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고려)/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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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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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긍정적 평가
2.1. 한반도 단일국가 기틀 마련
2.2. 포용 정책과 민족 통일
2.3. 조선의 평가
3. 비판과 반론
3.1. 발해부흥운동 무시에 대한 비판
3.2. 결혼 관련
3.3. 호족 개입 관련
3.4. 후계 구도 비판
3.4.1. 호족 왕규


1. 개요[편집]


고려 태조 왕건의 평가에 대한 문서.

"태조는 아랫사람에게 너그럽게 대하여 어질고 지혜 있는 사람이 힘을 다하였고, 사람들에게 성심으로 대접하여 멀든 가깝든 모두가 그를 따랐으니, 살리기를 좋아하는 인덕은 천성에서 나왔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지정(至情)[1]

에서 나온 것이다. 견훤이 부자간에 서로 해치자 토벌하여 취하였고, 신라는 군신이 와서 의탁하자 예를 갖추어 그들을 대우하였다. 강한 거란이 동맹국을 침략해 멸망시키자 국교를 단절하였고, 약한 발해가 나라를 잃고 돌아갈 데가 없자 이를 위무하여 받아들였다. 자주 서경에 행차한 것은 근본이 되는 땅으로 만들려는 까닭이었으며, 친히 북방의 변경을 순수한 것은 사나운 풍속을 합쳐 교화하려 함이었다. 왕업을 처음 창건하여 모든 것을 고쳐 시작하였으니 비록 예악은 미처 제정하지 못했으나, 그 큰 규모와 원대한 계책이며 깊은 인덕과 후한 은택은 진실로 이미 500년의 국맥을 배양하였던 것이다."

고려사절요》1권 <태조 신성대왕> 편 중에서


"어진 사람을 좋아하시고 착한 일 하기를 좋아하셨다. 자기 생각을 미루고 남의 생각을 존중하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예의를 지키셨다. 모두 천성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민간에서 자라 어렵고 험한 일을 두루 겪으셨기에 사람들의 참모습과 거짓 모습을 모두 알아보셨고, 일의 성패도 내다보셨다. …(중략)… 재주 있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셨고, 아랫사람이 가진 힘을 모두 쏟을 수 있게 도우셨으며, 어진 사람을 취할 때와 간사한 사람을 쫓을 때에 주저함이 없으셨다."

최승로의 <5조 정적평> 중에서



2. 긍정적 평가[편집]



2.1. 한반도 단일국가 기틀 마련[편집]


왕건은 분열된 후삼국을 통일하고, 발해유민을 포용하여 이후 1945년 한반도 분단 이전까지 1,000년이 넘게 이어지는 단일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역사 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통일 과정에서 외세의 힘을 이용한 신라의 경우와는 달리 외세 개입 없이 자주적이고 보다 완성도 높은 통일을 이루었고, 능력과 세력이 있으면 어느 지방의 사람이라도 고위 관리가 될 수 있는 지방 간 기회의 평등을 나눌 수 있는 시대를 열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2]


2.2. 포용 정책과 민족 통일[편집]


신라의 경우, 통일 이전은 물론이고 통일 이후에도 수도 경주에 거주하는 소수의 진골 귀족들만 고위 관리를 독차지하는 골품제를 그대로 유지해 진골 귀족 이외의 신라 본토인들 및 새로 신라에 속하게 된 고구려백제계 주민들이 신라에 대한 진정한 소속감을 가질 수 없도록 만들었고 적극적인 포용 의지와 정책들의 부재로 인해 이후 200여 년이 넘어 신라 중앙 정부가 내부의 권력 다툼과 잇다른 실정으로 인해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자 옛 고구려와 백제 계열 주민들이 신라에서 이탈해 궁예의 후고구려와 견훤의 후백제를 건국하게 되는 중대한 원인을 제공했다.

