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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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페르시아 지배기 (카리아 왕국)
2.1.1. 리그다미스 왕조
2.1.2. 헤카톰노스 왕조
2.1.3. 역대 군주
2.2. 헬레니즘기
2.3. 로마 지배기 ~
3. 기타


1. 개요[편집]




파일:터키 아나톨리아.jpg
아나톨리아 반도에서의 카리아
파일:터키 카리아.png
카리아 지방의 주요 고대 도시 분포도 (푸른색은 인근 지역의 도시)

그리스어 Καρία
라틴어 Caria
터키어 Karya

아나톨리아 반도 서남부의 고대 지명. 현 튀르키예 서남부 무을라 도와 데니즐리 도 남부에 해당한다. 주요 도시 / 유적으로 할리카르나소스 (보드룸), 밀라사 (밀라스), 아프로디시아스, 에스키히사르 (스트라토니케아), 투르구트 (라기나), 달얀 (카우노스), 달라만 (칼린다), 카르푸즐루 (알린다), 귀뮈쉴뤽 (민도스), 크니도스 등이 있다. 서북쪽의 밀레투스디디마 역시 카리아 인들이 세웠지만 후일 문화적으로 이오니아에 동화되어 통상적으로 카리아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지명의 유래인 카리아 인들은 기원전 14세기 히타이트와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의 기록에 등장할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 민족으로, (현지 출신인)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제우스크레타의 아들인 카르 왕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밀라스의 제우스 신전이 최대 성지였고, 카르의 형제인 리도스와 미소스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리디아미시아 인들도 왕래하여 세 민족의 형제 의식을 다졌다고 한다.

상술된 여러 도시들 중 카리아의 중심지는 할리카르나소스였다. 비록 마우솔로스 영묘의 주인 마우솔로스 대왕이 고향 밀라스로 천도하였으나 사후 다시 할리카르나소스가 중심이 되었다. 3백년에 걸친 페르시아 지배기 동안 카리아에는 반세기 간의 공백기를 제외하면 세습 왕국이 있었고, 상당한 자치를 누리며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자체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헬레니즘 기에는 셀레우코스 / 프톨레마이오스 / 마케도니아 / 로도스 / 로마 간의 전장이었고, 로마 제국기에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늦게까지 다신교가 유지되던 지역이었다. 중세에는 동로마 제국을 거쳐 14세기 멘테셰 왕조 하에 재차 중심지가 되었으나 얼마 안가 오스만 제국에 병합되었다. 한편 다른 소아시아 지역보다 튀르크화가 크게 진행되어 이미 19세기 무렵 멘테셰 산작의 비무슬림 주민 비율은 1% 미만에 불과하였다. 그나마 고대부터 카리아의 특산물이던 무화과는 현재까지 일대의 대표 작물로 남아있다.

2. 역사[편집]


파일:카리아 터키 이란.jpg
파일:터키 카리아 석상.jpg
크세르크세스 1세 왕릉[1]에 묘사된 카리아 인
마우솔로스 영묘에서 출토된 남녀상 (아르테미시아 2세와 마우솔로스로 추정)

오랜 역사 만큼 카리아는 다양한 명칭으로 표기되었다. 히타이트어로 카르키자, 바빌론아카드어로 카르사, 엘람어와 고대 페르시아어로 쿠르카 표기되었다. 성경에서는 열왕기하 11장에서 '가리'로 등장한다. 역사적으로 미케네계 이주민들이 해안에 크니도스와 할리카르나소스를 세워 정착하였고, 트로이 전쟁 후 도리아계 이주민들이 로도스-코스-카리아 일대의 6개 도시에 정착하여 헥사폴리스라 칭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카리아 해안의 도시들은 뛰어난 해군으로 유명하였고, 한때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에피다우로스 등 그리스 해안을 지배하기도 하였다. 또한 카리아 인들은 육상 전투에서도 용맹함을 인정받아 스파르타, 이오니아와 함께 지중해 각지에서 용병으로 고용되기도 하였다. 한편 내륙에서는 히타이트의 멸망 후 기원전 11세기 신하타이트 계열 국가가 들어섰는데, 기원전 6세기 내륙과 해안을 포함한 카리아 전역은 크로이소스리디아에 병합되었다.

2.1. 페르시아 지배기 (카리아 왕국)[편집]



2.1.1. 리그다미스 왕조[편집]


파일:아르테미시아 터키.jpg
기원전 480년대 아르테미시아 1세의 치세에 발행된 동전

기원전 545년 카리아는 아케메네스 제국령이 되었고, 할리카르나소스를 주도로 하는 사트라피로 편성되었다. 기원전 520년 카리아는 현지 리그다미스 가문이 사트라프 자리를 독점하며 페르시아의 제후국으로 변모하였고, 상당한 자치를 누리며 페르시아 해군의 중추를 구성하였다. 기원전 490년대 카리아 북부의 도시들은 이오니아 반란에 가담했다가 진압되었고, 이로써 촉발된 페르시아 전쟁에서 카리아 해군은 페르시아 해군의 중추를 이루며 아테네에 맞섰다. 특히 할리카르나소스의 여왕 아르테미시아 1세크세르크세스 1세의 동맹으로써 아르테미시온 해전과 살라미스 해전에 참전하였다. 그녀의 활약은 후일 300: 제국의 부활 영화의 주연 중 하나인 아르테메시아 캐릭터의 모티브가 되었다. 한편 살라미스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 역시 모친이 카리아 인이었는데, 후일 도편추방제로 아테네에서 축출되자 페르시아로 망명하여 마그네시아 총독을 지내다 죽는다.

