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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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세종~성종 시기에 활동한 관료.
2. 생애[편집]
1402년(태종 2) 중추원사 정흠지와 최씨 사이에서 형 정갑손에 이어 차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한성부윤[10] 정정부이다. 1423년 사마시와 1423년 식년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가 된 것을 시작으로, 이후 능력을 인정받아 집현전에서 근무하며 통감훈의(通鑑訓義)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1441년 사섬서령, 1443년 집현전 응교가 되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반포하려 하자 이에 대해 최만리, 하위지 등과 함께 반대 상소를 올린 바 있다. 세종은 상소를 올린 전원을 의금부에 하루 동안 투옥시켰는데, 정창손만큼은 파직이라는 아주 강도 높은 징계를 가했다.[11]
보통 토론을 통해서 논리적으로 신하들을 제압하는 세종의 평소 모습과는 달리 이 때는 이례적으로 왕권을 발동시켜 반대파를 강압적으로 진압했는데, 이는 논쟁 과정에서 정창손이 한 치명적인 실언 때문이었다. 훈민정음 반대파의 또다른 거두인 최만리는 정치적이고 과학적인 논리[12] 를 내세웠기에 세종도 명분상 함부로 반박하기 어려웠으나, 정창손은 선비라는 자가 유교 정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논리를 내세운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간단히 말하면 "삼강행실도[13] 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해 봐야(=백성들에게 읽히고 가르쳐 봐야) 태생이 천하고 멍청한 백성들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라는 엄청난 소리를 유교 국가의 왕 앞에서 한 것이다.또 정창손(鄭昌孫)은 말하기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하였으니, "이 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용속(庸俗)한 선비로다."
하였다. 먼젓번에 임금이 정창손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도 엄청난 망언이었다. 조선의 건국 이념인 성리학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성리학은 "누구나 수양을 통해서 성인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평생 수양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철학이 중심인 학문이다.[14] 성리학의 근간이 된 유교를 창시한 공자도 "가르침이 있을 뿐 부류란 없다(有敎無類)"도 하여 누구나 바른 가르침에 의해 수양하여 군자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이를 증명하듯 빈민 출신 안회와 양아치 출신 자로를 제자로 육성해 보였다. 또한 맹자도 사람이 누구나 요순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제자의 질문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답한 바 있다.
즉, 정창손의 이 발언은 문자 그대로 공맹으로부터 내려온 유학의 정신을 근본부터 부정하는 심각한 실언이었다. 유교를 국가의 근간으로 삼고 그에 따라 치르는 과거 시험으로 등용한 나라의 공직자라는 사람이 이 따위 헛소리를, 그것도 당당하게 왕 면전에 대고 지껄이는데 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15] 조선이 만들어진 원인이 된 고려 시절 권문세족들의 입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다.
당연히 세종은 정색하여 "훈민정음을 통해 오히려 백성들이 효·충을 깨우치기 쉬울 것이다"라고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세종실록》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감정적이고 강도 높은 '용속한 선비'라는 발언을 남겼다. 저것도 사실 공식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이라 표현이 순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선비 구실도 제대로 못하는 쓸모없는 밥통 같으니라고' 정도의 상당한 욕설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용속한 선비'라는 표현을 시쳇말로 바꾸면 씹선비 정도의 어감이니, 상당히 과격한 욕설을 퍼부은 셈.
그나마 조선의 공직에 재능을 헌신한 정창손의 공이 인정된데다, 사람을 함부로 해하지 않는 인본주의를 추구한 세종의 성향 덕분에 얌전히 파직 정도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처럼 왕의 권위를 조금이라도 위협하는 자는 반드시 숙청해 버리는 경계심 많은 왕이었거나, 연산군처럼 자기 기분 따라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 죽여 대는 또라이 왕 잘못 만났으면 강상죄 + 반역죄로 꼬투리 잡혀 삼족이 멸해질 수도 있었던 엄청난 실언이었으니 목숨 건진 것만 해도 용한 일이다.
1444년 다시 집현전 응교로 복직되었다가 1445년 집현전 집의가 되었는데, 1446년 세종이 불경 간행을 추진하자 "성리학의 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하는 것은 아니 된다"라며 또다시 세종에게 강경하게 맞서다 좌천되었다. 성리학을 부정한 양반이 성리학을 명분으로 불교를 배척했다는 점이 웃음 포인트. 그러나 운 하나는 정말 억세게 좋아서 1447년 세종에게 용서받아 직예문관에 등용됐으며, 그 해 문과 중시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을 거쳐 1448년 집현전 부제학이 되었다. 집현전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세종의 불교 숭배에 대해 반대하는 상소문을 꾸준히 올리며 대립하기도 했으나, 능력은 출중해 1449년 <고려사>, <세종실록>, <치평요람> 등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
세종 사후 문종의 치하에서는 우부승지를 거쳐 대사헌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제학, 대제학, 병조판서를 거치며 <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단종 재위 원년에 이조판서가 되었을 때 사헌부로부터 "정창손은 홍원용과 친척지간인데 친척끼리 업무가 연관된 관청에서 근무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일단 논란이 있으니 해결될 때까지 관직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자[16] "는 구설수가 있었으나 단종이 나서서 피혐은 되지 않았다.
