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스 1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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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로마 제국의 제 129대 황제. 로마 제국과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며, 더 나아가 왕국 및 공화국 시기까지 통틀어 2,206년을 이어온 로마의 마지막 지도자였다.그는 훌륭한 군인과 유능한 행정가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생동안 단 한 번도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스티븐 런치만(Sir. James Cochran Stevenson Runciman, CH, FBA, 1903년 6월 7일 ~ 2000년 11월 1일),《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2. 언어별 표기[편집]
3. 생애[편집]
3.1. 즉위 이전[편집]
팔레올로고스 가문 출신. 별칭은 드라가시스(Δραγάσης)로 어머니가 세르비아의 드라가슈(Dragaš) 가문 출신이라 붙은 별칭이다. 팔레올로고스라는 성보다도 어머니의 성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마누일 2세와 엘레니 드라가시 사이에서 8남 중 5남으로 태어났다. 그중 둘은 어린 나이에 사망했으므로 장성한 황자 중 4남에 해당했다. 콘스탄티노스의 성장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상당히 적은데, 가끔 '포르피로게니토스(Πορφυρογέννητος)'로 묘사되는 걸 보아 블라헤르네 궁전의 자주색 산실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부터 사냥과 승마, 무예에 소질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몇 가지 기록으로 볼 때 모험심과 활달함, 용기를 갖춘 성품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장남 요안니스 8세는 차기 후계자로 지명된 상황에, 차남 테오도로스 2세 팔레올로고스와 삼남 안드로니코스는 각각 모레아와 테살로니키의 데스포티스로 임명된 상황이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영토가 워낙에 적었기 때문에 어린 콘스탄티노스는 할당된 영지 없이 당분간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무르게 되었다.
1422년 6월, 당시 17세의 소년이었던 그는 무라트 2세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을 경험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마누일 2세와 차기 후계자인 요안니스 8세의 공동 황제 통치 시기였다. 결국 오스만군은 해가 가기 전 철군했지만, 이 공성전이 크나큰 스트레스가 되었는지 공성전 기간 중인 9월에는 부황 마누일 2세가 뇌졸중으로 반신 마비를 겪기도 했다. 다음 해 여름에는 튀르크의 공세에 시달리던 안드로니코스 데스포티스가 베네치아인들에게 영지인 테살로니키를 넘겨주었는데, 7년 후인 1430년 3월 29일 테살로니키는 오스만 술탄국에게 함락된다.
요안니스 8세의 치세기 동안 콘스탄티노스는 황제를 대리할 섭정직을 두 차례 맡았다. 당시 요안니스 8세는 서방 세계의 도움을 얻기 위해 몸소 서유럽으로 찾아가 동서교회 통합을 추진했는데, 이 때문에 황제가 부재할 동안 수도를 관리할 섭정이 필요했다. 첫 번째는 1423년 11월부터 이듬해 11월 초, 그가 18세 ~ 19세 때의 일로 이것이 그가 맡은 최초의 정치적 직무였다. 두 번째 섭정기는 1437년 11월 말에서 1440년 2월까지였다. 이 두 차례의 섭정기를 통해 콘스탄티노스는 후사가 없던 요안니스 8세를 이을 후계자로 잠정적으로 여겨졌다.[2]
1428년에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제국의 번국인 모레아 전제군주국(Despotate of the Morea)의 군주가 되었다. 모레아 데스포티스 시절에 라틴계 아테네 공국, 아카이아 공국 등을 격파하고 흡수함으로써 그리스 남부의 경쟁 세력을 모두 격파하고 1443년에 이르면 베네치아의 식민지 일부를 제외한 펠로폰네소스 반도 전 지역과 아티키의 상당수를 세력권에 넣었다. 그러나 이를 경계한 무라트 2세의 대군에 의해 영토를 모조리 토해내야 했으며,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입구인 코린토스 지협에 모레아 전제군주국이 세운 제국판 만리장성인 헥사밀리온이 함락되고 모레아까지 황폐화되었다.
