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S./인기 및 위상/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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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정규 1집

S.E.S.
(1997.11.24)

정규 2집

Sea & Eugene & Shoo
(1998.11.23)

정규 3집

Love
(1999.10.29)

정규 4집

A letter from Greenland
(2000.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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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4.5집

Surprise
(2001.07.11)

정규 5집

Choose My Life-U
(2002.02.14)

리믹스 싱글

Remixed
(2002.08.28)

스페셜 5.5집

FRIEND
(2002.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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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싱글

Love [story]
(2016.11.28)

스페셜 20주년 기념

REMEMBER
(2017.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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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첫 등장 당시
4. 데뷔와 동시에 성공
5. 20년 만에 걸그룹 계보
6. 성별과 세대를 구분하는 기준
7. 같은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화제
8. 1990년대 신(新) 메이크업 트렌드 주도
9. S.E.S. 성공 후 3인조 걸그룹 범람
10. 걸그룹 최초 저녁 메인뉴스에 단독 소식으로 보도
11. 글로벌 위상
11.1. 걸그룹을 취재하기 위해 외신 기자들이 방한한 최초 사례
11.3. ·· 문화 가교자 역할
12. 대중적 인지도
13. 시청률 상승 및 파급 효과
14. 국가 행사를 대표하는 국민 아이돌로서의 위상
14.1.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오찬에 초대
15. 음반 판매량
16. 팬덤
17. 1위 맞대결
18. 생방송 여론조사
19. 캐시카우 걸그룹으로서의 위상
20. 방송사 특별 편성 위상
20.1. 활약상을 조명하는 지상파 예능 코너 방송
20.2. 단독 지상파 특집 프로그램 편성
21. 한일 양국 교과서에 등재
22. 기록 정리



1. 개요[편집]


S.E.S.한국 인기 및 위상을 정리하는 문서이다.

2. 상세[편집]




2017.01.10 줄거리 알려줌

총 5년 간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활동 기간 동안 S.E.S.는 '대중성, 팬덤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여기에서만 끝나지 않고 '아이돌 가수로서는 결여되기 쉬운 음악성과 실력까지 겸비하였고, 짜임새 있는 칼군무와 무대매너로 그 당시 기준으로도 시대를 앞서나가고 굉장히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음악과 컨셉을 선보이며 대중들과 대중가요 전문가 및 업계 관계자들로부터 동시에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로 인해 25년이 흐른 지금도 S.E.S.가 남긴 음악과 무대는 지금 봐도 세련되고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3. 첫 등장 당시[편집]


S.E.S. 등장 이전 한국 가요계는 점차 성인 가요에서 10대 가요로 주류가 개편되고 다양한 장르가 공존하는 일명 가요계의 르네상스 시대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도 패권을 쥐고 있었던 건 역시나 남자 가수였다. 10대와 20대층을 공략하는 장르를 선보이며 남자 가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여자 가수는 찾아보기 힘든 시기였다. 물론 S.E.S. 등장 이전에도 베이비복스 등의 그룹이 가요계에 도전장을 내밀었으나 음악 시장에서 큰 방향을 불러 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맥을 쓰고 있는 여자 가수라고 해도 성인 가요나 발라드 풍 계열의 음악을 선보였으며 그 수 조차도 남자 가수에 비해서는 미비한 수준이었고, 남성 가수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기였다. 당시 H.O.T, 젝스키스 등을 필두로 시작된 아이돌 가수 열풍이 분 가요계에서 이제는 이 보이 그룹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걸그룹의 등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점차 두각되던 시기였다. 그렇게 여자 가수의 극심한 기근 속에서 해성처럼 등장한 S.E.S.는 단 순간에 가요계를 장악하며 데뷔와 동시에 빅히트를 터트린다.

또한 S.E.S.의 등장은 문화적인 흐름 속에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적인 흐름 속에서 두각된 니즈와 많은 것이 부합하였다. 당시 사회는 모든 것들이 새로운 시기를 향해 빠르게 바뀌고 있었던 혼돈의 시기였다.

첫 번째 사회적인 흐름으로 S.E.S. 탄생 7일 전 터진 IMF 외환위기 사태다. IMF 사태로 경제는 한 순간에 혼돈에 빠졌으며 이러한 어려운 시기 속에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걸그룹으로서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며 IMF 시대 이후 처음으로 사랑받는 여자 가수가 되었다. 실제로 당시 IMF 시대 속 S.E.S.를 보며 느낀 감정을 남긴 한 평론가의 글도 있으며 당시 한 조사기관에서 여론조사를 실시간 결과 50대 이상 남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자 가수가 S.E.S.로 나타났다는 것이 이를 대표적으로 방증하는 결과이다.[1] 경제는 혼돈을 향해 가고 있었고 국민들의 몸과 마음이 지친 시대에 S.E.S.의 흥겨운 멜로디와 밝은 이미지는 잠시라도 삶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가볍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기에 충분했다는 의견이 있다.

두 번째 사회적인 흐름으로 S.E.S. 탄생 후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여야 간 첫 평화적 정권교체를 통한 새로운 대통령의 탄생이다. S.E.S. 탄생 이전 수많은 여성 듀엣, 트리오, 합창단들이 존재했고 S.E.S.는 이전의 그들과는 180도로 다른 패러다임을 제시했던 걸그룹이었다. 이러한 S.E.S.의 행보와 새로운 변화를 맞은 사회적인 흐름 또한 같은 흐름을 타고 있었다. 실제로 S.E.S.는 당시 한국을 세계에 널리기 알리기 위해 대통령과 함께 찍는 국가홍보CF에서 각계 각층의 저명인사들과 함께 대표 모델로 선정되기도 했다.

마지막 세 번째 흐름으로는 새로운 정권의 등장과 함께 급물살을 탔던 일본문화 전면개방 정책이다. S.E.S.는 애초에 기획 때부터 한국은 물론 일본중국에서도 활동할 수 있는 범아시아적 글로벌 전략을 토대로 제작된 그룹이었다. 멤버 는 재일교포 출신으로 일본문화에 익숙하였고 일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 또한 탁월하였다. 데뷔 이후 얼마 안 가서 정식으로 일본 진출을 선언하였고, 일본 기획사와 호조건으로 계약을 맺는 등 진출을 위한 행보에 박차를 가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S.E.S.의 일본 진출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큰 기대를 받았고 진출 후 한일 양국을 오고가며 활동하며 문화적 가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렇듯 S.E.S.의 탄생은 문화적인 흐름과 새로운 변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사회적인 흐름의 태동 속에서 그 니즈에 부합하며 데뷔를 했다.


4. 데뷔와 동시에 성공[편집]


데뷔와 동시에 성공을 했다. S.E.S.의 이런 인기를 두고 각종 언론에서는 열풍 등의 표현을 사용했다. 걸그룹이 데뷔와 동시에 신드롬을 일으킨 건 최초였다.

5. 20년 만에 걸그룹 계보[편집]


S.E.S.가 해체를 선언했던 2002년 이후 가요계에는 한동안 걸그룹 암흑기라고 불릴 정도로 딱히 큰 반향을 일으키거나 사회적으로 대두되는 인기를 얻는 걸그룹이 전멸한 상태였다. 그러다 2007년 2세대 걸그룹의 양대산맥인 원더걸스소녀시대가 등장하여 큰 인기를 얻으며 다시 한번 걸그룹 신드롬이 일어났다. 침체된 걸그룹 시장이 다시 살아나기까지 5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것이다. 그런데 S.E.S.는 이들보다 훨씬 오랜 기간인 무려 20년만에 걸그룹 암흑기를 깨고 걸그룹 역사를 써내려갔다.

