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고려 거란 전쟁)/작중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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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작중 행적
2.1. 1회
2.2. 2회
2.3. 3회
2.4. 4회
2.5. 5회
2.6. 6회
2.7. 7회
2.8. 8회
2.9. 9회
2.10. 10회
2.11. 11회
2.12. 12회
2.13. 13회
2.14. 14회
2.15. 15회
2.16. 16회
2.17. 17회
2.17.1. 해당 회차 분석
2.18. 18회
2.19. 19회
2.20. 20회
2.21. 21회
2.22. 22회
2.23. 23회
2.24. 24회
2.25. 25회
2.26. 26회
2.27. 27회
2.28. 28회
2.29. 29회
2.30. 30회
2.31. 31회
2.32. 32회(최종회)



1. 개요[편집]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의 등장인물 강감찬의 작중 행적 문서.

2. 작중 행적[편집]



2.1. 1회[편집]


역순행적 구성으로 강감찬과 거란군의 장수 소배압귀주대첩이 전개되면서 드라마가 시작된다. 강감찬은 1019년 귀주 대첩 당시인 프롤로그에서 상원수로 등장하는데, 소배압거란군에 의해 고려군 선봉이 무너지자, 2군의 모든 병사들이 혼란에 빠져서 패퇴할 위기에 놓인다. 이에 부원수 강민첨이 전열을 무너뜨린 도주병들을 베어서 군율을 세워야 패퇴를 막을 수 있다며 진언하지만, 고민하다가 혼자 앞으로 나아가서 검차를 잡고 "고려는 승리한다. 우리는 죽지 않는다." 라는 혼잣말을 작게 되뇌인다.[1]

이를 본 군사들의 사기가 올라가기 시작해 도망치려던 다른 군사들도 마음을 고치고 그를 도와 거란군에게 진격한다. 이 순간 김종현이 이끄는 고려의 중갑기병대가 나타나 거란군을 향해 돌격하고, 강감찬을 비롯한 보병들이 검차를 밀면서 돌격하는 장면으로 프롤로그가 마무리된다.


2.2. 2회[편집]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목종 재위 후반에 충주 판관으로 본격적으로 등장. 거란에 잡혀가 7년 간 타국에서 노비가 되었다가 탈출하여 고향으로 왔으나, 그보다 3년 전에 도망쳐서 거란을 피해 멀리 달아났다는 나머지 가족들을 찾으러 떠돌아 다닌 백성의 사연을 듣고 적으면서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였다. 사연을 전한 백성도 놀라 말문을 끊으면서 "이리 울어주시는 분은 처음이다."라고 말했다. 정작 본인은 "미안하네. 늙어서 그렇다네."라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이어갔다.[2]

이후 집으로 가서 그 백성에게 (사재를 털어) 쌀 한 포대를 주면서 보냈지만, 이 광경을 지켜 본 아내"쌀 한 포대면 되겠냐? 아예 세간살이 다 내놓지. 퍼줄 거면 윗사람에게 퍼주지 뭐하냐, 남들 재상 할 나이에 아직도 5품 판관[3]이니 속이 터진다, 내가 이런 사람이랑 결혼하려고 500리나 말타고 왔냐? 부모님이 원망스럽다!"라는 타박[4]을 견디다 못해 다시 관아로 돌아갔다.

이후 관아에서 김종현과 거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거란의 재침이 반드시 있을 것이고 지금은 단지 명분을 찾고 있을 뿐'이라고 단언한다.


2.3. 3회[편집]


호족을 동원해 정권을 장악하려는 김치양에 의해 지방의 사병들이 무장 태세를 갖추는 것을 김종현과 함께 지켜보고,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에 황급히 개경으로 향한다. 이 때 홀로 개경으로 향하는 것을 만류하는 김종현에게, 자신은 변란을 진압하러 가는 게 아니라 '전쟁을 막으러' 가는 것이며, "거란의 책봉을 받은 현재의 성상(목종)에게 변고가 생기면 거란에게 침공 명분을 주게 되므로 무조건 성상이 살아있어야 한다."면서 떠났다.

하지만 개경에 도착했을 땐 한 발 늦어 목종이 승하하고 대량원군이 즉위한 이후였다.


2.4. 4회[편집]


황보유의에게 그 사이의 경위를 듣고 대책을 고심하다 최항을 찾아가 거란의 침공을 막기 위해 사신을 보낼 것을 건의한다. 이에 최항은 그를 아예 예부시랑으로 조정#朝廷에 끌어들인다.[5]

조정에 돌아오고 첫 조회에서 강조가 은대와 중추원을 중대성으로 합쳐 조정의 목줄을 틀어쥐려 하자 아무 것도 모르는 현종[6] 앞에서 침묵하던 조정 신료들 사이에서 임금의 측근 역할인 은대와 중추원의 기능을 설명하며 황제의 명을 전함과 동시에 황제를 지키는 곳이니 폐지되면 안 된다며 홀로 나아와 반대한다. 이에 그를 천거한 최항에게도 적어도 말을 가려서 하고 거란에 보낼 표문을 작성하라면서 한 소리 듣는다.

거란에 보내는 사신단 표문에 목종병사했다는 내용을 넣으며 전쟁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강조에게는 중대사가 자행한 일이 전쟁의 단초이며, 자신이 직접 책임지겠다는 강조에게 '전쟁은 혼자 책임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나라 전체가 책임져야 하는 일'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이후 현종에게 직접 표문[7]을 올리고 독대하면서, 조정에서 홀로 강조에게 맞선 강감찬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현종에게 차근차근 시작하면 된다며 현종의 정치 스승 역할을 자처한다.


2.5. 5회[편집]


현종과 독대 장면이 여럿 나온다. 강조를 제거하여 전쟁의 명분을 없애보겠다는 현종의 말에 애초에 강조를 제거한다 해도 전쟁의 구실을 찾던 거란이 전쟁을 물리지 않을 것이라고 만류한다.

이후 초조하게 밖에서 기다렸는데[8], 그사이 현종의 강조 암살 시도는 실패하고, 강조가 이를 불문에 부치고 나오다가 그를 발견하곤 "퇴궐 안하고 뭐하냐?"고 묻자 어쩔 줄 몰라하다가[9] 사신의 일정을 묻는 강조에게 내일 귀국 전 알현이 있다고 일러주곤, 이후 폐하는 어떠시냐고 넌지시 현종의 안위를 걱정하는데 강조로부터 내일 정전에 드실 것이라고 답을 듣는다.

전쟁 준비 중 각 부서를 돌며 격려하던 현종의 고뇌를 들으면서 백성을 위하는 마음과 결단이 황제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며 이를 갖추셨으니 아직은 설익은 모습일지라도 장차 성군이 되실 것이라고 격려한다.[10]


2.6. 6회[편집]


거란군이 시행하는 타초곡[11]이 무엇인지 현종에게 설명한다.[12] 그 후 불안해 하는 현종에게 잠이 안 오면 개경의 사찰을 찾아가서 불공을 드리는 백성들을 위로하라는 권유를 한다. 그 권유에 따라서 절을 찾아간 현종은 가족을 사지로 보낸 백성들의 마음이 어떤지 공감하게 된다.

그런데 집에 와 보니 아내가 충주에서 개경으로 와서 식사를 차려놓고 있었다. 그래도 죽을 때는 같이 죽자는 심정으로 상경했다고. 다만 저녁 먹는 내내 아내에게 바가지를 긁힌다. 식사 중에 아내가 계속 푸념[13]을 늘어 놓자 밥맛이 떨어졌는지 숟가락을 내려 놓고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많이 먹었다면서 밥상을 물리려 하나,[14] 바로 또 밤에 배고프다고 일어나서 찬장 뒤지지 말고 빨리 다 먹으라며 잔소리를 듣는다. 그 말에 빈정 상한 표정으로 밥술을 다시 뜨자 이번에는 또 밥 먹는 거 하나는 장군감이라면서 또 구박을 받는다.[15] 죽상이 되면서도 아내 말은 잘 들으며 밥을 꼭꼭 씹어먹는 표정 연기가 일품이었던 장면.


2.7. 7회[편집]


유진을 포함한 조정의 재상단들이 몰래 가족들을 개경 밖으로 피신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대노한 현종이 유진을 질책하고, 이에 유진은 한 때 김치양의 변란 당시에 목종을 지켰던 일을 거론하며 가족 걱정 없이 폐하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라고 호소하면서 강감찬을 쳐다보는데, 강감찬 역시 고까운 표정으로 유진을 바라본다.

