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노 이치로

덤프버전 :




역임한 직위
[ 펼치기 · 접기 ]

[ 펼치기 · 접기 ]
초대
이시이 미츠지로
2대
스나다 시게마사
3대
사토 에이사쿠
4대
고노 이치로
5대
마스타니 슈지
6대
이시이 미츠지로
7대
호리 시게루
8대
아카기 무네노리
9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10대
나카무라 우메키치
11대
마에오 시게사부로
12대
후쿠나가 켄지
13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14대
하시모토 토미사부로
15대
스즈키 젠코
16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17대
스즈키 젠코
18대
나다오 히로키치
19대
마쓰노 라이조
20대
에사키 마스미
21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22대
쿠라이시 타다오
23대
스즈키 젠코
24대
니카이도 스스무
25대
다나카 타츠오
26대
호소다 키치조
27대
가네마루 신
28대
미야자와 기이치
29대
아베 신타로
30대
이토 마사요시
31대
미즈노 키요시
32대
카라사와 슌지로
33대
니시오카 다케오
34대
사토 고코
35대
키베 요시아키
36대
무토 카분
37대
시오카와 마사쥬로
38대
모리 요시로
39대
후카야 다카시
40대
이케다 유키히코
41대
오자토 사다토시
42대
무라오카 카네조
43대
호리우치 미쓰오
44대
규마 후미오
45대
니와 유야
46대
니카이 도시히로
47대
사사가와 다카시
48대
다노세 류타로
49대
고이케 유리코
50대
시오노야 류
51대
호소다 히로유키
52대
노다 세이코
53대
니카이 도시히로
54대
호소다 히로유키
55대
다케시타 와타루
56대
가토 가쓰노부
57대
스즈키 슌이치
58대
사토 쓰토무
59대
후쿠다 다쓰오
60대
엔도 도시아키
61대
모리야마 히로시




일본국 제3차 이케다 개조내각 부총리
고노 이치로
河野一郎 | Konō Ichirō
출생1898년 6월 2일
가나가와현 아시가라시모군 도요카와촌
(현 오다와라시)
사망1965년 7월 8일 (향년 67세)
재임기간부총리도쿄올림픽담당대신
1964년 7월 18일 ~ 1964년 11월 9일
학력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정치학과 / 학사)
부모부 고노 지헤이[1]
형제[2]
동생 고노 켄조[3]
배우자고노 데루코
자녀장남 고노 요헤이[4]
친척손자 고노 다로[5]
손자 고노 지로[6]
정당
지역구舊 가나가와 3구 (중선거구)
의원 선수11 (중)
의원 대수18, 19, 20, 21, 22, 25, 26, 27, 28, 29, 30
약력아사히 신문 직원
야마모토 데이지로 농림대신 비서관
중의원 의원 (제18-21·25-30대)
일본자유당 간사장
농림대신 (하토야마 내각)
경제기획청 장관 (제1차 기시 개조내각)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농림대신 (제2차 이케다 제1차 개조내각)
건설대신 (제2차 이케다 제2차 개조내각)
부총리도쿄올림픽담당대신 (제3차 이케다 내각)
부총리 겸 스포츠담당대신 (제1차 사토 내각)

1. 개요
2. 생애
2.1. 정계 입문 전
2.2. 정계 입문
2.3. 사망
3. 기타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일본국의 정치인. 부총리 겸 오륜대신[7], 농림대신, 경제기획청 장관, 건설대신,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11선 중의원 의원을 역임했다. 고노 요헤이 전 중의원 의장의 아버지이자 고노 다로 현 디지털대신의 할아버지이다.

하토야마 이치로, 미키 부키치(三木武吉)와 함께 자민당 창당의 주역으로 전후 일본 정치사에 있어서 보수정치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이른바 당인파(党人派)의 거두로 꼽히는 인물이다.


2. 생애[편집]



2.1. 정계 입문 전[편집]


1898년 6월 2일, 일본 제국 가나가와현 아시가라시모군 도요카와촌(현 오다와라시)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지헤이는 가나가와현의회 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었고, 어머니는 소가에서 태어나 도카이도선의 터널 공사를 하청하던 노동자였다. 형은 태어난지 몇 달 만에 사망했고, 동생 켄조도 훗날 참의원 의장을 역임했다.