S.E.S.가 등장하기 전까지 가요계에서 큰 인기를 얻거나 이렇다 할 성과를 내는 걸그룹의 부재는 2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만큼 걸그룹의 암흑기가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었다.참고 기사 S.E.S.를 시작으로 확립된 걸그룹은 아니지만 이전에 그나마 괄목할만한 큰 성과를 냈던 걸그룹이라고 하면 1968년에 데뷔해 MBC 10대가수가요제에서 걸그룹 최초로 가요대상을 수상한 펄 시스터즈, 1978년 데뷔해 MBC 10대가수가요제에서 중창부문을 수상한 경력이 있는 희자매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이후 한국 대중 음악사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는 걸그룹의 부재는 20년 가까이 이어졌다. 그나마 소녀형 걸그룹을 표방하고 나왔던 세자매, S.O.S, 애플 등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는 데 실패하고 얼마 안 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만 했다. 이런 칠흑 같은 20년이라는 세월을 걷어내고 걸그룹이 큰 인기를 구가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S.E.S.의 등장이었다. 당시 각종 언론들은 S.E.S.에게 이전 세대의 걸그룹들과 견주며 다시 한번 촉발된 걸그룹 전성시대를 재확인했다.
S.E.S.하면 뭐 여러분들 잘 아시다피 우리 나라 저 은방울자매 이후에 최고의 여성 그룹 아닙니까.

1998.02.07 MBC 쇼 토요특급 }}}

이 여성 트리오가 이렇게 아주 뭐라고 해야할까요. 소위 이제 떴다하는 거는 희자매나 서울시스터즈 이후 처음인데요.

1998.02.19 SBS TV 한밤의 TV연예 }}}

은방울자매의 낭낭한 목소리, 바니걸스의 귀여운 외모, 서울시스터즈의 무게감을 갖춘 S.E.S.

1998.02.21 MBC 쇼 토요특급 }}}

이 시스터즈, 쿨 시스터즈, 희자매, 서울 시스터즈. 그리고, 한국 여성 트리오의 맥을 잇는 S.E.S.

2000.01.03 KBS2 스타 데이트 }}}


6. 성별과 세대를 구분하는 기준[편집]


데뷔 당시 S.E.S.를 어떻게 읽고 인지 유뮤에 따라서 세대와 성별을 구분한다는 우스개 소리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얼핏 들으면 왜?라고 물음표가 지어질 수 있지만 들어보면 그럴싸하다. S.E.S.를 발음법 '세스'라고 읽으면 구세대고 알파벳 '에스이에스'라고 읽으면 신세대며, S.E.S.를 모르면 남자도 아니고 미디어와 담을 쌓은 사람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S.E.S.를 모르면 화젯거리에서 제외되고, 이들을 알아야만 유행을 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S.E.S.의 등장이 얼마나 파급력이 컸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혹자는 이들을 가리켜 '세스'라고도 하지만 그렇게 부르는 이들은 구세대이다. 신세대라면 이들을 이렇게 부른다. 에스이에스.

1998.01.31 MBC 쇼 토요특급 }}}

S.E.S.를 모르면 남자도 아니다. S.E.S.를 세스라 부르면 신세대도 아니다등 남성과 세대를 분가름하는 가치 기준이 된 S.E.S.

1998.02.21 MBC 쇼 토요특급 }}}

'S.E.S.를 아시나요?'. 만약 '세스? 그게 뭔데' 하고 묻는다면 요즘 TV나 라디오와 담을 쌓은 사람으로 보면 된다.


S.E.S.를 세스라고 읽으면 구세대라는 세대 구별법까지 등장.

2015.01.18 MBC 해피타임 스타열전 }}}


7. 같은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화제[편집]


데뷔 당시 S.E.S.는 같은 연예인들 내에서도 큰 이슈거리였다. 팬을 스스로 자처해서 직접 대기실에 찾아가거나 사인을 받는 등의 일이 비일비재 했다.
방송계 새로운 바람, 연예인들 S.E.S. 싸인 받기

요즘 들어 방송국에는 새로운 유행이 생겼다고 한다. 예전에는 시간이 지나면 연예인들끼리 서로서로 친분이 자연스럽게 두터워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는데, 가요계예 S.E.S.가 등장하고 나서 연예인들 마저도 팬들과 다름 없이 싸인을 받으러 쑥쓰러운 듯 이 세 소녀 가수들에게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이미 많은 남자 동료 연예인들이 싸인을 받아 갔는데, 어디서나 선배 가수들에게 깍듯한 예의를 갖추며 열심히 하는 모범생 스타일이기 때문에 잘 몰랐을 때 접했던 사람들이 이들을 직접 보고 그 성실성에 반해 더 좋아하게 된다는 것이다.
파일:SES_Magazine_1st_Broadcast.jpg

데뷔 당시 잡지 기사 중 }}}

바다는 13일 방송된 MBC '황금어장-라디오스타'에 출연해 "S.E.S.로 활동할 때 박진영이 기타를 매고 저희 대기실에 찾아와 노래를 불러준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삼엄한 경호로 다른 가수들과 접하기 어려웠는데 유일하게 경호를 뚫고 우리를 만나러 온 가수였다"고 설명했다. 당시 박진영은 "너희가 S.E.S.구나. 진짜 인형같다, 방울 만져봐도 되니" 등의 말을 하며 마냥 신기해 했다고 바다는 전했다.



8. 1990년대 신(新) 메이크업 트렌드 주도[편집]


1990년대 연예계의 메이크업 트렌드는 주로 피부 표현은 매트하게, 눈썹은 갈매기 모양으로, 눈은 진한 아이라인과 색조 섀도우로, 입술은 원래 라인보다 두껍게 그리고 꽉 채워놓는 것이었다. 그 당시 베이비복스, SOS, 애플 등의 걸그룹들도 무대에서 주로 이러한 메이크업을 하고 무대에 올랐다.

하지만 S.E.S.가 무대에 보여준 메이크업은 이와는 완벽하게 반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강한 아이라인과 형형색색의 섀도우, 두꺼운 립라인과 브라운 립색, 강한 쉐딩 등은 과감하게 걷어냈다. 화장은 최소한으로 하고 입술은 립글로스나 챕스틱 정도만 할 정도로 10대 소녀 본연의 폿풋한 매력을 한껏 살렸다. S.E.S.가 선보인 이런 투명 메이크업은 그 이후 걸그룹들의 메이크업을 바꿔놨으며, 더 나아가 연예계 전반적으로 투명 메이크업으로 유행이 개편되는 계기가 되었다.


9. S.E.S. 성공 후 3인조 걸그룹 범람[편집]


S.E.S. 등장 이전에도 3인조로 구성된 트리오 걸그룹이 존재하긴 했지만 그 수가 절대적으로 넘쳐나는 건 아니었다. S.E.S.가 큰 성공을 거두고 난 후 가요계에는 제2의 S.E.S.를 노리며 3인조로 구성된 걸그룹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범람하기 시작했다.

한스밴드, 쿠키, 클레오, 씨유, 아이다, C.O.C, SZ, 가이, 티니, 투야, 걸프렌드, 민트, 키스, 데이지, 티키, 스위티, 신비, 러브, 아이다, F.O.X(이상 총 20팀)등 모두 S.E.S.가 큰 성공을 거둔 후 음악시장에 문을 두드린 3인조 걸그룹들이다. 하루 아침에 사라진 그룹과 그 이후에 나온 그룹[2]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나게 된다.

이러한 3인조 걸그룹 붐 현상은 모든 그룹이 지양하는 음악이나 콘셉트가 S.E.S.와 동일했다는 게 아니다.[3][4] 다만 그 당시 대세를 이끄는 그룹의 구성이 다른 팀을 꾸리는 데 영향을 준 것만큼은 자명하다는 것이다. 먼저 나와서 성공이라는 검증을 받은 상품을 토대로 시장에 내놓는 것만큼 안전한 것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만큼 수요가 증명 됐기 때문이다. 2세대 대표 걸그룹 소녀시대가 큰 성공을 거둔 후 다인원으로 데뷔하는 걸그룹이 넘쳐날 정도로 대세 된 것도 이러한 벤치마킹 사례의 좋은 예시다.
그렇다면 왜 3명인가?‘삼국지’에서 제갈공명이 위 촉 오의 3국으로 힘의 균형이 맞춰질거라 예언했 듯이 3이라는 숫자가 가장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80년대를 주름잡았던 인기 여성그룹 희자매와 서울시스터즈도 모두 트리오였다. S.E.S.의 성공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여성 그룹의 황금률은 3명이라는 속설이 거의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듯 보이기도 한다. 4인조의 경우 3인조에 비해 드문드문 결성되고 있다.