조회가 파한 후 강감찬은 어디 한 번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유진의 푸념에 "조정의 대신들이 가족들을 피신시키는 것은 백성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후방을 교란시키는 중죄"라면서 가차없이 비판을 가하고, 이어 그를 말리며 유진을 변호하는 채충순과 최항에게도 "그 분 공이 있는 것 아니까 폐하 앞에서는 말 안 했다. 그리고 당신들도 가족들을 피신시킨 것을 알고 있다"라며 날을 세운다. 이에 강감찬을 조정으로 불러 들여온 최항마저도 "공은 참 가까이 하기 힘든 사람"이라고 한숨을 쉬며 자리를 뜬다.[16]

그 장면 이후 바로 집에서 아니나 다를까 "왜 당신 출사 시켜준 정당문학에게까지 날을 세우냐?"며 아내에게 구박을 받는데, 아내는 마냥 강감찬을 구박만 하는 게 아니라 "마음 속에 뭔가 답답한 게 있어서 이러는 것 아니냐?"며 털어놓으라고 호소하지만 강감찬은 대답하지 않고 그냥 자리를 뜬다.[17]


2.8. 8회[편집]


통주 전투의 패전 이후 패전의 원인을 두고 유진과 설전을 벌이다가, 지나간 일 말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논하자며 현종이 논쟁을 매듭짓고 대책을 요구하자, 아직 거란이 성을 하나도 함락시키지 못했으니 할 만하다는 취지로 현종에게 고한다.

이후 현종과의 독대에서 승전보를 알릴 때와 마찬가지로 패전보도 자신이 백성들에게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는 현종에게 백성들에게 전투 결과를 함구할 것을 권한다. 백성과의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는 현종에게 강감찬은 황제가 베푸는 최고의 선정은 승전을 통해 백성들의 터전을 지키는 것이며,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신의를 잃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패전의 고통이라며 현종을 설득하려 하고, 이러다보니 "폐하가 전쟁에 대해 잘 모르셔서 그런 것이다"[18]라며 언성을 높이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날 밤, 잠 자면서 한숨을 푹푹 쉬는 것에 무슨 일 있었는지 알아챈 아내에게 "이번엔 누구에게 싸움닭 기질로 밉보였냐"는 물음에 처음엔 시치미를 떼다가 성상 폐하라고 털어놓고, 이에 충격 받은 아내는 냉수를 뜨러 문을 열고 나가다가 "삼족 멸할 일 있냐? 죽으려면 혼자 죽어라"라며 극대노한다.[19]

곽주와 영주의 함락 이후 최항이 궐로 가던 그를 붙잡고 친조와 항복을 청할 것을 논하자 격하게 반발하다가 "항복(협상)은 싸울 힘이 있을 때 하는 거다. 싸울 힘이 없을 때 항복을 청하면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에 결국 수긍하여 조정 회의에서 현종에게 자신이 표문을 쓰겠다며 거란 황제를 친조할 것을 청한다.

이후 현종과의 독대에서 "다시 말하시오"라고 분노에 찬 추궁을 받는 와중에도 똑같이 친조를 청하라고 했지만, 현종이 용상에서 내려와 자신의 앞까지 다가왔을 때, 똑같이 친조를 청하라고 하면서도 "그래야만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사옵니다"라고 덧붙인다. 그 후 '친조가 곧 항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진짜 목적을 이야기하며,[20] 친조를 표하여 거란의 진군을 멈춘 다음, 시간을 벌어 동북면의 군사를 끌고 와서 서경에서 반격하자는 전략을 제시하며 현종을 설득한다.[21] 다른 대신들은 반대할 게 뻔하니 조정회의에서는 다른 대신들은 물론, 현종까지도 속인 것이었다. 이후 친히 표문을 들고 사신이 되어 거란 진영으로 향하는데, 이 모습을 지켜보는 현종의 내레이션이 인상적.[22]


2.9. 9회[편집]


집에 가서 부인에게 다녀오겠다는 말을 전하고[23] , 거란 진영으로 간다. 가는 중간에 숙주성이 함락되고 포로로 잡히는 고려 백성들을 보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나, 참아내고 거란 황제에게 가다가 죽은 강조의 목이 효수돼 있는 모습을 보고 경악한다.

거란 황제 앞에서 고려 황제가 친조를 청했다고 전했고[24], 거란 황제는 친조에 응하겠다면서 진격을 멈춘다. 아울러 고려 백성들에 대한 약탈도 멈춰달라고 청하고, 거란 황제는 이 또한 받아들여 타초곡을 금지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친조 제의를 믿지 못한 소배압은 강감찬을 며칠 동안 거란 진영에 머무르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황제가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 이에 따라 강감찬 본인은 발이 묶이고, 같이 온 전령들만 개경으로 돌아가 거란 황제가 친조를 받아들이겠다고 한 소식을 조정에 전한다.

거란 진영에 억류된 사이에, 포로로 잡혀온 고려 아이가 와서 날이 춥다며 화로를 전해주고, 고려가 거란한테 항복한 게 사실이냐고 묻는다. 이에 아이에게 사실이라고 답하고,[25] 아이가 나간 뒤에 울분을 토한다.

그리고 소배압으로부터 서경으로 가서 내일까지 항복을 받아오라는 지시를 받는다. 이에 따라 한기를 비롯한 거란 사신 일행과 함께 서경으로 갔는데, 서경부유수 원종석이 고려 조정의 거짓 항복 사실을 폭로하는 바람에 분노하면서 항의한다. 그리고 원종석에 의해 감옥에 억류되고, 이후 밧줄에 묶인 채로 거란의 사신들에게 끌려간다.

포승에 묶여 끌려가던 중, 현종의 명으로 동북면에서 서경 구원을 위해 달려온 지채문과 그의 군사들이 우연히 거란 사신 일행을 발견, 그들을 화살로 쏴 죽여 구출된다. 이에 지채문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고, 서경으로 달려가 성을 지키라고 권유한다. 그리고 본인은 거란 진영으로 가서, 소배압에게 서경이 항복했으니 진격할 필요가 없다고 설득한다.[26]


2.10. 10회[편집]


단신으로 돌아와 원종석이 쓴 항복문을 들고 여유롭게 "다녀왔습니다. 서경성이 항복했으니 진격할 필요 없습니다"라고 능글맞게 소배압에게 말한다. 왜 혼자 돌아왔냐는 소배압의 물음에 "거란 사신들은 서경에서 황제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고, 이제 고려는 거란 황제의 신하가 되었으니 무엇이 불안하겠냐?"면서 다른 사신 일행도 호위 병력도 없는 이유를 그럴듯하게 받아친다. 이후 직접 야율융서에게 항복문을 올리고, 다시 그를 속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후 거란 진영 내 막사에서 살아 돌아오라는 현종의 당부를 되새기며 전전긍긍하다가, 다음 날 아침 동북면의 고려군이 서경성으로 진격하면서 거란군이 속았음을 알고 소배압이 즉시 그를 잡으려 막사에 들어갔지만 막사 안은 텅 비었다. 이미 강감찬은 이미 도주 준비를 마치고, 경비병에게 "거란 황제의 명으로 개경으로 간다."고 둘러댔으나 이후 추격대가 자신을 잡으러 쫓아오자 즉시 말을 움직여 거란 군영의 쪽문을 뛰어넘고 도주했다. 그리고 한참 거란 병사들의 추격을 받다가 장연우와 황보유의가 이끄는 군사들에 의해 구조되었다.

이후 서경성이 항전 분위기로 정리된 것에 안도하며, 장연우에게 개경으로 복귀하라고 권한 뒤 먼저 개경으로 향하여 현종에게 무사귀환과 함께 서경의 항전 분위기를 전하며 현종에게는 기쁨을, 다른 재상들에게는 당혹감과 배신감을 안겨준다. 최항과 채충순이 강감찬과 현종의 은밀한 작전을 두고 강감찬에게 강력히 항의하며 "우리도 국익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항복을 주장한 건데, 공이 이렇게 일 저질러놓고 패전하면 후손들이 누굴 원망할지 모르겠다"며 질타하고, 이에 강감찬은 "그렇기에 승리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말로 팽팽하게 대립한다.[27]

이후 집에 들어와 아내에게 밥 달라고 하고 열심히 먹방을 찍다가 아내에게 "내가 소를 키웠다"는 핀잔을 듣고 나서 이후 현종과 다른 중신들과 함께 궁궐에서 서경에서의 낭보를 접하면서 웃다가 드라마 최후반 탁사정이 도망치고, 지채문이 패하여 도망치고 대도수가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현종과 함께 놀란다.