적극적인 민족 포용책을 썼던 고려 역시도 무신정권 시절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부흥을 기치로 내세운 반란 세력들이 있기는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이후 고려 왕조 내에서 완전한 민족의 정서적 통일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단일한 민족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일부 학자는 무신정권기에 부흥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다는 이유로 태조의 민족 융합 정책이 불완전했다고 폄하하지만 이는 근거가 부족하다. 결론적으로 무신정권기 부흥운동들은 모두 실패했고 그리 세력이 크지도 못했으며 이후 고려 충렬왕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우리 한민족의 시조로 단군을 언급하면서 지역을 초월해 삼한의 사람들은 모두 단군의 후손이라는 인식이 사람들에게 심어지면서 이후로는 더이상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부흥운동을 기치로 한 반란이나 민란은 사라졌다는 사실이기 때문.[3] 무신정권기의 부흥운동이 모두 실패한 것이 단순히 당시 고려 조정의 반란 진압 능력이 신라 말기보다 훨씬 뛰어나고, 당시 부흥운동의 지도자들의 역량이 궁예와 견훤에 비해 훨씬 떨어졌기 때문만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당연히 태조와 이후 국왕들의 민족 융합 정책의 효과도 있었는데 고려는 신라와 달리 전 지역 사람들을 보다 평등하게 대우해서 과거제와 음서제를 통해 지방민이라도 실력과 세력이 있으면 천민과 노비가 아닌 다음에야 누구나 고위 관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신정권기에 부흥운동이 일어났어도 해당 지역들에서 과거제와 음서제를 통해 고려의 고위 관리가 되어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리는 옛 삼국 출신의 관리들은 거기에 동참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반란을 진압했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자신에게 크게 기여한 각 지방들을 극진히 대접했던 것이 후대 임금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던 경우들도 있었다. 제8대 현종은 제2차 여요전쟁 때 수도 개성이 함락되자 태조가 궁예의 태봉 시절 가장 크게 활약한 전장이고, 평양과 더불어 제2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나주로 피난을 갔다. 고려의 대몽 항쟁 때 전라도 지역에서 옛 백제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며 민란을 일으켰던 이연년 형제의 난을 박서와 더불어 귀주성 대첩의 영웅으로 백성들과 조정 신료들의 인망을 크게 얻었던 김경손이 나주 지역을 근거지로 해서 진압했다. 고려 말 제2차 홍건적 침입의 전반부에 홍건적의 공격으로 대패한 공민왕이 수도 개성을 떠나 고창 전투로 고려 왕조에게는 매우 뜻깊은 지역인 안동으로 피난을 갔고, 여기서 전열을 재정비해 이듬해 개성 탈환 작전을 성공시켜 홍건적을 대파하게 된다. 당시 나주와 안동은 고려 왕조와의 역사적인 깊은 인연과 이들 지역에 대해 극진한 혜택을 준 이유들로 인해 고려 왕조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도와 태조 사망 이후 후대의 임금들과 신료들이 위기를 헤쳐나가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고려가 멸망할 당시 목숨을 걸고 고려 왕조를 위해 충성을 다한 사람들은 대체로 옛 백제와 신라계 사람들이었다. 최영[4], 이색[5], 정몽주[6], 이숭인[7], 정지[8] 등 백제와 신라계 인물들이 고구려계 인물들을 제치고 고려 왕조 사수에 가장 앞장섰다는 것은 그만큼 고려의 민족 융합 정책이 성공했다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2.3. 조선의 평가[편집]


그래서 왕건의 후삼국 통일과 그 과정에서의 어질고 후덕했던 면, 그리고 왕건의 삼한 통일 이후 조선왕조 멸망때와 그 이후의 일제강점기까지 1,000년이 넘도록 다시는 한반도가 갈라지지 않도록 여러가지 좋은 정책들을 실시한 면들 때문에 심지어 고려왕조를 멸망시킨 조선 왕조에서도 왕건은 매우 높이 평가했으며, 위에서 이야기가 되었듯이 심지어 《성종실록》, 성종 24년 12월 22일 임오 4번째기사 '시독관 유호인이 기자묘의 수리를 아뢰다'라는 기사#를 보면 성종과 당시 신료중 하나였던 유호인은 왕건의 공적에 대해 역대 우리나라의 임금들 중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했다.