44살이 되는 1448년에는 맏형인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8세가 후사 없이 사망했고, 동생인 디미트리오스와 제위 계승 분쟁이 있었으나 오스만 술탄 무라트 2세의 지지를 받아 제위에 올랐다. 거기에 대관식조차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아니라 모레아 전제군주국의 수도 미스트라에서 치렀는데, 이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아닌 지방 도시에서 즉위식을 올린 황제는 몇 명 있었으나[3] 콘스탄티노스가 예외적이었던 것은 그들은 모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다시 한번 즉위식을 거행했던 반면, 콘스탄티노스에겐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데 이는 동서 교회의 통합 문제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노스는 로마 교황의 군사적 지원을 얻고자 동서 교회의 통합을 꾀했고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도 그에 동조적이었으나, 그걸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성직자들도 많았다. 교단 내에서까지 배척받는 총대주교에 의해 대관식을 받을 경우, 콘스탄티노스는 즉위하는 순간부터 정치적 위기에 직면할 확률이 높았다. 한참 뒤에 반발이 줄어들거나 교회 일치는 없던 일로 한다는 어명이라도 떨어졌더라면 성 소피아 성당에서의 대관식도 가능했을 테지만, 그전에 동로마가 멸망해서 콘스탄티노스 11세에게는 그럴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이로써 멸망을 앞둔 로마의 운명을 대변하듯,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이후 유일하게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르지 못한 동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3.2. 즉위[편집]
1449년 1월 6일, 그는 로마 황제로서 즉위식을 올린다.[4] 그가 제위에 올랐을 때, 이미 동로마 제국은 완전히 몰락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 일부(= 모레아 공국)[5] 를 제외하면 그 영토가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그 주변에만 겨우 남아있는 도시국가로 전락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 주변의 영토는 죄다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술탄국에게 완전히 장악당했기 때문에 제국이 부흥할 가망이라곤 전혀 없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로마 황제 자리가 매우 위험하고 이름 밖에 남지 않은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즉위한 이후로는 불가피한 멸망을 조금이나마 늦추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통치하였다. 훌륭한 인품과 교양을 지녀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으며, 존망의 기로에 선 로마 제국을 구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외교를 펼쳤다. 정교회에 대한 교황 수위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6] 서유럽에 지원 요청을 했고[7] 당시 교황이었던 니콜라오 5세는 그 제의를 받아들였으나 교황령에서 보낸 지원군은 고작 궁수 200명과 식량 뿐이었다.
사실 이 당시 교황령의 군사력도 동로마 제국만큼 약하다 보니 제대로 된 지원을 해 줄 여력이 없었으며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카스티야 연합 왕국과 아라곤 왕국은 각각 백년전쟁과 레콘키스타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은 제후들 간의 다툼이 잦은 상태였고, 폴란드 왕국과 헝가리 왕국은 1444년에 바르나 전투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교황령 외에 동로마 제국의 지원 요청을 받고 구원군을 보낸 서유럽 국가는 제노바 공화국과 베네치아 공화국뿐이었다. 결국 오스만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동로마 제국이 동원한 병력은 동로마인, 서방 구원군, 용병을 모두 합쳐 약 8,000명으로 오스만에 비해 매우 열세였다. 또한 서유럽은 이미 1396년에 한 차례 십자군을 보냈다가 니코폴리스에서 대패하는 바람에 근 한세기간 오스만에 대해서 수세적 입장에 처하여 구원을 해주기 어려웠다.
