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시모토 류타로 (r2021030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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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카타 마사요시
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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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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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모토 류타로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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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82-83대 내각총리대신
하시모토 류타로
橋本龍太郎 | Hashimoto Ryūtarō

출생
1937년 7월 29일
도쿄부 도쿄시 시부야구 (現 도쿄도)
사망
2006년 7월 1일 (향년 68세)
도쿄도 신주쿠구 국립국제의료연구센터
재임기간
제82대 내각총리대신
1996년 1월 11일 ~ 1996년 11월 7일
제83대 내각총리대신
1996년 11월 7일 ~ 1998년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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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부친 하시모토 료고
친모 하시모토 하루코
계모 하시모토 세이
형제
이복동생 하시모토 다이지로
배우자
하시모토 쿠미코
자녀
차남 하시모토 가쿠
친인척
사촌형 하시모토 아키라
학력
게이오기주쿠대학 (법학 / 학사)
정당


지역구
오카야마 4구
의원 선수
14 (중)
의원 대수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약력
쿠레 방직 주식회사 직원
니시무라 에이이치 비서관
중의원 의원
제57대 후생대신
제58대 운수대신
제25대 자유민주당 간사장
제93-94대 대장대신
제39대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제59대 통상산업대신
제17대 자유민주당 총재
제18대 부총리
제82-83대 내각총리대신
제42대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
초대 규제개혁담당대신
초대 오키나와·북방대책담당대신

1. 소개
2. 생애
3. 선거 이력
4. 여담



1. 소개


일본정치인, 82/83대 총리. 도쿄 시부야구 출신.

2. 생애


파일:external/www.weblio.jp/souri82.jpg

대장성 관료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자부 고등학교[1]를 거쳐 게이오기주쿠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정치인들의 비서진으로 활동하다가, 1963년 정치인이었던 부친 하시모토 류고(橋本龍伍, 1906~1962)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중의원 구 오카야마현 제2구에 출마하여 당선됨으로서 본격적인 정치인생을 시작하였다. 즉, 2세 정치인. 사촌 형인 하시모토 아키라(橋本明)는 아키히토 덴노와 가쿠슈인 동창이자 친구이다. 어찌나 친했던지 고3 때 시종들 몰래 황태자와 나가서 놀았다가 황태자가 실종된 줄 알고 온 황실이 발칵 뒤집어져 나중에 동궁대부와 경찰에 엄청나게 깨졌던 일도 있을 정도라고.

외조부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낸 오노 로쿠이치로(大野緑一郎)이다.

1970년 사토 에이사쿠 내각에서 후생정무차관에 임명된 후 오히라 마사요시, 나카소네 야스히로, 가이후 토시키,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에서 여러 부처의 국무대신을 지냈다.

1990년 대장대신 시절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를 끝장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부동산 대출 총량규제를 실시하여 잃어버린 10년을 열어버린 인물이다. 물론 거품 해소를 위해서 꼭 필요한 조치였다는 것에는 모두 동의하지만, 여러가지 정책수단과 적절한 규제를 조합해서 연착륙을 유도했어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당시 하시모토의 정책은 쉽게 말해서 은행들한테 "더 이상 대출하지마!!!"하고 윽박지르는 식이였는데, 이게 시장에 잘못된 신호를 보냈다는 비판이다.

자민당 위주의 내각을 다시 열었으며, 1995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하여 당시 가장 큰 라이벌이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후생대신을 큰 표차로 따돌리고 총재에 당선되었으며 이어 1996년 1월 무라야마 내각 총사퇴로 82대 수상이 되었다.

