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플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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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레드 제플린의 보컬리스트[3] 로 유명한 영국의 아티스트이다. 레드 제플린 시절에 지미 페이지와는 역사상 최고의 기타-보컬 듀오로 꼽히는 플랜트-페이지를 구성하기도 했다. 1980년대 레드 제플린의 해체 이후에는 솔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2009년 그래미 상을 받을 정도로 음악 활동도 평가가 높은 편이다.
4옥타브에 이르는 넓은 음역과 풍부한 성량을 자랑하는 보컬, 찰랑이는 금발 머리, 잘생긴 외모, 윗통은 반쯤 벗고 다닌 패션으로 그루피 부대를 이끌고 다니는 등 수많은 여심을 사로잡고 무대 위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낸 1970년대 하드 록 및 헤비 메탈 씬의 대표적인 음악가이다. 목소리 톤 자체도 매우 높은 편이기에 언뜻 들으면 여성처럼 들릴 정도로 높은 고음을 소화해낸다. 그의 보컬은 이안 길런, 액슬 로즈, 프레디 머큐리 등 동시대 및 후대의 수많은 보컬리스트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심지어 로저 달트리 등의 선배 록스타들과 마돈나, 레이디 가가 등의 팝 스타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를 빼놓고서는 하드 록, 메탈 보컬의 역사가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그렇기에 보통 록 음악과 대중음악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보컬리스트이자 프론트맨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대중들에게 "최고의 가수" 투표를 하면 10위권 밖으로 떨어지는 일이 없고, 롤링 스톤이 선정한 "최고의 보컬리스트 100인"에서 15위[4] 에 들었고, 동일 잡지에서 독자들의 투표로 선정한 "최고의 록 가수"에서 1위를 차지했다.[5]
3. 생애[편집]
자세한 내용은 로버트 플랜트/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뮤지션으로서의 재능[편집]
4.1. 보컬리스트로서[편집]
록 역사상 최고의 보컬리스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것과 동시에 대중음악사를 통틀어도 톱클래스로 꼽힐만한 보컬로 평가받는다. 그만큼 그를 추앙하고 영향을 받은 뮤지션들은 엄청나게 많은데, 대표적으로 로저 달트리[8] , 오지 오스본, 액슬 로즈, 프레디 머큐리[9] , 겐키 히토미, 게디 리, 데이비드 리 로스, 새미 헤이거, 잭 러셀, 김종서[10] , 마돈나, 레이디 가가 등이 있다. 역대 최고 메탈 보컬리스트를 논할 때 로버트 플랜트가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드 록이나 헤비 메탈 뿐만 아니라 Thank You, The Rain Song같은 소프트 록, 파워 발라드 등에서 감정을 잡고 쏟아내는 능력도 대단하고 여러 장르에 그에 알맞는 보컬을 들려주는 이해와 소화 능력까지 출중하다.Robert Plant is one of the most original vocalists of our time.
로버트 플랜트는 현 시대에서 가장 독창적인 보컬리스트 중 한 명이다.
지미 페이지는 처음 로버트의 노래를 들었을 때 “어째서 이 사람이 지금껏 무명이지? 성격에 문제가 있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높은 음역대를 가진 테너 성종의 록보컬의 대명사로 통한다. 비음이 많이 섞인 엄청난 하이톤의 미성이 트레이드 마크이며, 이를 바탕으로 중고음을 굵직하게 긁어 처리하고,[11] 고음역대는 거칠고 선명한 두성으로 처리한다. 때문에 소리에서 굵직한 허스키함과 귀를 찌르는 날카로움이 공존하는, 어떻게 보면 상당히 모순되는 특성들이 어우러진 음색을 가지고 있다. 후대에 그를 모델로 삼고 연습한 보컬들 중에서도 그의 굵직한 허스키함과 중성적인 날카로운 하이톤을 모두 재현한 보컬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12] 이 야누스적인 카리스마는 그만의 독보적인 매력으로 평가되며, 그 포스는 정말 말그대로 압도적인지라, 무대에서 삑사리를 자주 내는데도 그 특유의 음색과 카리스마, 음악적 센스로 다 커버해 사람들을 열광시킬 정도다.
고음 뿐만 아니라 저음역도 상당히 넓었는데, 0옥타브 대에서도 안정적인 보컬을 구사할 수 있다. Going to California 같은 노래에서 들을 수 있는데, 잔잔한 어쿠스틱 반주에 저음역대의 보컬이 매우 잘 어우러진다.
