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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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태조를 추대한 네 공신 중 한 명이다.
경주 배씨(慶州裵氏)의 중시조이다. 배씨는 삼국사기 신라 건국기사에 의하면 본래 고조선 유민으로 고조선이 한나라에 멸망한 이후 경주 지역으로 남하해서 신라를 건국한 6촌 중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의 촌장 배지타의 후손이다. 그러나 신라시대 배씨의 계보는 기록 실전으로 상고할 수 없어 고려 개국공신인 배현경을 중시조로 삼아서 계보를 잇고 있다. 모든 관향이 배현경의 후손을 자처하고 족보도 통합해서 간행하고 있어 실질적인 모든 배씨의 시조다.
2. 약력[편집]
3. 생애[편집]
남북국 시대 태봉의 수도인 철원 지역에서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추대해 고려를 건국한 공을 세운 고려의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936]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초명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백옥삼(白玉三), 『고려사(高麗史)』에 백옥삼(白玉衫)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홍술백옥삼능산복사귀'로 붙여서 나오기에 잘못 끊어읽어 '백옥'으로 표기한 번역본도 존재하지만 고려사에는 분명 배현경의 아명은 백옥삼, 신숭겸의 아명은 능산으로 나와 삼국사기에 기록된 아명을 어떻게 끊어읽어야 하는지 명확하다.
군졸 출신으로서 남다른 담력을 기반으로 전공을 쌓아 궁예(弓裔) 휘하에서 뛰어난 무예 실력을 자랑하며 전장에서 수많은 공을 세워 마군장군까지 승진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궁예가 황후와 태자까지 살해하는 등 공포정치를 일삼자 918년 6월 홍유(洪儒)·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과 모의하여 왕건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였다. 왕건은 즉위하여 고려를 건국한 후에 배현경을 비롯한 네 장군의 공훈을 표창하여 개국1등공신으로 삼았다
고려 건국 후 배현경은 태조 왕건에게 천도(遷都)를 건의했다.삼한(三韓)이 분열된 이후 도적의 무리가 다투어 봉기하자, 지금의 왕(궁예)이 용맹을 떨쳐 크게 호령하여 마침내 초적(草寇)을 평정하고 세 지역으로 나누어진 나라 땅 가운데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습니다.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한지도 스물 네 해[1]
남짓 지났으나, 이제 끝을 잘 마무리하지 못하고 잔학한 짓을 너무 제멋대로 하며 형벌을 부당하게 행하여 아내와 아들을 살육하고 신료를 죽여 씨를 말리고 있습니다. 백성은 도탄에 빠져 그를 원수같이 미워하니 하나라의 걸왕(桀王)과 은나라의 주왕(紂王)의 악정도 이보다 더하지 않았습니다. 포악한 왕을 내몰고 현명한 왕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대의이니, 바라건대 공께서는 은나라와 주나라의 옛 일을 실행하소서.
왕건은 배현경의 건의를 받아들였으며 배현경을 새 도읍을 건설하는 총 책임자인 개주도찰사에 임명했고 919년(태조 2) 1월 도읍지를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겼다. 이후 배현경은 궁예의 잔당들을 소탕하는데 공을 세워 '대상행이조상서 겸 순군부령도총 병마대장'에 이르렀으며 전장에서 그의 능력을 필요로 할 때는 장군, 중앙 정부에서 그의 능력을 필요로 할 때는 각료로 활동하면서 많은 공을 세웠으며 왕건의 옆에서 보좌할 때는 잘못된 점이 있으면 항상 잘못된 것이라고 직언을 올리는 인물이었다. 그런 배현경을 왕건 역시 굳게 신뢰하였고 배현경의 직언이 있으면 문제에 대해서 잠시 생각하고 다시 결정을 내리는 모습을 이어갔다. 특히 왕건이 인사 문제에 대해서 좋게좋게 넘어가려고 하면 한치의 양보도 없이 꼬장꼬장하게 따지고 드는 모습도 보였다. 왕건이 청주 출신인 현률에게 정2품 순군낭중을 제수하려 하자 같은 청주 사람이었던 아지태가 순군의 관리로 재직하며 반역을 도모하였던 선례를 지적하고 왕건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였다.[2] 이에 급을 낮춰 야전 지휘권이 없는 병부낭중에 임명하였다.철원은 궁예의 터전입니다. 철원 도성 백성들의 주상에 대한 반감은 왕권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왕권 안정과 민심 수습을 위해 천도가 필요합니다.
말년에는 최고의 등위인 정1품 대광(大匡) 벼슬을 받았으나 고려가 통일을 한 직후인 936년에 세상을 떠났다.[3] 고려사에 따르면 배현경의 임종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왕건이 친히 배현경을 찾아가 손을 잡고 "아, 천명이로구나. 하지만 그대의 자손이 있으니 내 어찌 그대를 잊으리!"라는 말을 하였고 왕건이 손을 놓고 문을 나서자 숨을 거두었다고 하는데 태조는 어가(御駕)를 멈추고 관비(官費)로 장사를 치를 것을 명한 후에 환궁하였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성종 연간에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4. 대중매체[편집]
자세한 내용은 배현경(태조 왕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둘러보기[편집]
[1] 정식 국가로서의 후고구려-마진-태봉만 따지면 24년에 꽤 미달하지만, 그걸 넘어 궁예의 세력형성을 기준으로 하는 듯.[2] 일전에 궁예가 국호와 연호를 여러 번 바꾸면서 아지태를 비롯한 청주 세력을 전폭 기용한 일이 있었다. 당연히 왕건이 고려를 세운 이후 청주 지역 호족들은 왕건에게 비협조적인 자세로 일관했다.[3] 같은 해에 그와 함께 왕건을 옹립한 4기장 중 1명이었던 홍유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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