2.1.2. 헤카톰노스 왕조[편집]


파일:터키 마우솔로스.jpg
마우솔로스 영묘에서 발굴된 마우솔로스 대왕 석상
파일:픽소다로스 터키.jpg

기원전 340년대 픽소다로스의 치세에 발행된 동전

카리아는 기원전 454년 리그다미스 2세가 사망한 후 할리카르나소스는 델로스 동맹에 가입, 페르시아 지배에서 벗어났다. 다만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리스 군의 이오니아 원정을 격퇴한 후 기원전 428년 다시 페르시아 지배로 회귀하였고, 리디아 사트라피에 속해있다가 기원전 395년 밀라사 호족 가문 출신의 헤카톰노스가 사트라프에 오르며 반세기만에 사트라피로 환원되었다. 그후 이전 리그다미스 왕조처럼 세습제를 확립하며 카리아의 2번째 번왕국인 헤카톰노스 왕조가 성립되었다. 기원전 377년 헤카톰노스가 사망한 후 그의 다섯 아들 딸들이 연이어 통치했는데, 그중 첫번째인 장남 마우솔로스와 장녀 아르테미시아 2세는 남매끼리 결혼하였다. 기원전 366년 페르시아판 삼번의 난인 사트라프들의 난이 터지자 마우솔로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명으로 리디아의 아우토프라다테스와 함께 프리기아의 아드라미티온을 포위하여 반란 진압에 협조하였다.[2]

기원전 360년경 마우솔로스는 리키아 왕국을 멸하고 그 영토 대부분을 병합하였다. 이후 이오니아와 에게 해의 섬들을 공격하였고 로도스와 함께 아테네에 맞섰다. 또한 수도를 기존 할리카르나소스에서 가문의 거점인 밀라스로 옮겼다. 이렇듯 카리아의 전성기를 일군 마우솔로스는 기원전 353년 사망하였고, 계승한 아내이자 자매인 아르테미시아 2세는 그를 기리며 마우솔로스 영묘 건립을 명하였다. 다만 그녀는 2년만에 사망하여 결국 사후에 완공되었고, 남매이자 부부는 후일 마우솔레움의 어원이 되는 그곳에 매장되었다. 뒤이어 즉위한 이드리에우스아다 역시 남매 부부였고, 카리아는 로도스와 키오스 등지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기원전 343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명으로 40척의 함대를 이끌고 키프로스의 반란을 진압한 이드리에우스는 얼마후 사망하였고, 누이이자 부인인 아다가 계승했으나 기원전 340년 누이와 결혼하지 않은 막내 동생 픽소다로스에게 찬탈당하였다.

중립 외교를 추구하던 픽소다로스는 두 딸을 각각 페르시아 귀족 오론토바테스와 필리포스 2세의 아들 중 한명에게 결혼시켜 안정을 꾀하려 하였는데, 전자만이 성사되었다.[3] 그리고 오래 왕위 계승을 기다리느라 이미 연로한 상태에서 즉위했던 픽소다로스는 사위 후보였던 알렉산드로스 3세가 동방 원정에 나설 무렵인 기원전 334년 사망하였고, 사위 오론토바테스가 계승하였다. 한편 복위를 노리며 카리아 북쪽 끝의 알린다에서 웅거하던 아다는 밀레투스 공방전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남하하자 그를 입양하고 알린다를 내어주었다. 이를 수용한 알렉산드로스는 그녀에게 할리카르나소스 공방전의 지휘권을 주었고, 멤논과 오론토바테스가 코스로 퇴각하며 도시가 점령되자 아다를 카리아 군주로 복위시켰다. 다만 기원전 326년 아다는 노령으로 사망하였고, 이로써 카리아는 자연스럽게[4]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로 넘어갔으나 그 역시 3년 후 사망하였다.