성량 또한 매우 크다. 라이브에서 목소리가 밴드 소리를 뚫고 나올 정도. 또한 리즈 시절에 라이브 중 스피커가 터진 적도 있다.[13] 또한 악기들의 발달로 레드 제플린 활동 당시보다 악기 소리가 훨씬 더 짱짱해진 현재에도 보컬이 밴드 소리를 뚫고 나온다.
로버트 플랜트의 전성기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2년까지로[14] , 이 시절 라이브를 들어보면 전성기 때 얼마나 어마어마했는지 알 수 있다.[15] 예로 1971년 몽트뢰 카지노 공연을 들어보면 애드리브로 지르는 3옥타브 중후반대의 샤우팅, 기타 소리마저 뚫고 나오는 어마어마한 성량 등을 볼 수 있다. 특히 유튜브에 공개되어 있는 1973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 1979년 네브워스 라이브 등과는 다르게 Rock and Roll, Black Dog, Stairway to Heaven 등의 히트곡들을 음을 낮추어 부르지 않고 원키로(!) 부른 것이 백미.
Songs like (Led Zeppelin’s) Babe I'm Gonna Leave You, I find my vocals on there horrific now. I really should have shut the fuck up!
Babe I'm Gonna Leave You 등 레드 제플린 초창기 시절 곡들에서 내 보컬은 끔찍함 그 자체였다. 난 입을 좀 닥쳤어야 했다.
1집 시절 보컬에 대한 본인의 평
1집 시절에는 중음에서 목을 잔뜩 긁어 무겁게 소리내는 것을 힘으로(...) 고음까지 쭉 유지하는 방식을 썼다.[16] You Shook Me같은 곡에서 들을 수 있는데, Immigrant Song을 부를때처럼 소리를 얇고 날카로운 질감으로 처리하는게 아니라, 매우 무겁고 거칠게 처리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에너지 소모가 매우 심하고 성대에 엄청난 무리를 주는 창법이라[17] 상술했다시피 본인 또한 1집 시절의 보컬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2집 발매 이후, 1970년부터 날카로운 고음을 내기 유리한 식으로 창법을 변화시켜 왔고, 4집에서 절정을 맞는다. 그러나 1973년부터 부족한 자기관리와 그 동안의 무리한 발성으로[18] 음색이 탁해지고 음역이 줄어 초창기보다 훨씬 거칠고 진한 음색과 창법을 보여주었다. 때문에 당시 라이브에서는 몇몇 곡들을 낮추어 불렀는데, 1973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에서는 Black Dog, Rock and Roll 등의 히트곡들을 전부 낮추어 불렀다.
이후로 창법을 변경하면서 고음역 회복을 줄기차게 꾀하였으나 결과는 별로 신통치 않았다. 그래도 본래 엄청난 보컬리스트라 제 몫은 해냈지만[19] , 이전과는 다른 스타일의 보컬이 되어버렸다. 본래 날카로우면서도 허스키한 독특한 미성이었다면, 1970년대 후반의 보컬은 끈적하면서도 고음역대는 더 허스키하게 변했다. 원래는 쉽게 소화하던 3옥타브 이상의 고음역대를 어렵게 소화하는 등 기량이 떨어진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러자가 레드 제플린 해체 후 1980년대 중반부터 목이 완전히 상해서 라이브 에이드에서는 고음을 거의 소화하지 못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이후에 철저한 관리와 창법을 변화시켜서 1990년대에 목소리를 회복하는데 성공하였고, 90년대 중반의 페이지&플랜트 투어에서 전성기를 연상시키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노년기인 현재까지도 워낙 기본적인 가창력이 뛰어났던데다 밴드가 해체한 이후로는 관리도 잘 하였기 때문에 수준급의 보컬을 유지하고 있다. 노년의 인상과는 전혀 매치가 불가능한 목소리는 덤이다. 현재까지 흡연자에 음주를 즐겨하는 데다가 과거 마약을 달고 살았던 사람인데도 이 정도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그만큼 할 것은 다 하면서도 관리는 엄청나게 하였다는 의미. 젊었을 적처럼 날카롭진 않지만 그동안 창법을 꽤나 바꿔오며 적응해냈기 때문에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그래도 고령의 나이 때문에 몇몇 곡들은 키를 한두 키 낮추어서 부르고 있으나, Since I've Been Loving You 같은 곡들을 부를 때는 여전히 3옥타브 솔(G5)의 샤우팅을 보여주는 등 어마어마한 역량을 유지하고 있다. 록밴드의 보컬들이 나이가 들면서 목소리가 엄청 나빠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가 록 보컬리스트로서 얼마나 열심히 임하고 있을 것인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레드 제플린 시절 앨범들을 리마스터링하는 것 외에는 좀처럼 음악 활동을 하지 않