2.11. 11회[편집]


서경이 위기에 처하자 조정 대신들은 항복을 권하지만, 강감찬은 항복은 불가하며, 거란이 거점도 부족한 상태로 계속 남하하고 있으니 결국 시간을 벌면 유리한 건 고려라는 주장과 함께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서 항전하여 승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방법으로 '몽진'을 제안한다. 그러나 개경 백성들에게 '함께 남아 있어 달라, 함께 싸우겠다.'며 시도 떄도 없이 이야기했던 현종은 몽진을 받아들을 수 없었고[28], 강감찬은 조정 대신들이 면전에서 반박하는 것에도 괘념치 않고 계속해서 항전을 주장하며 결국 현종에게는 "미쳤다"라는 말을, 최항에게는 "후손들에게 비난받지 않으려고 당대의 백성을 저버리는 공(강감찬)이야 말로 역적이고 간신이다. 공을 출사시킨 것이 후회된다"라는 거의 인신공격 수준의 맹비난을 받는다.[29]

이후 현종의 명에 따라 항전 의지를 선포하는 조서를 작성하였고, 자신은 절령으로 가서 서경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와 개경의 마지막 방어선를 맡은 지채문을 만나 솔직하게 전황을 말해달라고 요구하여, 시간을 한나절 밖에 벌 수 없다는 말을 듣는다. 이에 강감찬은 지채문에게 "반드시 살아남아라. 자네는 할 일이 더 있다"라고 말하는데[30], 이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장연우가 "아니 뭐 그럼 난 죽으란 얘긴가?"라면서 툴툴댄다. 개경으로 돌아가 지채문의 보고를 전하며 몽진을 할 것을 다시 한 번 주청하는데, 이때 현종이 아직 도성에 있으니 백성들이 떠나지 못한다고 말한다.[31]

이후 거란군이 서경성 공략을 포기한 채 바로 개경으로 진격하고, 마지막 방어선인 절령마저 무너지자, 대신들이 일제히 몽진을 주청하지만 현종은 남아 있겠다고 버티는데, 이후 피난 준비를 하던 중 다급히 황제를 모셔오라는 원정황후의 말에 전황을 전했던 황보유의와 함께 정전으로 뛰어가는데, 내관 양협으로부터 현종이 단도를 들고 정전 문을 잠궜다는 말에 경악하며 정전의 문을 두드리며 읍소한다. 결국 황보유의가 문을 부수고 강감찬이 들어가니 다행히 현종은 자결하지 않았고, 심적으로 무너져 우는 현종을 안아주면서 "폐하는 잘해왔사옵니다, 저는 폐하가 늘 자랑스러웠사옵니다."라고 고백과 격려로 현종을 다시 일으켜 준다. 그 면전에서 폐하는 소신의 마지막 섬길 군주[32]라면서 충심을 고백한다.

이후 몽진길에 나선 현종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강감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놀라는데, 신하들 중에서 혼자 떠나지 않고 정전에 남아 거란군의 함성을 듣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회차가 종료되었다.


2.12. 12회[편집]


이미 황제가 몽진을 떠난 개경에 홀로 버텨 정전에 있다가[33] 거란군을 이끌고 온 소배압이 궁궐에 도착할 즈음 황제의 옷을 갈아입고 동쪽으로 도주하다가 발각되었으나 결국 개경 시가 밖으로 끌어낸 뒤 몸을 피하여 따돌리는 데 성공한다. 이후 개경이 함락되어 불타버린 모습에 망연자실한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하는데 아내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아내에게 별다른 연락을 취하지 않는 모양이다.[34] 강감찬은 가족을 먼저 보낸 신하를 비판했기에 이런 행동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만, 한편으로 숭고한 일이 마냥 멋지지도 좋지도 않음을 보여준다.

다행히 목숨은 건져 어디론가 가던 중,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오던 하공진을 만났다. 처음에는 거란군일까 생각해서 고개를 돌리고, 고려인인 걸 본 후에도 하공진을 몰라서 주저하지만, 하공진이 강감찬을 알아 보았기 때문에 서로 대화하였다. 이후 개경이 함락되었는지라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하공진과 동행하면서 개경 인근에서 거란군의 동태를 파악하던 중 그와 함께 서경으로 가던 거란의 사신을 발견하고 뒤쫓아 가서, 마침 "고려의 황제가 승하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려 양규를 포함한 서북면 고려군을 와해시키려던 거란의 계획이 성공을 거둘 찰나에 현종의 생존과 몽진 사실을 서경의 백성들과 장수들에게 알렸다.[35]

이후 양규와 독대하며 곽주성을 탈환한 것을 치하하고, 거란 사신에게 양규가 날렸던 "'거란군은 단 한 명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란 일갈이 진심이냐?"고 묻고, "그렇다."라는 양규의 답을 듣는다.[36]


2.13. 13회[편집]


서경에서 양규 및 무장들과의 작전 회의를 하면서, 거란의 철군을 예상하고 철군하는 거란군을 귀주로 몰아 섬멸시킨다는 양규의 계책을 두고, 먼저는 거란의 철군을 유도하는 게 먼저라면서, 거란주가 친정을 한 전쟁이니 성과 없이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만약 남쪽으로 진격을 강행한다면 남쪽의 국토도 참화를 입을 것이라면서 이 쪽에서도 철군을 유도하기 위한 계책이 필요함을 강변한다.

이후 양규와의 독대에서 거란의 도통(소배압)과 접선을 하여 철군의 명분을 거란에게 쥐어주겠다고 제안하지만 양규는 적진 한 가운데에 있는 수장을 만날 길이 없다며 위험한 작전이라며 쉽게 허락하지 않다가, 통주성에서 포로로 잡아두었던 거란 사신과 노전을 풀어주어 강감찬과 소배압이 접선하게 해주어 절령에서 소배압과 만난다.

강감찬은 소배압에게 거란의 철군을 도와주겠다고 제안하며 필요한 명분이 뭐냐고 묻는다. 소배압이 "굳이 그걸 고려가 걱정해주는 이유가 뭐냐? 우릴 철군시킨 뒤 뭘 꾸밀 작정이냐"라고 묻자 강감찬은 대놓고 돌아가는 거란군을 섬멸하겠다고 밝히면서, 어차피 가만히 있으면 자멸할 것이고 남쪽으로 가면 더 대책이 없으니 거란의 입장에선 철군이 가장 나은 선택지고, 우리 고려도 그걸 바라니 철군에 필요한 명분을 한 번 제안해보라고 한다.

소배압이 거란의 철군 명분으로 "항복"을 내세우자 강감찬은 코웃음을 치며 돌아가겠다고 한다, 이에 소배압은 "거란땅에 와서 친조"를 요구한다. 이에 강감찬은 그것은 항복보다 더 한 굴욕이라며 반발하지만, 소배압은 "말만 그렇게 전하고 실행은 나중에 생각하면 되는 거 아니냐"며 친조의 표문을 다시 올리라고 요구한다.[37] 이에 강감찬은 수긍하며 돌아가는데, 하필 강민첨과 하공진을 먼저 보낸 사이 야율분노의 추격을 받아 등에 화살을 맞고 붙들려[38] 개경으로 끌려온다. 야율융서의 앞에 끌려간 강감찬은 분노 어린 일갈[39]을 듣고 도끼에 자칫하면 죽을 뻔 했지만, 아직 정보를 캐내야 한다며 데려간 야율분노에 의해 이후 채찍질에 피가 철철 흘릴 때까지 쇄골에 갈고리를 박는 모진 고문을 받으며 회차가 종료되었다.[40]


2.14. 14회[편집]


이 회차 초반은 지난 회의 후반부 장면으로 이뤄졌고, 이미 고문의 심한 후유증으로 인해[41] 초죽음이 된 상태라서 작중 최초로 대사 하나 없는 낮은 비중을 기록했다. 아무튼 그렇게 초주검 상태에서 먼저 포로로 잡힌 아내가 자청해서 나서 치료를 하긴 했지만, 신음 소리가 난 상태에서 마침 그 곳에 들른 소배압이 그의 부인을 만나면서 강감찬은 옥에서 나오게 된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야율분노에게 그의 부관이 언급한 바에 따르면, 소배압이 군사들을 데려와서 자신들이 손을 쓸 수 없었던 듯하다.


2.15. 15회[편집]


소배압이 강감찬과 그의 처를 빼돌린 곳은 그냥 궁궐 인근의 창고였고, 거란군이 개경을 불태우고 철군하는 것을 본 아내가 필사적으로 그를 다시 집으로 끌고 데려오며 간병을 한다. 이후 서경에서 텅 빈 개경으로 내려온 강민첨과 조자기 덕분에 어떻게든 치료를 받아 깨어날 수 있었다.

깨어난 직후 부인을 부르면서 "여기가 어디냐?"고 묻자, 부인은 "나와 함께 있으니 어디겠냐? 지옥이지."라고 바로 바가지 모드로 들어서고, "거란군이 어디로 철군했냐?"고 물으니, 아내는 "깨어나자마자 나랏일부터 묻는다."면서 핀잔을 주고 강민첨과 조자기를 부르러 나갔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거란군이 귀주 방면으로 철군하고 있으며, 도순검사 양규가 지속적으로 승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강민첨에게 폐하께 이를 알리고 개경으로 환궁하시게 하라고 지시한다.