고노는 학교에 입학하기 전 학교에 빨리 가고 싶어 때를 썼다 하는데, 그의 어머니는 고노의 의견에 동의해 호적에서 생년월일을 6월에서 3월로 바꾸어버려, 그 때문에 일년 먼저 소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 것이 나중에 호적법 위반으로 적발되어 아버지 지헤이가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

중학교 시절에는 매우 철이 없는 행동을 많이 저질렀다 하는데, 중학교 2학년 때 한 영어교사가 마음이 안든다는 이유로 그를 낙제시키기 위해 시위를 일으켰고, 결국 고노를 포함 총 10여명이 그 교사에게 낙제점을 붙여 그 교사를 일년 낙제시켰다. 그리고 훗날 일본 학사원상을 수상한 당시 교사였던 다케다 유이치에게 '도마뱀'이라는 별명을 붙여 놀리거나, 칠판에 진짜 도마뱀을 풀어 장난을 치는 등 철이 없는 행동들을 많이 벌였었다고 한다. 고노는 훗날 이 일들을 회상하며 반성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일본의 광업이 전성기를 맞아 일본의 공업화가 매우 빠른 기세로 진행되고 있었다. 고노는 이에 큰 감화를 받아 광산학을 공부하려 했었고, 시험 이후 와세다대학 이공과에 면접을 넣지만 불합격되어 1년간 중앙예비교를 다녔다. 두번째 시험 이후에는 대학으로부터 "이공과는 유감스럽지만 점수가 부족하다. 다른 학과라면 지망해 볼 수 있다"라는 통지를 받아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에는 동생 켄조와 함께 육상 장거리 선수로 활약하여 종합 우승을 가진적 있다.

대학 졸업 이후 아사히 신문에 입사하기 위해 시험을 치루어 1차 시험에서는 합격하지만, 2차 시험에서 떨어졌다. 그러나 전직 중의원 의원이었던 스기우라 시게요시의 추천으로 시모무라 히로시가 있던 곳에 소개장을 가지고 나간 것이 인연이 되어 입사하게 되었다.


2.2. 정계 입문[편집]


1931년,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의 농림대신인 야마모토 데이지로의 비서관이 되어 1932년, 제1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입헌정우회 소속으로 가나가와 3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후 하토야마 이치로에게 붙어 측근이 되었다.

종전 이후 1945년, 정우회의 정통파 세력들을 규합해, 하토야마를 총재로 하는 일본자유당을 결성하고 당 간사장으로 취임하며 내각 결성에 분주하지만, 다음 해 하토야마에게 미군정으로부터의 공직 추방령이 내려져 그의 라이벌이었던 요시다 시게루가 후계 총재로 지명되고 내각 조성에 착수한다. 또 고노 자신에게도 공직 추방령이 내려졌다. 추방 중인 1948년에는 정치자금 관련 문제로 중의원 부당재산거래조사특별위원회에 증인환문되었다. 1951년에 추방이 해제되어 자유당에 복당, 이후 반요시다파의 선두주자로 하토야마 내각 수립에 앞장섰다. 그러나 1952년 중의원선을 앞두고 요시다가 하토야마파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이시바시 단잔과 함께 고노를 당에서 제명시켰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제명이 취소되었고 다음 해 3월 14일, 하토야마와 함께 자유당에서 분당하여 일본민주당을 결성했다.

1954년, 제1차 하토야마 내각에서 농림대신으로 입각해, 2·3차 내각에서도 유임되었다. 다음 해 11월 5일, 보수 합동 작전으로 인한 자유민주당 합당에 참여해 고노파를 결성했다.

1956년 하토야마가 정계에서 은퇴하고 기시 노부스케가 당내 주류가 되자 다음 해 제1차 기시 개조내각에서 경제기획청 장관으로 입각했고, 제2차 내각에서는 당 총무회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1959년 고노를 당 간사장으로 취임시키는 안건에 기시가 거부를 하여 이 때부터 반주류파로 넘어가게 되었다. 미일안보조약 개정과 관련하여 기시 내각에 반대 입장을 취하고 중의원에서 강제체결되자 고노파는 미키파와 함께 결석했다.

기시의 퇴진 이후 자민당 총재선에서 오노 반보쿠와 이시이 미쓰지로를 지지하지만, 이케다 하야토에게 패배했다. 이로 인해 한 때 '고노신당'의 결성을 고려하지만 오노와 코다마 요시오 등이 반대하여 단념하였다. 오노가 이케다한테의 접근을 도모해, 1961년 제2차 이케다 제1차 개조내각에서 농림대신으로 재입각하고, 다음 해 2차 개조내각에서는 건설대신도쿄올림픽담당대신으로 취임했다. 제3차 내각에서는 한 층 더 올라가 부총리 겸 올림픽대신으로 취임했다.

1963년에는 우익 인사 노무라 슈스케의 방화로 인해 저택에 불이 났다.[8]

1964년 도쿄 올림픽의 종막과 이케다의 퇴진으로 인해 차기 유력 총재 후보중 한명으로 거론되었으나, 이케다가 지명한 사토 에이사쿠가 총재로 취임했다.[9] 고노는 코다마 요시오를 비롯해 우익, 야쿠자와 유착한다는 의혹이 짙었고[10] 요시다 계열의 관료출신 정치인들이나 경제 4단체[11]를 중심으로한 경제계는 이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결국 이때문에 총재를 눈앞에 두고 고배를 마셔야 했다.

