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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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K리그}}}
창설

1983 시즌

1984 시즌

1. 창설 배경과 준비
2. 대회 방식
3. 외국인 선수
4. 클럽 순위
5. 의의
6. 다른 시즌 보기


파일:attachment/K리그/1983년/1983.jpg





1. 창설 배경과 준비[편집]


한국의 성인 축구 리그 역사는 꽤 오래 됐다. 일제강점기 시절 경성부를 중심으로 경성축구단평양축구단 등 각 도시별 실업팀이 여럿 운영됐으나 해방과 6.25 전쟁 이후 대부분 와해됐다. 다수의 팀이 리그 형태로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964년에 출범한 전국실업축구연맹전이 시초로 이 연맹전이 한국 성인 축구의 최상위 리그로 운영됐다.

실업 축구 리그의 프로화는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축구계의 숙원 사업이었으나 일부 실업팀들의 반발 때문에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대한축구협회는 프로화 추진에 앞서 1975년과 1980년에 단일 리그 체제였던 실업 리그를 1부 리그와 2부 리그로 나누고 승강제를 추진하려는 노력을 했으나 일부 실업팀들이 이마저도 반발해 승강제 도입이 실패했다.

답보 상태를 걷던 축구의 프로화가 본격화된 것은 1980년대가 밝아오면서부터다. '실업 축구의 프로 전환'을 공약으로 내세운 최순영신동아그룹 회장이 1979년 대한축구협회 회장에 취임하고 1980년 집권한 전두환 정부3S 정책을 앞세우며 국민들의 관심사를 정치에서 벗어나게끔 하려는 노력을 하면서 축구의 프로화가 본격적인 닻을 올리게 된다.

특히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전두환소문난 축빠였기에 축구의 프로화는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전두환은 육군사관학교 시절 교내 축구부에서 골키퍼를 맡을 정도로 축구를 잘 했고 박정희 대통령 재임 당시에는 청와대 관저에서 박정희의 옆에 앉아 TV로 중계 되는 축구 경기를 90분 동안 쉬지 않고 해설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로 축구 이론과 실기에 능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프로축구 출범을 위해 먼저 움직인 쪽은 청와대 참모들이었는데 1981년 5월 교육문화수석비서관실에서 프로스포츠 출범을 위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참모들은 종목별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야구 쪽에서 박영길 당시 롯데 자이언트 감독, 이호헌 KBS 야구 해설위원, 이용일 대한야구협회 전무 등을 불렀고 축구 쪽에서는 최순영 축구협회 회장을 불렀다. 참모들은 야구와 축구 쪽에 각각 종목별 프로 리그 출범 계획을 물었는데 박영길 감독이 "야구는 1976년에 재미사업가 홍윤희 씨가 만든 프로화 계획이 있다"고 말했고 최 회장 역시 "축구도 준비는 끝났다"고 말했다.

다만 비용 문제에서 향방이 다소 갈렸는데 최순영 회장이 "정부에서 139억원을 국비로 지원해서 경기장 시설 투자를 해달라"고 요청한 반면 이용일 전무는 "야구는 정부 지원 없이 대기업의 출자만으로 프로야구 리그를 만들 수 있다. 대신 정부에서 야구단을 창단하는 기업에 융자 혜택과 세제 혜택을 달라"고 말하면서 참모들이 야구를 밀어주기 시작했다. 이 계획대로라면 프로축구에는 나랏돈이 들어가지만 프로야구에는 나랏돈이 안 들어가도 됐기 때문이다.

결국 청와대 참모들은 야구의 프로리그 출범을 우선적으로 추진하기로 하고 그 계획을 정리해서 전두환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프로스포츠 창설 계획서' 첫 페이지를 열어본 전두환의 반응은 다소 엉뚱했다. 그는 "어? 이거 뭐야? 야구야? 난 프로스포츠라고 하길래 축구인 줄 알았지" 라고 말했다고 한다. 전두환 개인적으로는 프로야구보다 프로축구의 출범에 더 관심이 많았다는 증거다. 어쨌든 정부의 입김으로 한국프로야구가 1982년 먼저 출범했고 프로축구는 이듬해인 1983년에 출범하기로 한다.

