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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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자민당YKK.jpg
가토 고이치
야마사키 타쿠
고이즈미 준이치로[1]

1. 개요
2. 사건 전개
2.1. 원인
2.2. 과정
2.2.1. 불신임 결의안 투표 결과
2.3. 결과



1. 개요[편집]


가토의 난(加藤の乱)은 2000년, 당시 제2차 모리 내각을 무너뜨리기 위해 민주당의 모리 내각 불신임안에 찬성·결석하며 가토 고이치야마사키 타쿠를 중심으로 벌어진 자유민주당의 내란으로, 이 사건 이후 보수본류가 중심이었던 자민당의 정치 판도가 보수방류로 완전히 뒤집어지며 보수방류가 20년 넘게 자민당의 중심으로 군림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다.


2. 사건 전개[편집]



2.1. 원인[편집]


가토 고이치야마사키 타쿠는 각각 소속된 파벌을 계승해 차기 총재 후보로서 실적을 뽑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1999년 총재선에 출마하기도 전 오부치 게이조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자신이 무투표로 당선되길 원했던 오부치는 총재선 출마를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가토와 야마사키가 총재선에 출마한다 선언하자 오부치는 격노했다. 평소 온후한 인품을 지니고 있던 오부치 였으나 "그 녀석은 나를 쫒아내려 했다"라고 말하며 가토와 야마사키를 저지한다.

당시 가토는 개혁적인 이미지가 강하고 차기 총리 순위에도 항상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또 자신의 파벌인 굉지회의 회장이나 "YKK의 장남"으로 총재 후보에도 유력시한 인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비주류가 지속적으로 방해를 하고 있던 가운데 오부치가 급사하며 보수방류 모리 요시로가 총리로 선출된다.

오부치의 급사 전의 정계에서는, 가토가 포스트 오부치의 제일로서 떠오르고 있었다. 보수본류의 대표격 정치인이자 하시모토 류타로·오부치 정권 탄생에도 기여했고, 간사장 시절 신진당을 분열시키는데에 한 몫하는 등 실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가토는 총리 취임을 거부했다. YKK로서의 반 다케시타파의 원류, 미야자와 내각의 다케시타파(가네마루 신)의 영향 하에 정권이 이중적으로 운영되고 있어서 이에 반발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지율이 낮은 모리 내각으로 제19회 참원선을 실시하면 자민당이 참패할 것이 예상되고, 거기다 참의원 의석수의 과반수 분열로 여소야대 상황이 예상되고 있었다.

여기서 야마사키는 가토의 오랫동안 맹우로서 가토 정권이 설립되면 자신에게 정권이 선양되는 것이 목표였고, 언제든지 가토를 지지하게 된다.


2.2. 과정[편집]



2.2.1. 불신임 결의안 투표 결과[편집]




  • 결석(51명)
    • 자유민주당: 42명
      • 굉지회(가토파): 21명
      • 근미래정치연구회(야마사키파): 17명
      • 헤이세이 연구회(하시모토파): 2명
      • 무파벌: 2명
    • 21세기 클럽: 3명
    • 무소속의 모임: 3명
    • 민주당·무소속 클럽: 1명
    • 무소속: 2명

  • 퇴장(1명)
    • 보수당: 1명


2.3. 결과[편집]


가토의 난 이후 자민당의 정치판도는 물론 일본의 정치판도도 완전히 뒤바뀌기 시작했다. 원래 보수본류요시다 시게루-사토 에이사쿠-다나카 가쿠에이 3대에 이어 자민당의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가토의 난 이후로 YKK의 일원인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총리직에 오르고, 장기집권에 성공하면서 난 이후 아소 다로기시다 후미오를 제외한 모든 총리가 보수방류 출신 총리로 집권하며 자민당의 실세로 자리매김했다.[2] 현재 보수방류가 주장하고 있는 평화헌법 개정, 자위대 군대 전환, 보통국가 수립 등 우익-극우적인 정책도 가토의 난 이후 고이즈미 때부터 거론되어오고 있는 정책들이다.

보수본류에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우선 본류의 중심이었던 굉지회가 가토파와 호리우치파로 갈라지며 분열되었고, 야마사키의 근미래정치연구회도 야마사키의 정치적 스캔들과 소속 의원들의 지속적인 이탈 등으로 현재는 자민당 내의 최소파벌로 추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노 요헤이대용회 만큼은 분열되거나 망하지 않았는데, 애초에 고노가 대용회를 결성한 이유가 가토와 굉지회 회장 자리를 두고 서로 대립하다 가토가 회장이 되자 굉지회를 뛰쳐나와 대용회를 결성한 것이기 때문에 가토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이고, 이에 불신임안 투표 때 파벌 전체가 반대표를 던지며 살아남았으며, 대용회의 2인자였던 아소 다로도 방류파에 붙어다니며 그들과 협조했기 때문이다. 헤이세이 연구회 또한 애초에 본 갈등의 가장 기초적인 원인인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이 파벌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토의 난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의원들 대부분이 반대표를 던지며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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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이즈미는 가토의 난의 주동자도 동업자도 아니였으나, YKK의 일원으로서 가토의 난으로 수혜를 가장 많이 본 정치인으로 훗날 자신이 총리가 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 되었다.[2] 그 아소 다로 마저도 고이즈미 내각 때 주요 직책들을 역임하며 세를 불려갔고, 아베후쿠다 옆에 붙어다니며 이들의 정권 수립에 앞장섰기 때문에 그나마 총리직이라도 얻어낸 것이다. 즉 사실상 기시다 후미오를 제외한 제대로된 보수본류 총리는 없다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