2.3. 사망[편집]


같은 해 11월에 발족한 제1차 사토 내각에서 부총리 겸 스포츠담당대신에 취임했으나 다음 해 6월 개조내각에서는 입각을 거부, 한 달 뒤 7월 8일 대동맥 파열로 사망했다. 향년 67세.


3. 기타[편집]


  • 샤다이 그룹의 그린 팜과 제휴한 오너 브리더인 나스노 목장의 소유주였다. 다만 소유주 시절에는 주목할 만한 경주마들이 없었으며, 훗날 나스노 목장의 첫 중상 우승마가 된 나스노 코토부키를 생전에 봤지만 데뷔전을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나스노 목장이 세운 대다수의 업적들은 목장을 물려받은 아들 고노 요헤이가 일궈냈으며, 현재는 손자인 고노 지로가 사장인 에비스 흥업이 운영하는 중이다.
  • 생전에도 경마계에 깊게 관여했는데, 일본중앙경마회와 독립된 마차경주 협회를 설립해 전쟁 후 방치된 네기시 경마장을 중심으로 마차경주를 부흥시키는데 앞장 섰거나, 비싼 종마를 수입하는것 보다 효율이 좋다며 서러브레드의 인공수정에 찬성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마차경주 부흥 계획은 직전에 무산되었다.

4. 소속 정당[편집]


소속기간비고

1931 - 1940정계 입문

[[무소속|
무소속
]]
1940 - 1942정당 해산
익찬정치회1942 - 1945창당

[[무소속|
무소속
]]
1945제2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인한 정당 해산

1945 - 1946창당

[[무소속|
무소속
]]
1946 - 1951공직 추방령으로 인한 강제 제명

1951 - 1954공직 추방령 해제
입당

[[무소속|
무소속
]]
1954일본민주당 창당을 위한 탈당


1954 - 1955창당

1955 - 1965신설 합당[12]
사망


5. 선거 이력[편집]


연도선거 종류지역구소속 정당득표수 (득표율)당선 여부비고
1932제1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나가와 3구
? (?%)당선 (3위)초선
1936제1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선 (4위)재선
1937제2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선 (3위)3선
1942제2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익찬정치회? (?%)당선 (2위)4선
1946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나가와 전현구
? (?%)당선 (3위)5선
1952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나가와 3구
57,580 (15.74%)당선 (2위)6선
1953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47,774 (13.84%)당선 (3위)7선[13]
1955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9,433 (17.93%)당선 (1위)8선
1958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3,265 (15.32%)당선 (2위)9선
1960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66,515 (16.05%)10선
1963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98,830 (20.90%)당선 (1위)11선[14]

6. 둘러보기[편집]


고노 가문
[ 펼치기 · 접기 ]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2 08:12:45에 나무위키 고노 이치로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1875~1950, 가나가와현의회 의장, 도요카와촌장, 아시가라 비료 회사 사장 역임.[2] 출생 후 몇 달 만에 사망.[3] 1901~1983, 제11·12대 참의원 의장, 중·참의원 의원 역임.[4] 1937~, 부총리, 중의원 의장, 제128-131대 외무대신, 제55대 내각관방장관, 제16대 자유민주당 총재, 중의원 의원 역임.[5] 1963~, 제145·146대 외무대신, 제20대 방위대신, 제90대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역임. 현 제4대 디지털대신, 중의원 의원.[6] 고노 가문 소유의 중견기업 일본단자 대표이사.[7] 1964 도쿄 올림픽 담당 국무대신을 일컫는다. 일본에서는 올림픽을 오륜으로 표기하기도 해서 1964 도쿄 올림픽 때는 물론 2020 도쿄 올림픽 때에도 담당 국무대신을 줄여서 올림픽상, 오륜상, 오륜대신, 올림픽대신으로 부르기도 했다.[8] 노무라에 따르면 고노가 파벌정치를 심화시키는 것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다고 하며 더욱이 고노가 나스 고원의 황실 별장 부근에 광대한 토지를 매입하여 별장과 목장을 건설하는 과정에 임야를 불태운 것에 대해 격앙되어 있었다고 한다.[9] 요시다 시게루기시 노부스케, 그리고 경제계를 비롯해 여러 방면에서 사토를 총리로 지명하기 위한 공작이 진행되어 이미 2, 3일전에 사토가 내정되어 있었지만 고노는 전혀 몰랐다고 한다.[10] 야마구치구미의 주요 돈줄이었던 고베항의 하역업무의 뒷배가 고노 이치로였다.[11] 경단련, 일경련, 경제동우회, 일본상공회의소[12] 자유당과의 신설합당[13] 분당파 자유당 (하토야마파)[14] 1965.7.8 임기 중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