2.16. 16회[편집]


개경의 집에서 여전히 누워있지만 피투성이였던 이전 회차보다 그나마 회복되었다 조자기에게서 현종이 환궁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몸을 일으키고, 부인에게 관복을 달라고 하다가 한소리 들었다. 이후 불타버린 개경 황궁을 보면서 오열하는 현종 옆에 성치않는 몸에 더딘 발걸음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같이 오열한다.[42]

전쟁 이후 논공행상을 통해서 벼슬이 '예부시랑'에서 '한림학사 승지'가 되었지만[43], 이전에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아직 몸이 불편해 조정에 나서지 못하고, 예부낭중이 된 강민첨에게서 관용을 베푼다는 현종의 발언[44]을 듣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고심하고, 강민첨으로부터 몸이 나았으면 조속히 복귀해서 폐하를 설득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2.17. 17회[편집]


등청하던 중 현종을 호위해야 할 친종장군 지채문이 우간의대부 탁사정을 베려고 하던 것을 말렸고, 이후 전후 처리 문제와 호족들의 척결 문제로 인해 작중에서 처음으로 현종과 반대 입장이 된 상황이다. 따라서 처음 현종이 그에게 과거를 주관하는 지공거가 되어달라는 부탁에도 거절하면서 반대해 이후 우습유로 임명된 최충이 예부와 같이 과거를 주관하게 되었고, 자신은 서고에서 어지러진 채 방치된 책들을 정리하다가 마침 들른 예부낭중 강민첨과 이런저런 대화하다가 예부로 하여금 거란으로 파견할 사신단을 구성해달라고 부탁하는 등 다시금 재침을 준비하는 거란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후 현종과 신임 형부시랑인 김은부와 대화하면서 자신도 이 개혁에는 공감하지만,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다면서 지금은 호족들을 척결하는 식의 지방제도 개혁이 아니라 거란의 재침공 대비에 힘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에 반대한다면서 이후에 순차적으로 일을 해결해도 최소 7~8년은 걸린다고 주장[45]했지만, 김은부로부터 "자신의 반대로 인해 폐하(현종)이 큰 고통을 겪고 있으니 폐하의 뜻에 따르지 않을 것이라면 사직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이지 않느냐?"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이후 급진적으로 진행하던 현종의 지방 개혁에 반발해 예부를 비롯해 병부, 호부를 비롯한 모든 부서의 관리들이 대거 사직하는 일이 발생해 거란에 대비하는 일들이 차질을 빚자[46] 다시금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현종의 부탁에 다시금 입장을 고수하며 거절한다.[47] 결국 현종에게서 당신도 똑같은 금주의 대호족이라는 말[48]을 들었고, 결국 지금 있던 한림학사 승지에서 파직당하자 눈을 감은 채[49] 회차를 마무리했다.


2.17.1. 해당 회차 분석[편집]


이번 회차에서 나름 분석할 것이 있는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작중 강감찬은 청백리로 일반 관리만도 못한 삶을 살고 있었기에 매우 억울할만한 상황이었음에도 현종의 심적 고통을 이해해서인지 이를 직접 반박하지 않았고, 다음날 조정에서 파직의 명을 받게 되었다.

이는 비록 대부분 창작이긴 했지만, 제2차 여요전쟁 당시 그의 활약을 다룬 부분들을 재해석해서 그가 왜 현종이 추진하고자 했던 급진적인 호족 개혁에 부정적인 것으로 묘사되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는데, 13회 후반에 절령에서 그와 소배압 사이의 대화에서 나왔던 '친조'를 철군의 명분으로 거란의 손에 이미 쥐어줬던 상황이었고, 실제 역사에서 현종이 거란에 친조를 하지 않은 것을 계기로 거란이 재침한 점을 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회차에서 강감찬과 강민첨이 대화에서 거란에 사신단을 꾸려 거란의 동태를 살피려고 했던 점이나 중간에 등장한 야율융서와 소배압의 대화에서 다시 10만 군대로 고려를 침공하려는 것과 고려 국경을 정찰했던 거란 척후병, 그리고 그 소식을 병부상서 유방을 통해 들은 현종이 잠시 좌절한 장면 등이 대표적이다.[50]

아무튼 그렇게 거란의 재침이 예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급진적인 호족 개혁을 추진하다가 자칫 타이밍을 잘못 맞출 경우, 고려는 정면에서는 거란의 대군을, 후면에서는 이를 갈고 있을 호족들의 반란을 맞이하게 되는 상황에서 고려 중앙군은 제2차 여요전쟁의 상처를 완전히 회복하지도 못한 상황이 되므로 이번에는 정말로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그리고, 실제로 이 와중에 현종은 안 그래도 거란이 지속적으로 영토를 침범하여 도발하는 전시상황에서 무신들을 차별하는 정책으로 인하여 문신들의 부패를 방치해버렸고 결국 일부 무신들이 집단으로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키면서 대략 150년 먼저 무신정권이 들어설 뻔하게 만든 최악의 실책을 저지르게 된다.

실제로 고려와 비슷하게 지방세력이 강했던 백제는 무리하게 호족 개혁을 추진하다가 문제가 생겼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백제의 직접적인 멸망원인은 18만이나 되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이지만 그에 대응하는 백제군의 수가 너무 적게 묘사되기 때문이다. 신라의 5만 대군을 5천으로 막으려고 한 것은 주력군이 당을 상대하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구당서, 삼국사기 등의 기록을 보면 1만~1만 5천 정도의 병력이 당군에 의해 사망하는 것으로 당군을 향한 저항도 끝난다. 물론 당군쪽은 전멸을 암시하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수만은 동원했던 것으로 보이나 백제 멸망 이후 부흥운동의 규모를 보면 백제는 나당연합군을 상대로 군사를 더 모을 여력이 있었으며, 그것을 시행하지 못했던 이유가 호족과의 분쟁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2.18. 18회[편집]


파직당한 상태로 집에 돌아와 관복을 함에 넣었는데, 이를 보고 파직된 것이 맞냐면서 이제 자식들 보러 가자는 부인의 말에도 그저 답답한 채 나라의 장래에 대해 걱정하였다. 그러던 중 사직했던 중·하급 관리들이 강감찬을 찾아가 현종의 뜻을 꺾어달라고 청했지만 이를 거절했다.[51]

그러다가 과거 죄를 지었던 관리들이 불러간 것을 보고 그대로 형부시랑 김은부와 만나서 대치했고, 이후 서경 판관이 되어 잠시 개경에 온 조원과 노전으로부터 상황을 전해듣고 다시 예부낭중 강민첨이 찾아와 김은부가 과거 공주 절도사 시절 호장들의 자식들을 빼낸 일을 알고 김은부와 현종을 찾아가 따졌지만, 오히려 현종에게서 물러가라는 말을 듣고 고뇌에 빠졌다.

한편, 김은부와 그의 큰딸과 관련한 행동을 의심한 원정황후가 내사시랑 평장사 유진에게 김은부를 제압하기 위해 강감찬을 이용해 상소를 올리기로 했는데, 강감찬이 올린 상소문과 김은부의 비리에 관련된 증거들을 들은 현종이 끝내 강감찬의 집에 달려가 개경을 떠나라고 압박했다.[52]


2.19. 19회[편집]


부인과 함께 낙향하러고 하던 중 강민첨에게 현종이 낙마한 소식을 듣고 급히 궁으로 가려고 했으나 출입이 통제되었고, 뒤이어 "공 때문에 그러지 않소. 낙향하라는 명이 폐하의 마지막 명이시다."라는 형부시랑 김은부의 비난을 듣고 결국 고향인 금주로 내려가[53] 종가에서 여러 어른들[54]의 눈치를 부부가 보았다.

이후 부인과 과거 어머니가 남긴 말에 대해 얘기하다가[55] 자신으로 인해 황제가 죽게 되었다면서 자책했고, 부인의 위로에도 슬피 운다.

다음 날 어머니의 묘소에서 슬퍼하다가 부인이 다가와 정당문학 최항이 집에 찾아왔다고 하자 그를 만나 정국 상황에 대해 들으면서 최항에게서 "공(강감찬)이 그렇게 만들었으니 공이 돌려놓으라."고 말한 걸 듣고 밤새 고민하다가 예부낭중 강민첨을 통해 현종에게 형부시랑을 살릴 방법이 들어있는 서한을 보냈고, 이에 현종이 김은부의 큰 딸을 아내로 맞이하게 한다.


2.20. 20회[편집]


본인이 쓴 서한[56]으로 위기를 넘긴 김은부가 이 일을 강민첨[57]과 현종에게서 듣고 알게 되면서 금주 인근 사찰[58]에서 만나 지방 개혁에 대해 의논했다. 이때 강감찬은 아직 때가 아니기 때문에 호족들의 군정권과 조세권을 당장 뺴앗는 대신 안무사를 파견해 그들을 감독하게 하는 선에서 타협하자고 제안하고, 돌아온 김은부는 현종의 의지에 따라 이를 받아들인다.

다만 이 일로 인해 "물러난 사람이 조정 일에 끼어드는 거냐?"면서 부인에게서 다시 한 번 바가지를 긁던 중 문중 큰 어른[59]한테서 "폐하의 의지를 꺾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이에 의심을 가졌고, 회차 후반 안무사를 쫓아낸 지방의 호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안무사의 목을 베면서 우리의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태조 대왕이 고려를 일으킨 게 누구 덕분이냐?"는 어느 호족 대표 부인의 말에 반발[60]하면서 거란의 2차 침공 때 거란군이 창화현까지 남하했던 사실을 거론하면서 "그들이 조금만 더 내려왔다면 이 자리의 그 누구도 없었다. 국가가 있어야 가문도 있다, 도적은 가문의 힘으로 막을 수 있지만, 외적은 온 나라의 힘으로 막아야 하니 반역을 그만두라."고 성토한다.

