자유한국21 창당준비위원회에 흡수되어 자유한국21로 당명을 교체했다가, 자유민주당에 합류하기 위해 자진 해산하였다. 해당 항목 참조.
- 대표:
5.5. 비주류 보수정당[편집]
5.5.1. 구국참사람연합[편집]
전관 전 소장이 창당한 정당,
5.5.2. 민주통일당(2011년)[편집]
5.5.3. 새마을당[편집]
5.5.4. 국민희망당[편집]
5.5.5. 국제녹색당[편집]
이래원씨가 창당한 녹색 보수주의 정당.
5.5.6. 충청의미래당[편집]
- 대표: 박석우, 최창원(2020년 2월 21일 - 2023년 9월 20일)
6. 현존 보수정당[편집]
6.1. 원내[편집]
6.1.1. 민자당계 직계[편집]
6.1.1.1. 국민의힘[편집]
대한민국의 집권여당이다. 주류 보수정당인 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의 계보를 계승했다. 해당 항목 참조.
- 대표:
-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 2020년 5월 27일 ~ 2021년 4월 8일)
- 주호영 (권한대행, 2021년 4월 8일 ~ 2021년 4월 30일)
- 김기현 (권한대행, 2021년 4월 30일 ~ 2021년 6월 11일)
- 이준석 (대표, 2021년 6월 11일 ~ 2022년 8월 9일)[17]
- 권성동 (직무대행, 2022년 7월 8일 ~ 2022년 8월 9일)
- 주호영 (비상대책위원장, 2022년 8월 9일 ~ 2022년 8월 26일)[직무정지]
- 권성동 (직무대행/권한대행, 2022년 8월 26일 ~ 2022년 9월 8일)
- 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 2022년 9월 8일 ~ 2023년 3월 8일)
- 김기현 (대표, 2023년 3월 8일 ~ 2023년 12월 13일)
- 윤재옥 (권한대행, 2023년 12월 13일 ~ 2023년 12월 26일)
-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 2023년 12월 26일 ~ 2024년 4월 11일)
- 윤재옥 (권한대행, 2023년 4월 11일 ~ 2024년 5월 2일)
- 황우여 (비상대책위원장, 2024년 5월 2일 ~ 현재)
6.1.2. 중도보수[편집]
6.1.2.1. 개혁신당[편집]
국민의힘 초대 당대표였던 이준석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개혁보수정당. 해당 항목 참조.
6.2. 원외[편집]
6.2.1. 공화당(2024년)[편집]
- 2020년에 창당된 탈북민 수호운동 위주의 보수정당.
6.2.2. 국민통합연대[편집]
6.2.3. 내일로미래로[편집]
- 충청의미래당이 당명 변경한 정당으로, 원외 보수정당 빅텐트.
6.2.4. 대한국민당[편집]
6.2.5. 한국국민당(2015년)[편집]
- 대표:
- 윤영오(2015년 8월 4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