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역사귀속과 계승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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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기원
2.1. 사서
2.1.1. 중국
2.1.1.1. 당서
2.1.1.2. 통전
2.1.1.3. 송사
2.1.1.4. 금사
2.1.2. 한국
2.1.2.1. 사불허북국거상표
2.1.2.2. 태사시중께 드리는 편지
2.1.2.3. 삼국유사
2.1.2.4. 고려사/고려사절요/제왕운기
2.1.3. 일본
2.1.3.1. 속일본기
2.1.3.2. 유취국사
2.2. 말갈비칭설
2.3. 고분
2.4. 결론
3. 계승
3.1. 현대
3.1.1. 한국
3.1.1.1. 대한민국
3.1.1.2. 북한
3.1.2. 중국
3.1.3. 일본
3.1.4. 러시아
3.1.5. 서구권
3.2. 현대이전
3.2.1. 한국
3.2.1.1. 고려
3.2.1.2. 조선
3.2.2. 중국



1. 개요[편집]


항목을 시작하기 전, 우선 이 문제에 대하여 유념해둘 점이 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한국중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 학계에서는 발해 역사가 어느 나라 역사에 귀속되는지 딱 집어서 정하는데 큰 관심이 없다. 서구 학자들 중 발해 역사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들은 주로 한국사보다는 만주족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로[1] 이를테면 르네 그루세가 저술한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서는 발해에 대해 "일부 한국인들이 말갈족들을 문명화시키면서 발생한 국가"라는 식으로 여진족의 역사 관련하여 간략하게 서술하는 편이다.

고구려 역사는 세계학계에서 한국사에 귀속된다고 대체로 합의하고 있지만, 발해사 관련해서는 한중러 삼국 학계의 의견을 각각 정반합으로 절충하는 편이다. 러시아 학자들이나 서구 학자들 입장에서 발해사는 만주 지역의 역사로 보는 지역사나 경계사 혹은 퉁구스계 민족들의 역사로 보는 관점이 우세하다.[2] 또 중요한 점은 발해사의 귀속성 논쟁 때문에 발해의 한국적 성격과 중국적 성격을 따지다보니 발해만의 독자적 성격을 논하지 못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아직 발해 관련한 사료가 그렇게 충분한 편이 아니기 때문에 작정하고 한 쪽에서 그럴듯하게 지어내서 우기면 다른 한쪽에서도 마찬가지로 상상력을 가지고 우기는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연유로 한국과 중국은 모두 제각기 발해를 자국의 역사로 설명하고 있지만, 상술한 것처럼 외국 학계 입장에서는 발해가 오늘날 어느나라 역사에 귀속되는지가 그렇게 중요한 쟁점이 아니다.

애당초 한국 내에서도 발해의 역사적 귀속에 대해 특히 역사에 관심이 있다 싶은 사람이면 고구려와 달리 '오롯한 한국의 역사'라고 보는 관점을 취하는 일은 많지 않다. 정확하게 말하면 발해의 역사가 한민족뿐 아니라 다른 민족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이중적인 정체성이 있음을 굳이 부정하지 않는 쪽에 가깝다. 그도 그럴 것이 발해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알겠지만 발해는 오롯이 고구려 계열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기보다는 고구려가 망한 뒤에 유민이 된 예맥족(고구려인)과 퉁구스족(말갈 등)이 손잡고 세운 나라인지라 이민족인 말갈의 지분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3]

2. 기원[편집]



2.1. 사서[편집]



2.1.1. 중국[편집]



2.1.1.1. 당서[편집]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흔히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이라는 식으로 건국 세력이 고구려의 유민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사실 발해의 족원(族源)을 따지는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왜냐하면 여러 사서에서 건국자 대조영이 말갈 출신 내지 말갈과 연이 깊은 인물임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당서(舊唐書)》 발해말갈전의 기록은 이렇다. 참고 자료.

발해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려 별종이다.

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구당서》의 기록을 풀이하면,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고구려 지파 출신이라는 뜻이다.

신당서(新唐書)》 발해전의 기술은 이렇다.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고려에 더부살이하던 것들로서, 성은 대씨다.

渤海 本粟末靺鞨 附高麗者 姓大氏


《신당서》의 기록을 풀이하면, 대조영을 비롯한 대씨 왕족은 원고구려인이 아닌 속말말갈 출신으로 나중에 고구려에 복속하게 된 집단에 속하는 것이 된다. 고구려 멸망 전의 기록에서도 생해 같이 '고구려인'과 구별되면서도 고구려에 속해서 움직이는 말갈인의 존재가 확인되는데, 대씨 일가와 그 조상 역시 그런 케이스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흔히 《신당서》의 기록을 인정하지 않는데, 그것은 《구당서》의 기록과 다르다는 점 때문이다. 즉 《구당서》에는 "말갈족이 주축이 된 나라지만 건국자는 고구려인"이라고 사실에 충실하게 기록한 반면 《신당서》에는 "말갈족의 나라이며 지배층도 말갈인"이라는 식으로 일관성을 지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구당서》와 《신당서》 중 《구당서》 쪽이 신뢰도가 높기 때문에 《구당서》의 기록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 한국 사학계의 일반적인 입장이다.

하지만 중국 사학계는 《구당서》의 문장이 대조영을 '고려인'이라 하지 않고 '고려 별종'이라고 지칭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그냥 '고구려인'이라면 굳이 '별종'이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 사학계는 '별종'을 '다른 종족[異種]'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반박한다. 백제나 고구려를 부여 별종이라고 한 것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오히려 고구려에 대한 계승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수서에서는 백제를 고구려 별종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고고학적 연구 결과로도 충분히 증명되거니와 건국 설화 등을 볼 때 고구려 지배 세력이 부여에서, 백제의 지배 세력이 고구려에서 나왔다는, 최소한 아주 강한 친연성을 가진 일족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적어도 '별종'으로 표현한 이유가 고구려와의 차별성뿐만 아니라 연결성을 강조할 수 있는 이중 표현의 의미란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구당서》의 찬자가 대조영의 출신지를 고구려의 '본류'[4]로 생각하지 않고 일종의 '지류'[5]로 취급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대조영에 대해서는 단순한 계승을 나타내는 표현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 '본래[本]' 고려 별종 즉 고구려 지파 출신이라고 하여 건국 이전부터 대조영이 고구려와 분리시켜서 볼 수도 있는 어떠한 집단의 소속임을 강하게 시사하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구당서》의 같은 기사에서 대조영이 나라를 세운 후 모여든 고구려 유민에 대해서도 '고려 별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발해부분만 봐서 저런 이야기라도 나오는 것이지, 구당서의 일본전을 보면 저 별종의 표현은 더 복잡해지게 된다. 왜냐하면

일본국은 왜국의 별종이다.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

라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별종이라는 말처럼 중국에서는 기존의 왜와 일본은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는 것으로 봤기 때문으로 볼 수 있지 않느냐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윗문장에서 이어지는 표현들이 걸린다.

그 나라가 해의 가장 구석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을 이름으로 했다고도 하고, 혹은 왜국이 스스로 그 이름을 싫어하고 듣기를 꺼려서 고쳐 일본이라 했다고도 하고, 일본이 옛 소국으로 왜국의 땅을 아울렀다고도 한다.

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爲名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爲日本或云日本舊小國併倭國之地

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보면 별종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고구려가 이름을 바꿔서 발해라고 부른거다'라고 해석할 수도, '발해가 원래 고구려에 있던 세력인데 그게 고구려 땅을 먹어서 고구려 별종이라고 불러주는거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건 당시 중국사서가 자기들 나라 밖에 대한 기록을 얼마나 대충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당은 수의 별종이다

《신 / 구당서》에, 영주를 탈출할 때 걸걸중상이 걸사비우와 더불어 거느렸던 집단이, 말갈인들이 아닌 고구려 유민으로 나와 있는 것도, 걸걸중상이 말갈계가 아닌 순수 고구려계 사람이었거나 말갈계라고 하더라도 이미 말갈인과 따로이 고구려 유민들을 친솔할만큼 고구려에 동화된 사람일 가능성에 힘을 실어준다.

萬歲通天年,契丹李盡忠反叛,祚榮與靺鞨乞四比羽各領亡命東奔,保阻以自固。

만세통천년(萬歲通天年 : 696년)에 거란(契丹)의 이진충(李盡忠)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은 말갈의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각자 망명자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달아나서 스스로를 굳게 지켰다.


《구당서》의 기록에는 "각자 망명자를 거느리고"라고만 나와 있어 영주 탈주 당시 걸걸중상 - 대조영 계열 지도부의 통솔을 받았던 세력의 정체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으나,

萬歲通天中,契丹盡忠殺營州都督趙翽反,有舍利乞乞仲象者,與靺鞨酋乞四比羽及高麗餘種東走,度遼水,保太白山之東北,阻奧婁河,樹壁自固。

만세통천 중에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 도독 조홰(趙翽)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리(舍利) 걸걸중상(乞乞仲象)이라는 이가 말갈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 유민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서 요수(遼水)를 건넜는데, 태백산(太白山) 동북쪽을 차지하고 오루하(奧婁河)를 막아 성벽을 쌓아서 스스로를 굳게 지켰다.