이에 분노한 문중 어른에게 끌려가, "넌 폐하의 신하가 아니라 강씨 가문의 일원이다. 방금 발언을 사죄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마지막 통첩을 받지만, "자신은 폐하의 신하이며, 반역을 획책하는 것이아말로 삼한벽상공신 가문을 모독하는 것이다."라고 일갈하며 의지를 꺾지 않아 목이 베일 위기에 처해졌다가[61] 친종장군 지채문과 함께 온 현종[62]을 보고 놀라면서 마무리되었다.

2.21. 21회[편집]


이전 회차에서 이어져 현종에 의해 목숨을 건지고 개경으로 돌아와 다시 '한림학사 승지'에 복귀하며 현종과 화해를 이뤘다. 이후 개경의 집에서 울분에 찬 듯 걸레질을 해대는 아내의 눈치를 보며 슬쩍 옆에서 같이 걸레질을 하려다가 아내의 방석빼기에 자빠지는 몸개그를 당하고는 "개경에서도 죽을 뻔하고, 금주에서도 죽을 뻔하는 꼴 보니 더이상 살떨려서 같이 못살겠다"며 이혼 요구까지 받는다. 하지만 혼자 살기 싫다며 거부하고, 아내가 든 걸레를 붙들고 "가까이 있으나 멀리 있으나 걱정하는 건 똑같다. 어차피 당신에겐 나밖에 없다."라는 말로 단호히 붙잡는 상남자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 형부시랑 김은부와 화기애애하게 서고를 정리하던 중 예부낭중 강민첨으로부터 거란의 사신이 왔다는 소식에 사신을 맞이하면서 막무가내로 현종의 친조를 요구하는 사신과 "지금은 인사를 나누는 자리이니 자세한 일은 관료들과 논의하라", "고려의 관료들은 간교하니 믿지 말며, 특히 황제를 기만한 그대와는 더더욱 상종하지 말라 하셨다"는 등 신경전을 벌인다.

사신을 숙소로 보낸 후, 긴급회의 자리에서 '저들은 애초에 우리가 친조할 의사가 없음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빌미삼아 재침할 명분을 확실하게 만들러 온 것'이라며 서두를 뗀다. 이어서 지난 침공 이후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번 침공군은 적겠으나 고려도 마찬가지이니 역시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이에 사신을 보내 친조 날짜를 잡든지, 병 핑계를 대든지해서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유진의 의견에 찬성하여 두 달 안에 친조를 이행하겠다는 표문을 전할 사신단 파견이 결정된다.

이후 계획대로 진행되어 고려에서는 계속해서 사신을 보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친조를 미뤘고, 돌아온 사신이 '거란은 이제 전쟁 준비에 돌입했고, 거란주도 더이상 사신을 보내지 말라 하였다'라는 보고를 하자 강감찬은 '실제로 친조 행렬을 갖추어 천천히 서경으로 향해 여진족 측에서 이것을 거란 측에 전하게 하자'고 제안한다. 최사위도 이에 '거란은 특성상 전쟁을 벌일 수 있는 시기가 한정된 국가이니 시간을 끌어 적기를 놓치게 하면 될 것'이라 찬성한다. 그러나 최항이 '만약 그러면 거란에 먼저 파견된 사신은 거의 확정적으로 죽게 될텐데 누가 가려하겠냐'며 반대하자 자신이 가겠다며 사실상 마지막이 될 거란으로 갈 사신을 자청하게 되지만, 현종은 "경은 국경을 넘는 순간 죽은 목숨이다."[63]라고 극구 반대하면서 표문을 쓰는 역할을 맡았다.

2.22. 22회[편집]


거란에서 사신이 와서 선전포고를 하더니, '친조' 대신 '강동 6주', 정확히는 '흥화진'을 내놓는 방법도 있다고 말을 바꾸자 회의에서 "전쟁을 할 거라면 하겠다고 선전포고하고 가면 될 것이지. 갑자기 왜 저들이 먼저 말을 바꿔 협상을 제안하는가?"라고 의문을 표하며 거란 내부에 이변이 발생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에 현종에게 청하여 우습유 최충을 시켜 국경을 정탐하는 등 거란의 동태를 파악한다. 한편, 사신에게 베푸는 주회에서 사신이 다시 한번 강동 6주의 할양을 요구하자 "그렇다면 지금 거란이 거느리는 영토도 연원을 모두 따져서 우리에게 내놓으라고 해도 되겠냐?"[64]고 일갈한다.

그 사이 압록강변 양국 국경에 도달한 최충이 거란의 선봉대로 추정되는 병사들[65]을 조우하였고, 거란의 3천 선봉대가 국경 근방에 주둔했다는 보고를 전달받고 고심한다. 현종과 재상단이 흥화진의 할양을 두고 논의하고 있을 때, 최사위와 함께 흥화진의 할양에 강력하게 반대했는데, 이 와중에 김훈과 최질이 박진의 충동질을 받고 회의장에 난입하자 "조정의 신하는 각자의 역할이 있는 것."이라고 꾸짖는다.

이후 현종에게 흥화진을 할양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반대 의사를 전했고, 마침내 현종이 대소신료가 모인 자리에서 흥화진의 할양을 요구하는 거란 사신에게 "흥화진을 가지고 싶으면 고려를 굴복시켜야 할 것"이라고 일갈하자 벅찬 듯이 미소를 짓는다.

2.23. 23회[편집]


단호한 입장을 내면서도 다소 불안한 현종을 위로하고 이후 조정 회의 도중 거란 사신이 돌려보내면서 미소를 짓는다.

이후 지난 전쟁을 복기하다가 잠시 들른 현종에게, 결국 거란과의 전쟁을 끝내려면 흥화진이나 귀주 벌판에서 대회전을 벌여야 한다면서 검차로 적의 정면을 막고, 후방을 기병으로 치자는 전술 구상을 밝힌다. 이렇게 현종과 대화를 나누던 와중, 전전승지 양협이 거란으로 사신으로 갔던 형부시랑 김은부가 탈출하다가 잡히기 직전 보낸 서찰[66]을 보고 거란 사신을 잡기 위해 자청해서 흥화진으로 떠났다. 말을 몇 번 갈아타면서 흥화진까지 도착했는데, 이미 눈치채고 압록강을 건너려던 거란 사신들은 서북면행영병마사 유방과 흥화진사 정성에 의해 붙잡힌 뒤였다.

이후 내원성에 머물던 난릉군왕 소배압과 두 차례 담판을 벌인다. 첫 담판에서 강감찬은 "거란 사신을 돌려받고 싶거든 고려의 사신 또한 돌려보내줘야 한다."고 요구하고, "거란이 내부 반란 때문에 전쟁을 할 수 없으니, 사신을 억류한 걸 넘어서 고려가 거란을 선제 공격하고 거기에 송까지 가세하면 3면 전쟁이 될 것이다."라며 큰 소리를 친다. 이를 옆에서 지켜본 유방은 "블러핑 할 거면 제대로 하자."면서 아예 부교까지 놓는 척하며 한 술 더 뜬다.

그 날 밤 흥화진에서 유방과 밤하늘을 보다가 서희에 대해 회상했고, 유방이 지난 전란 당시 강감찬의 공을 격려했지만, "협상만으론 전쟁을 끝낼 수 없다. 결국 전투에서 이겨야 전쟁을 끝낼 수 있다"면서 겸손함을 드러냈다. 그리고 거란의 전령이 오며 두 번째 담판이 벌어졌는데, 이번엔 강감찬이 거란 국경으로 건너가 소배압과 만났다. "거란 사신을 돌려준다면 고려 사신 또한 돌려보내겠다. 단, 내원성에 몇 달간 두었다가 그 후에나 보내줄 수 있다."라고 통첩을 날리자, 강감찬은 "내원성이 아니라 여진족들의 영역에 두어 고려가 직접 보살핀 후, 내원성을 통해 돌려받겠다."고 받아친다. 소배압은 "자신더러 또 폐하를 속이라고 하는 거냐?"면서 짜증을 내지만, 강감찬은 솔직히 인정하면서 "거란을 위해서 다시 한 번 적과 내통하라."고 능글맞게 받아친다.

이렇게 소배압과의 담판을 마무리 지은 이후, 개경으로 돌아와 현종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이를 들은 현종은 강감찬에게 군사 경험을 쌓고 여진족들의 영역으로 억류한 형부시랑 김은부를 살피라는 목적하에 동북면행영병마사로 임명되어 강민첨과 김종현을 부장으로 삼고 동북면으로 떠났다. 떠나기 전 "너무 잘 먹어서 '장군감이다.'라고 놀렸더니 진짜 장군이 되었다."는 부인과 작별하면서 그녀의 말("칼은 쓸 수 아시오? 활은 쏠 줄 아시오?")을 들었고, 평생 전쟁과 거리가 멀었던 그의 행영병마사 임명을 두고 김훈, 최질을 비롯한 개경에 있던 장수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67]


2.24. 24회[편집]


행군하면서 강민첨으로부터 자신에 대한 무장들의 반대가 심하다는 얘기를 들었고, 이후 화주의 동북면 군영에서 그 곳의 방어사인 이자림[68]과 여진군을 상대하던 중랑장 도용수 등 지역 내 무장들을 접견하지만, 도용수로부터 "붓이나 만지던 사람이 장군으로 왔다던데 공이시오?"라는 멸시와 텃세[69]를 받는다. 그리고 항복한 여진인을 길잡이로 하여 강민첨, 김종현과 함께 우여곡절 끝에 여진 부락으로 가 그 곳에 머물던 형부시랑 김은부와 해후한다.