1453년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정창손은 수양대군의 편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이후 좌익공신 3등에 녹훈되어 봉원군에 봉해졌는데, 1454년 사위였던 김질이 사육신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꾸미다 실패할 것 같다는 생각에 장인이었던 자신에게 이를 고하자 세조에게 직접 고변했다.[17] 이에 대해 세조는 정창손을 좌익공신 3등에서 2등이었던 수충경절좌익공신(輸忠勁節佐翼功臣)으로 올려주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가 더해졌으며 봉원군에서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이런 모습으로 인해 생육신들, 그 중에서도 특히 김시습으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으나 1457년 좌의정까지 올랐다. 1458년 모친인 최병례가 사망하며 3년상을 위해 사직을 청하자 세조는 직접 1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부의(賻儀)를 내렸으며 여묘(廬墓)살이를 하고 있는 그를 기복[18] 시켜 영의정으로 임명한다. 정창손은 자신은 부담스럽다며 여러 번 사양했지만 세조는 일축하고 영의정 임명을 관철시켰다.
3년상을 치르고 정계에 복귀한 그는 죽은 세조의 장남이자 세자였던 이장에게 의경(懿敬)[19] 이라는 시호를 올리는 데에 적극 앞장서며 세조의 신임을 얻었으나 1462년 양위와 관련된 발언을 해 삭탈관직되었다. 곧 정계에 복귀해 1468년 예종 즉위 후에는 남이와 강순의 국문을 직접 맡아 그 공을 인정받고 익대공신 3등에 올랐다.
1469년 성종 즉위 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승품되고 원상(院相)이 되었다. 1470년 나이가 70살이 되어 정계에서 물러나기를 원했으나 성종이 허락치 않았다. 남효온(南孝溫)이 소를 올려 세조 즉위 초에 폐위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 복위를 주청하자 소릉의 폐출에 참여한 그는 복위에 반대했는데 후일 복위된 뒤 이 일로 지탄을 받았다. 1475년 영의정에 재임되었으며 1476년 성종이 왕비 윤씨를 폐하려고 할 때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강력하게 간하지 못하였다. 이후 여러 번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다가 1485년 나이 84세의 고령에 영의정으로 재임된지 10년 만에 사직하였다.
특진관 예조 판서(禮曹判書) 유지(柳輊)가 아뢰기를,
"성안에 요귀(妖鬼)가 많습니다. 영의정 정창손의 집에는 귀신이 있어 능히 집안의 기물(器物)을 옮기고, 호조 좌랑(戶曹佐郞) 이두(李杜)의 집에도 여귀(女鬼)가 있어 매우 요사스럽습니다. 대낮에 모양을 나타내고 말을 하며 음식까지 먹는다고 하니, 청컨대 기양(祈禳)하게 하소서."
하자, 임금이 좌우에 물었다. 홍응이 대답하기를,
"예전에 유문충의 집에 쥐가 나와 절을 하고 서서 있었는데, 집 사람이 괴이하게 여겨 유문충에게 고하니, 유문충이 말하기를, ‘이는 굶주려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다. 쌀을 퍼뜨려 주라.’고 하였고, 부엉이가 집에 들어왔을 때도 역시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는데, 마침내 집에 재앙이 없었습니다. 귀신을 보아도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면 저절로 재앙이 없을 것입니다. 정창손의 집에 괴이함이 있으므로 집 사람이 옮겨 피하기를 청하였으나, 정창손이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비록 죽을지라도 어찌 요귀로 인하여 피하겠느냐?’고 하였는데, 집에 마침내 재앙이 없었습니다."하였다.
유지가 아뢰기를,
"청컨대 화포(火砲)로써 이를 물리치소서.(請以火炮禳之.)"
하니, 임금이 응하지 아니하였다.
-성종실록, 성종 17년(1486) 11월 10일
죽기 1년 전인 1486년에는 집에 유령이 나타났다고 <조선왕조실록>에 나오지만 정창손 본인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긴 듯.[20] 예조 판서 유지가 "화포로 물리치자"고 한 것은 '양진'(禳鎭)이라고 불렀는데, '방술(화약)을 써서 재앙을 막는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귀신이 나온다니까 대포로 잡아 보자"라고 상신했다가 성종이 반려했다는 이야기다.[21] 이는 음기(陰氣)가 강한 귀신을 양기(陽氣)인 불(=화포)로 물리칠 수 있다는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22]
1487년 86세로 죽자 성종은 청빈 재상이라 하여 많은 물품 등을 부의로 하사하였다. 1504년 연산군이 주도한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가 중종 때 신원되었으며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3. 대중매체[편집]
능력만 보자면 영의정을 세 차례나 역임할 정도로 뛰어난 관료였고 검소한 청백리로도 이름 높았던 인물이지만, 상술된 "백성이 유교를 배워도 천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발언으로 세종과 대립해 놓고서는 자신은 훗날 수양대군에게 붙어 권신이 되었고 사육신을 밀고하는 짓까지 저지른 능력과 인간성이 별개인 사람의 전형을 보였다.