신당서》에는 보는 바와 같이 그 대상이 고구려 유민[高麗餘種]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공동 지도자였던 걸사비우가 말갈 추장[靺鞨酋]으로 나와 있다는 점에서 걸걸중상은 고구려 유민을, 걸사비우는 말갈족을 이끌었다는 해석도 있다. 《구당서》의 각자 거느렸다[各領]라는 표현을 감안하면 충분히 개연성 있는 해석이긴 하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중국 정사에서 걸걸중상이 이끈 것으로 확인되는 집단은 어디까지나 고구려 유민이었지 속말말갈이든 뭐든 말갈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상의 기록들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은 1.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각기 다른 고구려 유민 집단을 이끌고 영주를 탈출했다거나 2. 걸걸중상은 고구려 유민 집단을, 걸사비우는 말갈족 집단을 이끌고 영주를 탈출했다거나 둘 중 하나이지, 걸걸중상이 말갈족 집단을 이끌고 영주를 탈출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신당서》에서 걸사비우에 대해서만 굳이 따로 말갈 추장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걸걸중상이 그와 같은 신분이 아니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설령 걸걸중상이나 대조영이 말갈 출신이었어도 이들은 고구려의 계승을 일컬으며 발해를 세웠다. 그만큼 고구려인이란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던 셈이니 종족과 계승성 문제를 연결짓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건국자가 중국에서 넘어온 위만조선이 한국사로 인정받는 것과 마찬가지.

구당서 현종본기의 태산 봉선의식의 '조회하러 온 외국'에 신라, 일본과 함께 말갈이 있는데 발해로 추정된다. 물론 흑수말갈 같이 독립 혹은 준복속 상태[6]의 말갈 부족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2.1.1.2. 통전[편집]

통전》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다. 그 우두머리인 대조영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진단(震旦)이라고 불렀다. 선천(先天) 연간[당나라 현종 임자년(서기 712년)이다.]에 비로소 말갈이라는 국호를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만 불렀다. 개원(開元) 7년[기미, 서기 719년]에 대조영이 죽자 시호를 고왕(高王)이라고 하였다.



2.1.1.3. 송사[편집]

정안국(定安國)은 본래 마한(馬韓)의 한 종족이다. 거란(契丹)에게 공파되자 그 서비(西鄙)를 지켰다.

定安國本馬韓之種.

爲契丹所破 保其西鄙.

송사(宋史) 정안국전(定安國傳)


발해부흥운동정안국송사마한의 한 종족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삼국시대 때부터 고구려의 별칭으로 , 삼한, 마한, 변한 등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대목이라 할 수 있다.[7]


2.1.1.4. 금사[편집]

금사(金史)》에서 등장하는 발해 관련 기술.

金之先,出靺鞨氏。靺鞨本號勿吉。勿吉,古肅慎地也。元魏時,勿吉有七部:

曰粟末部、曰伯咄部、曰安車骨部、曰拂涅部、曰號室部、曰黑水部、曰白山部。

隋稱靺鞨,而七部並同。唐初,有黑水靺鞨、粟末靺鞨,其五部無聞。粟末靺鞨始附高麗,姓大氏。>李績破高麗,粟末靺鞨保東牟山。後爲渤海,稱王,傳十餘世。

금의 선조는, 말갈씨(靺鞨氏)에서 나왔는데, 말갈은 본래 물길(勿吉)이라 불렀다. 물길은 옛날 숙신 땅이다.

원위(元魏) 때, 물길은 7부가 있었는데, 말하길 속말부(粟末部), 말하길 백돌부(伯咄部), 말하길 안차골부(安車骨部), 말하길 불열부(拂涅部),

말하길 호실부(號室部), 말하길 흑수부(黑水部), 말하길 백산부(白山部)이다.

수(隋)가 말갈이라 칭하였는데, 7부는 모두 같다.

당(唐) 초에, 흑수말갈과 속말말갈이 있었는데, 그 5부는 듣지 못 했다.

속말말갈은 처음에 고려(高麗)에 속하였는데, 성(姓)은 대씨(大氏)다.

이적(李績)이 고려를 파하자, 속말말갈은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였다.

후에 발해(渤海)를 다스리고, 왕을 칭하였으며, 십여세를 전하였다.



2.1.2. 한국[편집]


신라 측의 기록들은 발해의 모체가 고구려임은 인정하나, 고구려 그 자체라기보단 잔당(殘孽) 등의 표현을 써서 잔여 세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물론 이는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했다는 삼한일통 의식에 따르면 고구려의 본류는 통일신라에 속했고 이를 벗어난 발해는 일부임을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 고려 역시 발해를 형제국으로서 동질감을 표현하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통일신라에 속한 고구려 부분인 패서에서 비롯되어 신라의 삼한일통을 계승해 재완성한 입장이다보니 삼국사기 등 관찬 사서를 통해 계보의 본류에서는 배제했다. 즉 고구려의 정통 계승국은 자신들이며 발해는 방계에 불과하다는 것. 다만 태조 왕건의 발언에서 드러나듯 발해가 고려와 매우 가까운 친척국가라는 걸 부정하진 않았고 호의적으로 서술하였다. 발해를 통일신라와 병존한 대등한 정통 왕조로 보는 사관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비로소 등장한다.


2.1.2.1. 사불허북국거상표[편집]

최치원은 당나라 황제에게 올린 글 "발해(渤海)가 신라의 윗자리에 거함을 불허함을 사례하는 표(사 불허 북국 거상 표, 謝不許北國居上表)"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고 자료. 이 글은 최치원이 쓰기는 했는데, 신라 왕이 당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국서의 형식이다. 따라서 당시 신라의 공식적인 견해라고 해도 무방한 것이다.

臣謹按渤海之源流也。句驪未滅之時。本爲疣贅部落。靺羯之屬。寔繁有徒。是名栗末小蕃。嘗逐句驪內徙。其首領乞四羽及大祚榮等。至武后臨朝之際。自營州作孼而逃。輒據荒丘。始稱振國。

발해(渤海)의 원류(源流)는 고구려(高句麗)가 망하기 전엔 본시 사마귀 만한 부락(部落)으로 말갈(鞅鞨)의 족속이었는데 이들이 번영하여 무리가 이뤄지자 이에 속말(粟末) 소번(小蕃)이란 이름으로 항상 고구려를 좇아 내사(內徙)하더니, 그 수령 걸사우(乞四羽) 및 대조영(大祚榮) 등이 무후(武后) 임조(臨朝) 때에 이르러, 영주(營州)로부터 죄를 짓고 도망하여 문득 황구(荒丘)를 점거하여 비로소 진국(振國)이라 일컬었나이다.


이 글에서는 최치원은 발해의 원류를 말갈이라 말하는 동시에 고구려에 내사(內徙) 즉 들어갔다고 하여 발해의 모체가 고구려의 일부였음도 밝히는 이중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2.1.2.2. 태사시중께 드리는 편지[편집]

삼국사기》 최치원전의 '(당나라) 태사시중께 드리는 편지[上太師侍中狀]' 중.

총장(摠章) 원년(서기 668)에는 영공 이적(李勣)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격파케 하고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를 설치하였으며, 의봉(儀鳳) 3년(서기 678)에 이르러 그 사람들을 하남과 농우(隴右)에 옮겼습니다.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모여 북으로 태백산(太白山, 백두산) 아래를 근거지로 하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하였습니다.


발해의 건국 세력을 고구려 잔당[高句麗殘孽]으로 표현했다.


2.1.2.3. 삼국유사[편집]

삼국유사》에서는 〈기이(紀異)〉 제1 '말갈·발해' 편에서 발해를 다루고 있다. 주석에 인용한 신라의 고기(古記)에는 대조영을 고구려의 옛 장수, 즉 구장(舊將)으로 말하고 있으나, 인용자인 일연 본인의 개인 의견[按]으로는 발해를 말갈의 '별종'으로 간주했다.

新羅古記(신라고기)에, 高句麗(고구려)의 舊將(구장) 祚榮(조영)의 姓(성)은 大氏(대씨)니, 殘兵(잔병)을 모아 나라를 太伯山南(태백산남)에 세우고 國號(국호)를 渤海(발해)라 하였다 한다. 以上(이상) 諸記事(제기사)를 보면 渤海(발해)는 靺鞨(말갈)의 別種(별종)인바, 다만 開合(개합)함이 같지 않았을 뿐이다.


참고로 여기서 '별종'이라는 표현을 구당서 대조영 기록 부분을 해석하는 중국 학자들의 주장처럼 '혈통적으로 관련이 없는 별개의 집단'으로 보게 되면 발해는 말갈의 '분파'나 '후계 집단'일 수 없게 된다. 물론 구당서 저자와 일연이 별종이란 표현을 다른 뜻으로 표기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같은 뜻으로 표기했을 가능성도 있으니 어찌보면 말장난.

위 서술에 대해 '말갈·발해'라는 편명을 강조하여 신라에서 발해=말갈로 인식했다고 보는 의견도 있으나, 그와 같은 편명은 어디까지나 고려 사람인 일연이 임의로 붙인 것일 뿐이다. 그와 별개로 인용한 신라 당대의 기록은 엄연히 대조영을 고구려인으로 표현한만큼, 그러한 편명을 신라인들이 발해가 고구려에서 기원했다는것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취급할 수는 없다. 이는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의 嘗逐句驪內徙 운운과 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에 新羅古記를 '신라(新羅)의 옛 기록[古記]'이 아닌 고려 시대에 편찬된 신라 역사서의 제목으로 본다면 이는 고려인들이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국으로 봤다는 증거가 되며, 이는 고려 사회에 발해의 원류를 일연의 안(按)과 다르게 보는 시각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또 일연이 발해를 말갈국가로만 보고 고구려와는 무관한 존재로 여겼다면, 기본적으로 고려의 전사(前史)를 다루고 있는 〈기이〉편에서 다룰 리가 없다. 고려인들은 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으로 이어지는 퉁구스계 여러 종족에 대해 한 번도 동족 관념을 표출한 바가 없고 따라서 이들의 역사를 자국 역사의 일부로 취급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8]


2.1.2.4. 고려사/고려사절요/제왕운기[편집]

고려사절요》에서의 발해와 대조영.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인데, 당나라 무후(武后) 때에 고구려인 대조영(大祚榮)이 달아나 요동(遼東)을 지키니 당나라 예종(睿宗)이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봉하였다. 그 뒤에 스스로 발해국이라 일컬으며 부여(扶餘)ㆍ숙신(肅愼) 등 10여 나라를 아울러 다 차지하고 문자ㆍ예악(禮樂)과 관부(官府)의 제도를 세웠다.