프로축구 출범 당시 계획은 기존의 할렐루야 축구단 1팀에 1982년 중 3개 팀을 추가로 창단해 1차로 4구단 체제를 만들고 1983년 4개 구단을 추가로 창단해 총 8개 구단 체제로 리그를 꾸리겠다는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원하는 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1983년 2월에는 슈퍼리그 창설위원회가 축구협회 산하에 만들어지게 된다. 그러나 끊임없이 장애물들은 등장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브라질 프로팀 초청건이었다. 국가대표팀과 브라질 프로팀과 초청경기를 통해 축구열기를 지핀다는 계획은 참신했지만, 당시 지방의 각 시도의 협회 지부는 "프로야구 때문에 관객유치가 곤란하다. 적자를 내면서까지 대회를 유치할 수는 없다"며 반대한다. 뿐만 아니라 프로화에 대해 오히려 실업팀이나 프로팀마저 슈퍼리그에 제각각의 이유를 대며 딴지를 거는 통에 협회는 내부간 싸움까지 겹쳐 어수선한 상태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일신한 것은 그해 개최된 대통령배로, 협회는 첫 개막전을 제외한 모든 경기를 무료로 개방함으로써 72게임 동안 20만명의 관중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고 이는 한국주택은행 축구단, 한일은행 축구단, 그리고 현대자동차[1]가 슈퍼리그 참가를 요청해올 정도로 열기는 무르익게 된다.


2. 대회 방식[편집]


당시 대회 방식은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전주, 춘천, 마산, 안동 등 총 9 도시를 순회[2]하며 모두 40경기를 벌이는 것이었다. 하루에 두 경기씩 토요일, 일요일에 경기를 개최했고, 형식상 각 팀당 지역연고는 존재했으나 사실상 미약했다.
팀명
연고지
창단년도
기타
유공 코끼리
서울 인천 경기
1982
프로팀
할렐루야 독수리
충남 충북 강원
1980
프로팀
포항제철 돌핀스
대구 경북
1973
실업팀
대우 로얄즈
부산 경남
1979
실업팀
국민은행 까치
전남 전북
1969
실업팀


3. 외국인 선수[편집]


  • 프로 출범과 동시에 외국인 선수의 기용도 허용되었다. 팀 당 2명의 외국인 선수를 영입할 수 있었고, 동시에 2명 모두 출전이 가능했다.

4. 클럽 순위[편집]


83 수퍼리그
순위

경기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구단 형태
비고
1
파일:할렐루야축구단 엠블럼.png할렐루야 독수리
16
6
8
2
28
20
+8
20
프로

2
파일:대우 로얄즈 로고.svg대우 로얄즈
16
6
7
3
21
14
+7
19
실업

3
파일:유공축구단 엠블럼.png유공 코끼리
16
5
7
4
26
22
+4
17
프로

4
파일:포항제철축구단 엠블럼.png포항제철 돌핀스
16
6
4
6
21
21
0
16
실업

5
파일:국민은행축구단 엠블럼.png국민은행 까치
16
3
2
11
11
30
-19
8
실업


  • 승리 시 승점 2점, 무승부는 승점 1점을 획득한다.
  • K리그 1983 시즌 우승
  • 할렐루야 독수리는 구정컵 국제축구대회에서 준우승하였다.

수퍼리그 1983 우승
파일:할렐루야축구단 엠블럼.png
할렐루야 독수리
첫 번째 우승


5. 의의[편집]


본격적인 프로 리그의 출범이자 원년이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흥행도 평균 2만여명을 동원하는 등 우수한 성적을 보였던 한 해였다. 뿐만 아니라 시즌 경기가 TV를 통해 중계됨으로써[3] 저변을 확대할 수 있었고, 그동안 사그러들던 축구열기를 다시 지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총 5팀 중 프로팀은 2개, 실업팀은 3개로 구성되어 있어 아직 진정한 의미의 프로리그라고 보기가 힘들었고, 하루에 2경기씩을 개최하는 살인적인 일정 또한 아직 프로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쨌든 슈퍼리그의 출범으로 인하여 기존의 실업팀 중 프로화를 생각하는 팀이 늘어났고, 프로화는 대세가 되었다.


6. 다른 시즌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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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 울산 현대[2] K리그 팬 사이에서는 유랑극단 방식이라고 부른다.[3] K리그는 KBS가 열성적으로 중계를 해줬는데 한 해 먼저 출범한 KBO 리그의 TV 중계가 상당한 자극제가 됐다는 후문이다. 출범 초창기의 KBO 리그는 자사 산하 야구단을 보유하고 있던 MBC가 일주일에 1~3번은 반고정으로 야구 생중계를 편성하면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