여성 그룹 데뷔 열풍? 아카이브 (2001.09.04 언론사 미확인) }}}

‘여성 3인조’ 키스, S.E.S. 아성 넘는다. 같은 3인조의 대표적인 여성 그룹인 ㄹ20ㅌS.E.S.에 겁 없이 도전하고 있는 셈이다. 2000년대 들어 수많은 3인조 여성 그룹이 등장해 S.E.S.의 아성을 넘봤으나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여성 3인조’ 키스 S.E.S. 아성 넘는다 아카이브 (2002.02.17 스포츠투데이)
Wayback Machine 2002.02.17 스포츠투데이 기사 리스트[5]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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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걸그룹 최초 저녁 메인뉴스에 단독 소식으로 보도[편집]


1998년 11월 9일 월요일 SBS '저녁 8시 뉴스'에 S.E.S.의 일본 진출 소식이 단독[6] 소식으로 보도됐다. 걸그룹이 단독 소식만으로 지상파 저녁 메인 뉴스에 보도되는 것은 최초였다.

당시 10대 아이돌 스타였던 S.E.S.는 주로 정치, 경제, 외교, 사회 등의 소식이 보도되는 뉴스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인물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문화계 인물이고 문화계 인물 조차도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나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웬만해서는 벽을 뚫기 힘든 곳이다. 더군다나 연예인 그 중에서도 10대 아이돌 스타에겐 더더욱 그렇다. 시간대가 저녁 메인 시간대라면 그 벽은 더 높아진다.

지상파 뉴스 시간대는 주로 아침, 정오, 오후, 저녁, 새벽 시간대로 나뉘는데 그 중에서도 저녁 시간대는 꽃이라 할 수 있다. 뉴스의 주 시청자인 중장년층이 퇴근하고 집에서 뉴스를 시청하는 황금 시간대이기에 하루의 여러 뉴스 시간대 중에서 시청률이 가장 높게 나오기 때문이다. 이렇기에 당시 고작 10대 아이돌 스타에 불과했던 S.E.S.의 소식이 문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단독 보도됐다는 것은 단순히 10대 아이돌 스타를 넘어서는 큰 의미를 가진다.

당시 일본문화 정책개방이 사회적으로 크게 대두되고 있는 시기였는데, 일본에 진출한 S.E.S.는 팬과 대중, 언론 너나 할 거 없이 일본문화와 견주어도 경쟁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때문에 일본 데뷔 소식 자체가 국내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고 많은 기대를 받고 있었기에 보도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역대 아이돌을 통틀어서 아이돌 가수의 단독 소식만으로 지상파 저녁 메인 뉴스에 나온 사례는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극히 적다. 특히 걸그룹이라면 더욱더 그렇다.[7][8]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따른 시장 잠식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큽니다만 최근 일본에서는 한국의 댄스 그룹 S.E.S.가 큰 인기를 얻으며 화제를 뿌리고 있습니다. 도쿄에서 박진원 특파원입니다.

S.E.S. 일본에서도 떴다 (1998.11.09 SBS 저녁 8시 뉴스) }}}

S.E.S. 일본에서도 떴다.



1998.11.09 SBS 8시 뉴스 당시 보도 화면 }}}


11. 글로벌 위상[편집]



11.1. 걸그룹을 취재하기 위해 외신 기자들이 방한한 최초 사례[편집]


2000년 3월 19일 개최한 첫 단독 콘서트 《A Sweet Kiss from The World of Dream》에는 취재를 위해 일본 외신 기자들 60명, 대만 외신 기자들 40명 총 100명의 외신 기자들이 방한했다. 걸그룹을 취재하기 위해 외신 기자들이 대규모로 한국까지 방문한 사례는 최초였다. 아시아에서 인기와 위상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공연장에는 일본의 NHK, 아사히(朝日)TV, 후지(富士)TV, 니혼(日本)TV 등 주요 방송사와 스포니치 등 일간지에서 60여명이 취재했으며 대만에서도 민생보(民生報), 자유보(自由報) 등 메이저 일간지와 삼립(三立)TV, MTV 등 방송사 및 잡지사에서 40여명의 기자가 몰려 열띤 취재 경쟁을 벌였다. }}}



11.2. 한국 가수 최초한국어·일본어·중국어 기자회견 실시[편집]


2000년 3월 19일 개최한 첫 단독 콘서트 《A Sweet Kiss from The World of Dream》 종료 후 일본, 대만 기자들과 함께 한국어·일본어·중국어로 질의응답 기자회견을 실시하였다. 한국 가수한국어·일본어·중국어로 기자회견을 실시하는 것은 최초였다.

2000.03 대만 음악 잡지 PLAY 공홈 기자회견 전체 영상 }}}


11.3. ·· 문화 가교자 역할[편집]


한국, 일본, 대만, 중국 등 동아시아에서 많은 팬을 보유한 그룹답게 팬들 사이에서도 이색적인 교류가 피어났다. 한국 팬은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 팬은 한국어를 배우고, 대만중국 팬은 한국어일본어를 배우며 비록 국적과 문화는 다르지만 서로 한 마음 한 뜻으로 같은 스타를 응원하는 양상이 펼쳐진 것이다.[9] 비록 각 국가들 간의 역사적, 정치적 이념 대립은 있을 지 몰라도 S.E.S.는 그 사이에서 아시아 팬들을 이어주는 문화가교를 놓으며 서로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이해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12. 대중적 인지도[편집]


그룹 이름과 멤버들의 이름을 남녀노소 전연령층에서 인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지상파에서 범국민적인 인지도가 포착되는 장면이 여러번 나왔다. 데뷔 6개월 쯤에 각 지역별로 표본을 선정하여 알고 있냐는 질문에 70% 이상이 알고 있다는 답변이 나왔다. 길거리에서 10대에서 40대까지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멤버 중에 누구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세 멤버들의 이름이 각기 거론 될 정도로 폭 넓은 인기를 구가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이름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장면이 전파를 탈 정도였다.[10] 대통령도 알고 있는 아이돌이기도 했다. 데뷔초 이들의 높은 인지도 덕에 멤버들의 이름을 딴 ''바':'유':에 빠졌 '슈'...'이라는 다소 썰렁한 삼행시가 유행을 탈 정도였다.

1999.10.30 MBC 음악캠프 시민들 인터뷰 }}}


13. 시청률 상승 및 파급 효과[편집]


S.E.S. 단독 방송 이후 전 주 대비 시청률이 크게 상승해서 기자들이 일명 'S.E.S.효과'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놀러와', S.E.S. 효과 있었다! 동시간대 1위 탈환 ‘놀러와’ 원조 요정 S.E.S. 효과 톡톡, 1위 재탈환아카이브

2001년 3월 18일 방송된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 게릴라 콘서트> S.E.S. 특집 편 시청률은 TNS 조사 기준 23.2%를 기록했다. 이는 당시 방영된 회차들 중 최고 시청률 기록이었다. 해당 기록까지만 해도 대단한데 14년 후 당시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단한 기록이 또 한번 밝혀졌다.

2015년 5월 31일 MBC <해피타임: 해피랭킹>에서 '21세기 시청률 끝판왕!'이라는 주제로 2000년대 이후 역대 MBC 모든 예능 순간 시청률 기록이 방송되었다. 해당 방송을 통해 발표된 순위는 MBC 내부에 축적된 DB에 근거한 공식 자료다.[11] 방송에서 공개된 순위 자료 아카이브 해당 방송에서 S.E.S.의 <게릴라 콘서트> 특집 편이 순간 최고 시청률 40.1%를 기록하며 역대 2위를 차지한다는 대기록이 공개됐다. 총 6위까지 공개됐는데 최종 1위는 45%를 기록한 <20002 한일 월드컵 이경규가 간다> 편이었다. 해당 프로는 한일 월드컵이라는 국민 대통합 축제의 프로그램이니 연예인 예능 중에서는 1위다.[12]

2001년은 TV 시청률이 지금보다 잘나오는 시기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TV에 대중스타가 오래 자취를 감추면 또 그만큼 쉽게 잊혀지기 쉬운 시대였다. 당시 S.E.S.는 국내에서 11개월의 공백기로 TV에서 자취를 감춘지 오래였다. 지금과 같은 초고속 인터넷 플랫폼을 활용하여 대중들과 팬들이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극히 드물던 시절이었다. 한 마디로 S.E.S.의 11개월 간의 공백기는 연예인으로서 특히 즉각적인 반응이 인기와 앨범의 성패를 좌우하는 아이돌 스타에게는 사실상 사형선고나 다름 없는 공백기였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바다의 건강 문제로 이미 컴백이 한 번 미뤄진 상태였고, 그후 불거진 유진의 대학입학과 관련된 억측으로 입학 취소를 당하는 등 데뷔 이래 역대 최악의 위기를 맞이하며 아이돌 스타로서의 수명 또한 위협받는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1%라는 어마어마한 역대급 시청률 수치가 나온 것이다. 이미 S.E.S. 브랜드 자체가 흔들리지 않는 기반을 공고하게 다져 놓은 것이며 그 이름 자체로 가지는 대중성과 파급력 자체가 엄청났다는 것이다.