요지는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인데 건국 주체는 고구려인이라는 것. 고려사도 비슷한 내용을 전하고 있으며 제왕운기에서는 말갈에 대한 언급은 없이 그냥 대조영이 고구려의 유장이었다고만 나온다. 고구려의 유장이었단 부분은 삼국유사의 경우와 같다. 이러한 관념은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에서 나온 발해의 기원관과 비슷하나 고왕 대조영을 일관적으로 고구려인으로 명시했다는 차이가 있다.


2.1.3. 일본[편집]


발해 군주 대무예가 부여와 계루부의 풍속을 이어받았다고 일본에 밝힌바가 있다.


2.1.3.1. 속일본기[편집]

발해 측은 국서에 스스로를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발해가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復高麗之舊居 有夫餘之遺俗)"라고 하였다.


2.1.3.2. 유취국사[편집]

지배층인 고구려계가 소수이고, 피지배층인 말갈계가 다수였다는 식의 기록은 기본적으로 일본 사서인 《유취국사》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 (일본 사신) 재당학문승 에이츄 등이 덧붙여 보낸 글을 받들어 전하였다. 발해국은 고려의 옛 지역에서 일어났는데, 아메미코토히라카스와케노스메라미코토(덴지 덴노) 7년 고려왕 고씨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으며, 그 후 아메노마무네토요오호지노스메라미코토(몬무 덴노) 2년 대조영이 비로소 발해국을 세웠다. 화동 6년에 당나라에서 책립받았다. 그 나라는 사방 2천리이며, 주, 현과 관역이 없으며, 곳곳에 촌리가 있는데 모두 말갈 부락이다. 그 백성은 말갈인이 많으며, 토인(土人)[9]

은 적다. 모두 토인이 촌장이 되었으며, 대촌에는 도독, 다음에는 자사이며, 그 아래는 백성들이 모두 수령이라 부른다. 토지는 극도로 춥고, 논이 마땅치 않다. 자못 풍속에 글을 안다.

又傳奉在唐學間僧泳忠等所附書, 渤海國者高麗之故地也. 天命開別天皇七年, 高麗王高氏爲唐所滅也. 後以天之眞宗豊祖夫天皇二年大祚榮始建渤海國, 和銅六年受唐冊立. 其國延袤二千里, 無州縣官驛, 虛虛有村里, 皆靺鞨部落. 其百姓者, 靺鞨多, 土人少, 皆以土人爲村長, 大村日都督, 次日刺史, 其下百姓皆日首領, 土地極寒, 不宣水田,俗頗知書.


다만 일각에선 고구려계 피지배층 소수설을 뒷받침하는 이 기록을 근거로 오히려 고구려계 소수설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어느 시대의 이야기인지, 에이츄(泳忠, 永忠)는 발해에 대해서 얼마나 알았는지, 어느 길을 지나서 왔는지 등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당시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와 일본으로 가는 동경용원부의 항구[10]를 잇는 일본도는, 옛 고구려의 최변방으로서 원(原) 고구려인의 비중은 비교적 낮고 말갈을 비롯한 비고구려계 종족이 많이 살았던 지역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서》는 용천부는 숙신의 옛 땅으로, 용원부는 예맥의 옛 땅으로 기록했다. 숙신이든 예맥이든 발해 건국기에 존재했던 종족은 아니지만, 그 후손이거나 친연성이 강한 집단이 거주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11] 일본 사신인 에이츄는 당연히 이 일본도를 지났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에이츄가 본 발해의 풍경은, 숙신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는 불열(拂涅)말갈이나, 예맥에 속하는 부여·옥저계가 많이 살았던 두만·무단(牡丹) 강 유역 일대, 즉 동부 발해의 모습일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이 고구려 유민의 구성비도 대조영 시기, 문왕과 무왕 시기, 흑수 말갈을 흡수한 이후 등을 모조리 고려해야 한다. 또한 고구려 멸망 이후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였는가를 추측해야 한다. 이 단계로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유취국사》 내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 중국의 동북공정의 연구 보고서는 고구려 인구를 거의 모조리 당나라로 잡아가서 과거 고구려 영역이 무주공산 지경으로 변했다는 수준으로 표현하고 있다.[12]

애초에 말갈이라는 말이 당대인들이 자신들을 일컬어 사용한 말이 아니라, 부르는 쪽에서 편한 대로 지어 부른 것이며 고구려 변방민을 가리키는 범칭· 비칭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최치원이 사용한 발해 말갈이라는 표현도 그러한 비하 의식과 관련되어 있다는 추측도 있다. 최치원이 쓴 '사불허북국거상표'은 기본적으로 발해를 비방할 목적으로 작성되었기에 걸러 들어야 할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와 말갈 양 집단 모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국가라면, 당연히 중국의 통일 왕조와 당당히 맞서 여러 번 승리를 거둔 고구려보다는 야만인 취급을 받는 말갈과 연관성을 강조하는 것이 그러한 목적을 이루는 데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2.2. 말갈비칭설[편집]


사서에서 언급된 말갈의 의미에 대한 문제이다. 당시 말갈에 대해 다방면으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중화중심의 역사관은 대부분의 이민족은 중국 왕조에서 붙여준 타칭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말갈의 최초 조상은 숙신으로 이들은 여진 이전의 종족이다. 이들이 한대에는 읍루였고, 남북조시대에는 물길 그리고 수·당대에는 말갈이라 불린 것이다.[13] 참고 영상

한규철 교수는 말갈이란 종족적인 측면에서 기록상의 말갈로 불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구려와 발해인을 의미하며(위말갈) 고구려와 다른, 현대에 인식되는 전통적인 말갈이란 흑수말갈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발해의 시조인 대조영과 피지배계층이 말갈인이었다 하여 발해는 고구려를 잇는 계승국가가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는 중이다. 여기서 대조영은 과연 말갈인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은 위의 항목에 나와 있는 구당서에서는 이미 대조영을 고려별종이라 칭하고 있듯이 그는 말갈계 고구려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갈이란 스스로가 자칭했던 종족명이 아니라 당이나 고구려 중앙에서 도성중심의 시각으로 고구려 변방인들을 편하게 부르는 뜻으로 이민족 명칭인 말갈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왕조시대의 국가관은 주로 수도 중심이었기에 국내성/평양 사람의 입장에서 시골사람들을 이민족처럼 말갈로 불렀다는 것은 요즘 서울사람들이 지방사람을 촌놈이라 멸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신당서에서 기록되어 나오는 대조영이 속말말갈이란 것도 그가 현재 중국 송화강 유역 출신의 시골사람이란 뜻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이 도성중심 역사관은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당나라 황제가 안시성에 진군하여 치니, 북부욕살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이 고구려군과 말갈병 15만을 거느리고 안시를 구하려 하였다. (중략) 연수와 혜진은 그 무리 3만 6천 8백 명을 거느려 항복을 청하고 군문(軍門)에 들어와 엎드려 절하며 명을 청하였다. 당나라 황제가 욕살 이하 관장(官長) 3천 5백 명을 가려서 (당의) 내지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고, 말갈 사람 3천 3백 명은 거두어서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삼국사기』 권21, 고구려본기9 상


여기서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저기서의 고구려군이 단순히 고구려의 군대가 아닌 모두 평양 출신으로 이루어진 부대여야 말이 되는데 당연히 저 고구려군은 각지에서 모인 고구려의 군대를 뜻하는 것이므로 평양으로 돌려보냈다는 건 곧 "고구려"로 돌려보냈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로 경순왕 9년, 신라를 고쳐 경주로 했다는 기록을 보아 신라가 곧 경주라 생각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맥락에서 "고구려 = 평양"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발해의 주민은 발해 건국 30년 전에 멸망한 고구려인들이 그대로 그 지역의 주민으로서 발해인이 된 것이고 그 당시 흑수말갈을 제외한 말갈인이라 불린 주민들은 고구려와 다른 종족이 아닌 고구려 변방민을 멸시적인 호칭으로 부른 것이 된다.[14][15]

하지만 이 주장대로면, 물길과 말갈의 외교 기록은 고구려 중앙정부가 변방민 하나 통제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속말말갈과 고구려의 전쟁, 이로인해 궐계부를 중심으로 한 속말말갈 8부가 수나라로 이탈한 점은 변방민이 중앙정부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그 일부가 중국으로 망명한 것이다.

의견들을 종합해 보면 말갈 부족들과 고구려는 기본적으로는 정치적으로 이질적인 집단이었으나 고구려의 통치체제 아래 변방민으로 있었던 기간이 있었고, 이 기간동안 고구려의 직간접 지배를 통해 고구려인 정체성을 형성한[16] "말갈계 고구려인"들이 일부분 존재한다는 것이다.[17] 그리고 해당 집단이 고구려 정체성을 가지고 발해를 세웠다는 것이다.


2.3. 고분[편집]


고구려의 석실은 독특한 천장형태로 유명하다. 궁륭형이라 불리는 아치형 천장에서 시작하여서 모서리가 있는 절천정형 천장, 집모양을 딴 맞배지붕형 천장, 고임천장, 고임천장 가운데서도 삼각고임, 평행고임이 있으며 고임천정의 형태는 이중, 삼중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고구려가 멸망할 즈음의 고구려 석실들은 대부분 삼각고임과 평행고임이 이중으로 베풀어진 양상의 천장을 보이고 있다. 발해의 고분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삼각고임과 평행고임을 조합한 천장으로 축조하며, 벽화의 재제 또한 고구려 멸망시점의 벽화들과 같은 주제로 그려진다. 구조적으로도 초창기의 발해 고분은 고구려 고분과 거의 같다.