굳이 단점을 꼽자면 라이브 기복이 많다는 것이다. 다만 이는 이안 길런, 프레디 머큐리 등 당대 유명했던 고음형 보컬리스트들이 어느 정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단점이었으며, 이들이 정식으로 보컬 레슨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또한 레드 제플린 팀 자체가 앨범의 최상의 퀄리티를 위해 녹음 시 라이브 걱정은 안하고 본인들 기량을 최대한 쥐어짜서 녹음하는 타입이라, 애초에 본인의 곡들을 라이브에서 애드리브까지 다 살려가며 소화하기엔 너무 어려운 곡들이었을 것이다.[21] 또한 컨디션이 좋을 때에는 음원 이상의 라이브를 보여주며, 라이브 기복이 있다고 그를 위대한 보컬리스트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창법과 스타일에 있어서 엘비스 프레슬리, 소니 보이 윌리엄슨 2세, 하울링 울프, 재니스 조플린, 스티브 매리엇, 로저 달트리 등의 보컬리스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스몰 페이시스의 보컬리스트인 스티브 매리엇의 열렬한 팬이어서 무대 뒤, 대기실 등에까지 스토커처럼 쫓아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자연히 창법에 있어서도 스티브 매리엇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는데, 예를 들어 스몰 페이시스가 1966년에 발표한 You Need Loving을 들어보면 로버트 플랜트가 매리엇의 창법 스타일을 얼마나 많이 벤치마킹했는지를 알 수 있다.[22]
그의 진성 음역대는 0옥타브 도(C2) ~ 3옥타브 시(B5)이며, 가성까지 포함하면 4옥타브 시(B6)이다.# 이에 범접하는 음역대를 가진 록 보컬리스트는 프레디 머큐리[23] , 액슬 로즈[24] 정도밖에 없으며, 다른 장르까지 보더라도 니콜라 세다[25] , 디마시 쿠다이베르겐[26] , 비타스[27] 정도밖에 없다.
4.2. 프론트맨으로서[편집]
록 장르 프론트맨의 이미지를 구축한 아티스트이다. 찰랑찰랑한 긴 금발과 헤드뱅잉, 잘 빠진 몸매를 그대로 보여주는 상반신 노출, 어딘가 세상 일 따위 상관없이 내 갈 길 간다는 달관한 눈빛, 3옥타브 대에 이르는 샤우팅 등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른바 “록 보컬리스트”의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특징 중 대부분은 로버트 플랜트와 믹 재거, 그리고 로저 달트리를 통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8] 이러한 점은 후대의 록 프론트맨들에게도 그대로 전수되었으며, 특히 퀸의 프레디 머큐리는 라이브 공연에서 언제나 로버트 플랜트처럼 행동하려고 했다고 한다. 또한 80년대의 글램 메탈씬의 헤어스타일에도 꽤나 영향을 끼쳤으며 락 뮤지션뿐만이 아닌 70,80년대의 아이돌 팝 가수 레이프 가렛에게도 스타일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공연에서 지미 페이지와의 호흡 또한 매우 잘 맞았기에 “최고의 프론트맨”을 뽑자면 플랜트-페이지가 열 손가락 안에 자주 꼽힌다. 이들은 공연에서 관중을 조련하기도 하며 샤우팅과 기타를 이용해
4.3. 작사가로서[편집]
And as we wind on down the road
우리가 인생의 길을 달려갈 때
Our shadows taller than our soul
우리의 그림자가 우리의 영혼보다 더 커 보일 때
There walks a lady we all know
저기 우리 모두가 아는 그 여인이 걸어와요
Who shines white light and wants to show
그녀는 하얀 빛을 밝히며 보여주려 해요
How everything still turns to gold
어떻게 여전히 모든 것들이 황금으로 변하는지요
Oh, father of the four winds fill my sails
오, 네 갈래 바람의 아버지여, 내 돛을 채워 주오
Across the sea of years
세월의 바다를 건너도록
With no provision but an open face
대비책이란 없이, 다만 정직한 마음으로
Along the straits of fear
두려움의 해협을 따라가도록
Kashmir 中
작사가로서의 능력도 가히 최상급이라고 평가할 만한데, Stairway to Heaven, Kashmir 등 제플린의 대다수의 히트곡들의 작사를 맡았다.Once I stood beside a well of many words
한때 저는 많은 단어들이 있는 우물가에 서 있었죠
My house was full of rings and charms and pretty birds
제 집은 반지, 매력, 그리고 어여쁜 새들로 가득했죠
Please understand me
제발 저를 이해해 주세요
My walls come falling down
제 벽이 무너지고 있어요
There's nothing here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That's left for you
그건 당신을 위해 남겨 놓은 거예요
But check with lost-and-found
