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년 대폴란드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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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iloslaw.jpg

미워스워프 전투를 묘사한 그림. 1868년작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결과 및 영향


영어: Greater Polish Uprising of 1848 (1848년 대폴란드 봉기)
폴란드어: Powstanie Wielkopolskie 1848 roku (1848년 대폴란드 봉기) / Powstanie Poznańskie (포즈난 봉기)
독일어: Posener Aufstand von 1848 (1848년 포젠 봉기) / Polnischer Aufstand in der Provinz Posen von 1848 (1848년 포젠 주의 폴란드인 봉기)

1. 개요[편집]


1848년 대폴란드 봉기는 1848년 혁명프로이센 왕국포젠[1]에서 일어난 폴란드인들의 봉기를 일컫는다.


2. 배경[편집]


대폴란드 지역은 포즈난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당대에는 프로이센 왕국포젠 대공국이었던 이 지역은 1793년 2차 폴란드 분할 후 프로이센으로 편입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8년간 바르샤바 공국이라는 이름의 폴란드 국가의 일부가 되기도 하였지만 빈 회의 이후 환원되었고 30여년간 이 지역은 프로이센의 통치를 받았다.

포젠/대폴란드를 통치하던 프로이센은 독일인 개척자들을 수십만 단위로 지역에 정착시키되 빈 회의에서 폴란드인들의 언어, 민족과 종교를 존중할 것이라고 약속했고 그 결과 프로이센 왕국 산하 포젠 대공국이 수립되어 폴란드인들의 자치를 보장받았다. 불과 5년도 안 지켜졌지만. 1819년에 이르러서 프로이센 당국은 행정, 교육, 사법 전반에서 폴란드어의 퇴출을 점진적으로 진행시켰다. 이러한 정책은 1822년에 잠시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1824년에 이르러서 재개해 1825년에는 전보다도 노골적으로 이뤄졌다.

1830년 러시아령 폴란드 입헌왕국에서 11월 봉기가 일어나자 프로이센은 러시아 제국의 폴란드 반란 진압을 지원했고 자국 내 폴란드인들에 대한 대응도 강경화되었다. 포젠으로의 개척자 이주도 증가하는 한편 정부와 법정에서 폴란드어의 사용은 전면 금지되었다.

이러한 민족 탄압에 폴란드인들의 불만은 고조되어 왔고 이미 1846년에는 봉기를 모의한 폴란드인 254명이 체포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런 와중 전 유럽에 혁명의 열기가 불어오고 프로이센을 포함한 독일 전역에서 3월 혁명이 발생하자 대폴란드 지역에도 봉기가 벌어졌다.


3. 전개[편집]


프로이센을 포함한 독일 지역이 3월 혁명 와중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정치범들을 사면시키면서 폴란드인 정치범들도 석방되었는데 이 폴란드인들은 독일의 혁명가들과 배회하고[2] 베를린 황궁에서 "폴란드 군단"을 수립했다. 이 폴란드 혁명가들은 독일의 혁명가들과 협력이 가능하다고 보았고 통일 독일과 독립 폴란드가 러시아 제국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을 것을 믿었으며 이에 대한 연설들을 했다.

베를린에서 벌어진 3월 혁명의 사건들에 영감을 받은 포즈난의 폴란드인들은 폴란드 국민회의를 열고 3월 20일에 데모를 일으켰다. 폴란드 국민회의와 포젠 주 당국은 폴란드인들에 베를린에 포젠 폴란드인들의 의사를 담은 서한을 보내는 것에 동의했다. 초안에는 폴란드의 독립을 명시적으로 요구하였으나 자치로 선회하였다.

폴란드 국민회의에서 포젠의 독일인과 유대인들의 가입을 배척한 것과는 별개로 봉기 초기 폴란드인들과 독일인들의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독일인들은 폴란드인들의 데모에 함께 참석하여 연대를 표했다. 한편 대폴란드의 프로이센군은 폴란드인들과의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해 주둔지에서 이동하지 않았으며 베를린에서 수립된 루드비크 미에로스와프스키의 폴란드 군단은 프로이센 철도의 도움을 받아 포즈난으로 귀환했다.