또한 S.E.S.는 당시 같은 아이돌 스타인 핑클, god, H.O.T.처럼 매주 지상파를 통해 만나볼 수 있는 고정 예능을 진행하지도 않았고 예능 출연 빈도가 1세대 6대 천왕[13] 아이돌 중 가장 적은 팀이었다. 그 시대에는 예능 출연을 많이 해야 효과적으로 자신들을 알릴 수 있었고 대중성과 인지도를 쌓을 수 있는 시대였다. 앨범 흥행을 위해서도 많은 예능 출연은 자신을 홍보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런데 단독 1회성 출연 예능만으로 40.1%라는 엄청난 수치의 시청률 기록을 만들어낸 것이다.[14] 2022년 지금까지도 21년동안 역대 아이돌 최고 시청률 1위 기록을 가지고 있다.[15]
이날 '일요일 일요일 밤에 게릴라 콘서트'의 시청률은 23.2%.


덩달아 시청률도 올랐다. 23.2%(TNS 기준) 최근 방송된 것 중 최고였다.


S.E.S.의 게릴라 콘서트 시청률은 자그만치 23.2%.


S.E.S.의 게릴라 콘서트 시청률은 자그만치 23.2%.

【꿀잼명작】 게릴라 콘서트 최고 시청률 S.E.S.편, 소름 돋는 관객 수 (2016.03.07 MBC 공식 채널 타임머신 T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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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31 MBC 해피타임 }}}

2002년 3월 18일 S.E.S.가 게스트로 출연한 MBC <전파견문록> 시청률은 TNS 조사 기준 전국 19.4%, 수도권 18.9%를 기록했다. 해당 수치는 전 주 3월 11일 방송분이 기록한 시청률 전국 15.6%, 수도권 15.7%보다 전국 3.8% 상승, 수도권 3.2% 상승한 수치였다.


S.E.S.의 시청률 상승 및 파급 효과는 활동 종료 후에도 계속되었다. 2009년 10월 26일 방송된 MBC <놀러와> S.E.S. 특집 편 시청률은 닐슨 조사 기준 전국 15.9%, 수도권 16%를 기록했다. 해당 수치는 전 주 10월 19일 방송분이 기록한 시청률 전국 12.8%, 수도권 13.1%보다 전국 3.1% 상승, 수도권 2.9% 상승한 수치였다.




2014년 12월 27일 방송된 MBC <무한도전: 특별기획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16]>에 199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 중 한 팀으로 출연했다. 이날 방송에서 멤버 바다가 팬들을 언급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TNS 조사 기준 순간 시청률 전국 26.6%, 수도권 32.0%까지 상승했다. 이는 당일 방송 순간 최고 시청률 기록이었다.
S.E.S.의 무대를 마친 이후 바다는 눈물을 쏟았다. 팬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유진이가 바다에 빠졌슈’라는 플래카드를 언급하며 바다가 옛 팬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눈물 흘리던 장면은 전국 시청률은 26.6%, 수도권 시청률은 32.0%까지 올라갔다. 이날 방송의 순간 최고 시청률이었다.


2016년 12월 17일 방송된 KBS2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가수 박정현, 배우 김하늘과 함께 게스트로 출연하였다. 총 1시간 17분 가량의 방송에서 S.E.S.는 41분부터 마지막까지 총 37분 정도 출연하였다. 이날 시청률은 닐슨과 TNMS 두 시청률 조사 기관 모두 동일하게 2.8%를 기록하였다. 해당 수치는 전 주 12월 10일 방송분이 기록한 닐슨, TNMS 시청률 2%보다 0.8% 소폭 상승한 수치였다. 12월 19일 방송된 KBS2 <연예수첩>에서 해당 회차에서 S.E.S. 장면이 최고의 1분을 기록했다는 것이 방송됐다. '최고의 1분'이라는 표현은 가장 높은 분당 시청률을 기록한 장면을 말할 때 쓰는 표현이다. 즉 당일 방송에서 S.E.S. 장면이 가장 높은 분당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또한 S.E.S. 단독 출연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14년 만에 재결합한 S.E.S.의 출연으로 인해서 시청률 소폭 상승에 기여했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이번에는 월요일마다 만나는 화제의 1분 시간입니다. 14년 만에 재결합한 원조요정 그룹 S.E.S!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통해 최초로 완전체 컴백을 알렸습니다! 시청자들을 울리고 웃긴 원조 요정들은 과거엔 볼 수 없었던 파격 퍼포먼스도 보여줘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2016년 12월 24일 방송된 MBC <리멤버 S.E.S.> 단독 예능 시청률은 닐슨 조사 기준 2.7%, TNMS 조사 기준 3.1%를 기록했다. 단발성 1회 특집 프로그램, 방송 하루 전 기습 편성 발표, 황금 연휴기 크리스마스 새벽 12시 45분 방송 등 시청률이 잘 나오기 힘든 최악의 시간대와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네이버 프로그램 시청률 정보 2016년 12월 24일 리멤버 S.E.S.[17] 아카이브 }}}



14. 국가 행사를 대표하는 국민 아이돌로서의 위상[편집]


데뷔하고 6개월 남짓 '전 세계에 송출되는 대한민국 홍보 CF 모델로' 각계 각층의 대표 인물들이 발탁되었는데 연예인 모델 중 '걸그룹으로서는 S.E.S.가 유일하게 한국을 대표하는 얼굴로 발탁'되었다. 한국인에게는 잊지 못할 레전드 월드컵으로 남아있는 '2002 한일 월드컵을 홍보하는 대표 모델을 인터넷 여론조사로 선정'하였는데, '여자 가수로는 가장 많은 득표수를 얻어 홍보대사로 발탁' 됐따. 함께 치뤄질 '일본 홍보용 CF 대표 한국 모델로도 발탁'되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젊은 층의 투표 독려를 위하여 S.E.S.를 이미지를 차용한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선거만화홍보가 전국적으로 발매될 정도'였다.


14.1.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오찬에 초대[편집]


2000년 8월 22일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이 일본 마지막 체류날 일본 현지에 진출해서 활동하고 있는 대중가수들을 초청했다. 이 자리에 S.E.S.는 김연자, 계은숙, 이수만등과 함께 초대되었다.


15. 음반 판매량[편집]


S.E.S.의 음반 판매 기록은 가히 독보적 원톱이었다. 그 어떤 걸그룹도 S.E.S.의 음반 판매 기록을 넘어서거나 동등하게 올라오는 걸그룹이 없을 정도였다.[18]

양대산맥으로 불렸던 핑클마저도 음반 판매 면에서는 S.E.S.에게 안 될 정도였다. S.E.S.와 핑클 팀 자체의 판매량만 보더라도 그렇지만[19], 핑클과 이효리, 옥주현 음반 판매량을 합쳐도 S.E.S. 한 팀의 판매량과 큰 차이가 난다.

단일 음반 판매량, 모든 음반 총 누적 판매량, 초동(1주일 판매량) 판매량[20], 연간 순위 어느 지표를 보더라도 S.E.S.는 걸그룹계에서 천상계의 성적을 기록했다. 걸그룹계에서 음반 판매로 얼마나 적수 없는 독보적인 기록을 세웠는지 체감되는 지표가 있다. S.E.S.의 단 3일, 6일 판매량으로 웬만한 걸그룹의 총판에 가깝거나 오히려 그보다 훨씬 더 팔릴 정도였다.