분실물 센터에서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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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학 쪽에 조예가 깊은 로버트 플랜트답게 그가 쓴 가사들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며, 역사에 기반한 가사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가사가 시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29] Immigrant Song이 대표적인데, 이 곡은 중세 유럽 당시 바이킹이 잉글랜드를 침략하는 장면을 바이킹들의 시점에서 바라본 곡이다. 따라서 해당 곡에서는 북유럽으로 진출했던 게르만의 일파인 바이킹들의 신화인 북유럽 신화, 그들의 주요 본거지 중 한 곳이었던 아이슬란드의 간단한 역사와 지리적 특징 등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Kashmir 같은 경우에도 서구권 팬들로부터 그저 단순한 노래가 아닌, 실제 카슈미르를 여행하는 여행자의 모습을 매우 잘 그려낸 한 편의 문학 작품같다라는 평가부터 문학 작품들을 많이 읽지 않았으면 절대 쓸 수 없는 가사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그의 작사 능력은 가히 경탄할 만하다.
한편 로버트 플랜트 또한 과거 사이키델릭 록 뮤지션들처럼 마약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Stairway to Heaven 같은 경우는 마약을 하다가 약에 취해 무아지경에 빠져서 정신없이 썼던 가사이다. 해당 가사같은 경우에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본인이 가장 놀랐다고(…).
지미 페이지는 로버트 플랜트가 쓴 Stairway to Heaven의 가사를 보고 크게 감탄하여 이후 작사에서는 손을 떼버리고 로버트 플랜트에게 전부 맡겼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4.4. 솔로 음악가로서[편집]
존 레논, 조지 해리슨, 폴 매카트니, 필 콜린스, 루 리드, 시드 바렛, 로저 워터스, 스팅, 피터 가브리엘, 브라이언 이노 등과 더불어서 밴드 활동 외에 솔로 활동으로도 인정받는 몇 안되는 아티스트 중 한 명이다. 보통 밴드, 그 중에서도 레드 제플린과 같은 레전드급 밴드에 몸담았던 음악가들은 솔로 활동이 밴드의 성공에 비해 부진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음악가들의 전성기는 5~10년 정도인데, 밴드 활동은 아무리 못해도 10년은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솔로 활동을 시작할 때 쯤에는 전성기에서 약간 빗겨나 있는데다가, 밴드 시절과는 달리 음악적 충고를 해줄 사람이 없어지니 어딘가 부족한 면도 생기게 된다. 그래서 로버트 플랜트도 신보를 제작할 때마다 "지미 페이지가 여기 있으면 좋았을 텐데" 타령을 매일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버트 플랜트는 레드 제플린의 유산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만의 음악적 스타일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초기 커리어는 하드 록으로 시작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시대의 흐름에 맞춰 팝 록, 신스팝, 뉴 웨이브를 수용했고, 1980년대 말기에는 얼터너티브 록, 포스트 펑크도 시도했다. 2000년대 이후로는 음악적 색체가 더욱 다양해져서 아메리카나, 컨트리 뮤직, 심지어는 월드 뮤직도 선보였다.[30]
놀라운 것은 이러한 엄청난 음악적 스펙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앨범들의 평가가 꽤나 준수했고, 상업적으로도[31] 성공을 거뒀다는 점이다. 약 300만 장 가량이 팔린 Raising Sand를 비롯하여 그의 앨범들은 대부분 빌보드 차트, UK 차트 상위권에 진입했다. 그는 1,000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으며, 평론적으로도 올타임 음악가로 불릴 정도로 평가가 높다. 로버트 플랜트는 어클레임드 뮤직 선정 올타임 아티스트 855위에 랭크되었다. 더욱 유의미한 것은 1980년대 661위, 1990년대 488위, 2000년대 168위로 오히려 순위가 시간이 지날수록 상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5. 가족[편집]
20세의 어린 나이에 모린 윌슨과 결혼하였다. 그러므로 로버트는 레드 제플린이 데뷔하기 전부터 배우자가 있는 몸이지만 레드 제플린으로 활동하는 내내 그루피들과 어울리며 가정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다. 그럼에도 모린과의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는데 모린에게 로버트가 헌정한 Thank You는 모린을 향한 로버트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모린과의 사이에서 딸인 칼멘과 아들인 캐락, 로건을 두었다. 그루피들과 어울리던 시절에도 로버트는 자녀들을 각별하게 아꼈는데 1976년에 개봉한 The Song Remains the Same에서는 로버트가 자녀들과 어울리는 단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연하지만 로버트가 자녀들과 같이 촬영한 사진도 많이 남았다.
