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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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군인, 관료, 정치인, 의사.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 수여)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1920년 2월 1일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이후 서울특별시 용산구 신계동 1-17번지, 용산구 이촌동 300-136번지 등에서 거주했다.
숭실전문학교 재학 중이던 1938년 신사참배 거부 운동에 참여했고, 1940년 3월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해 졸업한 뒤 나가사키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이후 중화민국으로 건너가 하남성 개봉시(開封市) 소재 하남의원(河南醫院)에 근무하면서 의사로 활동하였는데, 이 때 한국광복군 징모 제3분처의 활동에 협조하여 초모공작 및 부상병 치료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1943년 12월 장흥의 협조로 문상명, 박용운, 이건국 등과 한국광복군에 정식으로 입대해 독립군으로도 활동하였다.
8.15 광복 후 귀국하여 신익희 휘하에서 활동하였고, 유익배, 안병성과 대한독립촉성국민회청년단 정치공작대를 결성해 중앙요원이 되었다. 1945년 12월 그는 평안남도 평양부로 잠입해 조만식을 만났고, 그에게 월남을 설득했으나 그로부터 북한 인민들을 위해 북한에 남겠다는 말만 듣고 어쩔 수 없이 돌아왔다. 1946년 대한민국 국군 창설 후 대한민국 육군에 의무장교로 입대해 1952년 제3육군병원장(現 국군부산병원장, 당시 대령)으로 근무했고, 이후 국군군의학교장(現 국군의무학교장)을 거쳐 1954년에는 육군 의무차감으로서 그해 4월 21일부터 28일까지 아르헨티나 육군 보건부 주최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개최된 세계군의무회에 육군 대표로 참석했다. 1955년에는 제2대 육군의무교육기지 사령관(現 국군의무사령관)으로서 터키에서 개최한 국제군의학회에 참석했다.
1957년 1월 육군본부 의무감(대령)으로 근무했으며, 1958년 3월 1일 채명신·노재현·이규동 등과 함께 준장으로 승진했다.
1961년 7월 7일 육군본부 의무감(육군 준장)으로 예편함과 동시에 제9대 보건사회부 장관에 임명되어 1963년 12월 16일까지 역임했다. 그 사이 1963년 8월 보건사회부 노동국이 개편되어 노동청으로 발족되자 초대 노동청장에 겸임 발령받았다. 1966년 2월 한국해외개발공사에 임명되었다가 1966년 4월 15일부터 1969년 10월 20일까지는 제12대 보건사회부 장관을 역임했다. 1969년 10월 30일 전라남도청으로부터 1년간 구호사업을 적극 지원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명예 전라남도민증과 기념메달을 수여받았다.
이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및 중앙대학교에서 외래교수로 출강했고, 1970년부터 기아해방운동 한국지부위원장을 역임했다. 1972년 5월 26일 민주공화당 영등포구 을 지구당 위원장에 임명되었고, 1973년 2월 중순에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영부인 육영수의 이름 한 글자씩 따 '정수(正修)'라 이름한 정수직업훈련원의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2월 27일 실시된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김수한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고, 그해 3월 31일 재단법인 보건장학회 임시이사회에서 제2대 보건장학회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그해 9월 한국노동연구소 회장으로 재직했다. 1976년 재단법인 한국나병연구원 이사장으로 재직했고,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 1978년 8월 한국구강보건협회 회장으로 재직했고, 그해 12월 시행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관악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김수한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신군부가 집권하자, 그해 11월 12일 '정치활동규제 대상자' 1차 명단에 이름이 올라갔다가 11월 25일 정치활동규제가 해제되었다. 12월 3일에는 한국국민당 발기준비위원으로 참여했고, 12월 6일 한국국민당 서울특별시 조직책임자에 내정되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동작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조종호 후보와 민주한국당 서청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2년 9월 6일 33억 6천 2백만원의 비용을 들여 경기도 시흥군 의왕읍 오전리(現 의왕시 오전동) 310번지에서 시흥종합병원을 개원해 이사장에 취임했다.
그러다 1984년 10월 경상남도 거제군 거제기독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하던 중 과로로 쓰러졌고, 고혈압과 당뇨 증세 호소해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던 시흥종합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1986년 3월 1년반 동안의 투병 생활 끝에 건강을 회복해 퇴원했으나, 1987년 10월 26일 시흥종합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67세. 그의 유해는 1987년 10월 28일 국립서울현충원 제1장군 묘역에 안장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3. 원광대학교와의 관계[편집]
원광대학교는 1970년대에 의과대학 설립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고 한다. 의과대학 설립에 가장 큰 어려움은 실습병원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이에 원광대학교 측은 근처에 있던 씨그레이브 병원에 실습병원 사용을 요청하였다. 그때 씨그레이브 병원 이사장이 정희섭이였다. 정희섭 이사장은 병원을 무상으로 기증하였고, 동시에 원광대학교가 제의한 모든 보상을 사양하였다고 한다. #
그런데 이때 놀라운 사실은 정희섭은 개신교 신자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과 종교가 다른 원불교 재단의 대학에 자발적으로 아무런 보상없이 병원을 통째로 건네주었다는 것이다. 이에 결국 2017년 '대학을 빛낸 인물 5인'에 포함되었다. #
4. 선거 이력[편집]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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