3.3.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편집]
오스만의 새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즉위하자 그에게 자신이 그의 왕위 계승 경쟁자인 오스만 왕족 오르한[10] 을 데리고 있다고 자극하면서 이를 활용해보려 했지만 이것이 오히려 자충수가 되었다.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초반의 자세를 번복하고 최후의 공세를 준비한 것이었다.[11]"제국 없는 황제로 사는 것은 신께서 금하신다.[8]
내 도시가 스러지면 나도 함께 스러질 것이다.(μη δώσει ο Θεός να ζήσω, αυτοκράτορας εγώ, χωρίς αυτοκρατορία. Αφού πέφτει η πόλη μου, θα πέσω κι εγώ μαζί της)도망가고 싶은 사람은 할 수만 있으면 목숨을 구하고, 죽음을 직면할 각오가 된 사람은 나를 따르라!"(όποιος θέλει να φύγει, ας σώσει τον εαυτό του, αν μπορεί κι όποιος είναι έτοιμος να αντικρίσει τον θάνατο, ας με ακολουθήσει!)[9]
수행원 중 누군가가 항구로 도착해 탈출할 시간이 있을 거라고 하자 대답했다는 말.
10배가 넘는 대군을 동원한 오스만 술탄국의 공격에 온힘을 다해 두 달 간이나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었다. 이때 동로마군은 용병을 포함하여 닥치는대로 긁어모은 병력이 고작 8,000명이었고 다른 유럽 국가들은 지원 요청을 받았지만 지원군을 보내기가 어려웠거나 일부는 아예 무시하기도 했다. 이러니 가망이 없었다.[12]
자세한 내용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1453년) 참조. 당시 메흐메트 측에서는 사절을 보내 항복하면 황제 및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총독으로 임명해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하지만 황제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정중히 거부했다.
이 도시를 넘겨주는 일은 나뿐 아니라 여기 살고 있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의사에 따라 죽기로 결정했고,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이오.[13]
5월 21일, 오스만 측 사절에게.
인간이 목숨을 걸 만한 명분에는 네 가지가 있다. 신앙과 조국, 가족과 주권이 그것이다.
이것들을 위해서라면 누구나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나 또한 도시와 백성을 위해 기꺼이 한 목숨 바칠 것이다.
그대들은 고결한 백성들이며, 저 위대한 그리스와 로마 영웅들의 후손이다.
나는 그대들이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조상들에 못지않은 용기를 보여 줄 것이며,
예언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히려는 이교도 술탄의 음모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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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행방불명[편집]
파일:Theofilos_Palaiologos.jpg
그리스의 민속화가 테오필로스 하찌미하일이 1932년에 묘사한 전투. 백마를 탄 장수가 콘스탄티노스 11세.
"도시는 무너졌고 나는 아직 살아있구나!"(η πόλις αλίσκεται, και εγώ ζω έτι)[15]
미하일 크리토불루스(1410 ~ 1470)의 기록
일설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자,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할 생각이 없었던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위의 유언을 남기고 끝까지 자신을 따르던 근위대와 함께 무너지는 성벽을 수의 삼아 밀려오는 오스만군에 돌격했고,[17] 오스만군에 유린당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행방불명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이것이 2,206년을 이어온 로마의 멸망이었다."내 머리를 받아줄 그리스도인은 없는 것이냐?" (Δεν υπάρχει κανένας χριστιανός να μου πάρει το κεφάλι)[16]
게오르기오스 스프란체스(1401 ~ 1480)의 기록
그러나 대개 콘스탄티노스가 오스만과 끝까지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오스만 제국 측 사료나 후대에 서유럽 역사가들이 쓴 사료를 보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는 순간 목을 맸다거나 겁을 먹고 도망치는 도중에 죽임당했다거나 하는 등의 내용도 보인다. 이에 영국의 도널드 니콜(Donald Nicol)(1923 ~ 2003)은 대체 어느 것이 진상인지 알아내려 했으나 도저히 분간해낼 수 없었고,[18][19] 다만 동로마 역사가들은 그가 영웅적인 최후를 맞이했다고 묘사하는 반면[20] 오스만 측과 유럽 국가들의 사료에는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는[21] 것만 확인했다고 한다. 다만 행적이 묘연한 것은 함락 뒤부터인데 터키어 위키백과에서까지 항복보다 저항을 택했다고 서술한 만큼 그 직전까지 가망이 없음을 알고도 결사적인 태도로 일관한 그가 자살은 몰라도 함락되고서야 도망을 쳤다는 것은 맥락이 맞지 않아 보인다. 영어, 그리스어 위키피디아에서는 도시를 탈출했다는 사료는 세 개뿐이며 당일에 사망했다는 데에는 동의하는 편이라고 한다.
