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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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평장사
고려 현종, 덕종의 장인
왕가도
王可道

출생
연대 미상
사망
1034년 6월 13일[1]
(음력 5월 18일)
작위
개성현 개국백(開城縣開國伯)
시호
영숙(英肅)
본관
청주 이씨 (사성 개성 왕씨)
이름
이자림(李子琳) → 이가도(李可道)
→ 왕가도(王可道)
배우자
개성군부인(開城郡夫人) 김씨
자녀
1남(추정) 3녀
장녀 - 원질귀비[2]
차녀 - 경목현비[3]
삼녀 - 상당현군(上黨縣君)[4]
아들(추정) - 왕하[5]
1. 개요
2.1. 서경의 하급관리
4.1. 거란 침공 건의
5. 가족관계



1. 개요[편집]


고려 현종 대의 문신.

장녀 원질귀비는 현종의 후궁, 차녀 경목현비는 덕종의 제2비라 현종과 덕종의 장인이기도 하다.

초명은 이자림(李子琳), 나중 이름은 이가도(李可道)로 청주 이씨[6]지만, 개경나성#羅城 축조를 총괄하여 마무리한 공로로 사성정책에 따른 국성을 하사받아 왕가도(王可道)가 되었다. 성종, 목종, 현종, 덕종 4대 임금을 섬겼으며, 현종 대에 큰 활약을 하여 현종의 배향공신이 되었다.


2. 성종 ~ 목종[편집]


성종 시기 관직
직위
서경장서기(西京掌書記)
문서 관리를 담당한 하급 직위


2.1. 서경의 하급관리[편집]


청주 이씨호족 출신이다. 성종 대에 과거에 급제하며 조정에 입문했고, 서경(西京) 장서기(掌書記)가 되어 서경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즉 과거 제도로 들어온 신흥 문관 출신이었다.

장서기 동안의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이후 김훈·최질의 난에서의 모습을 보면 상당히 인망이 있고 어느정도 승진하여 중견급 관리가 되었을거란 추측이 가능하다.

강조의 정변이 터진 뒤에도 여전히 북방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별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3. 현종[편집]


현종 시기 관직
직위
화주 방어사(和州防禦使)
북방 방비 관직 중 하나
권서경유수판관(權西京留守判官)
서경 분사 조정의 최고위 직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事)
고려 양대 정부기관인 중추원의 차관
참지정사(叅知政事)
고려 양대 정부기관인 내사문하성의 서열 3위 직위


3.1. 김훈·최질의 난[편집]


제대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시기는 현종이 즉위하고 난 후였다. 무관 김훈과 최질이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현종에게서 권력을 탈취하였다. 이 때 이자림은 매우 분노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승진하여 화주[7] 방어사(防禦使)가 되었고, 화주에서 임기를 마친 뒤 개경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이자림은 현종에게 "한고제가 운몽에서 놀이한 고사[8]를 아십니까?" 하고 은근슬쩍 자신의 뜻을 전했는데, 장서기 시절 이자림이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현종은 이자림을 권서경유수판관(權西京留守判官) 직에 임명하고 그가 잘 알고 있는 서경으로 보낸다.

현종은 이자림의 배후에서 조용히 계획을 세웠고, 이자림은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현종은 김훈, 최질 등 당시 권신들을 데리고 서경의 장락궁으로 가 연회를 열었다. 이자림은 그들이 취하자 19명을 죽이고, 그들의 가족을 체포, 귀양보낸다. 이로 인해 이자림은 현종의 눈에 들었고, 고위직으로 승진하기 시작한다.


3.2. 현화사비[편집]


현종이 1021년 최사위에게 맡겨 세운 현화사비의 1022년 채충순이 쓴 뒷면에는 이가도(李可道)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고려사 1020년 기사부터 이 이름으로 나오므로 김훈·최질의 난이 끝난 1015년과 1020년 사이에 개명했음을 알 수 있다. 내사문하성과 더불어 가장 높은 정부기관인 중추원의 차관으로 등장하며 경상도 지방에 나타난 사리를 회수하러 다녀온다.