전체 모든 가수를 통합해서 보더라도 상위에 존재하는 몇 남자 가수를 제외하고는 여자 가수로서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SM 내에서도 H.O.T. 다음으로 강력한 음반 판매 화력을 가진 팀이었으며, H.O.T. 해체 후에는 SM 소속 가수 중 가장 많은 음반 판매 수익을 기록했다.

1997년 11월에서 2002년 12월까지 총 5년 간의 활동 기간 동안 총 7장의 앨범으로 국내 판매량만으로 총 누적 판매량 3,526,687을 기록하였다. 1세대 걸그룹 중에서 압도적인 1위 기록이다.

16. 팬덤[편집]


당시 인기가 있던 그룹이라 팬덤도 존재했다.

17. 1위 맞대결[편집]


당시 S.E.S.와 함께 1위 맞대결에서 이길 수 있었던 걸그룹은 단 한 팀도 없었다. 이 시기에도 걸그룹 전성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는 그룹은 많았지만, 인기를 얻는 그룹은 현저하게 적었다. 지상파 음악 방송 1위 후보에 오를 수 있을 정도의 인기를 누린 걸그룹이라고 해봤자 S.E.S, 디바, 핑클, 베이비복스, 샤크라 다섯 팀이 전부였다.관련 게시물 그리고 이들 중에서도 매 앨범마다 음악 방송 1위 후보에 올랐던 걸그룹은 S.E.S.와 핑클 이 두 팀이 유일했다. 사실상 S.E.S.와 함께 1위 후보에 올라 맞대결을 펼쳤던 걸그룹핑클이 유일했다는 이야기다.

데뷔 때부터 줄곧 라이벌이라고 엮였던 S.E.S.와 핑클의 라이벌 열전은 가요팬들의 흥밋거리가 되기 충분했다. 운명의 장난인지 S.E.S.와 핑클은 데뷔 초와 마지막 활동 즉, 첫 역사 때부터 마지막 역사 때까지 1인자 자리를 놓고 서로의 자존심을 건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는 것이다. 이토록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둘 이 될 수 없는, 오로지 단 하나의 1인자 자리를 놓고 맞대결을 펼친 라이벌 그룹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21]

S.E.S.와 핑클이 처음으로 1인자 자리를 두고 선의의 경쟁을 펼친 장소는 1998년 12월 8일 KBS2 TV 뮤직뱅크를 통해서다. S.E.S.는 정규 2집 타이틀곡 Dreams Come True로 활동한지 19일째 되는 날이었고, 핑클은 정규 1집을 발표하고 활동한지는 7개월, 삼속곡[22] 루비(淚悲)는 2개월째 활동 해오던 시기였다. 약 44분가량 생방송으로 진행된 이 방송은 당일 모든 출연 가수들에게 특정 번호를 부여하고 오직 시청자들의 전화투표만으로 1위 수상자를 가리는 방식이었다.[23] 즉, 철저하게 대중성이 더 높고, 인기가 더 있는 가수에게 유리한 시스템이었다. 최종 결과 S.E.S.가 36,553표, 핑클이 31,383표를 얻어 단 하나의 1인자 자리는 결국 S.E.S.에게 돌아갔다.

1998.12.08 KBS2 뮤직뱅크 1위 결과 화면 }}}

2002년 3월 초 S.E.S.와 핑클이 활동 이래 처음으로 단 1주일 차이로 활동 기간이 겹쳤다. 앨범 발매 시기는 S.E.S.가 2월 14일, 핑클이 3월 8일 거의 한 달 차이로 S.E.S.가 더 먼저, 핑클이 더 늦게 발매했다. 하지만, 첫 컴백 무대는 S.E.S.가 2월 24일 SBS 인기가요, 핑클이 3월 3일 SBS 인기가요를 통해 단 1주일의 차이로 활동에 돌입했다. 당시 언론은 이 둘의 라이벌 열전에 큰 관심을 보이며 촉각을 곤두세웠는데, 언론의 관심이 이 정도인데 팬들의 관심이 쏠리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팬들이 이 두 팀의 경쟁에 더 촉각을 곤두세웠다.

컴백 후 한 달이 지나서 S.E.S.와 핑클이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1인자 자리를 두고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광경이 또 한 번 일어났다. 2002년 3월 30일 MBC TV 생방송 음악캠프를 통해서다. 당시 MBC 음악캠프는 2001년 9월 1일부터 공신력 있는 여론조사기관인 한국 갤럽에 순위 집계를 100% 의뢰함으로써 공정성을 담보하는 방식으로 순위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즉, 방송사의 힘이나 기획사와의 유착관계 등으로 인한 입김이 절대 작용할 수 없는 구조였다는 것이다.
이런 시청자들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뜻에서 「생방송 음악캠프」제작팀은 공신력있는 여론조사기관인 한국갤럽에 순위집계를 100% 의뢰함으로써 공정성을 담보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한국갤럽측은 매주 음반판매량과 방송횟수 등을 고려해 표본수 2천명을 대상으로 가요순위를 조사한 뒤 그 결과를 「생방송 음악캠프」팀에 전달하기로 했다.


진행자 류시원 : 또 순위 선정 방법에도 변화가 생겼다고 들었어요.
진행자 황인영 : 네. 저희 음악캠프 자체 내 집계는 모두 배제하고요. 사전 리서치 점수와 음반 판매 점수 그리고 방송 출연 점수를 전문 리서치 조사 기관인 갤럽에서 총괄 집계해 나온 결과를 통해서 저희 음악캠프 순위가 선정됩니다.

2000.09.01 MBC 음악캠프 진행자 안내 }}}

상세별 점수 항목은 갤럽 리서치 점수, 방송 출연 점수, 음반 판매 점수 총 세 항목이었다. 최종 결과 S.E.S.는 갤럽리서치점수 500점, 방송출연점수 168점, 음반판매점수 289점, 총 957점을 얻었고, 핑클은 갤럽리서치점수 351점, 방송출연점수 200점, 음반판매점수 298점, 총 849점을 얻었다. 이로써 둘 이 될 수 없는, 오로지 단 하나의 1인자 자리는 마지막 맞대결 순간에서 조차 S.E.S.에게 돌아갔다. 점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S.E.S.와 핑클의 승패를 가른 건 한국 갤럽 리서치 선호도 점수였다는 것'이다. 주간 음반 판매량 점수와 방송 출연 점수는 핑클이 근소차로 앞섰지만, 한국 갤럽 리서치 선호도 점수에서 S.E.S.가 큰 차이로 앞서나간 탓에 1위와 2위의 승패가 갈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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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30 MBC 음악캠프 1위 결과 화면 }}}

다만, 핑클은 생방송 MBC TV 음악캠프에 출연하지 않고 동 시간대에 똑같이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KBS1 TV '쇼! 행운의 신용카드'에 출연했다. 가수가 1위 후보에 올랐는데도 음악 방송 출연을 포기하고, 같은 시간대 타 방송사의 생방송 쇼프로에 출연하는 것은 이례적인 선택이었다. 말이 좋아서 쇼프로지 사실상 인지도가 거의 없는 프로그램이었다. 즉, 핑클은 네임드 프로그램 출연을 포기하고 비주류 프로그램 출연을 선택했다는 것인데,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어쨌든 핑클의 미출연으로 인해 뮤직 비디오 화면이 14초 가량 대체되어 방송에 나왔고, 이 두 팀의 불꽃 튀는 라이벌 열전을 기대했던 팬들과 대중들은 싱거움을 맛봐야만 했다. 마치 김빠진 콜라를 마시는 듯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핑클의 이러한 행보를 두고 정면 대결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모양새가 역력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당시 증거: 핑클 출연 2002.03.30 KBS1 쇼! 행운의 신용카드 무대 영상 아카이브
당시 증거: 핑클 출연 2002.03.30 KBS1 쇼! 행운의 신용카드는 MBC 음악캠프와 똑같은 시간대가 확실[24] 아카이브
당시 증거: 핑클 출연 2002.03.30 KBS1 쇼! 행운의 신용카드는 생방송이 확실[25] 아카이브
당시 증거: 쇼! 행운의 신용카드는 KBS1 TV 프로그램이 확실 아카이브

이렇게 두 팀의 첫 역사 때부터 마지막 역사 때까지 지상파 TV로 전 국민에게 송출됐던 그들의 불꽃 튀는 1인자 자리를 향한 선의의 경쟁은 결국 2승 2패, S.E.S.의 완승, 핑클의 완패로 끝났고 말았다.