신라의 삼국 통일 23년후 발해가 건국되어 남북국시대가 열렸으며, 뿌리 깊은 골품제와 고구려와 백제계 백성들에 대한 적극적인 포용제도 정책들과 포용 의지 부재로 인해 고구려와 백제 출신인 귀족과 백성들에게 신라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옛 고구려와 백제 영토에 살던 백성들은 그대로 고구려와 백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갔고 200여년이 넘어 신라 중앙정부의 지배력이 흔들리자 궁예의 태봉과 견훤의 백제를 탄생시켰다. 이를 재통일하고 다시는 갈라지지 않도록 여러가지 제도적 장치들을 성공적으로 마련한 인물이 왕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 태조 왕건을 지금의 한국을 있게 한 통일의 시조로 본다.


3. 비판과 반론[편집]


그러나 일정 부분에서는 비판을 받는 점도 있는 편이다. 물론 한반도 각지의 호족들을 성공적으로 포섭하여 고(구)려라는 간판을 내세우면서도 우리 모두 다 같은 삼한인이라는 통합된 정체성을 이룩한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그와 별개로 국가의 정치적/체제적 안정성 확립에 있어서는 그저 좋은게 좋은거지~ 노선으로 일관하다 덜컥 죽어버렸다는 점에서 통일삼한의 시조일지라도 비판을 피하기가 어렵다. 부연하자면, 한반도 각지의 호족들과 혼인동맹만 줄창 맺어서 삼한통일을 완료해놓고는 정작 그 뒤에 해야할 공신/외척 숙청은 전혀 안했기 때문에 차기 왕권을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결과론이긴 하지만, 이 때문에 혜종 왕무와 정종 왕요가 뭘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적장자에게 왕위룰 물려주지도 못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3.1. 발해부흥운동 무시에 대한 비판[편집]


예를 들면 위기에 처한 발해 및 발해부흥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은 탓에 한국사에서 만주가 아예 떨어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던 게 있다. 단 발해의 멸망(926)을 막지 않았음을 비판하는 건 남쪽에서 후백제와 여전히 쟁패 중이었던 고려의 어려운 상황을 너무나도 도외시하는 단견이다. 훗날 입증되었듯이 후백제와 신라를 통합한 고려의 상태에서도 거란은 정말이지 상대하기 어려운 강적이었다. 그런 판국에 등 뒤에 있는 후백제와 쟁패하는 과정에서 거란을 화나게 한다는 건 바로 후백제의 견훤이 바라는 시나리오에 빠져듬을 뜻했다.

하지만 926년 1월 발해가 멸망했을 당시 아무리 고려가 여유가 없었다지만, 후백제를 멸망시킨 이후에도 정안국이나 흥료국 같은 발해 후속국들이 지원을 요청해오면 일정 부분 거리를 두는 정책을 펴는가 하면, 정권의 요청은 묵묵부답하고 단지 귀순해오는 일부 유민만 받아들이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건 태조가 앞서 발해의 사정을 무시한 정책의 연장선이다. 정안국이나 흥료국은 고려가 후삼국시대를 끝내고 상대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던 시기였다.

전근대의 국가관계에서 이웃 국가가 다른 나라에 의해 무너진다면 가장 좋은 부분은 멸망한 나라의 유민이나 영토 일부를 흡수하는 식의 어부지리 식의 이득을 얻는 것이고, 그게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멸망시킨 나라와 갈등을 빚어 자국에 불똥이 튀는 것을 막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따라서 거란과 싸움이 안 된다고 여겨질 때 발해를 돕지 않은 것은 고려의 군왕으로서 당연한 판단이었다. 발해 부흥국들은 거란을 적대하는 것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기에 이들을 돕게 되면 엄연히 당대 동아시아 최강으로 떠오르고 있었던 강국 거란과의 전면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진취적인 건국 초기라지만 거란 역시 건국 초기의 폭발적인 성장 동력을 뿜어내고 있었던 터라 그 아무리 전쟁 방면으로 잔뼈가 굵었던 왕건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일전을 불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왕건 재위 시기 만부교 사건을 일으킨걸 보면 좀 미묘하긴 하다만, 고구려를 잇는다는 고려의 입장에서 정통성 면에서도 정통성의 경쟁자인 발해를 도와서 고구려가 2개가 되는 것보단 발해를 망하도록 둔 이후 그 일정 부분을 흡수하는 게 정치적으로도 더 바람직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거란이 고려에게 대놓고 시비 걸며 서경 이북을 내놓으라던 성종(제6대) 시기 고려의 조정은 서희가 나서기 전까지 바짝 쫄아 서경 이북을 내놓기로 결정하기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왕건의 재위 당시 고려는 건국 초기인 데다가 밑에는 후백제라는 강적이 존재했음은 물론 시조인 왕건이 견훤에게 참패한 뒤 죽을 뻔하는 등 위기가 있었고 게다가 왕건 사후에도 혜종, 정종 등 연달아 왕들의 미심쩍은 죽음을 겪고 왕건의 호족 우대 정책으로 호족들의 힘이 원체 강했고 중앙 제도나 군사 제도 등이 정비되지 않아 그야말로 어수선한 시기였기 때문에 애초에 군사들의 파병은 힘들었다.

