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태후

덤프버전 :



[ 펼치기 · 접기 ]
태조 후
혜종 후
정종(定宗
광종 후
1
신혜왕후 류씨
2
장화왕후 오씨
3
신명왕후 유씨
4
신정왕후 황보씨
5
신성왕후 김씨
6
정덕왕후 류씨
1
의화왕후 임씨
1
문공왕후 박씨
2
문성왕후 박씨
1
대목왕후 황보씨
경종 후
성종 후
목종 후
현종 후
1
헌숙왕후 김씨
2
헌의왕후 류씨
3
헌애왕후 황보씨
4
헌정왕후 황보씨
1
문덕왕후 유씨
2
문화왕후 김씨
1
선정왕후 유씨

1
원정왕후 김씨
2
원화왕후 최씨
3
원성왕후 김씨
4
원혜왕후 김씨
5
원용왕후 류씨
6
원목왕후 서씨
7
원평왕후 김씨
덕종 후
정종(靖宗
문종 후
순종 후
1
경성왕후 김씨
2
경목현비 왕씨
3
효사왕후 김씨
1
용신왕후 한씨
2
용의왕후 한씨
3
용목왕후 이씨
1
인평왕후 김씨
2
인예왕후 이씨

1
정의왕후 왕씨
2
선희왕후 김씨
선종 후
숙종 후
예종 후
인종 후
1
정신현비 이씨
2
사숙왕후 이씨
1
명의왕후 류씨

1
경화왕후 이씨
2
순덕왕후 이씨
3
문정왕후 왕씨

연덕궁주 이씨
복창원주 이씨
1
공예왕후 임씨
2
선평왕후 김씨
의종 후
명종 후
신종 후
희종 후
1
장경왕후 김씨
2
장선왕후 최씨
1
의정왕후 김씨
1
선정왕후 김씨

태자비 왕씨
1
성평왕후 임씨
강종 후
고종 후
원종 후
충렬왕 비
1
사평왕후 이씨
2
원덕태후 류씨
1
안혜왕후 유씨

1
정순왕후 김씨
경창궁주 유씨

1
제국대장공주
충선왕 비
충숙왕 비
충혜왕 비
공민왕 비
1
계국대장공주
1
복국장공주
2
조국장공주
3
경화공주
4
공원왕후 홍씨

1
덕녕공주
2
희비 윤씨
1
노국대장공주
우왕 비
공양왕 비

근비 이씨
1
순비 노씨



시호
고려사
신헌선정태후(信獻宣靖太后)
고려사절요
정선태후(靖宣太后)
존호
흥덕궁주 원비(興德宮主 元妃)[1]
왕태후(王太后) / 황태후(皇太后)
태상황모(太上皇母)
관저
흥덕궁(興德宮)
장추전(長秋殿) 경흥부(慶興府)
수복전(綏福殿) 응경부(膺慶府)
본관
강릉 김씨
능호
진릉(眞陵)
생몰연도
? ~ 1222년 9월 23일 (음력 8월 17일)
부모
부친 - 강릉공 왕온(江陵公 王溫, ? ~ 1146))
모친 - 강릉 김씨 김고(金沽)의 딸
형제자매
언니 - 장경왕후(莊敬王后)
언니 - 대령후 왕경(大寧侯 王暻)의 부인
언니 - 의정왕후(義靜王后)
남동생 - 공화후 왕영(恭化候 王瑛, 1126 ~ 1186)
남동생 - 왕작(王鷟)
배우자
신종(神宗)
자녀
슬하 2남 2녀
장남 - 희종(熙宗, 1181 ~ 1237)
차남 - 양양공 왕서(襄陽公 王恕)
장녀 - 효회공주(孝懷公主, 1183 ~ 1199)
차녀 - 경녕궁주(敬寧宮主)

1. 개요
2. 가족관계
3. 생애
4. 마지막 시조
5. 시호


1. 개요[편집]


신종의 왕후이자 희종의 모후. 안혜태후의 조모이다.