그러나 1977년에 5세이던 캐락이 위장질환으로 사망한다. 레드 제플린의 미국 투어로 인해 영국에 없었던 로버트는 캐락의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하고 캐락을 떠나보낸다. 자녀들을 아끼던 로버트는 절망하여 그 자리에서 투어를 종료하고 영국으로 귀국하여 1년이라는 시간을 칩거한다. 다시 활동을 시작한 로버트가 캐락을 잃은 아픔을 토대로 만든 노래가 8집인 In Through the Out Door에 수록된 All My Love와 I'm Gonna Crawl. 1980년에 모린과 이혼한 로버트는 11년이 지난 1991년에 모린의 여동생인 셜리와 만남을 이어가다가 아들인 제시를 얻는다. 모린이 낳은 칼멘, 로건과 셜리가 낳은 제시는 외사촌인 동시에 형제자매인 황당한 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1979년에 태어난 로버트의 차남인 로건은 로버트와 흡사한 외모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금발에 벽안인 로버트와 다르게 로건은 흑발에 벽안이다.
6. 다른 음악가와의 관계[편집]
현대 유명 음악가와까지 친분을 맺고 있는 록 음악계의 대표적인 마당발인 링고 스타나 데이비드 보위 만큼은 아니지만 활동 당시 로버트 플랜트는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뮤지션들과도 친분을 맺었는데, 이는 후술할 그의 사교적이고 유쾌한 성격 때문으로 추측된다.
6.1. 지미 페이지[편집]
음악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플랜트-페이지 문서 참조.
레드 제플린 시절 지미 페이지와는 매우
그러나 워낙 친했기에 밴드 활동 내내 시도때도 없이 친목질을 하는 바람에(…) 둘 사이에서 소외되고 자신의 역할이 세션맨에 불과하다는 불만을 느낀 베이시스트 존 폴 존스가 활동 중반기와 후반기에 일시적으로 밴드를 탈퇴하기도 했다. 물론 존 본햄의 설득으로 다시 밴드에 재가입했다.
그런데 레드 제플린 해체 후엔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의 사이가 예전만큼 좋지 못하다. 해체 후 둘이 간혹 같이 공연하거나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의견 불일치와 사소한 다툼 등 트러블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2007년 재결성 공연에서 로버트 플랜트는 지미 페이지에게 무언가 불편함과 불쾌감을 느꼈다고 하며, 이 때문에 2023년 현재까지 레드 제플린 재결성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6.2. 기타 음악가[편집]
7. 디스코그래피[편집]
7.1. 정규 앨범[편집]
- Pictures at Eleven (1982)
- The Principle of Moments (1983)
- Shaken 'n' Stirred (1985)
- Now and Zen (1988)
- Manic Nirvana (1990)
- Fate of Nations (1993)
- No Quarter: Jimmy Page and Robert Plant Unledded (1994)
- Walking into Clarksdale (1998)
- Dreamland (2002)
- Mighty ReArranger (2005)
- Raising Sand (2007)
- Band of Joy (2010)
- Lullaby and the Ceaseless Roar (2014)
- Carry Fire (2017)
7.2. 싱글[편집]
7.2.1. 빌보드 핫 100 3위~10위[편집]
- Sea of Love (1984, 3위)
7.2.2. 빌보드 핫 100 11위~20위[편집]
- Big Log (1983, 20위)
7.2.3. 빌보드 메인스트림 록 차트 1위[편집]
- Other Arms (1983)
- Little by Little (1985)
- Heaven Knows (1988)
- Tall Cool One (1988)
- Hurting Kind (I've Got My Eyes on You) (1990)
- Most High (1998)[35]
7.2.4. 빌보드 메인스트림 록 차트 2위~10위[편집]
- Burning Down One Side (1982, 3위)
- Big Log (1983, 6위)
- In the Mood (1983, 4위)
- Ship of Fools (1988, 3위)
- Tie Dye on the Highway (1990, 6위)
- Your Ma Said You Cried in Your Sleep Last Night (1990, 8위)
- 29 Palms (1993, 4위)
- Calling to You (1993, 3위)
- I Believe (1993, 9위)
7.2.5. 기타 차트 성적[편집]
- Please Read the Letter (2007, 버블링 언더 핫 100 차트 20위)
- Rich Woman (2007, 버블링 언더 핫 100 차트 18위)
8. 여담[편집]
- 상단에 있는 사진은 로버트 플랜트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라고 한다. 이 사진은 1973년 샌프란시스코 공연에서 찍힌 사진인데, 당시 공연이 개막할 때 천 마리의 비둘기들을 관객들을 향해 풀었는데, 그중 한 마리가 날아오르지 않고 로버트 플랜트의 손 위에 앉았을 때 찍힌 것이다. 로버트 플랜트는 이 사진을 직접 복사해서 가지고도 있다고.