3.3. 개경 나성#羅城 건축[편집]


이후 이가도는 조정에서 상당한 발언력을 가지게 된다. 누차 승진하여 고려 최고 정부기관 내사문하성의 3인자급인 참지정사(叅知政事)에 임명된다. 참지정사가 된 이가도는 강감찬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던 개경 외성 건설의 책임자가 된다. 이가도는 서눌, 황보유의, 황주량 등 당대의 중신이 모두 참여한 거대 프로젝트로 21년에 걸쳐 진행되었던 23km의 나성 공사를 마무리 지었다.

이 공으로 공신호를 받고 개성현 개국백(開城縣開國伯)이 되었다. 부인 김씨 또한 개성현부인에 봉해졌다. 공식적으로 왕씨(王氏) 성을 받으니 그가 이가도가 아닌 왕가도로 유명해지는 계기가 된다.

장녀 원질귀비현종의 후궁이 되면서 왕가도는 당대의 중신이 된다.


4. 덕종[편집]


덕종 시기 관직
직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내사문하성의 2인자급 직위
태사(太師) 중서령(中書令)
사후 증직(贈職)

차녀 경목현비가 덕종과 결혼하면서 왕가도는 국왕의 장인이 된다. 이에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에 임명되니, 이 관직은 내사문하성의 2인자급 직위였다.[9]


4.1. 거란 침공 건의[편집]


덕종거란과의 관계에 있어 매우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는데 왕가도는 임금의 외교 방향에 동의했다. 거란이 고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사신 파견을 중지하고 연호 갱신을 거부하자고 주장하였다. 많은 대신들이 반대했으나 덕종은 이를 채택하여 고려와 거란 간의 외교는 단절된다.

덕종의 배향공신 유소의주 침공을 건의하자 왕가도는 적극 찬성했고, 덕종에게 출정을 강하게 요구했다. 하지만 또 다시 많은 중신들이 반대했고, 덕종은 이번만큼은 왕가도의 제안을 거부해 출정은 취소된다. 나이도 많아지고 자신의 레임덕이 시작됐다는 것을 느낀 왕가도는 결국 사퇴를 결심하고 청주로 돌아간다.

결국 1034년 5월 정축일에 사택에서 사망한다. 나라에서 장례식을 치러주었으며 명예직인 태사(太師)와 중서령(中書令)을 추증받았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가치를 알아준 현종의 묘정에 배향된다. 일개 서경 말단 관리에서 재상까지 올라간 걸출한 인물이었다.


5. 가족관계[편집]


딸로 원질귀비, 경목현비, 상당현군(上黨縣君)이 있다. 장녀 원질귀비는 현종의 후궁이고, 차녀 경목현비는 덕종의 제2비다. 3녀 상당현군은 이정의 아내로 고려 역사상 최고의 문벌귀족이었던 인주 이씨의 시조 이자연의 며느리다.

같은 사성 왕씨로 추정되는 왕하는 항렬상 그의 손자일 가능성이 있다. 고려에서는 보통 봉호에 출신 지역을 넣는데 왕하의 딸이 왕가도의 부인과 같은 개성군부인(開城郡夫人)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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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리우스력 6월 7일[2] 현종의 제8비 - 후궁[3] 덕종의 제2비[4] 이자연의 장남 이정의 부인[5] 왕하의 딸이 왕가도의 부인과 같은 개성군부인(開城郡夫人)이기 때문이다.[6]충청도 청주시[7]고구려의 박평군, 현 함경도 영흥군[8] 한고조 유방이 이성 제후왕들을 숙청할 때, 운몽에서의 연회를 이용하여 초왕 한신을 체포했을 때의 고사를 말한다.[9] 다만 1인자라고 할 문하시중은 공석일 경우가 자주 있었기 때문에 평장사직을 가진 다수의 사람들이 재상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원래 당나라 중기 이후 송나라 때까지의 정치체계가 이렇게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서 첫 번째에 위치하는 인물은 대체적으로 판이부사를 겸하였다.