하지만 프로이센과 독일인들의 폴란드 민족운동에 대한 호의는 마냥 이유 없는 것이 아니었으니, 독일 혁명 수뇌부는 통일 독일독일 혁명을 원하지 않을 러시아의 개입을 우려했고 폴란드인들을 혹시나 있을 전쟁에서의 고기방패로 보았다. 따라서 러시아의 전쟁 위협이 잦아들자 독일인들은 폴란드 민족운동에 적대적으로 돌변했다. 특히 대폴란드 지역의 독일인들과 유대인들은 폴란드인들이 기존 독일계 행정부를 폴란드계 행정부로 대체하고 폴란드인 군대를 조직하면서 우려를 자아냈고 폴란드 민족운동이 포즈난 시를 벗어나 대폴란드 전지역으로 번져 대폴란드 각지에서 프로이센의 상징물들과 독일계 이민자들이 공격받고 폴란드인들과 프로이센군의 충돌이 가시화되었다. 독일인들과 유대인들은 이러한 충돌에 대응하여 포즈난의 독일 국민회의를 조직하여 추후 프랑크푸르트에 세워질 독일 의회에 포젠이 독일 연방에 포함될 것을 요구하였고 이는 실제로 이뤄졌다.

독일-폴란드 충돌이 악화되던 3월 24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포젠의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독일인과 폴란드인 각각을 위한 의회를 구성할 것을 중재안으로 선언했고 폴란드인들이 이를 대폴란드 자치의 수용으로 받아들이면서 무력충돌은 연기되었다. 다만 4월 이 행정 개편과 의회 수립에 관한 회의가 진행 중일 무렵부터 폴란드인들의 포즈난 의회가 대폴란드의 독일 연방 가입투표를 부결시키자 독일 민족회의는 독일-폴란드 우호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성명을 냈고 이전부터 폴란드인들의 무력진압을 주장하던 프로이센군은 포즈난 시를 포위했다. 무력충돌에는 승산이 없음을 본 폴란드 민족회의는 폴란드 민병대 및 군단의 비무장화를 결의하지만 미에로스와프스키는 이를 거부했다.

4월 29일을 기점으로 독일계 민병대와 프로이센군이 자진 비무장화와 동원해제한 폴란드계 민병대원들을 잇달아 공격하였고 600여명을 사살했다. 분노한 폴란드 농민들은 다시 봉기하여 게릴라 전술에 나섰고 미에로스와프스키의 1200명 규모 민병대는 4월 30일 미워스와프에서 프로이센군 2500명과 맞붙어서 승리했다. 폴란드인들은 프로이센과의 타협에 다시 나서 자치를 받아내기를 희망하였으나 논의가 재개되는 일은 없었고 뒤이은 충돌에서 폴란드인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미에로스와프스키는 사임하고 폴란드 군단의 새 사령관 아우구스틴 브제잔스키는 5월 9일 항복했다.[3]


4. 결과 및 영향[편집]


이 봉기 이후 포젠 대공국은 공식적으로 해산되어 프로이센의 주가 되었다.

이 충돌은 폴란드 독립운동에 큰 인상을 남겼는데 첫째로 폴란드인들에게 폴란드 독립은 독일과의 협상으로는 얻어낼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또 눈여겨볼 점은 이 봉기에서는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이나 러시아령 폴란드 입헌왕국에서와는 다르게 굉장히 활발한 폴란드 농민들의 참여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상술한 두 사례에서와는 달리 프로이센령 폴란드에서는 유의미한 독일 개척자들의 유입으로 폴란드 농민들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차이점에서 비롯한다.

이 봉기의 여파로 1,500여명의 폴란드인들이 포즈난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이 수감자들은 구타와 고문을 겪었고 미에로스와프스키 본인도 투옥되었다가 프랑스의 외교적 항의로[4] 해방되었다.

폴란드 독립운동의 노선도 선회를 겪어 "유기적 노동"[5]으로 대표되는 폴란드어, 문화, 전통과 가톨릭 신앙의 보전을 위한 운동과 폴란드계를 경제적으로 부강하게 발전시키면서 정치적인 힘을 얻는 민족계몽운동을 펼쳤는데 이는 1차대전의 발발까지 폴란드 독립운동의 주 노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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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폴란드다.[2] 추후 이 봉기를 지도할 루드비크 미에로스와프스키는 아예 독일의 흑적금기를 흔들며 베를린 시민들의 환호를 받았다.[3] 공교롭게도 이 날은 97년 후 나치 독일소련에 항복한 날이다. 2014년까지는 폴란드에서도 이 날을 승리의 날로 기념했다.[4] 미에로스와프스키의 모친은 프랑스인이었다.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독일에 대한 견제 차원이었지만.[5] Organic 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