- 동양인들이 생각하는 게르만, 켈트의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인 금발벽안에 흰 피부를 가지고 있지만 그의 어머니는 흑발에 다소 어두운 피부[36] 를 가진 롬인, 즉 집시이다. 따라서 로버트 플랜트는 집시 혈통이다.
- 팬 서비스가 좋은 록스타로 유명하다. 레드 제플린 활동 시절부터 현재까지 사인을 엄청 잘 해주며, 휴대폰이 보급된 현재에는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면 팬들이 원하는 포즈로 같이 찍어준다고 한다.[37]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레딧 등지에 이러한 인증샷들이 자주 올라온다.
- 크라프트베르크의 최연장자인 ‘랄프 휘터’와 생일이 같은데, 로버트 플랜트가 2살 아래다.
- 간간히 기타를 연주하기도 했다. 레드 제플린 해체 후에는 본인이 직접 기타를 연주하기도 했는데, 솔로를 연주하기도 했다. # 지미 페이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인지 상당히 비슷한 스타일로 연주한다는 평이 많은 편.
-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메이저 데뷔도 1968년에 하는 등 빨랐기에 동시대의 아티스트 중에서는 나이가 상당히 어린 편이며, 후배 밴드들의 구성원과 나이가 비슷하다.[38]
- 필 콜린스의 앨범이자, 1980년대 팝 음악의 메가 히트작인 No Jacket Required의 앨범 이름에 본의 아니게 영감을 줬다. 이에 대한 일화는 문서 참조.
- 풍성한 금발 머리 때문에 젊은 시절에는 로저 달트리를 은근히 닮았었다. 이 둘은 활동 당시 음악적인 면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받았었다.
- 당대의 많은 록스타들이 그러하듯 여러 그루피 등 수많은 여자들과 바람을 피웠다. 몇 년 전에는 ‘밴드 오브 조이’ 활동을 같이 했던 미국의 싱어송라이터인 패티 그리핀과 교제중이었으나 2014년에 결별했다고 밝혔다.
- 창법 때문일진 몰라도 노래부를 때 목소리가 조금
많이야한 편이다. 또 무대에서 성적매력을 과시한다며설쳐대서레드 제플린 무명시절엔 안티들에게 까이기도 했다. 당시 레드 제플린의 노래를 듣던 청소년들은 부모님이 오시면 소리를 줄였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왜 자신에게 성적 매력 강조를 운운하는 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39]
- 다른 레드 제플린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지 않았기에, 로버트 플랜트가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졌는지는 레드 제플린 활동 당시부터 현재까지 팬들의 떡밥거리(…)가 되고 있다.[40] 다만 브렉시트를 계기로 영국 정부가 투어를 전보다 어렵게 만들었다고 정부를 비판하는 공개 서한에 서명한 것으로 보아, 정치적인 이유든 경제적인 이유든 브렉시트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41]
- 프레디 머큐리와는 록 음악의 역사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 보컬 실력 면에서 록 음악 역사상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점 때문에 해외에서는 팬들에게 자주 비교의 대상이 된다.[42] 물론 프레디 머큐리와 로버트 플랜트 정도의 클래스의 보컬이면 굳이 비교하는게 무의미한 수준. 사실상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린다고 보면 된다.[43]
- 젊은 시절에는 지미 페이지처럼 종교적으로 흑마술, 오컬트에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으나, 이후 나이가 들어서 점차적으로 믿지 않게 되었다. 현재에는 종교에 관련해서 확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그래서 팬들 사이에서는 그의 종교에 대해 기독교, 무종교(범신론/이신론), 혹은 불교까지 다양한 가설들이 나오지만 어느것도 확실하지 않다.