그리고, 이들의 승패를 가린 건 두 번의 대결 모두 '대중 선호도'였다는 점도 흥미롭다. 시청자들의 생방송 전화 인기 투표 점수로만, 한국 갤럽 리서치 선호도 점수에 의해 갈렸기 때문이다. 즉, 두 번의 대결 모두 대중의 인기도 및 선호도가 만들어준 결과니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22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부 핑클 팬들은 이 맞대결에 대해 교묘하게 사실을 왜곡하며 날조를 시도하고 있어서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18. 생방송 여론조사[편집]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는 지상파 및 케이블 음악 방송과 연말 시상식에서 생방송 중 시청자들의 전화투표를 통한 여론조사로 1위 가수나 대상 수상자를 가리는 형식이 빈번했다.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이라 당시 음악 방송과 연말 시상식의 시청률은 지금보다 더 큰 영향력이 있었으며 실시간으로 참여하는 시청자들의 참여 표본수 또한 넘사벽 수준을 자랑했다. 이 당시에는 TV 생방송 여론조사가 웬만한 여론조사기관과 어깨를 할 만큼 공신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2001년 6월 21일 KBS2 TV 뮤직뱅크에서 90분 동안 실시간 전화투표로 진행된 '2001년 상반기 최고의 가수는?' 여론조사'에서 51만 명(515,909)이 참여한 결과 S.E.S.는 최종 2위(득표수 99,588표)를 기록했다. 이는 여자 가수로서는 가장 높은 순위였다.

2001.06.21 KBS2 뮤직뱅크 영상 및 최종 결과 화면 }}}


19. 캐시카우 걸그룹으로서의 위상[편집]


S.E.S.는 대형 기획사 SM엔터테인먼트캐시카우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H.O.T. 다음으로 가장 많은 음반 판매 수익을 가져다주었고, H.O.T. 해체 이후에는 줄곧 SM엔터테인먼트의 음반 판매 수익 일등공신이었다. 음반 판매뿐 아니라 공식 팬클럽, 광고 등 다방면의 활약에서도 황금알을 낳아주는 효녀였다.

S.E.S.가 캐시카우로서 가지고 있던 힘은 해체 발표 후 바로 지표를 통해 나타났다. 다음 날 주가가 무려 6.5% 하락한 것이다. 걸그룹은 돈이 안 된다는 통념을 깨고 기획사의 캐시카우 가 될 수 있으며, 그들의 작은 행보 하나만으로도 회사의 기둥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최초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유진과 재계약 협상 결렬로 S.E.S.가 해체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에 SM 주가가 20일 5%대 하락했다.


인기 여성 보컬그룹 S.E.S.가 해체 위기를 맞으면서 SM 주가가 20일 6.25% 급락했다.



20. 방송사 특별 편성 위상[편집]



20.1. 활약상을 조명하는 지상파 예능 코너 방송[편집]


2015년 1월 18일 방송된 MBC 해피타임에서는 스타열전 코너 주인공으로 S.E.S.를 집중 재조명하는 약 13분 가량의 방송을 내보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당대 최고의 스타의 활약상만 다루는 해당 코너에서 걸그룹으로서는 유일하게 등장했다.[26]

2000년대 중반 정도 MBC에는 주말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서 이와 비슷한 포맷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당대 최고의 스타들의 과거 활약상을 집중 조명하는 코너가 있었는데, 이 프로그램까지 포함해도 걸그룹이 지상파 프로그램을 통해서 과거의 활약상이 단독으로 집중 조명받는 내용이 방송은 S.E.S.가 최초이자 유일하다.[27]
'해피타임'에서 S.E.S.의 어린시절 사진이 공개됐다. 18일 방송된 MBC '해피타임'의 '스타열전' 코너에서는 그룹 S.E.S.의 활약상을 재조명했다.


파일:SES_2015.01.18_happytime.jpg

MBC TV 해피타임 실제 방송 화면 }}}


20.2. 단독 지상파 특집 프로그램 편성[편집]


모바일 동영상 앱 oksusu를 통해 2주간 총 10회로 방송된 데뷔 20주년 기념 프로젝트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1시간 분량으로 편집되어 2016년 12월 24일 MBC에서 방송되었다. 모바일 앱으로만 공개 예정이었던 해당 프로그램은 S.E.S. 브랜드 파워로 지상파에 특별편성 됐다.

걸그룹의 이름을 내세운 지상파 특집 프로그램이 편성되는 건 소녀시대 이후 역대 두 번째이며, 1세대 걸그룹으로서는 최초였으며 2002년 현재까지도 유일하다. 또한, 걸그룹이 해체 및 활동 종료 후 자신들의 이름을 내세운 지상파 특집 프로그램이 편성된 것도 최초였으며 2022년 현재까지도 유일하다.

역대 모든 여자 연예인을 통틀어서 자신들의 이름을 내세운 지상파 특집 프로그램이 편성된 사례는 배우 김희선, 2세대 걸그룹 걸그룹 소녀시대, 1세대 걸그룹 S.E.S. 총 세 팀만 존재할 정도로 희귀한 기록이다.[28]


21. 한일 양국 교과서에 등재[편집]


  • 교과서에 1990년대 K-POP을 대표하는 인물로 등재.
2018년 천재교과서가 출판한 중학교 1~3학년 음악 통합 교과서에 걸그룹으로서는 유일하게 서태지와 아이들과 함께 1990년대를 대표하는 K-POP 인물로 사진이 실렸다. 또한 1990년대를 대표하는 노래 중 하나로 이들의 데뷔곡 I'm Your Girl걸그룹 노래로는 유일하게 소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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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글 1[29] 아카이브 트위터글 2 아카이브 }}}

2018년 동아출판이 출판한 1학년[30] 음악 교과서 52페이지에 걸그룹으로서는 유일하게 김건모, 서태지와 아이들과 함께 1990년대를 대표하는 K-POP 인물로 사진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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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시인사이드 아카이브 Faondom[31] 아카이브 트위터[32] 아카이브 }}}


22. 기록 정리[편집]


다른 가수들과 통틀어 세운 기록만 작성한다.[33]
해외에서 세운 기록은 앞에 '한국 가수'라고 밝힌다.