2. 가족관계[편집]


선정태후의 증조부는 문종 왕휘, 조부는 조선국 양헌왕 왕도, 아버지는 강릉공 왕온이다.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선정태후가 김씨를 따랐으므로 모계가 김씨 가문과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자매로 장경왕후, 광정태후가 있다. 인종의 아들인 의종, 명종, 신종 삼형제가 왕온의 딸인 장경왕후, 광정태후, 선정태후 세 자매와 결혼한 것이다. 참고로 왕온의 둘째 딸도 인종의 차남 대령후와 혼인하였으며, 아들인 왕영은 인종의 딸 승경궁주와 결혼했다. 5겹사돈? 고려 왕실 특유의 근친혼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남편과의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희종양양공 왕서이며, 딸은 효회공주[2]와 경녕궁주다.

3. 생애[편집]


신종이 황태제가 되기 전, 평량(平凉)[3]의 공작일 때 결혼했다. 신종이 황태제가 된 후에 등극하자 궁주 원비에 봉해져 정식 왕후가 된다. 어떤 궁을 하사받았는지는 고려사에 나와있지 않은데 자신의 큰언니와 1년 전 죽은 자신의 딸이 살았었고, 희종이 즉위해 장추전으로 옮겨가자마자 최충헌이 소유하게 된 흥덕궁일 가능성이 있다.

늙은 남편이 태자 희종에게 양위하자 아들로부터 1204년 4월에 왕태후로 올려졌다. 18년 동안 태후로 존재했으며 중간에 아들 희종최충헌을 죽이려다 실패하여 폐위되고, 조카 강종이 등극했다가 고종이 등극하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꿋꿋히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의 점잖은 모습을 보여주니,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1222년에 사망하였으며 시호를 선정태후라 하고 이후 고종이 신헌(信獻)이라는 시호를 추가하였다.

고종은 이규보를 시켜 선정태후를 기리는 시를 짓게 했다. 동국이상국전집 제 16권에 기록된 '왕태후 만사'가 바로 그 시인데, 선정태후가 생전에 태상황모(太上皇母) 존호를 받았다고 설명을 덧붙혔고 손녀가 왕후(王后), 아들이 상황(上皇)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선정태후가 힘든 시절 정치에 관여하기보단 왕실 안정에 힘을 쓴 것을 찬양했다.

4. 마지막 시조[편집]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은 양양공 왕서의 직계 후손이다. 양양공 왕서는 선정태후의 차남으로, 고려는 선정태후의 혈통으로 끝을 맺은 셈이다.

5. 시호[편집]


선정태후의 시호는 신종 靖효대왕과 靖 자 돌림이다. 그러나 고려사 기록 상으론 희한하게 신종 '정'효왕과 선'정'태후는 뒤의 시호를 맞췄다. 원 간섭기 이전의 고려왕실은 시호를 맞출 때 보통 앞의 시호를 맞췄다. 선정태후의 자매들을 봐도 의종 '장'효왕과 '장'경왕후, 명종 '광'효왕과 '광'정태후 등 모두가 앞의 시호를 맞췄다.

고려사절요 제14권 희종 성효대왕엔 선정태후의 시호가 정선태후(靖宣太后)로 앞뒤가 바뀌어 있는데, 고려왕실이 모두 앞 시호를 돌림으로 썼다는 걸 감안하면 이 시호가 정확한 시호일 가능성이 더 높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희종이 신종과 정화태후(靖和太后)의 아들이라고 나오는데, 정화태후라는 시호도 다른 왕후들의 시호 작명법과 같은 원리이나 어디서 근거하여 서술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3 07:32:31에 나무위키 선정태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고려사에서는 궁호가 나오지 않으나, 이미 사망한 딸을 흥덕궁주로 추봉하였고 고려시대에 어머니와 어린 자녀가 궁호를 공유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신종 대 흥덕궁의 실소유주로 추정된다.[2] 종친인 하원공 왕춘과 혼인하였는데 신종 2년(1199)에 17세로 요절하였다. 이후 왕춘은 강종과 사평왕후 이씨의 딸인 수령궁주와 재혼했다.[3] 원 고구려의 평원군이었으며 신라의 북원소경으로 바뀌었다. 현재의 강원도 원주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