이후 군영을 순찰하면서 열약한 상황[70]을 보고 전해 들으면서 이자림을 꾸짖다가 그와 함께 도용수를 찾아갔는데, 도용수는 강감찬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구의 병사와 대련을 붙여 일부러 모욕을 주려 했고, 신병에 의해 나가 떨어지는 굴욕을 당한 강감찬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도용수를 꾸짖으면서 도발했고 결국 그를 굴복시켰다.

정확히는 강감찬의 꾸짖음에 발끈한 도용수가 연습용 장대로 강감찬을 때리려다가 멈춘 채 강감찬의 패기에 주눅들었고, 강감찬은 도용수에게 "앞으로 군사일지를 꼬박고박 쓰고, 군사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방어사(이자림)에게 건의하게."라고 지시했다. 강감찬이 떠난 후 "문관이라고 나처럼 심약하지 않다."라고 이자림이 항변한다.
이후 여진의 한 부족이 급습해 약탈하고 백성들을 몰살한 다음 달아나자, 무장들을 불러모아 그들을 기습할 작전을 세우고 감행한다. 퇴로를 차단하면서 도용수, 강민첨, 김종현이 여진족 병사들과 싸우는 것을 이자림과 지켜보다가 뒤에서 기습을 받아 부족한 무력 탓에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이자림 덕분에 살아남고 전투도 승리로 끝난다.

이후 여진의 한 부족이 급습해 약탈하고 백성들을 몰살한 다음 달아나자, 무장들을 불러모아 그들을 기습할 작전을 세우고 감행한다. 퇴로를 차단하면서 도용수, 강민첨, 김종현이 여진족 병사들과 싸우는 것을 이자림과 지켜보다가 뒤에서 기습을 받아 부족한 무력 탓에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이자림 덕분에 살아남고 승전하며 끝난다.

그리고 여진 부락에 잠시 머물던 형부시랑 김은부가 돌아오자 강민첨, 김종현과 함께 개경에 돌아와 복구된 만월대 정전을 현종과 다른 신료들과 함께 걷는 장면이 나온다. 다만 이 때 어떤 관직에 올랐는지 밝혀지지 않았다.[71]

2.25. 25회[편집]


예고편에서 노전과 함께 어딘가로 이동하던 중 황궁으로 가는 반란군을 보고 경악한다.

2.26. 26회[편집]



2.27. 27회[편집]



2.28. 28회[편집]



2.29. 29회[편집]



2.30. 30회[편집]



2.31. 31회[편집]



2.32. 32회(최종회)[편집]


