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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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초대 법무부 장관이자 독립운동가, 변호사, 정치인.
익재 이제현의 후손이며, 맏사위는 재선 국회의원을 지낸 이태구이다.[2]
2. 생애[편집]
2.1. 초년기[편집]
1896년 경상북도 대구군 동상면 사일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사일동)에서 아버지 이종영(李宗榮)과 어머니 연일 정씨 정복희(鄭福姬)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고려 공민왕 때 종1품 문하시중을 지낸 익재 이제현의 후손으로, 대대로 경상도 경주부 산내면에 살다가 1830년대에 조부 이관준(李寬俊)이 대구도호부 수북면 효목동(현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으로 이주해와서 대구에서 살게 되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니혼대학 전문부 법률과 야간부에 입학했다가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과에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2.2. 일제강점기[편집]
1921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실무수습을 하던 중 1923년 도쿄에서 시행된 일본변호사시험에 합격하여, 서울에서 법률사무소를 개업하였다. 이후 1935년 조선변호사협회장에 취임하여 일제강점기 당시 가인 김병로, 허헌과 함께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무료변호를 하면서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서 명망을 날렸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창씨개명을 거부하였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2.3. 해방 이후[편집]
8.15 광복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여 한국민주당 소속으로 있었으며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49년 7월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마지막 위원장에 임명되어 반민특위를 해체했다. 1949년 6.6 반민특위 습격사건에 이어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이 물러난 전후로 반민특위의 활동은 사실상 무력화되어버린 시점이었다. 이인은 애초에 반민특위 활동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졌던 인물이었다.[3][4]
2.4. 정계 활동[편집]
1949년 법무부 장관에서 물러난 이후 장면이 주미 대사로 부임하면서 국회의원직을 사임하자 제헌 국회의원 선거 재보궐선거(서울특별시 종로구 을)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을 지역구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참의원(參議員)에 당선되었다.
2.5. 말년[편집]
1962년 유엔 인권옹호 한국연맹 이사에 임명되었다. 1972년 민족통일촉진회장,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고문 등을 역임했다.
1979년 4월 논현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으며 사후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북양리에 안장되었으나 2011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3. 선거이력[편집]
4. 둘러보기[편집]
[1] 경주 이씨 36세 규(圭) 항렬이나 항렬자는 쓰지 않았다.[2] 장녀 이덕경(李德璟)과 결혼하였다.[3] 당시 이인 외에도 장헌상이나 조병옥처럼 친일파 색출·처벌보다는 반공을 강조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존재했다.[4] 매불쇼(건국절논란)[5] 종로을구[6] 양주군갑구[7] 영등포을구[8] 종로갑구[9] 제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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