파일:S.E.S. 로고 화이트.svg
기록
음반 판매량 (단일)
걸그룹 최초 단일 음반 60만 장 돌파
걸그룹 최초 단일 음반 70만 장 돌파
걸그룹 최초 단일 음반 2연속 60만 장 돌파
걸그룹 최초 단일 음반 3연속 60만 장 돌파
걸그룹 최초 단일 음반 4연속 60만 장 돌파
걸그룹 최단 기간 최다 음반 판매 (21년간)[34]
걸그룹 단일 음반 판매량 1위 (21년간)[35]
여자 가수 단일 음반 판매량 2위 (21년간) [36]
음반 판매량 집계 기관 설립 후 여자 가수 단일 음반 판매량 1위 (21년간)[37]
여자 가수 한국음반산업협회 단일 음반 판매량 1위 (영원한 기록)[38]
음반 판매량 (누적)
걸그룹 최초 총 누적 음반 판매량 100만 장 돌파
걸그룹 최초 총 누적 음반 판매량 200만 장 돌파
걸그룹 최초 총 누적 음반 판매량 300만 장 돌파
1세대 걸그룹 총 누적 음반 판매량 1위 (영원한 기록)
1세대 걸그룹 유일 총 누적 음반 판매량 300만 장 돌파 (영원한 기록)
1990년대 여자 가수 총 누적 음반 판매량 1위 (영원한 기록)
1990년대 여자 가수 유일 총 누적 음반 판매량 300만 장 돌파 (영원한 기록)
역대 걸그룹 누적 음반 판매량 1위(21년간) [39]
음반 판매량 (연간 순위)
걸그룹 최초 연간 음반 판매량 순위 9위[40]
걸그룹 최초 연간 음반 판매량 순위 5위[41]
걸그룹 최초 연간 음반 판매량 순위 4위[42]
걸그룹 최초 연간 음반 판매량 순위 4위 2회[43]
여자 가수 유일 1998년 신나라 레코드 연간 음반 판매량 순위 10위권 진입
신인 가수 유일 1998년 신나라 레코드 연간 음반 판매량 순위 10위권 진입
걸그룹 유일 2002년 한터차트 연간 음반 판매량 순위 4위권 진입
1세대 걸그룹 유일 연간 음반 판매량 순위 4위
1세대 걸그룹 유일 연간 음반 판매량 순위 4위 2회
1세대 걸그룹 최다 연간 음반 판매량 순위 10위권 진입
수상 (시상식)
걸그룹 최초 베스트 드레서상 수상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수상
걸그룹 최초 여자 그룹상 2년 연속 수상[44]
아이돌 그룹 최초 활동 종료 후 메이저 연말 가요 시상식 수상
걸그룹 최초 활동 종료 후 메이저 연말 가요 시상식 수상
걸그룹 유일 활동 종료 후 메이저 연말 가요 시상식 수상 (17년간 ~ing)
광고
여자 가수 최초 광고 개런티 2억 원 돌파
역대 걸그룹 최초 광고 재계약 체결
1세대 걸그룹 최초 광고 재계약 체결
1세대 걸그룹 유일 광고 재계약 체결


  • 수상(음악 방송)
    • 걸그룹 최초 지상파 음악 방송 1위(1981년부터 지상파 3사가 순위제를 실시한 이후 18년 만의 대중가요 역사상 최초 대기록)
    • 걸그룹 최초 한 앨범으로 2곡 음악 방송 1위
    • 걸그룹 최초 데뷔 앨범에서 2곡 연속 음악 방송 1위
    • 걸그룹 최초 한 해 3곡 지상파 음악 방송 1위
    • 걸그룹 최초 1990년대, 2000년대를 통틀어 지상파 음악 방송 1위
    • 걸그룹 최초 한 주 지상파 3사 음악 방송 1위 올킬
    • 걸그룹 최다 지상파 음악 방송 1위(13년간 기록 유지)

  • 공식 팬클럽
    • 여자 가수 최초 공식 유로 팬클럽 모집
    • 여자 가수 최초 공식 유로 팬클럽 보유
    • 한국 걸그룹 최초 해외 공식 팬클럽 보유
    • 한국 걸그룹 최초 한국, 일본, 대만 동아시아 3개국 공식 팬클럽 보유

  • 공연(단독 팬미팅)
    • 걸그룹 최초 단독 팬미팅 개최
    • 걸그룹 최초 단독 팬미팅 2회 개최
    • 걸그룹 최초 해외 단독 팬미팅 개최
    • 걸그룹 최초 해외 단독 팬미팅 2회 개최
    • 걸그룹 최초 단독 팬미팅 3회 개최
    • 걸그룹 최초 단독 팬미팅 4회 개최
    • 걸그룹 최초 단독 팬미팅 5회 개최
    • 걸그룹 최초 단독 팬미팅 6회 개최

  • 공연(단독 콘서트)
    • 걸그룹 최초 첫 단독 콘서트 체초경기장 개최[45]
    • 가수 최초 콘서트 티켓 인터넷 예매 판매 시도
    • 이틀 만에 콘서트 매진
    • 여자 가수 최초 체조경기장 매진

  • 공연 (합동 공연)
    • 걸그룹 팬덤 최초 드림콘서트 좌석 3층 입성

  • 팬덤 기록
    • 걸그룹 팬덤 최초 녹덕[46] 등장
    • 걸그룹 최초,유일 투표 사이트 VIP에서 거대 보이그룹 H.O.T. 팬덤을 제치고 1위
    • 걸그룹 팬덤 최초 연말 시상식 인터넷 투표에서 거대 보이그룹 팬덤을 제치고 1위[47][48]

  • 수입
    • 동아일보 조사 추정 발표자료 1999년 상반기 여자 가수 수입 1위
    • 1세대 걸그룹 매출 최다 기록

  • 프로모션
    • 아이돌 최초 상표권 등록
    • 아이돌 최초 모든 멤버 따로 또 전략의 개인 활동 시도[49]
    • 한국 가수 단독 공연 중 최초 일본어 노래 무대[50]
    • 가수 최초 뮤직 비디오 슬로우 모션 카메라 도입[51]
    • 한국 가수 최초 해외 발매 앨범을 국내 번안 발매[52]
    • 걸그룹 최초 앨범 발매 기자회견 개최
    • 걸그룹 최초 단독 공연 TV 송출[53]


  • 여론조사
    • 여론조사기관 리스피아르 1990년대 통합 여자 가수 인기도 조사 걸그룹 최고 순위
    • 1998년 MBC 가요제전 갤럽 여론조사 30세 미만의 국민이 뽑은 인기 가수 선정
    • 1999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 갤럽 여론조사 30세 미만의 국민이 뽑은 인기 가수 선정
    • 2001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 갤럽 여론조사 30세 미만의 국민이 뽑은 인기 가수 선정, 전 연령 지지율 중 10대로부터 50% 폭발적인 지지율 기록

  • MBC 게릴라 콘서트
    • 여자 가수 최초 MBC 게릴라 콘서트 총 동원 인원 10,000 명 돌파
    • 여자 가수 최초 단독으로 MBC 게릴라 콘서트 2회 도전
    • 여자 가수 유일 단독으로 MBC 게릴라 콘서트 2회 성공[54]

  • 해외 기록
    • 한국 가수 유일 2001 Asia Super Live 한국 대표로 초청
    • 대한민국 여자 가수 최초 미국 빌보드지에 소개[55]

  • 해외 기록(일본)
    • 한국 걸그룹 최초 일본 오리콘 차트 진입
    • 한국 가수 최연소 일본 진출[56]
    • 외국 가수 최초 일본 전국고교축구선수권대회 주제가 선정

  • 그 외 기록
    • 걸그룹 최초 공중파 저녁 메인 뉴스에 단독으로 소식 보도[57]
    • 걸그룹 최초 사진집 해외 동시 발매[58]
    • 한국 걸그룹 최초 CF 해외 동시 온에어[59]
    • 한국 가수 최초 마이클 잭슨과 공연(1999년 H.O.T.와 함께)
    • 한국 가수 최초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동아시아 3개국 언어로 기자회견 실시

  • 트렌드세터(음악적 시도)
    • 한국 가수 최초 뉴잭스윙 장르 시도
    • 한국 가수 최초 유로팝 장르 시도
    • 한국 가수 최초 Jazzy-Hop 장르 시도

  • 트렌드세터(패션)
    • 걸그룹 최초 패션 유행 아이템 제조(1997년 11월 바다의 머리 방울.)
    • 걸그룹 최초 패션지 커버모델 장식

  • 트렌드세터(안무)
    • 걸그룹 최초 안무 유행(1997년 11월 I'm Your Girl 둥근해춤.)

