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시모토 류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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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본 운수성 로고.svg 일본 운수대신
제57대
미쓰즈카 히로시

제58대
하시모토 류타로


제59대
이시하라 신타로





일본국 제82·83대 내각총리대신
하시모토 류타로
橋本龍太郎 | Hashimoto Ryūtarō

파일:橋本龍太郎.jpg
출생
1937년 7월 29일
도쿄부 도쿄시 시부야구 (現 도쿄도)
사망
2006년 7월 1일 (향년 68세)
도쿄도 신주쿠구 국립국제의료연구센터
재임기간
제82대 내각총리대신
1996년 1월 11일 ~ 1996년 11월 7일
제83대 내각총리대신
1996년 11월 7일 ~ 1998년 7월 30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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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부친 하시모토 료고
친모 하시모토 하루코
계모 하시모토 마사
형제
이복동생 하시모토 다이지로[1]
배우자
하시모토 쿠미코
자녀
차남 하시모토 가쿠
총 2남 3녀
친인척
사촌형 하시모토 아키라
며느리 지미 하나코
학력
오타구립 덴엔초후 소학교 (졸업)
아자부 중학교 (졸업)
아자부 고등학교 (졸업)
게이오기주쿠대학 법학부 (정치학 / 학사)
정당

지역구
오카야마 4구
의원 선수
14 (중)
의원 대수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약력
구레하방적주식회사 직원
니시무라 에이이치 비서관
중의원 의원
제57대 후생대신
제58대 운수대신
제29대 자유민주당 간사장
제93-94대 대장대신
제39대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제59대 통상산업대신[2]
제17대 자유민주당 총재
제82·83대 내각총리대신
제42대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
초대 규제개혁담당대신
초대 오키나와·북방대책담당대신

1. 개요
2. 생애
2.1. 유년 시절
2.2. 정치 활동
2.3. 총리 재임기
2.4.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세계문화유산 등록 당시 미국과 일본의 신경전
2.5. 퇴임 후
2.6. 한일 관계
3. 선거 이력
4. 기타



1. 개요[편집]


일본정치인, 82/83대 총리. 도쿄 시부야구 출신.


2. 생애[편집]



2.1. 유년 시절[편집]






파일:하시모토가 가족사진.jpg

하시모토가 가족사진
1937년 도쿄 시부야에서 당시 대장성 관료였던 하시모토 료고(橋本龍伍, 1906~1962)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료고는 일개 맥주공장 효모기술자에서 대일본맥주 상무이사로 출세하여 가계를 일으킨 부자의 아들로 유복한 가정환경이었으나 어린 시절부터 다리가 불편해서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지만, 의지만은 강하여 20대에 구제 제1고등학교에 진학하였고 도쿄제국대학을 거쳐 대장성에 입성하였다.

료고는 첫 아내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역임한 오노 로쿠이치로의 딸 하루코를 맞아 1937년 장남 류타로가 태어났지만 하루코는 류타로 출생 5개월만에 젊은 나이에 병으로 요절하였다. 이후 류타로가 7세이던 때 두 번째 아내로 정치가 와카미야 사다오의 딸 마사를 들여 1947년 차남 다이지로가 태어났다. 나이 터울이 10살이 났다.

류타로는 덴엔초후 초등학교를 거쳐 명문 중고일관교인 아자부 중고등학교[1]에 입학한다. 중학 시절 성적이 최하위였기에 정치가 아들이 뒷문으로 들어온 거라고 여겨졌다고 한다. 아자부 고등학교 시절엔 산악부에서 활동하였고 성적이 중간 정도로 올라왔으며, 1956년 게이오기주쿠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검도에 매진했으며, 1960년 대학을 졸업하고 쿠레하 방적에 입사한다. 사회인 3년차인 1962년 아버지 료고가 급사하였다. 본래 아버지가 의중에 두던 후계자는 동생 다이지로였고 류타로 역시 정계에 나아갈 생각이 없었다. 허나 당시 동생은 고등학생이었고, 결국 아버지와 친분이 깊었던 사토 에이사쿠의 지명으로 후계자가 된다. 이후 정계 입문 준비를 위해 니시무라 에이이치 후생대신의 비서로 근무하며 후생성 출입기자들이 감탄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한다. 그와 후생성의 연관이 깊은데 평생 장애로 다리를 절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후생족의원이 되었을 정도이다.


2.2. 정치 활동[편집]


1963년 제30회 중의원 총선거에 부친 하시모토 료고의 뒤를 이어 舊 오카야마현 제2구에 출마하여 당선됨으로서 본격적인 정치인생을 시작하였다. 당시 26세로 당연히 해당 선거 최연소 당선자였으며 정치 역정을 매우 일찍 시작하였다.[2] 당선 동기는 동갑내기이며 역시 26세에 최연소 당선된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가 있다.