당시 "로마 제국은 창건자[22] 와 이름이 같은 황제의 치하에서 멸망한다."는 예언이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이 소문은 들어맞고 말았다. 흥미롭게도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도 로마를 세운 로물루스와 첫번째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23]
그리고 콘스탄티노스의 동생인 디미트리오스와 토마스가 통치하던 모레아 전제군주국 역시 형제 간의 내분으로 내전을 거듭하다 1460년에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으며, 또 다른 동로마계 국가인 아나톨리아 북부 폰토스의 트라페준타 제국[24] 도 이듬해인 1461년에 멸망 당했다. 이후 1475년에 테오도로 공국이, 1479년에는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이 멸망하며 로마 제국의 마지막 잔재들은 완벽히 사라지게 된다.[25] 이후 팔레올로고스 가문은 몬페라토 변경백 가문으로나마 이어지다 1533년 남계 혈통이 단절되며 이후 굴리엘모 9세의 딸이 곤차가 가문과 이어지는데 이 곤차가 가문의 후예가 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프란츠 1세이며 이로 인해 오늘날 합스부르크 가문의 피에는 팔레올로고스 가문의 혈통이 남아있다.
3.5. 사후[편집]
유해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26] 이후 튀르크의 지배를 받게 된 그리스에서는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죽지 않고 대리석상으로 변해 잠들어 있으며, 튀르크의 지배가 무너지고 그리스가 해방될 날 다시 부활하여 앞장서게 될 것이라는 전설이 생겨났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스만이 패망하자 그리스가 메갈리 이데아(Μεγάλη Ιδέα)[27] 를 내세워 1차 대전 승전국으로서 에디르네와 스미르나를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영유권을 요구하면서 이 전설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케말 파샤가 이끈 튀르키예에 의해 실패했고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을 통해 그리스와 튀르키예의 정교도와 무슬림이 맞교환되면서 이스탄불은 튀르키예 땅으로 굳어졌다.
자녀가 없었으므로 명목상 로마 황제 자리는 동생들인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 토마스 팔레올로고스를 거쳐 토마스의 아들인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에게 이어지다가 안드레아스가 프랑스의 샤를 8세와 스페인의 이사벨 1세, 페르난도 2세에게 제위를 팔면서 증발했다.[28]
4. 평가[편집]
4.1. 그리스에서[편집]
민족 영웅이나 다름 없는 대접을 받는다. 2009년 스카이TV에서 집계한 위대한 그리스인 100인 중 28위에 선정될 정도. 이는 역대 로마 황제 중 최고 순위다.[29][30] 역대 군주 중에서도 알렉산드로스 대왕, 레오니다스 1세 다음 가는 3위로, 페리클레스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네임드 속에서도 상당히 선방한 편.
콘스탄티노스 11세를 기리는 노래로 현대에 작곡된 '당신은 번개처럼 오시리라(Θά 'ρθεις σαν αστραπή)'라는 그리스어 노래가 있다.
4.2. 서유럽에서[편집]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상실했다가 수복한 이후 동로마 제국의 위신은 떨어질 대로 떨어져서 영어에서 Byzantine이라는 단어가 음흉함 혹은 복잡한 간계 등을 의미하는 관용어로 남았을 정도였다. 이후 동로마 제국은 끝없는 소모전과 음모, 내전으로 모든 방면에서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전성기 때와 비교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영토와 국력 속에서 동로마 제국은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불명예 속에서 사라질 뻔한 동로마 제국을 전설로써 끝낸 사람이 바로 콘스탄티노스 11세였다.