- 레드 제플린 시절에 다른 아티스트들처럼 마약을 했지만[44] , 지미 페이지처럼 심한 마약 중독에까지 이르진 않았고, 나름 절제하려고 노력하며 건강에도 신경 쓰는 타입이었다.
- 1976년 영화인 The Song Remains the Same에서 중세 유럽의 기사 분장을 하고 열연을 펼쳤다. 그리고 후술할 브라이언 존슨의 방송에서 저 복장을 그대로 입고 출연했다![45] 참고로 이 당시 길쭉한 대검을 하나 들고 나오기도 했는데, 브라이언이 칼을 보고 놀라 웃자 로버트는 "사람들이 이 칼만 보면 칼 얘기만 그렇게 해댄다."라며 소소한 불평(?)을 하기도 했다.참조
- 1992년에 열린 프레디 머큐리 추모 콘서트에 참여해서 Innuendo,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을 불렀으나, 당시 감기에 걸렸어서(…) 라이브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 팬들에게서 불리는 별명은 식물(Plant)옹(...).
- 영국인답게 축구를 매우 좋아한다. 레드 제플린 활동 당시부터 현재까지 동네에서 조기축구를 자주 하며 EPL의 축구팀 울버햄튼 원더러스 FC를 매우 열광적으로 응원한다.[47]
- 해외에서는 Watch Robert Plant while Roger Waters라는 유명한 밈이 있다. 로버트 플랜트의 성인 Plant가 영어로 ‘심다’을 뜻하고, 로저 워터스의 성인 Waters가 영어로 ‘물’을 뜻하는 점을 들어 "로버트가 심고 로저가 물을 준다"라는 언어 유희를 하는 것. 여기에 달과 별을 하늘에 띄워 놓거나, 옆에 장미꽃이나 종이 한 장을 하나 곁들이는 등의 기출 변형도 존재한다. 참고로 이들의 성씨는 링고 스타를 제외하면 모두 예명이 아닌 원래 성씨이다.
- 우리나라의 가수 김종서가 로버트 플랜트와 노래 스타일이 비슷한데, 실제로 김종서는 로버트의 열렬한 팬이다. 창법 뿐만 아니라 무대 매너까지 로버트와 흡사한데, 김종서는 로버트 플랜트를 롤 모델, 귀감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본인 노래도 당연히 잘 부르지만 레드 제플린 노래를 부를 때도 놀라운 수준의 가창력을 보이는데 아시아에서 로버트 플랜트의 노래를 가장 잘 커버한다는 평이 있다.
- 무대에 설 때면 대부분 상의는 입지 않거나 그 위에 헐렁한 재킷을 걸친 상태로 올라왔는데, 문제는 항상 바지는 꽉 끼게 입어서 바지 위로 굵직한 무언가가 돌출되었다는 것.
8.1. 성격[편집]
매우 유쾌하고 사교적인 성격이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1974년 5월에 로버트, 지미, 존 본햄은[48] 어릴적 우상이자 오랜 팬이었던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을 보기 위해 당시 엘비스의 공연이 열리고 있던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공연을 관람한 뒤에 호텔을 방문하여 엘비스를 만난적이 있었다. 당시 엘비스는 레드 제플린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처음엔 잠깐만 시간을 내주려 했으나, 로버트의 재치있는 입담에 푹 빠져서 결국 2시간 동안이나 시간 가는줄 모르고 대화를 계속 했다는 일화까지 있다. 이때 엘비스의 매니저는 그들이 있는 방 문을 두드렸으나 문을 잠그면서까지 대화를 계속했다고.
에피소드를 추가하자면, 엘비스는 레드 제플린이 최신 인기 밴드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음악을 들어본 적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49] 그래서 제플린의 음악보다는 당시에 매스컴에 많이 나오던 제플린에 관한 가십성 소문들에 대해 관심있었는데, 특히 순회공연 때마다 수많은 그루피족과 질펀하게 어울린다는 소문에 대해 궁금해 했다고 한다.