파일:하시모토 류타로 26세.jpg

26세의 나이로 중의원 총선거에서 첫 당선
외조부 와카미야 사다오와 아버지 하시모토 료고가 모두 국회 의원을 지냈기에 하시모토 류타로는 3대째 세습정치인이고 그의 차남 하시모토 가쿠가 현재도 오카야마현 제4구에서 하시모토 가문의 정치를 이어가는 중이다.

동생 다이지로 역시 정치인으로 연고도 없는 고치현에서 1991년부터 2007년까지 4선 현지사를 지냈다. 그의 홈페이지에 가면 본인뿐 아니라 아버지 료고, 어머니, 형 류타로까지 온가족의 인생 역정을 다 적어놓았는데 그 자신의 이야기보다 분량이 훨씬 많다. 가족이 출처인 믿을만하면서도 자세하고 충실한 사료가 될듯. 그의 홈페이지

친척 중 사촌형인 하시모토 아키라(橋本明)는 아키히토 덴노와 가쿠슈인 동창이자 친구이다. 어찌나 친했던지 고3 때 시종들 몰래 황태자와 나가서 놀았다가 황태자가 실종된 줄 알고 온 황실이 발칵 뒤집어져 나중에 동궁대부와 경찰에 엄청나게 깨졌던 일도 있을 정도라고. 외조부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낸 오노 로쿠이치로(大野緑一郎)이다.

1970년 사토 에이사쿠 내각에서 후생정무차관에 임명된 후 오히라 마사요시, 나카소네 야스히로, 가이후 토시키,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에서 여러 부처의 국무대신을 지냈다.

1990년 대장대신 시절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를 끝장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부동산 대출 총량규제를 실시하여 잃어버린 10년을 열어버린 인물이다. 물론 거품 해소를 위해서 꼭 필요한 조치였다는 것에는 모두 동의하지만, 여러가지 정책수단과 적절한 규제를 조합해서 연착륙을 유도했어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당시 하시모토의 정책은 쉽게 말해서 은행들한테 "더 이상 대출하지마!!!"하고 윽박지르는 식이였는데, 이게 시장에 잘못된 신호를 보냈다는 비판이다.


2.3. 총리 재임기[편집]


자민당 위주의 내각을 다시 열었으며, 1995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하여 당시 가장 큰 라이벌이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후생대신을 큰 표차로 따돌리고 총재에 당선되었으며 이어 1996년 1월 무라야마 내각 총사퇴로 82대 수상이 되었다.

96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오자와 이치로신진당을 물리치고 사회민주당, 신당 사키가케와 합쳐 연립여당의 안정 과반수 확보에 성공하며[3]비교적 강한 리더십을 발휘했으며 이후 행정개혁(정부부처 개편), 경제구조개혁, 재정구조개혁, 금융구조개혁, 사회보장개혁, 교육개혁 등 6개 개혁을 당면과제로 삼고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개혁이 효과가 없지는 않아서 1995년 2.7% 1996년에 3.1%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경제가 버블붕괴의 영향에서 어느정도 회복되기 시작했는데 하시모토 류타로는 이를 내수시장이 정상궤도로 돌아온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1997년 4월 소비세를 3%에서 5%로 인상했다. 그러나 재정적자를 벌충하겠다는 생각으로 진행한 소비세 인상의 결과는 망했다. 소비세가 인상되자 소비는 급속히 위축되었고 거기에 더해 아시아 외환위기로 일본의 주요 금융회사들이 잇따라 파산하면서 잃어버린 10년이 연장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경기침체가 다시 시작되며 하시모토 류타로의 지지율은 지속적으로 하강 곡선을 달렸고 1998년 7월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44석을 확보하는 참패를 거두며 물러났다. 사실 소비세 인상(3%→5%, 1997년 4월부터 적용)은 그의 결정적인 실수였다. 당시는 80년대 후반 버블경제의 몰락이 이미 중장기적인 경기침체 수준으로 악화된 시점이었다. 일단 부동산, 주식가격의 폭락으로 인해 국민들은 현금성 자산 저축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래서 저축만 하고 소비를 좀처럼 하지 않다보니 가처분 소득이 원활하게 순환하지 못했는데, 이게 경기 침체 단계로 진입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소비 심리를 촉진할만한 부양책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오히려 소비세를 올려버리니 소비 심리가 위축되어버린 것이다. 소비심리 진작을 위해 노력하던 전임 정권들의 노력[4]에 찬물을 끼얹은 꼴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총 재임기간은 2년 7개월로 90년대부터 등장한 총리 가운데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다음으로 긴 재임기간.

