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석(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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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동군 출신 독립운동가, 서영석
2. 부산광역시 출신 독립운동가, 서영석



1. 대동군 출신 독립운동가, 서영석[편집]


건국훈장 독립장(單章) 수훈자 파일:건국훈장독립장약장.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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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영석(徐永錫)
생몰1897년 ~ 1931년
출생지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윤인리
사망지평양형무소
추서건국훈장 독립장

서영석은 1897년경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윤인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원장교회의 교인으로, 1919년 3월 2일 상사리 모락장의 만세운동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주동자들이 헌병대에 체포되자,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3월 4일 오후 10시경 합성학교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에 가담했다. 이후 그는 3천 명의 군중과 함께 모락장으로 행진했다. 그러다 매복한 일본 헌병들이 무차별 사격을 가해 13명이 현상에서 죽고 4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에 서영석은 군중들에게 무기를 들어 맞서 싸울 것을 호소했고, 선두에서 돌을 던지며 전진했다. 이에 일본 헌병소장과 보조원 3명이 도망치려 하자, 그는 이를 추격해 모두 붙잡고 현장에서 살해했으며 구금 중이던 모락장 만세시위 주동자들을 전원 구출했다. 그러나 후에 체포되었고, 1919년 12월 6일 고등법원에서 살인, 방화,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무기징역형에 처해졌다. 이후 평양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1년경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서영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 부산광역시 출신 독립운동가, 서영석[편집]





성명서영석(徐泳奭)
생몰1925년 11월 24일 ~ 1963년 6월 25일
출생지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
사망지부산광역시
추서건국훈장 애족장

서영석은 1925년 11월 24일 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일본으로 이주했고, 17세인 1941년 5월 오사카에서 조선독립청년단에 가입했다. 이후 1942년 정덕수(丁德秀)의 지령을 받고 그해 3월 1일에 있을 조선독립선언 항일학생 봉기를 준비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동지들이 체포되자, 그는 잠적했지만 1943년 관부연락선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 후 1944년 8월 27일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8.15 해방 직후 석방되었다. 이후엔 부산으로 돌아와 평범한 삶을 살아가다가 1963년 6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서영석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