단, 그렇다고 현대의 국가주의 사고방식을 지나치게 대입하여 발해와 고려가 이름이 다른 그저그런 이웃 국가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 또한 딱히 옳은 견해가 될 순 없다. 발해는 어디까지나 대외용 명칭으로서 발해의 진짜 공식 국명은 어디까지나 고려였다. 즉 왕건이 세운 나라와 이름이 똑같았고 왕건은 이 발해가 바로 같은 고구려인들이 세운 국가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며 늘 호감을 숨기지 않았다. 다만 현실적 어려움이 있어 북쪽의 형제국이 망하지 않게 도와주는 건 여러모로 어려웠을 뿐이다.


3.2. 결혼 관련[편집]


또한 왕건이 적극적인 혼인 정책으로 호족들을 안정시켰다고는 하지만 확인된 부인만 29명[9]이다. 혜종의 어머니 장화왕후 오씨의 부친 오다련은 나주 호족이었지만 당시 행정 구역상으로만 나주인 목포에 있던 인물이었고, 《고려사》에서는 대놓고 오씨를 원나잇 상대로 하려 했으나 오씨가 임신하려고 왕건의 정액을 자신의 음부에 부어넣는 등의 노력해 성공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물론 장화왕후와 혜종을 비하하기 위해 후대에 만들어진 악의적인 이야기일 것이다. 또한 이미 사정 된 정액을 다시 음부에 넣어 임신을 하기란 매우 어렵다. 음부에 사정을 한다 한들 음부의 압력으로 인해 정자가 죽어 임신이 안되는 경우도 있다. 더군다나 질외사정을 했으니 정자들은 다시 움직이기 어려울것이다. 또한 왕건은 오씨와 903년 혼인했지만 혜종은 912년 생이다. 그리고 이러한 말도 안되는 일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누군가 목격했거나 태조나 오씨가 말하고 다녔다는 것 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불경스러운 일을 말했다간 당연히 자신에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을테니 즉 이건 과학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말이 안되는 일이며 고려사를 쓴 나라가 고려를 무너트리고 정권을 교체한 조선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게 악의적인 용도로 쓰인 것이라고 쉽게 판단이 가능하다.

그러나 왕건이 인물은 인물인지라 김행파의 일화와 같이 호족이 시침으로 딸들을 왕건에게 제공하는 경우가 있었다. 김행파의 딸들이 동침 이후에 왕건이 돌아오길 기다리면서 출가하자 왕건이 그대로 환속 못하게 절에 못박아버리고 결혼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결혼이 꼭 왕건쪽에서 제안한 것이 아니라 호족측에서 제안하기도 했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또 극단적인 왕건의 자식들의 성비를 보면 왕건이 건드린 여자 중에서 딸만 낳았거나 자식이 없을 경우 왕건이 책임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기도 하다.