기혼자였던 로버트로서는 이에 대해 답변하기가 곤란한 처지였는데, 다음과 같은 재치있는 답변으로 잘 넘어갔다고 한다. "그런건 소문일 뿐이고 우리는 무척 가정적인 사람들입니다. 우린 호텔에 머물 때 딴 짓 안 하고 오직 당신의 노래를 부르면서 휴식시간을 보내는게 유일한 즐거움입니다(일동 웃음)." 곤란한 질문도 서로 기분 좋게 넘어가게 하는 플랜트의 재치있는 언변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플랜트의 장기였던 엘비스 흉내 모창을 보여줬는데, 특히 엘비스의 ‘Love Me’를 부를 때 노래나 표정이나 워낙 비슷하게 흉내내서 엘비스를 포함한 모두가 폭소를 터트렸다고 한다.
8.2. 외모[편집]
늙어서도 미노년인데, 젊었을 때는 정말 엄청난 꽃미남이었기 때문에 지미 페이지와 함께 엄청난 그루피들을 몰고 다녔다. 금발벽안과 흰 피부를 가졌으며 북유럽 신화 혹은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신을 떠올리게 하는 외모를 가졌다. 실제로 전성기 때에는 60~70년대 특유의 패션과 어우러져 북유럽 신화 속의 신 혹은 바이킹 같다는 말이 많이 나왔다.[50] 이는 동양적인 외모를 가진 지미 페이지와 대조를 이루며 레드 제플린의 인기 상승에 기여했다. 섹시한 록 스타 순위를 꼽을때 커트 코베인, 믹 재거, 로저 테일러, 액슬 로즈, 리암 갤러거 등과 함께 결코 빠지지 않는 대단한 외모의 소유자이다. 거기에다가 엄청난 고음의 목소리로 색기를 발산해댔을 뿐더러 외모 또한 미소년이었던 탓에 여성 그루피 뿐만 아니라 남성 그루피까지 주변에 꼬였다고 했다.
보통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1970년에서 1971년 사이에 수염을 길게 길렀던 적이 있다. 수염을 기르면 북유럽 신 같은 느낌이 더욱 극대화된다. 특히 수염을 기르고 Immigrant Song을 부를 때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일명 ‘히피펌’이라고 불리는 특유의 풍성한 금발 곱슬머리가 특징이다.[51] 일부러 파마나 고데기를 했던 것은 아니고, 집시 혈통인 어머니에게서 곱슬머리를 물려받았다. 이 헤어스타일에 애착이 강하다고 하는데, 오죽하면 외모나 노래 실력에 대한 칭찬보다 헤어스타일에 대한 칭찬을 더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다. 아무튼 애착을 갖고 신경써서 관리했던 덕분인지 그 풍성한 금빛 머리의 효과까지 더해져 20대 리즈시절 무대 위 그의 모습은 여심을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그래서 당시 별명도 황금빛 신(The Golden God)이었으며, 노년이 된 현재까지 이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 위의 가족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본인과 똑같이 금발 머리를 가지고 있는 자녀들의 당시 헤어 스타일도 로버트 플랜트와 똑같다(…).
이 헤어스타일에 대해서 당시 레드 제플린의 안티들은 로버트 플랜트가 당시 유명했던 로저 달트리를 배꼈다고 마구 비난했다고 한다. 그러나 로저 달트리가 직접 등판하여 자신은 로버트 플랜트와 친한 사이이며, 자신을 따라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미 페이지는 로버트 플랜트의 헤어스타일이 너무 부러웠는지 고데기를 해서 억지로 곱슬을 하고 다녔는데, 그루피들에 의하면 이것 때문에 머리에서 탄내가 풍겼다고(…) 한다.
백인의 노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감안하면, 1980년대에는 40대가 맞는지 의심되는 수준의 동안을 보여줬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에 나잇살이 붙고 얼굴에 주름이 늘어나면서 갑자기 폭삭 늙어버렸는데, 2007년과 현재 모습을 비교해 보면 다른 게 거의 없다(…).
칭찬만 있던 건 아니고, 뻑하면 웃도리를 벗어던지고, 옷을 입더라도 단추를 잠그는 일 없이 털이 숭숭 난 가슴을 다 드러냈기에 레드 제플린 안티들에게는 노출증 환자냐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똑같이 가슴털을 드러내고 웃통을 까고 노래한 퀸의 프레디 머큐리는 고릴라 같다고 욕을 듬뿍 먹었지만 플랜트는 그나마 얼굴이 잘 생겨서 덜 욕을 먹은 정도.[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