그는 선량하고 성실한 인품을 지녀 서유럽의 많은 인사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로마 제국이 동서 간 분쟁을 초월한, 2,200여년 역사의 보편제국 "로마"답게,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을 수 있었던 것은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뼈저리는 노력 덕분이었다. 그는 그 동안 쌓여온 동로마 제국의 불신을 불식하고 식어버린 서유럽인들의 마음을 돌려내었으며, 이는 베네치아인들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그들의 고향이자 무덤으로 삼게 하였다.
4.3. 정교회에서[편집]
그리스 정교회 중에서도 일부 지역 교회가 순교자이자 성인으로 공경한다. 아테네의 미트로폴레오스 대성당 앞 광장에서는 칼을 치켜들고 서 있는 그의 동상을 만나볼 수 있다. 다만 그 외의 정교회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하기 위해 정교회를 로마 가톨릭과 일치시킨다는 조건을 제시하여 서유럽의 원군을 요청한 것을 두고 정교회를 통째로 교황에게 바치려 했다며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여, 온 정교회에게서 성인으로 공경받는 것은 앞으로도 요원할 것으로 보인다.
4.4. 아랍권에서[편집]
아랍권의 경우 일단은 오스만과 같은 이슬람이라지만, 동유럽, 발칸 반도 국가들과는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해 지배를 받은 역사를 공유하므로[31] , 오스만이 일으킨 정복 전쟁 자체를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 민족도 다르고.[32] 따라서 아랍권의 무슬림들은 콘스탄티노스 11세를 비록 패배자이지만 튀르크족 침략자에게 맞서 싸운 용맹한 이교도 군주로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특히 이라크인들과 시리아인들은 이런 쪽에서 그리스와의 동병상련이 강하다 보니 그리스 현지인들만큼은 아니어도 콘스탄티노스 11세에 대한 평가가 좋은 편이다.
다만 아랍권 중에서도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알제리의 경우에는[33] 그리스와 사이가 나쁜 건 아니지만 터키와도 사이가 좋다 보니[34] 콘스탄티노스 11세에 대한 평가가 중립적이다.
4.5. 총평[편집]
큰 실책 없이 나라를 다스렸고, 마지막에는 황제로서 당당히 죽은 성군이자 매우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군주였다.
그는 신학과 철학과 같은 학문적인 분야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으나 미스트라스에선 개혁을 부르짖던 철학자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과 친하게 지냈다. 또 그는 좋은 군인이자 유능한 행정가였다.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성실함이 있었다. 그는 불명예스러운 행동은 하지 않았다. 까다로운 형제 문제를 다룰 때에도 관용과 인내심을 보여주었다. 친구들과 관료들은 그와 항상 의견이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그에게 충성하였으며, 그에게는 신하들에게 존경과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자질이 있었다.
능력이 아주 출중한 인물이었지만 망해가는 자신의 나라를 살릴 수는 없었다. 실제로 2,206년 역사의 로마가 망한 것이 그의 탓이라고 비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로마인답게 마지막까지 로마를 위해 싸운 진정한 영웅이었다.
5. 대중 매체에서[편집]
풍전등화의 제국을 유지하고 지키던 유능한 인물임과 동시에 극적인 일생과 죽음이라는 소재 때문에 망국의 마지막 군주라는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평가가 좋은 인물이다.
위에서 설명되었듯 튀르키예 영화인《정복자 1453》에서는 실제 모습과 달리 향락에 빠진 암군으로 왜곡되어 묘사되었으며, 때문에 그리스쪽이나 서방 역사학계에서의 반발이 엄청났다. 아랍권에서도 상술한 이유로 이러한 묘사에 대해 평이 좋지 않았다.