일본의 주식가격 변화

하시모토 류타로 임기동안 일본경제는 주가하락, 실업률 폭등과 함께 아시아 금융위기를 발생시킨 주범이라는 지탄을 받았고 그로 인해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 때부터 시작된 미국 빌 클린턴 정부의 시장경제 개방에 대한 압력이 절정에 이르렀다. 이에 분노한 하시모토 내각은 미국과 철저하게 대립각을 세웠고 미일관계는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최악으로 험악한 관계를 보였다.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80196-00_01414821.jpg
미국, 차기 수상 선임 앞두고 일본 때리기 나서

미국과 미 언론들이 하시모토 류타로의 총리직 사임을 메인뉴스로 보도했을 정도로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하시모토 류타로 시절 최악의 갈등을 겪었다.


2.4.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세계문화유산 등록 당시 미국과 일본의 신경전[편집]


1996년 12월, 히로시마 원폭돔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자, 하시모토 류타로 당시 일본 총리는 "'지금까지 전쟁에 관련된 것이 문화유산으로 한번도 등록되지 않았다는데 이미 등록된 것(아우슈비츠)이 있는 이상 히로시마가 등록되는 것은 마땅하다"'며 환영의사를 표했다. 당시 미국과 중국 등은 일본의 전쟁 책임 때문에 문화유산 등록에 반대의사를 표해 묘한 신경전이 오가기도 했다.[5][6]

2.5. 퇴임 후[편집]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04082918202540004200-001.jpg
이후 2001년 다시 한번 총리직에 도전하였으나 파벌 정치의 종식을 기치로 내건 고이즈미 준이치로에게 패하면서 꿈을 접었다. 그 이후 2004년 불법자금 문제로 압수수색을 당하고 검찰에 소환될 뻔 하는 굴욕을 겪었다. 이로서 당내 최대계파인 헤이세이 연구회는 쇠퇴를 시작했다.

파일:external/news.chosun.com/200607020371_01.jpg
2005년 지역구에서 은퇴하고 전국구 공천을 받지 못하면서 정계에서 은퇴하였고, 2006년 지병인 대장 질병으로 도쿄도 신주쿠구 국제의료센터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68세. 다만, 그의 지역구는 차남인 하시모토 가쿠(橋本岳, 1974~)가 물려받았는데, 하시모토 가쿠는 44, 45회 중의원 선거에서는 지역구에서 낙선하였으나, 46회부터 3회 연속 당선되어 (석패율 비례대표 초선을 포함해) 4선 의원이 된다.

일본 정치권에서 최초로 "작은 정부"론을 도입한 인물로, 고이즈미가 그 정책의 맥을 잇는다고 평가받는다. # 특히 본인이 대장대신을 역임했음에도, 부처 중의 부처로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하던 대장성 분할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결국 대장성은 재무성과 금융청으로 분할되고, 예산기능은 경제재정자문회의로 넘어갔다.[7][8]

2.6. 한일 관계[편집]


파일:김영삼과 하시모토 류타로.jpg파일:김대중과 하시모토 류타로.jpg
1996년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으며[9][10], 후임인 김대중 대통령과도 1998년 ASEM에서 회담한 바 있다.

파일:VN19962153-00_01055005.jpg
임기 초반부터 독도 영유권 문제, 한일어업협정 체결 등으로 마찰이 있었으며 반일 감정이 전 내각 때보다 세졌으나, 한일월드컵 공동개최 발표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 두 정상은 서로의 공동개최를 축하하며 한일 양국 두나라가 2002년 월드컵 결승전까지 올라가 멋진 맞대결을 펼치자는 덕담이 오가긴 했다.[11] [12]

그 외에 1998년 아키히토 천황의 영국 방문이 성사 될 수 있었던데에는 당시 하시모토 총리가 영국군 포로 학대 문제에 대해 사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라는 영국측의 공식 외교문서가 2021년 12월에 공개되기도 했다. #[13]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3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 오카야마현 2구


74,564 (18.9%)
당선 (2위)
초선
1967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3,838 (16.0%)
당선 (4위)
재선
1969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7,489 (17.7%)
당선 (1위)
3선
1972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5,489 (14.2%)
당선 (3위)
4선
1976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1,157 (12.4%)
당선 (5위)
5선
1979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4,395 (20.1%)
당선 (1위)
6선
1980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9,964 (20.9%)
당선 (1위)
7선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5,647 (16.5%)
당선 (2위)
8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32,067 (26.2%)
당선 (2위)
9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77,693 (32.0%)
당선 (1위)
10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50,714 (28.4%)
당선 (1위)
11선[14]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오카야마 4구
152,595 (68.0%)
당선 (1위)
12선
2000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8,888 (65.6%)
당선 (1위)
13선
2003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4,653 (56.5%)
당선 (1위)
14선


4. 기타[편집]


파일:external/file2.cbs.co.kr/01204632031_60600020.jpg
검도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하시모토 시절의 자민당 선거 광고 중에 검도 대련하는 컨셉의 광고가 있다.