발해가 고구려인들과 말갈인으로 구성되어있지만 분명 고구려의 별종인 말갈이라고 되어있는 것처럼 발해의 초기 고분문화도 고구려의 고분문화와 거의 같고 사실상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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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결론[편집]


발해의 민족성에 대해선 학계에서도 왈가왈부가 있지만, 어찌됐든 발해는 당대와 직후의 시대를 다룬 송과 고려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후예국임을 대내외적으로 인정받는 나라였다. 중국 측에서는 인종적으로 "말갈인"이라는 이유로 발해를 고구려와는 별개의 나라라고 정의하나, 상기한대로 자타칭 고구려의 계승자로 인정되었으며 고구려 문화도 계승하였다.

3. 계승[편집]



3.1. 현대[편집]



3.1.1. 한국[편집]


한국계 국가 모두는 역사 교과서에 발해를 자국사의 영역으로 다루고 있다. 한국에서는 고대사로, 북한의 경우에는 중세사로 다룬다.[18]

발해나 고려 모두 고구려의 후신국임을 천명했기 때문인지 가끔씩 누가 진짜 후신국인지를 가지고 키배를 벌이는데, 둘 모두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중국의 전한-후한-촉한과 같은 관계를 비유로 설명한다. 그중 발해는 후한의 경우에 해당되는데 일단 후한의 전신인 전한이 중원을 200년 이상 통치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듯이, 발해의 조상국인 고구려 역시 한반도 북부 요동 요서 지방을 700년 이상 다스려 존재감이 묵직하던 나라였고 게다가 후한은 전한이 멸망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광무제라는 걸출한 위인이 나타나 각지의 군벌을 격파하고 후한을 건국했듯 발해 역시 대조영이라는 걸출한 리더가 나타나 유민들을 통합하고 천문령 전투에서 당나라군을 격파하고 발해를 건국한 점도 비슷하다.

게다가 멸망 이후도 유사한데, 후한이 멸망한 이후에는 후한을 멸망시킨 위나라가 세워지고 그리고 또 한쪽에서는 후한의 시조인 광무제와 같은 한나라 황족인 유비가 위나라의 탄압을 피해 도망친 후한의 이주민들을 바탕으로 후한의 형제국인 촉한을 건국했다. 위나라는 중원을, 촉한은 익주지방을 점거하며 두 나라는 서로를 원수취급했고 조상의 땅을 수복하려는 촉한과 이를 저지하던 위나라는 40년동안 서로 피튀기는 전쟁을 계속했다.

발해 역시 멸망한 후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요나라를 건국했고 그리고 한쪽에서는 발해의 시조 대조영과 같은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자 고구려계 호족인 왕건고려를 건국했다. 요나라는 발해의 영토인 요동과 요서 그리고 연해주 지방을, 고려는 발해의 남방 영토인 평안도 일대를 비롯한 압록강 이남 일대의 영토를 차지하며[19] 두 나라 역시 서로를 원수 취급했고 끝내는 27년이 넘는 전쟁을 치르고 말았다.

형제국들의 운명도 비슷한데 촉한, 고려 모두 전한/후한, 고구려/발해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는 국력의 한계로 실패한 점 역시 비슷하다. 다만 고려는 동북9성제1차 요동정벌을 통해 아주 일시적으로 대업을 완수한 적은 있다.

단, 후한-촉한의 관계를 발해-고려의 관계에 완전히 대입할수는 없다. 촉한은 후한의 내부에서 건국된 나라이고 촉한의 시조 유비 역시 후한인이었으며 위나라가 찬탈한 한실의 계통을 부흥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건국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발해와 관련이 없는 신라 땅에서 고구려계 호족들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지 발해를 계승한 나라가 아니다. 즉 고구려-발해/고구려-고려이지 전한-후한-촉한처럼 고구려-발해-고려가 아니다. 고려는 한반도의 통일국가로 500년 가까이 존속했지만 촉한은 중국의 일개 지방국가로 50년도 채 가지 못했다는 점도 매우 큰 차이이다.

3.1.1.1. 대한민국[편집]

대한민국은 20세기까지만 해도 국사교육에서 발해의 시대를 통일신라시대로 가르치면서 그 안에 발해도 포함시키는 정도였으나, 2000년대 들어 남북국시대로 시대명을 바꾸어 발해를 이전보다 조금 더 강조하고 신라가 통일을 한 것이 맞기는 하지만 불완전한 통일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이후 후삼국을 통일하고 발해 유민도 일부 흡수한 고려에 들어서 완전한 통일을 하였다고 보고 있다. 다만 여전히 통일신라와 발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어서 신라정통론에 약간 더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러나 발해의 강역은 현재 한국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영역에 포함되지 않아서 지역적 계승의식은 고사하고 고고학적 연구는 사실상 어려운 형편이다. 다만 발해와 일본의 해상로를 재현하는 연구는 몇차례 시도된 바 있다.


3.1.1.2. 북한[편집]

북한은 남한이 백제, 신라의 강역과 조선왕조의 수도인 서울을 점유하고 있는 역사적 정통성에 대비되어 고조선, 고구려의 강역과 고려의 수도인 개성을 점유하고 있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고조선-고구려-(발해)-고려-북한을 잇는 계보를 강조한다. 그래서 고조선이나 고구려 만큼은 아니더라도 북방에 있었고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중요시 여기고 있다.[20][21]

북한 학계에서는 통일신라 대신 '후기신라'라는 명칭을 본격적으로 사용했고, 초기에는 신라가 당과 결전을 벌여 이를 몰아낸 사실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다가 1960년대 이후부터는 발해사를 강조하고 신라통일론을 부정하였다. 나중에 가면 오히려 더 발해에 비중을 두는 식으로 전개가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발해의 옛 강역에서 일어난 발해부흥운동이나 공민왕이 시도한 고구려, 발해의 고토인 요동을 정벌하려 했던 사건 등을 남한 교과서보다 상세히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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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중국[편집]


2005년부터 중국은 옛 상경 성터 출입을 통제하고[22] 발해의 궁성(宮城)을 복원하는 작업을 실시했는데, 2008년 복원이 완료된 상경의 궁성은 장안성을 모방해서 복원했다. 일부에서는 이를 동북공정의 일환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당시 장안성의 구조나 건축 양식은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쳤으며, 발해의 유물들 또한 당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측면이 드러나기 때문에 당의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발해뿐만 아니라 신라의 금성이나 일본의 헤이안쿄도 당나라장안성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으므로 이를 두고 발해의 중국사 귀속을 논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한편 발해의 한반도 영역인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은 그 나라의 중심 지역이 아니었고, 발해의 5경 중에서 4경은 만주에 존재했다. 그리고 그 4경의 위치는 현재 중국 영토로 비정된다.[23] 또 고려·조선의 사가들은 발해에 대해 고구려만큼 일관적으로 자국사로 다루지 않았으며, 발해를 '우리 조상'이 아닌 '우리 조상인 고구려의 또다른 후손'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일반적이었다.[24] 꼭 고구려 후손으로 본 것만도 아니고 말갈의 '별종'이라는 인식도 공존했다. 이런 점들을 본다면 발해사의 중국사 편입을 꼭 '역사 왜곡'으로 치부할 수만도 없다.

특히 발해가 직계가 아닌 방계라는 점이 발해사 귀속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국내에서 발해사의 귀속을 주장할 때 주로 쓰이는 논거는 고구려-발해의 연속성인데 사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고구려-발해의 연속성이 아닌 발해-남북한의 연속성이고 이 부분에 있어서 발해의 위상은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에 떨어진다. 일례로 할아버지와 나의 연속성을 이야기할때 중간에 아버지를 거치지 삼촌을 거치지 않는데 발해사는 현 한국인에게 소위 삼촌과 같은 방계에 불과한 것이다. 비교적 존재감이 적은 백제와 비교를 하더라도 발해의 낮은 입지는 명백해지는데 660년 백제 멸망 당시 사비성에 살던 백제인들은 대다수가 통일신라를 거쳐 현 한국인의 직계 조상에 합류했음이 분명한데 비해 926년 발해 멸망 당시 상경용천부에 거주하던 발해인들 대다수가 고려를 거쳐 현 한국인의 직계 조상에 합류했다는 주장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설령 발해가 말갈과 관련없는 고구려의 한국계 문화를 많이 향유했다 하더라도 926년 이후 다수의 발해인이 요/금/원에 동화되었기 때문에 발해-남북한의 연관성이 떨어지는 현실을 극복할 수 없고 그에 따라 귀속의 근거가 고구려-발해의 연관성에만 치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5]