대한민국 국회의장을 지낸 정치인 김형오의 역사소설《술탄과 황제》에서는 메흐메트 2세와 함께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이 소설을 조한이 만화화한 《만화로 보는 술탄과 황제》에서도 말을 타고 검을 들며 오스만군에 돌격하는 최후로 묘사되었다. #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전을 영화화한 2012년작 튀르키예 영화《정복자 1453(Fetih 1453)》에서는 영화에서 주인공인 메흐메트 2세는 300의 레오니다스처럼 묘사한 것은 그렇다 쳐도 콘스탄티노스 11세를 하렘에서 여색과 환락에 빠져든 탐욕스런 폭군으로 왜곡하여 묘사하고 있다. 황제가 된 후 결혼도 못 하고 즉위식조차 못 올렸을 정도[35] 로 국가를 위해 노심초사한 황제인데 말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메흐메트 2세가 성 소피아 성당으로 대피한 동로마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모습은 역사왜곡으로 비난받았다.[36] 우습게도 300도 미국에서 흥행에 성공했듯이 이 영화도 튀르키예에서 2012년 흥행 1위를 차지했다. 특히 이 영화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을 튀르키예 시점으로 극화했기 때문에 튀르키예에서 좋아할 만하다. 어이 없을 정도로 노골적인 역사 왜곡에도 불구하고 상영 당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과 튀르키예 정부가 이 영화를 지원을 했고 튀르키예 정치권에서는 영화를 칭찬, 두둔하는 발언을 하면서 대놓고 밀어주면서 흥행 몰이를 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민간에서 제작해 방영한 사극 드라마《위대한 세기》에 대해서는 에르도안이 이슬람교와 오스만 제국 술탄의 위엄을 깎아 내린다며 노발대발 해대면서 비난하는 내로남불적인 행동을 보였다.
튀르키예에서 제작한 넷플릭스의 다큐 드라마 '오스만 제국의 꿈'에서도 등장. 위 영화와 달리 가히 시즌 1의 진주인공으로써 갈수록 불리해지는 전황에 내심 고뇌하면서도, 끝까지 자기 백성을 책임지려 애쓰는 성군으로 그려진다. 작중 그의 노력은 동로마 귀족들과 껄끄러운 관계인 조반니 주스티니아니에게도 인정받을 정도. 최후의 날에 로마 역덕들의 심금을 울리는 명연설을 하면서[37] 병사들을 독려하나, 시대의 흐름은 막을 수 없었고, 끝내 자신에게 돌진해오는 예니체리 근위대에 용맹하게 돌격하는 것으로 극에서 퇴장한다.
《Europa Universalis 4》에서는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시작 시점의 황제인 형 요안니스 8세보다는 낫지만 객관적으로는 평범 그 자체. 일부 유저들이 실제로 실책을 저질렀던 외교 능력치만 놔두고[38] 나머지 행정이나 무력 능력치를 더 높게 줘도 되지 않냐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대부분의 유저들은 일찍 죽어서 그랬지 실제로는 능력자였던 문종에게 밸런스 맞춰야 된다고 1,2,1이라는 희대의 쓰레기 능력을 주고 패치도 안 해주는 패러독스에게 뭘 바라냐며 한숨을 쉬고 있다. 그러나 1.36 버전에서 능력치 버프가 확정되어 3/2/2 였던 것이 5/2/3이 되는 것이 확정되면서 이전에 비해 확실히 쓸만한 군주가 될 것으로 보인다.[39]
미국의 대체역사소설 거장으로 유명한 해리 터틀도브의 1990년작 단편《황제의 귀환(The Emperor's Return)》에서는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콘스탄티노플 함락 순간에 하기아 소피아의 대리석 바닥 속으로 빠져들어 콘스탄티노플 수복의 순간까지 잠들어 있다는 전설이 실제로 일어났고, 2003년[40] 에 그리스 사회주의 정권이 소련과 동맹을 맺고 터키를 침공하여 그리스군이 이스탄불을 점령하고 하기아 소피아에 그리스군 정찰병들이 진입한 순간 잠들어있던 콘스탄티노스 11세가 깨어난다. 그러나 '이제 내 것인 제위를 되찾겠다'는 황제의 말을 듣고 사회주의자였던 그리스군 분대장은 '그리스엔 더이상 전제군주는 필요없다'며 쿨하게 콘스탄티노스 11세를 사살해버린다. #, 번역
모바일 게임《마녀병기》에서는 1453년에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성배를 얻은 이후 500년간 세상을 통치했었으나, 결국 성배의 힘에 매혹되어 미쳐버리게 된다. 결국 4명의 성기사가 그를 성배에 봉인함과 동시에 세상을 다시 1453년으로 회귀시키지만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저주는 여전히 성배에 깃들어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하였고 결국 작중 시점에서 성배의 봉인이 풀리기 직전까지 오게 되었다.