[1] 이를 보고 1회 방영 당시에는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려는 의도'치고는 너무 작게 말해서 위화감이 든다는 반응이 있었는데, 회차가 진행될 수록 강감찬이 '침략국을 상대로 승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미친 노신'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병사들을 다독이기 위해 외쳤다기 보다 오히려 자기 최면을 위한 암시였다는 식으로 납득이 된다는 의견도 있다.[2] 여담으로 눈물이 떨어지는 장면은 메이킹 필름에서 보면, 촬영진이 뒤에서 인공눈물을 떨어트리면서 찍었는데, 머리 위에선 너무 각도가 안 나오다보니 어깨 부분에서 떨어트렸다. 위치상 최수종의 등에 업히다시피 찍어야 해서 최수종이 기겁을 하기도 했다.#[3] 사실 '개국공신 가문'이란 이름값이 커서 그렇지만, 사실 5품에 해당되는 '충주 판관'이라면 실패한 공직 생활은 아니다. 사실 충주 지역은 고려 이전 통일신라 때 5소경 중 한 곳인 '중원경'이었고, 수로를 통한 물산 이동이 중요했던 조선시대 말까지는 한반도에서 제일 중요한 도시이자 한강 이남에서는 한양 다음 가는 오늘날의 부산광역시와 비슷한 위상의 大도시였다. 특히나 강감찬이 살았던 고려 초(10세기~11세기)에는 신명순성왕태후의 본향(충주 유씨)이며 성종 때 전국적으로 12목이 설치되었을 때 한 곳이었다.[4] 강감찬 처의 이 바가지는 사실 전작 <정도전>의 최씨 부인이 '부처님'이라 할 정도로 엄청나다. 『고려사』 기록을 보면, 강감찬은 매우 늦은 나이(36세)에 관직에 들어간데다 청렴하고 검약해서 가정 사정을 돌보지 않았고 옷도 더럽고 해졌다거나, 전쟁 후 이부상서가 된 뒤에 왕에게 아뢰어 개령에 있는 자신의 밭 12결을 군호에게 나눠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작중 설정으로 성공하기 전부터 백성에게 퍼주는 행보로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최수종 필모에 보기 드물게 바가지 긁히는 모습으로 특히 남녀관계는 사극 주역 이전 젊은 시절 멜로물 주인공을 도맡아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연기가 처음이다.[5] 이 소식을 충주에 있던 김종현이 듣고 강감찬의 부인에게 남편이 조정에 올라갔다는 소식을 전달하면서 개경으로 가는 게 어떤가 말했지만, 정작 그녀는 덤덤하게 "어차피 윗분들에게 미운털이 박혀서 다시 내려갈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김종현을 당황하게 했다.[6] 사실 현종은 앞서 보았듯이 이모 천추태후에 의해 사찰로 보내진데다가 늘 신변의 위협을 느껴 왔다. 3회에서 목종이 대량원군을 불러 태자로 삼게 한 것은 본격적으로 정치 수업을 받도록 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막상 정변이 터지고, 목종이 폐위된데다가 시해당해 현종은 조정이 어떻게 돌아가고, 관직과 조정 기구가 어떠한지 모르는 상태에서 덜컥 황제에 오른 것이다.[7] 이 때의 표문은 내용은 같지만 위에 강조와의 대화 이후 또다시 작성한 표문이다.[8] 사실 현종은 강조 암살 시도 전에 강감찬에게 입막음하면서 일에 휘말리지 말고 일찍 퇴궐하라고 말했다.[9] 4회에서 강조에게 신랄하게 밀어붙었던 모습이 무색하게 엄청나게 쩔쩔매는 모습이다.[10] 이 때 현종이 강감찬의 격려가 아버지 같다는 표현을 한다. 전쟁을 앞둔 진지한 상황이지만 현종이 왕건의 손자이고, 최수종 배우의 대표작을 생각하면 일종의 배우개그.[11] 최소한의 보급품만 가지고서 출정하고, 나머지 필요한 보급품은 전장에서 약탈로 확보하는 것.[12] 그 문답으로 당대 거란군의 상황이나 특성이 어떠한지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는다.[13] 성종 치세에 10만이 쳐들어왔을 때도 그 난리가 났는데 40만을 어떻게 이기냐고 말한다. 이에 강감찬이 고려군도 30만이라고 위로하니까 농사짓던 사람까지 박박 긁어모은 30만이 평생 전쟁하던 사람들로만 채워놓은 40만과 같냐고 반박한다. 전체적으로 양군 전력 차이에 대한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는 대화이다.[14] 민간인인 아내도 아는 사실을 강감찬이 모를 리가 없다. 앞서 현종에게는 결국 고려가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 장담하고 격려해 주었지만, 누구보다 고려군의 질적 열세를 잘 아는 입장에서 지난 전쟁을 통해 정반대의 상황을 예측하며 비관하고 있을 여느 백성들의 심정을 면전에서 들은 셈이니 많은 고민이 들었을 것이다.[15] 암만 들어도 후일 역사에 대한 복선이기 때문에 시청자들에게 소소한 웃음을 줬다.[16] 그래도 강감찬은 다 알고 있었지만 현종에게 보고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17] 이때 아내의 말을 통해 그동안 노비들도 다 쫓아내고 죽마고우들과도 의절해 사실상 사적인 인간관계는 아내밖에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공동체주의가 강했던 전근대 사회에 개국공신 집안 사람이 이 정도로 처참한 인간관계를 자랑한다는 점에서 강감찬이 얼마나 꽉 막힌 성격을 가졌는지를 보여준다.[18] 제1차 여요전쟁은 993년에 일어났났고, 992년에 태어난 이후 궁에 있다가 사수현(현재의 사천시)에 유배되었던 아버지에게 의탁했던 현종은 자라면서 당시를 살아간 사람들에게 전쟁이 있었단 이야기를 듣는 것 외엔 전쟁을 알 방도가 없었다.[19] 아내의 분노는 당연한데 30년 넘는 결혼 생활에서 명문가임에도 남편 성질머리 때문에 노비 하나 없는 아낙네 생활에 지방을 전전하는 처지다. 그럼에도 바가지 긁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냥 넘어갔지만 폐하에게 간언을 넘어 충고를 했으니 아내 입장에서는 화를 넘어 미칠 노릇이다.[20] 친조문에는 '직접 만나고 싶다'는 내용만 들어갈 것이며, '항복'이라는 말과 언제 만날지는 언급도 안 할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고려는 이후 여몽전쟁에서 여러 차례 이 방법을 활용하기도 했다. 이런 강감찬의 말에 현종은 적어도 외교엔 신의란게 있어야 하지 않냐고 말하지만, 먼저 신의를 저버린 것은 거란이기에, 고려 쪽에서도 구태여 신의를 지킬 필요가 없어 아무 부담 없이 저지를 수 있는 일임을 부각했다.[21] 참고로 원작 소설에서는 채충순이 명목상 항복을 요청하는 표문을 작성하여 거란군을 철군하게 만들자는 계책을 주장하였고, 유진을 포함한 다른 대신들도 이에 동의하였다.[22] "대체... 경은 어떤 사람이오? 처음에는 아버지처럼 자상한 늙은 신하였소... 그 다음에는, 바른 말하기 좋아하는 고집쟁이 신하였소. 한데, 이제 보니 승리에만 미쳐있는, 광인 같소..." 글로만 보면 강감찬을 비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강감찬의 기만작전에 감탄하는 것이다.[23] 이때 강감찬이 반쯤 주눅들어 다녀오겠다고 하는데 부인은 쳐다도 보지 않지만, 강감찬이 문 밖을 나서자 그의 뒷모습을 아련히 바라보는 츤데레적인 모습을 보이는 장면은 소소한 개그 포인트이다.[24] 이때 강조의 죽음마저도 기만책을 위해 서슴치 않고 이용한다. 상술한 효수된 모습을 보며 충격을 받고도 야율융서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강조를 역신으로 칭하는 모습이 냉혹해 보일 정도.[25] 시간을 벌기 위한 거짓 항복이라는 건 극비 사항이므로, 적 진영 한복판에서 이를 사실대로 말해줄 수 있을 리 없다.[26] 이때 강감찬이 쓰고 있는 관모는 한기가 쓰던 것이었다. 압송 도중 관모를 잃고 끌려간 지라 급히 대체한 걸로 보인다. 작중 고려와 거란의 관모는 형태에서 차이가 있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강감찬이 쓴 관모는 작중 거란의 관모와 일치한다. # 설명하자면, 고려의 관모는 사모뿔이 리본 모양으로 머리 뒤에 꽂히지만 거란의 관모의 사모뿔은 직사각형이다. 다만 고려와 거란 모두 행정적인 면에서 유교를 도입했고, 그에 맞춰 관복 양식 역시 유사해서인지 결국 이 부분을 들키진 않았다.[27] 양측 다 나름의 논거는 있다. 고려가 항복을 한다면 거란이 포로로 끌고 간 백성들의 삶은 장담할 수 없으며, 이 때의 항복을 빌미로 거란이 후대에 어떠한 요구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본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 이후 250여년이 지나 몽고와의 전쟁에서 화의를 청한 후의 고려와 600여년 뒤에 해당되는 병자호란 때 삼전도에서 항복한 이후 끌려간 백성들의 삶을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반대로 최항과 채충순은 아예 멸망하고만 발해의 예시를 들며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전쟁에 패해 나라가 완전히 멸망했을 때 백성들이 겪을 고통보다는 덜할 것이며, 항복의 조건과 거란의 요구 또한 협상에 나서 적절한 수준으로 타협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실제로 고려는 비록 30만 대군이 와해되기는 했지만 소배압 말대로 대부분은 성으로 도망치는데 성공해버렸기 때문에, 요나라가 고려를 상대로 강압적으로 구는건 한계가 있었다. 더군다나 병자호란 때는 왕이 사로잡혀 저항 자체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청나라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고려는 전쟁 역량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항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훨씬 나은 조건으로 협상할 여지가 있었다.[28] 원작과는 반대되는 행보인데, 원작에서 강감찬은 몽진을 주장하기는 했으나 결정은 성상께서 하셔야 한다고 말하고 현종은 강단 있게 몽진을 결심하며, 이에 조정 신료들이 너무 위험하다고 반대하지만 강감찬이 성상이 결정하셨으니 우리가 더 이상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고 하자 모두 수긍한다.[29] 강감찬의 전략은 결과를 아는 우리에게는 묘안으로 보이지만 소수의 병력과 하급 무관만 있는 서경이 버티는 일, 양규가 수성 측의 반도 안되는 병력으로 곽주성을 함락시킨 일, 돌풍이 불어 거란이 하루 정도 재정비 하는 일 모두 합리성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구체적인 대책은 없고 몽진을 떠나고 그로 인해 피해를 당할 백성들은 승리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으로 여기는 등 강감찬의 주장은 현종 말처럼 승리에 미친 것으로 보일 것이다. 다만 강감찬의 주장 역시도 일리가 있다. 대군을 이끌고온 거란 입장에서는 지구전은 약탈만으로 한계가 있는데, 아직 곳곳에 고려군의 병력이 건재하고 거란군의 보급 거점이라고는 곽주성 하나, 서경이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으니 몽진으로 시간을 벌어 거란을 지치게 하면 승산이 충분히 있다. 여담으로 이 장면은 강감찬이 '불세출의 명장'이 아니라 '승리에 미쳤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전쟁의 승리가 가져오는 백성의 평안의 역설인데, 승리를 위해 현재 백성의 희생이 불가피하고 그 희생에 자기자신과 가족까지 포함되어 있기에 정말로 승리에 미쳤다는 말밖에 안 나오는 모습이다.[30] 원작에서는 현종이 몽진 길에 오르는 것을 선택한 후 지채문이 충신이라는 것을 잘 안다면서 서경의 일은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이니 너무 근심하지 말라고 하며, 성상이 살아있어야 고려도 온전하니 꼭 그를 지켜달라고 당부한다.