또한 발해사를 '광의의 중국사'로 바라볼 경우 발해 귀속에 대한 중국의 주장이 무조건 틀렸다고 볼 수 없다. 발해의 강역과 인구 및 중심지(5경 중 4경)가 죄다 중국령에 귀속되었기 때문. 넓은 관점에서 티베트나 대리국의 역사를 중국사, 류큐와 아이누의 역사를 일본사, 참파의 역사를 베트남사에 넣는 것이 무리가 없는 것과 같다.[26] 물론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었다는 중국의 주장은 궤변에 불과하지만 중국사를 정통왕조 기준이 아닌[27] 광의의 중국사로 규정하면 중국사 귀속 역시 설득력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다고 발해사를 중국사로만 한정해서 보기도 어렵다. 고구려인보다 말갈족이 주체였다고 하더라도, 발해는 중원 국가를 표방하지 않았고, 한족이 주체인 나라도 아니었던 만큼 중국사에 포함될 건덕지란 그냥 만주의 옛 나라 겸 말갈족의 후손 중 하나가 현대 중국의 소수민족이라는 점 뿐이다. 그런데 퉁구스계인 말갈 후손들은 만주족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나나이족·우데게족 등 다른 퉁구스 제민족도 있으며, 만주에만 잔존하다가 중국에 흡수된 것이 아니라 연해주·한반도·몽골 지역에도 퍼져 나가 그곳을 영유한 국가의 구성원이 되었던 만큼 로마 제국처럼 다국이 공유하는 공동의 역사가 아니라 "말갈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소수 민족인 만족의 선대 집단이므로 말갈의 역사는 곧 중국의 역사이며 따라서 발해는 중국사의 일부다."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중·근세 한반도 왕조에서 발해사를 일관적으로 자국사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중국 통일왕조 역시 발해사는 최근세까지 일관적으로 자국 역사에서 제외하며 그냥 '외국·이역 열전'에 기록했다. 1778년 청나라의 만주원류고에 와서야 자국사로 취급한 것인데, 이것도 중국의 전사(前史)가 아니라 만주족의 전사로 다룬 것이다. 발해의 후손들이 현재 중국 영토에 가장 많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것도 막연한 추정일 뿐, 명확한 당대의 통계나 유전자인류학적 분석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후대 한국사에 발해가 끼친 영향이 크지 않다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중국사에 끼친 영향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한국의 경우, 200여년에 걸쳐 이루어진 발해 유민의 고려로의 대규모 내투가 끼친 영향을 무시하기 힘들다는 의견 또한 분명 존재한다. 이들의 규모는 수만호 내지는 수십만으로 추정되는데, 이를 감안해서 당시 고려의 인구 구성에 발해인들이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중국이 단순히 자국의 지방사나 자국 내 소수민족의 역사로서 말갈사를 다루면서 발해를 언급하거나 동북 지방의 향토사 측면에서 접근하는거면 몰라도 문제는 중국 학자들이 발해의 독자성을 무시하고 자국의 중앙정부가 설치한 변방 지역 통치 기구 정도로 취급한다는 것, 더 나아가 국제적인 공동 연구를 가로막고 현재의 에 걸쳐 존재했던 고대 왕조의 역사를 배타적으로 점유하려고 한다는 것이다.[28] 이러한 중국의 막무가내식 태도가 발해사에 대한 공동 합의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특히 최근에는 발해보다 중국의 귀속 여지가 훨씬 적은 고구려사나 어떤 면에서 보든 중국과 전혀 무관한 백제사나 신라사까지 중국사인마냥 저술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발해사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기 어려워 보인다.

전근대에는 발해의 역사가 극소수 역사가들의 관심을 끌거나 단편적으로 언급되는 수준이었다. 한반도나 중국의 왕조가 국가적으로 발해사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여 발해 역사서를 편찬하고 대대적으로 자국사로 끌어안으려는 시도를 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내셔널리즘이 대두되면서 발해사를 배타적으로 점유하기 위한 동북아시아 각국의 대립이 심화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29]

중국의 경우 민족구성을 연구한 논문까지 발표하며 발해를 말갈-여진-금-청 으로 이어지는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고 있다. 다만 밑의 링크를 타고 들어가봐도 보이지만 일본에서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으며 일본 사학계에서도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한국사로 서술하기도 했다. 그 시대를 '통일신라 시대 혹은 남북국 시대'라고 지칭했다.[30]

다음은 중국의 대표적인 교과서 제작사인 인민교육출판사의 중학교 1학년(初一) 역사 교과서에서 발췌한 발해 관련 내용이다.[31]

파일:중국중학1년역사교과서발해1.png

발해가 중국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파일:중국중학1년역사교과서발해2.png

주요 내용: 말갈이 건국한 국가이다.. 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제법 높은 문화를 이룩하였다. 당에 왕자를 유학 보내기도 하였다. 수도인 상경부는 장안을 베껴 만들었다. 농업 등의 별 시덥잖은 이야기도 다 나와 있으나, 고구려나 한반도와의 관련성 및 계통성에 대해선 의도적으로 침묵하고 있다.

발해는 말갈족 수령 대조영이 건국한 말갈족 나라이다… 일본과 교류 시 스스로를 "고려국"이라고 칭하였으나 학자들은 이 명칭이 일본에서 일방적으로 부른 명칭으로 보고 있다.『중국 바이두 백과』[32]



3.1.3. 일본[편집]


8~10세기, 퉁구스계 말갈족 대조영이 건국한 나라이다.

일본 goo 사전[33]


퉁구스계 말갈족 대조영이 고구려를 계승하며 건국한 나라이다.

일본 세계사의 창문[34]


일본은 발해를 경계사 정도로 보는 해석이 우세한 편이다. 발해를 표현할 때 퉁구스계 말갈족 나라라는 표현을 자주 쓰면서 말갈계 역사라는 것에 비중을 두면서도, 일본어 위키백과에도 한국어 발음이 병기되어 있는 등 한국사로 여겨지기도 한다는 사실 역시 꽤 표기하고 있다. 박물관의 한국사 특별전에서도 발해를 한민족계 영역으로 표시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물론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만큼 이런 귀속 문제 자체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없기도 하다.


3.1.4. 러시아[편집]


러시아 사학자들은 발해를 강제 이주한 고구려인들의 왕국이며 중국과는 독립적인 정치 체제로 간주한다. 그러나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러시아 사학에서는 애초에 고구려부터 퉁구스계 중심의 왕국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후술한 러시아어 문단에서도 발해를 말갈족 중심의 다민족 국가라고 설명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In traditional Russian historiography, this state is recognized as the first highly organized independent state formation of the Tungus-Manchurian peoples. Still other Russian scholars argue that they cannot determine the ethnic composition of Bohai with great precision as no materials has been found that can conclusively confirm the opinion of either the Chinese or the Korean side. Shavkunov has proposed that ancient Ainu-speaking and Nivkh-speaking tribes as well as Turkic-speaking people may also have been part of the Bohai population in addition to the traditionally recognized inhabitants of Bohai (Koguryo and Mohe).

전통적인 러시아 역사학에 따르면, 이 국가(발해)는 퉁구스-만주계 민족 역사상 최초의 고도로 체계적인 국가이다. 일부 러시아 학자들은 중국 측이나 한국 측의 주장을 입증할 만한 자료가 존재하지 않기에, 발해의 민족 구성을 정확하게 가늠할 방법이 없다고 주장한다. 샤브쿠노프는 전통적으로 발해인으로 인정받는 민족인 고구려인과 말갈인 이외에도, 아이누어와 니브흐어를 구사하는 고대 민족 및 튀르크계 민족이 발해에 살았을지 모른다고 제의한 바 있다.

『영어 위키백과 Balhae controversies 부분』[35]


러시아는 발해를 연구할때 단순히 변경지역 역사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닌 중앙아시아와 연계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발해와 소그드인 간의 실크로드 무역 관련한 부분은 한국어 관련 연구 자료보다 러시아쪽 자료가 훨씬 더 많다.(...)[36]

Бохай было многонациональным государством основным населением его была титульная нация Мохэ. Также были представлены национальные меньшинства на юге на современной территории КНДР проживал народ Когурё и на западе в районе Тунляо народ Кидани и на севере Эвенки. Бохай обладал развитыми средневековыми ремёслами и занимался торговлей с соседними странами, такими как Тюркский каганат, Япония, Силла и Империя Тан

발해는 말갈족이 중심이 된 다민족 국가이다. 발해 영토 남쪽 오늘날 북한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고구려인들이 거주하였으며, 서쪽 퉁랴오 지역에는 거란족들이 거주하였고 북부에는 에벤키족이 각각 소수민족으로 거주하였다. 발해는 중세 수공업 제품들을 생산하면서 튀르크카간국들, 일본, 신라 그리고 당나라 같은 이웃 국가들과 교역하였다.

Согласно «Старой книге Тан», в начале своего существования государство имело существенно больше 100 000 домашних хозяйств и обычаем было похоже на киданей. Археологические данные свидетельствуют о том, что культура Бохай была уникальной для региона. В архитектурных методах прослеживалось влияние Когурё, с явно выраженным регионом постоянного проживания представителей этноса Когурё в КНДР и района реки Ялу. В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м устройстве прослеживается влияние Китая. В целом же культура является предковой для культуры чжуржэней и Золотой Империи

구당서에 따르면 건국 초 10만여 호를 보유했으며 풍속은 거란과 유사했다고 한다. 고고학적 연구 결과를 종합해본다면 발해의 문화는 만주 지역 내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고학 유물을 바탕으로 보자면 발해의 유물은 (오늘날에 북한이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압록강 유역에 기반한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역사 사료상에 기록된 국가 시스템 체계는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발해의 문화는 이후 여진족과 금나라 문화의 기원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 위키피디아 발해 문서 러시아어판 개요 부분 요약 발췌 번역


러시아, 몽골 및 중앙아시아 국가에서는 주로 발해의 중국식표기인 보하이(Бохай)로 표기된다.[38] 다만 2019년, 러시아측에서 한국 측에서 적극적으로 발해의 러시아어 변경 표기에 나선다면 러시아 학계에서도 이를 검토하고 바꿀 수 있다고 밝힌 적은 있다.# 이를 정치적 관점에서 보는 의견도 있는데 러시아 입장에선, 내심 청나라 시절 뺏긴 연해주도 수복해야한다고 보고 있는 중국에게, 연해주를 차지했던 발해의 역사를 중국 역사로 인정해주는 것 자체가 후환을 남기는 것일수도 있기 때문. 적의 적은 나의 친구인냥 해석한 셈.