어쨌든 이 여파로 왕족들의 성씨를 정하는 제도도 펼치게 되는데 이것도 특이한 방식이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왕씨와 결혼한 여자가 아들을 낳으면 왕씨 성을 따르지만 딸을 낳으면 모계의 성을 따른다. 가령 드라마화로 인지도가 있는 천추태후의 경우, 왕건의 친손녀이지만 성씨는 할머니 신정왕태후 황보씨에서 따 온 황보씨였다. 보통 어머니의 성씨를 잇는 경우가 많았지만 천추태후 자매는 일찍 부모를 잃고 할머니 신정왕태후가 양육해서 할머니의 성씨와 패서호족 세력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가까운 친척인 경종(제5대)[10]과 근친혼을 하게 된다. 즉, 왕족이 딸을 낳아도 그 딸은 모계의 성씨를 따르게 되며 이리되면 왕건 대부터 시작한 유력한 호족 가문과 지속적으로 혼인동맹을 맺을 수 있고 지위의 인플레도 막을 수 있긴 하다. 문제는 이게 당대 가치관으로 봐도 정상적이지 않다는 거다.


3.3. 호족 개입 관련[편집]


근친혼고려시대보다 더했던 신라 왕실에서는[11] 혁거세 거서간의 박씨와 박 성(姓)의 안에 씨(氏)의 지파로 편입된 탈해 이사금의 석씨, 태조 성한왕의 김씨, 구(舊) 금관가야 왕실인 新 김씨끼리만 혼인하고, 신라 중추를 이루던 6부인 이씨, 최씨, 손씨, 배씨, 정씨, 설씨는 정황상 혼인했을 것으로 보이나 기록에 나오지도 않을 만큼 성스러운 혈통을 따져서 그럴 필요가 없었다. 新 김씨도 백제 성왕을 전사시키고, 신라의 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태종 무열왕통의 양대 조상이 될 수 있었다.[12] 이런 신라의 철저한 족내혼 풍습은 외부 세력을 유입시키지 않고 왕통의 신성성을 유지하면서 역성혁명 여지를 없애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호족 연합으로 이루어진 국가였다. 이들은 고려 성립과 후삼국 통일에 여러가지 도움을 주었고 지방에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는 이후의 조선처럼 호족들을 모두 힘으로 누르는건 힘들었기에 왕건은 이들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왕실에의 개입 여지를 줄 수밖에 없었다.


3.4. 후계 구도 비판[편집]


후계 구도를 엉성하게 잡아서 아들 혜종의 위치를 위태롭게 한 것도 비판을 듣는다. 후견인이라고 붙여준 인물이 박술희인데, 박술희는 왕건이 아끼던 인물이었지만 세력이 없었고, 그렇다고 모계 쪽이 세력 있는 호족도 아니었다. 상기했듯 오다련은 진짜 나주 호족도 아니고 세력을 가질 만큼 강한 인물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사돈 가문이라도 세력 있는 가문을 들여야 했는데 그러지도 않았다. 혜종의 아내 의화왕후 임씨는 진천 임씨로 대광 임희의 딸이지만 충주 유씨나 황주 황보씨 같은 집안보다는 격이 내려갔다.

당시 건국 초이고, 호족 세력이 강한 만큼 황주 및 개경 세력을 지지 기반으로 해주거나, 그도 아니라면 충주나 청주, 광주, 경주 같은 패서 지방이 아닌 타 지역에 기반을 둔 유력한 호족과 맺어주어 개경 세력을 견제하도록 해줬어야 했다. 다만 충주나 황주와 같은 유력호족 가문같은 경우에는 당시 그들이 미는 장성한 황자들이 이미 존재했던 만큼 굳이 혜종을 지지할 필요가 없었고, 그 점을 왕건도 알았기에 일찌감치 포기했을 수는 있다. 결국 고려 초기의 정치적 혼란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어졌다.[13]

다만 《고려사》를 보면, 왕건이 붕어 직전 당시 옆에 있던 재상이었던 왕규, 염상, 박수문에게 안팎의 중요한 일들 중 오랫동안 결정짓지 못한 것은 경들이 태자(혜종)와 함께 처결한 후 보고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는 기록이 있는데, 만약 이들이 다른 이들의 입김이 아닌 왕건의 의도대로 재상에 임명된 것이라면, 거기에 이들이 박술희와 같은 고명대신이었다면, 당시의 왕건으로써는 나름 괜찮은 방법을 취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공교롭게도 수백년 뒤,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 역시 후계자 문제로 말년에 자식들간의 골육상쟁을 봐야 했다. 고려를 세운 왕과 조선을 세운 왕이 모두 후계자 선정에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는 것은 여러모로 기묘한 우연이라고 볼 수 있다.