96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오자와 이치로신진당을 물리치고 사회민주당, 신당 사키가케와 합쳐 연립여당의 안정 과반수 확보에 성공하며[2]비교적 강한 리더십을 발휘했으며 이후 행정개혁(정부부처 개편), 경제구조개혁, 재정구조개혁, 금융구조개혁, 사회보장개혁, 교육개혁 등 6개 개혁을 당면과제로 삼고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개혁이 효과가 없지는 않아서 1995년 2.7% 1996년에 3.1%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경제가 버블붕괴의 영향에서 어느정도 회복되기 시작했는데 하시모토 류타로는 이를 내수시장이 정상궤도로 돌아온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1997년 4월 소비세를 3%에서 5%로 인상했다. 그러나 재정적자를 벌충하겠다는 생각으로 진행한 소비세 인상의 결과는 망했다. 소비세가 인상되자 소비는 급속히 위축되었고 거기에 더해 아시아 외환위기로 일본의 주요 금융회사들이 잇따라 파산하면서 잃어버린 10년이 연장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경기침체의 재개로 하시모토 류타로의 지지율은 하강곡선을 달렸고 1998년 7월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44석을 확보하는 참패를 거두며 물러났다. 사실 소비세 인상(3%→5%, 1997년 4월부터 적용)은 그의 결정적인 실수였다. 당시는 80년대 후반 버블경제의 몰락이 이미 중장기적인 경기침체 수준으로 악화된 시점이었다. 일단 부동산, 주식가격의 폭락으로 인해 국민들은 현금성 자산 저축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래서 저축만 하고 소비를 좀처럼 하지 않다보니 가처분 소득이 원활하게 순환하지 못했는데, 이게 경기 침체 단계로 진입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소비 심리를 촉진할만한 부양책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오히려 소비세를 올려버리니 소비 심리가 위축되어버린 것이다. 소비심리 진작을 위해 노력하던 전임 정권들의 노력[3]에 찬물을 끼얹은 꼴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총 재임기간은 2년 7개월로 90년대부터 등장한 총리 가운데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다음으로 긴 재임기간.

일본의 주식가격 변화
하시모토 류타로 임기동안 일본경제는 주가하락, 실업률 폭등과 함께 아시아 금융위기를 발생시킨 주범이라는 지탄을 받았고 그로인해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때부터 시작된 미국 빌 클린턴 정부의 시장경제 개방에 대한 압력이 절정에 이르렀다. 이에 분노한 하시모토 내각은 미국과 철저하게 대립각을 세웠고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는 2차대전 이후로 최악으로 험악한 관계를 보였다.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80196-00_01414821.jpg
미국, 차기 수상 선임 앞두고 일본 때리기 나서
미국과 미 언론들이 하시모토 류타로의 총리직 사임을 메인뉴스로 보도했을 정도로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하시모토 류타로 시절 최악의 갈등을 겪었다.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04082918202540004200-001.jpg
이후 2001년 다시 한번 총리직에 도전하였으나 파벌 정치의 종식을 기치로 내건 고이즈미 준이치로에게 패하면서 꿈을 접었다. 그 이후 2004년 불법자금 문제로 압수수색을 당하고 검찰에 소환될 뻔 하는 굴욕을 겪었다. 이로서 당내 최대계파인 하시모토파는 쇠퇴를 시작했다.

파일:external/news.chosun.com/200607020371_01.jpg
2005년 지역구에서 은퇴하고 전국구 공천을 받지 못하면서 정계에서 은퇴하였고, 2006년 지병인 대장 질병으로 도쿄도 신주쿠구 국제의료센터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68세. 다만, 그의 지역구는 차남인 하시모토 가쿠(橋本岳, 1974~)가 물려받았는데, 하시모토 가쿠는 44, 45회 중의원 선거에서는 지역구에서 낙선하였으나, 46회부터 3회 연속 당선되어 (석패율 비례대표 초선을 포함해) 4선 의원이 된다.

일본 정치권에서 최초로 "작은 정부"론을 도입한 인물로, 고이즈미가 그 정책의 맥을 잇는다고 평가받는다. # 특히 본인이 대장대신을 역임했음에도, 부처 중의 부처로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하던 대장성 분할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결국 대장성은 재무성과 금융청으로 분할되고, 예산기능은 경제재정자문회의로 넘어갔다.

파일:김영삼과 하시모토 류타로.jpg파일:김대중과 하시모토 류타로.jpg
1996년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으며, 후임인 김대중 대통령과도 1998년 ASEM에서 회담한 바 있다.