또한 러시아가 발해의 중앙아시아, 튀르크 및 퉁구스와의 연계성을 주장하는 이유 역시 정치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러시아 제국과 소련은 중앙아시아의 여러 튀르크계 나라들을 직접 지배한 바 있고, 현재에도 러시아 내에는 타타르인이나 사하인 같은 많은 튀르크인들이 살고 있다. 또한 말갈의 후예 또는 친척이라고 볼 수 있는 퉁구스계 민족인 나나이족, 우데게족, 에벤크족 등 역시 대부분이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으며, 첫 인용문에서 언급된 아이누인과 니브흐인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러시아는 자국 내에 있는 소수민족과 발해의 연관성을 강조하여 발해의 고토인 연해주 지배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일 공산이 크며, 나아가 만주에서의 이해관계도 얽혀 있을지 모른다. 니브흐인과 아이누인의 경우 사할린과 쿠릴 열도와 유관함으로, 일본을 견제하는 의도일 가능성도 다분하다.

3.1.5. 서구권[편집]


영문 위키백과에서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의 연합으로 성립되었다고 서술되어있다. 한국사임을 딱히 부정하지도 않지만 만주의 지역 역사인 동시에 중국사와의 연관성도 인정하고 있다. 온전한 한국사로 처리된 고구려사와는 대비되는 점.

이외에도 서구권이나 터키에서는 보통 발해를 한국의 역사로, 적어도 한국사에 가깝게 보는 관점에서 다루는 반면, 동구권에서는 소련 시절 이루어진 고고학적 연구 등을 바탕으로 만주 지역사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서구권에서는 발해(Balhae)로 표기하며 발해가 한국사에 속한다고 보는 편이다.

La population du Balhae était constituée essentiellement de celle du Goguryeo avec donc plusieurs peuples toungouses en Mandchourie, dont les Mohe étaient les plus importants représentants. Les Mohe constituaient cependant un peuple soumis, beaucoup avaient le statut d'esclave, et la majeure partie constituait les basses classes de l'État. Néanmoins, il y eut quelques cas d'ascension sociale parmi les Mohe tels que les adeptes de Geolsa Biu

발해는 고구려에 기반을 둔 나라였기 때문에, 주민의 상당수가 만주의 퉁구스계 사람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말갈족의 비중이 컸다. 그러나 말갈족은 피지배층이었고 이 중 상당수가 노예였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사회 하층민이기도 했다. 물론 말갈족 중에서도 사회적 지휘가 높은 부류가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대표적인 예로 걸사비우와 그 부하들을 들 수 있다.

Les origines principales de la culture de Balhae provenait du Koguryo. Des Ondol ont été découverts dans les palais du Balhae, et des statues bouddhistes et les motifs du type de Koguryo ont été trouvés dans les temples de Balhae.

발해 문화의 주요 요소는 고구려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발해 궁궐터에서 온돌이 발견되었으며, 발해 사찰 유적의 불상을 비롯한 여러 건축양식 역시 고구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위키피디아 프랑스어판 발해 문서 내 사회 항목 발췌#



3.2. 현대이전[편집]



3.2.1. 한국[편집]



3.2.1.1. 고려[편집]

발해 멸망 이후 태자 대광현 외 대화균, 대균로, 대원균, 대복모, 신덕, 대심리, 박어 등 다수의 발해 관료와 수만의 발해 백성이 고려에 귀부하였으며, 고려는 그들을 우대하여 조상들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해주었고, 대광현에게는 왕씨를 사성하고 새로 이름을 하사하여 왕계(王繼)[39]라는 새 이름으로 살게 하였다.

일각에서는 대광현의 투항을 두고 고려가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의 유민을 적극 포용한 결과로 해석한다. 왕건이 거란의 사신을 유배보낸 만부교 사건를 봐도 초기 고려가 발해를 기본적으로 우호 국가로 인식했음은 분명하다.[40] 따라서 고려 시대에는 발해에 대해 계승·동류 의식을 표방한 바가 전혀 없다가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야 자국의 역사 체계에 편입시켰다거나, 고려가 고구려 계승을 천명했기 때문에 발해의 존재를 부담스러워 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낭설일 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고려 내에서도 발해에 대한 인식이 희미해져갔고 그로 인해 발해에 대한 기록이 매우 부족해져 버렸기 때문에, 유득공은 이를 두고 고려가 발해사를 홀대했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연의 《삼국유사》는 고려 이전의 왕조들에 대한 일종의 통사로서 작성된 기이(紀異) 편에서 발해를 다루고 있으며, 이승휴의 역사 서사시 《제왕운기》에서도 한국사를 다룬 하권에 후백제 다음에 발해를 언급함으로써 자국의 역사임을 분명히 했다.

고려의 시조인 왕건부터 발해를 두고 "본디 우리 친척 나라[本吾親戚之國]"[41]라고 언급한 적도 있다. 이를 두고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고려 왕실이 발해와 혼인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지만,[42] 일반적으로 그 발언은 고려가 발해와 더불어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동류 의식을 나타낸 것으로 여겨진다. 윤관의 아들인 윤언이가 자신이 과거에 주장한 칭제건원 건의의 정당성을 역설하면서 내세운 '전례'에도, 고려 국초인 태조·광종대의 사례, 신라의 사례에 더하여 발해의 사례를 들은 것[43] 역시 고려가 발해를 자국의 전대사(前代史)로 인식했다는 증거가 될 만하다.

다만 1300년을 전후한 시기의 인물인 충선왕이제현이 만부교 사건에 대해 그 역사적 배경을 잘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면, 고려의 발해 계승 의식은 후대로 갈수록 희미해진 것이 아닌가 싶다. 고려가 삼국의 고토는 계승한 반면 발해의 중심 지역인 동만주 지역을 끝내 영유하지 못하기도 했고 남하한 발해인 집단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고려 사회에 동화되었기에[44] 고려인의 의식 세계에서 발해의 존재감이 점차 약해진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발해가 일찍 멸망한 탓에, 발해와 고려의 외교관계는 제대로 수립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데, 만약 두 나라가 꽤 오랫동안 공존했다면 어떠한 관계를 형성했을지는 추측하기가 쉽지 않다. 왕건은 고구려 계승국이라는 이유로 발해에 친근감을 드러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양국이 첨예하게 대립했을 수도 있다. 신라에서 갈라져 나온 후삼국이나, 서로 부여의 후손임을 자처했던 고구려·백제의 상호 항쟁을 보면 그랬을만도 하다. 하지만 요·금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 손을 잡았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아무튼 고려가 고구려 계승 문제 때문에 발해를 내심 경원시했다는 문헌적 증거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발해를 멸한 요나라 사신들이 보내온 낙타를 굶겨 죽일 정도로 발해에 대한 동족의식이 있었다. 예를 들면 거란을 금수의 나라[45]로 본 훈요10조가 그러했다.


3.2.1.2. 조선[편집]

조선후기 안정복은 《동사강목》, 범례에서 발해의 역사를 자국 역사에 적는것에 문제가 있다고 밝힌다.

渤海不當錄于我史, 而本爲高勾麗故地, 與我壤界相接, 義關唇齒, 故通鑑備書之, 今從之.

발해는 우리 역사에 기록할 수 없는 것이나, 본디 고구려의 옛 땅으로 우리의 국경과 상접하여 의리가 순치지세(唇齒之勢)이므로, 《통감》에서 갖춰 썼기 때문에 이제 그대로 따른다" 《동사강목》, 범례


다만 안정복은 발해를 두고 "우리 역사에 기록하기는 부당하다"한 것 치고는 발해사에 대한 분량이 조선 초기의 동국통감이나 삼국사절요에 비해 훨씬 많아졌을 뿐 아니라, 발해사의 주요 사건들도 중국의 구당서, 신당서 및 성경통지와 최치원의 문집인 계원필경이나 고려사 등을 인용해서 시간 순서에 따라 모두 적고 발해사의 흐름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신라가 당으로부터 패강 이남에 대한 영유권을 완전하게 인정받는 데는 발해의 강성함이 영향을 주었다거나 병자호란의 사례를 들어 '거란의 발해 공격은 중원 공략을 앞두고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한 '선행 조치 차원'에서 행한 것이었다'는 해석은 현대 한국 사학계의 해석과도 들어맞으며, 문왕 때인 790년 신라가 사신을 보냈다는 ‘북국’이 발해라고 주장한 것도 의외로 안정복이 류득공보다 앞선다. 따로 '발해국군현고'라는 항목을 두어서 발해의 지리 강역 변동에 대한 최초의 총괄적 분석을 시도한 것도 동사강목이 최초. 츤데레? 오히려 동사강목에서 발해의 역사나 지리에 대한 기록을 상세하게 조사해 남겼기 때문에 훗날 류득공이 발해고를 편찬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46] 안정복의 입장은 발해사를 한국사로 인식하는 입장이 정리되기까지의 과도기적인 측면이 들어있어 주목된다.우리 역사에 기록하기 부당하다는 것도 한국사와 전혀 관련이 없다기보다 신라의 삼한일통 이전의 고구려나 백제, 그리고 후삼국시대 후고구려(태봉)나 후백제처럼 ‘(유교적 도덕적 명분을 두루 갖춘) 정통성이 있는 왕조’로 간주할 수는 없다는 의미가 더 짙다고 볼 수 있다. 마한(건마국, 목지국) 멸망 이후 신라의 삼한일통까지 안정복이 삼국(+가야) 전체를 ‘무통’ 즉 정통성 없는 나라로 간주한 이유가 이것이다. 발해의 경우는 견훤처럼 대조영이 나라를 세운 뒤에 신라로부터 대아찬(5위) 관등을 받는 등 잠깐이나마 신라의 신하국을 자처한 적이 있기도 했고.[47]