2.1.3. 역대 군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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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fff,#000><rowbgcolor=#000000><rowcolor=#FFFFFF><-4> '''리그다미스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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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bgcolor=#000000><rowcolor=#FFFFFF><-4> '''헤카톰노스 왕조''' ||
|| [[헤카톰노스]] || [[마우솔로스]] || [[아르테미시아 2세]] || [[이드리에우스]] ||
|| [[아다(카리아)|아다]] || [[픽소다로스]] || [[오론토바테스]] || [[아다(카리아)|아다]] ||




2.2. 헬레니즘기[편집]


파일:스트라토케이아 터키.jpg
헬레니즘기 스트라토니케아에 세워진 극장
파일:attachment/diadochi_275.png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령 카리아 (기원전 274 ~ 195년)

대왕 사후 디아도코이 시기 카리아 지방은 재차 자립했다가 해안은 대부분의 시기 자치 도시로 유지되었으나 내륙 지역은 수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우선 안티고노스 1세가 차지했으나 입소스 전투카산드로스의 영토가 되었고, 다시 몇년 후 리시마코스가 장악하였다. 리시마코스는 더 나아가 해안까지 장악하며 카리아를 통합했으나 기원전 281년 그를 죽인 셀레우코스 1세에게 넘어갔다.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토로 유지되던 카리아는 기원전 274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게 점령된 것을 시작으로 시리아 전쟁의 주요 전장 중 하나로써 수차례 격전이 벌어졌다. 그틈을 노려 바다 건너 로도스 왕국이 크니도스 반도 내륙부와 밀라스 동쪽의 스트라토니케아 등 중부 일부를 장악하였다. (페라이아 περαία)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새로운 적을 만드는 대신 로도스와 동맹하여 셀레우코스-안티고노스 연합에 맞섰고, 이로써 카리아는 두 국가가 평화로이 분할 통치하게 되었다.

파일:터키 갈라티아 4.png
아파메아 평화 조약으로 로도스 령이 된 카리아

3차 시리아 전쟁까지만 해도 선전하던 이집트는 4차 시리아 전쟁부터 약한 모습을 보였다. 기원전 201년 로도스-프톨레마이오스 연합에 맞서던 안티고노스-셀레우코스 동맹의 마케도니아 국왕 필리포스 5세가 해상 원정을 감행, 카리아를 점령하였으나 로마의 개입으로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패하였다. 이로써 기원전 198년 카리아는 재차 프톨레마이오스-로도스 지배로 환원되었으나 이어진 5차 시리아 전쟁에서 안티오코스 3세가 이집트 군을 축출하고 카리아 전역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195년) 기원전 190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셀레우코스 군을 격파한 로마 공화국은 동맹인 페르가몬과 로도스의 영토를 더해주었는데, 이로써 로도스령 소아시아인 페라이아는 옛 카리아 왕국의 영역에 해당되는 카리아와 리키아로 확장되었다. 다만 기원전 167년 로도스는 로마의 보호국이 되었고, 페라이아는 크니도스와 카우노스 일대로 축소되었다. 동시에 로마는 카리아에 자유를 선포하였다.

2.3. 로마 지배기 ~[편집]


파일:터키 밀라스 3.jpg
2세기 밀라스 인근에 세워진 제우스 신전

자유 선포 후 카리아에는 로마 지배 하에 놓인 도시 국가들이 출현하였고, 그중 스트라토니케아는 기원전 39년 로도스 령 페라이아를 병합하며 위세를 떨쳤다. 로마 제국기인 서기 44년 자치권이 몰수된 옛 종주국 로도스와 달리 카리아는 비록 로마령 아시아 속주에 편성되었지만 어느정도 자치가 유지되었다. 또한 바울의 전도 여정에 포함되지 않은 탓인지 다른 소아시아 지역과 다르게 기독교세가 미약하였고, 4세기까지 주교구가 설치되지 않는 등 골수 다신교 지역으로 남았다. 로마 시대에도 행정구역 명으로는 쓰이지 않았지만 지역 내에서 통용되던 카리아는 7세기 테마 제도 개편으로 키비르하이오타이 테마가 설치되며 사장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대는 14세기 멘테셰 후국에게 점령된 후 급속히 튀르크화 / 이슬람화가 진행되며 옛 그리스-로마의 모습을 잃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민족 변동이 심했던 터키 내에서도 고대와 현대 간의 문화적 괴리감과 단절이 심한 편이다.

3. 기타[편집]


고대 그리스의 인상주인 카리아티드가 페르시아 전쟁 당시 동족인 그리스가 아닌 적의 편에 선 것에 대한 징벌로 카리아인 여성들을 본따서 기둥을 조각한 것이라 알려져 있기도 한데, 카리아티드는 소아시아의 카리아가 아닌 그리스 남부의 도시 카리아이를 지칭하는 것이다. 애초에 카리아 인들과 그리스 인들은 유사 문화권이긴 했어도 서로 동족으로 보지 않았다. 그리스-마케도니아 관계와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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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르세폴리스 인근 낙쉬 에 로스탐에 있음[2] 초반에는 반군에 호응하기도 했다가 곧 페르시아와 협력, 비록 스파르타의 개입으로 아드라미티온 함락은 실패하나 반란의 기세를 꺽는데 성공, 결국 프리기아 사트라프 아리오바르자네스는 내분으로 암살된다[3] 혹은 한 딸을 오론토바테스 혹은 알렉산드로스에게 결혼시키려 했는데 필리포스 2세의 거절로 전자에 결혼시켰다고도 한다. 확실한 것은 10대의 알렉산드로스가 (장애인 형을 제치고) 카리아 공주 아다와 결혼하고 싶어 했다는 것[4] 아다가 알렉산드로스를 양자로 삼았으므로 자연스럽게 양자에게 상속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