[31] 원작에서도 강감찬이 현종이 몽진을 갔을 때에도 아직 피난을 가지 않은 백성에게 왜 아직도 여기 있냐고 물으니 그 백성이 이렇게 답하는 장면이 있다.[32] 실제 역사에서도 강감찬은 고령의 나이에도 계속 일을 하다가 현종과 같은 해에 세상을 뜬다.[33] 나중에 현종과 다른 재상단들과의 대화에서 밝힌 바로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몽진을 계획할 때부터 미끼 역할을 자청한 것이다.[34] 사실 정전에서 자결하려던 현종을 빼내려다 시간이 지체되었고, 본인은 미끼 역할을 자처하던 급박한 상황이었다. 여담으로 이 장면은 전작인 <태조 왕건>에서 왕건공산 전투에서 위기에 빠지자 신숭겸이 왕건으로 위장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후백제군을 유인하는 것이 역사대로 나왔으니, '할아버지가 자기가 도망친 방법으로 손자를 구했다.'는 배우 개그도 성립힌다.[35] 참고로 원작에서는 양규가 이 사실을 자신이 구한 포로에게서 듣게 된다.[36] 해당 회차를 보면, 실제 기록이 없어서 일부러 설정한 극중 창작이라고는 하지만, 그야말로 '목숨을 건 이상한 짓'을 한 셈인데, 실제 생지옥으로 변한 개경을 보다가 거란군에게 잡힌 그의 부인이 이후 옆에 있던 아낙이 "남편이 안 알려주고 도망갔냐?"라고 묻자, "차라리 도망갔으면 다행이고 이상한 짓해서 죽지 않아야 한다."고 답답해 하던 모습이 나왔는데, 그 말 그대로였다. 남으로 몽진했지만 만삭의 황후를 동반한 현종은 분명 움직임이 느릴 것이고, 그에 따라 추격하는 거란군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불리해지는 형국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미 내려간 거란군은 하공진에게 맡기면서 현종을 추격하는 거란군의 수를 줄이려는 계책일 수 있다. 실제로 이후 하공진은 현종을 만난 후, 북상하여 거란 성종을 속이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37] 당장 고려는 거란의 철군 및 철군 동안 힘을 빼놓을 유격전을 노리고 있고, 거란 또한 본대가 장기간의 원정으로 와해될 분위기를 빠르게 수습하고 시기에 맞춰 철군함과 동시에 철군을 한 뒤에도 재침공 명분을 남겨놓는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협의가 성립한다.[38] 이 때 붙잡혀 끌려가는 모습을 절령에서는 강민첨이 보고 양규에게 알렸으며, 개경에서는 먼저 거란군의 포로가 된 그의 아내가 멀리서 보게 되었다.[39] "너 때문에 이 전쟁이 어그러졌다."라고 하는데, 강감찬이 기만술을 펼쳐 시간을 벌었고 이게 서경을 지키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그리고 마치 나비효과처럼 하나가 어긋나면서 거란의 침공은 고려의 수도까지 함락했음에도 승리하지 못하고 있었다.[40] 아무리 기록이 부족해서 상상에 의거하여 전개한 이야기라고 해도 상식적으로 이성계 같은 베테랑 백전노장도 아니고 환갑이 넘은 문관으로서 이 정도로 당했으면 강감찬은 그 자리에서 진작에 죽고도 남았다. 시청자들도 이 장면에만큼은 '불호'를 표하는 의견이 많다. 게다가 추격전 중에 등에 화살도 한 발 맞고 낙마까지 한 상황이다. 일반적으로 사극에서 군인들이 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칼 한 방, 화살 한 대에 죽는 걸 생각하면 내구력 밸런스를 잘못 잡은 케이스이다.[41] 생살을 도려내는 고문이 가해졌다고 나온다.[42] 참고로 최수종이 태조 왕건왕건 역을 맡았던 점을 생각하면 개그로는 볼 수 없는 씁쓸함을 보여주는데, 왕건이 고려를 세운 지 갓 100년이 되던 해에 자신의 손자이면서 후대 왕인 현종이 전란에 의해 개경이 불탄 것과 개경을 지키지 못하고, 도망친 자괴감에 절망하여 우는 것을 창업자인 자신이 그저 곁에서 지켜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참담함을 보여주는 듯한 연출로도 보여지는 만큼 해당 회차에서 '양규, 김숙흥이 전사한 장면'과 함께 보는 시청자들이 먹먹함을 느끼게 만들었다.[43] 이를 두고 전쟁 당시 강감찬의 부인과 함께 개경에서 잡혔던 아낙은 옆에서 "재상 될 날이 멀지 않았네요."라고 기뻐했지만, 정작 부인은 심드렁했다. 사실 '예부시랑'이나 '한림학사'나 같은 정4품으로 승차한 것은 아니다. 유진 역시 '상서좌복야'에서 '내사시랑평장사'가 되었지만 똑같은 정2품 품계이고, 이 때의 논공행상에서 드라마상 품계가 높아진 사람은 채충순과 최사위 둘 뿐이다. 다만 품계로 따지면 그게 그거지만, 예부시랑이 외교부 차관 정도라면 한림학사승지는 대통령 비서실의 수석비서관 정도에 해당해 훨씬 실세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극중대사대로 한림학사승지를 역임한 인물은 재상이 되는 수순을 밟았다.[44] 전란과 몽진 중에 서경을 버리고 도주한 탁사정, 영주를 버리고 도망친 박섬과 같은 자들을 (현종이) 처벌하지 않겠다라고 발언해 신료들과 장수들의 반발을 샀다.[45] 여담으로 제2차 여요전쟁 종료 시점인 1011년부터 제3차 여요전쟁이 발발한 1018년 사이의 간격이 최소 7년~8년에 해당되어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현종이 전국 각지에 지방관을 파견한 해가 딱 1018년이다.[46] 당시 밖으로 행차하던 현종에게는 우습유 최충이 아뢰었고, 강감찬에게는 예부낭중 강민첨이 직접 가서 상황을 설명했다.[47] 강감찬 또한 먼저 현종에게 '그만하시옵소서!' 라고 간청한다.[48] 이 발언은 현종이 김은부에게서 들은 말이다. 다만, 작중에서의 강감찬은 비록 집안이 고려를 세운 개국공신 가문이지만, 노비 한 명조차 없으며 일상적인 삶 자체가 일반적인 하급 관리만도 못하기 때문에 강감찬 입장에서는 억울한 소리라 할 수 있다. 실제 현종에게 이런 소리를 들을 때 말리려거나 반박하려는 듯 손을 뻗다가 내린 장면이 나왔다.[49] 파직하라는 명을 들을 때 주변에 있던 신하들 모두 당황하거나 눈을 감은 상태였다. 수상 격인 유진은 답답하다는듯 한숨까지 내쉬었다.[50] 본인 입으로 말했지만 작중에서 강감찬이 현종의 개혁을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다. 문제는 당장 거란이 쳐들어 올 것은 기정사실인데 16화부터 현종이 내린 결정은 단기적으로는 국가를 내분시키는 일들이 많은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51] 다시 한번 서술하지만 강감찬 또한 호족 개혁의 필요성에 동의하는 입장이다. 단지 거란이 언제 재침할 줄 모르기에(명분이 더군다나 2차때와는 달리 거란에게 있기 때문에 준비만 된다면 바로 내려올 수 있는 형국이다.) 지금은 안된다는 입장일 뿐이다. 이를 들은 관리들은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52] 현종도 얼마나 답답했는지 강감찬의 목을 조르려 했고, 이후 무리하게 말을 타고 개경 거리를 질주하다가 그만 물건들을 잔뜩 실은 달구지와 충돌하며 크게 넘어지며 피를 토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되었다.[53] 이때 부부의 행색은 하인도 없이 강감찬은 타고 다닌 말에 짐을 실었고, 부인은 등에 배낭을 메었다.[54] 특히 상단에 앉은 어른은 17회에 등장했던 호족이었다.[55] 이때 낙성대 설화가 재현되었는데 낙성대 설화 자체야 정사인 고려사에서도 언급되는 유명한 이야기지만 CG를 정말 많이 써야할 전쟁씬이 아니라 여기에 쓴 것에 대해 혹평이 많다.[56] 목소리로 언급한 바로는 『주례』와 『예기』를 거론하면서 김은부 일가를 위기에서 구하는 방법이 담겨 있다.[57] 강민첨에게 알리면서 '이 일을 아무에게 전하지 말고 함구하라.'고 했었다.[58] 김은부의 말로는 금주로 가면 나름 그 곳의 호족들에게서 눈치를 볼 것 같다고 언급했다.[59] 이전 17회에서 박진이 만났던 바로 그 어른이다.[60] 그 와중에 하필이면 카메라가 강감찬의 원샷을 잡아주는 바람에 시청자들이 모두 뿜었다는 반응이 많다. 대놓고 노렸다는 평가.[61] 연출력과 별개로 무리수가 많은 장면이다. 당시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이 당시 60세를 넘긴 강감찬은 가문의 최연장자일 가능성이 높고, 설령 나이가 더 많거나 항렬이 높은 친척이 있다고 해도 강감찬은 삼한벽상공신 강궁진의 아들인 만큼 발언권이 뒤질 리 없다. 차라리 강감찬이 가문의 수장이었으면 수장이었지. 최소한 문중의 큰어른 위치에 있을 강감찬을 무슨 새파란 애송이 대하듯 이놈저놈으로 지칭하며 하대하면서 사사로이 목을 베려 한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62] 김은부한테서 지방으로 파견한 안무사 중 절반이 지방의 호족들과 그들의 영향력에 있던 백성들의 저항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에 현종은 분노하면서 강감찬이 왜 돌아오지 않는지 물었고, 금주 인근 사찰에서 그를 만났던 김은부는 "아직 폐하를 볼 면목이 없는 것 같다."라고 답했다. 이에 강감찬을 직접 불러들이고자 직접 금주까지 내려갔다가 이 상황을 목격한 것으로 보인다.[63] 이미 그가 거란을 기만했던 점이 알려져 만약 강감찬이 사신으로 간다면, 100% 죽는 목숨이었다.[64] 1차 여요전쟁 당시 서희가 거란의 소손녕에게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선언하며 담판을 통해 과거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평안북도 서북 일대 강동 6주의 영유권을 얻어낸 일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질타기도 하다.[65] 소배압의 기만술로 이 시점에서 작중 거란의 본대는 요의 서북방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서북쪽 부족들이 결집해 반란을 일으키려한다는 서북로초토사의 보고가 들어왔기 때문. 강감찬이 제기했던 거란의 이변이 바로 이것이었다.[66] 거란 서북방의 반란으로 인해 본군이 그 쪽으로 갔다고 적혀있다. 김은부는 타국의 사신들과 하공진의 정보로 얻은 그 내용을 서찰에 적어 보내려다가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 거란군에 붙잡혔지만, 그 전에 화살로 해당 서신을 흥화진사 정성에게 전했다.[67] 이번 회차에서 드라마 후반부 하이라이트의 두 축인 '김훈·최질의 난'과 '귀주대첩'을 표현하기 위한 떡밥을 많이 뿌렸다는 반응이 많이 나왔다. 더불어 평생 문관으로 지낸 강감찬의 행영병마사 일을 돕기 위해 군사와 전쟁 경험이 있는 강민첨과 김종현을 부장으로 넣은 것으로 보인다.[68] 후에 김훈·최질의 난을 진압하고, 개경 외곽의 나성을 축조한 공으로 국성을 새로 받은 '왕가도'가 이 사람이다.[69] 다만 본작의 강감찬에게는 완전히 해당되지는 않는 것이, 2차 여요전쟁 당시 사실상 고려 저항군의 수장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문관과 무장의 역할을 동시에 했던 최사위와 문관 출신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의 사례도 있다. 최질이 '정치나 하던 문관들이 무신들의 주요 요직을 다 차지하고 있다'라며 큰 반감을 가졌던 것처럼, 문관에 대한 무장들의 반감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70] 좁은 군영 안에 군사 50명이 자는 것은 물론 덮는 이불이 오래되어 얇아질 정도이다. 게다가 전투일지도 온전하지 못할 정도.[71] 거란의 재침이 언급되는 모습을 고려할때 1014년 중추사로 임명된 이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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