유득공발해고를 편찬하며 발해가 한국사에 포함되며 통일신라시대남북국시대로 정의하였다. 또한 외국인인 장건장(張建章)도 발해국기를 저술하여 발해 역사서를 편찬하였는데 전조 고려에서는 발해 역사서 하나 쓰지 않았다고 비판하였고 발해고 서문을 쓴 박제가 역시도 유사한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대 유학자들의 주된 의견은 아니었고 실학자 중에서도 소수의 의견에 불과했다. 이는 위 단락의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 발해를 부록으로 다룬 것을 보면 알 수 있다.[48]

발해 유적인 러시아 '체르냐치노 고분'에서 발굴된 철검[49]이 크기와 형태에서 조선의 보검인 전어도와 상당히 유사해서 두 검의 관계에 대해서 이런 저런 추측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유물과 유적[50]들은 문화적 계승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있다.[51]


3.2.2. 중국[편집]


현대 이전 중원의 한족계 통일 왕조들은 발해에 딱히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한족이 아닌 요나라나 후에 발흥한 금나라는 발해에 '친연성'을 가지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발해에 대한 계승의식과 동족의식은 없었다. 애초에 요나라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발해부흥운동도 탄압했고, 금나라는 요나라를 멸망시키며 발해 유민들의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요나라 멸망 이후 발해인들을 토사구팽해 한족과 동화시켜 소멸시켰다. #