총리 재임 중에는 우익 성향이라는 평을 들었던 인물이다. 1996년 독도에 선박 접안 시설을 건설하려 했을 때, 영유권 문제를 거론했기 때문. 이외에는 중도 성향에 가까운 인물이다.

동아리 후배 중에 훗날 자민당 총재가 되는 다니가키 사다카즈가 있었다고 한다.

비서 중에 에다 겐지가 있었다.

가와이 가쓰유키, 가와이 안리 부부의 중매를 서줬다. 아들 가쿠가 안리의 친구였기 때문.

중국인 애인을 뒀는데 중국인 스파이란 소문이 돌았다. 하시모토 측에서는 불륜은 인정했으나 해당 여성은 중국 대사관에서 만난 사이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일본 정부 역사상 가장 여성 편력이 화려했던 총리들 중 하나로 유명했기 때문에 사후 14년이 지난 지금도 평판이 영 좋지 않다. 심지어 중국인 애인을 뒀던 사건이랑 맞물려서 아예 하시모토 류타로 본인이 말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위해 일하는 상태였다고 믿는 사람들까지 있다. 물론 고인드립이다. 익명성이 보장되어 있는 인터넷에서 주로 도는 소리다.

여성 편력이 화려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준수한 외모에다 매력도 갖춰서 한때 이시하라 신타로, 고노 요헤이와 함께 여성 지지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정치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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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이세이 고등학교, 무사시 고등학교와 더불어 도쿄의 3대 사립 명문고로 통하는 학교로, 스즈키 슌이치, 요사노 가오루, 다니가키 사다카즈, 히라누마 다케오, 후쿠다 야스오, 야마다 다로, 쓰무라 게이스케 등이 여기 고등학교 출신이다.[2] 이로 인해 웬만한 의원들보다 당연히 선배가 될 수 밖에 없었는데, 싸가지는 좀 없었던 것 같다. 거물 경찰관료 출신으로 경찰청 장관과 내각관방부장관을 지내고 중의원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고토다 마사하루(後藤田正晴) 전 부총리가 처음 당선됐을 당시, 고토다보다 23살이 어린 하시모토가 정계에서는 한참 후배인 그에게 '고토다 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3] 물론 전체적으로 사회민주당과 신당 사키가케가 지지층을 민주당과 공산당, 신진당 등에 빼았기고, 선거에서 망했기 때문에(사민당 30석->15석, 신당 사키가케 9석->2석) 6석, 의원 정수 감축을 감안해도 의석을 많이 늘린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당초 신진당과 접전이 예상되었던것보다는 많이 선전했다.[4] △9조엔 규모의 종합경기대책 발표(1992.8., 국채 및 지방채 발행폭 확대를 통한 공공사업 실시, 재정투융자 자금 추가방출, 주택취득에 대한 융자확대) △엔고 진행 저지를 위한 재할인율 인하(1993.9.) 등[5] 일 원폭돔 세계문화유산 지정, 미국 중국 반성없이 피해강조 우려 한겨레[6] 일 원폭돔과 전쟁범죄 동아일보[7] 특기할만한 점은 동시기 한국의 김영삼은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을 재정경제원으로 통합하였다는 점.[8] 이후 재정경제원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재임 당시 국무총리 직속 기획예산처와 재정경제부로 다시 분리되었다가 기획재정부로 통합되었고, 금융청에 해당하는 금융위원회는 금융감독위원회 등 전신에 기획재정부의 금융 기능을 떼어 붙이는 식으로 재편되었다. 요약하자면 일본은 재무(국고기능)-예산-금융을 모두 분리해 운영하고 있으나, 한국은 재무와 예산은 1개 부처에서, 금융은 별도로 운영하고 있는 것.[9] 청와대 전직 사진사에 따르면 둘이 만찬을 가진후 김영삼을 형님으로 부르기로 했었단다.[10] 김영삼 대통령은 일본어가 유창한 편으로 이런 언어적 이점을 바탕으로 친교 관계를 맺었을 개연성이 있다.[11] 김대통령.하시모토 일본 총리, 월드컵 공동 개최 입장 표명[12] 김대통령 하시모토 월드컵 결승전서 만나 멋진 맞대결 펼치자[13] 사실 결정적이라고 보긴 어려운 것이 히로히토고준 황후는 이전에 엘리자베스 2세의 초청을 받아 영국 국빈방문을 한 적이 있다. 타이밍을 앞당겼다라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14] 일본 중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