  • 해체 후
    • 걸그룹 최초, 유일 자신들의 이름을 딴 바자회 주기적으로 개최

  • 재결합
    • 걸그룹 최초 재결합 시도
    • 걸그룹 최초 활동 종료 후 단독 콘서트 개최
    • 걸그룹 최초 활동 종료 후 단독 콘서트 2회 개최
    • 재결합한 1세대 걸그룹 중 멜론 음원 최고 성적
    • 재결합한 1세대 걸그룹 중 음반 판매 최고 성적

  • 국가 행사
    • 걸그룹 최초 청와대 초청
    • 걸그룹 최초 청와대 2회 초청
    • 문화관광부 장관 오찬에 초대된 가수
    • 연예인 최초·유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모델로 선거만화 출간#

  • 시청률
    • 역대 아이돌 순간 시청률 1위(40.1%, 2001 MBC 게릴라 콘서트)[60]
    • 2000년대 이후 역대 MBC 예능 순간 최고 시청률 2위 (40.1%)

  • 한국 걸그룹 최초 해외 가요 차트 1위[61]
[1] 1998년 드림콘서트 진행자 김희선, 류시원과 인터뷰에서 언급된 내용이다.[2] S.E.S.가 활동한 2002년까지 기준으로 정리한 것이며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져서 포함되지 않은 그룹도 있을 정도다.[3] 이 중에서 투야가 멤버 구성과 일본 진출 마케팅 등에서 가장 유사했으며 포스트 S.E.S.로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다.[4] 클레오는 데뷔 초기 S.E.S.의 이미지나 콘셉트 등을 노골적으로 벤치마케팅 했다.[5] 기사 본문은 삭제 되었다.[6] 다른 가수들이나 분야와 함께 묶어서 보도됐다는 게 아니라 오직 S.E.S. 소식만 단독으로 보도 됐다는 것을 말한다.[7] 베이비복스의 중국 공연과 관련된 인터뷰가 MBC 뉴스데스크에 나온 적은 있지만 단독 소식은 아니었다.[8] 원더걸스가 2007년 당시 신드롬으로 SBS 저녁 8시 뉴스에 단독 소식으로 보도된 적이 있다. 해당 영상[9] S.E.S.가 2001년 2월 23일 MBC 웹 투나잇에 출연해서 직접 밝힌 내용이다.[10] 자신들을 SBS라고 인지하지 않고 정확하게 S.E.S.로 인지해서 기쁘다는 말도 곁들였다.[11] 즉 언론 자료가 많이 안 남아있는 아날로그 시절이라는 점을 악용하여 네티즌이 조작해서 부풀린 내용을 언론에서 사실 검증 없이 수용해서 내보낸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 점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12] 이경규가 진행하는 코너지만 내용이 2002 한일 월드컵에 관한 내용이었다. 즉 연예인에 대한 신변 잡기나 오락 프로그램과 관련된 예능 프로그램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13] 당시 아이돌 중에서도 최정상급의 인기를 누렸던 H.O.T, 젝스키스, S.E.S, 핑클, 신화, god 이렇게 총 6팀을 묶어서 불렀던 1세대 아이돌 용어다. 이들 중에서도 초기 아이돌 문화를 만든 H.O.T, 젝스키스, S.E.S, 핑클 이렇게 총 4팀만 묶어서 4대 천왕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14] 방송을 통해서 공개된 6위까지의 순위만 보더라도 4위가 god의 <육아일기> 놀이방에 간 재민이편 32.3%다.[15] 3세 걸그룹 TWICE가 2018년 12월 31일에 출연한 일본 NHK 홍백가합전에 선보인 무대 시청률이 42.7%를 기록한 적 있으나 이는 일본에서의 기록이라 같은 선상에 올려놓기는 힘들다.[16] 일명 '토토가'로 약칭해서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17] 현재 TNMS 시청률 기록 내용은 삭제됐다. 아마 TNMS가 포탈에 시청률 정보를 제공하지 않기로 결정한 이후에 삭제된 것으로 추정된다.[18] 2세대 걸그룹 소녀시대가 음반 판매 면에서는 타 걸그룹과 적수가 없었던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쉽다.[19] 총 누적 판매량이 약 120만 장 가량의 차이가 난다. 약 1.5배 차이가 난다.[20] 그 당시에는 초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긴 했다. 여기서 초동은 말 그대로 판매 기간을 이해하기 쉽게 포함된 설명에 그치지 않는다.[21] 아마 S.E.S.와 핑클이 유일할 확률이 높다.[22] 3번째 활동곡이라는 의미다.[23] 당시 IMF 경제사태로 노래 순위제를 운영하던 가요톱텐이 폐지되고, 얼마 안 가서 다시 생겨난 게 뮤직뱅크였는데 순위제를 대놓고 하자니 눈치는 보이고 시청률과 돈을 동시에 챙길 수 있는 이런 제도를 시행했던 것이다. 그래서 음반 판매량, 방송 횟수, 엽서 투표 등이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24] 링크는 S.E.S. 팬카페지만 본문 내용은 핑클 소속사 측이 안내한 일정표를 퍼온 것이다.[25] 그런데 이미 핑클 출연 회차 영상 후반부에 자막으로 생방송이라고 뜨긴 한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은 이 날짜 외에도 계속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으로 확인된다.[26] 해피타임과 방영 시기와 포맷이 엇비슷하고 각각 토요일과 일요일 주말 아침 시간대라는 점이 겹쳤던 타 프로그램이라면 KBS2 세대공감토요일이 있는데 해당 프로에서는 라이벌 스타를 엮어서 재조명 하는 코너는 있었지만 스타 단독으로 다루는 프로그램은 없었다.[27] 2019년 핑클이 캠핑클럽으로 컴백한 후 MBC ON에서 '접속하시겠습니까? 핑클'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전성기 당시 이들이 MBC에 출연했던 방송분을 편집해서 재방송해준 적은 있지만 앞서 적었듯이 지상파가 아니다.[28] 예능 형식이 아니라 콘서트 형식의 특집 프로그램까지 포함하면 송가인도 꼽을 수 있다.[29] 현재 링크는 삭제된 상태다.[30] 정확히 중학교인지 고등학교인지는 정보가 없다.[31] 현재 링크는 삭제된 상태다.[32] 현재 링크는 삭제된 상태다.[33] S.E.S. 자체 활동 범위 내에서 세운 기록은 S.E.S./활동 문서 각 활동란에 작성한다.[34] 이후 블랙핑크가 경신하였다.[35] 2020년 10월, 블랙핑크가 경신하였다.[36] 최초의 음반 판매량 집계 기관인 한국음반산업협회가 설립 되기 이전 신나라 레코드에서 발표한 연말 판매량까지 포함하면 1위가 이소라 80만 장이었다.[37] 1998년 9월부터 한국영상음반협회가 매월 음반 판매 집계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38] 2018년 정도까지만 판매량을 집계했기 때문에 영원한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이후 판매량은 한터차트로 보며, 가온차트가 생긴 이후에는 초동은 한터차트, 총판은 가온차트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이후 가온차트는 써클차트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39] 2019년, 트와이스가 경신하였다.[40] 1998년 신나라 레코드.[41] 1999년 신나라 레코드.[42] 1999년 한터차트[43] 2002년 한터차트.[44] 2001년, 2002년 M.net 《뮤직 비디오 페스티벌 》시상식에서 수상하였다.[45] 이후 핑클, 소녀시대, 카라, 블랙핑크 등이 콘서트를 개최하게 된다.[46] 방송이나 직캠 등을 녹화해서 온라인 팬클럽에 공유해주는 팬을 지칭하는 아이돌 팬덤 용어.[47] 2001년 서울가요대상.[48] 참고로 이 날 대상은 김건모가 수상했다.[49] 아이돌 최초의 개인 활동은 2000년 신화의 김동완이 라디오를 진행한 것이 최초이며, 멤버 전원이 개인 활동을 시작한 건 S.E.S.가 최초다.[50] 2001년 서울체조경기장 단독 콘서트 에서 일본 현지에서 발매한 노래를 일본어로 직접 불렀다. 이는 한국 가수 단독 공연 역사상 최초로 일본어 노래 무대가 울려퍼진 사례다.[51] 3집 타이틀곡 Love MV.[52] 2001년 스페셜 4.5집 Surprise.[53] 2002년 공식 팬클럽 5기 팬미팅이 M.net 프라임 콘서트를 통해 실황이 송출되었다,[54] 핑클이 2회 도전한 적은 있지만, 한 번은 유승준과 공동으로 도전한 것이었다.[55] 역대 전체 한국 가수로는 신승훈에 이어 두 번째.[56] 이후 2000년 보아가 진출하여 경신.[57] SBS 저녁 8시 뉴스에 당시 일본 진출이 단독으로 보도.[58] 국내에서 발매한 첫 번째 사진집을 대만에서도 발매하였는데 2,000여권 모두 매진.[59] 2001년 에뛰드 CF가 대만 TV에도 동시 온에어 되었다,[60] 이 기록은 2022년 현재도 유효하다.[61] 일본 지상파 방송 차트와, 대만 케이블 방송 삼립TV 가요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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