3.4.1. 호족 왕규[편집]


왕규광주 호족이자 태조 제15비 광주원부인 왕씨(廣州院夫人 王氏), 제16비 소광주원부인 왕씨(小廣州院夫人 王氏), 혜종 제2비 후광주원부인 왕씨(後廣州院夫人 王氏)의 아버지로 태조와 혜종 모두의 장인이자 왕씨 성을 받을 정도로 능력있는 문신이었다[14].

염상은 축성쪽으로 많은 활약을 한 무장으로, 홍유, 배현경, 신숭겸 등 당시 거의 대부분 사망한 개국 1등 공신들의 다음 서열인 2등 공신이었다.

박수문패서 호족인 평주의 호족이자 제27비 월경원부인 박씨(月鏡院夫人 朴氏)의 아버지로 외척이었으며, 아버지 박지윤은 제25비 성무부인 박씨(聖茂夫人 朴氏), 박수경은 제28비 몽량원부인 박씨(夢良院夫人 朴氏)의 아버지였다.

즉 만일 이들이 태조 왕건이 정한 혜종의 후견세력이라면 중앙의 패서 호족과 지방 호족은 물론 개국 공신이나 외척에 문•무 신료까지 모두를 어느 정도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정종-광종만큼은 아니더라도 나쁘지는 않은 조합이었다.

혜종의 혼인도 나름대로 신경을 쓴 편이었다. 태조가 딸 둘을 들인 광주 호족 왕규의 딸을 혜종의 두 번째 왕비로 삼게 하고, 제3비 청주원부인 김씨(淸州院夫人 金氏)의 집안 청주 김씨(淸州 金氏)는 건국 초기 반란을 종종 일으켜 왕건이 직접 민심 수습을 했으며, 신명순성왕태후 유씨의 충주 유씨(忠州 劉氏)와 더불어 호서의 유력 집단이었다. 당장 조선시대의 지명이기는 하지만, 충청도가 충주와 청주 일대에서 따온 명칭이라는 점에서 호서지역 내의 세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정종 제3비 청주남원부인 김씨(淸州南院夫人 金氏)와 자매 관계로 정종과 인척으로 엮이게 만들었다. 제4비 궁인 연씨(宮人 連氏)는 신라의 중심지인 경주 호족의 딸로 후광주원부인을 통해 혜종의 배경을 공고히 하는 것과 동시에 청주원부인으로 충주 유씨와 정종을 견제하고, 궁인 연씨는 또 다른 유력 세력인 신라계 포섭에 사용했다.