파일:VN19962153-00_01055005.jpg

1996년 한일월드컵 공동개최 발표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 두 정상은 서로의 공동개최를 축하하며 한일 양국 두나라가 2002년 월드컵 결승전까지 올라가 멋진 맞대결을 펼치자는 덕담이 오가긴 했다..[4] [5]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3
제30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2구)
자유민주당
74,564 (18.9%)
당선 (2위)
초선
1967
제31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2구)
자유민주당
63,838 (16.0%)
당선 (4위)
재선
1969
제32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2구)
자유민주당
77,489 (17.7%)
당선 (1위)
3선
1972
제33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2구)
자유민주당
65,489 (14.2%)
당선 (3위)
4선
1976
제34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2구)
자유민주당
61,157 (12.4%)
당선 (5위)
5선
1979
제35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2구)
자유민주당
104,395 (20.1%)
당선 (1위)
6선
1980
제36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2구)
자유민주당
109,964 (20.9%)
당선 (1위)
7선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2구)
자유민주당
85,647 (16.5%)
당선 (2위)
8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2구)
자유민주당
132,067 (26.2%)
당선 (2위)
9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2구)
자유민주당
177,693 (32.0%)
당선 (1위)
10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2구)
자유민주당
150,714 (28.4%)
당선 (1위)
11선[6]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4구)
자유민주당
152,595 (68.0%)
당선 (1위)
12선
2000
제42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4구)
자유민주당
128,888 (65.6%)
당선 (1위)
13선
2003
제43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4구)
자유민주당
104,653 (56.5%)
당선 (1위)
14선


4. 여담


파일:external/file2.cbs.co.kr/01204632031_60600020.jpg
검도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하시모토 시절의 자민당 선거 광고 중에 검도 대련하는 컨셉의 광고가 있다.


사실 하시모토 류타로도 총리 재임 중에는 우익 성향이라는 평을 들었던 인물이다. 1996년 독도에 선박 접안 시설을 건설하려 했을 때, 영유권 문제를 거론했기 때문.

동아리 후배 중에 훗날 자민당 총재가 되는 다니가키 사다카즈가 있었다고 한다.

비서 중에 에다 겐지가 있었다.

가와이 가쓰유키, 가와이 안리 부부의 중매를 서줬다. 아들 가쿠가 안리의 친구였기 때문.

중국인 애인을 뒀는데 중국인 스파이란 소문이 돌았다. 하시모토 측에서는 불륜은 인정했으나 해당 여성은 중국 대사관에서 만난 사이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일본 정부 역사상 가장 여성 편력이 화려했던 총리들 중 하나로 유명했기 때문에 사후 14년이 지난 지금도 평판이 영 좋지 않다. 심지어 중국인 애인을 뒀던 사건이랑 맞물려서 아예 하시모토 류타로 본인이 말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위해 일하는 상태였다고 믿는 사람들까지 있다. 물론 고인드립이다. 익명성이 보장되어 있는 인터넷에서 주로 도는 소리다.
[1] 카이세이 고교, 게이오기주쿠 고교와 더불어 일본의 명문고로 통하는 학교로, 스즈키 슌이치, 요사노 가오루, 다니가키 사다카즈, 히라누마 다케오, 후쿠다 야스오, 야마다 다로, 쓰무라 게이스케 등이 여기 고등학교 출신이다.[2] 물론 전체적으로 사회민주당과 신당 사키가케가 지지층을 민주당과 공산당, 신진당 등에 빼았기고, 선거에서 망했기 때문에(사민당 30석->15석, 신당 사키가케 9석->2석) 6석, 의원 정수 감축을 감안해도 의석을 많이 늘린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당초 신진당과 접전이 예상되었던것보다는 많이 선전했다.[3] △9조엔 규모의 종합경기대책 발표(1992.8., 국채 및 지방채 발행폭 확대를 통한 공공사업 실시, 재정투융자 자금 추가방출, 주택취득에 대한 융자확대) △엔고 진행 저지를 위한 재할인율 인하(1993.9.) 등[4] 김대통령.하시모토 일본 총리, 월드컵 공동 개최 입장 표명[5] 김대통령 하시모토 월드컵 결승전서 만나 멋진 맞대결 펼치자[6] 일본 중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