이후 1778년 청나라의 만주원류고에 와서야 발해에 대해 기록한 것인데, 이것도 중국 정사로 다룬게 아니라 만주족의 전사(前史)로 다룬 것이다. 그리고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저 책 자체가 역사의 계승성에 대해 논란이 많은 관점을 가진다. 신라를 만주의 원류로 삼았다는 점부터...
[1] 서구의 동양사학자들 중에는 문화적으로 낙후된데다 인구마저 소수였던 만주족이 어떻게 거대한 근세 대제국 청나라를 건국할 수 있었는지 흥미있어하는 경우가 많고, 서구 학자들의 발해사 연구도 같은 맥락에서 즉 만주족들의 조상들은 고대 어떤 문화의 영향을 받았는지 관련해서 이루어지는 편이다.[2] 이런 종류의 역사귀속과 계승인식 관련한 분쟁은 동유럽 혹은 중앙아시아 역사에서도 골치아픈 논란거리인데, 제3자에 해당하는 서구 역사학자들 입장에서 굳이 이런 부분에 일부러 개입해서 신경써줄 이유는 없다. 외국 학계에서 발해사 관련해서 중요하게 보는 것은 발해가 만주 지역 발전에 어느정도의 영향을 미쳤는가 혹은 퉁구스계 민족들의 형성 및 발전에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는가이다. 발해가 한국사인지 중국사인지는 외국 학자들 입장에선 엄연히 부차적인 문제이다.[3] 세계사적으로 볼 때 유달리 한중일 3국은 국가 정체성이 곧 민족 정체성인 수준으로 고립되어 왔기에(단, 중국은 중화주의 사관 때문에 다층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음에도 자국 중심적인 면모를 보임.) 이 같은 다층적인 정체성을 낯설게 느끼는 경향이 있는데 유럽 등 유라시아 각지의 역사를 같이 놓고 보면 오히려 이처럼 중첩되는 정체성이 훨씬 흔하다. 문제는 이러한 세계사적 보편성과 한국사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역사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발해를 한국사에 독점적으로 귀속시키지 않는 것에 반감을 가지기 쉽다는 것이다.[4] 어느 한 계통에서 원줄기가 되는 집단[5] 어느 한 계통의 원줄기가 되는 집단에서 갈라져 나온 집단[6] 발해에서 일본으로 보낸 사신단 중 중앙정부를 대표하는 인사들과 더불어 말갈 부족들을 따로 대표하는 인사들이 있었다.[7] 백제나 신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8] 《삼국유사》에서도 숙신·읍루·물길·흑수 등을 다룬 편목은 없으며 다만 이 '말갈·발해'편에서 말갈의 전신으로 언급한 게 전부다. 그와 같이 숙신·읍루계를 철저히 자국의 역사에서 배제했던 고려인이 말갈을 자국의 역사에 포함시킨 것은 당연히 발해와의 연관성 때문인데, 그처럼 발해를 자국의 전신 중 하나로 취급한 관념은 그 나라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의식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성립하기 힘들다. 물론 확실히 포함시키지도 않은 걸 보면 넣기도 빼기도 애매한 경계사 정도로 인식했을 것 같긴 하다만.[9] 한규철은 해당 구절에 대해서 사인(士人)이라고 적은 판본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토착민'이라는 의미가 있어 지배층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기에 토인(土人)이라는 단어는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전자로 보는 것이 옳은 해석이며, 이 경우 "말갈이 많고 사인이 적다"는 문구는 "피지배층이 많고 관인은 적다"로 말갈은 단순한 피지배층에 대한 멸칭으로 풀이된다고 주장한다. 말갈에 대해 특정 종족이 아니라 중앙의 관점에서 지방민을 촌놈이라는 뉘앙스로 비하해 불렀다는 것.[10] 두만강 하구나 그 부근으로 추정.[11] 후기 발해의 수도인 상경 용천부의 위치 자체가 지금의 흑룡강성 일대로, 새로운 복속 집단인 흑수부 말갈을 다분히 의식한 입지이다. 본래 발해의 초기 수도는 두만강 유역의 중경 현덕부로서 오래 전부터 고구려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이었다.[12] 발해의 피지배층이 대부분 말갈인이었다는 논리의 가장 큰 반박거리로 꼽힌다. 상식적으로 한 나라의 멸망 이후 모든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모두 적국으로 다 끌려가는 것은 말이 안 됨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문서에도 나와있듯 멸망 당시 추정 고구려 인구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지만, 이 사람들을 모두 당나라로 끌고갈 수도 없을 뿐더러 설령 끌고 간다고 해도 수백만의 난민이 갑자기 중원으로 유입되어 엄청난 혼란만 야기된다. 당장 사료상으로 나오는 고구려의 인구가 69만 호인데 상식적으로 이들이 전부 중원으로 끌려갈 수도 없거니와 끌려간 이들 가운데서도 상당수가 말갈이나 신라로 탈주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프로이센 지역의 독일인들이 모조리 추방당한 사례가 있긴 한데, 이는 무력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 와서나 가능한 이야기다.[13] KTV 특별한 강의 150회 역사특강, 발해의 고구려계승성_영토와 종족. 한규철, 숙신읍루연구(백산학보38, 1988)[14] 참고 문헌: 새롭게 본 발해사, 동북아역사재단, 2005[15] 일본에서도 서일본이 중심지일 때 동일본 지역민들을 아즈마 에비스, 카고시마 지역의 사람들을 사츠마 하야토라며 변방의 촌놈으로 취급한 적 있다. 이전에 그 지역에 에비스, 하야토 등의 일본계 혹은 이민족의 복속되지 않은 변방민이 살았고 그들을 정복하고 동화가 끝난 뒤에도 멸칭은 계속 남은 것이다.[16] 고대-중세-근세를 막론하고 제국은 원래 다민족 집단인 경우가 많고, 제국 내의 다민족들 중에서는 제국을 계승하며 융화되려는 세력이 있나 하면 제국으로부터 이질성을 유지하며 이탈하려는 세력이 존재한다.[17] 굳이 유사한 예를 들자면 미국 흑인, 한국계 일본인, 인도계 영국인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전부 미국인, 일본인 ,영국인으로 구분되며 이들이 해당 국적을 가지고 정치를 하면 미국사,일본사,영국사로 구분한다. 당연히 말갈계 고구려인이 갑자기 말갈 독립같은 가치를 내세우며 움직이지 않는한 고구려인에 분류된다. 당연히 발해의 건국 집단은 이러한 말갈독립같은 주장은 한적이 없으니, 고구려인의 정체성을 가진 고구려인 집단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18] 고조선-남북국을 고대, 고려 왕조를 중세, 조선 왕조를 중세/근세/근대로 보는 한국과는 달리, 신라 촌락 문서의 내용을 근거로 남북국시대부터를 '중세봉건사회'로 보기 때문이다.[19] 다만 발해의 남방 영역에 대해서는 지금도 확정적이라기엔 이설이 많은 편이다. 예를 들어 어떤 학자는 평양 일대까지 발해가 통치했다고 보기도 하고, 어떤 학자는 고고학적 근거를 토대로 발해가 직접 지배는 못하고 신라와의 완충 지대 비슷하게 남겨뒀을거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발해와 신라 사이에 있던 흑수국, 보로국 같은 나라가 바로 그 존재라는 것이다.[20] 사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는 현 북한의 중심지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어 발해와 북한의 연결성은 신라와 북한의 연결성만큼이나 느슨한 편이다. 하지만 신라는 남한 지역에 기반하던 왕조이고 또 북한의 자랑인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일조한 바도 있어서 북한은 함경도를 제외하면 북한의 중심지와 큰 관련이 없는 발해를 남한의 통일신라에 대응해 억지로 밀고 있는 형국이다. 발해 5경 중 1경(남경)은 북한에 위치하지만 4경(서경, 중경, 동경, 상경)은 중국에 위치한다. 거기다가 정작 가장 중요한 제1수도 상경은 북한의 중심지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 발해와 북한의 연결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신라-남한이나 고구려-북한의 연결성에 비해 발해-북한의 연결성이 떨어지는건 사실이다.[21] 그러나 계승이나 귀속의식은 항상 시대적 배경이나 역사의식, 지식의 발달에 따라서 변해왔다. 당장 그 발해부터도 고구려의 계승을 주장했지만 고구려의 중심지와 그 일대의 주민들(이들은 후에 고려로 이어진다)을 흡수하는 데에는 실패했고 옛 고당전쟁 전선 기준으로 한참 후퇴한 지역에서 변방민들을 기반으로 새로 터전을 잡아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출자가 고구려 유민이라는 자각이 있었고 문화적으로도 고구려와 가장 큰 관련이 있었으니 그 유산의 계승을 주장했던 것이다. 고려말부터 시작해 조선대에는 발해의 부수도 중 하나를 포함하며 중심지에 가까운 관북지방을 완전히 영역화하는 데 성공했으며 상당한 지식을 갖춘 사족 계층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들 중 역사에 대한 관심과 조예가 깊은 지식인들에게 발해는 고려와 함께 삼국의 유산을 물려받은 나라였으며 고려대에도 이미 동족으로 인정받고 있었다는 사실이 널리 확산되었고 이 시점에서 발해의 후계국들을 비롯한 여타 한민족 국가들은 완전히 몰락하거나 조선에 흡수되어 조선만이 유일한 한민족 국가로 남아있었다. 그랬기에 조선의 지식인들이 발해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은 물론 계승을 주장한 발해고 같은 책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남한과 북한이 분단되면서 서로 민족주의에 기반해 각자의 우월성을 주장하게 된 시점부터 남한이 남부 왕조들을, 북한이 북부 왕조들을 훨씬 강조하게 될 거란 건 기정사실이었다.[22] 중국 측에서 한국 학자들이 발해 유적지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한 일에 대해서는 송기호 교수가 여러 해에 걸쳐 쫓겨난 사례를 언급하는 등 비판했다.[23] 북한은 동경 용원부 역시 함북 부근으로 비정하기는 한다.[24] 이처럼 뿌리는 같으나 결과적으로 갈라진 무리를 '자매'에 빗댄다. 고려-조선 시기 한반도 한민족은 발해를 한민족의 역사속 자매 국가 정도로 인식했다는 뜻이다.[25] 간혹 고구려가 한국사면 발해도 한국사이고 발해가 한국사가 아니면 고구려도 한국사가 아니라는 식으로 고구려와 발해를 일체화해서 보려는 시각이 있는데 이는 크게 잘못되었다. 단순히 지도만 놓고 보면 고구려나 발해나 비슷해 보이겠지만 수도를 비롯한 전통적인 중심지의 위치는 판이하게 다르다. 고구려는 국내성-평양을 잇는 평안도 일대에 정도한 반면 발해는 흑룡강성 남부에 그 중심을 두었다. 관서와 패서의 고구려 인적 자원 대부분은 한반도에 머문 반면 만주 한복판의 발해의 인적 자원 대부분은 그곳에 그대로 머물며 고려시대 이후 한반도사와 별개의 길을 걷게 된다.[26] 더 나아가면 고구려의 경우에도 해당하나 발해사에 비해 고구려사에 있어서 중국이 설 자리가 훨씬 좁은 이유는 통일신라 이래 한반도 왕조들이 고구려사를 자국사로 포함시켰고 고구려의 중심지인 평양이 한반도 내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중국령이라는 국내성조차 압록강 바로 이북이라 온성 기준으로도 200여km 떨어져 있는 상경용천부와 상황이 다르다.[27] 하-상-주-춘추전국-진-한-위진남북조-수-당-오대십국-송(+요, 금)-원-명-청[28] 한편 고구려에 대한 중국의 태도도 이와 같기에 문제가 된다. 차라리 발해의 중심지를 비롯한 고토 대부분이 현 중국령이라거나 말갈이 중국의 소수민족이기에 중국사라 한다면 나름대로의 근거라도 갖추고 있지만 조공-책봉 질서를 갖고 귀속 여부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러한 논리면 동아시아사 전체가 중국사가 된다. 또한 어떤 중앙정부지방정권 따위와 겨룬다고 백만 대군을 보냈다가 패해서 망하며 어떤 지방정권이 감히 중앙정부선제공격한다는 말인가? 말이 되지 않는다.[29] 일본 학자 후루하타 토오루는 이런 동북아 역사 전쟁의 면모를 역사의 쟁취라고 표현했다.[30] 고구려의 후계임을 자처하고 스스로 중원과는 거리를 두고 독자 국가임을 천명했으므로, 차라리 발해사를 한국사로 보거나, 한국, 중국 그 어느 쪽의 역사도 아닌 것으로 보는게 더 합당한데, 이 나라를 무작정 중국사로 보는게 별로 신빙성있는 주장은 아니다.[31] 출처.[32] 출처.[33] 출처.[34] 발해 항목 출처. 다만 발해사에 대해 한국과 중국간 분쟁이 있다는 것도 표기해두었다. 또 정작 대조영 항목에서는 민족 여부는 빼놓은채 말갈족, 고구려인 이설이 있다고만 해놨다. 여기서 인용한 「발해국이란 무엇인가」(2018)에서 저자 후루하타 토오루는 각각의 논자는 자설을 강화하기 위해 관련 사료를 제시하거나 자기 의견에 유리하도록 해석을 하는 수준에 불과하다며, (확실한 결론도 나지 않을) 대조영의 출신을 따지는 것 자체가 넌센스라고 말하기도 했다.[35] 이전에는 발해 문서 영어판에서 러시아 학자의 "대부분"이 발해가 고구려 유민들의 나라라고 인정한다는 내용을 발췌했었는데, 2022년 7월부로 그 문단은 해당 위키백과 문단에서 삭제되었다.[36] 발해 관련해서 러시아어로 된 대중 역사 교양서가 번역 출간된 건 아니지만, 대신 국내 대학 도서관을 좀 뒤적거려보면 러시아어 논문을 한국어로 번역한 책자들에서 관련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37] 고대 튀르크어에서 b와 m의 발음은 통용되므로 정확한 발음은 '뫼퀼리(Möküli)'가 된다.[38] 다만, 러시아는 19세기 말엽까지는 한반도 국가와 국경조차 맞닿아있지 않았던 나라고, 동구권 국가들도 냉전이 끝나기 전까지는 한국과 아무런 인연도 없었으니, 중국어에서 차용한 '보하이'라는 명칭을 쓰는 건 당연하다. 당장 발해의 전신인 고구려중국이나 돌궐에서 차용한 말로 유라시아 각국에 알려지면서 티베트에서는 중국어에서 기원한 말인 '케우리'라고 불렀고, 동로마 제국이나 위구르족들은 돌궐에서 차용한 말인 '뵈퀼리'[37]라고 불렀다. 그리고 먼 옛날로 갈 필요도 없이, 지금 한국을 가리키는 말인 코리아고려 시대에 한국을 방문한 아랍인들이 부르던 말이 내려온 것이다. 그러니 발해를 중국식인 '보하이'라고 부른다고 뭐라 할 건 없다. 어차피 기원은 한자어 渤海와 같기 때문. 애초에 이들은 몽골어의 영향으로 중국을 한족의 원수라 할 수 있는 거란족에서 유래한 키타이로 부른다(...).[39] '이어질 계'자이다.[40] 왜냐하면 만부교 사건 자체가 고려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던 거란의 사신을 유배보낸, 상당한 외교결례이기 때문이다. 왕건이 이런 외교결례를 저지른 데에는 거란이 발해 멸망의 원흉이라는 점이 주된 동기라는 게 지배적인 해석이다. 왕건 본인이 발해에 얼마만큼의 애착이 있었는지야 알 수 없으나, 이와 같은 제스쳐가 고려가 흡수한 발해 유민들을 위한 정치적 퍼포먼스라는 것은 명백하다.[41] (開運二年(945) 十月) 初, 高麗王建用兵呑滅鄰國,[42] 김창겸, 後三國 統一期 太祖 王建의 浿西豪族과 渤海遺民에 대한 政策硏究, 성대사림, 성균관대학교사학회, 1987.[43] 繄是立元之請, 本乎尊主之誠, 在我本朝, 有太袓·光宗之故事. 稽其往牒, 雖新羅·渤海以得爲, 大國未嘗加其兵, 小國無敢議其失.[44] 애시당초 발해라는 국호 자체가 당나라나 신라와의 외교가 원할하게 하기 위한 국호라는 설이 유력하고, 일본과의 교역에서는 발해의 왕들이 고려국왕을 자처했다. 같은 고구려의 계승국이므로 쉽게 동화되는 건 당연지사.[45] 이런 표현은 아무리 거란을 고려의 입장에서 야만적인 오랑캐의 나라라고 보아도 과한 표현으로 이는 형제국 발해를 멸망시킨 것에 대한 경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46] 출처: 김종복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발해사 연구 성과'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년[47] 한때 고구려 부흥군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던 보덕국왕 안승은 신라로부터 소판(3위) 관등을 받았다. 일단 둘 다 진골만 받을 수 있다.[48] 다만 발해가 우리 역사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관점은 딱히 조선 후기부터 생겨난 소수 의견이 아니라 고려 시절부터 있어왔던 관점이다. 그저 조선 후기에 들어서 권력층이 되지 못한 실학자 계층이 조명했기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또한 이는 관념적인 것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의미가 없었던 게 아닌 게 고려-조선은 태자 대광현과 대신들, 수많은 유민들의 귀부로 방대한 인적자원을 흡수한데 이어 발해 5경 중 하나인 남경남해부가 위치해있었음은 물론 중심지 인근이었던 관북지방을 점유하는 데도 성공해 지리적 지분 또한 갖추고 있었으며 고려-조선 자체부터가 발해와 마찬가지로 삼국의 문화적 유산을 계승한 국가였으니(이는 타국에는 없는 요소다) 이 모든 것이 종합돼 연고를 주장할 배경은 이미 갖추어져 있었고 발해고는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연고를 직접적으로 주장한 최초의 그것도 전근대에 쓰여진 사서로서 의의가 있었던 것이다.[49] 문화재청 자료[50] 특히 무덤양식[51] 다만 단지 문화 교류의 흔적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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