질 페이튼 월시의 『황제의 수의(The Emperor's Winding Sheet, 1974)』, 제임스 십맨의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 2013)』, 피터 샌드햄의 『반암과 재(Porphyry and Ash, 2019)』에서도 주인공 또는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Fate/Grand Order에서 서번트로 등장했다. 자세한 내용은 콘스탄티노스 11세(Fate 시리즈) 참조.
한국의 인터넷 대체역사소설《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서 주인공이 전생한 인물이다. 주인공으로서의 행적을 제한 콘스탄티노스라는 인물의 행적을 본다면 콘스탄티노플 포위 이후 어린 몸으로 신에게 제국을 살려달라 눈물로 빌고 있었는데 그것을 들은 사신이 그 몸에 주인공의 영혼을 집어 넣은 것.
그외에도 용병대장과 성녀, 마지막 바이킹, 내가 바로 세종대왕의 아들이다와 같이 15세기 초중반이 배경이면 유럽 묘사시 반드시 등장한다. 원역사의 행적이 행적이다보니 그가 비중있게 등장한다면 오스만은 그 반대급부로 무조건 끝장나는지라 오스만 킬버튼이라 봐도 될 정도.
6. 기타[편집]
한국 인터넷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콘스탄티노스 11세가 "로마도 황제 직위도 모두 주겠다! 살려만 다오!” 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역사왜곡 밈이 있다. 일명 "살려만다오스".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마이너 갤러리에서 역사 인물들의 유언이라면서 올린 글에 은근슬쩍 넣은 날조인데, 해당 글은 이외에도 여러 가지 유언이 날조되었으나[41] 유독 악의적으로 날조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것이 가장 유명한 밈이 되었다. 패독갤에는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애정이 너무 깊은 나머지 시종일관 비잔티움 찬양을 일삼는 속칭 '그리스퍼거[42] '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조롱하던 유행이 이어진 결과물이기도 하다.
콘스탄티노스 11세가 평균적인 역사 교육을 받은 한국인이라면 알기 어려운 인물인 데다, 그의 실제 행적과 장엄한 최후에 대해 모른다면 웃기도 힘든 한국 역덕들만의 밈. 게다가 대놓고 웃기게 날조한 다른 유언들과 달리, 망국의 군주+암군이라면 진짜로 했을법한 그럴싸한 말이기까지 하다. 이렇다보니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사실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 웹에서의 역사 왜곡 + 날조로 만들어진 밈이라 당연히 외국어로는 비슷한 이야기조차 아예 찾아볼 수 없다.[43] 물론 한국에서도 장난으로 시작된 것인 만큼 그걸 진지하게 믿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건 사실이 아니라면서 진실에 대한 설명을 해준다.
그에게 헌정된 노래로 당신은 번개처럼 오시리라가 있다.
7. 참고 자료[편집]
- Nicol, Donald M., The Immortal Emperor: the life and legend of Constantine Palaiologos, last Emperor of the Roma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