태조 사후 일찍 사망한 것인지 아니면 왕규의 난에 동반으로 휩쓸린 것인지는 모르지만, 위의 기록 이후로 행적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염상을 제외하더라도, 왕규는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혜종, 박술희와 갈등을 벌이다가 빈틈을 보임으로써 결국 혜종이 몰락할 계기를 제공하며, 자신 역시도 정종과 왕식렴에 의해 살해당했고, 박수문은 혜종, 왕규, 박술희 등에 대해 불만이 있어 반대편에 합류한 것인지 아니면 누이와 딸, 조카 등을 왕건의 부인으로 들일 수 있을 만큼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인지, 왕식렴과 친분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패서 호족 출신이어서 제거가 안 된 것인지는 몰라도 정종이 즉위한 후에도 동생인 박수경과 축성 작업을 참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볼 때, 혜종 사후에도 생존해 있었음이 확인되었으니... 결국 어떤 식으로든 간에 적통인 혜종을 통해 후사를 이어가려한 왕건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지극한 정.[2] 사실 정확히 중앙과 지방 간의 차이 없이 평등한 관리 채용이 시작된 것은 태조의 업적이라기보단 과거제가 도입된 제4대 광종 시기부터다. 이전에는 지방의 독자적인 힘을 바탕으로 고려의 중앙 정계로 진출, 관직을 하사받아 권력을 나누었으며 그 세가 왕을 위협할 정도로 막강해진 탓에 혜종과 정종 시기에는 호족들의 알력 다툼이 표면화되었다. 광종 대 들어서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의 도입을 통해 호족들의 힘을 빼놓는 한편 공포 정치를 통해 대다수의 호족들을 정계에서 몰아내면서 비로소 실질적인 중앙과 지방 간의 기회 평등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지 않았다면 광종의 시행도 불가능했을 것이기에 근본적인 요인은 왕건이 만들어 낸 것이 맞다.[3]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배경도 대몽 항쟁과 원 간섭기라는 시기에서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단, 대몽 항쟁을 계기로 한민족 의식이 완성되었다는 종래의 설이 사실이라면 한민족 의식을 태조가 100% 이루지 못한 것이 된다. 물론 통일을 이룬 뒤 7년 뒤에 사망한 태조가 이것을 완전히 이루고 가는건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한민족 의식의 계기를 만들어낸 것만으로 큰 의의가 있는 업적이다.[4] 본관이 철원 최씨로 철원 최씨는 최치원을 시조로 하는 경주 최씨에서 분파된 본관으로 신라계라 할 수 있으며, 본인의 고향으로 보아도 구 백제령이었던 충남 홍성이다.[5] 본관이 한산 이씨로 지금의 충남 남부 지역으로 당연히 백제계이며, 태어난 고향으로 보면 경북 영덕군에서 태어나서 신라계도 성립된다.[6] 본관이 연일 정씨로 연일은 포항의 이칭으로서 경주의 바로 윗동네이므로 당연히 신라계이다.[7] 고려 중기의 천재 시인 정지상과 더불어 고려 왕조 최고의 대문학가로 명나라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던 이숭인의 경우, 본관은 성주 이씨로 성주는 경북 대구 근처에 있는 지역으로 당연히 신라계이다.[8] 관음포대첩의 영웅이자 고려 말 왜구들이 최영, 이성계와 더불어 두려워한 대표적인 고려 명장으로 그의 본관은 하동 정씨이다. 하동은 경상남도에 위치해 있으니 당연히 그는 옛 신라계이다. 태어난 고향으로 보면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서 백제계도 성립된다.[9]동국통감》에만 나오는 대량원부인은 신성왕태후의 궁호라는 설이 유력하다.[10] 경종과 헌애왕후는 부부 겸 친사촌 겸 외사촌 겸 이종사촌 겸 고종사촌이라는 기가 막힌 관계를 자랑한다. 이는 경종과 헌애왕후 자매의 부모들 모두가 태조의 자식들이기 때문. 심지어 경종의 어머니인 대목왕후와 헌애왕후의 아버지인 대종은 부모가 같은 친남매다.[11] 안 알려져서 그렇지 근친혼의 대명사로 유명한 스페인 합스부르크도 이들에 미치지는 못한다. 선덕여왕(제27대)의 남편 음갈문왕은 숙부 김국반이나 김백반이라는 설이 있고, 진성여왕(제51대)과 놀아났다는 숙부 김위홍도 실제로는 정식 남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보다 더한 근친혼을 한 나라는 신격화로 인한 신성혼(神聖婚) 때문에 남매혼이 흔했던 고대 이집트 정도 뿐이다.[12]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 달리 박씨, 석씨, 김씨, 금관가야 김씨는 모두 박 성(姓)의 안에 있는 지파로 간주되었지 다른 성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고대에는 성과 씨가 별개의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석씨는 데릴사위로 편입되었으며, 김씨는 성한왕의 귀화로 편입되었고, 금관가야 김씨는 항복하면서 전(前) 왕실로서 예우하기 위해 왕족이 되었다. 성의 시조가 해모수부여, 고구려, 백제 왕실은 해씨, 고씨, 부여씨로 씨가 다르지만 중국 기록에 따르면 같은 시조라서 성은 같았다고 한다. 백제 초기 루() 돌림, 고이왕통, 초고왕통이 돌아가면서 왕위를 이어받은 것이 밝혀진 지금도 이들이 부여-고구려계이기에 당대에 일계로 간주될 수 있던 것이다.[13] 결국 광종의 대숙청이 필요했던 가장 근본 원인은 왕건에게서 비롯된다.[14] 원래 왕규는 양근 함씨(楊根 咸氏)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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