때문에 당대에는 물론이고 현대 기준으로도 타인의 귀감이 된다고는 볼 수 없는 위인이기 때문에 대중매체에서는 거의 일관되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묘사된다. 그나마 눈에 띄게 부정적으로 다뤄지지는 않는 매체에서는 반대로 비중이 전무하다. 일반적으로는 선민의식에 빠진 찌질한 인간 쓰레기로 나오는 경우가 많고, 실제 인물도 별반 다른 모습은 아니기에 늘상 그렇게 그려진다. 세종 집권 시대만을 다룬 사극에서는 계유정난에 참여한 인물들인 수양대군, 정인지, 신숙주조차도 이 때만큼은 세종의 조력자로서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반면, 정창손은 정말 일관성있게(...) 인간 말종으로 그려지는 것이 특징.[23]
-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배우 안대용이 연기했다. 전형적인 기회주의형 노회한 권신의 이미지로 나왔다. 초반부에는 수양대군의 세조 즉위를 강력히 찬성했고 단종복위운동을 밀고한데다가 단종 사사를 주청하는 동시에 한명회와도 손을 잡고 세조 반대파 숙청에 나서는 강경파의 이미지가 두드러졌고 중반부에도 원로대신이면서 한명회 등과 함께 남이의 옥사 때 남이를 처벌할 것을 주장하는 등 강경파의 이미지가 두드러졌다. 그러나 후반부에는 노쇠한 이미지로 나오면서 약간 온건해졌으며 한명회와 함께 훈구파의 중심축을 지키는 동시에 원로대신의 이미지로 나왔다.
- 2008년 KBS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배우 오용이 연기했다. 비뚤어진 사상을 가진 모습인데 명나라와의 교류를 우선하고 문자 창제를 반대하며 백성은 천성이 비루하다는 둥 실제 역사와 똑같은 소리를 하다가 마지막에 세종에게 호통을 듣기도 한다.[24] 비뚤어진 중화 사상으로 인해 명나라에게 국가 비밀에 해당하는 정보를 자꾸 넘기려는 사실상 고정 간첩과 맞먹는 행위를 하는 매국노이자 작중 최악의 인간 쓰레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등 긍정적인 면을 찾을 수 없는 인물. 선과 악이 구분이 거의 불분명한 이 드라마에서 가장 악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 2011년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위의 삼강행실도 관련 발언이 이순지에게 넘어가서 등장한다.
이순지 지못미세종이 극대노해 "네놈이 유학자냐"면서 갈군다.갓 세종의 팩트폭격
- 2019년 개봉한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서는 그를 모티브로 한 정남손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배우 김태우가 연기했다. 작중에서 주역들과 가장 많이 충돌하는 메인 빌런으로 대사헌을 맡고 있으며 세종, 장영실과 대립하는 신하들 중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강경하게 나서는 인물로 명나라와 내통해 서신을 주고 받기까지 했었다. 명나라 사신이 세종의 천문 관측을 문책하러 오자 적극 협조하여 장영실을 체포해 명나라로 압송하다가 강화도에서 명나라 사신과 함께 잔치를 벌이던 중 조롱하려고 부른 장영실에게 오히려 조롱을 당하자 장영실의 목을 베려다가 세종이 보낸 친위군 병력에게 저지당하고 체포된다. 어가가 부서지는 사고가 난 후 세종의 명령으로 집이 수색을 받아 명나라와 내통한 서신이 발각되고 이후 세종에게 "명나라와 작당해 반역을 꾸몄냐"는 질타를 받게 되자[25] 억울하다며 데꿀멍하게 되는데 "이 개새끼야"라고 욕을 듣는다.[26] 세종이 직접 칼을 빼서 참수하려다가 이 작품의 최종 보스인 황희[27] 가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계획을 알고 있다"고 역공에 나선 덕분에 목숨은 건진다. 물론 이후 역사와는 달리 실권을 잃은 듯 안여사건 이후 장영실을 용서해 달라는 신하들 틈에서 눈만 감고 있을 뿐 딱히 아무런 발언을 하지 못한다.
- 대체역사물 짐승조선에서도 영의정으로 등장하는데 여기서도 극단적 양천의식에 빠진 유교 꼴통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축문관에 강제로 끌려들어가고부터 김금수가 나라의 체면을 해친다며 그의 정책안을 극렬히 반대하나 한명회와 정인지가 편을 들어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후로도 김금수에게 지속적으로 딴지를 걸다 한명회와 성종에게 쿠사리 먹는 패턴이 반복되는 것이 소설의 일상. 그러다가 김진수 부마 건에서 부마를 관직에 올리는 것은 암군이나 하는 것이라는 초특급 망언을 하게 되며,[28] 이에 명분을 제대로 잡은 성종에 의해 삭탈관직된 후 의주로 유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